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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에 대하여 자세하게 적어드릴께요.
오성의 이름은 이항복이고, 한음의 이름은 이덕형입니다.
이항복 (오성,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 호는 필운 또는 백사.
고려의 대학자 제현의 후손으로 참찬 몽량의 아들이다.
1. 가계
오성부원군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과의 기지와 작희에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영향을 받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1571년(선조 4)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의 아들인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2. 출사와 관직
1575년에 진사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강연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에 의하여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의 《강목》 한질씩을 하사받고 옥당에 들어갔으며, 1583년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에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문사낭청으로 친국에 참여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하여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하였기 때문에 그의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대사간 이발이 파당을 만들려 함을 공박하였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그 이듬해 정철의 논죄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담화를 계속하여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3. 업적
1) 임진왜란중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동안 그는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으며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남도지방에 사신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윤승훈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이 황응양을 조사차 보냈는데,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의 파견을 보았다. 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사유의 3천병력이 파견되어왔으나 패전하자 그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그는 대사마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에 전라도에서 송유진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하여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시켰다.
2) 중립적 국사처리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양호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에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에 올랐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가 같은 사신인 경략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가 되어 부사 이정구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뒤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여 유성룡을 탄핵하자 그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진하여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문경호 등이 최영경을 모함, 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는 성혼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에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해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뒤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바 있어 성균관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져 권당(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그의 주장으로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으며, 곧이어 북인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선조의 장인 김제남 일가의 멸문지환,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의 살해 등 북인파당의 흉계가 속출하였고,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하여 북인파당의 원망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에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와 별장 동강정사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에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에 유폐되고, 이어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해 8월에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그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으며,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을 보내 영당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에 등용하게 하는 은전이 있었으며,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의 요청으로 봉사손의 관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4. 평가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완전에 가까운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1권과 《주소계의》 각 2권, 《노사영언》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 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이다.
이덕형 (한음, 1561(명종 16)∼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 호는 한음·쌍송·포옹산인. 지중추부사 민성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하였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양사언과 막역한 사이였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하사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조사로 온 왕경민이 그를 만나려 하였으나 사사로이 면대함은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이 출중함을 칭찬하는 글귀를 전하였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를 하였고, 이듬해 서총대의 응제에서 수석에 선발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가 충주에서 그와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로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하였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그는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하였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의 접반관이 되었는데, 전란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를 설복시켜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하였다.
그해에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였으며, 대마도정벌을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에 녹훈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본인의 사양과 그를 시기하는 자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하였다.
그뒤 용진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이다.
제발 마패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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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이 알해군과 똑같아요!! 심사결과 등급 : B-, 마짱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