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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 김영기
엄마가 이른 새벽부터 아침을 준비하신다. 내가 4학년이 되어 나까지 점심도시락을 싸면서 모두 네 개가 되었다. 우리 집은 언니 셋, 나, 남동생 하나로 모두 1남 4녀다. 이제 막 1학년이 된 남동생은 오전 수업만 하니까 도시락은 안 싼다. 엄마는 내 도시락을 새로 사 주셨다. 뭐 예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도시락은 넓적한 네모 모양에 밥 칸이 넓고 위쪽에 칸막이를 둬 반찬을 넣게 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가 밥솥에 밥을 퍼 도시락에 넣는 것을 구경했다. 우선 밥을 주걱으로 푹 떠서 도시락 한가운데에 넣은 다음 살살 폈다. 어찌나 손놀림이 빠른지 순식간에 도시락은 빈 부분 없이 꽉 찼다.
“영기야, 여기에 김치 좀 담아라.”
엄마는 내가 옆에 있으니까 일을 시키시고 싶은 가보다. 나는 정신이 번뜩 들어 김치를 가지고와 정성들여 반찬 칸에 김치를 담았다.
“도시락 뚜껑은 나중에 닫아야지. 밥 쉰다.”
내가 도시락 뚜껑을 닫으려니까 엄마가 어느새 보고 말을 건네셨다. 우리 가족이 아침을 먹는 동안 도시락들은 천장을 보고 밥이 식기를 기다린다.
셋째 언니랑 손잡고 학교를 간다. 우리집은 창성동 콩나물고개 말랭이 집에서 3학년 때 수송동 새 집으로 이사를 왔다. 셋째 언니가 있어서 나는 전학을 안 가고 계속 중앙초등학교에 함께 다녔다. 내년에 셋째 언니가 중학교에 가면 언니가 어느 중학교에 가나 봐서 내 학교를 옮기기로 했다. 중앙초등학교는 아주 넓고 크다. 나는 구 건물로 들어가고 셋째 언니는 이번에 새로 지은 새 건물로 들어갔다. 새 건물 벽면에는 사람이 몸을 구부려 공을 굴리는 모습이 타일로 붙여있어 더 멋있다. 우리 교실은 구 건물 중에도 1층 끝 가장 구석이어서 부서진 책상이나 걸상들이 계단 밑 공간에 쌓여있었다. 겨울에 우리 할머니 담임선생님은 그걸 가져다가 난로 속에 넣어 우리 반만 늘 따뜻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도시락을 열었다. 김치가 새어나와 밥에 빨간 물이 들어있었고 김치가 시어 냄새도 시큼했다. 옆 짝꿍을 보니 달걀말이 반찬에 소시지 계란부침이 반찬통에 따로 들어 있었다. 또 김치를 가지고 온 친구는 깜찍한 작은 병에 담아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내 도시락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도시락을 책상위에서 내 무릎위로 옮기고 책상 밑에서 젓가락을 조용히 움직이며 밥을 먹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한테 와서 도시락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 밥하고 우리에게 밥을 주고 청과물 시장에 가서 하루 종일 과일을 팔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도 나는 도시락을 무릎위에다 놓고 혼자서 밥을 먹었다. 다른 친구들은 세 네 명씩 모여 이야기도 하고 갑자기 뭐가 재밌는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냥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이 밥을 얼른 먹어버렸으면 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꽤 잘 했다. 1학년 때 선생님께서 공부 잘하는 비법을 알려주셨는데 그 때까지 충실하게 그 비법을 실천을 했기 때문이다. 그 비법은 선생님 눈을 따라 가라는 것. 나는 수업시간에 항상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선생님한테 혼날 일도, 문제가 틀릴 일도 없었다. 나는 항상 선생님이 과제를 내 주면 금방 끝내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우리 반 할머니 선생님은 그런 내가 대견했는지 나를 예뻐해 주시고 수학경시 반을 만들어 따로 가르치실 때 나를 그 반에 넣어 주셨다. 수정이도 수학경시 반에 들어왔다.
수정이는 고무줄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애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그리고 늘 하얀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나는 원래 조용한 성격이라 처음에 친구 사귀기가 힘들었다.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별로 안 친한 애라 4학년 때는 그냥 친구 없이 다녔는데 갑자기 수정이가 먼저 나한테 다가왔다. 나는 고무줄도 못하는데 같이 고무줄을 하자는 것이다.
“그럼 월화수목금토일은 알지?”
하면서 고무줄의 기본 중의 기본을 나하고 함께 해 줬다. 나는 집에 가서 언니랑 고무줄 연습을 아주 많이 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내가 또 무릎 위에 도시락을 놓고 밥을 먹고 있는 데 수정이가 도시락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영기야, 이거 한번 먹어봐.”
소시지 반찬이다.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정이를 쳐다보았다. 수정이는 내 무릎을 힐끗 보고는 나도 김치 먹어 볼래 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시락을 책상위에 올렸다.
“이야~. 니네 김치 진짜 맛있다.”
수정이가 우리집 김치를 젓가락에 집어 맛깔스럽게 입에 넣고 이렇게 얘기하니까 다른 친구들도 와서 하나씩 집어 먹었다. 다들 맛있다면서 먹고 나에게는 자기네들 반찬 하나씩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행복한 점심시간이 또 있었을까....내 김치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얼마 후 수학 경시대회 모의고사가 수업이 다 끝나고 있었다. 경시대회에 나가는 아이들은 서로 보지 못하게 한 줄로 쭉 앉아서 시험지를 풀었다. 내 뒤에는 요즘 나랑 부쩍 친해진 수정이가 앉아 있었다. 문제는 어렵지만 조금씩 풀려나갔다. 한참을 문제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수정이가 뒤에서 쿡쿡 찌르더니 쪽지하나를 건넸다.
“이거 보고 풀어.”
선생님은 선생님 책상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시느라 수정이 말을 잘 못 들었다.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쪽지를 펼쳐보니 내가 잘 몰랐던 그 문제의 해법이 써있었다. 아....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이 수정이는 나를 또 쿡쿡 찔렀다.
“영기야, 시험지 좀 보여줘. 옆으로 좀 비켜봐.”
나는 받은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비켜 내가 푼 답들을 수정이가 잘 볼 수 있게 옆으로 비켜주었다. 수정이는 빠르게 답을 베꼈다.
집으로 오늘 길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수정이가 여태까지 수학 100점 맞은 것은 이렇게 해서 맞은 거구나. 수정이가 나에게 갑자기 친하게 한 것도 속셈이 있어서 그런 거구나. 수정이는 내 친구일까? 내가 계속 수정이랑 친하게 지내야 할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샘솟듯 퐁퐁 튀어나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나는 점심 먹고 나서 고무줄을 하지 않았다. 그냥 혼자 교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소공녀 책을 읽었다. 내가 태도를 바꾸자 수정이도 나를 힐끗 보고는 자기네 패거리들과 함께 나가 고무줄을 했다. 나는 선생님께 수정이의 행동에 대해 이르지 않았다. 그냥 그 이후로 수정이를 멀리했다. 다행히 얌전한 다른 친구랑 사귀게 되어 교실에서 놀았다. 수학경시대회는 끝났다. 수정이도 나도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책상에 자랑스럽게 도시락을 올려두고 밥을 먹는다. 우리 반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는 우리 집 김치다.
*공기청정기 대 빨래 건조기 / 김영기
“오늘은 미세먼지 수준이 나쁨 수준이오니 외출하실 때 꼭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 연일 중국발 황사가 밀려오면서 또랑또랑한 기상 캐스터가 미세먼지 수준을 알려준다. 남편은 출근할 때 애들 마스크는 꼭 씌워서 학교 보내라고 신신당부하고 자기도 마스크를 쓰고 나간다. 남편은 매사에 조심성이 있고 걱정이 많다. 남편 성격상 미세먼지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남편은 한 달 정도 계속 공기청정기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다. 한번은 사고 싶은 공기청정기를 캡처해 내 카톡으로 보내기도 했다.
나는 우리 집은 공기청정기 따위는 필요 없다며 버텼다. 우리 집은 군산에서도 알아주는 공기 좋은 은파 호수 바로 앞에 있다. 더러운 공기는 호수와 나무가 정화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공기란 여기저기 드나드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공기 청정기로 잠깐 돌린다고 공기를 다 정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봄에 중국에서 황사가 날아와 우리나라 대기 질에 영향을 준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갑자기 뉴스에서 미세먼지를 놓고 떠드는 것은 대기업이 공기청정기 팔아먹으려고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이게 공기청정기 구입에 대한 나의 입장이었다. 이런 논리로 한 달 간 잘 버텼는데 남편은 끝내 공기청정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 집 빨래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우리 시어머니께서 첫째 아이를 봐 주실 때 우리 집 살림까지 해주셨는데 ‘다른 일은 다 차치하더라도 너희 집 빨래는 너무 힘들더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아이고 어른이고 한번만 입고 홀라당 벗어놓는 통에 하루만 세탁기를 안 돌려도 여기저기 수부기 쌓여있는 빨래거리를 보면 골치가 다 아프다. 내가 어렸을 땐 누구나 옷 한 번 입으면 일주일은 기본으로 입고 다녔고 목 언저리, 옷소매가 새까매도 부끄럽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 깔끔 떤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연휴에 남편이 사려고 마음먹은 공기청정기를 사러 하이마트에 갔다. 그런데 하이마트 입구에 빨래건조기가 있는 게 아닌가....나는 공기청정기보다 빨래 건조기에 마음이 훅 갔다. 나의 고민을 한방에 날려줄 빨래 건조기.... 빨래는 세탁기를 돌리는 것보다 말리는데 손이 더 많이 간다. 우선 세탁기에서 꺼내서 탁탁 털고 옷 한 장 한 장 팔과 머리를 들어 올려 건조대에 널어야 한다. 건조대는 늘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면 여기저기 빨래 사이사이에 양말이나 속옷 등 작은 것들을 잘 끼워 놓아야 한다. 그러고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꼬박 하루, 혹은 이틀을 기다린다. 비가 오거나 우중충한 날씨에는 잘 마르지도 않고 빨아놓은 빨래에서 쿰쿰한 냄새까지 난다. 빨래 때문에 일부러 조금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남편이 문단속한다고 닫았을 땐 십중팔구 말린 옷에서는 고리고리한 냄새가 나서 다시 빨아야한다. 이럴 땐 내가 빨래를 괜히 돌렸나.... 일기예보 좀 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작년 서울 사는 셋째 언니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언니가 빨래 건조기를 샀다며 정말 편하다고 자랑을 했다. 언니네 것은 가스로 하는 열풍 건조기인데 세탁하고 건조기에 넣은 후 1시간 내에 빨래가 마르고 가스비도 한 달에 만 원밖에 안 나온다는 것이다. 빨래를 개고 있는 언니에게 형부가 “건조기로 말리니까 팬티도 한 장만 있으면 되겠어.”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이마트 직원이 공기청정기 필요성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건조기 생각뿐이었다. 남편은 60만원이 넘는 공기청정기를 결국 샀다. 공기청정기 값을 결재하며 나는 슬쩍 직원에서 건조기는 가격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다. 특가105만원.
‘나 건조기 살래.’ 했더니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처럼 빨래 잘 마르는 집에 건조기가 왜 필요해?”
“빨래 널기 힘들단 말이야.”
“내가 널을 게.”
결국 남편이 앞으로 빨래 널기로 하고 우리 가족은 공기청정기만 들고 하이마트를 나왔다. 집에 와서 남편은 자신의 선택에 꽤 만족한 듯 미세먼지 뉴스만 나오면 이렇게 말했다.
“이럴 때 우리 집에 공기청정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이방 저방 공기청청기를 옮겨가며 틀어놓으면서도 빨래는 여전히 세탁기에서 내 손을 거쳐 건조대로 건조대에서 내 손을 거쳐 옷장으로 들어간다. 내 생각엔 우리 집에 진짜 필요한 물건은 빨래 건조기이다.
* 비오는 날 아침 / 김영기
아침에 늦잠을 잤다. 우리 집은 남동향이어서 맑은 날은 쨍하는 햇살 때문에 늦잠을 잘래야 잘 수가 없다. 하늘이 희뿌옇다. 남편을 깨워 직장에 보내고 9살 큰아들을 깨운다. 이 녀석은 강적이라 웬만큼 해서 일어날 기미도 안 보인다. 아들 다리를 양 손으로 잡고 침대에서 끌어내린 다음 머리를 받쳐 화장실에 밀어 넣었다. 자칫 방심하면 화장실에서 다시 튀어 나와 이불 속에 뛰어들어 뒹굴기 때문에 이 때만큼은 도끼눈을 뜨고 잘 감시를 해야 한다. 몽둥이를 들고 있으면 더욱 효과적이다.
2단계. 밥 먹이기. 요즘 엄마들은 그냥 굶겨서도 학교를 보낸다고들 하는데 나는 이것만큼은 용납이 안 된다. 나도 겪어 봤지만 굶고 가는 날은 2교시쯤부터 배가 고파져서 3교시에 절정을 이루고 4교시가 지나면 배고픔이 사라지고 점심시간 밥맛이 하나도 없다. 공부하러 가는데 2교시부터 배가 고프다면 그게 어디 공부가 되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아들 입에 밥을 밀어 넣는다. 아들은 마네킹처럼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고 내가 수저를 바삐 놀려 밥을 입속에 밀어 넣어 주건만, 그놈의 녀석은 나무 늘보마냥 천천히 씹고 있다. 으.... 속터져. 한바탕 홱 소리를 질러주면 조금 씹는 속도가 빨라진다. 어느 정도 밥을 먹으면 옷을 입혀 집 밖으로 내보낸다.
“오늘도 또 지각하겠네. 얼른 가!”
아이를 밀어 내고 한 시름 놓고 있으면 띵동. 조금 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엄마 실내화 주머니 안 가져갔어.”
‘으....오늘도 지각하겠구나....나는 어렸을 때 안 그런 거 같은데 애가 왜 이렇게 느리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둘째 아이를 씻기고 밥 먹여서 어린이집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현관 앞을 나서려는데 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차, 경필이 우산 안 가져갔는데....이 비를 다 맞고 학교 갔겠네....’
얼른 우산 두 개를 집에서 가져와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큰아이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실내화 주머니 가지러 왔을 때 우산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은 아이들이 서로 활동을 하느라 시끌벅적하다. 비 오는 날 교실은 맑은 날 보다 더 소리가 울리고 시끄럽다. 아이들도 더 말도 안 듣고.... 경필이와 눈이 마주치려고 노력한 끝에 경필이 친구가 경필이 옆구리를 쿡 찍어 내가 있는 쪽을 가리켜주었다.
“경필아, 우산.”
아들에게 우산을 건네는데 아들이 다른 우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경민이 선생님이 나 아침에 뛰어가는데 쓰고 가라고 우산 줬어.”
“어머, 고맙네.... 그럼 이거 쓰고 선생님 우산은 내가 가져다줄게.”
이런 고마울데가.... 덜렁대는 엄마의 부족한 점을 채워준 경민이 선생님이 고맙다.
어렸을 때 갑자기 비가 오면 학교 현관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우두커니 서서 고민할 때가 생각난다. 이럴 때 친구 엄마가 우산을 건네주시며 받고 가라고 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친구는 엄마와 한 우산을 쓰고 가고 나는 친구 엄마의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갔던 것이 기억난다. 비가 올 때 나도 내 우산을 나눠준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니 잘 생각이 안 난다. ‘같이 쓰고 갈까요?’ 하고 말할 용기가 없어 머뭇대다가 그냥 지나친 적은 있는 것 같다. 다음에 또 비가 오면 우산을 여분으로 준비했다가 비 맞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 우산 쓰고 가세요.’하고 말해주고 싶다.
*고마워요. 윤진씨/김영기
“띵동~”
‘이 낮 시간에 누가 우리 집을 찾아왔지?’
현관문을 열어보니 아래층 아주머니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예쁜 접시에 담아 가지고 왔다.
“만들다 보니 양이 많아서 하나 가져왔어요.”
“아! 정말 맛있겠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머니가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문을 닫았다. 요즘 같은 아파트 시대에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먹다니....남는 음식이 있어도 주면 싫어할까봐 말도 못 꺼내고 겨우 목인사만 하고 지냈는데 이렇게 먼저 음식을 가져다주니 너무 고마웠다. 감사란 이렇게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호의를 받아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는 것이 아닐까? 무거운 물건을 들고 왔는데 문을 열어 준다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준다거나 하는 아주 사소한 호의라도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은 감사하다.
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 그건 별로 고마운 마음이 안 생긴다. 혹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짐을 지고 있다면 작은 짐을 들고 있는 사람한테는 고맙다는 생각이 안 든다. 지금 남편이 그렇다. 남편이 우리 집에서 하는 일은 주로 쓰레기 버리기다. 거기에 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아이 돌보기, 공부시키기, 요리, 설거지, 빨래, 청소다. 지금은 휴직중이라 낮 시간에 집안일을 하고 조금 쉴 수 있지만 맞벌이로 똑같이 돈을 벌고 있을 때도 집안의 역할 분담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은커녕 늘 원망하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남편이 아주 안 고맙지는 않다. 가끔 청소도 하고, 빨래도 널어주고, 아이들과도 놀아주어 감사하는 마음이 들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아이에게 화를 낸다거나 나에게 힘들다고 투덜대는 통에 고마운 마음은 싹 날아가고 다시 그러면 그렇지....하는 체념이 든다.
이번 주의 글 주제가 ‘고마워요, 남편’이라 열심히 고민하고 기억을 들춰보았다. 남편이 결혼 전, 결혼 후, 첫 아기 가질 때, 병원 입원했을 때 고마운 적이 없지 않다. 그런데 지금 내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니 남편이 고맙다는 글이 써지지가 않았다. 지난 토요일 서울에서 사촌 조카 결혼식이 있었다. 촌수가 머니 안가도 되는 거였는데 세 언니들과 엄마랑 1박2일로 서울에서 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떠나는 아침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남편, 나 이번 주 글 주제가 ‘고마워요, 남편’인데 고마운 게 생각이 안 나네. 나 놀러갔다 돌아오면 화내지 않고 ‘잘 다녀왔어?’그러면 그 글 쓸 수 있을 거 같애.”
서울에 1박 2일 있는 동안 언니들과 엄마랑 맛있는 것도 먹고 마사지도 받고 쇼핑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평생 이렇게 언니들이랑 엄마랑 놀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려니 아이 둘을 보느라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을 남편이 걱정되었다. 1박 2일 동안 남편은 단 한 번도 전화나 문자를 하지 않았다.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남편에게 전화했는데 아주 짧게 응,응 만 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둘째 아이는 자고 있고 큰 아이는 놀이터에서 친구랑 노느라 집에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선수를 쳤다.
“애들 보느라 애썼어. 고마워.”
“이제 나는 좀 쉬어야겠네.”
남편은 이렇게 말하면서 얼른 신발을 신고 나가려고 했다. 나는 나가려는 남편을 현관문 앞에서 잡고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하고 물었다.
“잘 다녀왔어?”
1박2일 동안 아이들을 돌봐준 남편이 고맙다. 내가 마음속에서 막 우러나는 그런 고마움은 아니지만, 옆구리 쿡 찔러 받는 고마움이지만 고맙긴 고맙다.
*명화와 효정이
나는 대학을 한번 졸업하고 직장 2년에 재수까지 해서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교대에 들어온 01학번들과는 7살 차이가 났다. 광주 교대에는 학생 기숙사가 있어 개강하기 전에 서울에서 짐을 빼고 그쪽으로 이사를 했다. 광주 교대 개강하고 첫째 주 주말이었다. 개강 첫 주라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은 거의 집에 갔다. 나는 어차피 집에 가면 엄마가 대학 두 번씩이나 가고 잘하는 짓이라며 잔소리할 게 뻔하기 때문에 집에 가기 싫었다. 내 룸메이트는 마르고 예쁘긴 한데 말이 별로 없고 새초롬한 애였다. 과학과 애였는데 졸업할 때까지 그 애하고는 별로 말을 섞어본 적이 없다. 룸메도 집에 가서 기숙사 방에 나 혼자였다. 기숙사는 복도식이고 방들 중간에 공동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어 누가 씻으러 가면 슬리퍼 끄는 소리가 방에서도 들리는데 그날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무 심심해, 오늘 같은 날 혹시 나 같은 애가 또 있지 않을까? 하고 기숙사를 뒤져보기로 했다. 내 방은 302호. 301호부터 똑똑하고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다. 303호, 304호....310호. 아무도 없다. 311호. 똑똑.
“네~누구세요~”
“아....저기 그냥....”
사실 똑똑한 이유를 뭐라 말하기가 참 그랬다. 문이 열리고 01학번치고는 좀 나이 있어 보이는 애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얘도 예비역인가?’
이름이 조명화였다. 놀랍게도 그 애는 현역이었다. 명화는 이렇게 어리숙하고 순진한 애가 또 있을까 싶게 웃는 얼굴이 해 맑았다. ‘언니~’하고 웃으면 현역은 현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명화 얼굴은 이상하게 나이 들어 보여서 왠지 나보다 훨씬 언니가 ‘언니~’라고 부르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명화야, 우리 이 기숙사에 또 누가 있는지 찾아볼까?”
“그래요. 언니~.”
언니~하고 길게 빼는 콧소리가 사랑스럽다. 아까 혼자 조심스럽게 기숙사 문을 두드릴 때와는 다르게 명화가 옆에 있으니 든든했다. 우리는 꼬마 개구쟁이들이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기숙사를 탐험했다. 3층에는 나하고 명화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2층으로 내려갔다. 한참 문을 두드렸는데 207호에 누가 있었다.
“누구세요?”
딱 보기에도 현역인 이쁘장한 애가 문을 열었다. 우리 둘은 207호에 같이 들어가 우리가 찾아온 이야기를 했다. 이름은 김효정. 효정이는 한센병환자들이 사는 소록도로 들어가기 전 마을인 녹동에서 왔다고 했다. 전라남도 사투리가 구수하다. 그 개강 첫 주, 우리는 기숙사에서 주는 밥도 셋이서 같이 먹고 여기저기 학교도 둘러보러 다녔다. 보통 교대 아이들은 자기랑 같은 과 애들하고만 친했는데 내가 과가 다른 명화와 효정이와 친한 걸 보고 우리과 애들이 궁금해서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면 난 늘 ‘응, 특별한 사연이 있어.’ 라고 대답했다. 광주 교대 4년 내내 명화와 효정이는 내 든든한 친구였다.
*세 잎 클로버/김영기
은파로 아침 운동을 나갔다. 집 밖을 나서면 이렇게 멋진 호수와 산책길의 호사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살짝 부는 바람에 반짝이는 호수와 풍겨오는 꽃향기에 감격한다. 오늘로 운동 5일째. 아침에 밀린 집안일을 해 볼까 하다가 그냥 무작정 나와 버렸다. 인라인 스케이트장을 돌고 메타세콰이어 길을 지나 물빛 광장의 햇살을 받고 은파 제1주차장 운동기구 있는 곳으로 가서 잠시 운동기구에 뻣뻣해진 몸을 맡겨본다. 아! 개운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발걸음을 조금 빨리해서 걸어본다. 가다가 세 잎 클로버가 아침이슬에 살짝 젖어있다. 크고 싱싱한 이파리에 손이 간다. 나는 잎 하나를 살짝 뜯었다. 클로버 줄기를 손가락으로 집어 살살 돌리면서 신나게 걷는다.
물빛 광장 옆을 지날 때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광장 무대에서 둘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에 지나다니는 어르신들도 많은데 꽤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저절로 눈길이 갔다. 여학생 한 명과 남학생 네 명. 하나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는 가던 길을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그냥 지나가야 하나 말아야하나? 에잇, 내 일도 아니잖아. 아니지, 할 말을 해 줘야지....’
광장 중간 정도까지 걸어갔을 때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곤 무대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내가 무대 가까이에 갈 때까지 청년들은 계속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파 공원 전 지역은 금연이에요. 가실 때 뒤처리를 잘 하고 갔으면 좋겠어요.”
나는 떨렸지만 청년들을 바라보며 비교적 단호하게 말했다.
“네....잘 하고 가겠습니다.”
술 취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커다란 눈이 순해 보이는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그대로 뒤돌아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계속 걸었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가장 미스테리한 것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청년들을 그냥 지나쳤나’이다.
‘왜 사람들은 잘못한 일을 보고도 아무 말도 못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요즘 사람들은 너무 자기 위주이다.
‘내 일이 아니니까 누군가 맡은 사람이 하겠지.’
‘내가 괜히 참견해서 잘못되면 어떻게 해. 그냥 지나가자.’
나는 올바른 시민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촛불 집회를 보며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는 살아있는 시민이 부족한 것 같다. 지금은 조금 기분 나쁘더라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할 시민이 필요하다. 대통령 옆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도 진심어린 충고를 할 수 있는 시민이 필요하다. 나의 꿈은 이런 살아있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아직은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다가 한마디 해 놓고는 콩닥대는 가슴에 크게 숨쉬기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당당하게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다.
네잎 클로버는 누구나 좋아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세 잎 클로버는 너무 흔해서 사람들의 눈길이 머물지도 않는다. 그래도 아침 이슬을 먹고 싱싱하게 자라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꽃말처럼 우리에게 행복을 전해준다. 살아있는 시민은 이렇게 사회를 생기 있게 만들고 생활의 소소한 행복을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나도 세 잎 클로버 같은 살아있는 시민이 되고 싶다.
* 작가님/ 김영기
작년 겨울에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후 싱아책)를 다시 읽었다. 이 책을 다시 집은 지 한 십년은 된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너무 재미없어서 책 앞부분 몇 장 읽다가 도서관에 반납한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싱아책을 집은 이유는 ebs 교육 다큐멘터리에 싱아책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프로그램에서 한 일본 교사가 일본의 생활상이 잘 그려진 소설을 가지고 아이들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 아이들이 자라 대부분 좋은 직장을 다니며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교사의 교육 방식에 따라 교육 실험을 했는데 이 때 교과서로 선정한 책이 싱아책이었다고 한다.
책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인지 다시 싱아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책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박완서’라는 작가가 궁금해져 박완서 작가가 쓴 책은 모조리 찾아 읽었다. 박완서 작가는 1931년에 태어나셨고 1970년 소설 ‘나목’으로 등단했다. 약 40살이 되었을 때 등단을 한 것이다. 등단하기 전에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평범한 가정 주부였다. 그런데 아이들 다 키우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기억에 남는 일을 적어 볼까 하다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 인세라는 것을 들었을 때인 것 같다. 톨스토이나 세익스피어 같은 유명한 작가의 자손들이 자기 부모의 인세를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표를 읽었을 때 막연하나마 동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황선미 작가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지금은 인기 작가로 교직은 그만 두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작가는 나에게 하늘같은 존재여서 감히 나 같은 것이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면 물론 말도 안 되게 쓰레기 같은 책도 있지만 내가 만난 책들은 감히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나에게 보여주고 알려주고 다른 세상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고귀한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박완서 작가를 보며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박완서 작가는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소설가로 40대 이후부터 2011년 돌아가실 때까지 맹렬히 글을 쓰셨다. 박완서 작가의 ‘나목’은 미군피에스에서 일하며 겪었던 일을 소설로 꾸몄다. 싱아책도 자기 어렸을 적 일을 성장소설로 써낸 것이다. 나도 박완서 작가처럼 나와 내 주변의 글을 쓴다면 글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군산을 배경으로 하는 글을 쓰고 싶다. 나의 어렸을 적 겪었던 세시 풍속과 내 고장 곳곳의 이야기를 써서 내 자손들에게 우리가 살았던 아름다운 군산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지난 학기에 평생교육원에서 군산학에 대한 강의를 신청해서 들었고 엄마의 자서전을 쓰며 엄마가 살았을 적 군산을 들어보았다. 나도 조금씩 작가라는 꿈을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고 있다.
* 그네 / 김영기
경필이는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그네를 탔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 그네는 앉는 곳이 매우 낮아 아이들 타기에 매우 좋다.
“마마, 그...그...”
말도 못 하는 애가 그네만 보면 달려가 타자고 졸랐다.
떨어질까봐 아이를 조심스럽게 앉는 곳에 앉혀주면 아이는 야무지게 줄을 잡고 몸을 흔들며 까르르 거렸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니까 집에 놓는 그네가 있다고 알아봤는데 안전 제일주의자 남편이 극구 말려서 그네 설치는 무산됐다.
우리는 시간만 있으면 놀이터에 가서 그네를 탔다. 조그만 녀석이 그네만 타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이었다. 그러다 다른 아이들이 와서 비켜줘야 할 때면 정말 볼만했다.
“앙~~앙~~경필이 탈래~~~~”
말을 할 때쯤엔 투정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그네 옆에서 화석이 되는 줄 알았다. 그네를 타러 가면 나도 그네를 탈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네 옆에서 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갔다 뒤로 오면 힘껏 밀어주고 또 갔다 오면 밀어주고.... 한 한 시간쯤 그 일을 하고 나면 정말 그네가 진저리가 쳐진다. 아이가 어렸을 땐 까르르 웃는 소리에 내 마음도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는데 이게 3~4년 되니 저절로 그네를 기피하게 되었다.
경필이 6살 때 옆집 여자아이가 혼자 그네를 타는 것을 보았다. 경필이랑 동갑인데 그 여자아이 엄마는 그네를 안 밀어주고 벤치에 편안하게 앉아서 다른 아줌마랑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도 그 아줌마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경필이가 그네에서 계속 외친다.
“엄마! 그네 좀 밀어줘!”
“하....쟤는 언제쯤 혼자 그네를 타는지 몰라. 경필아! 윤진이 좀 봐봐.... 혼자 잘 타잖아. 앞으로 갈 땐 발을 쭉 내밀고 뒤로 갈 땐 착 접어. 그래.... 잘하네....”
형식적으로 발을 접으니 앞으로 나갈 리가 없다. 다시 화석 모드로 들어가 그네를 민다.
경필이가 7살, 가을 때쯤인 것 같다.
“엄마, 인제 나 그네 탈 수 있다. 자 봐봐.”
어~정말이네. 경필이가 혼자서 하늘을 날고 있다. 앞뒤로 발과 몸을 구르며 하늘 위로 휙휙 날아오른다. 와~~해방이다.
날아오르는 경필이를 바라보며 나도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6년 만에 그네 화석을 벗어났다.
지금도 9살 경필이는 여전히 빈 그네만 보면 뛴다.
“엄마~ 그네 비었어. 나 먼저 간다~”
그리고는 앉아서든 서서든 휙휙 그네를 잘도 뛴다. 그런데 4살 경민이는 형이 그네를 타는 것을 보면서도 엄마 뒤에 숨는다.
“엄마, 그네 무서워.”
내 손을 꼭 그려 잡는 경민이는 언제쯤 그네를 탈까?
* 김말이 / 김영기
“선생님, 창수가 저 바가지라고 놀렸어요.”
“현정이가 저보고 창호지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현정이의 성은 박씨다. 성이 박씨면 바가지라고 놀리고 김씨면 김밥으로 놀린다. 초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으면 이렇게 놀림 받고 이르러 오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아들 친구 이름이 조선희인데 그 아이 별명은 조선 치킨이다. 초등학교에서 이름은 인간관계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리 셋째 언니 이름은 김말희다. 이름만 딱 들어도 그 집에 딸이 많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한편으로 우리 부모님은 언니 둘을 낳고도 세 번째 또 딸을 낳았으니 저 이름을 붙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여자아이를 그만 낳으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진 언니는 어렸을 때 얼마나 놀림을 많이 받았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요새는 개명도 많이 한다는데 언니는 개명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언니에게 전화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슬쩍 언니 이름 얘기를 꺼냈다.
“언니는 개명 하고 싶지 않아?”
“아~니. 그게 바꿔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 데 귀찮아서 싫어.”
언니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언니의 당당함에 궁금증이 들어 다시 물었다.
“언니는 어렸을 때 이름 갖고 놀림 안 당했어?”
“뭐 초등학교 때야 남자애들이 좀 놀리고 중 고등학교 처음 출석부를 때 꼭 호구조사를 하긴 했지만 내가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으니까 남자애들도 놀리다가 말고 중 고등학교 땐 선생님들이 이름 때문에 나를 잘 기억해주니까 좋더라고. 그리고 우리 집에서나 [말리]로 발음했지 친구들은 다 [마리]라고 불렀잖아. 내 친구들은 내가 이름 쓴 것을 보고야 ‘아~마리가 아니고 말희였구나’했어. 마리라는 이름도 나쁘지 않고.”
말희 언니가 좋아하는 튀김은 김말이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쯤 상추 튀김이 유행이었는데 튀김집에 가면 언니는 늘 김말이를 빼 놓지 않고 사 먹었다. 소심한 나는 언니가 김말이를 맛있게 먹는 것을 의아해 하며 쳐다보곤 했는데 언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언니 이름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내 이름은 김영기다. 셋째 언니까지 낳고 대 실망한 부모님께서 득남의 소망을 담아 뒷집 남자아이의 이름을 내게 붙여 주셨다고 한다. 나는 이름에 얽힌 별명이 없다. 영기라는 이름으로 만들려면 기상천외한 별명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 매우 조용한 아이였다. 반응이 없으면 시큰둥해지는 게 남자애들이다. 중 고등학교 때도 아주 가끔 중성적인 내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선생님이 계시긴 했지만 별로 내 이름의 내력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된 건 내가 나를 영어로 소개할 때이다.
'My name is Kim young ki. I'm the youngest daughter in my family."
‘내 이름은 영기고,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나중에 태어난 딸이다.’라고 하면 외국인들이 내 이름을 잘 기억해준다. 나이를 먹어도 내 소개는 ‘I'm Young ki, I'm the youngest.'다. 나는 내 이름 덕에 점점 젊어지는 것 같다.
* 추석 / 김영기
우리 전통 문화가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 없어져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어렸을 때 명절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 어릴 적 추석은 이렇다.
추석에는 외할머니 댁에 갔고 거기서 식혜랑 전을 먹었다. 우리 집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전은 거의 먹어볼 수가 없기 때문에 외할머니 댁에서 채반에 담아 놓은 전을 맘껏 먹었다. 그리고는 외할머니가 푼돈을 주면 그것을 들고 슈퍼에 가서 불량식품을 사먹었다. 그런 구멍가게에는 늘 꼬맹이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조그만 장난감이나 종이 인형을 늘어놓고 팔았다. 나는 종이 인형을 사서 그걸 오려놓고는 인형에 옷 입히기를 하며 놀았다.
추석이나 설날 전에 엄마는 꼭 옷을 한 벌씩 사 주셨다. 딸 막내라 늘 물려받은 옷만 입었는데 한 해는 셋째 언니랑 똑같은 원피스랑 타이즈를 사 주셨다. 추석날 외갓집에 가는 길에 사람들이 자꾸 나랑 언니가 쌍둥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렇게 이쁜 옷을 입고 있어도 노는 것은 평소랑 다르지 않았다. 외할머니 댁 앞에는 기찻길이 있었다. 철길 위에 안 떨어지고 걷기, 철길 속에 있는 돌멩이 중에 예쁜 돌 고르기, 기찻길 옆에 수북이 나 있는 풀로 소꿉놀이하기 등 할머니네 집에서 배터지게 먹고 나면 기찻길을 오르내리며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았다.
오후가 되면 이모네 집에 갔다. 이모네 집에는 포도나무가 있어 추석 때쯤 되면 포도가 까맣게 익었다. 이모네 집 옥상에 올라가 새까만 포도를 똑똑 따서 그냥 그 자리에서 먹었다. 이모네 집은 제사를 아주 거창하게 지내기 때문에 추석에 먹을 것도 많았다. 방 하나를 광처럼 쓰는데 그 방에 들어가면 대추, 밤, 사과, 배, 건어물, 땅콩 뭐 이것저것 맛 나는 것 천지였다. 그래도 이모네 집에는 무서운 할머니가 계셔서 함부로 그 방에 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모네 집 막내 오빠는 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안 나서 막내 오빠랑 많이 놀았다. 막내 오빠는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해 주었다. 이모네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오면 둥그런 달이 뜨는데 옛날 산에 올라가 그 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다.
‘예쁜 마른인형을 갖게 해 주세요.’
초등학교를 마치고 엄마가 장사하는 시장을 가다보면 진짜 속눈썹이 있는 마른인형을 진열해 놓은 가게가 있었다. 그 인형은 누우면 눈이 감기고 앉으면 눈이 떠졌다. 엄마에게 갈 때면 그 인형가게 창문에 매달려 얼굴을 박고 한참동안 인형구경을 했다. 그 인형이 정말로 가지고 싶었는데 엄마에게 사 달라는 말을 못했다. 겨우 추석 둥근 달에게나 그 인형이 가지고 싶다고 속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의 추석은 언제나 귀경 전쟁 속에 있었다. 명절에 서울에서 군산으로 내려오는 차는 늘 막혔고 차표도 구하기 힘들었다. 기차표는 진즉에 동이 났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평소의 두 배는 걸려 집에 왔다. 그런 보람도 없이 내가 집에 와도 엄마, 아빠는 늘 장사를 하느라 바빴다.
음식 하는 훈기 하나 없이 부엌은 싸늘했고 거실 바닥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나는 우선 집안 청소를 하고 장사 배달을 도왔다. 밤 11시가 지나 가게 문을 닫으면 엄마는 씻지도 못하고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방바닥에 늘어놓고 돈을 셌다. 엄마가 돈을 세다 잠이 들면 내가 나머지 돈을 세서 100만원씩 가지런히 바닥에 놓아두었다.
과일장사는 명절이 대목이라 추석, 설에는 하루만 장사해도 100만원씩 세어놓은 묶음이 10개도 넘게 바닥에 깔렸다. 돈을 다 세고 그렇게 깔아놓은 돈방석에 앉아보기도 했다. 추석 명절이 딱 지나면 그 다음날은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이미 과일을 살 사람은 다 사가서 손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빠는 추석 명절에 맞춰 경상도에 명절 쇠러 가고, 엄마랑 나는 그냥 집에서 밥해먹고 빈둥거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외갓집에 발걸음도 뜸해졌고 이모네 집에 가도 그냥 인사만 하고 왔다. 추석은 명절이라기보다 그냥 학교가 쉬는 날이었다.
*상장/ 김영기
토요일 아침은 늘 10시쯤 시작한다. 남편부터 아이들까지 모두 늦잠꾸러기들이니 토요일 아침이 일찍 일어나는 나에겐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식구 전부가 새만금 걷기 대회에 가야해서 아침부터 서둘렀다. 눈과 눈꺼풀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남편을 깨우고, 아이들은 세수도 안 시키고 옷 먼저 입혔다.
“자~아침마다 생기는 나라는? 일어나라!!!”
큰 아이의 어깨를 잡고 번쩍 일으켜 욕실로 보냈다. 작은 애는 대충 눈꼽만 뗐다. 둘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아침부터 왠 수선이냐는 표정이다.
“오늘 새만금 다리를 한번 걸어보자! 그림을 잘 그리면 상장을 받을 수도 있어.”
김밥을 먹으며 도착한 비응항 공원에는 벌써 사람들로 북적댔다. 큰 아이 학교인 용문초를 찾아 등번호를 받고 시간 여유가 있어 부스를 둘러보았다.
“엄마가 2년 전에 여기 제자들하고 참석했는데 그림 그리기 대회가 있었어. 크레파스도 주고 선물도 주고 그랬는데 한번 찾아보자.”
둘째 아이는 남편에게 맡기고 큰 아이와 부스를 둘러보는데 그림 그리기 대회 부스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올해는 그림 그리기 대회는 안 하나봐. 아쉽네....”
재작년 내가 4학년 아이들을 담임할 때였다. 학교 문예 업무를 맡아서 ‘새만금 걷기 그림 그리기 대회’ 공문이 나에게 배정되었다. 학교 옮길 때 학생 지도 점수가 필요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대회에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꼬시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번 새만금 걷기 그림 드리기 대회 나갈 사람? 선물도 많이 준다는데.... 내가 비응항에서 칼국수도 사 줄게.”
그런데 ‘걷기 대회’가 들어가서 인지 그림 잘 그리는 여자애들은 하명도 신청을 안 하고 졸라맨만 그려대는, 그림에는 전혀 소질이 없어 보이는 남자애 4명만 신청했다.
‘에휴, 그냥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자. 그냥 애들하고 놀다 와야겠네....’
새만금 걷기 대회에서 초등학생은 비응항 공원에서부터 방조제 첫 번째 휴게소까지 6.5km를 걸어갔다가 버스를 타고 다시 비응항 공원에 돌아오면 되었다. 새만금 방조제의 길이 33.9km 만큼 걷는 코스도 있지만 그건 건강한 성인의 몫이었다. 아이들과 신나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새만금 방조제 길을 걸었다. 가는 길에 래인이가 힘들어 죽으려고 했지만 다른 아이들이 밀어주고 끌어주고 했다. 휴게소에서 버스를 타고 비응항 공원에 다시 돌아와 나는 아이들에게 도화지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주제가 새만금 걷기 대회래. 오늘 갔다 온 거 그리면 되겠다.”
“선생님, 저는 그냥 따라온 거예요. 저는 안 그릴래요.”
준영이는 그냥 친구 따라 신청한 거라 그림 그릴 생각도 안 하고 풀숲 도마뱀을 잡아서 놀고 있었다.
“그, 그래.... 그럼 넌 가서 친구들 끝날 때까지 놀아.”
래인이는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는 그림을 그리고 성격대로 꼼꼼하게 색칠을 했다. 형민이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을 대충 그리고는 역시나 크레파스로 대충 색칠을 했다.
“선생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영민이가 연필을 잡고 한참을 고민하다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럼, 다른 애들은 어떻게 그렸는지 한번 구경 가 볼까?”
나는 영민이 손을 잡고 아이들 그림을 둘러보았다. 아이들 그림을 보면서 나는 감탄을 하고 있는데 영민이는 오히려 주눅이 들어버렸다.
“선생님, 저는 상은 못 탈 것 같네요.”
“아냐, 우리도 잘 그리면 돼. 가서 한번 그려보자.”
우리 자리로 돌아와서 영민이가 그림을 그리려는데 또 연필을 잡고 난감한 표정이었다.
“자, 그럼 내가 그린 그림을 좀 따라 그려봐.”
나는 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영민이도 조금씩 그림을 그리더니 내 그림하고 좀 비슷하게 그렸다. 그때부터 나는 내 그림에 쏙 빠져들어 신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를 하고 주최측에서 나눠 준 크래파스로 색을 칠했다. 어른이 그린 그림이 아니고 아이가 그린 것처럼 색칠은 대충했다. 뒤에 이름을 써서 내야하는데 그림을 안 그린 준영이 이름을 쓸까 하다가 ‘4-1반 김영기’ 하고 내 이름을 써서 냈다.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교무실에 갔는데 교무실무사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 상장이 왔는데 선생님 이름으로 왔어요. 이거 잘못된 거죠? 제가 다시 보내달라고 할 테니 대회 나간 아이들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교무실무사가 상장을 보여주는데 새만금 걷기 그림 대회 상장이었다.
“아냐, 이거 제거 맞아요. 제가 제 이름 써서 냈어요. 다른 아이 이름으로 온 상장은 없어요?”
“하하, 그러셨구나. 상장은 그거 한 장만 왔네요.”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그림 그려서 상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30년 만에 처음 그림 상장을 받아봤다.
* 미룡동 나무
내 생애 첫 집은 거저 얻었다. 내 주위에 대학 졸업하고 바로 결혼한 친구들은 처음 월세 방부터 시작해서 전세를 거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절차를 밟았다. 나는 결혼 대신에 내게 맞는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대학에 다시 들어가는 바람에 그 과정을 겪지 않고 소위 ‘선생 며느리’를 선호하는 시어머니에게 발탁되어 결혼하자마자 입주하는 새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처음 예비 신랑과 우리 집을 보러 갔을 때는 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룡동이라 군산 시내에서 좀 떨어져있고 벽지 색깔이며 아트월 모양이며 특히 욕실에 욕조가 너무 작은 게 맘에 들지 않았고 여기저기 하자만 눈에 띄었다. 그래도 시어머니가 사 주신 건데 뭐 어쩔 셈인가 그냥 살아야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수송택지지구가 만들어져 수송동 여기저기 모델하우스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모델하우스를 보러가니 으리으리하고 좋아보였다. 특히 한라비발디가 좋아보였다. 나는 슬그머니 남편에게 우리 집 팔고 한라비발디로 가자고 말을 건넸다. 남편은 절대 안 될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작년에 아이 학교 때문에 수송동으로 이사가려고 집을 보러 다녔다. 며칠을 이집 저집 구경을 하러 다녔는데 딱히 맘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지금 사시는 집이 잘 빠져서 다른 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집 소개 시켜 주는 공인중개사가 내 맘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수송동에 있는 아파트가 우리 집보다 늦게 지었는데도 여기저기 곰팡이도 피어있고 구조도 이상했다. 거기다 별로 좋지도 않은데 가격은 우리 집보다 오천만원가량 비쌌다. 우리 아파트는 단지가 작아 단지 안 조경이 별로지만 은파 호수가 가까이 있어 현관문만 나서면 은파 공원이 내 정원이다. 거기에 인라인 스케이트장이 코앞이라 아이들이 놀기 좋다. 여름만 되면 아이들이 거기에서 살다시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기도 좋고 은파 호수 공원 제2주차장에서는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부스 행사가 자주 열린다. 딱히 멀리 가지 않아도 내 집 주변에서 이런 일들을 누릴 수 있으니 이제는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람은 분명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인데 나는 가끔 사람도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곳에 씨가 떨어져 싹을 피우고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처럼 사람도 한 장소에서 마주치는 모든것과 관계를 맺어가며 새록새록 정이 든다. 나도 어느새 커다란 미룡동 나무가 되어버렸다. 여기 이곳이 좋다.
* 아빠의 비빔밥
아빠의 몸매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다. 아빠는 늘 배가 불룩했다. 우리 일곱 식구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은 내 남동생이고 그 다음이 엄마, 그 다음이 우리 네 딸, 마지막 가장 키가 작은 사람이 아빠다. 배가 불룩하고 키가 작으니 아빠의 풍채는 꼭 풍뎅이꼴이다. 하지만 아빠 얼굴은 꽤 잘생겼다. 엄마가 결혼할 때 아빠 얼굴이 엄마 얼굴보다 더 예뻤다고 하니 말이다. 아빠는 눈매가 선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했다. 단, 엄마에게만은 예외였다. 아빠는 남에게는 한없이 친절하지만 아내에게는 불친절한 전형적인 남의 편이었다. 물론 엄마도 아빠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긴 했다. 아빠는 아이들을 매우 예뻐했다. 특히 막내딸인 나는 아빠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내 동생인 막내아들은 그것의 만 배 쯤은 더 많이 받았지만...... 엄마가 장사를 하시니 우리들은 아빠와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아빠가 청소하는 법을 알려주시던 게 생각난다. “방을 닦을 때는 얼룩진 데, 더러운 데를 먼저 닦고 걸레 빨아서 다시 닦아야 해. 그래야 깔끔해지지. 여기 장판이 겹쳐지는 곳도 더럽지? 방 닦을 때는 여기도 들어서 한번 닦아 줘야해.” 아빠는 엄마와 달리 깔끔한 편이었고 청소를 잘하셨다.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니 집안이 깔끔할래야 깔끔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마당이 늘 비질이 되어있었고 엄마 장사하던 곳도 아빠덕에 돼지우리를 면했다. 엄마는 장사를 잘했기 때문에 손님들이 깎아먹은 과일 껍질들이 가게 여기저기에 늘 수북했었다. 아빠는 비빔밥을 좋아하셨다. 엄마가 무무침을 해 주시면 커다란 양푼을 하나 달라고 해서 무무침을 넣고 밥을 넣고 고추장을 듬뿍 넣고 된장 국물을 조금 넣어 쓱쓱 비벼 드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눈을 반짝이며 아빠가 다 비빌 때까지 기다렸다. “아빠, 비빔밥 좀 주세요!” “나도, 나도!” “너희들도 이렇게 비벼 먹어봐.” “아빠 것이 더 맛있단 말이에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비벼도 아빠 비빔밥은 내 것보다 훨씬 더 맛나다. 아빠는 우리에게 비빔밥을 다 나눠주시고는 다시 비벼서 드셨다. 아빠는 개를 좋아하셨다. 개를 키우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개고기도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키우던 개들은 다 아빠 뱃속에 들어있다. 한번은 옛날 산에서 우리 개를 동네 아저씨들이 잡는 것을 보았다. 개를 지푸라기 가마니에 싸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개를 마구 때려서 죽였다. 셋째 언니랑 같이 보았는데 그 때 이후로 셋째 언니는 고기를 못 먹게 되었다. 다른 언니들도 나도 개고기는 안 먹었다. 개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아빠가 개밥 주라는 잔소리가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밥 먹고 있으면 아빠는 으레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밥 먹으면서 개는 밥도 안 주냐? 니배 고프면 개도 배고픈 줄 알아야지!.” 그럼 우리는 밥 먹다가도 슬금슬금 일어나 개밥을 주러 갔다. 어쩔 때 아빠는 우리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개들은 자신들이 나중에 어디로 갈지 아는 것처럼 아빠보다 우리들을 더 좋아했다. |
* 박진철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선생님께서 너무나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셔서, 아니 마지막 인사드릴 시간은 주셨는데 제가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를 특별히 예뻐해 주셔서요. 선생님께서 인생의 마지막 제자들을 가르친 1991년도에 저는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선생님을 뵈었지요. 제 기억으로 선생님께 국어를 배운 기간은 3개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선생님 눈을 쳐다보면 공부를 잘한다’라고 말씀해 주신 이후로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선생님 수업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씀은 이해가 잘 되었어요. 한번은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는데 우리 반 친구들이 선생님의 질문에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지요. 그 수업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합니다. 저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답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도 학생번호 1번부터 번호를 불러 답을 물어보셨어요.
“1번, 내가 말한 의미가 뭐지?”
“모르겠는데요.”
“2번!”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우리 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진희까지 왔습니다. 저는 진희가 답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진희도 모른다고 했지요. 그리고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전에 그것은 00이라고 설명해 주셨는데요.”
“봐, 얘는 기억하고 있잖아. 하하하”
그 수업 이후로 저는 선생님의 특별 학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저한테는 부담이었는지 선생님께서 저를 특별히 예뻐하시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 이후로 국어시간에 더 조용히 지냈지요. 그러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학교를 안 나오셨어요. 선생님께서 췌장암 말기라고 하는 말을 담임선생님한테 전해들은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 수업을 잘 안 들었던 아이들도 선생님 소식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저 덤덤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제 주변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별의 아픔은 세월이 지나며 서서히 올라오지 그 당시는 별 생각이 없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암 투병을 하시며 3개월 병원에 계시는 동안 7반 아이들은 선생님께 응원 편지를 단체로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답례로 연습장을 하나씩 선물하셨지요. 저도 선생님께 힘내시라고, 훌훌 털고 일어나시라고 편지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집에 가서 편지지를 펴고 편지를 몇 자 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끝내 보내지 못했어요. 선생님은 다른 제자의 편지도 반가워하셨겠지만 제 편지를 기다리셨을 것 같습니다. 병상에서 선생님의 특별 제자의 편지를 기다리셨건만 제가 끝까지 선생님께 응원 편지를 못 보내드렸습니다. 어쩜 편지가 다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셨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청소를 하면서 저는 책상을 교실 뒤로 밀고 있었습니다. 책상을 같이 밀던 친구가 와서 저를 나무랐습니다.
“너는 박진철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제자였는데 왜 안 우니?”
지금이야 제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죽어도 눈물 한 바가지 쯤 쏟아 놓을 자신이 있는데 그 때는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편지를 못 드려서 죄송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편지를 못 보낸 구차한 변명이고 제 마음입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위로와 힘을 드려야했었는데 이제야 편지를 올리네요. 저는 선생님의 특별 제자가 싫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자랑스러웠는데 이팔 청춘이라 쑥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여고 시절에 선생님에 대한 좋은 추억을 심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실 일은 없겠지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2017년 11월 17일
선생님의 특별 제자 올림
옛날 산의 추억
나는 언니가 셋에 남동생이 하나 있다. 내 또래 친구들도 집안에 아이들이 네다섯 쯤 되니까, 또 내가 살던 동네는 군산에서 가장 빈민촌였던 창성동 말랭이였으니까 아이들은 내 주위에 늘 드글드글 했다. 지금은 옛날 살던 동네를 찾아가도 차 한 대쯤은 거뜬히 지나갈 만큼 길이 널찍해졌지만 내가 꼬맹이 시절에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사람이 한명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길들이 많았다. 그런 길에서는 술래잡기를 해도 재밌고 숨바꼭질을 해도 재밌었다.
우리집은 창성동 꼭대기여서 우리 집에 붙은 집들을 조금만 지나면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 산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곳을 옛날산이라고 불렀고 거기는 약간의 평평한 공터가 있어 아이들이 놀기에 좋았다. 공터로 내려가는 비탈은 겨울에 썰매 타기에 좋았고 겨울이 아닐 때는 하도 아이들이 올라 다녀서 풀 한포기도 없이 맨질맨질했다. 그래도 명색이 산이니 여기저기 이름 모를 꽃과 풀이 가득해서 소꿉놀이하기 좋았다. 배추 이파리같이 생긴 풀을 뜯어 놓고 흙을 뿌려 김치를 담그기도 하고 평편한 돌멩이를 그릇 삼아 멋지게 상차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동무와 한참 소꿉놀이 하고 그냥 그 한 상을 놓고 집에 가려고 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름에는 바랭이 풀로 우산도 만들고 토끼풀 반지도 만들어 끼고 들꽃으로 한껏 치장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소꿉장난을 하다보면 땅에서 땅강아지가 많이 나왔다. 땅만 파면 땅강아지가 나와서 그 애를 흙성에 가둬 두기도 하고 흙을 가득 넣어 주어서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며 놀았다. 그런데 요즘 땅을 파도 땅강아지가 없다. 그 많던 땅강아지들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는 낮에 놀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언니랑 놀아야하는데 언니들이 학교에 가버리니 그 때는 정말 간절히 학교를 가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늘 언니들을 따라 다니며 언니들과 같이 놀았다. 옛날산에서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냥 아이들끼리 섞여서 놀았다. 아이들이 많을 때는 ‘얼음 땡’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돈가스’ 같은 놀이를 다 같이 했다. 한참을 뛰어놀아 온 몸에서 쉰내가 날 즈음에 각 집에서 ‘밥 먹어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언니가 많아서 공기도 많이 했다. 문방구에서 산 플라스틱 공기 한 채는 늘 소중히 간직했다. 공기놀이의 끝은 없었다. 손가락을 쫙 펴고 공기 한알한알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것부터 해서 공기 세 개 위에 공기 한 개를 올리는 것 까지 마스터했을 땐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플라스틱 공기 세트는 다섯알 공기할 때만 쓰고 많은 공기를 하기 위해서는 작고 맨질맨질한 돌맹이를 많이 모아야했다. 우리 집에 여자가 넷이니 동네 한 바퀴 돌면 그 정도는 금방 모였다. 돌맹이 모은 걸 마루에 놓고 나랑 큰언니가 한 팀, 둘째, 셋째 언니가 한 팀이 돼어 많은 공기를 했다.
고무줄은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우리 둘째 언니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발목부터 시작해 머리끝에서 손 한뼘을 넣고도 둘째언니는 그 높은 고무줄을 쉭 넘어버렸다. 노래하면서 그걸 하는데 셋째언니랑 나는 그냥 입 벌리고 구경할 뿐이었다. 나는 고무줄은 잘 하지 못했다. 4학년때 월화수목금토일을 할 정도였으니....4학년 때 고무줄이 유행해 집에서 셋째언니랑 의자에 고무줄 묶어두고 같이 연습한 게 생각난다. 그 때는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노는 시간만 있으면 고무줄을 했다. ‘금강산 찾아가자’, ‘산골짝에 다람쥐’ 같이 학교에서 동요로 배우는 노래는 다 고무줄 놀이에 써 먹었다. 동요를 부르는 놀이는 고무줄 뿐 아니라 손바닥치기도 있었는데 6학년때는 ‘푸른하늘 은하수’노래에 맞춰 하는 손바닥치기가 유행했다.
*콩쥐가 된 엄마
2018. 2. 15 오전 6:23 김영기
“나 오늘 오후에 약속 있어.”
“어디 가는데?”
“청주, 모임이 있어.”
“그럼 애들은?”
“경필이 점심은 윗집 할머니한테 부탁해 놨고 오후 4시에 경민이랑 경필이는 시아버지가 데려갈거야. 큰집에서 애들 저녁 먹여준대. 당신도 큰집에서 밥 먹을거야?”
“응. 나도 거기서 밥 먹고 애들 집에다 데려다 놓을게.”
“그래. 그럼 내가 9시까지 들어올게.”
아빠는 엄마 약속 얘기를 듣고 오늘도 힘들겠다며 얼굴을 찡그리고 나갔습니다. 엄마는 약속이 있으니 마음이 바쁩니다. 우선 아이들 밥을 먹이고 경필이 먼저 학원에 보냈습니다. 경민이가 혼자 잘 노는 동안 엄마는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합니다. 바닥에 있는 장난감을 치우자마자 경민이는 아빠방에 가서 아빠 물건을 바닥에 하나하나 꺼내 놓고 놀고 있습니다. 빨래를 다 널고 나니 세제 때문인지 손이 거칠거칠합니다. 손을 씻으며 대충 세수를 합니다.
“아, 힘들다....경민아, 이제 가자.”
“싫어. 나 집에 있을 거야. 엄마 혼자 다녀와.”
경민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일은 어떤 집안일보다 더 힘이 듭니다.
“경민아, 엄마가 가다가 마트클럽에서 사탕 사줄게.”
“사탕?. 그래 가자.”
엄마는 집안일을 다 해 놓고 나가느라 늦었지만 경민이가 나갈 것 같지 않아 사탕카드를 내밀고 말았습니다. 경민이를 데려다 주고 모임에 간 엄마는 결국 30분이나 지각을 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엄마는 피곤했습니다. 왔다갔다 운전을 오래 했기 때문입니다. 집에 오니 아빠는 큰집에서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아이들을 씻기지도 않고 핸드폰 게임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입었던 두꺼운 옷을 벗지도 않고 놀고 있습니다. 집은 이미 아침에 치워놓았던 그 집이 아닙니다.
“자~이제 씻고 자자.”
엄마는 아이들을 씻깁니다. 경필이는 이제 커서 혼자서도 잘 씼습니다. 경민이는 아직도 씻는게 서툴러서 엄마가 많이 도와줘야합니다. 아빠가 바닥에 이불을 깔아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빠방에 들어가 핸드폰 게임을 합니다. 엄마가 늦게 오니 자는 시간도 늦어졌습니다.
“아, 힘들다....얘들아 이제 자자.”
아이들은 서로 엄마 옆에 누우려고 자리다툼을 합니다. 엄마가 가운데에 눕자 엄마 오른쪽에는 경민이, 왼쪽에는 경필이가 누웠습니다.
“엄마, 내 책 읽어줘.”
“아니야, 내 책 읽어줘.”
이제는 서로 자기 책을 먼저 읽어달라며 책을 내밉니다. 이럴 때 아빠가 와서 책을 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엄마는 이미 포기한 듯 경민이를 설득합니다.
“경민아, 형은 금방 잠이 드니까 형 거 다섯 장 읽어주고 네 거 읽어 줄게. 잠깐만 기다려.”
경민이는 조금 찡찡 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책을 뒤적거립니다. 엄마는 얼른 경필이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경필이 얼굴을 보니 벌써 잠이 들었습니다. 경필이도 피곤했나봅니다.
“경민아, 책 읽자.”
경민이가 얼른 엄마 옆에 눕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가 잠이 옵니다. 책 한권을 채 읽지도 못했는데 책이 툭 떨어졌습니다.
“아....피곤하다. 경민아, 엄마가 오늘 너무 피곤한데 내일 책 많이 읽어줄게 그만 자자.”
“엄마, 책 읽어주어~~”
“경민아, 엄마는 너무 졸려서 책을 못 읽겠어. 이제 그만 자자.”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잔 경민이는 감겨지는 엄마 눈을 자꾸 열려고 합니다.
“그럼 불 끄고 엄마가 이야기 해 줄게. 콩쥐팥쥐 어때?”
엄마가 불을 끄니 경민이가 엄마에게 착 달라붙습니다.
“옛날 옛날에 콩쥐하고 팥쥐가 있었어. 콩쥐는 엄마가 보기에 너무 예쁘고 착해서 아주 예뻐했대. 우리 경민이를 엄마가 예뻐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콩쥐를 그렇게 사랑해주던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신거야. 그리고 새엄마가 들어왔는데 콩쥐를 하나도 안 사랑해주고 계속 일만 시켰대. 새엄마는 딸 하나를 데려왔는데 그 애가 팥쥐야. 새엄마는 팥쥐에게는 일도 안 시키고 엄청 사랑해줬어. 하루는 마을에 잔치가 있어서 콩쥐가 가려고 하니까 새엄마가 또 일을 시켰어.
“얘, 콩쥐야, 너도 잔치에 가려고? 그럼 쌀 한가마니 빻아놓고 저 돌짝밭 갈아놓고 이 항아리에 물 가득 채워 놓은 다음에 따라오너라. 그럼 우리는 먼저 간다.”
새엄마와 콩쥐는 예쁘게 차려입고 자기네들끼리만 잔치에 갔어. 새엄마가 콩쥐에게 시킨 일은 하루에는 절대로 다 끝낼 수 없는 아주 힘든 일이었어. 콩쥐가 할 일을 생각해보니 일이 너무 많아서 너무 슬펐어. 그럼 콩쥐만 잔치에 못 가잖아. 그런데 콩쥐가 누구야? 맨날 일을 해서 콩쥐는 일을 아주 아주 잘해.”
“엄마처럼?”
경민이는 고운 손으로 거칠어진 엄마 손을 가만히 잡습니다.
“응 맞아. 콩쥐는 그 일을 다 하고 잔치에 갔어. 그리고 잔치에서 만난 사또 아들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대. 경민아, 이제 자자.”
오늘도 엄마는 경민이보다 일찍 잠이 들었습니다. 경민이는 좀 더 놀다가 엄마 옆에 가서 가만히 누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 전래동화는 여성해방을 원하는 여인들의 마음을 표현한 최초의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초반에 선녀는 나무꾼이 숨긴 선녀 옷 때문에 조선 시대의 하층민인 나무꾼과 결혼을 하게 된다. 선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쁘고 있는 집 자녀다. 선녀 옷을 뺏겼다는 건 한 번의 실수로 처녀성을 잃은 게 아닐까? 아씨마님이 건강미 넘치는 마당쇠에게 한눈에 넘어가기도 하니 있을 법한 그런 일이기 하고 노총각이 한밤중에 아가씨를 보쌈해 갔을 수도 있다.
선녀가 목욕하는 곳을 알려준 사슴은 나무꾼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셋, 어떤 책에서는 넷을 낳기 전까지는 선녀 옷을 주지 말라고.... 여기서 선녀 옷은 결혼 전의 순결보다는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가졌던 꿈을 뜻하는 것 같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면 자신보다는 자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야기를 보면 여자가 혼자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숫자가 둘 또는 셋이이라는 건데 나는 둘이 더 적당한 것 같다. 둘이 놔두면 서로 의지도 되고 둘이 함께 있으니 엄마가 다른 일을 하기에도 수월하니까 말이다. 여자는 아이를 둘 낳을 때까지는 꿈을 가지고 있다. 예뻤던 얼굴은 어느 정도 세월과 고생의 흔적으로 주름져 있을 테지만 처녀 때부터 갖고 있던 능력과 고된 육아로 다져진 근성이 사회로 나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선녀는 하늘나라가 그리워 병이 난다. 자기의 꿈을 펼치고파 안달이 난 것이다. 그때 나무꾼은 선녀 옷을 보여주고 선녀는 자녀 둘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드디어 여자는 남자를 벗어나 자녀와 함께 꿈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혼자 남은 나무꾼은 아내와 자녀를 찾을 궁리를 한다. 남편은 다시한번 마담뚜 사슴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재결합하지만 나무꾼은 혼자 남겨진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여기서 홀어머니는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선녀가 집을 나간 이유는 시월드가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다음 대목이 그런 추측에 무게를 더한다. 선녀는 나무꾼에게 날 수 있는 말을 준다. 하지만 나무꾼의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된다. 며느리의 복수다. 어머니가 아들을 안아보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그전에 어머니가 남편을 안아보지도 못하게 한 것처럼....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하던 팥죽을 매일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말에 타고 있던 아들은 뜨거운 팥죽을 말 등에 흘려 말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발이 땅에 닿고 만다. 나무꾼은 이제 영영 선녀와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다. 엄마말만 듣다 이혼하고 엄마를 원망하며 사는 요즘 마마보이처럼....
나무꾼은 선녀를 그리워하다 닭이 된다. 조금이라도 하늘과 가까워지게 말이다. 닭이 지붕위에 올라가 꼬꼬댁하고 우는 것이 선녀를 그리워하는 나무꾼이 선녀를 부르는 것이란다. 여기서 전래동화는 끝이 난다.
나무꾼은 저리도 처량하게 되었는데 선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선녀는 하늘에 있다. 물론 선녀 옷도 있다. 그 말은 꿈을 이루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들도 엄마와 같이 갔으니 신분 상승이 되었을 것이다. 아빠는 없지만 옥황상제가 할아버지다.
아이 둘의 엄마는 마루 끝에 앉아 빨래를 개다 닭이 이웃집 지붕 위에서 꼬꼬댁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선녀처럼 예뻤을 때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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