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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문학이 머무는 풍경, 전주 시비(詩碑)기행
더밝은미소 추천 0 조회 49 14.10.06 07: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문학이 머무는 풍경, 전주 시비(詩碑)기행



문학의 향기는 늘 우리 곁에서 피어난다. 시비(詩碑)와 기념비, 문학관과 생가(生家), 문학이 머무는 풍경. 전주는 1969년 가람 이병기의 시비를 시작으로 신석정, 김해강, 이철균, 백양촌, 신동엽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극작가 박동화와 소설가 최명희의 흉상과 부조상은 각각 전주체련공원과 건지산 중턱 혼불문학공원에 있다. 예술인들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되짚어보고 그 정신과 맥을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의 일환이다.

우리가 시비나 기념비를 통해 시인과 작가들을 기리는 것은 그들이 우리 삶에 불어넣어 준 향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터 가까이에서 그 향기를 오래 같이 나누자는 뜻이다. 볕 좋은 어느 날, 시집 한 권 들고 흐드러질 꽃무리를 찾아 나서자. 작가의 열정과 혼을 느낄 수 있는 시비와 기념비를 찾는 것도 좋으리라.

장소

작가

구분 작품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신석정

시비 山山山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이병기 시비 난초

전주교육대학교

신동엽

시비 껍데기는 가라

전주덕진공원

이병기 시비 시름

전주덕진공원

백양촌 시비

전주덕진공원

신석정 시비 네 눈망울 속에는

전주덕진공원

김해강 시비 금강의 달

전주덕진공원

이철균 시비 한낮에
전주체련공원 박동화 시비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전주한옥마을

최명희 생가터, 최명희문학관  

혼불문학공원(건지산 중턱)

최명희 부조상, 표지석 『혼불』 등

휴비스 전주공장

서정주 헌(獻)시비 서정주 헌시비

*전주교육대학교 → 다가공원 →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 전주덕진공원 → 전주체련공원

*각 장소마다 이동시간을 써 넣는 일은 무척 곤혹스럽다. 사람마다 걸음걸음은 천지차이이며, 여기저기 눈길 가는 곳에 슬쩍 마음을 얹히다 보면 시간 추렴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축제가 많은 탓에 교통통제도 많고, 학생들 시험기간이라도 걸리면 낮에도 버스는 미어터진다. 신호등은 좀 많은가.

? 다가공원ㆍ전북대 삼성문화회관 : 이병기ㆍ신석정

선비로서, 시인으로서, 학자로서 고매한 삶을 살았던 가람 이병기(1891~1968). 다가공원 언덕에는 시조 문학과 국문학의 거목인 가람의 시비가 서 있다.

 

그대로 괴로운 숨지고 어이가랴하니 / 작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시름 / 회도는 실구리같이 감기기만하여라 / 차라리 슬프다는 말을마라 / 돌도 아니고 물도 아닌 몸이 /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씩 불어 온다 / 볕은 실낱만치도 아니 비쳐든다. / 한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여라. 

                                                                            가람 이병기의 시 「시름」 전문
 

 


가람 서거 1주기인 1969년 11월 30일 호국영령탑 마주한 곳에 세워진 이 시비에는 일제 암흑기에 쓰인 시조 「시름」을 서예가 강암 송성용의 글씨로 새겨 두었다. 전주의 대표 공원인 다가공원에 전주를 상징하는 인물의 시비를 세운 것이다.

“전주신사는 전주읍성의 서문 밖에 위치한 다가산(多佳山, 65m) 구릉의 정상에 세워져 전망이 탁월하였으며, 일본인 거류지를 비롯한 식민지 경관들과 인접하였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전주신사가 시민들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것은 훼손된 민족 정체성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한 시민들의 저항 담론의 결과였다. 그 장소에는 대신 충혼탑과 가람 시비가 세워짐으로써 다가산은 일제의 신사가 세워졌던 장소에서 국가 및 민족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탈바꿈하였다.”(최진성, <일제강점기 조선신사의 장소와 권력 : 전주신사(全州神社)를 사례로>,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2권 1호, 44-45쪽)

가람의 좌우명은 ‘후회하지 말고 실행하자.’였다. 50여 년 간 꾸준히 일기를 쓴 것도, 전 생애 언제나 떳떳하여 흠결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좌우명을 따랐기 때문이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는, 이른바 ‘창씨개명’에도 응하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에 쓴 시와 수필의 어느 한 편에서도 친일문장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얼굴’이라고 하였다.

가람의 시에는 자연 ― 특히 난초와 매화, 수선화, 함박꽃을 비롯하여 별, 구름, 낙엽, 볕, 새벽 등 정경에 대한 것들이 많다. 그 속에는 또한 인생의 기쁨이나 슬픔도 녹아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바로 나날의 삶에서 마음에 와 닿는 바를 꾸밈없이 나타내고자 하는 시정신과 삶의 뿌리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의 시 「난초」의 흔적은 그가 재직했던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앞 숲에 있다. 가람의 시비 맞은편에는 신석정 시인의 시「山山山」이 새겨진 시비가 있다.


? 전주덕진공원 : 신석정ㆍ김해강ㆍ이철균ㆍ백양촌

전주 덕진공원에는 김해강ㆍ신석정ㆍ이철균ㆍ백양촌(신근) 시인의 시비가 원형으로 둘러 서 있다. 지역 현대문학의 개척자이자 전북문학사를 빛냈던 문인들의 족적을 추모할 수 있는 ‘전주 문학의 성지’다. 가장 먼저 세워진 시비는 1976년 신석정 시비다. 「네 눈망울에서는」가 새겨진 이 시비는 석정의 고아함을 일러준다.


석정은 교과서를 통해 목가시인으로 알려지기 전에 항상 역사의 현장에 입회인이 되고자 했던 올곧은 선비였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혼란과 갈등,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어려운 세상을 살았지만,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은 그를 ‘속됨이 없는 난초와 같은 기품을 남기고 간 시인’으로 기억한다. 특히 “일제하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문(日文)으로 원고를 쓰지 않은 보기 드문 문인이었다.”는 군산대 허소라 명예교수의 연구는 시인이 지닌 시정신의 일면을 보여준다. 원로작가 홍석영씨는 “석정은 줄곧 시와 더불어 살았고 한시도 시에서 떠난 적이 없었던, 영원한 현역 시인”이라고 말한다. 유기수 시인은 시 ‘발음’을 거론하며, “평생 자연을 사랑한 목가시인이었고 일제의 저항시인이었던 석정은 끝내 자연을 관조하며 인간구원을 절규했던 시인이었다.”고 기억한다. 전주고등학교에 재직하던 1961년 5?16 직후,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 「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에 「춘궁은 다가오는데」를 발표하며 연행돼 취조를 받기도 했던 그를 어느 누가 목가시인이라고만 하겠는가. 『山의 序曲』 서문에 남긴 그의 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시와 더불어 이순이 넘었다. 그 동안 역사의 흙탕물 줄기가 무참하게도 내 정신세계를 여러 번 짓밟고 달아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허튼 속정에 국척하거나 한눈팔기에 나를 크게 소모한 적이 없음을 자위한다.

시가 잘 되고 못됨은 공정에 앞서 오로지 선천적 천문에 맡길 일이요, 나대로 저 저악의 의연한 모습으로 시에 임하는 자세는 예나 다름없다.  
                
                                                     시집 『山의 序曲』(1967) 서문 중에서

 

이 글은 석정의 문학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목가시인, 참여시인, 민중시인 등을 따로 떼어 명명할 수 없다. 전원적 목가적인 자연 친화와 현실과 자연이라는 객관적 대립 관계에서 현실 참여와 현실 극복의 문제를 시로써 표출했기 때문이다. 석정의 시비는 각계 인사 180여명으로부터 1백68만원의 성금을 받아 건립되었으며, 1982년 조각가 배형식의 작품으로 동상이 세워졌다.

1993년에는 김해강(1903 ~1987)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시인이 재직했던 전주사범학교와 전주고등학교 제자들과 문인들이 중심이 돼 세운 해강의 시비는 지름 7m의 원형구조물로 전북대학교 임승택 교수가 4개월의 작업으로 제작했으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목가적 시세계와 학처럼 맑게 생활하였던 청정한 기품을 담아내기 위해 삼족조라 불리는 태양조를 주제로 설정했다. 시비의 좌대 휘호는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이 쓴 것으로 석전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시비에는 「금강의 달」이 담겼다.


 

고운 산 / 고운 달 / 밤 자태가 맑으니 / 산 나그네졸음도 밝아 // 달을 베고 누우니 / 물소리 은하처럼 / 창가에 더욱 맑다 // 눈을 뜨면 / 산 이마에 뚜렷한 얼굴 / 눈을 감으면 / 물에 채어 부서지는 달 소리 // 차마 잠을 이룰 수 없어 / 말없이 호올로 앉아 / 달을 바라본다 // 거울처럼 / 안히 트이는 마음 / 이 한 밤 / 부처인 양 받들어 보리

                                                                            김해강의 시 「금강의 달」 전문

 

전주 출신인 시인은 ‘태양의 시인’ ‘학의 시인’으로 불렸다. 1925년 『조선문단』에 「흙」, 「달나라」를 발표하여 등단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한 한국의 전통적 서정세계를 작품에 담았다. 또 「지주망」, 「천하의 시인이여」, 「마녀의 노래」 등 의기와 분노와 예언자적 지성으로 일제강점기 현실에 맞서는 수많은 저항시를 쓰며 시인의 의연한 태도와 역사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아름다운 태양」 등 3편의 시는 친일 작품으로 거론된다.

 

쑤꾸기 소리 따라 감꽃은 하나 둘 피어났는가? / 다시는 오지 못할 푸르름 밑에 / 하마트면 뜨지 못할 나의 눈빛이 / 진정 새로운 뜻으로만 피어났는가? // 의좋은 어느 집 어린 형제와 같이 / 돌담 위에 서로의 손짓이 보일 듯 / 어제 밤 너와 나와의 아쉽던 가슴 위엔 / 저기 저 감꽃이 쑤꾸기 소리 따라 피어 났는가? 

                                                                                     이철균의 시 「감꽃」 전문

 


소설가 복거일은 “이 시를 낭송하면, 거기 담긴 사랑의 애틋함으로 가슴에 파아란 물살이 인다.”고 말했다. 대중적 인기와 평단의 조명에 연연하지 않고 평생 고향 전주에서 시 하나만을 끌어안고 살다 간 이철균 시인(1927-1987). 그의 삶은 지인(知人)이었던 이운룡 시인의 조시 ‘감꽃 시인’(『현대문학』1987.11)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한평생 시인으로 살면서 / 시를 썼고 / 집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살다가 / 시집 한 권 엮어내지 못한 채 / 마지막엔 虛虛 / 무덤조차 남기지 않고 재로 뿌려진 시인 / 신화처럼 믿기지 않는 시인 / 참말로 시만을 사랑한 시인 / 감꽃으로 희게 피어나 / 감꽃을 노래하다 / 수줍게 시만을 남겨 놓고 / 깨끗이 떨어진 감꽃 시인.

 

감꽃 시인. 그는 허기가 겹쳐 영양실조로 쓰러지면서도 누옥 한 칸 없는 떠돌이 삶을 비관하지 않고 시심을 불태웠다. 1954년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데뷔한 이후 33년 동안 1백 편이 될까말까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만은 감꽃과 같이 순수하고 소박한 아름다운 정서로 충만했다. 시집 한 권 없이 작고했지만 전북문인협회 선후배들과 시인이 잠시 몸담았던 전주고등학교 제자들은 1992년 12월 시비(조각 정현도ㆍ글씨 송하선)와 함께 유고시집 『신즉물시초(新卽物詩抄)』를 발간했다.

백양촌(白楊村)이란 아호로 더 잘 알려진 신근 시인(1916~2003)의 시비는 2003년 11월 제막됐다. 1950ㆍ60년대 신석정ㆍ김해강ㆍ이철수 시인과 함께 활발히 활동했던 선생은 전북 문단의 기틀을 마련한 큰 나무였다.

부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시 쓰기와 함께 전주사범학교와 삼례중ㆍ전주고ㆍ전주성심여고 등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전라신보 편집부국장과 전북일보 상임 편집고문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전북예총지부장을 역임했다. 1989년 자신의 아호인 백양촌을 따 백양촌문학상을 제정,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시인이자 교육자ㆍ언론인으로 뚜렷한 자취를 남긴 고인의 생애와 문학을 영원히 기린 이 시비는 고인의 시 「강」의 전문이 새겨져 있으며, 전북출신 서예가인 성균관대 송하경 교수와 서울시립대 김창희 교수가 글씨와 새기는 작업을 맡았다.


 

여기 서면 /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 어머니, 당신의 젖울인양 정겹습니다 /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 오는데 /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 님의 가락 /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옵니다 / 목숨이야 어디 놓인들 끊이랴마는 / 긴 세월 부여안고 넋으로 밝혀 온 말간 강심 / 어머니, 당신의 주름인양 거룩하외다 / 길어 올리면 신화도 고여 울 것 같은 / 잔물결마다 비늘지는 옛 님의 고운 가락 / 구슬로 고여옵니다. 

                                                                                         백양촌의 시 「강」전문

 

덕진공원의 거대한 연못은 이른 여름이면, 장엄한 홍련(紅蓮)의 바다가 된다. 전체 3만평인 연못 중 현수교로 나뉘어진 동쪽 1만3,000평이 연꽃 군락지다. 널찍한 연잎이 수면을 빼곡하게 메우고, 그 사이사이로 불가우리한 연꽃이 눈부시게 빛난다. 스치는 바람에 너울너울 들썩이는 진초록의 연잎과 그 장단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는 연꽃은 시름을 잊게 한다. 이곳의 연꽃 구경은 ‘덕진채련’(德津採蓮?덕진에서 연꽃을 감상한다)이라고 해 전주8경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덕진연못은 고려 때 풍수지리 때문에 만들어진 못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전주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북쪽만 열려있는 탓에 땅의 기운이 낮아 제방으로 이를 막아 지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대부분의 저수지가 농사용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하면 유래가 독특하다.


? 전주체련공원 : 박동화

 

내 몸둥아리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상장(喪章)을 둘러 마지막의 내 호흡이 끊어진다면 나와 동일한 다른 운명의 소유자가 나의 독백을 이어받아 나의 독백은 두고두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독백, 인간의 독백은 지구의 운명이 마지막 될 때 역시 지구의 운명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기에 막은 언제고, 오르고 또 올려야만 되는 것이다. 

                                           박동화의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중에서

 

흔히 그에게는 ‘전북연극의 산파’ ‘전북연극의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희곡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박동화(본명 : 박덕상?1911-1978). 해방 이후 전북의 현대연극사에서 그는 가장 크고 명확한 족적을 남겼으며, 그 자취는 신화와도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적도, 그의 작품을 본 적도 없었을 지금의 후배 연극인에게도 그는 여전히 이어 받아야할 정신과 뛰어 넘어야할 벽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전북연극,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감성 한 자락을 분명 보여주고 있으며, 사후 전북연극의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동화를 보다 정확하고 차근히 바라보는 일, 그리고 작품을 통해서 그를 이해하고 그의 작업을 평가하는 일은 바로 이런 이유로 더욱 절실해진다.

1956년 전북대학교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부임하며 전주와 인연을 맺은 그는 전북대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전주ㆍ전북의 연극판을 일궜다. 당시 김두헌 전북대 총장과 이병기 대학신문 주간의 주선으로 전주(전주시 중노송동 1가 292번지)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70년대 말까지 20여 년 넘게 오직 연극만을 위해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 극예술을 익힌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문극단인 창작극회를 발족시킨 이도 그다. 연극인 양성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고, 창작극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연극판의 성격도 정립시켰다. 한국연극협회 전북지부장은 초대에서 7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리였으며, 전북예총의 수장을 겸하기도 했다.


 

나는 행복한 게야. 연극인이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은 것 아닌가. 후회는 없네. 다만 연극을 맘 편히 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 자네는 후배들을 위해 길 닦음 노릇만 해. 먹고살지 못하니까 쓸만하면 다 서울로 서울로 떠나지 않는가? 그들이 이 고장을 지킬 수 있도록 도립극단이나 시립극단도 만들고, 소극장도 있어야 돼. 참 나 말이야 죽거든 절대 화장하지 못하게 하게나? 난 죽어서도 연극을 해야되니까.

                                                         최기우의 희곡 「가인(佳人) 박동화」 중에서

 

죽음에 임박한 시간, 박동화는 후배이자 제자인 문치상에게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는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며, 후배들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쓸쓸한 울림이 귓가에도 맴도는 듯하다.

전주체련공원에 있는 ‘전북 연극계의 대부’ 극작가 박동화의 동상은 1999년 지역의 연극인들과 미술인 등이 힘을 모아 건립했다. 동상은 약 2미터 높이의 좌대 위에 박동화 선생의 연출 모습을 담은 1미터 40센티미터 높이의 흉상이다. 좌대에는 고인의 대표작품인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의 주요 대사가 새겨져 있고, 양 측면 좌대엔 선생의 업적과 동상건립을 도왔던 사람들의 이름이 서각돼 있다.


? 전주교육대학교 : 신동엽

내 인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 내 일생을 사랑으로 채워 봤으면 /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던 민족시인 신동엽(1930~1969). 그는 1962년 쓴 산문 「서둘고 싶지 않다」(『신동엽전집』?창비?1999)를 통해 “언젠가 부우연 호밀이 팰 무렵 나는 사범학교 교복 교모로 금강 줄기 거슬러 올라가는 조그만 발동선 갑판 위에 서 있는 적이 있었다. 그 때 배 옆을 지나가는 넓은 벌판과 먼 산들을 바라보며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했다.”고 추억했다. 시인은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 사라져 가는 언덕 너머 인생의 꿈을 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억압과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들추어내다 서른아홉의 나이로 작고한 시인의 시비는 전주교육대학교 내 석물공원에 있다. 2001년 5월 15일 그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전주사범 제3회 동문들이 졸업 50주년을 맞아 제막했으며, 시비에는 1967년 신구문화사 간행 『현대한국문학전집(제18권)』에 실린 시 「껍데기는 가라」가 새겨져 있다.

 

껍데기는 가라. /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다시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가 /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漢拏에서 白頭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충남 부여 출신인 시인은 1943년 그 절대 빈곤의 시대에 가난한 수재들이 열망하는, 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문학, 종교, 사상서에 파묻혀 살았다고 전한다. 그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소설가 하근찬은 “그는 그 무렵 기숙사에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아 교실 앞자리에 앉았고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키가 큰 육상 선수에 외향적이었으므로 학교 시절 아주 썩 가까운 친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숙사와 교실을 오갈 때 옆구리에 세계문학전집 같은 문학 서적을 끼고 다녔으며, 우리는 서로가 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전주 서서학동 토박이들은 신 시인이 사범학교를 다니면서 흑석골 일대에서 야학을 했었다고도 기억한다.

첫 시집 『아사녀』(1963)에서 서사시 『금강』(1969)에 이르기까지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토착정서에 담은 리얼리즘 계열의 시를 썼던 그는 누구보다도 맑은 감성과 고운 언어로 노래하였고, 뚜렷한 역사의식으로 분단의 고통을 감지하였으며 불의에 대해 도전하는 단단한 예리함을 보여주었다.

병영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던 일제 말기의 전주사범 기숙사 생활을 묵묵히 견디면서, 일제의 무리한 근로봉사와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어가던 이 시기가 비로소 민족의식에 눈뜬 시기일 것이다. 시인의 아내 인병선 여사도 전주교대 교정에 시비를 제막하게 된 이유를 “10대 청소년기, 신동엽 시인의 시정신이 형성된 때가 이곳을 다니던 때”라며 “그의 시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곳에 시비를 세우는 것은 시비 자체로의 의미도 있지만 그의 시정신이 후학들에게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라고 소개했다. 
그의 뜻을 기리는 것은 단지 시비 건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정신을 오늘에 새롭게 되살리려는 노력에 있다. 시비에 새겨진 그의 소망처럼 모든 껍데기와 허위의식을 벗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그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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