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 기 준(遵)
1492년 음력 2월 23일 78세 기찬의 오형제 중에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시어 1521년 10월 28일 기묘사화에 함경도 온성에서 사사되어 29세로 돌아가시다.
자는 자경(子敬)이시고 호는 복제(服齊) 또는 덕양(德陽)이시다
1513년 사마양시 1514년 별시 문과에 제 5등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역임하고 저작박사로 호당에 선임되시어 벼슬이 응교에 이르셨다.
기묘사화로충남 아산에 유배되시었다가 함북 온성으로 이배되어 돌아가시었다.
1545년 인종의 명으로 관직이 복구되고 후에 아들 기대항이 고귀한 사람이 되어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으로 추증되시다.
1776년 영종때 문민공으로 시호를 받다, 근면하게 배우고 글을 좋아함이 문이요 선비와 백성이 상처받아 슬픔이 민이다.
묘는 아버지 묘의 서쪽 다른 산기슭에 남서방향(간좌)으로 있다, 비에 증손자 기자헌의 기록이 있고 상석 주석 등의 석물이 있다, 염제 정실이 지은 행장, 하서 조경이 지은 시상이 있다. 저작은 덕양집 2권이 세상에 전한다. 글씨는 기묘제현 간첩에 있다, 고양 문봉 아산 인산 종산 온성 충곡 등의 서원에서 제사지낸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파평 윤씨
1492년 음력 2월 17일 태어나시어 1492년 음력 8월 11일 73세로 돌아가시었다.
아버지는 정국공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 파성부원군 헌의공으로 추증된 윤금손이시고 할아버지는 찬성 파원군에 추증된 윤지강 증조부는 형조판서로 병조판서에 추증된 윤잠이시다.
외가는 경주 김씨로 외할아버지는 목사 김태경이시다.
묘는 쌍장으로 왼쪽에 장사지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자경 호는 복제, 덕양. 아버지는 기찬홍, 조광조의 문인이다, 15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홍문관정자로 초계문신이 되었으며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 하였다.
스승 조광조의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사경으로 있을 때는 임금에게 효제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1516년 저작으로 천문이습관을 겸하였으며 검토관, 수찬, 검상, 장령, 시강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이성언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저질렀다 하여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당시 대각이 이를 묵인하였음을 논박하여 훈구파인 남곤 심정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519년 응교가 되어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하여 김식 김정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정배되었다가 1521년 송사련의 무고로 신사무옥이 터져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되었다. 시에도 능하여 해동시선, 대동운부군옥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 아산의 아산서원, 고양의 문봉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복제집, 부인기문, 덕양일기 등이 있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1545년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이다.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기록을 요약하면,
*기준은 자는 경중(敬仲) 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복재(服齋)요 본관은 행주이다. 판중추(判中樞) 기건(奇虔)의 증손자이고 응교(應敎) 기찬의 아들이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고 갑술년에 문과에 급제 하였다, 기묘년에 (충남) 아산으로 귀양갔다가 (함북) 온성으로 옮겼다, 다시 잡아 올려 국문하고 유배 장소로 돌려 보내어 위리 안치 하였다가 신사년에 사사하였다, 인종이 복관을 명령했고 아들 기대항(奇大恒)은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l 기준이 일찍이 정암 조광조에게 편지하기를 [벼슬을 버리고 산림 속에 몸을 감추고 싶을 뿐 다시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다] 하니 정암이 대답하기를 [나도 역시 그렇다] 고 하였다.
l 정응은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 서한(西漢)의 문장을 지녔었고 기준은 인품이 쇠같이 단단하고 옥같이 윤택하여 깊이 염계(濂溪)의 학풍을 본받았었는데 두사람이 같이 연소하고 단아하여 당시 사람들이 쌍벽으로 지칭했다.
l 기준이 하서 김인후가 아홉살 때 보고 [뒷날에 마땅히 세자(인종)의 신하가 될 것 이다] 했다.
l 기준이 어느날 대궐 안에서 숙직할 때 관외(關外)로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길 여행을 전전하면서 율시 한수를 읊으니
이성강산고국동(異城江山故國同)
천애수루의고봉(天涯垂淚倚高峰)
완운막막하관폐(頑雲漠漠河關閉) 혹은 호성적막하관폐(湖聲寂寞河關閉)
고목소소성곽공(古木蕭蕭城郭空) 혹은 목엽소호성곽공(木葉蕭號城郭空)
야로세분추초외(野路細分秋草外)
인가요주석양중(人家遙住夕陽中)
정범만리무회도(征帆萬里無回棹)
벽해망망신불통(碧海茫茫信不通)
[낯선 땅 산과 물은 고향과도 같은데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아득한 검은 구름에 강가 관문이 닫기었고
(혹은 호수는 소리없이 적막하고 강가 관문이 닫기었네)
고목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에 빈 성곽이 쓸쓸하다
(혹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빈 성곽이 쓸쓸하다)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망망한 벽해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
하였다, 갑자기 깨어나 벽에다 꿈 속의 시를 썼다고도 하고 사재척언과 덕양유고에는 깬 뒤에 꿈속에 본 바를 기억하고 지은 것이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묘사화에 관련되어 충청도로 귀양갔다가 곧 함경도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 였다, 말을 멈추고 꿈속의 시를 다시 읊을 때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가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온성에 이르러 조금 있다가 사사되었다, 사람들이 그 시를 서로 전하며 외우면서 슬퍼하고 분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l 기묘년에 경연에서 장차 성리대전초선(性理大全抄選)을 강의 하려 하여 진강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미리 강습 시키는데 남곤, 김안국, 이자, 김정, 김세필, 조광조, 신광한, 김정국, 유운, 김구, 홍언필, 김식, 한충, 박세희, 기준, 정응, 장옥, 조우, 이희민, 황효현, 권운, 이충건, 등 23사람을 미리 강습시켰다,
l 기묘에 남곤과 심정이 심술굿게 남을 해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사림들에게 죄를 얻었는데 그들이 태도를 바꾸어 청류들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사림들이 전혀 받아주지 않자 이에 반감을 가지고 복수할 기회만 노렸다, 이때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집행하기를 공정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이에 남곤 등이 그가 인심을 얻었다 은근히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다, 남곤과 심정은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가 조광조에게 반감이 있음을 알고 서로 통하여 희빈 홍씨를 시켜 중종에게 조광조를 경계하게 만들고 감즙으로 나뭇잎에 주초위왕을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하여 중종에게 바치며 모함하였다.
l 이에 중종은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밀교를 내려 신무문을 열고 여러 재상들에게 들어오게 하였다.
l 얼마 안지나 성운이 나와서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어 이장곤에게 주며 [이것은 어필이다, 이 사람들을 곧 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그들은 입직해있던 윤자임, 공서린, 안정, 이구 및 응교 기준과 수찬 심달원 들이었다, 이어서 대궐문이 열리고 조금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 형조판서 김정, 도승지 유인숙, 좌부승지 박세희, 우부승지 홍언필, 동부승지 박훈, 부제학 김구, 대사성 김식 등이 대궐 뜰로 붙들려 왔다.
l 그날 초저녁에 기준이 윤자임, 안정, 이구 들과 함께 천문을 보기 위하여 천문을 관측하는 간의대로 갔었는데 정원 사령이 달려와 알리기를 [두어 사람 재상이 서문으로 해서 입궐했고 또 근정전 가운데에 불빛이 있으며 군사가 호위해 서 있다] 고 알려왔다, 서로 놀라, [어떻게 정원에서 모르는 일이 있단 말이냐?] 하고 곧 내려왔다, 조금 있다가 당번 승지 두사람 윤자임과 공서린, 홍문관 두사람 기준과 심달원, 한림 이구, 주서 안정 들을 금부에 내려 가두고 조금 있다가 이자, 김정, 조광조, 김식, 김구, 유인숙, 박세희, 홍언필, 박훈 등을 잡아 가두었다. 조금 뒤에 유인숙, 공서린, 홍언필 세 사람을 놓아 주라 명령하였다. 또다시 심달원, 안정, 이구 세사람을 놓아주라 명령하였다. 또 이자를 놓아주라 명령했다.
l 밤 삼경에 영의정 정광필이 부르는 명을 받고 들어와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삼정승이 죄를 의논하게 해달라고 말하였고 중종이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가려하자 중종의 옷을 붙들고 머리를 조아리고 따라 들어가며 울었다.
l 중종이 정광필을 시켜 조관조 등의 죄안을 정하게 하였다, 정광필은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으니 여러 의논을 종합하여 결정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중종이 남곤에게 전지를 초하게 하였다, 중종이 이를 보고 죄안을 정하였는데 조광조등 8명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이 서로 붕당을 지어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진출시키고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세력을 키우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후진을 꾀어 궤격한 습성을 길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의 정사를 점점 그르치게 하여 조정 신하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등은 조광조의 무리의 궤격한 버릇에 동조하였다] 고 되어 있다.
l 16일 아침에 의금부사 김전, 이장곤, 홍숙 등이 나와 앉아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이 붕당을 지었다는 것과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등이 조광조에게 부화했다는 일을 국문하였다.
l 기준이 말하기를 [신이 젊어서부터 옛 사람의 글을 읽어 자못 방향을 알아서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충의를 다할 것이라 하여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함께 옛 도리를 강구하여 우리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 세상을 지극히 다스려지게 하려고 작은 정성을 다 하였고 또 남이 착한 것은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뇌동부화하였겠습니까? 조광조 등과는 뜻이 같고 도가 맞아서 서로 사귀어 좋아했을 뿐 궤격한 줄은 몰랐습니다] 고 하였다
l 금부에서 고문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고문할 것 없이 율문대로만 하라고 명령하였다, 김전 등이 간당 죄에 해당되는 법률을 써서 마땅히 목을 베고 그 집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중종은 이것으로 죄를 결정하라 하고 이어서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네사람은 사사하고 그 나머지는 귀양보내라고 하였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어었다.
l 날이 저물 무렵 (의금부사 등이) 또 나와 앉아 국문은 그만하고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 네명에게는 사형시키고 나머지 네명은 곤장 1백대를 때리고 삼천리 밖으로 귀양보내기로 하고 중종에게 보고하였다, 중종이 승지 김근사를 불러 탑전에서 판부를 쓰게 하기를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하고 김식과 김구는 곤장 백대를 때리고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 ] 하였다, 김근사는 명령을 받고 머뭇거리고 사관 채세영은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신에게 다시 상의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중종이 [다시 의논하는게 좋겠다] 하였다, 영의정 정광필이 하교를 듣고 종종을 찾아가 사형에서 감해주기를 울면서 요청하였다, 중종이 다시 승지 성운을 불러 [조광조등 네명은 매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등 네명은 먼 곳에 귀양 보내라] 하였다,
l 조광조등이 금부에 갇혀 있던 날 밤 모두들 죽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 날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밝은 달만 뜰에 가득 비쳤다, 마당에 늘어 앉아서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작별인사를 하는데 김정이 시에
중천차야장귀객(重泉此夜長歸客)
공조명월조인간(空照明月照人間)
오늘밤 황천으로 갈 사람들
속절없이 밝은 달만 남아 인간을 비치네
하였다, 김구가 또 옛시를 읊었다.
매골백운장기의(埋骨白雲長己矣)
공여류수향인간(空餘流水向人間)
흰 구름속에 뱍골을 묻으면 여원히 그만,
공연히 흐르는 물만 남아 인간으로 향하리
하였다, 또 시를 지어
명월장천야(明月長天夜)
달 밝은 긴 밤하늘
하고 읊으니, 김정이 화답하여
엄동석별시(嚴冬惜別時)
추운 겨울 애석하게 시로 작별하네
하였다, 모두들 조용히 스스로 위로하며 [차야 이자는 반드시 면죄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차야가 울음을 터뜨렸다, 조광조가 울면서 [꼭 우리 임금을 만나 뵙고 싶다] 하였다, 서로 위로하며 [조용히 의(義)로 죽어야지 어째서 울기까지 하랴?] 하니 조광조가 [조용히 의로서 죽어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임금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랴?] 하며 밤새도록 울었다, 이튿날 사형에 처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태연해졌다.
*16일밤 삼경에 모두 석방되어 집으로 와서 조금 자게 하고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 밖 인가로 나가 있게 하였다. 얼마 후 모두 금부에 모이라 하고 승지 성운이 중종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읽었다, 이날 밤에는 동소문 밖 인가에서 잤다.
*세상에서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병조판서 이장곤, 형조판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식, 응교 기준, 유생 신명인을 팔현이라한다.
*처음에 기준이 홍문관 숙직소에 있다가 옥에 가두고 매질하여 아산으로 귀양 보냈다. 이보다 앞서 기준의 큰형 기형(奇逈)이 그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고을 한자리를 빌어서 무장현의 현감이 되었었다, 이때 기준이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자 무장에 게시는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빠져 나와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하룻길도 못 가서 잘못을 깨닫고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아산현감 배철중과 함께 옥에 갇히었다. 배철중이 죄 받을 것이 무서워 기준이 도망가다가 돌아온 것으로 말하였다, 기준이 감옥에서 옷자락을 찢어서 상서했는데 그내용은 [신은 난 지 겨우 한달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직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처음 신이 죄를 입었을 때 어머니가 무장에 있어서 신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울고 부르고 했다 합니다, 비록 가보고 싶었으나 그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시 온성으로 옮기게 되자 철없는 생각에 북쪽 하늘과 남쪽 땅이 서로 머나먼데 한번 북으로 가면 다시 볼 길이 없어 생사도 모르고 소식조차도 서로 통할 길이 없을 것 같아서 한번 얼굴이나 보고 서로 영결이나 할까 생각하니 슬픈 심정을 참을 수 없고 사세가 급박하므로 저도 모르게 경망히 뛰어 났으나 나가서 다시 생각하니 뒷일이 난처하므로 뉘우치고 다시 배소로 돌아왔던 것 입니다. 도망한 죄를 변명하기는 어려우나 단 하루의 일이고 아무런 다른 뜻이 없었으며 신이 비록 물초하오나 일찍이 사대부의 반열에 있던 터이온즉 어찌 망령한 사람이 되어 백일하에 구차히 살고자 하였겠습니까? 진정으로 모자 사이에 참지 못할 일이므로 이렇게 되었사오니 신이 마땅히 그 죄를 받을 것이오나 효도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전하께서 이 조그마한 심정을 살피신다면 또한 만물을 기르시는 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래서 매를 때리고 도로 귀양 보냈다가 이때에 와서 다시 죄를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l 기묘당적에 의하면 기준이 아산으로 귀양가 있을 때 그의 큰형 기형이 무장 현감이 되어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임지로 갈 때 직산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아산과의 거리가 50리 밖에 되지 않았다. 기준이 아산 현감 배철중에게 간청하여 가서 어머니를 보고 하루밤을 자고 돌아왔다, 그 뒤 그 사실이 발각되자 배철중이 제 마음대로 죄인을 놓아보냈다는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기준이 도망했다고 위증을 한 것이다.
복재집(服齋集);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기준(奇遵)의 시문집. 6권 2책. 목활지본. 원래 허봉(許봉)이 시문을 모아 간행하려다가 못하였던 것을 1605년(선조 38) 복재선생의 증손자 기자헌이 이경윤(李慶胤)의 서문과 박순(朴淳) 오억령(吳億齡)의 발문을 붙여 간행하였다. 그 뒤 1875년(고종 12) 방손 기우만 등이 중간할 때 이경윤의 서문대신 박순의 발문을 서문으로 하고 기우만이 끝에 사유를 붙였다. 권1, 2는 시 475수 권3은 책(策) 1편, 상소 1편, 연설(筵說) 2편, 권4는 편지 3편, 잡저 8편, 명 61편, 부록 권 1은 척록(摭錄)으로 이황 김정국 강유선 노수신 허봉 이호민 심흠 이정구 유성룡 등의 복재 선생에 대한 기록, 권2는 행장 시장(諡狀) 비기(碑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점에서 볼 때 비교적 방대한 분량으로 저자가 30 미만의 젊은 나이에 먼 함경도 온성에 위리안치 되었을 때 지은 것이 많다. 시는 가시울타리 속에서의 처절한 고독감 젊음의 이상, 임금에 대한 충성심, 불의를 미워하는 적개심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시의 상당량이 해동시선에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어머니와 형, 누이와 아내, 그리고 아들을 그리워 하며 읊은 오율의 옥중사가(獄中四歌) 4수는 애절한 심정이 잘 표현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편지 3편은 모두가 안처순(安處順)에게 보낸 것으로 그 가운데 1편에는 끝에 오언시 1수가 붙어 있는데 친구와의 마지막 이별을 읊은 내용이다. 잡저의 축장설(畜獐說) 양어설(養魚說) 위리기(圍籬記) 등도 위리안치 되었을 때의 생활상을 그린 것들이다. 이책에서 두번째로 양이 많은 질욕혈(窒欲穴) 암실(暗室) 재도가(載道架) 대모관(戴慕冠) 해혹대(解惑臺) 등으로 역시 극지의 위리안치생활에서 자칫 채찍질하는 내용들이다. 책은 사도의 존엄성과 그 확립을 강조한 내용으로 비교적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도서 장서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 등이 있다…………………양홍렬
79세: 기 대항(大恒)
1519년 음력 6월 17일 외아들로 태어나시어 1564년 음력 7월 12일 45세로 돌아가시다.
자는 가구(可久)이시다.
1540년 진사, 1546년 문과급제하여 홍문정자, 저작박사를 역임하고 이랑으로 옮겨 부제학에 벼슬이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손자 기자헌이 귀중한 사람이 되어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양관대제학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견공이시다.
묘는 할아버지묘 아래에 서향(묘좌)으로 있다. 짧은 갈명이 음각되있고 혼석, 노석, 상석, 주석, 장군석, 작명등 등의 석물이 있다, 4촌 동생 기대승이 지은 행장이 있다. 율곡 이이가 제문을 지어 진상했다.
부인은 정부인 양주 조씨
1519년 태어나시어 1567년 음력 6월 15일 48세로 돌아가시다.
아버지는 사성 조방종, 할아버지는 돈령부 봉사 조영견, 증조부는 부사 조선이시다.
외가는 전의 이씨 외할아버지는 목사를 지내시고 전성군에 추증된 이한원이시다.
묘는 쌍장으로 왼쪽에 장사지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행주. 자는 가구, 아버지는 응교 기준이다.
154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1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폐를 살폈다. 이듬해 이조정랑을 거쳐 1553년 헌납이 되었다, 1554년 사간이 되고 이어 전한, 직제학이 되었다. 1556년에는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561년 대사간으로써 재변소 6조목을 울려 경천, 법조, 무학, 납간, 임현, 애민에 힘쓸 것을 건의하였다. 1563년 부제학이 되었는데 당시 권신이던 이량이 사화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하려 하자 심의겸 등과 함께 이량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때 이량을 옹호하던 사헌부의 죄상도 함께 탄핵하여 이량을 강계로 귀양보내고 그 일파도 관직을 삭탈하는 한편 새로 등용된 사림들을 옹호하였다. 이어 대사헌이 되고 이조참판을 거쳐 1564년 공조참판, 한성부 판윤에 발탁되었다. 시호는 정견이다.
연려실기술 기록
이량이 귀양가다
# 이량은, 자는 공거이며, 효녕대군 보의 5대손이오, 국구 심강의 처남이다. 임자년에 문과하였는데 위인이 어리석고 기가 많아 친구들이 모두 우습게 보았다. 임금이 갑자기 총애하고 발탁하여, 몇년 안되어 낮은 벼슬로부터 판서에 올렸으니 윤원형이 임금의 권력을 침해하므로, 임금이 속으로 두려워하여 이량을 내세워 윤원형과 대항하게 하려함이었다. 동각잡기.
# 이량이 그 세력을 믿고 이조에 들어가려 하니, 이조랑관 홍천민이 좇지 않았다. 이조 당상 중에 이량을 돕는 이가 있었으나 홍천민이 문득 다른 사람을 천거하였더니, (임금이> 이조의 추천을 받은 이는 다 물리치니, 마음이 이량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박호원이 새로. 전적에 승진되었는데, 홍천민이 박호원을 <이조랑관에> 추천하니, 임금이 평안도에 흉년이 심하여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핑계하고 박호원을 용강현령으로 내보내었다. 그러나 역시 홍천민이 <이량이 이조에 들어오는 것을) 즐기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의정부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박대립이 사인으로 있으면서 거절하니 임금이 응교로 승진시켰다가 곧 올려 승지가 되었다. 동포휘언
#이량이 (임금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세력이 불길 같으므로 이욕을 즐기는 무리가 일시에 다 휩쓸려 추종하였으니, 이감, 권신, 고맹영, ·김백균, ·이영 등이 그의 심복이 되고, 김명윤 · 정사룡 · 원계 검 등은 숭품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서 아첨하고 사귀어 뻔뻔스럽게 부끄럼이 없었으며, 신사헌은 본래 간사한 사람으로 정사롱에게 뇌물을 주고 시제를 사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공론에 의하여 삭과되었다가 이량에게 빌어서 복과되었으므로 섬기기를 종처럼 하고, 윤밴원은 원로의 아들로, 그 아비가 윤원형에게 죽었음을 원망하여, 또한 이량에게 붙었다 이량의 아들 이정빈은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였는데, 계해년 알성친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니, 사람들이 모두 술책을 써서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 달이 채 못되어 전랑에 추천되었으나, 곧 이량이 판서가 되었으므로 상피하여 갈리자, 이정빈이 동료에게 부탁하여 유영길을 자기 후임으로 추천하려 하였으니, 그와 가까운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정랑 박소립과 좌랑 윤두수가 청론을 주장하여 그 말을 좇지 않으니, 이정빈이 원망하였으며 이문형 ·허엽은 이량에계 붙으려 하지 않았고, 기대승 ·윤근수는 후진으로서 사류의 칭찬을 받으니, 이량의 무리가 꺼려하였다. 이에 이감이 대사헌이 되어, 이문형 ·허엽 ·박소립 ·윤두수 ·윤근수 ·기대승 등이 부박하여 서로 선동한다고 탄핵하여, 삭직되어 외임으로 나갔다. 동각잡기
#임금이 일찌기 야대에 나오니, 승지 허엽이 아뢰기를, "조광조는 바른 선비인데 소인의 모함으로 죽었습니다. 그때 (그가>시가를 지나갈 때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니 인심을 얻어 다만 이것으로 죄를 삼았습니다. 옛날 송나라 사마광은 낙양에서 조정에 들어오면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었으니, 이는 다 존경해서 그러한 것인데, 어찌 <조광조에게> 이것으로써 죄를 삼겠습니까. 전하께서 마땅히 그 무고함을 살피셔야겠습니다. 또 구수담이 본래 곧기로 이름이 있어서, 전하께서 또한 곧고 성실한 사람이라 말씀하였는데, 한때의 의논으로 인하여 중죄를 입었으니, 또한 불쌍합니다"하였고, 경연관 윤근수도 따라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대답이 없었다. 이때에 이량과 이감 등이 바야흐로 국론을 잡고 있는데, 이 린이 <허엽 등과> 함께 입시 하였다가 그 날로 말을 누설시켜, 이튿날 양사에서 "허엽이 의논을 내기를 좋아하여 시비를 현란하게 한댜"고 탄핵하여 승지에서 갈리고, 윤근수도 또한 과천현감으로 쫓겨 갔다. 동각잡기.
# 기대승 ·이문형 · 허엽은 사림의 허여하는 바요, 윤두수· 박소립은 전랑이 되었을 때 <이 량에게) 미움을 받았고 윤근수도 또한 의논이 명백하므로 다 (이 량의) 꺼리는 바가 되니, 양사에서 아뢸 때에 이감 등이 이 사람들을 「을사의 여당」』이라고 하려 하니 정언 이언이가 불가하다 하면서, '(죄가 있으면) 마땅히 죄대로 죄를 줄 일이지, 어찌 뜬말을 지어내려는가" 하여 의논이 중지되엇디. 이언이는 이량에게 붙었으나 그 말이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석담일기.
#심의겸은 이량의 생질이다. 처음 벼슬길에 나와 선비들과 교유하고, 이량의 하는 일에 반대하려 하였다. 이때에 기대항이 부제학이 되니, 또한 이량의 무리였다. 이량이 이문형 등을 몰아 내쫓은 뒤에 세상의 인심이 크게 놀랐으므로 심의겸이 이량을 제거하려 하여 기대항에게 왕래하며 모의하니, 기대항은 심강의 척당이라, 심강이 이미 (그의 딸인) 왕비에게 연락하여 묵인 받은 것을 알고, 동료를 데리고 차자를 올려 이량의 죄악을 탄핵하고. 또 양사가 침묵을 지켜 말하지 않음을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곧 이문형 등을 다시 불러 쓰고 얼마 안 있어, 이량(벴) ·이감 ·권신 ·신사헌 · 이영 ·윤백원 등에게 죄를 주어 멀리 귀양보내고 고맹영 ·김백균은 중도부처하고, 정사룡 · 윤계검 ·이정빈 ·이언충 이중경 · 황삼성 · 조덕원 · 고경명 · 이성헌 강극성 ·윤인함 등은 삭출 혹은 파직하였다. 동각잡기
#이량이 권력을 탐하고 일을 좋아하여, 아첨으로 임금의 비위를 영합하려 하여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라도 완상할만한 것은 다 구하여 궁중에 바쳐서, 안으로 임금의 환심을 사고 밖으로 도당을 모아 세력이 성하여, 사람들이 감히 바로 보지 못하였다. 동각잡기에 이량이 처음은 외척으로 사랑을 받았다가 세력이 성한 뒤에도 내시와 결탁하여 임금의 동정을 가만히 엿보아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비부가 세력을 읽을 것을 걱정하여 안하는 일이 없으니 그 두려움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사림의 청의가 없어지지 않음을 꺼려서, 이감 등을 사주하여 사림에게 화를 끼치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불안하여 저녁으로 어렇게 할지를 몰랐다. 심강이 매우 불평하여 기대항을 불러 이량의 허물을 말하니, 기대항이 처음은 이량에게 붙었다가 이에 깨달아서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이량 등의 죄를 논하였다. 왕비는 본래 이량을 좋게 여기지 않아 임금에게 쓰지 말 것을 간하였었다. 이때에 임금이 크게 깨달아서 이량 등을 모두 문 밖으로 내쫓고, 언관을 모두 갈아 기대항으로 대사헌을 삶으니, 이에 양사가 합문 밖에 엎드려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므로 드디어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그때 사람들이 기대항을 가리켜 서림이라 하였으니, 아마 서림이 본래 강도 임걱정의 당이 었는데 관에 자수하여 죄를 면하고, 관군을 인도하여 임꺽정을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석담일기.
#일찌기 이량의 사람됨이 집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왕비 친정인) 심씨 집에서 권력을 쓸 이가 없어서 비록 이량의 위인을 알지만, 기대항으로 하여금 돕게 하면 일이 될 것이라 하여 시험 삼아 썼더니, 며칠 사이에 당파를 조정에 가득 채워 권세가 윤원형을 압도하므로 윤원형이 또한 "두려워하였다. 수년 후에 심의겸이 과거에 급제하니 권세가 저절로 서로 나누이게 되자, 이량이 이를 싫어하여 하루는 그 무리를 모아 사림에 화를 일으키려고 문을 닫고 의논하는 차에 심의겸이 그 집에 왔다. 문지키는 자가 주인이 외출하였다 하였으나 심의겸이 문을 박차고 바로 들어가 병풍 뒤에서 몰래 들으니」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내쫓을 것이요,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삭탈할 것이다" 하고 차례로 죄를 논하는데 의론이 채 끝나기 전에 심의겸이 갑자기 병풍 밖으로 나오니,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놀라 얼굴빛이 변했다. 이튿날(그들이>먼저 허엽과 박소립 등을 죄주니 모두 일세의 명사들이라 조정과 민간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의겸이 곧 비밀히 아뢰어 이량의 탁란하는 죄상을 왕비에게 아뢰니, 이미 외숙의 어리석음을 알고 조정의 일을 맡겼음은 누구의 과실인가. 대전에서도 역시 아신다" 하였다. 이에 심의겸이 곧 기대항을 불러 의논하기를, "일이 장차 혜아릴 수 없을 것이니, 부제학은 이를 탄핵하라" 하니 기대항이 황겁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심의겸이, "벌써 왕비의 명을 받들었다" 하고 내어 보이니, 기대항이 뛸듯이 좋아하며 쾌락하였다. 이튿날 동료들과 중학에서 모임을 가진 뒤에 기대항이 이량의 집에 들려 조용히 이야기하고 남은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의심하지 않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사헌 이감이 이량에게 편지로 연통하기를, 『뜻밖에 옥당에서 중학에 모이는 것이 염려되니, 이 무슨 일이요) 하였다. 이량이 답하기를 “부제학이 지금 나를 보고 갔는데, 무슨 일이 있겠소. 책을 교정하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였다. 조금 뒤에 이량의 무리 수십 명을 탄핵하여 죄를 정하니, 이량은 강계로 귀양가서 죽고 이감은 경원으로 귀양가서 죽었으며, 일곱 간신인 김백균 ·황삼성 ·이영 등은 모두 귀양 가고 삭탈되었다
이로부터 선비들의 기세가 조금 떨쳐, 오래된 병이 소생된 것 같았으니, (이것이) 곧 갑자년이었다. 괘일록
#이량이 정권을 함부로 휘두를 때에 임금이 벌써 제어하기 어려움을 걱정하여, 임금이 직접 책제를 내어 선비를 뽑을 때에 [어진 이를 나오게 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친다]는 것을 출제하니, 기대항이 임금의 뜻을 짐작해 알았고 심의겸이 또한 비밀 명을 받들어서 이때에 일이 터진 것이니, 그때의 사람들이 쾌히 여기었다. 촉수편
80세; 기 응세(應世)
1539년 음력 3월 16일 형제 중에 큰아들로 태어나시어 1585년 46세로 돌아가시다
자는 경우(景遇)이시다
아들 기자헌이 영의정이 되면서 순충적덕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덕창부원군에 추증되시다.
묘는 아버지묘아래에 같은 방향으로 있다. 짤은 갈명이 둘있는데 하나는 신숙이 글을 잦고 석봉 한호가 글을 썼고 다른 하나는 명나라의 주지번이 제자하고 아들 기자헌이 그것을 기록했다. 혼석, 상석, 노석, 주석 등의 석물이 있다
부인은 정경주인에 추증된 선산 임씨
1539년 태어나시어 1583년이나 1643년 음력 4월 29일 돌아가시다.
효행편이 삼강록속편에 있고 선조때의연려시다.
아버지는 좌의정 임백령, 할아버지는 판서에 추증된 임우형, 증조부는 찬성에 추증된 임수 이시다.
외가는 함양 오씨이고 외할아버지는 감사 오성원이시다.
묘는 쌍장.
81세; 기 자헌(自獻)
1562년 음력 12월 2일 4형제 중에 첫째로 태어나 1624년 1월 24일 62세로 인조의 명령에 의해 서대문 자택에서 자결하시다.
처음 이름은 자정(自靖)이시고 자는 사정(士靖)이며 호는 만전(晩全)이시다.
1582년 사마양시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이 되고 사가독서하였고 호당이 되었다. 선조(광해군)때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러 덕평부원군 임진왜란에 정난공신이 되었다 1617년 광해군에게 올린 의견으로 길주에 유배되었다. 인조때에는 다시 서산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괄의 난에 4촌 기익헌이 가담하여 김류 등이 내통할것으로 염려된다고 모함하여 인조가 자결을 명령해 자택에서 자결하시다.
1626년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
묘는 안성 흘니곡(迄泥谷)에 있으며 비와 상석 주석 돌사람 등의 석물이 있다.
부인은 부부인 전주 이씨
아버지는 하원 이원정이시다
묘는 합장이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행주 초영은 자정 자는 사정 호는 만전 증조부는 응교 기준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기대항 아버지는 기응세 1582년 성균관에 입학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하고 검열이 되었다 1592년 예문관 봉교 겸 설서, 병조와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 집의, 성균관직장, 홍문관부교리, 보덕, 사간, 사인,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승지가 되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 관찰사, 이듬해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며 1601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을 신원하게 하고 당시 옥사를 일으킨 서인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1602년 왕세자 광해군의 우부빈객으로 맹자를 강의 했으며 병조,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이 되어 사임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선조가 세자를 폐하고 계비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06년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팜중추부사가 되었다. 1608년 유영경 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 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던 정온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하여 감형케 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에 올라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 불가함을 간하다가 문외송출되고 홍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길주로 이배되었으며 강릉에 방귀되어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 이귀 등이 모의에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써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으며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하여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고 그 일족도 몰살당했다. 1627년 이원익, 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82세; 기 준격(俊格)
1594년 4형제 중에 큰아들로 태어나 1624년 30세에 이괄의 난에 내통을 염려하여 인조에게 사형당하였다.
자는 붕만(鵬萬)이시다.
1615년 진사가 되고 1616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사서이시다.
부인은 광산 김씨
아버지는 김시보이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행주 초명은 수격(秀格) 자는 붕만. 아버지는 영의정 기자헌이며 유희분과도 인척관계에 있다 1615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알성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정언, 병조좌랑,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해에 허균이 역모를 꾀한다고 상소하여 다음해에 그를 처형하게 하였으나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도 강릉에 유배당하였다, 1621년 사서에 서용되고 병조좌랑으로 옮겼다, 북인에 속하지만 인목대비의 폐모에 찬성하지 않았다 임조반정후 남의 문장으로 응시하였다 하여 과거합격이 취소되었으며 허균의 역모를 고발한 상소에 인목대비와 그 아버지 김제남을 배척한 내용이 있다고 공격받았다. 1624년 이괄의 난에 내응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사형당하였다.
83세; 기 반룡(攀龍)
xxxx년 태어나 xxxx년 음력 9월 28일 돌아가시다
수직으로 통정이 되다
묘는 전남 보성 대곡 수당리 장동에 동쪽방향(유좌)으로 있다
부인은 담양 전씨
xxxx년 태어나 xxxx년 음력 4월 19일 돌아가시다
아버지는 전보련이시다
묘는 쌍장이다
84세; 기 이해(以海)
1628년 태어나 xxxx년 음력 10월 9일 돌아가시다
자는 해보(海寶)이시다
묘는 아버지묘 아래 남동방향(해좌)으로 있다
부인은 홍천 홍씨
xxxx년 태어나 xxxx년 음력 10월 8일 돌아가시다
아버지는 훈련첨정 홍우석이시다
묘는 쌍장
85세; 기 한창(漢昌)
1650년 두아들 중에 둘째로 태어나시어 1739년 음력 4월 6일 89세로 돌아가시다.
처음 이름은 유창(有昌)이시고 자는 창언(昌彦)이시다
벼슬은 절위장군 첨지 중추부사 용양위부호군 이시다
묘는 함양 안의면 상비 안산에 서향(갑좌)으로 있다
문한으로 유명하고 화림 저로시가 세상에 전한다.
이괄의 난때 무주 풍동면 삼내리에 은거해 살다가 다시 경남 안의면 지대리 상비로 옮겨사시다.
부인은 밀양 손씨
1651년 태어나시어 1717년 음력 3월 15일 66세로 돌아가시다
아버지는 손란철이시고 증조부는 손필이시다.
묘는 쌍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