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③
* 발해의 역사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대조영(고왕: 698~719)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737~793)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3성 6부 중앙정치 체제를 정비하고(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수도를 중경(742), 상경(755), 동경(785) 등으로 자주 옮기었는데, 이는 국력의 신장과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흑수말갈 등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을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세운 요에 의해 수도인 홀한성(상경)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