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경관이 수려하고 빛이 유난히 고운 산골짜기에 빛고을이란 동물마을이 있었다. 빛고을에는 산토끼 다람쥐 고라니 너구리 족제비 두더지와 같은 동물들과 꿩 뻐꾸기 올빼미 말똥가리 황조롱이 딱따구리와 같은 새들이 저마다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빛고을 동물들은 땅속이나 나뭇등걸 또는 풀섶 등에 예쁜 집들을 짓고, 서로가 예의를 깍듯하게 지켜가며 아무런 다툼 없이 평화롭게 잘 살았다.
그런 빛고을에 동물 모두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옹달샘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옹달샘은 마르지 않을뿐더러 맑고 깊기론 빛고을 동물들 모두가 풍족하게 쓰고도 남아돌았다. 뿐만 아니라 옹달샘의 물은 차디차면서도 달콤한 미네랄까지 듬뿍 함유하고 있어 물배만 채워도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자연히 빛고을 인심은 넉넉해지고 이웃들 간의 돈독함이 더해갔으며, 서로 나누려는 온정도 넘쳐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빛고을에 큰 근심거리가 생겼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웬만한 불편은 서로 감수하며 지내왔던 빛고을 동물들은 이도저도 못하는 큰 곤경에 처한 것이다.
다름 아닌, 덩치가 산山만한 멧돼지가족이 빛고을로 이사를 온 뒤로 빛고을의 묵계들이 하나 둘 깨뜨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멧돼지가족한테 항의는커녕 불만마저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멧돼지가족은 덩치와 힘만 믿고 남은 안중에도 없는 듯 제멋대로 굴었다. 남의 곳간을 맘대로 뒤져 맛있는 음식을 훔쳐먹는가 하면, 아무데서나 똥오줌을 마구 쌌다. 목통도 어찌나 크던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어대었다. 아무나 붙들고 시비를 걸기도 했고, 건방지게 나이 많은 어른들한테도 함부로 대들었다.
멧돼지가족의 무례함도 눈꼴이 시렸지만, 빛고을 동물로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옹달샘이 마치 제 집의 목욕탕인양 그 안에 들어가 목욕을 즐겼고, 또 목을 축이려 다가가는 동물들에겐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물을 끼얹어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옹달샘을 목욕탕 삼아 그 안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놀고 있는 멧돼지가족을 멀찌기 떨어져서 바라보던 동물들의 마음은 마냥 무거웠다. 뿐만 아니라 멧돼지가족에 대한 원망이 점차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먼저 너구리가 멧돼지가족을 흘겨보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저것들은 어디서 굴러먹다온 뼈다귀들이야?”
이에 딱따구리도 부리에서 침을 튀겨가며 빈정거렸다.
“그 부모에 그 자식들이라고…, 어찌 식구들 모두 하나같이 철면피한지 모르겠어. 예의도 없고 게다가 뻔뻔스럽기까지 하니….”
고라니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딴엔 용기 있는 제안을 꺼냈다.
“우리가 눈 벌겋게 뜨고 이렇게 당할 수만 없지. 저 멧돼지들을 쫓아낼 방법을 찾아야 돼.”
산토끼가 큰 귀를 늘어뜨리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렇지만, 덩치나 힘으론 우리가 한꺼번에 덤빈들 가당키나 하겠나.”
족제비가 헛기침을 하고나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섰다.
“덩치나 힘으로 어림없다면,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모두들 족제비의 말에 긴장을 했다. 간사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동물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은 동물이 족제비라 여겼던 때문이다.
“머리를? 머리를 어떻게 써야 하는데?”
“저 멧돼지들이 센 힘과 커다란 덩치로 딴엔 우릴 우습게 알고 우쭐댈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둔한데다 미련한 동물임이 분명해. 그걸 이용하자는거지.”
족제비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동물일수록 미련한 반면에 지혜가 부족하리라 여겼다. 그러니 모든 동물들이 모인 자리에서 멧돼지가족에게 미련하고 지혜가 부족한 면을 일깨워 준다면, 그들 스스로도 부끄럽다 여겨 반드시 그 못된 버릇을 고치리란 생각이었다.
족제비의 계획대로 몇몇 동물대표들이 멧돼지가족을 찾아갔다. 그리고 정중한 예의를 갖추며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멧돼지님. 이제 우리 빛고을마을도 규모가 제법 커졌고, 또 많은 동물들이 모여살게 되었으니, 이제 현명한 지도자를 뽑아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멧돼지님이야 말로 힘은 장사요, 덩치도 태산만하니 지도자감으로 손색이 없다 여겨집니다.”
이 말에 아빠 멧돼지는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졌다. 명색이 동물대표들이 나서서 자신을 지도자로 뽑아주겠다는데, 그보다 더 만족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동안 자신들이 저질러온 짓들이 딴엔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고맙긴 합니다만,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른지요?”
물론, 본심에서 우러나온 겸손의 말은 아니었다. 덥석 맡겠다고 나서기보단 약간 겸손의 미덕을 보일 필요가 있다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멧돼지님. 지도자에겐 한 가지 더 갖춰야할 덕목이 있습니다.”
아빠 멧돼지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그마한 것들이 꽤나 겁없다 여겨진 것이다.
“덕목? 아니, 힘이 세고 덩치가 크면 됐지, 뭐가 또 필요하단 것이요?”
“예, 현명한 지도자에겐 여러 덕목 가운데 특히 지혜란 것도 당연히 갖춰져있어야 합니다.”
“아! 지혜 말이요? 맞아, 힘이 세고 덩치만 크다하여 현명한 지도자라 할 수는 없지.”
의외로 아빠 멧돼지도 현명한 지도자에겐 지혜가 있어야한다는 그 말에 동의했다.
따라서 동물대표들은 멧돼지가 자신들의 꾐에 빠져들고있다는 생각에 서로의 눈짓을 통해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 동물대표들이 한 가지씩 문제를 내면, 멧돼지님께서 정답을 맞히시면 됩니다. 물론 멧돼지님은 산전수전 다 겪으시고 그만큼 지혜를 갖추셨으니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봅니다만….”
“좋소. 내 비록 아는 바는 없으나 최선은 다하리다.”
아빠 멧돼지가 흔쾌히 동물대표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아침, 빛고을광장으로 동물들 모두가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일부러 이웃마을 동물들까지 모두 초대하여 광장은 그야말로 메어터질 듯 동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단상 중앙에는 예의 그 멧돼지가족이 앉고, 그 양옆으로는 문제를 출제할 나이든 동물출제위원들이 자리했다.
사회를 맡은 족제비가 멧돼지가족과 출제위원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행사의 목적을 설명했다. 그리고 본행사가 바로 이어졌다.
첫 번째 출제위원 두더지가 문제를 냈다.
“삼백이십이322 더하기 이백십사214는?”
아빠 멧돼지와 엄마 멧돼지는 물론 아들 멧돼지와 딸 멧돼지 입에서 마치 합창이라도 하는 듯 동시에 정답이 튀어나왔다.
“오백삼십육536이요!”
“네, 정답이 맞습니다.”
두더지가 정답임을 선언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빛고을광장이 떠나가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번째 출제위원 산토끼가 문제를 냈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마찬가지로 멧돼지가족 입에서 동시에 정답이 튀어나왔다.
“아마존강이며, 전체 길이가 칠천육십이7,062킬로미터요!”
“네, 정답이 맞습니다.”
박수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산토끼도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멧돼지 가족은 문제가 너무 쉽다며, 더 어려운 문제를 요구했다.
이번엔 세 번째 출제위원 올빼미가 문제를 냈다.
“에 또….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을 더하면?”
역시 멧돼지가족 입에서 동시에 정답이 튀어나왔다.
“물 한 방울이요!”
“네, 정답이 맞습니다.”
이번에도 박수소리가 요란했고, 올빼미 또한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빛고을 동물대표들은 비로소 멧돼지가족을 골려주려던 계획에 커다란 차질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멧돼지가 힘만 세고 덩치만 큰 미련한 동물이 아니라, 머리도 좋고 지혜가 많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빠 멧돼지는 그로써 명실공히 빛고을의 지도자가 되었다.
멧돼지가족을 쫓아내려했다가 되레 빛고을지도자로 앉히게 된 빛고을동물들 입장에서는 혹을 떼러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이고 돌아온 셈이었다.
그렇지만 빛고을동물들이 내심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멧돼지가족은 의젓하니 몰라보게 변했다.
남의 곳간을 함부로 뒤지는 일도 없었고, 남을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똥오줌을 아무데나 싸는 일도 없었고, 목통껏 떠드는 일도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거는 일도, 웃어른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빛고을동물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왔던 옹달샘에서 목욕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옹달샘을 되찾게 된 빛고을동물들이 하나같이 증언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세상 많이 좋아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