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충청남도 동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약 6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두었는데, 670년에 신라가 차지하여
신문왕 때 웅천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때 공주라 개칭하였고 그후 변천을 거쳐 현재는
공주시로 승격하였다.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시조는 신라때 사람인 이천일(李天一)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3년문명이 뛰어나 중국 한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대장군이 되어 흉노적 정벌에 공을세워 요동백에 봉군되어 신라로 돌아와 공산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공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천일의 36세손 우(양호공)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하여 우의 아들 저(苧)가 고려에서
대제학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사손(思孫)은 첨의정승을 지냈다.
공주 이씨의 세계는 사손(思孫)의 두 아들 엽(曄)과 서(曙)의 대에서 7파로 갈리었다.
경력공파(經歷公派)
명선 (엽의 아들)
어사공파(御史公派)
명성 (엽의 아들)
공숙공파(恭肅公派)
명덕 (엽의 아들)
지평공파(持平公派)
명보 (엽의 아들)
참의공파(參議公派)
명윤 (엽의 아들)
현감공파(縣監公派)
명의 (엽의 아들)
강양공파(剛襄公派)
부 (서(曙)의 아들)
명선의 현손 겸(謙)이 연산군때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그곳에서
정착하였으므로, 경성을 중심으로 한 관북지방에 후손들이 집중 세거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력공파 명선(明善)의 10세손 기수(麒壽), 붕수(鵬壽) 형제가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 싸움에서 순절하여 형은 부제학, 아우는 지평에 추증되었다.
원배(元培)는 명선(明善)의 18세손인데, 경서(經書)와 학행으로 이름나 정조 임금 앞에서
구경(九經)에 대한 질문 62조를 적절하게 답변하여 많은 포상을 받고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공숙공파의 파조인 명덕(明德)은 세종때 이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고, 중추원 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원사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받았다. 또한 그의 8세손 정견(廷堅), 정헌(庭憲) 형제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무공을 세워 명성을 날렸다.
강양공파 부(敷)는 조선개국 삼등공신으로 흥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11세손 도(棹)가
숙종때 부총관을 지냈다. 그외 3·1운동 민족대표인 필주(弼柱)와
지평공파 명보(明保)의 후손으로 철종때 우승지를 역임한 동발(東發),
참의공파 명윤(明尹)의 후손으로 정조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응거(應擧)가 이름났고,
현감공파 명의(明義)의 후손인 병덕(秉德)은 순조때 현감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이씨(公州李氏)는 남한에 총 6,809가구,
28,6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댓글 공주이씨의 종가집을 찾고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