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 스페인 정리하기
스페인 중부 지역에는 메세타(Meseta, 대규모 평원지대)가 있음.
이 지역 전체는 높은 고지대와 깊은 골짜기들로 이루어진 고원지대로, 메세타 때문에 스페인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 산지가 가장 많은 곳임.
메세타의 중간엔 마드리드가 있음. 마드리드가 수도인 이유도 스페인의 중앙에 있기 때문.
스페인의 산악지형과 면적은 강력한 정치적 통치력을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오히려 각 지역마다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적 및 언어적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게 함.
이러한 문화적 차이들은 현대에 들어서 바스크, 카탈루냐 등의 분리독립 운동으로 이어짐. 또한 지방에는 폭력적인 지역 민주주의의 잔해가 남아 있음.
스페인은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인구밀도가 훨씬 낮음. 마드리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도시는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음(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빌바오…). 스페인의 인구는 수 세기 동안 변동이 컸음. 현재 인구는 약 4천 7백만 명이지만, 향후 40년 내에 5백만 명 정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4번째로 국토 면적이 넓은 나라. 프랑스, 포르투갈, 지브롤터(영국령), 안도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 모로코 내에 스페인령 고립영토인 세우타와 멜리야가 있음. 지중해에는 모두 151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스페인령의 발레아레스 제도가 있음. 이 제도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군도를 이루고 있지만,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마요르카, 메노르카, 이비사, 포르멘테라, 카브레라 등 5곳뿐. 스페인 남쪽으로 가면 북서아프리카 해안으로부터 1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가 있음. 카나리아 제도에는 테네리페와 그란카나리아 등 큰 섬들이 8개 있음.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스페인으로 하여금 방어적 측면에서 군사적 이점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지중해를 드나들 수 있는 권한과, 군사 및 교역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항구와 기지,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군대 중 하나를 가질 수 있게끔 했고, 제국까지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점만 있었던 건 아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아주지만, 교역 측면에서는 원활한 흐름을 방해함. 또한 산악지대에 가까이 붙어 있는 좁은 평야는 농업 발전에 있어 공간적 제약이 됨. 메세타 지역 평야에서는 많은 식량을 생산하고 있지만, 산맥 때문에 나라 주변과 항구들로 가는 이동을 막고 있음.
스페인에는 넓은 평야 지대를 따라 끊기지 않고 흐르는 큰 강이 없음. 대다수 강은 길이가 짧고 수량이 적으며, 여름이면 아예 물이 말라버리는 곳들도 있음. 최근 들어서도 심한 가뭄으로 인해 작물이 말라 죽고, 지역 전체에 제한 급수가 시행되는 일도 자주 발생함. 스페인의 주요 다섯 개 강 중 네 개가 대서양으로 흐르고, 에브로강만 지중해로 흘러든다. 대다수 강들은 배를 띄우기 어려워 내륙으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이용하지 못해 물자를 실어 나르거나 전쟁 중 군대를 이동시키는 데도 쓸모가 없다. 유일하게 운항이 가능한 내륙의 하천은 과달키비르강. 이 강이 지나는 세비야가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해양을 운항하는 선박들이 오갈 수 있는 내륙 항구임을 의미함. 그래도 제한적이지만, 이 나라의 강들은 농경지에 물을 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며, 현대에 들어서는 수력 발전의 원천이 됨.
스페인 남부 산악지대는 반도의 동과 서를 가로질러 내달리면서 대서양의 습한 공기를 가로막음. 그로 인해 북쪽의 갈리시아와 칸타브리아 산맥은 이득을 누리지만, 메세타 평야 지대에는 약간의 비만 내리게 해 물에 대한 압박을 주고 있음. 지중해 연안에서는 다공성 암반 지역 주변으로 과도하게 지하수를 끌어올려 바닷물이 스며들어 그곳 땅의 염도를 높여 놓았음. 이 때문에, 지역 간 물에 대한 협상을 하기도 함. 스페인은 이웃 나라들과 물 배분 문제로 다투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함.
스페인의 산맥과 강들이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어렵게 한 탓에 스페인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음. 이 때문에 각 지역의 정체성과 언어가 보존될 수 있긴 했음. 스페인 정부는 이러한 지리상의 장벽을 철도와 도로망으로 극복하려고 애써왔음. 1848년 바르셀로나 항만 지역과 마타로를 잇는 29km의 철도 구간 개통. 이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노선이 개통되면서 퍼져 나감. 현대의 도로 시스템은 20세기 후반 들어서 제대로 연결됨. 1969년 바르셀로나와 마타로를 연결하는 최초의 단거리 고속도로 개통. 이때, 중앙 정부가 <스페인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자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 등 지방 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반대하기도 했음.
스페인의 위치는 고대부터 북아메리카와 유럽 양쪽에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6백여 년 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것은 스페인의 건축, 종교, 언어 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서고트족에게도 수세기동안 점령당했는데, 서고트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음.
710년 서고트의 왕이 죽고 나서 스페인은 서로 경쟁하는 세력들로 분열됨. 위티자 가문이 로데리크 왕을 죽여달라고 이슬람군에게 부탁했지만, 이슬람군은 오히려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서 알 안달루스라는 이름을 붙임. 이슬람군은 피레네 북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하며 투르 전투를 벌임. 이슬람군과 프랑크 왕국의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이 승리함. 덕분에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음. 그리고 프랑크 왕국은 피레네 산맥 남쪽에 완충지대를 만듦. 투르 전투 이후 무슬림들이 밀려나고 756년부터 1031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3분의 2정도만을 차지한 채 안달루시아 우마야드 왕국을 세우게 됨. 이곳의 수도인 코르도바엔 무슬림 학자들이 들어와 문화를 부흥시켰고, 이때문에 스페인어에는 아랍어의 흔적이 많이 남게 됨. 1031년에 왕국이 무너지고, 소규모 왕국들로 분열되었고, 그리스도교 수장들은 이때가 이슬람의 통치로부터 벗어날 기회라고 여겼음.
1085년 그리스도교 군대는 메세타 중심부로 가는 요충지가 되는 톨레도를 탈환. 1212년 데스페냐페로스강 고개 뚫음. 1250년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그리스도교 세력 휘하로 들어가게 함.(그라나다 왕국 제외). 그라나다는 카스티야에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하면서 이후 250년을 잘 버팀. 이러한 레콩키스타(스페인 재정복 운동, 국토회복운동)은 통일된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조각조각난 형태로 진행되었고, 이것은 현대 스페인이 처음부터 조각난 상태로 시작됐고 여전히 그 상태로 남아있게 한 요인.
1469년. 무슬림 통치의 종말 시작.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도 왕자가 결혼하면서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관이 하나로 합쳐짐. 지리상으로 볼 때 이는 스페인 북동부와 서부가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의미함.
1482년 페르디난도 부부는 그라나다에 대한 공격 개시. 1492년 그라나다 항복, 카스티야에 합병. 이후 무슬림 통치가 끝나고 가톨릭 국가가 됨.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개종하거나 추방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때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대략 4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방정책은 1968년 폐지됨.
1609년, 개종한 무슬림인 <작은 무어인들> 또한 추방당함. 이 때 발렌시아 왕국은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고, 한 세대 동안 농업이 황폐화됨.
이후, 스페인은 반유대주의 문화를 뿌리 뽑으려 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임.
후디아다(judiada)-지저분한 술수나 잔인한 행동
레온(도시)의 후디오스(matar judios)라는 음료-<유대인을 죽이라> 라는 뜻. 오늘날에도 고난주간에 마심.
일부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있음.
스페인의 군주들은 자신들에게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개종시킬 종교적 책무가 있다고 믿었음. 이때 콜럼버스가 등장. 그는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에게 히스파니올라(서인도제도의 섬)으로 갈 만한 투자를 받았고, 거기서 소량의 금을 발견함. 이때 그는 엄청난 금광을 발견했다고 거짓말 했고, 포르투갈과 같은 다른 세력들도 콜롬버스의 사업에 참가하고자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쟁은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그린 가상의 선을 기준으로 서쪽에서 발견되는 것은 스페인 것. 동쪽에서 발견된 것은 포르투갈 것으로 정함(토르데시야스 조약).
대략 1500년부터 1681년 즈음, 남아메리카의 금광과 은광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부는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군사력 확충과 건축, 문학, 회화 분야에서 걸작들이 탄생.
하지만 스페인의 각 지역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각자의 방식대로 정치 및 경제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스페인은 국부의 상당 부분을 유럽 내 분쟁에 쓰고 있고, 이에 따라 대서양을 지킬 해군력을 위한 투자는 약화되었다. 16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스페인은 해상 항로 지배권을 잃어가고 있었음. 카리브해에 머물던 스페인 상선들은 태평양에 면한 중앙아메리카 항구에서 운송되어온 중국 상품들을 배로 실어 나르곤 했다. 또 금과 은을 가득 싣고 해군 범선의 호위를 받는 선박들에 합류해 쿠바 방면으로 가 스페인으로 향했다. 하지만 카리브해 해적들은 그 배들을 어떻게 공략할지 알아냈다.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인 월터 롤리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에게 돌아갈 수입의 흐름을 약화시켜 놓았다.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해협으로 전함 130척을 투입하여 영국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스페인과 싸우고 있는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스페인의 수입을 지키려하였다. 또한 영국을 침공해 프로테스탄트 여왕을 끌어내린 뒤, 네덜란드의 반란까지 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스페인의 함대 사령관의 경험 부족과 자금의 고갈 때문. 이로 인해 스페인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영토를 지키기 위한 네덜란드와의 전쟁조차 성과를 내지 못함.
1630년대, 마드리드는 빌바오의 방직공장에 세금을 부과했고, 대형 소금가게들을 징발. 이때 반란이 일어났고 3년동안 지속되며, 군대까지 투입됨.
1640년,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카탈루냐에서 개시. 카탈루냐도 전쟁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한 의도. 하지만 카탈루냐인들은 프랑스 측에 합류. 1648년에 카탈루냐와 프랑스군은 스페인군을 물리침. 1648년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고, 1652년에 심한 기근이 들어 마드리드가 카탈루냐에 대한 식량공급을 끊으며 다시금 지배권 획득.
이후, 여러 갈등과 전쟁을 치르며,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지브롤터 등을 빼앗김.
1805년, 트라팔가에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연합 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한지 2년 뒤에 프랑스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하며 독립전쟁 발발. 이때 스페인의 비정규군 무리가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힘.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볼리비아와 멕시코는 독립. 1898년 푸에르토리코, 쿠바, 필리핀도 독립하게 됨.
1923년, 스페인 내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발.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가 정권을 잡았지만, 1931년 치러진 선거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이 승리. 새 정부는 스페인을 공화국으로 선포. 군대의 고위 장교들을 축출하고, 교회의 특권을 배격. 광대한 사유지들을 국유화하고, 산업 노동자들에게 크게 상승한 급여를 지급하는 등의 일을 했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쿠데타가 일어났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야기된 혼란으로 1933년 다시 선거를 치뤘다.
이 선거로 들어선 우파 정권은 카탈루냐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조치가 포함되어 있던 정부의 정책들을 전면적으로 뒤집었음. 1936년 일련의 파업 사태와 탄압, 혼란스러원 경제 상황 속에서 또 다시 선거가 치뤄짐. 이번에는 통합 인민전선의 형태로 참여한 좌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으나, 서로 다른 파벌들이 극단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스페인은 내전이 일어나게 됨.
1936년 7월 12일, 골수 공화주의자이자 인민전선 정부의 무장 경비대의 수장인 호세 카스티요가 암살당함. 같은 날 밤, 경찰들과 무장한 좌파 무리가 우파 정치인인 호세 칼보 소텔로의 집을 급습하여 사망케 함. 소텔로의 장례식에서도 몇몇의 우파들이 시위자의 총을 맞고 사망.
장례식 사흘 후, 스페인령 멜리야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포함한 장군 네 명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킴.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반란군에게 훈련된 군대를 지원해줌에 따라 소련이 인민전선의 정부군측에게 무력 지원을 시도했음에도 프랑코의 반군 세력이 저항 세력을 뭉개버림.
1938년, 겨울 동안 공화파는 봉쇄로 인해 부대원들의 식량이 부족해지고, 점령 지역에서 프랑코 군대의 탄압을 피해온 난민들을 위한 생필품도 고갈. 1939년 1월, 바르셀로나를 떠난 50만 명의 시민과 병사들은 프랑스 국경 쪽으로 감. 이로 인해 프랑코 군대는 바르셀로나로 들어갈 수 있었음. 그해 2월 말,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를 새 정부 수반으로 인정. 3월에는 20만 명의 군인들이 마드리드로 무혈 입성. 4월, 프랑코는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냄.
프랑코는 자유주의 성향의 법률들을 폐기하고 파시즘적 통치를 함. 바스크나 카탈루냐 같은 지역의 정체성을 없애려 하며, 이들 지역의 언어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이 금지됨.또한 카탈루냐의 민속춤인 사르다나를 금지시킴. 카탈루냐 지역의 축구팀인 FC 바르셀로나의 명칭을 카스티야어로 바꾸거나 클럽의 배지를 바꾸게 하기도 함. 프랑코는 자급 경제로 알려진 경제 체계 도입. 이로인해 1940년대는 <굶주림의 해>가 됨.
카탈루냐 지역의 FC 바르셀로나의 팬들이나, 바스크 지역의 아틀레틱 빌바오의 팬들은 그들의 언어로 응원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마드리드에 대한 저항을 표출. 스페인의 게릴라들도 폭동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
프랑코는 파시즘 통치를 하며 스페인을 고립시킴. 하지만 공산주의인 소련의 군대가 서유럽을 침공하면, 소련이 지중해와 대서양의 접근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스페인에 대한 정책 변화를 약속하며 스페인을 미군이 전략적 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후, 2년 뒤 마드리드 조약이 맺어짐.
마드리드 조약은 스페인이 향후 20년간 20억 달러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받는 대신 미군에게 육군과 공군, 해군기지들을 허용한다는 내용. 이로 인해 스페인의 국민들의 생활은 조금 나아짐. 스페인은 무역의 규제를 좀 더 느슨하게 풀고, 외국인 투자도 허용.
1969년 프랑코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자신의 뒤를 이을 국왕으로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지명하는 법안에 서명. 카를로스 왕자가 기존의 정치 구조를 따를 것이라 믿었기 때문. 하지만 카를로스 왕자는 스페인을 유럽의 민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정당을 부활시켰고, 언론 탄압을 풀었다. 1976년에 시행된 국민투표로 입헌 군주제로 가는 개혁안이 찬성되어 통과됨.
이듬해에는 총선이 치뤄졌고 중도 우파 정당이 정권을 창출.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코주의를 거부했으나, 프랑코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음.
1981년, 테헤로 중령이 이끄는 2백 명의 민병대 부대원들이 의사당 건물로 난입해 쿠데타 시도.->실패
1981년에 들어선 사회당 정권은 처음으로 프랑코 정권 출신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최초의 정부.
1982년, 스페인은 나토에 가입.
1986년, EU 회원국 됨.
1999년, 유로화 채택.
바스크 지역 : 1512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갈라졌을 때 생긴 7개의 전통적인 지역들로 이뤄짐.
스페인 쪽은 북아일랜드 절반 크기. 인구 약 220만 명.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사람들은 바스크를 에우스칼 에리아(Euskal Herria)라 부르며 하나의 나라로 여김.
이들 인구의 4분의 1이 에우스카라어를 사용하며, 라틴어나 아랍어, 스페인어를 밀어낼 정도로 막강함.
이러한 민족의식은 일정한 자치권이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드러남.
1959년에 설립된 ETA<Euzkadi ta Askatasuna(바스크 조국과 자유)> 는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양쪽에 걸쳐있는 바스크 국가를 세우고, 프랑코 시대에 받았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만들어졌다.
1968년부터 이 단체는 총격사건과 폭탄테러, 납치, 살인 등 폭력을 저질렀음.
결국 1978년, 스페인 헌법은 바스크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
2011년 ETA는 폭력의 완전한 중단에 합의.
2018년 해체 선언
카탈루냐 : 면적은 벨기에와 비슷함. 인구 750만 명. 대부분 카탈루냐어를 사용.
동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 피레네 산맥. 서쪽에는 에브로강이 아라곤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음. 남쪽으로는 발렌시아와 맞닿아 있음. 바스크와 마찬가지로 인구 대다수가 해안 근처에서 거주.
방직업으로 부를 축적. 현재는 중공업과 관광업 등으로 경제를 다변화 시켜감.
스페인 카탈루냐 사람들은 전면적인 독립을 원함.
카탈루냐는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더 독립을 원하고 있음.
(카탈루냐에서는 스페인의 국민 총 생산의 20%와 수출의 4분의 1을 담당)
2014년, 비공식적으로 독립에 대한 찬반투표 실시.
2017년에도 투표 실시 -> 카탈루냐 의회는 승인, 스페인 대법원은 인정 안함.
두 투표 모두 투표율이 높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찬성의 비율이 높았고, 카탈루냐 의회는 독립 선언.
마드리드 정부는 카탈루냐 내각을 불신임하고 자치를 연기. 스페인 헌법 155조를 적용해 카탈루냐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
예로부터 북쪽의 침략자들은 바스크와 카탈루냐를 통해 스페인을 침략해왔음. 그렇기 때문에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분리 독립해 버린다면 스페인에게는 큰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 두 지역을 지키려고 함. 또한 이 두 지역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스페인의 주요 지상 보급로로 연결되고, 스페인의 주요 항구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임.
이러한 상황을 다른 나라들도 주목하고 있는 중. 만약 카탈루냐가 독립하고 EU로부터 배척당한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카탈루냐와 새로운 우호 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
러시아는 그리스에 발판을 마련하려고 공을 들여왔는데, 지중해 서쪽에서도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면 굉장한 이득이 될 것이다.
중국은 EU의 경제적 영향력과 개별 무역 거래에 반대하는 규정에 따라 EU 권역에서는 거의 차단된 상태. 카탈루냐가 독립된 국가가 되면 스페인은 카탈루냐의 EU 가입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고, 중국은 유럽 지역의 비유럽 성향의 카탈루냐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될 것이다.
또한 카탈루냐가 독립하면 코르시카, 스코틀랜드, 플랑드르, 시칠리아, 바이에른 등 유럽 각국의 독립운동을 연쇄적으로 부추길 위험이 있음. 만약 이들 지역이 독립한다면 EU에 가입할지도 미지수. 카탈루냐가 독립되었을 때, 중국의 침투를 막기 위해, EU는 카탈루냐에게 회원국 자격을 허용하고 싶을 수도 있음.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다른 지역의 독립주의자들을 자극할 위험도 있음.
카탈루냐를 EU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카탈루냐는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에 가입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EFTA에 가입하는 방안을 생각하는 것은 영국도 마찬가지. 카탈루냐 혼자 EFTA에 가입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영국도 가입한다면 EFTA가 훨씬 강력한 기구로 성장할 것이고, 이것은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EU를 탈퇴하고, EFTA에 가입하고픈 유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
이러한 이유들로 EU는 카탈루냐의 자결권에 미온적인 태도 유지.
EU에서도 카탈루냐에서 진행한 투표는 합법이 아니라며, 카탈루냐의 독립을 막고자 함.
또한 EU는 중국을 견제하고 강력한 EFTA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 중.
스페인은 18세기 초반에 영국에게 빼앗긴 지브롤터를 돌려받고 싶어함.스페인에게 지브롤터는 대서양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해주는 곳이기 때문. 지브롤터가 스페인에 귀속되면 이곳은 현대 스페인 방위의 핵심이 될 것. 스페인은 바다를 활용하는 활동이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의 해군이 필요하고 대규모의 항구가 필요함.
하지만 영국의 해군도 지브롤터를 유용하게 사용해와서, 쉽게 내주긴 어려운 상황. 그래서 영국은 지브롤터 주민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고, 2002년 지브롤터 주민들을 대상으로 스페인 영토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조사를 실시. 99%의 주민들이 반대하기도 함.
스페인은 필요한 에너지의 6분의 1을 수력 발전으로 충당. 태양광 발전량도 풍부.
스페인은 유럽에서 특히 태양광과 풍력이라는 재생 에너지를 선도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
스페인은 가까운 미래를 위해 여러 지방 정부가 모인 하나의민족국가와 거기서 야기되는 긴장감을 균형있게 유지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