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목포18코스 제2부
목포진역사공원-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노적봉-유달산둘레길-용해동행정복지센터
20220928
1.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과 유달산둘레길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는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문일석/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935년 발표.
목포진역사공원 전망대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삼학도 전체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 삼학도에 파도가 깊이 스며드는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서 전망대에 올라서 목포항과 삼학도를 내려보았으나 삼학도에 어린 전설과 구슬픈 정조는 떠오르지 않았다. 영상간하굿둑과 삼학도 매립지에 의하여 삼학도는 가까운 바다와 담을 쌓고 있어서 바다와 파도는 삼학도에 얼씬도 못하는 꼴이었다. 자연은 의구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끊임없이 변화된다. 처음으로 보는 삼학도 앞 바다, 노랫말과 상상으로만 그리던 삼학도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인간의 끈질긴 삶의 의지와 욕망이 채워진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삼학도의 상상에서 벗어나 동쪽을 바라보면 태양이 솟아오르는 아침노을을 바라보던 영산강하굿둑 앞 평화교가 가늠되고, 아침산책을 즐기는 갈매기의 춤이 그려진다. 허겁지겁 걸어온 연인의거리, 갓바위, 입암산과 그 아래의 갓바위문화타운, 삼학로와 목포 남항이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 가물거린다.
서해랑길은 영산강하굿둑으로부터 영산강 하구변, 목포 중심시가지 외곽 유달산둘레, 목포 북항 입구의 고하대로, 목포시청 북쪽 유방산을 거쳐가기에 목포 중심시가지를 관통하지 않는다. 목포진 역사공원에서는 서해랑길 18코스의 윤곽이 잡힌다.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목포의 중심시가지 그리고 유달산과 마주한 양을산이 송신탑을 세우고 솟아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을산 서쪽 용해동행정복지센터가 서해랑길 18코스의 종점이니 서해랑길은 나즈막한 유방산과 양을산 사이에 조성된 목포 신시가지로 이어질 것이다. 유달산으로 눈을 돌리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노적봉이 아담하게 들어오고 그 남쪽과 동쪽 아래로 등록문화재 제718인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전망대 안내도에 주요한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위치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을 분명히 확인할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그 이름들을 훑어만 볼 뿐이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일제강점기의 일본 건축물을 가리킨다. 일본식 가옥, 목포부두 근대상가, 구 목포부립병원관사,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구 목포 일본기독교회, 구 목포 일본영사관,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 구 목포화신백화점,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등 일본식 건축물이 흩어져 있는 곳을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 지칭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포진 역사공원을 내려와서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돌아나간다. 공간 한 곳 한 곳을 다 둘러볼 수는 없다. 주마간산으로 구 목포부립병원관사,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구 목포 일본기독교회, 구 목포 일본영사관을 거쳐 지나친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앞 '번화로'는 평일이어선지 고적한 느낌이 들었다. 그 고적함을 깨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유달동사진관, '유달동의 로망스' 음식점, '목포1897' 카페 앞 '번화로'에 축음기의 음악이 흐른다. 일본건축물을 살피느라고 마음을 빼앗겼던 탐방객의 바쁜 마음에 시원한 낭만의 선율이 넘쳐흐른다. 서해랑길 걷기를 중단하고, 사진관에 들어가 지난 시절의 목포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과 유물이 된 사진기들을 구경하고 음식점과 카페에서 낭만 항구 목포의 노래를 즐겨볼까? 마음만 이렇게 먹었지 발길은 유달동교차로 국도1, 2호선 기점 기념비 앞에서 구 목포일본영사관 방향으로 꺾어 허겁지겁 노적봉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목포에 와 보았는가? 목포를 스쳐만 지나갔지 이렇게 걷기는 처음이고 유달산 노적봉(露積峰)에 오기도 처음이다. 이야기만 들었던 노적봉 바위 앞에서 그동안 목포를 탐방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늦었지만 목포의 일부를 이렇게 걷는 것에 감사하며 위로한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 봉우리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마치 조선군의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처럼 꾸며 다수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고 충분한 양곡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일본군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수없이 들어온 노적봉 이야기를 노적봉 앞에 서서 생각한다. 국민학교 시절 노적봉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던 선생님과 동무들이 노적봉에 떠오른다.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동무들은 찾을 수 없다. 그 시절의 동무들이 유달산으로 올라가는 환상에 젖는다.
노적봉에 오르지 못하고 유달산공원 전망대로 올랐다. 전망대에서 목포 중심시가지와 바다 건너 영암군 삼호읍 대불국가산업단지, 영산강하굿둑, 아침부터 이곳까지 걸어온 길, 18코스 종점까지 걸어갈 길을 어림하며 목포의 정감에 푹 빠진다. 이곳이 목포구나. 목포를 보고 있구나. 그런데 목포의 무엇을 보았는가? 목포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이곳에 와야 한다. 한가로운 여행길을 잡아 천천히 목포를 산책하여야 한다. 그날을 기약하며 유달산둘레길로 접어들었다. 유달산둘레길은 '이야기가 있는 유달산 이야기' 안내판이 둘레길 곳곳에 설치되어 탐방객에게 목포를 알려주고 있다. 그 안내판을 대충 눈요기하며 유달산둘레길을 돌아나갔다. 둘레길에서는 목포의 서쪽 풍경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목포 해양대학교, 목포대교, 고하도, 달리도, 율도, 목포 북항 등과 남쪽으로 영암군 삼호읍과 해남 화원반도가 조망된다. 낙조대, 봉후샘쉼터, 어민동산 갈림목에서 덕산삼거리 내려가는 길에서 서해 바다를 조망 풍경이 좋았다.
유달산둘레길을 돌아서 해양대학로 덕산삼거리로 내려오면 목포 해상케이블카 북항승강장이 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과연 19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여기서부터는 줄행랑을 치듯 내뺐다. 북항교차로에서 고하대로를 따라 연산동사거리까지 순식간에 이른 뒤 산정로를 따라 목포시청 방향으로 이어가다가 유방산 숲길로 들어섰다. 두 개의 산봉을 거쳐 삼나무산림욕장을 거쳐 호남선 철도 터널 위를 가로질러 용해동으로 들어섰다. 용당로331번길을 따라가면 박화성이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한 '목포의 찬가'가 축대벽에 적혀 있다. 목포의 찬가 노래를 부르지 못하지만 그 노랫말을 음미하며 용당로331번 끝까지 가면 용해동행정복지센터 옆에 서해랑길 18코스와 19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18코스 긴 여정을 힘겹게 하지만 행복하게 마쳤다.
목화꽃 송이송이 들녘에 피고/ 푸른 물결 다도해를 감돌아드네/ 육지도 열리고 바다도 열려서/ 세계의 사연들이 오고가는 곳/ 내 고향 목포는 문화의 고장/ 알차게 뻗어나갈 미래를 향해/ 나가자 더 나가자 힘차게 더 힘차게~~~
삼학도 사라져도 전설은 남네/ 충무공 가셨어도 노적봉 그대로네/ 민족혼 깊게 서린 유달은 날로 푸르러/ 그 정신 이어가는 아들 딸을 가꾸는/ 내 고향 목포는 역사의 고장/ 흥겹게 거두어갈 결실을 향해/ 나가자 더 나가자 힘차게 더 힘차게~~~
-목포의 찬가, 박화성/작사, 손목인/작곡
2.탐방 과정
탐방 전체 거리 : 19.16km
탐방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30분
오른쪽에 목포진유적비와 목포진지 설명안내판이 있다.
시간에 쫓겨 이곳의 내부를 살피지 못하고 목포진 역사공원 전망대로 올라갔다.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목포진木浦鎭 자리에 재현된 목포진 역사공원 앞에 '소년 김대중 공부방'이 복원되어 있다. 이 공부방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살았던 옛 영신여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신안군 하의도 생활을 정리하고 함께 나온 어머니 장수금은 목포항이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언덕에서 영신여관을 운영했다. 객주집과 공부방으로 이뤄졌던 2층짜리 건물을 기념관으로 꾸몄다. 1층은 김대중의 목포상고 재학시절부터 7대 국회의원 활동까지, 2층은 일본 납치사건에서 미국 망명시절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 (주)영광21 신문사
육각정자 너머로 목포항과 바다 건너 영암의 대아산, 그 아래 해안에 대불국가산업단지가 펼쳐져 있다.
왼쪽부터 대삼학도, 중삼학도, 소삼학도, 세 개의 섬이 있고, 그 뒤는 목포 외항이다.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등록문화재 제718-10호 목포부두 근대상가 주택이 왼쪽 2층 건물일 것이라 가늠한다.
중앙 끝에 영산강하굿둑이 어림되고, 입암산 아래 갓바위문화타운을 거쳐 삼학로를 걸어 대삼학도 삼학도공원으로 들어왔다.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 소삼학도,중삼학도를 거쳐 목폭항 내안 부두를 걸어온 길이 한눈에 조망된다. 중앙 왼쪽 건물들 뒤쪽에 목포부두 근대상가주택 2층 건물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에 목포부두 근대상가주택이 있고 왼쪽에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 건물이 있을 것이라 가늠한다.
구 목포 화신백화점, 구 목포부립병원 관사 등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여러 건물들을 어림한다.
중앙에 소나무 한 그루가 솟은 바위가 노적봉, 그 아래 구 목포 일본영사관, 그 아래 왼쪽으로 구 목포 일본기독교회 건물, 구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건물 등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의 일본 가옥 건물들이 있다. 유달산 일등바위가 정상이고, 그 오른쪽 맨 뒤에 있는 바위가 이등바위인 듯.
이 안내도를 보면서 등록문화재 제718호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의 건물들을 어림하였다.
목포진 역사공원에서 유동로42번길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내려와 목포진 역사공원 입구를 되돌아보았다. 왼쪽 뒤에 목포진 객사 건물이 보인다.
목포진 역사공원에서 내려와 유동로42번길을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해안로165번길로 들어선다.
정면에 소나무가 자라는 바위 노적봉이 보이고 그 오른쪽 아래 구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이 보인다.
구 목포 부립 병원 관사 국가등록문화재 제718-5호
구 목포 부립 병원 관사는 구 동양 척식 주식회사 목포 지점과 대각으로 마주 보는 위치에 서 있는 일본식 고급 주택이다. 건축 연도는 1935년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구전으로는 1920년대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집의 최초 소유자는 목포 해운 회사, 조선 제유 회사, 태평 양조, 목포 소주 판매 회사 등에 참여했고, 전남 비료 회사의 대표를 지낸 일본 상인 ‘모리타 센스케(守田千助)’이다. 이 집은 이 주택의 맞은편에 있던 목포 부립 병원의 관사로 사용하였다는 설이 있다. 해방 후에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 건물이 해군기지가 되면서 해군 관사로 사용하다가 개인 소유가 되었다. 1966년부터는 나상수의 주택이 되었다.
일본 기와로 된 복잡한 지붕 구조가 특징이며, 내부 마당에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다. 2006년에 내부 수리를 한 후에 일본식 주택 구조를 활용한 이색적인 상업 시설로 용도를 바꾸었다.
구 목포 부립 병원 관사를 2006년에 내부수리한 후에 일본식 주택 구조를 활용한 이색적인 상업 시설로 용도를 바꾸었다.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리뉴얼에 따른 임시 휴관이라는 알림막이 펼쳐져 있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전라남도 기념물 제174호 지정일 1999. 11. 20.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한국 경제를 침탈하기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특수 회사이다. 일본인의 이주 지원, 식민지 지주 육성, 농장 관리, 금융 등이 주요 업무였다. 서울에 본점을 두고 전국 주요 도시 9곳에 지점을 세웠다. 구동양척식주식회사목포지점은 본래 나주에 있던 출장소를 1920년에 목포로 옮긴 것이며 건물은 1921년에 신축한 것이다. 해방 이후 이 건물은 대한민국의 해군 기지로 사용하였다. 1946년부터 1974년까지 ‘해군 목포 경비부’로, 1974년부터 1989년까지는 ‘해군 제3 해역 사령부 헌병대’로 사용하였다. 이후 헌병대가 영암군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1999년까지 약 10년간 빈 건물로 방치하여 철거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해 달라는 시민 사회와 학계의 요구에 따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이후 내부 보수를 거쳐 2006년도부터 근대 역사관(현재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목포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일제 강점기 건축물로 식민지 수탈의 상징 공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해군의 역사가 담긴 국방 유적의 가치를 함께 지니고 있다. 건물의 외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당시 사용된 대형 금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목포근대역사관2관으로 사용되는 이곳은 한때 목포3해역사령부 헌병대 옛터였으며, 5.18 민중항쟁 목포사적지 13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동양척식회사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목포3해역사령부 헌병대가 있던 자리이다.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이후 대대적인 5.18 관련자 체포에 나섰고 체포된 5.18 관련 목포지역 주요 인사들은 보안대 목포분소에서 갖은 구타와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한 후 이곳 헌병대 영창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에도 지속적인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기념비 아래에 목포 출신 사먕자 채광석, 김부연, 부상자 고종채 이름이 적혀 있다.
축음기의 음악이 흐르는 '번화로'는 낭만이 넘쳐흐른다. 뒤쪽에 유달산과 목포 해상케이블카 유달산승강장이 보인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구 목포부립병원 인근에 위치한 목포 일본기독교회로 1922년 9월 준공되었고 1927년 6월 한차례 증축된 일본인이 예배를 드린 기독교회이다. 목포 기독교의 선구적 전도사 윤치호와 결혼하여 목포 사회복지시설 ‘공생원’을 운영하였고 그 공로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훈장을 받은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1912~1968년) 여사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이다. 과거에는 전면부가 종탑형식의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나 현재는 상부가 없이 1층만 남아있는 상태로 근대기 동양척식주식회사 주변 시가지의 흔적과 기억을 담고 있어 당시 일본교회의 건축형식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문화재청
구 목포 일본 기독 교회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다니던 교회 건물이다. 1922년에 건립했고 1927년 6월에 증축했다. 원래는 2층 형태의 석조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2층 부위가 절개되어 단층만 남아 있다. 건물 출입구가 있는 중앙부를 약간 앞으로 튀어나오게 만들고 출입구의 좌우 벽면에 창문을 두었다. 정면 출입구 상부에 석조 현판이 있는데, 지금도 “木浦日本基督敎會(목포 일본 기독 교회)”라는 글자를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전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교회 건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한국인 윤치호와 결혼 후 평생을 목포 공생원에서 고아들을 보살핀 일본인 윤학자[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 1912~1968)] 여사가 다닌 교회이다.
서해랑길은 유달동교차로 국도1, 2호선 기점 기념비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구 목포일본영사관 방향으로 올라간다.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목포 평화의 소녀상과 구 목포 일본영사관으로 이어진다. 앞에 국도1, 2호선 기점 기념비가 있다.
목포는 호남선의 종착역이자 도로교통의 동맥과도 같은 국도1호선(목포~신의주 939,1km)과 국도2호선(목포~부산 377,9km)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1월 20일에 건립한 도로원표 표지석이 구 일본영사관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지만 2012년 6월에 목포대교가 개통됨에 따라서 2013년 2월 28일 국도1호선 기점이 충무동 달동(고하도)로, 2001년 8월 25일에는 국도2호선 기점이 신안군 장산면으로 변경되었다.
목포 평화의 소녀상을 침략국 일본영사관 앞에 조성하였다. 여러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서해랑길을 걸으면서 제한 시간에 쫓겨 내부를 관람하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다.
구 목포 일본영사관(舊 木浦 日本領事館) 사적 제289호 지정일 1981.09.25.
구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은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일본이 지은 영사관 건물이다. 1900년에 건립하였다. 유달산 노적봉 아래 자락, 평지보다 조금 높아 목포항을 내려다보기 좋은 장소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2층 구조로 높이가 13m이고 돌출한 출입구를 기준으로 좌우가 대칭인 장방형 형태이다. 외벽에 붉은 벽돌을 주로 사용하고, 곳곳에 적절하게 흰색 벽돌을 첨가하여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수직형 창틀 위에는 일본 국기를 연상하게 하는 원형 장식이 있다. 건물 2층 중앙 창틀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모되어 없어졌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벽돌로 허리 돌림띠를 두어 층간의 구별을 명확하게 했다. 건물 내부에 벽난로가 8개 있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2층 중앙의 벽난로는 건립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일 관계의 변화에 따라 1905년 이후에는 이사청, 1910년부터는 목포 부청으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목포 시청, 1974년부터 목포 시립 도서관, 1990년부터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내부 보수를 거쳐 2014년부터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 목포 일본영사관 건물은 목포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 건립 당시의 외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한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여 1981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왼쪽 뒤에 목포진 역사공원의 객사 건물, 바로 아래 입구에 국도1, 2호선 기점 기념비가 보인다.
유달산 노적봉(露積峰) 바위는 이순신 장군의 의인전술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노적봉은 해발 60미터의 바위 봉우리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마치 조선군의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처럼 꾸며 다수의 병사들이 있고 충분한 양곡이 있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일본군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한 적이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적봉 상단의 바위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큰 바위 얼굴’이라 불리기도 한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부두
유달산 잔디밭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흘러간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여수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 비오는 선창머리 돛대를 잡고/ 이별튼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왼쪽 뒤에 유달산공원 전망대가 있다. 목포 오포대는 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오포대는 목포시 유달산 입구의 이충무공 동상 남서쪽에 있다. 예전에 오포는 포탄 없이 화약만 넣고 포를 쏘아, 시민들에게 정오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였다. 당시의 오포대는 현재 유달산공원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포는 주변에 모형으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처음의 포는 조선식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는데, 1909년 경기도 광주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1913년 일본식 대포를 오사카 포병공장에서 구입하여 새로 배치하였으며, 그전의 대포는 송도신사(神社)(목포시 동명동 소재)에 보관하던 중 일제시대 후기에 오포대의 대포와 함께 일본정부가 가져갔다고 한다.
왼쪽 뒤에 영암군 삼호읍 현대 삼호중공업이 보이고 그 오른쪽 앞에 목포시 달동 고하도가 보인다.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 앞 바다 건너편에 영암군 용당리 대아산이 왼쪽에 솟아 있고, 그 앞쪽에 용당부두가 있다.
바다 건너 대아산 아래 대불국가산업단지가 펼쳐져 있고, 왼쪽 끝에는 삼호대교가 보인다. 왼쪽 앞에 삼학도 세 개의 섬과 바다 쪽에 목포 외항이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에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 건물이 보인다. 목포진지는 중앙 왼쪽 언덕에 보인다.
노적봉 뒤 맨 뒤쪽에 영산강하굿둑이 가늠되고 대삼학도 왼쪽 뒤에 목포 남항이 보인다. 왼쪽 뒤의 나즈막한 산은 안장산, 그 뒤 오른쪽이 입암산이라고 가늠한다.
오른쪽에 노적봉, 오른쪽 맨 뒤에 입암산, 그 앞 왼쪽에 안장산, 중앙 왼쪽에 송신탑이 있는 양을산을 가늠한다.
오포대가 아래쪽에 있다. 오른쪽 높은 빌딩 왼쪽 뒤에 낮은 산봉이 유방산의 옥녀봉일 것이라 가늠하면 그 오른쪽 뒤가 서해랑길 18코스 종점인 용해동행정복지센터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유달산 휴게소 유달산장 아래 유달산둘레길을 따라 왼쪽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왼쪽 학암사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잠시 유달산장 앞으로 올라갔다 온다.
목포의 상징으로 높이는 228.3m,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이다. 유달산(儒達山)의 이름은 옛 문헌에 대부분 놋쇠 유(鍮)로 등장하지만 구한말에 선비 유(儒)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산 정상 부근에 봉수대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서린 노적봉 등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바닷가에 위치하여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유달산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다가 극락세계로 가게 되면 3마리의 학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에 실려 떠나고, 용궁으로 가게 되면 거북섬으로 가 거북이 등에 실려 떠난다는 전설이 있다.
목포 출신의 명가수 이난영을 안내하고 있다.
일본이들이 거주했던 거리인 혼마치거리와 나카마치 거리를 소개하는 안내판이다.
유달산장에서 내려와 유달산둘레길을 서쪽 방향으로 이어간다.
옥지, 용연이라 불렸던 곳으로 1985년 폐쇄하였다. 위쪽에 해상케이블카 유달산승강장이 보인다.
1897년 개항 이후 목포의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축조한 저수지
오른쪽으로는 해상케이블카 유달산승강장, 왼쪽 아래는 다순구미(온금동)로 가는 아리랑고개,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구미는 바닷가나 강가에 물이 땅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을 이르는데, 다순구미는 따뜻한 구미를 뜻하며 온금동으로 불린다.
오른쪽에 목포 해양대학교와 바다 건너 달리도와 그 오른쪽의 율도, 목포대교가 목포시 죽교동과 고하도, 허사도를 잇는다.
고하도의 맨 오른쪽이 용머리, 중앙의 섬은 달리도인 듯. 왼쪽 뒤는 해남군이다.
왼쪽 건물은 신안비치호텔, 고하도 뒤는 영암군 현대삼호중공업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이등바위 방향으로 이어간다.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죽은 나숭대가 살던 골짜기라고 한다.
봉후마을의 유래는 1970~1980년대에 유달산 봉우리 뒤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봉후마을로 불린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으며, 봉후샘은 당시 40~50가구 주민들이 식수와 빨래터 등 공동우물로 사용했던 곳이다. 당시 마을 주변 밭에는 솔(부추)과 봄동을 재배하여 서울 등지로 판매가 아루어졌다고 하며, 각 가정에서는 소와 돼지 등 가축을 길렀다는 이야기를 마을 주민들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다. 봉후샘 주변에 집터와 가축 먹이통(구유) 흔적이 남아 있어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저장해 놓았다는 인분통이 있었다고 한다. 1982년 유달산공원화 사업으로 거주민은 대부분 이주하였으며 현재 봉후샘은 유달산둘레길을 찾는 산행객들이 쉬어가는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 유달산둘레길 설명안내판에서
거대한 바위의 주름진 표면과 빛깔이 코끼리를 닮아서 코끼리바위라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목포대교가 가로지르고, 왼쪽에 목포 해양대학교, 왼쪽에 달리도, 중앙에 장좌도, 그 뒤 오른쪽에 율도일 것이라 추정한다.
서해랑길은 일등바위와 반대 방향인 왼쪽 덕산삼거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어민동산 설명안내판이 입구에 세워져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어민동산이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통과한다. 어민상과 김지하 시비, 화목9품 조성되어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어민동산은 어업인들의 풍어만선을 기원하는 어민상과 목포 출신 김지하의 시 '바다'가 새겨진 시비가 있는 유달산의 명소이다. 특히 조선 초기 문인 강희안의 원예서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의 '화목 9품'을 품계에 따라 나누어서 실개천을 따라가며 심어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바다가 소리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아 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미지의 바다
-김지하의 '바다'에서
자귀나무 꽃은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하는 꽃이라고 한다. 여름날 연분홍으로 피어나는 부챗살 꽃이 예쁘다. 일반 자귀나무에 비하여 잎이 족제비싸리같이 크고 수술이 많아서 왕자귀나무라는 이름을 얻은 것 같다.
중앙에 목포 해양대학교가 있고, 목포대교가 고하도로 이어진다. 오른쪽 뒤가 달리도일 것이라 추정한다.
오른쪽으로 목포 북항이 펼쳐지고, 바다 왼쪽에 율도, 그 오른쪽 섬은 용출도일 것이라 가늠한다.
왼쪽으로는 해양대학교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간다.
저 바위는 유달산 이등바위이며 일등바위는 이등바위 뒤쪽 유달산 정상에 있는 것 같다.
오른쪽 북항로를 따라 북항교차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북항교차로에서 직진하면 북항선착장과 북항회거리, 서해랑길은 북항교차로에서 오른쪽 목포시청 방향으로 이어간다.
북항회거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고햐대로를 따라 목포시청 방향으로 이어간다.
목포대교로 이어지는 고하대로는 고하도와 영암으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반대 방향 목포시청 방향으로 이어간다.
고하대로를 따라 연산동사거리까지 이어간다.
횡단보도를 건너 꿈의교회 앞 산정로를 따라 연산동 현대아파트 방향으로 올라간다.
산정로를 따라가다가 연산동 현대아파트 104동 옆 산정로280번길을 따라 올라간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산정로280번길을 따라 달구덕음식점 앞으로 이어간다.
달구덕음식점과 하늘비전장로교회를 지나 오른쪽 유방산(옥녀봉) 숲길로 진입한다.
산불감시초소 3호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운동시설이 있고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삼나무산림욕장은 왼쪽에 펼쳐져 있고, 목포시청은 오른쪽으로 내려가며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옥녀봉은 목포시청 뒤에 있는 해발 97m의 산으로 속칭 유방산이라고도 한다. 백련동에서 바라보면 마치 두 봉우리가 여인의 젖가슴처럼 보여서 생겨난 이름인 듯하다. 그러나 연산동 현대아파트 뒷쪽에 있는 풍천 임씨의 묘비에 "옥녀봉대동우여인좌(玉女峰大洞右麓寅坐"라고 새겨져 있는데 대동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연산주공아파트 부근을 가르키고 있으며 대동이 옥녀봉의 오른쪽 기슭임을 나태내고 있어 유방산의 본디 이름은 옥녀봉임을 알 수 있다. 또 수리봉이라고도 했는데 독수리가 날개를 쫙 펴고 하늘로 나는 모양에서 생겨난 이름이라 한다. 옥녀봉의 남쪽 기슭에는 목포시청과 KBS방송국, 마리아회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 기슭인 백련마을과 관해들판은 용해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어 많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왼쪽 산언덕에 삼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은 숲길을 따라 용해동으로 내려간다.
호남선 철도 왼쪽은 연산동, 그 오른쪽은 용해동, 서해랑길은 호남선 터널 위쪽에서 오른쪽 용해동 방향으로 내려간다.
용해동 함께걷는교회 앞 용당로331번길을 끝까지 따라가면 용해동행정복지센터 옆 서해랑길 18코스 종점에 이른다.
용당로331번길 축대벽에 '목포의 찬가'의 가사가 그림과 함께 적혀 있다.
1절 : 목화꽃 송이송이 들녘에 피고/ 푸른 물결 다도해를 감돌아드네/ 육지도 열리고 바다도 열려서/ 세계의 사연들이 오고가는 곳/ 내 고향 목포는 문화의 고장/ 알차게 뻗어나갈 미래를 향해/ 나가자 더 나가자 힘차게 더 힘차게~~~
2절 : 삼학도 사라져도 전설은 남네/ 충무공 가셨어도 노적봉 그대로네/ 민족혼 깊게 서린 유달은 날로 푸르러/ 그 정신 이어가는 아들 딸을 가꾸는/ 내 고향 목포는 역사의 고장/ 흥겹게 거두어갈 결실을 향해/ 나가자 더 나가자 힘차게 더 힘차게~~~
용당로331번길 입구에 용해동행정복지센터가 있다.
용해동행정복지센터 옆 용당로331번길 입구에 서해랑길 목포18코스와 무안19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