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끈
손 수 자
어버이날이다. 올해도 어머니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릴 수 있음이 감사하다. 어머니가 팔순을 넘기신 후부터는‘내년에도 이 날을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스치곤 했다. 그런 염려는 가끔 효심을 자극한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안동 간고등어와 강원도에서 따 온 두릅을 종이 가방에 정성스레 담았다. 보정역에서 함께 전철을 탄 동생 무릎 위에도 선물 보따리가 푸짐하다. 동생은 어머니의 옷 한 벌을 샀다며 쇼핑백에서 옷자락을 살며시 끄집어내 보인다. 진동으로 해 놓은 휴대폰이 옷 주머니에서 옆구리를 간질거린다. 어디 쯤 오느냐는 어머니의 두 번째 전화다. 어머니는 83세이시다.
신정동에 사시는 어머니는 손수 상차림까지 하시곤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상에는 호박전을 비롯한 맛깔스런 반찬을 담은 접시들이 얌전하게 놓여 있다. 서울에 사는 동생들이 도착하자 우리는 어릴 때처럼 둥근 상에 둘러앉았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각인데도 어머니는 어서 수저를 들라고 재촉하시며 이것저것 자꾸 권하신다. 어머니의 자식 챙기는 모성애는 기력의 쇠진함과 비례하지 않는 모양이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어머니가 문갑 속에서 새끼손가락만한 것을 꺼내어 내 앞에 내미셨다. 작은 비닐봉지에 물건을 넣고 돌돌 말아서 노란 고무 밴드로 꼼꼼하게 감은 것으로 보아 하찮은 물건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궁금해 하는 나에게 어서 가방에 넣으라신다. 그것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딱딱한 금속성의 물건임을 예견하며 고무 밴드를 한 가닥씩 당겨 풀었다. 모두들 나의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다. 비닐을 풀자 또 한 번 하얀 화장지로 포장한 것이 드러난다. 목걸이였다. 의아해하며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그 것을 나에게 주시려는 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목걸이는 13년 전 어머니의 칠순을 맞아 내가 선물로 사 드린 것이다.
언젠가 어머니가 내 약지에 끼워진 녹두알보다도 작은 루비 반지를 보시고는 예쁘다고 하시며, 동창회에 나가면 친구들 대부분이 큼직한 알반지를 끼고 나온다고 하셨다. 그 때 나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엄마의 손가락에 닿았는데, 실반지 하나 끼지 않은 손마디에 새겨진 깊은 주름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날따라 엄마의 손은 왜 그리 안쓰럽고 허전해 보였던지. 어머니가 고희를 맞으실 땐 큼직한 알반지를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화려한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며 알반지를 고르는데, 반지보다는 디자인이 독특하고 예쁜 목걸이가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동글동글 반짝거리는 금줄에 잘 영근 좁쌀을 잇대어 붙인 듯한 십자가가 달려 있는 목걸이였다. 반지와 목걸이 사이를 오가던 시선이 결국 목걸이를 선택했다. 그 후, 어머니는 그 목걸이를 늘 목에 걸고 계셨다.
어느 날 교회에서 뵌 어머니의 목에 그 목걸이가 걸려 있지 않았다. 엄마 곁에 살던 막내딸이 남편을 따라 강릉으로 이사를 가자, 새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고 외로울 때 힘이 되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목걸이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이겨내라는 어머니의 바람이셨다. 얼마 후 그 목걸이는 어머니에게 되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딸의 목에 걸어 주신 것이다. 어려운 가계를 일으키느라 애쓰는 딸을 위해서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목걸이를 우상으로 여긴다며 핀잔하듯 말한 적이 있다.
아들 한 명에 딸 일곱, 팔남매를 두신 어머니는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다. 농촌 살림에 줄줄이 일곱 동생을 거느린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연년생인 남동생이 다음 해에 대학 진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 선호 사상이 유난했던 그 시절, 아들은 논밭을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키고, 딸들은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입시철이 되자 나는 어머니께 간청했다. 평생 한이 되지 않도록 입학시험에만 응시하게 해 달라고. 합격하더라도 대학 진학은 포기하겠노라고. 강릉역에서 서울 청량리행 기차표를 손에 쥐어 주시며, 그래도 시험을 잘 보라고 격려 해 주시던 어머니시다. 그 격려에 힘을 얻었을까. 나는 어머니와 한 약속을 어기고 교사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내 나이 스물 넷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어머니는 나에게 거는 기대와 믿음이 크셨다. 첫 단추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책임과 의무를 만만찮게 부여하셨다. 맏이가 잘 살아야 줄줄이 뒤를 잇고 있는 동생들이 언니 본을 받는단다. 그것이 부담으로 작용하여 때로는 반발심도 일었지만, 결국 엄마의 그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었다.
“자~ 어서 넣어라” 어머니가 재촉하신다. 곁에 있던 동생들이 엄마 편을 든다. 오래전부터 혈압 약을 복용하시고 가끔 어지럼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는 친구들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자극을 받으신단다. 당신도 낯선 곳에서 의식이라도 잃게 되면 혹시 남의 손에 목걸이가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신다. 엄마의 표정은 유산이라도 물려주시듯 사뭇 진지하셨다. 엄마와의 이별의 슬픔이 코앞에 닥친 듯하여 내 가슴도 뭉클해진다. “천국 갈 때 목에 걸고 가셔야지요.”라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농담처럼 말하며 목걸이를 되돌려 드리려했지만 소용없다. 나는 어머니가 하셨던 대로 목걸이를 작은 비닐봉지에 넣어 고무 밴드로 다시 감싼 후, 손가방 속에 고이 넣었다.
어머니가 소중히 여기시는 그 목걸이는 어머니의 장신구가 아니었다. 절대자인 그 분께 간절히 간구하며 기도하던 어머니의 소망의 끈인 것이다. 그것은 우상 또한 아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인내와 소망을 잃지 않으시던, 어머니의 믿음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 끈 한 자락을 나에게 쥐어 주시며, 또 첫 단추의 임무를 부여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동생들이 힘들어 할 때, 당신 대신 동생들 목에 걸어주기를 바라시는 무언의 부탁이 아닐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양에 잘 다녀왔느냐고 안부 물으시며 안전운전을 당부하신다. 퍼뜩 어머니가 주신 목걸이가 눈앞을 스친다. 전에는 노파심으로만 들렸던 어머니의 염려가 오늘은 찡하게 마음 안에 자리 잡는다. 전원생활 준비를 하느라 매 주말마다 용인에서 대관령을 넘나드는 나를 위해 어머니의 소망의 기도가 또 시작된 것은 아닌지. 당신이 주신 목걸이가 이번엔 내 목에 걸려 있기를 바라고 계신 걸까.
이제, 고이 간직해 둔 그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야 되나보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위한 소망을 담아야 되지 않겠는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게 해 달라는. (2006.6.23)
첫댓글 그 목걸이, 그 때 첨 볼 때의 감동이 되살아납니다. 그 목걸이가 다시 돌아오고... .다른 사람을 감동 시키고 스스로 오늘 다시 생각하는 이야기. 또 봐도 좋습니다. 들미소님.
수필 반에 등록하고 두 번째 쓴 글이라서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등단이 무엇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등 떠밀려 나가다 보니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네요. 열심히 글 쓰려고 합니다. 감사!
손선생님, 정말 감동적인 글이예요. 내가 최근 얼마전까지도 창작수필도 받아만 놓고 안 읽던 터이라 이 글을 못보았네요. 그런 어머니가 계시단 것은 축복이고, 어머니께도 이런 딸이 있음이 자랑일 것입니다. 문장이나 글의 전개도 등 떠밀릴만 합니다. 이럴땐 들미소라고 부르기 싫으네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합니다. 손수자님. 감동...
강릉 은사님(시인)으로부터 듣던 말을 권예자 선생님께서도 하시네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오늘 그 은사님의 시집을 발송했습니다. 월요일 쯤에...
작년 이맘 때(겨울 등단 작품) 보았습니다. 그날의 감동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완성이 아니고 영원히 진행형이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어머님의 건강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마야님!
강의실에서 읽었던 것과는 또다른 울림입니다.
글 선배님,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셔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