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삼릉은 "서쪽에 있는 3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희릉(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 능)
효릉(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 능)
예릉(조선 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 능) 외
소경원(소현세자), 의령원(의소세손), 효창원(문효세자)
그리고 일제시대 때 전국에 있던 왕실가족 태실과 왕자,왕녀
및 후궁들의 무덤을 경내로 옮겨왔고 광복이후 연산군의
모친 폐비 윤씨의 회묘까지 더해져 오늘날의 서삼릉이 됨
[ 대중교통 : 3호선 원흥역 7번 출구에서 2.3km 도보 이동
태실권역은 서삼릉 정문에서 다시 2km 도보 이동으로
왕복시 약 10km 걷는 효과 있음 : 서삼릉 누리길
043번 버스는 있으나 1시간 간격이라 걷는 게 나았음]
하지만 1960년대 경제개발을 도모하면서 왕릉의 많은 땅을
국가가 아닌 개인이나 기관이 소유하면서 왕릉구역은 심각한
폐해를 보게되어 아직까지도 개방 못하는 구역이 남아있습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지정되면서 개방이 안 된
왕릉을 조속 개방키로 하여 양주 온릉에 이어 서삼릉 효릉까지
2023년 9월부터 일반에게 개방됨으로써 남한 40기 왕릉 모두가
개방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다만 반드시 사전예약을 통해 하루 3차례 30명씩만 입장하고
반드시 해설사와 동행해야만 하는 아쉬운 점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반가운 일이죠.
[희릉 :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1491~1516) 윤씨 능]
장경왕후 윤씨는 1506년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양주 온릉)가
왕비가 된지 7일만에 폐위된 후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이듬해 왕비가 됨
중종과의 사이에서 효혜공주를 낳았고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중종 사후 희릉 근처에 중종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 했으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에 의해 중종만 강남으로 옮기면서
다시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이 됨
[문정왕후는 본인이 죽은 후 중종과 같이 합장하려 했으나
후대들이 풍수지리를 들어 정릉이 아닌 태릉에 모십니다.]
[예릉 : 조선 25대 철종(1831~1863)과 철인왕후(1837~1878)의 능]
철종은 사도세자의손자 전계대원군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이복형이
역모에 연루되어 14살 때 강화도 유배지에서 살던 중 19살 때인 1849년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릅니다.
어쩌다 왕이 된 강화도령으로 15년간 왕위에 있다 1863년 33세에 승하함
철인왕후 외 후궁 6명 사이에서 5남1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어
자손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불행한 왕입니다.
철인왕후는 안동김씨 가문 출신으로 철종 승하후 15년을 더 살다가
42살에 별세합니다.
[의령원과 효창원]
의령원은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첫 아들이 의손세손이
1752년 3세 때 죽자 조성한 원. 원래 추계예술대에 있던 묘소를
1949년 이곳으로 이장함.
1752년에 태어난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정조가 훗날 왕이 됨
효창원은 22대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의 원
1782년 의빈 성씨로부터 태어나 22개월 후 왕세자가 되었으나
1786년 다섯 살때 홍역으로 사망함
당초 지금의 효창공원내 효창묘로 있다 1944년 이곳으로 이장
정조의 비통한 마음이 담긴 신도비 표석만 옮겨옴
문효세자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적어내려간 정조의 글
오전에 여기까지 관람하고 정문을 나와 2km 떨어진 효릉과 태실권역은
오후 1시 예약 시간에 맞춰 도보로 이동하여 근처 보리밥 식사 후 대기함
[예약은 7일에서 3일 전까지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함]
오후 1시 태실권역 정문에 도착하니 예약자가 오직 나 혼자 뿐
안내자 한 분과 해설사 한 분을 대동하고 약 2시간에 걸친 탐방에
송구스런 마음 금할 길 없으나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으로 행복한 시간
[효릉 : 조선 12대 인종(1515~1545)과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능]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의 아들로 태어나 1520년(중종15)왕세자에 책봉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9개월만에 역시
세상을 떠납니다. 25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많은 공부를 통해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엄청난 효자였던 인종은 너무나 짧은 재위기간에
후세들의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합니다.
인성왕후는 1524년 왕세자빈이 되었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됩니다. 자식 없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실 권역]
왼쪽이 왕의 태실, 오른 쪽은 왕자 등 태실
[왕자, 왕녀 묘]
맨 뒤편 좌측이 세종대왕의 첫째 따님인 정소공주의 묘
오른 쪽이 예종의 첫째 아들 인성대군의 묘
[숙의 묘역]
[빈과 귀인 묘역]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묘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이며 영조의 첫사랑 의빈 성씨 묘
본명은 성덕임으로 10살에 궁에 들어와 홍씨 가문일을 돕던 부친의 영향으로
혜경궁 홍씨가 보살펴 주던 마음씨 착한 여식이었다 함.
어린 시절 같이 지냈을 거로 보이던 정조가 세자이던 14살 때 승은을 내리려 하나
거절함. 이유는 세자빈을 배려한 태도로 정조는 이해하고 넘어감
그리고 15년후 왕에 오른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나 또 같은 이유로 거절하자
정조가 하인들을 문초하자 할 수 없이 승은을 입고 이듬해 아들을 출산함.
나이 30세에 첫 아들을 본 정조가 기뻐하며 성덕임은 의빈에 봉해지고
아들은 세자(문효세자)에 책봉됨. 그 후 딸을 낳았으나 2개월만에 죽고
문효세자도 5살 때 홍역으로 사망하자 실의에 찬 의빈성씨는 5개월후
임신 9개월인 몸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안타까운 러브스토리로 많은 드라마의 소재가 된 장면이지요.
오늘날 효창공원의 유래가 된 문효세자의 효창원 옆에 어머니 의빈 성씨가
안장되어 있으며 각 비석에는 정조의 애끓는 이별사가 전해져 오는
정조가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라는 닉네임의 주인공 의빈성씨 성덕임!!
그녀가 바로 이 곳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헌종이 사랑한 경빈 김씨의 묘
빈과 귀인의 묘역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회묘]
폐비 윤씨는 1473년 성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1476년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됩니다. 같은 해 원자(연산군)을 낳았으나 투기가 심해 왕비로서의 품위를
잃었다 하여 1479년(성종10) 폐위되었고 3년 뒤 왕명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비 윤씨인 것을 알고 사당도
짓고 무덤도 고쳐 회묘라 함. 추후 무덤을 왕릉의 격에 맞게 꾸며 회릉으로
높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후 다시 회묘가 됨
원래 회기동 경희대 부근에 있넌 회묘는 1969년 현재 자리로 이장됨
[ 연산군의 명으로 모든 석물이 왕릉에 준한 수준일 뿐 아니라
최고의 솜씨로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음]
감사합니다.
첫댓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의빈성씨의 인장
의빈 성씨 인장의 글씨모습: 손에 쥐고 사용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왼쪽 12번)
의빈성씨가 필사한 곽장양문록의 한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