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무장기포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 사적 406호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구암면 구암리 구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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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음력)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난 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로 내려와 잔혹하게 백성들을 진압하자, 일단 해산하여 이곳 무장으로 내려온 전봉준이 무장 대접주 손화중을 설득하여 농민군을 모아 전면적 봉기를 단행(음력 3월 20일)한 곳이다. 당시 무장현 동음치면 구수마을이었던 이곳 무장기포지는 사그러들 뻔했던 고부농민봉기의 불씨가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으로 다시 피어난 곳, 즉 민란에서 혁명으로 발전된 의미 깊은 곳이다. 전봉준 등 지도부가 밝힌 거사의 대의명분은 이때 발표된 <무장창의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마을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큰 팽나무인 당산나무가 있어 당산마을이라 불렸고,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구수마을보다는 당산마을이라는 이름을 즐겨 부르고 있다.
무장기포의 현장인 공음면 구암리에는 지난 94년 만들어진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비석과 '무장창의포고비'가 있으며, 2002년 고창군이 동학농민혁명 최초 기포지로서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마련한 상징 조형물등이 세워져 있다.
여시뫼봉
소재지 - 전북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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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기포의 현장 구수(당산)마을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1킬로미터 가량의 거리에 있는 여시뫼봉(弧山峰)은 표고 152m 고지에 불과한 야산이지만 무장에서 약 2Km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사방이 터지고 방위와 공격에 유리한 지형이다. 여시뫼봉은 현재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에 있는 왕제산이다. 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후 동학농민군은 서남해지방으로 진격하는데, 1894년 4월 9일(음력) 무장을 점령한 후 이곳 여시뫼봉에 진을 친다. 이곳에서 농민군들은 훈련을 받고 무장을 강화하였다고 한다.
여시뫼봉 입구에는 동학농민혁명 무장창의문을 새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무장읍성
유형문화재 2호, 16호
소재지 - 전북 고창군 무장읍 성내리 15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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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쳐서 무장진을 삼고, 그해 2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축조하였다. 무장읍성은 토축으로 만든 약 1.2Km인 장방형 평지성이다. 현재 진무루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남문과 옹성지를 갖춘 동문지가 남아있고, 폭 4m, 길이 약 574m 정도의 성 둘레를 따라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성안의 무장객사는 선조 14년 (1581)에 건립되었으며, 궐패를 모셔두고 현의 수령이 매달 초하루 보름에 배례하는 정청과, 왕명으로 지방에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의 숙소로 쓰이는 좌·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무장 동헌은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대표적 양식으로 조선 명종 20년(1565)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현감이 집무하던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장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것은 당시 무장지역의 아전들이 거의 동학교도들이었거나 자발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손화중포의 핵심적 근거지에서 부패한 정부의 상징인 관아가 무사했다는 것을 통해 핍박받는 농민들과 서리들까지를 포괄하는 민중혁명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의 조직의 폭과 깊이, 그리고 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전봉준 생가(生家)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6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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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으나, 근년의 연구성과와 학술조사 등을 통해서 새롭게 확인된 곳이 이곳 당촌이다. 현재의 생가는 2001년 고창군이 당초 밭으로 방치되어 있던 부지에 예산을 투입하여 복원한 것이다. 이곳 전봉준 생가는 1984년 갑오년 한 해 동안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우리 역사상 가장 최대의 규모이자 최초의 대규모 민중항쟁을 주도한 상징적인 인물의 생가라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여러 유적지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고창읍성
사적 제145호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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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불려지는 이성은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극복을 위한 국방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4동의 조선시대 건물과 2지(池) 4천(泉)이 있었으나 전쟁 등으로 불에 타서 없어지고 성곽과 공북루 해자, 길영천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하기 시작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 풍속이 남아 있다. 황토재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이곳 고창읍성을 점령한 뒤 옥에 갇혀있던 동학교도들을 석방하였고, 성 앞의 악덕 고리대로 유명한 부호 은대정의 집을 파괴하였다.
부안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백산성 터 (동학혁명백산창의비)
사적 제409호
소재지 -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8-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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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 20일(음력)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은 25일 백산에 모여 진을 쳤다. 이곳에서 연합농민군의 군대로서의 대오를 편성하고 격문과 4대 명의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의 대장정에 나섰다. 당시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든 농민군들이 산을 가득 메워서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으로 산이 덮이고, 일어서면 농민군들의 흰옷으로 산 전체가 흰색으로 덮혔다하여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까지 유래되었다. 산 정상에 동학혁명창의비가 세워져 있어 백산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다. 동학혁명백산창의비는 1988년 동학혁명백산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하였다.
정읍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전봉준 고택 (古宅)
사적 제293호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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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고부농민봉기를 위한 사발통문 거사 모의 때와 동학농민혁명 3월 1차 봉기를 단행할 당시 전봉준이 살았던 곳이다. 1974년 해체·보수할 때 무인 2월 26일이라 적힌 상량문이 발견되어 그 건립연대(1878년)을 추정할 수 있다. 고택은 고부농민봉기 때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의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를 복원한 것이다. 전봉준 생가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이곳을 생가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얼마 전까지 표석에 전봉준 생가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전봉준 <고택>으로 바로잡혔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고부농민봉기를 전후하여 3년 가량 살았던 집이지 태어난 곳은 아니다. 생가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 있다.
전봉준 묘역
사적 제293호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고택 옆 500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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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단비는 고택에서 약 5백 미터 떨어진 소나무 숲에 위치하고 있다. 단비는 유해가 없는 빈 무덤의 비석이다. 비문 앞면에는 태극문양과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 새겨져 있다. 원래는 단비만 있었으나 천안전씨 문중에서 1994년 이후 묘역정비를 하여 봉분과 전봉준장군운명시비를 갖추어 놓았다.
고부관아
사적 제293호
소재지 -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160번지, 고부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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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고부농민봉기의 중심지역이었다. 고부관아는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표상으로 고부봉기 때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금의 고부초등학교의 자리가 옛 고부관아 터이며 학교 바로 옆은 향교이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 고부는 정읍군에 딸린 면으로 작아졌지만 갑오년(1894년) 당시에는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정읍보다 큰 고을이었다. 봉건관리들의 탐학이 극에 달했던 상황에서 고을의 물산이 풍부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곧 관리에게 뜯길 일이 많다는 것이므로, 오히려 주민의 고달픔을 더해주는 일이었다.
군자정
지방 유형문화재 133호
소재지 -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6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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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은 못으로 둘러싸인 누정으로 창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연못의 역사는 퍽 오래된 것 같다. 이곳은 갑오년 당시 악명 높은 고부군수 조병갑 등이 가혹하게 억압과 착취를 해서 얻은 고부군민들의 고혈로 풍류와 사치를 즐기던 현장의 하나이다.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소재지 -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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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은 1893년 당시 사발통문이 작성되었던 신중리 대뫼마을 녹두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당시 고부봉기에 참여했던 이름 없는 농민들의 뜻을 함께 기리고자 1994년 건립되었다. 정읍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세운 이 탑은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안에 5미터 크기의 주탑과 주탑을 둘러싼 1-2미터 크기의 보조 탑 32개로 되어 있다. 보조 탑에는 각각 무명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과 당시 무기로 사용했던 농기구 등을 새겨 놓았다.
사발통문 작성 터
소재지 -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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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1월 전봉준 등 20여 명에 의해 갑오년 사발통문 거사계획이 수립되었던 곳이다. 사발통문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죽이고 전주감영을 함락시켜 서울로 가자는 혁명적 모의가 결의되어 있으며, 이런 내용을 각 마을 집강에게 보냈다. 사발통문이 작성된지 두 달 후인 1894년 1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현재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마을 입구에 당시 사발통문 거사를 기념하기 위한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져 있다.
손화중 묘역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상평동 음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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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상평동 음성리에 있는 동학농민군 총영관이었던 손화중 묘역은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단, 그리고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묘소 앞과 좌우로는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전봉준 공원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쌍암동, 내장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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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내장산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이 공원은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읍시에서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1894년을 의미하는 높이 18,94미터의 주탑이 건립되어 있고, 둥근 보조탑 4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주변에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탑 왼쪽에는 자연석으로 '전봉준 공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말목장터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면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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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목장터는 현재 정읍시 이평면 소재지의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이다. 익산 군수로 발령을 받은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부임해오자 전봉준은 통문을 돌려 1894년 1월 9일(음력) 밤 농민들을 이곳 말목장터에 모이게 한다. 곧이어 이곳 말목장터에 모인 농민들에게 부근마을 민가에 미리 준비해 둔 죽창 수백 개로 무장하게 하여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다. 고부농민봉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는 현재 농민들의 집결지였던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흔적은 없으나, 그때에도 그곳에 서 있었다는 감나무가 얼마전까지 장터 한 귀퉁이에 서 있었으나 현재는 이 감나무조차 수명을 다해 치워져 있다. 이곳 말목장터는 고부농민봉기 당시 농민군 진지이자 중요한 지역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예동마을 (만석보 파보 선정비)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97-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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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동마을은 만석보유지비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말목장터 방향으로 1키로미터 떨어진 지점인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부농민봉기 때인 1894년 1월 9일 밤(음력) 예동마을에는 고부농민 5백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곧 말목장터를 거쳐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예동마을 입구에는 1898년 당시 고부군수 안길수가 만석보 파괴를 기념하는 만석보파보선정비가 서 있다.
황토재 전적지
사적 제295호
소재지 - 전북 정읍시 덕천군 하학리 산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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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재는 현재 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35미터의 낮은 구릉지다. 이곳에서 1894년 4월 7일(음력)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황토재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군대와 맞서 승전을 거둔 현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곳 황토재 마루에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1963년 박정희 정권 때 세워진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관리사업소에서 관리하고 있는 이곳은 전봉준 동상과 사당, 기념관, 교육관, 광장, 주차장 등이 갖춰져 있고, 2004년에는 기존의 기념관을 대체할 대규모의 전시관 개관을 앞두고 공사가 한창이다.
만석보 유지비
지방기념물 제33호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66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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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인에서 고부로 가는 약 4km 지점의 동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류에 보를 쌓았던 흔적이 있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 농민들이 쌓은 만석보가 있었다. 만석보는 광산보 또는 예동보라고도 했는데, 아무리 가뭄이 깊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에는 풍년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만석보라고 불렀다. 갑오년 당시 조병갑은 동진강 상류에 민보(광산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그 하류에 새로운 보(만석보)를 쌓게 하고 수세를 징수하였다. 만석보는 고부봉기를 유발한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이다. 현재는 만석보의 흔적이나 형태가 전무한 상태이며, 1973년 건립한 만석보유지비와 최근에 세운 시비(詩碑)가 서 있다.
태인(성황산) 전투 터
소재지 - 전북 정읍시 태인면 대성리 1번지 성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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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태인면에 위치한 성황산은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의 최후 격전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원평 구미란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1894년 11월 27일 이 곳에 진을 친 후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싸웠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이 곳 전투에서의 패배로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완전히 해산하게 되었다.
조규순 공적비
소재지 -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1번지, 피향정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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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순 공적비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친으로 태인현감을 지낸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 이는 조병갑이 자신의 아버지의 영세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부백성으로부터 1천량을 수탈하여 세운 것으로 농민들의 원성을 샀던 문제의 비석으로, 글자 그대로 영원히 잊지 못할 역사적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는 비이다. 이 비는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 경내에 있다.
최경선 묘역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칠보면 축현리 산73-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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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시 칠보면 축현리에 있는 동학농민군의 영솔장이었던 최경선의 묘역은 커다란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단과 비석, 사발통문석, 그리고 봉분 뒤의 배경이 되는 11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 조형물은 무명농민군의 영혼이 땅 속에서 그림자로 연결되고 그림자가 다시 농민군의 모습으로 부활하여 장군을 호위하는 형태로 제작되어 동학농민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역사이며 오늘날 우리가 이어가야 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임을 말해 주고 있다.
김개남 잡힌 곳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상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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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은 1894년 12월 1일(음력) 전봉준이 체포된 피노리 인근에 있는 이곳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은신하던 중, 반농민군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김개남은 서울로 압송되지 않고 전라감사에 의해 전주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당시 대역 죄인은 서울까지 압송하여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전라감사는 김개남의 혁명적 열정과 서릿발같은 기개가 두려워 전주에서 서둘러 처형했다고 한다
김개남 고택 터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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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묘역이 있는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뒷쪽에 고택 터라고 알려진 곳에는 현재 '김개남 장군 생가 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오래 방치되어 행랑채만 남아 있는 곳은 생가가 아닌 살던 집(고택)이고, 생가 터는 현재 밭으로 이용되는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개남 묘역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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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 있는 김개남 묘역은 후손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묘역에는 제단과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묘소 앞 좌우로는 장군석이 배치되어 있다.
김제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금구·원평집회 터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계리 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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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893년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집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열리고 있을 때, 호남지방 동학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금구·원평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이 집회는 전봉준이 중심이 되었고 손화중도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교조의 신원을 위해 계획된 보은집회와는 달리 금구·원평집회에서는 '척왜양' 등의 기치가 전면에 내걸린 정치집회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김덕명 묘역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장흥리 안정절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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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묘역 앞에 서 있는 묘비에는 '의사언양김공덕명지묘'라고 되어 있다. 이곳 묘역의 맨 아래에 있는 묘는 부인 이씨의 무덤이고, 가운데 둘레석이 있는 것이 김덕명의 무덤이다.
김덕명 추모비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계리 원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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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금구 대접주 김덕명의 추모비는 80년대 중반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추모비 뒷편에는 당시 희생된 동학농민혁명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각이 세워져 있다. 추모비가 있는 이곳 남쪽 언덕에는 구미란전투 당시 전사한 수백명의 농민군을 묻었다는 무덤들이 남아 있다.
구미란 전투 터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원평리 산1,3번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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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구미란은 우금재전투에서 패배한 후 수세에 몰린 동학농민군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재기를 위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곳 원평 구미란 전투지는 무명농민군의 억울한 죽음과 패퇴한 전투지로서의 의미를 갖는 곳이다. 공주 우금재전투에서 패퇴한 농민군이 1894년 11월 25일(음력)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결전을 벌였던 곳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지칠대로 지친 농민군은 우수한 화력을 가진 연합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며 이곳에서도 패하고 말았다. 현재 소나무 숲 사이로 무명농민군의 작은 봉분들이 수십 기 남아 있다.
전주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기념비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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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전주입성 기념비는 동학농민군 전주성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유일한 기념물이다.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완산칠봉에 조성되어 있는 완산공원 내에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상징적인 측면으로나 실제적인 측면으로나 동학농민혁명 전과정을 걸쳐 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다.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완산은 전주성을 둘러싸고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스스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경기전·조경묘
유형문화재 2호, 16호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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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4년(1414)에 건립되었다. 조경묘는 경기전 담 밖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자 전라감사 김문현 등은 경기전에 있던 이태조 영정과 조경묘 위패를 받들어 옮겨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하였다. 경기전과 조경묘가 있던 이곳 전주는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의지와 봉건적인 규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현장이다.
전주성 서문(西門) 터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파출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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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4월 27일(음) 동학농민군은 용머리고개를 넘어 이곳 서문을 통해 전주성으로 들어왔다. 전주성은 조선초기에 전라도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그 후 영조 10년(1734) 조현명에 의해 개축되었다. 오늘날 전주성은 없어졌으나 동학농민군이 들어왔던 서문 터인 현재 다가동 파출소 앞에는 전주성 서문지(西門址) 표석이 세워져 있어 그날의 역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동학혁명기념관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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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풍남동에 있는 동학혁명기념관은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이던 1994년 천도교에서 건립하였다. 지하 1층, 지상 2층 콘크리트 건물인 이 기념관은 2층 전시실에는 이종학씨가 기증한 사료들과 동학농민혁명 자료 등 400여점의 사진·서책·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용머리 고개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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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원평·삼천을 거쳐 이 고개를 지나 전주성에 들어왔다. 용머리 고개는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농민군과 관군과의 접전인 완산전투가 벌어진 전투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과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변해버리고 말았지만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진입에 따른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의미있는 곳이다.
전주성 풍남문
보물 제308호
소재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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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전주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 영조 44년(1768)에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남문은 성벽의 일부인 석축기대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세운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으로 현재 전주 4대 성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문이자 성터의 흔적이다. 동학농민군은 당시 서문을 통해 입성하였으나 서문이 남아있지 못해서 이곳 남문을 통해 당시 농민군 전주입성과 완산전투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적이다.
덕진공원
소재지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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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공원은 전주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유적은 없으나 이곳에는 동학농민혁명의 3대 장수라고 일컬어지는 전봉준·손화중·김개남 세 장군을 기리는 기념물이 후대들에 의해 모셔져 있다. 이곳 덕진공원에는 전봉준 장군 동상과 함께 김개남·손화중 장군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완주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삼례봉기 기념비
소재지 - 소재지 -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삼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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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승리를 이용하여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1894년 9월(음력) 동학농민군은 이곳 삼례에서 '척왜양창의'의 기치 아래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단행했다. 우리 나라 한일의병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번져나간 기점이 되었던 2차 삼례봉기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 기념사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6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를 건립하여 향후 기념사업의 단초를 열여놓았다. 2차 삼례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이 기념비는 삼례읍 삼례리 삼례입구에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삼례역참 터
소재지 -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곰멀마을, 동부교회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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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역참은 중앙과 지방의 물자 및 사신 왕래 등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13개 역을 관할하며 조정의 명령이나 지방관리의 보고, 군사적 통신 등을 관장한 호남 최대의 역참이었다. 삼례역은1892년 삼례집회의 현장이었으며, 1894년 9월 재봉기의 거점이었던 민족운동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으로, 현재 삼례 동부교회 위치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삼례집회에 1천여 명이 10여일 이상 집결하고 있었으며, 9월 삼례 봉기에는 4천여 명이 한 달 이상 주둔하고 있었던 곳으로, 당시 동학농민군의 집결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대둔산 최후 항전지
소재지 -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 15-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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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원광대학교 사학과 조사단에 의해 발견된 이곳 대둔산 전투지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뒤,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곳이다. 이곳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문헌에 기록된 최후의 항전지이며,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 중 유일하게 전투현장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대둔산의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이후 1894년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1월말까지 약 3개월 동안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소멸되어 사라진 뒤에도 끝까지 남아 농민혁명의 저항정신을 보여주었다.
임실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최시형 은둔지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새목티
임실군 청웅면 새목티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9월 재봉기 이후 우금치전투 등 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의 대부분을 여기에서 머물며 상황을 주시하였다. 전라도 농민군이 재봉기하자 최시형은 충청도 일대 교인들의 봉기를 지시하고 남원을 지나 이곳 청웅면 조항리 교인 허선의 집에 12월 초순까지 머물다가 이곳으로 찾아온 손병희를 만나 충청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순창 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전봉준 잡힌 곳
소재지 -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전봉준은 태인전투에서 패배한 후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태인에서 정읍 입암산성을 거쳐 12월 2일 이곳 쌍치면 피노리(현 쌍암리)로 숨어 었다가 옛 부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전봉준은 순창으로 이송되어 곧 나주,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가 체포된 곳으로 혁명의 마지막 유적지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현재 이곳은 개인 소유의 양옥집이다.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교룡산성
전라북도기념물 제9호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성은 남원시 서북쪽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3,120m이고, 현재 문지, 수구, 옹성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남원지역 20여 개의 산성 중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성으로 백제 때 신라와 대적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하며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장 처영이 크게 수축하였다. 이곳은 동학창시자 최제우의 은둔 포교지이자 수행지인 은적암이 있어 동학과 관련된 유적지일뿐더러,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에서는 남원일대 농민군의 군사적 거점지였다. 갑오년 당시 김개남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는 남원성을 공략한 뒤, 이 곳 교룡산성을 증축하여 남원의 외곽을 튼튼히 방비하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