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1/1일[ 1월 1일 탄생화] 스노우 드롭(Snow Drop)
꽃말 : 희망
수선화과
원산지: 지중해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던 날. 갑자기 꽃이 지고 나뭇잎이 떨어지더니 찬바람이 휘몰아쳐 순식간에 주위가 온통 눈으로 덮이게 되었답니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는 두 사람 앞에 천사가 사뿐히 내려와 "봄이 가깝도다" 하고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사알짝 눈을 매만지자 눈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녹아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이 순백의 가련한 꽃 스노우 드롭. 영어명 'Snow Drop'의 유래는 '눈 귀걸이'에서 왔답니다.
꽃 모양이 작은 귀걸이를 연상시킵니다. 영국에서는 '성모의 작은 촛불'로 불리기도 하여 성촉일의 꽃으로 되어 있습니다.
꽃말 : 품종이 무수히 많습니다. 영원한 눈처럼 하얀 것이 이 꽃의 운명. 1월1일에 태어난 당신은 눈이 내려도 찬바람이 불어도 결코 굴하지 않는 스노우 드롭처럼 인내심 강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선천적인 합리성, 성실성을 소중히 간직하여 평생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삽니다.
*스노우 드롭 Snow Drop -학명Galanthus L, 석산과 갈래투스속, 내한성 구근초로 원산지는 유럽 남부, 코카서스 지방 :
재배는 9∼10월에 반응달에 구근을 심는다. 구근은 건조저장을 싫어하니 그대로 지하에 두며, 원예 화분심기에는 늦봄에 잎이 져도 휴면시킨 채 가끔 관수만 하고, 분구는 늦여름에 하되 빨리 심어야 한다. 두 잎이 한 꽃봉오리를 보듬고 있다가 2월경 램프와 같은 꽃을 피우며 꽃빛은 순백색(줄기와 잎은 진초록)이다. 꽃의 용도는 화단용, 화분심기용, 정원용 등으로 길러지고 있다. 스노우 드롭은 특히 유럽 남부의 코카서스 일대에 겨울의 정취를 돋보이게 하는 꽃으로 18종이 주종이다.
[꽃 말] : 희망希望, 첫사랑의 한숨, 위안慰安, 어려울 때 친구
[탄생화] : 1월 1일에 태어난 귀하는 눈이 내려도 찬바람이 불어도 결코 굴屈하지 않는 스노우드롭처럼 인내심忍耐心이 강强한 성격性格을 갖고 계시는 것이 장점이십니다.
2013년 1월 1일 오늘의 역사
" 1월 January란 명칭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Janus에서 비롯되었다.
앞과 뒤에 모두 얼굴이 있는 신으로서 뒤의 얼굴로는 과거를 보고
앞의 얼굴로는 미래를 본다. 그래서 해가 바뀌는 1월의 신이 되었다.
1143 고려 일식 발생
1413 조선일식 발생
1422 조선 일식 발생
1430 경상도 전라도에 지진 발생
1574 율곡 이이, 임금에게 <만언봉사> 올림
1883 제물포 개항, 인천으로 이름 바꿈 부산항과 원산항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
1896 그레고리력 도입 (조선 고종 33) 우리 나라 양력 사용 시작
1897 (고종광무 원년) 서울에 최초의 석유 가로등 설치
1900 정부 만국우편연맹 가입
1905 경부선 (서울-부산) 개통
1910 양력 1월1일을 공휴일로 지정
1911 조선독립운동 말살책인 105인 사건 조작
1912 한국 표준자오선 일본표준시에 맞춰 127도 30분에서 135도로 변경
1913 어린이 교육잡지 붉은 저고리 창간
1917 이광수 매일신보에 무정 연재
1923 남대문역 경성역으로 개칭
1924 김구 선생 부인 최준례 여사 별세
1928 조선일보, 최초로 신춘문예 입선작 발표
1931 염상섭 장편 삼대 를 조선일보에 연재 (-9.17)
1934 수필가 전혜린 출생
1935 한국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 출생
1936 “학술원 설립 동아일보가 제안”
1938 전국 1400시장의 장날에 양력 사용
1946 -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선언'
1948 전기요금 6배로 인상
1949 ECA원조도입 시작
1949 미국, 한국정부를 정식 인정(초대 대사에 무초)
1949 남북한 우편물교환협정 체결
1949 친일파와 부일협력자 처단 위한 반민특위 발족
1949 백범 김구 선생,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을 염원하는 신년사
1950 제1회 건국국채 발행
1951 중공군 6개 사단, 38선 공격 개시
1954 정비석 장편소설 자유부인 서울신문 연재 시작
1955 문예지 [현대문학 現代文學] 창간,
1955 문교부 외래어표기법통일안 발표
1956 영암선 개통
1957 관훈 클럽 결성
1958 언론 제한을 포함한 선거법 국회 통과
1960 호적법 제정 공포
1962 정부 연호를 서기로 바꿈
1963 KBS-TV 유료광고방송 실시, 시청료 징수 업무 개시
1963 부산 직할시로 승격
1963 정치할동 금지 해제
1963 만화영화 아톰 탄생
1964 미터법 실시
1965 사병 복무기간 2년 10개월에서 2년6개월로 단축
1966 한국-일본, 대사 임명에 동의 주일대사에 김동조, 주한일본대사에 기무라(木村) 임명
1966 험프리 미국 부통령 내한
1967 대구서문 시장에 큰 화재
1968 부동산 투기억제세법 발효
1970 박정희 대통령, 모든 공문서와 기타 표현물을 완전히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지시
1971 정부 근대화백서 발표
1971 남산 제1호 터널 개통
1974 아프가니스탄 남북한과 동시 수교
1977 생활보호대상자 및 저소득자 2백9만5천명 대상으로 의료보호제도 실시
1978 동력자원부 발족, 초대 장관에 장예준
1981 중앙정보부 명칭을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
1982 한국전력공사 발족
1982 국제보건규칙의 검역전염병에서 천연두 관계조항을 삭제
1983 고위공직자의 재산등록 명시한 공직자 윤리법 발효
1987 농수산부 농림수산부로 개편
1988 국민연금제 최저임금제 실시
1988 김일성 신년사에서 남북연석회의 제안
1989 해외여행 자유화 전국민으로 확대
1990 KBS 문자다중방송 시작
1990 김일성, 신년사 통해 남북한 최고위 당국 정당 수뇌협상회의 제의
1991 김일성, 신년사 통해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 소집 제의
1993 한국-체코 국교 수립
1993 한국 -슬로바키아 국교수립
1994 서울시, <서울 정도 600년의 해> 선포
1995 쓰레기 종량제 전국 실시
1996 중요 무형문화재 30호 '가곡' 예능보유자 김월하(金月荷.사망,
1997 114 안내전화 유료화
1997 당산대교 철거 시작
1998 동아일보 신년호부터 전면 가로쓰기 단행
2000 영화 박하사탕 개봉(-3.24)
2000 Y2K(밀레니엄버그) 대란 우려 불발
2000 만국우편연합(UPU)가입 100주년 기념
2003 독도에 우편번호 ‘799―805’번 부여
2004 고속철시대 개막… 서울역사 준공,
2005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회장 국제상업회의소 회장에 선임,
2005 한국철도공사가 출범하다.
2007 전 동자부장관 유양수씨 별세
2007 새해 공식임기 시작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신년사'
2008 호적 (戶.籍)을 대신하는 가족관계등록부 도입
2009 106년 만에 열린 팔미도 '감격 해맞이'
2009 DJ “현 정권은 독재자 편 섰던 사람들”
2010 ‘연령차별 금지법’ 2010년 부터 전면 시행
해외 오늘의 역사
1115 여진족의 아골타 금 나라 건국
1484 츠빙글리/Huldrych Zwingli출생
1618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출생
1748 스위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 사망
1752 로스/Betsy Ross출생
1785 영국 더 타임스 창간
1801 소행성 처음 발견
1804 아이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814 홍수전/洪秀全출생
1861 모나코 독립
1863 미국 대통령 링컨, 노예 해방 선언
1863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태어남
1864 미국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태어남
1867 룩셈부르크 독립
1879 영국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출생,
1879 폭스/William Fox출생
1886 영국 버마 병합
1892 폴란드태생 미국지휘자 아서 로진스키 출생,
1895 후버 J(ohn) Edgar Hoover출생
1901 호주 건국
1905 시베리아 철도 (파리-블라디보스 톡 구간) 특급열차 운전개시
1910 청 나라 중화민국으로 개칭
1912 중화민국 수립을 선포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취임
1919 리히텐슈타인 독립
1922 헤이그에 국제재판소 개설
1934 독일 소설가 바서만 사망
1937 중국 공산당 강서성 (江.西.省)에 정권수립
1942 합방국 26개국 공동선언 발표
1945 프랑스 UN 가입
1946 히로히토 일왕 인간선언 발표
1947 중국, 신헌법 공포
1948 소련, 중국내전 불개입발표
1953 맬다이브 공화국 수립
1956 수단 영국으로 부터 독립
1958 유럽 공동체 시장(EEC) 발족
1959 카스트로 쿠바혁명 성공
1960 카메룬 독립
1962 서사모아 뉴질랜드로부터 독립
1965 아랍 공동시장 발족
1966 프랑스 제4공화국 초대 대통령 오리올 사망
1967 미국,영국,프랑스,일본 최초의 4원 TV 중계에 성공
1969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제 발족
1972 프레스카드제 실시
1973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EC에 가입
1975 워터게이트사건 4명 유죄판결
1977 체코슬로바키아 '77헌장'
1978 인도항공 소속 보잉 747기 폭발로 봄베이 근처 바다에 추락, 213명 사망
1979 미국과 중국, 30년만에 정식 국교 수립
1979 미국-자유중국 단교 ,상호 방위조약 파기
1981 팔라우 공화국 독립
1981 그리스 10번째로 유럽연합(EC)에 가입
1984 세계최대기업 ATT사 (미국전화전신회사), 22개의 지역전화회사(자회사) 를 분리 독립
1984 브루나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1990 딘킨스 뉴욕시 최초의 흑인시장으로 취임
1993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할
1994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발족
1995 세계무역 기구 (WTO)출범
1995 노벨물리학상(1963년)수상한 미국물리학자 유진 폴 위그너 사망
1999 유로 (EURO)체제 출범
2002 유럽 유로화 공식 사용
2004 고이즈미 신사참배,
2007 홍콩 전역 사실상 금연
2007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럽연합 가입
2009 태국 나이트클럽 화제 최소 59명 사망
2010 2010년 우표를 장식할 영웅들 공개
2010 차프타 발효…세계최대 ‘경제 만리장성’ 우뚝
2010 - ‘연령차별 금지법’ 2010년 부터 전면 시행
연령을 이유로 한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연령차별금지법)이 내년부터 모든 고용영역에서 시행된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31일 “2010년 1월1일부터 연령차별금지법이 확대 시행됨에 따라 임금과 임금 외 금품 지급, 복리후생, 교육·훈련, 배치·전보·승진, 퇴직·해고 등 고용의 모든 단계에 걸쳐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행위가 전면 금지된다”고 31일 밝혔다.
지난 3월부터 모집ㆍ채용 영역에서 우선 적으로 시행된 연령차별금지법은 이에 따라 2010년 부터 임금과 임금 외 금품 지급, 복리후생, 교육ㆍ훈련, 배치ㆍ전보ㆍ승진, 퇴직ㆍ해고 등 모든 고용 영역으로 확대 시행된다.
이에 따라 고용과 관련해 합리적 이유 없이 다른 연령대의 사람과 달리 불이익한 취급을 당한 당사자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다. 진정 접수는 전화(1331)나 홈페이지, 우편, 방문 등을 통해 가능하다.
인권위 시정권고 후에도 이행하지 않을 때는 노동부가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등이 부과된다.
한편 인권위는 2001년 11월부터 올해 12월까지 고용관련 연령차별 접수 사건 406건을 분석한 결과 모집ㆍ채용 차별이 299건(73.6%)으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또 퇴직ㆍ해고ㆍ정년차별 61건(15.0%), 승진ㆍ배치 차별 34건(8.4%), 교육 및 기타 차별 8건(2.0%), 임금 및 임금 외 금품 차별 4건(1.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경향닷컴 손봉석기자 paulsohn@khan.co.kr /경향닷컴 2009-12-31 14:59:09
인권위, 연령차별금지법 새해 전면 시행
국가인권위원회는 31일 연령을 이유로 한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연령차별금지법)이 새해부터 전면 시행된다고 밝혔다.
지난 3월부터 모집·채용 영역에서 우선 시행된 연령차별금지법은 이에 따라 2010년 1월1일부터 임금과 임금 외 금품 지급, 복리후생, 교육·훈련, 배치·전보·승진, 퇴직·해고 등 모든 고용 영역으로 확대 시행된다.
고용과 관련해 합리적인 이유 없이 다른 연령대의 사람(집단)과 비교해 불이익을 당한 당사자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거나 전화(국번 없이 1331), 홈페이지, 우편·방문 등을 통해 진정할 수 있다.
인권위가 시정을 권고하고 나서도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노동부가 시정명령과 3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한편 인권위가 2001년 11월부터 올해 12월까지 고용관련 연령차별 접수 사건 406건을 분석한 결과 모집·채용 차별이 299건(73.6%)으로 가장 많았고 퇴직·해고·정년차별 61건(15.0%), 승진·배치 차별 34건(8.4%), 교육 및 기타 차별 8건(2.0%), 임금 및 임금 외 금품 차별 4건(1.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서울=연합뉴스) 한상용 기자 gogo213@yna.co.kr /MSN 뉴스 2009-12-31 11:07
2010 - 차프타 발효…세계최대 ‘경제 만리장성’ 우뚝
1월1일부터…19억 인구 품는 거대 자유무역지대관세율 10%대 → 0%대 ‘뚝’…위안화 국제화 가속
* 차프타 : 중국-아세안 자유무역협정
새해 1월1일부터 중국-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자유무역협정(CAFTA)이 전면 발효됐다. 광활한 동남아를 무대로, 19억 인구를 품은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지대(인구 기준)라는 새로운 중국 중심의 경제지도가 그려진 것이다.
이번 자유무역협정 발효로 양쪽 교역 품목의 90%인 7000여개 상품의 무관세 무역이 시작된다. 중국이 아세안 상품에 부과하는 평균 관세율은 9.8%에서 0.1%로 내려가고, 아세안 국가가 중국산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율은 12.8%에서 0.6%로 떨어져 양국 교역이 급증할 전망이다.
2005년부터 중국-아세안 교역에서 일부 품목의 관세 인하가 시작된 결과, 양쪽 교역은 2003년 782억달러에서 2008년 2311억달러로 매년 평균 24.2% 증가했다. 순드람 푸슈파나탄 아세안 사무차장은 <아에프페>(AFP) 통신에 “중국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아세안의 세번째 교역파트너가 됐으며, 이번 협정 발효로 몇년 안에 일본과 유럽연합을 제치고 제1 교역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남아를 무대로 한 중국 기업들의 저우추취(해외진출·走出去)도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한진 코트라 베이징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 부장은 “이번 협정의 핵심은 투자분야 협정을 통해 중국 기업들이 아세안 투자를 늘리고 제조업 기지를 이전하는 등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세안 경제판도가 가속화되는 것”이라며 “이미 2008년 중국의 대 아세안 투자가 2007년에 비해 125% 급증했다”고 말했다.
아세안은 또한 중국 정부가 장기적 계획 속에 추진하고 있는 ‘위안화 국제화’의 주요무대로 부상할 전망이다. 중국은 2007년 12월 광시좡족자치구 및 윈난성과 아세안 국가와의 위안화 결제 계획을 발표했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과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번 협정을 통해 동남아에서 ‘위안화 경제권’이 더욱 빠르게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에 대한 농산품과 자원, 보석류, 식품 등의 수출 증가로 이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값싼 중국산 수입품의 대거 유입으로 타격을 입을 전망인 섬유, 신발, 철강 등 공산품 분야 기업들을 중심으로 반발도 확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경제단체들은 정부에 2012년까지 취약 분야 산업에 대한 관세율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중국-아세안 자유무역협정은 중국의 야심찬 자유무역협정 전략의 ‘선두주자’다. 중국은 모두 31개 국가·지역과 총 14개의 자유무역협정을 추진중이며 이미 8개의 자유무역협정에 서명했다. 천더밍 중국 상무부 부장은 최근 “무역보호주의의 심화로 다자간 협상 진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자유무역협정이 교역을 활성화하는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면서 “한국 일본 등과 진행 중인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한겨레 2009-12-31 오후 06:59:36
2010 - 2010년 우표를 장식할 영웅들 공개
노벨평화상 수상자 테레사 수녀, 퓰리처상 수상자 빌 마울딘, 그리고 여배우 캐서린 헵번 등이 2010년 발매될 우표의 주인공이 된다.
미 우정국(US Postal Service)은 2010년 새해를 맞아 올 한 해동안 발매될 우표의 디자인들을 공개했다.
인물을 소재로 한 우표 시리즈에는 또 ‘노래하는 카우보이’ 진 오트리, ‘미국의 보물’로 유명한 예술가 윈슬로 호머 등도 등장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최초의 흑인 야구 리그의 주역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하와이의 자연 경관, 신문연재용 유명 만화 시리즈도 발표된다.
다양한 소재와 디자인을 공개한 우정국의 발표는 우표수집가들을 벌써부터 설레게 하고 있다.
할리우드 = 채지훈 기자, ukopia.com /기독일보 2010-01-01 17:57:23
2009 - DJ “현 정권은 독재자 편 섰던 사람들”
“1년간 악몽 꾸는 것 아닌지 혼란 민주주의·경제·남북관계 위기”
“지금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고 사형 당하고 고문 당할 때, 독재자의 편에 섰거나 방관했던 사람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초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 전 대통령은 1일 오후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국민의 정부 신년하례식에서, “작년 1년 동안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져 악몽을 꾸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며 △민주주의 △경제 △남북관계 세 가지가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그는 “5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민주주의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을 거치며 이제 반석 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민주주의가 큰 도전을 받고 20~30년 전으로 역주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러나 강권정치나 억압정치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촛불집회에서 나타났듯이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경제 위기에 대해서는 “금융기관과 기업은 건전한 편이므로,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 서민, 비정규직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소비가 늘어나고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 정부는 건전한 은행과 기업을 넘겨 받은 데 대해 전임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은 레이건에서 부시까지 시장의 규제를 완화하고 부자에게 감세 혜택을 줘 일자리를 만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썼지만 그러다가 경제가 실패했다”며 “오바마는 부자가 아니라 서민계층을 집중 지원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 고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린다고 하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며 “특별법을 만들어 지위를 항구적으로 보장하고 정부예산으로 급여를 보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한겨레 2009-01-01 오후 09:26:04
2009 - 106년 만에 열린 팔미도 '감격 해맞이'
국내 1호 등대섬… ‘은둔의 땅’ 찾은 1000명 벅찬 함성
기축년 새해 첫날부터 군사작전지역이었던 팔미도가 일반에 개방됨에 따라 인천항 연안부두∼팔미도의 바닷길이 열렸다. 1903년 국내 최초로 등댓불을 밝힌 팔미도가 일반에 개방된 것이다.
1일 오전 6시경 인천 중구 연안부두에서 시민 1000여 명을 태운 유람선 3척이 ‘팔미도 해맞이’를 위해 출항했다. 유람선은 새벽바람과 거센 파도를 헤치고 50분 만에 인천항 남쪽으로 15.7km 떨어진 팔미도에 닿았다.
모래톱으로 연결된 두 섬이 마치 여덟 팔(八)자처럼 생겼다는 팔미도. 하얀 등대를 중심으로 팔미도 개방을 축하하는 레이저쇼가 관광객들을 맞았다. 2003년 100주년 기념행사 때를 제외하곤 일반인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은둔의 섬’답게 팔미도엔 소나무 소사나무 서어나무 등 울창한 산림을 비롯해 해안절벽, 백사장이 잘 보존돼 있었다.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2009년 인천 방문의 해’를 축하하는 대북(큰북) 공연이 펼쳐졌다.
이어 오전 7시 45분 붉은 해가 바다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바다가 다시 태양을 밀어 올려 팔미도 앞바다를 환하게 비추자 관광객들은 박수를 치며 함성을 질렀다.
시민들과 떠오르는 해를 지켜본 안상수 인천시장은 “인천 도약의 해가 될 2009년의 첫 해가 떠올랐다”며 신년 인사를 했다.
등대지기 김종환(52) 씨는 “잊혀졌던 섬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가슴이 뿌듯하고 감개무량하다”고 기뻐했다.
팔미도에 한국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3년 6월 1일. 이후 팔미도와 등대는 한국 근대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해 왔다.
1904년 2월 9일 팔미도 앞바다에선 일본과 러시아 함대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당시 러시아의 ‘바리야크함’과 ‘코레츠함’ 2척이 자폭 침몰해 러시아병사 770명이 숨졌다. 이에 따라 러시아대사관은 매년 팔미도 해상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팔미도 등대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기점이기도 했다. 1950년 9월 14일 밤 유엔사령부 맥아더 장군의 특별명령을 받은 켈로부대 특공대원 6명이 북한군에 점령됐던 팔미도를 탈환했다. 특공대원들은 곧바로 등대의 불을 켰고 이 점등을 신호로 261척의 함대가 인천으로 진격한 것.
팔미도의 옛 등대(높이 7.9m)는 100주년을 맞은 2003년부터 불을 밝히지 않고 있다. 대신 그 옆에 위성항법보정장치(DGPS)를 갖춘 새 등대(높이 26m)가 세워졌다.
새 등대 2, 3층은 등대박물관으로 꾸며 이날 개관식을 가졌다. 세계 최초 등대인 지중해의 파로스 등대, 로마제국의 라코루나 등대 등 등대의 역사와 항로표지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연안부두에서 떠나는 여객선은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두 차례 운항한다. 4월부터는 운항 횟수를 늘리고 주말 새벽엔 일출투어관광 프로그램도 마련할 예정이다.
팔미도=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동아닷컴 2009-01-02 03:00
2008 호적 (戶.籍)을 대신하는 가족관계등록부 도입
개인의 인적사항을 모두 드러내는 호적 대신 가족관계를 특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만을 담는 등록부를 말한다. 기존의 호주제가 2005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정으로 폐지되고 호적법을 대체하는 '가족관계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에 따라 2008년부터 도입되었다. 이에 따르면 가족관계등록부는 작성기준을 '호주'에서 '개인'으로 바꿔 개인의 존엄성과 양성평등 등의 헌법이념을 구체화하고 있다.
혼인이나 이혼ㆍ입양 등 인적사항을 모두 드러내는 기존의 호적과 달리, 생년월일ㆍ성명ㆍ주민번호 등 가족관계를 특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만 담고 있다. 무조건 아버지의 성을 따르도록 했던 부성주의 원칙을 수정해 부모가 혼인신고 시 협의만 하면 어머니의 성과 본을 사용할 수 있는 등 자녀의 성 변경이 가능해졌으며 기존의 본적 개념이 없어지고, 각종 신고를 처리할 관할을 정하는 기준으로써 등록 기준지가 도입됐다.
이 가족관계등록부는 가족관계, 출생과 국적, 개명 등 신분사항, 혼인과 입양 관련 내용, 친양자 입양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관련 증명서를 발급받을 경우에는 증명대상에 따라 가족관계증명서, 기본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입양관계증명서, 친양자입양관계증명서로 나누어 발급되므로 불필요한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단점이 없다.
또한 종전의 호적은 누구나 타인의 호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으나, 가족관계등록부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하여 발급권자가 제한된다. 결국, 이 제도의 취지는 이전 호적법의 '가족' 단위의 편제방식을 '개인' 단위로 전환해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증명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증명서 발급방식을 도입해 신분정보를 보호하는 것이다.
2007 - 새해 공식임기 시작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신년사'
새해 1월1일 유엔 사무총장 5년의 임기(연임땐 10년)가 시작되는 반기문 총장이 신년사를 발표했다. 다음은 반총장의 신년사이다.
<신년사>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그리고 투데이코리아 애독자여러분 대망의 2007년 정해년을 맞이하여 이곳 유엔에서 신년인사를 드립니다.2006년은 다른 어느 해 보다 저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한 해였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각별한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었기 때문입니다.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오늘 저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공식적인 임기를 시작합니다.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반도를 넘어 인류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저 자신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어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 세계 10위권의 수준에 걸맞은 역할과 기여를 해야 합니다.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저의 유엔 사무총장 선출에도 국제사회의 이러한 기대가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 사무총장으로서 세계속의 한국, 한국 속의 세계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올 한해 국민 여러분들의 건강과 행운, 그리고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 드립니다.
끝으로 새로출발한 투데이코리아의 무궁한발전을 기원드리며 애독자여러분들의 행운과 가정이모두 평안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임경오 기자 iko@todaykorea.co.kr /투데이코리아 2006년 12월 31일 (일) 09:45:21
반기문 UN 사무총장, 공식임기 시작
한국 출신의 반기문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공식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반 총장은 31일 자정을 기해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올랐습니다. 반 총장은 대대적인 유엔 개혁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반 총장은 올해 들어 각종 추문과 부패로 퇴색한 유엔에 대한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올해 62세의 반 총장은 북한과의 평화 구축도 재임 기간 중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 장관은 지난 12월 취임선서식을 가진 후,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차세대를 위해 보다 평화롭고 번영하며 공정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미국의 소리 VOA 01/01/2007
2007 - 홍콩 전역 사실상 금연
홍콩은 1일부터 식당·술집 등 모든 실내 사업장뿐만 아니라 공원·놀이터·버스정류장 같은 실외 공공장소 등 50만 곳에서 흡연을 금지했다. 이는 지난해 10월 논란 끝에 통과된 금연조례를 정식으로 시행한 데 따른 것이다.
이로써 84만명으로 추정되는 홍콩 흡연자들은 자기 집 바깥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사실상 없어졌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불붙은 담배를 들고 들어가면 벌금으로 최고 5천 홍콩달러(약 60만원)를 내야 한다. 이를 허용한 업주도 최고 징역 2년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나이트클럽·가라오케·사우나·마작게임장 등 여섯 가지 업소는 2년이란 유예기간을 두었다.
홍콩 정부는 지난해 10월, 금연구역을 이처럼 확대하면 관광산업에 의존하는 홍콩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담배회사와 요식업소의 주장을 물리치고 새 금연법안을 통과시켰다.
(홍콩/연합뉴스) /한겨레 2007-01-01 오후 08:55:08
2007 - 루마니아·불가리아 유럽연합 가입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1월1일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이로써 EU회원국은 25개국에서 27개국으로 늘었다. 또 슬로베니아는 이날부터 유로화를 공식 통화로 채택,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나라)도 13개국으로 늘었다. 신규 가입국인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정부청사에는 1일 EU국기가 게양됐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도 불꽃놀이와 레이저쇼 등으로 EU 가입을 축하하며 새해를 맞았다. /조선
2007 - 전 동자부장관 유양수씨 별세
유양수(柳陽洙.83) 전 동력자원부장관이 1일 밤 8시40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광주서중과 육사를 졸업한 유 전장관은 1963년 소장으로 예편, 필리핀·오스트리아 대사, 교통부·동력자원부장관, 한국석유개발공사이사장을 지냈다. 2003년부터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영결미사는 4일 오전 9시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빈소는 서울대병원. /조선
2005 - 한국철도공사가 출범하다.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 영어: Korea Railroad)는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공기업이다. 2003년 12월 31일 발효된 한국철도공사법에 의하여 정부 산하 철도청이 2005년 1월 1일에 철도 영업 부문은 한국철도공사로, 시설 보유와 건설부문은 철도시설공단으로 분할하면서 공기업의 형태로 출범하였다.
2007년 5월 7일부터 애칭으로만 쓰이던 코레일(Korail)을 브랜드명으로 내세웠으며, 공식 사명은 한국철도공사로 사용하고 있다. 2009년에 본사를 정부대전청사에서 대전역 동광장의 철도공동사옥으로 한국철도시설공단과 함께 이주하였다. 단, 광역철도본부는 서울본부에 있다.
역사
2005년 1월 1일 : 건설교통부 산하 철도청이 폐지되고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으로 분리됨.
2005년 12월 10일 : KTX 이용승객 5천만명 돌파
2006년 7월 15일 : 현업조직 개편 (5지역본부, 17관리역, 83사무소 → 17개 지사)
2006년 10월 29일 : KTX 1일 이용승객 15만명 돌파
2007년 5월 7일 : 코레일을 브랜드명으로 내세움.
2009년 1월 26일 : KTX 1일 이용승객 역대 최대 인원 (18만3천명이용)
2009년 9월 14일 : 현업조직 개편 (5본부 7실 3단 65팀, 17개 지사 139팀 → 5본부 8실 2단 63팀, 12개 지역본부 84팀)
2009년 9월 18일 : 제 110주년 철도의 날 행사에 맞추어 본사 사옥 이전 (정부대전청사 → 대전역 철도공동사옥)
/위키백과
2005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회장 국제상업회의소 회장에 선임,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이 세계 최대 민간 경제단체의 수장이 됐다.일 대한상의에 따르면 박 회장은 3일(현지시간) ‘경제계의 유엔’으로 불리는 세계최대규모의 민간 국제경제기구인 ‘국제상업회의소(ICC)’ 회장에 선임됐다. 이날 프랑스 파리 ICC 본부에서 열린 제188차 이사회에서 임기 2년의 제45대 회장에 선출된 것. 지난 2년간 ICC 부회장직을 수행해온 박 회장은 부회장 2년을 지낸 뒤 자동적으로 회장에 선출되는 정관에 따라 내년 1월부터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아시아권 출신 회장은 인도의 바라트 람(24대, 69~71년), 하리 싱하니아(39대, 93~94년)에 이어 박 회장이 3번째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ICC는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과의 정책 협의를 통해 국제통화제도 운영, 무역자유화 협상, 환경 등 주요 국제경제문제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위있는 민간기구다. 현재 138개국 경제단체와 기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박 회장이 ICC 회장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경우 무역규칙 제정이나 각종 국제경제 이슈에서 한국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또 세계 최대 민간 경제기구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우리나라의 민간외교에서도 큰 몫을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2000년 5월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한 박 회장은 재계 일 말고도 국제유도연맹 회장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 공식적으로 갖고 있는 직함만 60개가 넘을 정도로 광범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문화일보 2004/12/04 김교만기자 www.munhwa.com/economy)
*[“한국경제 도움안되는 4대입법에 허송세월”] -한국 경제나 기업의 경쟁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4대 입법’을 갖고 (정치권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지금처럼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는 기업을 도와주는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 여당은) 오히려 기업을 옥죄는 법을 만들고 있다.” 3일(현지시간) ‘경제계의 유엔’으로 불리는 국제상업회의소(ICC) 회장에 선임된 박용성(朴容晟·사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4일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정치권과 정부, 사회 지도층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는 “지금 한국 경제는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한 상태로 관료들도 ‘20년 동안 이렇게 정책 효과가 없는 것은 처음’이라고 토로하고 있다”면서 “내가 이헌재(李憲宰) 경제부총리 입장이라도 매우 답답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 본회의 통과 여부를 놓고 여야가 대치하고 있는 공정거래법 개정안과 관련해 “공정거래법 중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부문에 투자를 하려고 해도 못하게 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책임 아래 이뤄지는 자산운용에 대해 (정부가) 왜 간섭하는 것이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박 회장은 “이는 ‘기업은 항상 지도하고 감독해야 제대로 운영될 수 있다’는 (정부 여당의) 잘못된 의식 때문”이라며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이 스스로 판단해 개입하는 시스템이 작동되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현 정부 경제 정책의 좌파 논란과 관련해서는 “토지 공개념, 분양원가 공개 등 좌파 논란이 있는 것들은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참여정부의 정책 중 좌파 정책은 없다고 본다”며 “서로 비난하면서 좌냐 우냐 논란을 벌이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되며 이제 각자 역할에 충실하면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진 자들도, 우(右)측에 있는 자들도 반성해야 한다”면서 “18억 원짜리 집에 사는 사람이 종합부동산세 도입으로 세금 60만 원이 오른다고 아우성을 칠 수 있는가”라며 “사회 지도층은 지위에 맞는 역할과 의무를 다해야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박 회장은 또 “노동자 단체에 대응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있듯 환경단체를 견제하는 기능을 갖춘 (사측) 단체가 필요하다”면서 “지금까지는 (환경 분야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기업을 옹호해 줄 조직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박 회장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2%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 중에서 ICC 회장을 배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한국도 이제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하며 세계무역기구(WTO) 등과 협의할 때 우리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 2004/12/06 박중현 기자 www.donga.com)
2004 고속철시대 개막… 서울역사 준공,
*한국철도의 상징이자 100년 철도 역사의 영욕을 간직한 서울역이 새해 첫날 신역사 준공식을 갖고 고속철도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알렸다. 철도청은 1일 오전 10시 국무총리 등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고속철도 서울 신역사 준공식을 가졌다. 총 사업비 900억여원이 투입돼 완공된 고속철도 서울역은 2000년 5월 착공, 3년7개월여만에 지하 2층, 지상 5층, 연면적 9만5천200㎡(2만8천800평) 규모로 기존역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하루 10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고속철도와 대중교통과의 연계 이용을 위해 역사 지하에 환승 광장을 신설, 지하철 서울역과 연결시키고 역사 2층에는 환승 주차장을 만들어 승용차, 택시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높였다. 또한 서울역 동-서를 연결하는 폭 26m의 자유통로를 설치하고 버스정류장을 역광장에 근접 배치하는 등 교통시설을 대폭 확충했다. 이와 함께 편의 시설도 보강, 대합실(8천280㎡)을 기존 역사에 비해 2배 이상넓혀 쾌적하게 만들었으며 32개의 매표창구와 6개의 안내센터 등을 설치, 철도 여행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도착 승강장에는 장애인 승강기와 에스컬레이터도 설치했다. 철도청 관계자는 “‘활(弓)’을 형상화한 신 역사는 고속철도의 역동적인 출발과진취적인 방향성을 표현하고 있다”며 “대중 교통과의 연계를 강화해 서울시 교통난해소와 균형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구 민자 역사는 리모델링을 통해 할인마트로 새단장하게 되며 서울시 지방사적 284호로 지정돼 있는 구 역사 본관은 복합 문화공간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 연합뉴스-Daily focus 2004-01-02 오전 12:00:01 focus.co.kr )
2004 고이즈미 신사참배,
*[일본은 역시 이런 나라인가]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1일 2차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기습적으로 참배했다. 그의 취임 이후 네 번째인 이번 참배는 마치 작심이라도 한 듯 새해 첫날을 택했고, 옷차림도 일본 전통 의상을 골랐다. 그와 전쟁관과 역사관을 공유하는 지지자들에게 뭔가를 호소하고 지지를 부탁하는 듯한 기색이 확 풍기는 정치적 제스처다. 그러나 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일본 국내적 의미만을 가질 수는 없다. 일본 총리가 보란 듯이 당당하게 태평양전쟁 전범들에게 참배한 이번 모습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서 수많은 자국 국민이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고 강제 노역에 끌려가 이역에서 숨을 거둬야 했던 아시아의 여러 피해 국가들에 일본이 그 참혹한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는 참배 후 “어느 나라든 역사, 전통, 습관은 존중돼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일본이 자국의 역사와 전통, 습관을 존중하는 방식이 최고지도자가 피해자들의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을 추모하는 것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예 과거의 침략전쟁에 관해 일본은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고 달라질 수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일본이 아시아의 피해 국가들에 최소한의 예의라도 차릴 생각이 있었더라면 2차대전 전범들을 제외한 새 추도시설의 건립 논의를 그렇게 쉽게 팽개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갈수록 거꾸로 가고 있는 사실은 일본뿐 아니라 동북아의 미래에 매우 불행한 일이다. 정부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한다. (조선일보[사설3] 2004.01.03 chosun.com)
2003 - 독도에 우편번호 ‘799―805’번 부여
한.일간 영토분쟁 대상인 독도에 우리나라 우편번호가 부여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1월 1일 독도에 `799-805'번의 우편번호를 부여하고 올해판 전국우편번호부에 등재했다고 17일 밝혔다.
독도에 우편번호가 부여된 것은 독도유인화운동본부(의장 황백현)가 작년 독도경비대에 위문품을 보내려다 독도에 우편번호가 없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북체신청에청원한 지 1년만에 이뤄진 것이다.
독도에 일본 정부가 아직 우편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먼저 우편번호를 부여함에 따라 국제법상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내세울 수 있는 중요한 준거(準據)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정내기자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3.02.17 15:02
<화제> 고유 우편번호로 독도경비대에 내의 선물
독도 지키기에 앞장서 온 시민단체 대표가 자신의 청원에 의해 부여된 우편번호를 이용, 연말을 맞아 독도 경비대원들에게 내의 40벌을 선물했다. 독도유인화운동본부 황백현 의장은 자신의 청원에 의해 올해 처음으로 지정된 독도 고유 우편번호(799-805)를 이용, 내의 40벌을 독도경비대원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냈다고 9일 밝혔다. 황씨는 지난해 연말 독도 경비대원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주소를 기재하던중 독도리에 독립된 우편번호가 없는 점을 발견하고 정부에 청원, 올해 처음으로 우편 번호부에 `799-805'라는 독도 우편번호가 부여되도록 했다. 황씨는 현행 우정사업법상 독립된 행정구역에는 독립된 우편번호가 부여되도록 돼 있는 만큼 독립된 행정구역 `독도리'에 우편번호가 부여된다는 것은 독도가 법률적으로 우리 영토임을 한번 더 확인시켜 주는 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황씨는 이에 앞서 지난 2000년 독도가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닌 점에 착안, 청원을 통해 지난 2000년 `독도리'라는 행정구역을 지정받도록 했다. 독도에 독립된 우편번호가 부여되기 전에는 울릉읍 도동 우편번호(799-801)를 사용해 왔다. 황씨는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이를 지키려는 국민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국토 최동단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독도 경비대원들에 대한 위문과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부산=연합뉴스) 심수화 기자 2003-12-09
2002 -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Euro) 공식 사용 개시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유로화 출범 기념행사 직후 한 여인이 새로 인출한 유로화 지폐를 펼쳐보이며 환호하고 있다. /조선
유럽, 유로화 공식 사용
유럽 12개국의 인구 3억여명이 2002년 1월 1일 0시를 기해 단일 통화인 유로화를 공식 사용하면서 역사적인 유럽 단일 화폐 시대를 열었다.
새해 첫날 금융기관이 휴무일이었지만, 유로화 가입국(유로랜드) 주민들은 현금 인출기를 통해 유로화를 찾았고, 상점에서도 유로화는 통용됐다. 유럽 중앙은행(ECB)은 화폐교환을 대비해 150억장 이상의 유로화 지폐와 510억개 이상의 동전을 배포했고 유로화 동전 세트 1억5천만개도 시중에 깔아놓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그리스,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핀란드 등 12개국의 유로랜드는 국가별 차이가 있지만, 최종적으로 2002년 2월 28일까지 기존 화폐와의 통용기간을 거쳤다가 3월 1일부터 유로화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각국 은행들은 구(舊)화폐와 유로화의 환전을 2003년 6월 말에 끝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국민들을 향한 신년 인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역사 쓰기에 참여할 것"이라며 "우리는 유럽인들이 수세기 동안 꿈꿨던, 국경 없는 여행의 자유와 공동화폐 지불 시대의 여명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31일 밤 7시 파리의 퐁뇌프 다리에서 유로화 시대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조명 행사의 개막식을 가졌다. /조선
유로 화폐가 공식 통용되다.
유로 (통화 기호: ?; 코드: EUR)는 유럽 연합(EU)의 공식 통화이다. 유로는 16개국의 유럽 연합 가입국과 유럽 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9개국에서 사용되며, 이들 국가를 통틀어 유로존이라고 한다. 2008년 11월 기점으로 하여 실거래에 운용되고 있는 유로화는 약 7510억 유로(9530억 미국 달러와 같다.)로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화폐 자체적인 가치와 기타 가치를 더한 실질적인 화폐 가치는 미국 달러를 앞지르고 있다.
유로는 1999년에 처음 알려졌으며, 2002년 1월 1일부터 정식으로 동전과 지폐가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유로는 예전의 유럽 통화 단위(ECU)를 1:1 비율로 대체하였다.
특징 /위키백과
2000 - 만국우편연합(UPU)가입 100주년 기념
2000 - Y2K(밀레니엄버그) 대란 우려 불발
Y2에 대비한 비상용품이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가운데,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점원이 `유비``무환`이라는 이름의 비상용품 세트를 팔고 있다. /조선
Y2K(컴퓨터 2000년 인식오류) 대란 불발
세기의 전환을 앞두고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Y2K(컴퓨터 2000년 인식오류)대란이 현실화되지 않았다. 세계각국은 미사일 오발에 의한 전쟁발발, 원전 방사능 유출 등 '밀레니엄 버그'로 예상됐던 재앙의 시나리오가 기우였음이 확인되자 안도했다.
Y2K에 대비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미국의 Y2K 대비를 총지휘한 정보협력센터(ICC)는 24시간 가동체제에 들어가, 시시각각 세계 180개국의 Y2K 담당자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재난에 대비했다. 미국의 유나이티드항공은 2000년 12월 31일과 1월 1일 양일간 총 4000편의 항공기 운항을 중지했으며 이스라엘은 30년이 넘은 원자력발전소를 일시 폐쇄하기도 했다.
한국도 12월31일부터 1월3일까지 4일간 은행업무를 중단해 Y2K에 대비했다. Y2K 재난을 방지하기 위해 전세계가 들인 돈은 3000억-6000억 달러, 많게는 1조 달러로 추산했다. /조선
[오늘의 역사]Y2K 대란 불발
새 천년을 앞두고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던 Y2K(컴퓨터 2000년 인식오류) 대란이 지난 2000년 오늘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컴퓨터가 2000년 1월 1일을 1900년 1월 1일로 오인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혼란 때문이었고, 이것은 컴퓨터 보급 초창기 때 고가인 기억장치의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연도표시 4자리 중 마지막 2자리만을 사용한 데서 비롯됐다. 세계는 미사일 오발을 통한 전쟁 발생등 세계 혼란을 우려했지만 결국 Y2K는 불발로 그쳤다. 우리나라는 지난 1999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1월 3일까지 4일간 은행업무를 중단해 Y2K를 대비하는 등 전 세계가 Y2K를 방지키 위해 소요한 비용은 최소 3000억~6000억 달러, 최대 1조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8.12.30 18:00
1999 - 유로(EURO) 체제 출범
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유로체제의 출범을 축하하며 프랑크푸르트의유럽중앙은행에서 환호하고 있다. /조선
1999 년 오늘!
유럽의 단일통화인 유로가 공식 출범했다.
유로가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연합 소속 11개 나라에서 법정 통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이날부터 참가국의 통화신용정책 권한은 유럽중앙은행(ECB)에 귀속돼 공동 금융통화정책이 실시됐다.
가입국의 국민들은 2002년 유로가 기존의 통화를 완전히 대체할 때까지 수수료 없이 자국화폐와 유로를 자유롭게 호환해 쓸 수 있게 됐다.
사흘 뒤인 1월 4일 국제외환시장에서 거래된 유로화는 1유로당 1.17달러로 강세를 보이면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지속돼 온 달러화 중심의 일극체제가 달러와 유로가 분점하는 이극체제로 바뀌게 됐다.
/YTN 2011-01-01
유로(EURO) 체제 출범
유럽연합(EU)의 역사적인 통화 통합이 1999년 1월 1일 실시 돼 유로(EURO) 체제가 출범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핀란드, 벨기에 등 11개국이 단일통화 유로를 출범시켰고, 1월 1일부터 프랑과 마르크 등 구(舊) 통화가 사라지고 공식화폐가 유로화로 사용됐다.
그 나라 역사만큼이나 국민들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화폐들이 서서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유로 출범으로 2억9천만명의 인구에 미국과 거의 대등한 경제력을 갖춘 강력한 경제블록이 탄생하게 됐다.
당초 1.17달러로 출발했던 유로는 한때 유로당 1달러를 밑도는 약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유럽경제의 회복세를 뛰어넘는 정도로 미국의 경제가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EU 집행위는 유럽 경제가 밝기 때문에 강세로 반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선
1998 - 동아일보 신년호부터 전면 가로쓰기 단행
창간 78년 만에 전면 가로쓰기 단행
본보는 창간 73주년을 맞은 1993년 4월 1일 석간시대 30년을 마감하고 조간으로 새 출발을 했다. 조간화 단행 6개월 만에 발행부수 200만 부를 돌파해 1984년 150만 부를 기록해 한국 신문사상 신기원을 이룩한 이후 9년 6개월 만에 다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어 조간화 5년 만인 1998년 1월 1일 신년호부터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첫날 발행면수는 48면으로, 3개 섹션으로 나눈 새 얼굴을 선보였다.
1996 중요 무형문화재 30호 '가곡' 예능보유자 김월하(金月荷.1918-1996)사망,
한 점 혈육 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국악인들이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분이 바로 김월하 명인이다.
1917년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의 서울 이태원 부근이다. 두 살 때 콜레라가 창궐해 가족의 대부분을 잃었고 부친이 실성하다시피해 집을 나가버리자 이모집에 얹혀 살다가 어느 집의 양녀로 들어가 자랐다고 한다. 열 여섯 살에 혼례를 올렸지만, 자상한 남편은 6·25때 실종되어 버리고, 부산에서 삯바느질로 피난살이를 하던 중에 위궤양을 앓게 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회복차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 길에 우연히 시조를 듣게 된 것이 김월하 명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오며 가며 귀동냥으로만 노래를 익히다가 당시 정가의 큰 봉우리로 불려지던 두봉 이병성 명인을 만나 본격적으로 시조와 십이가사를 익혔고, 41세에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시조부문 1등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이주환 명인을 만나 가곡을 차근차근 배웠는데, 가곡은 시조나 가사와 달리 관현악 반주가 따르기 때문에 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양금과 거문고까지 병행해 배웠고,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의 예능보유자로 지정 되었다. 맑고 고우면서도 기품있는 노래는 지금도 정가의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목소리가 들어가면 되지 않으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어내리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1991년에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을 설립하고, 1992년 문화훈장 보관장, 1994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 1995년 KBS국악대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근검 절약이 몸에 배어 가까운 거리는 당연히 걸어다니며, 흔한 가스렌지도 없이 오래된 석유곤로를 사용했다는 김월하 명인은 그렇게 모은 재산을 대학에서 공부하는 어려운 환경의 후학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지급해 현재 중견 국악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고 공부를 했다. 또 사후에는 전 재산 수십 억 원을 월하문화재단에 기부해, 각종 연주회 지원과 장학금 지급, 정가 보존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 등에 사용되며 국악 발전과 보급에 큰 힘이 되고 있다.
1995 노벨물리학상(1963년)수상한 미국물리학자 유진 폴 위그너 사망
1995 노벨물리학상(1963년)수상한 미국물리학자 유진 폴 위그너[Wigner, Eugene Paul, 1902.11.7∼1995.1.1]사망 *1902년 11월 7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28년 모교의 강사가 되었다.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 강사, 1938∼1971년까지 이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시카고대학교 야금연구소에서 E.페르미 등과 함께 원자력 연구에 참여, 원자로(原子爐) 건설에 진력했다. 이론물리학 분야에 많은 업적이 있으며 분자·원자이론에서의 군론적(群論的) 연구, 고체론의 연구(위그너자이츠의 방법), 원자핵의 반응론(브라이트위그너의 이론), 핵력(核力:위그너力), 장(場)의 이론 등 수학적 방법을 구사한 것이 많다. 1963년 원자핵과 소립자(素粒子) 구조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엔리코페르미상(1958), 원자력평화이용상(1960), 독일물리학회 막스플랑크메달(1961), 미국 국가과학메달(1969), 앨버트아인슈타인상(1972) 등을 수상했고,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1995 - 쓰레기종량제 전국 실시
쓰레기 종량제 실시로 주민들이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조선
쓰레기종량제 전국 실시
쓰레기종량제가 1995년 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쓰레기의 실제 배출량에 따라 수수료를 차등 부과하므로 쓰레기 감량화를 유도하고 재활용품의 분리배출 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다.
가정과 상가에서 배출되는 모든 폐기물에 종량제가 적용되나 종이류나 빈병, 캔류, 플라스틱류는 분리수거되므로 수수료가 부과되지 않았다. 1994년 4월부터 시범적으로 실시 운영해오다 쓰레기 발생량이 약40% 줄어들고 재활용율이 100% 늘어난 것으로 조사돼 이날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조선
[오늘의 小史] 1월 1일 쓰레기종량제 실시
1995년 오늘 쓰레기종량제가 실시됐다. 94년 4월부터 33개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해온 쓰레기종량제가 효과를 거두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판매하는 규격봉투를 쓰지 않는 경우 과태료를 부과키로 하자 종량제 전면실시를 앞두고 대형폐기물 무단투기행위가 줄을 이었다. 이후 사생활 침해 문제 해결을 위해 쓰레기봉투의 색을 불투명하게 바꾸기도 했다. 최근 문전수거제 실시와 음식물쓰레기 전용봉투 사용 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부산일보 2005-01-01 [00:00:00]
1995 -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세계무역기구의 7명의 위원들이 1995년 12월 13일 스위스 제네바 WTO본부에서 열린 1차회의가 끝난 후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선
역사속 오늘[1995년 1월 1일]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세계무역기구(WTO)가 1995년 1월 1일 공식 출범했다. 세계무역기구는 1993년 12월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이후의 세계무역질서를 이끌고 갈 다자간 무역기구로, 1947년부터 세계무역질서를 이끌어 온 GATT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WTO는 GATT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세계무역분쟁 조정기능과 관세인하요구, 반덤핑규제 등의 법적 권한과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어 세계무역질서를 어지럽히는 국가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다.
신국제경제질서의 중심체로서 세계무역기구가 설립되고, 무역과 관세를 둘러싼 국제적 문제는 분쟁해결기구(DSB)를 설치, 법적으로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세계무역의 투명성을 제고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 주로 신경제질서가 형성되고 세계무역기구를 통해 미국과 같은 강대국과의 분쟁은 실제로 공정한 판결로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기구의 실질적인 존재성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됐다. /조선
세계무역기구가 출범하다. /위키백과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는 회원국들간의 무역 관계를 정의하는 많은 수의 협정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기구이다. 세계무역기구는 1947년 시작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GATT) 체제를 대체하기 위해 등장했으며, 세계 무역 장벽을 감소시키거나 없애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는 국가 간의 무역을 보다 부드럽고, 자유롭게 보장해 준다.
세계무역기구의 본부는 스위스제네바에 위치해 있다. 2005년5월 13일, 파스칼 라미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수파차이 파닛차팍 전 사무총장으로부터 2005년9월 1일 사무총장의 직책을 건네받았다. 2005년 8월 19일 현재 148개의 회원국이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는 개발도상국이다. 모든 회원국은 "무조건 최혜국대우 공여원칙"을 지킬 것을 의무로 갖는데, 이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하나의 회원국이 받는 특권이 모든 다른 국가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후반, 세계무역기구는 반세계화 운동의 주요한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설립
세계무역기구는 1995년1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 후 자유 무역을 지향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를 대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세계무역기구는 GATT의 원칙과 협정을 수용하며, 나아가 이를 관리 감독, 확대하는 것 또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무형의 협정 체제였던 GATT와는 달리 세계무역기구는 실제로 기구가 존재한다.
세계무역기구는 실질적으로는, GATT 체제를 대체하기로 했었던 국제무역기구의 후임이다. 국제무역기구는, 1948년3월아바나에서 있었던, 유엔의 무역 및 고용에 관한 회의 결과 합의 되었지만, 미국 상원에 의해서 기각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실패는 국제무역기구가 대형 사업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제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는 미국 기업가들의 두려움에서 야기된 것이라고 한다(리사 윌킨스, 1997년). /위키백과
1994 -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족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조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족
1992년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국이 조인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1994년 1월 1일 정식 발족됐다. 이로써 인구 3억7천만명에 GDP 6조8천억달러로 EC를 능가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경제블록이 탄생한 셈이다. NAFTA는 국민경제를 전제로 한고 있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세계가 냉전종식 이후의 혼란에서 벗어나 경제를 축으로 한 질서 재편과정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했다.
NAFTA 출범으로 단기적으론 세계경제가 지역블록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블록간 경쟁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무역경쟁의 시대로 돌입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이 NAFTA를 추진했던 목적이 세계경제의 지역화및 글로벌화라는 상호 모순된 경향속에서 EC와 일본경제에 대응하기 위한 지역화 전략이었기 때문에 NAFTA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않았다. /조선
[오늘의 역사]북미자유무역협정 발효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이 관세와 무역장벽을 폐지하고 자유무역권을 형성한 협정인 북미자유무역협정이 1994년 오늘 발효됐다. 권내 인구 3억 6759만 명(1992년 기준), GNP 6조 2030억 달러(1990년 기준)의 대(大)자유무역시장을 형성하는 협정으로 유럽공동체(EC)를 능가하는 경제권이었다.
이 협정 발효로 미국과 멕시코는 농산물 교역물량의 57%에 대해 관세를 폐지했고 발효 후 10년간 전체의 94%를, 15년 내 모든 농산물의 교역을 완전 자유화했다.
자동차의 경우, 미국은 멕시코에서 조립·생산되는 자동차에 대한 수입관세를 철폐했으며 멕시코는 5년 내 경트럭에 대한 수입관세를, 10년 내 승용차에 대한 관세를 모두 철폐했다.
북미지역 내 투자에 대해서도 각국은 100%의 과실송금을 허용하며 금융부문에 대해서도 2007년까지 모든 투자장벽을 철폐했다.
이 협정의 체결로 미국의 자본과 기술,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노동력이 결합돼 지역경제를 발전시키는 반면, 시장보호와 블록경제화 현상이 심화돼 한국과 같은 대미 수출의존도가 높은 역외국에게는 새로운 장벽이 됐다.
그러나 미국 기업의 멕시코 이동으로 인한 실업증대, 멕시코의 환경악화 등 미국 내에서도 일부 부정적 시각이 있었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9.12.31 15:00
1993 한국 -슬로바키아 국교수립
1993년 1월 1일 설치되었다. 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대전후 공산당 지배하에 체코와 통일국가를 이루었다가 1993년 1월 1일 새로운 독립국가로 분리되었다. 한국과는 1990년 3월 당시 통일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데, 1993년 1월 1일 분리독립한 이후 새롭게 수교하고 서로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90년 항공협정· 무역경제협력협정, 1991년 체육교류협정, 1992년 투자보장협정· 이중과세 방지협정, 1995년 사증면제협정을 맺었다.1993년 외무장관 모라빅(Moravcik)과 문화장관 슬로보드닉(Slobodnik)이 방한하였으며, 1997년에는 국회의장 가스파로빅(Gasparovic)이 방한하였다.
주요업무는 한국정부와의 외교·교섭, 무역진흥, 외교정책과 문화에 대한 홍보, 한국 거주 슬로바키아 국민의 보호감독 및 여권발급, 슬로바키아 여행객에 대한 사증발급 등이다. 슬로바키아와는 사증면제협정 체결로 한국인이 비영리목적으로 방문할 경우 최대 90일까지 사증 없이 체류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389-1번지에 있다.
1993 -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할
밀란 쿠산 슬로바키아 대통령(왼쪽)과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의 모습. /조선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분리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1993년 1월 1일 해체돼 고유 언어와 정부를 갖고 독자적인 경제-사회적 문제를 담당할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의 2개 독립국가로 탄생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와해로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금까지 통치해온 것은 체코인이었다. 동부 전원지대에 주로 살고 있는 슬로바키아인은 이 통치를 묵묵히 따랐다. 그러나 동구권의 자유화운동으로 공산화가 무너진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에서도 슬로바키아인의 자치확대 요구가 새롭게 시작됐다.
1992년경에는 연방의회내에 슬로바키아 의원이 늘어나 이들이 7월17일 주권선언을 하자 하벨은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후임 대통령은 1992년 8월에 연방분리를 결정,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가 74년만에 해체됐다. /조선
1988 - 국민연금제, 최저임금제 실시
[어제의 오늘]1988년 최저임금제 실시ㆍ‘벼룩의 간’ 마저 빼먹나
비인간적 요소 투성이인 자본주의 체제가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는 허점을 메우기 위해 고안된 많은 제도 덕분일 것이다. 국가가 임금의 최저수준을 정하고 사용자에게 그 지급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최저임금제’도 이러한 ‘보완재’ 중 하나다.
최저임금제를 처음 도입한 국가는 뉴질랜드(1894년)와 호주(1896년)다. 20세기 초반 영국과 프랑스·미국 등이 뒤를 이었고, 1928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최저임금결정제도의 수립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이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전세계로 확산됐다. 우리나라에서는 53년 근로기준법을 제정하면서 34·35조에 최저임금제를 실시할 수 있는 근거를 뒀다. 그러나 경제 상황으로 볼 때 시기상조라는 주장 때문에 이 규정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86년 12월31일 최저임금법이 제정·공포되고, 87년 6·10 항쟁 이후 개정된 헌법 32조 1항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포함된다. 최저임금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21년 전 오늘(88년 1월1일)이다.
2009년 적용되는 시간당 최저임금은 지난해(3770원)보다 6.1% 오른 4000원이다. 일급(8시간 근무 기준)은 3만2000원이며, 월급은 주 44시간 근무할 경우 90만4000원, 주 40시간 근무할 경우 83만6000원이 된다. 통계청이 발표한 33세 이하 단신 노동자의 월평균 생계비(137만원)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럼에도 경제위기를 빌미로 ‘벼룩의 간’마저 빼먹으려 하고 있다. 60세 이상 고령자에 대해 최저임금을 삭감하고, 최저임금보다 적은 급여를 줄 수 있는 수습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며, 사용자가 제공하는 숙식비를 최저임금에서 공제하겠다고 한다. 노동계와 인권단체가 이 같은 최저임금법 개정 방향에 대해 “저임금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개악 시도”라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해 아침이다. 극소수 부자들은 종합부동산세를 돌려받으며 웃음짓는데, 수많은 서민들은 쥐꼬리만한 최저임금마저 깎일까 두려움에 떤다. 2009년의 태양은 어디에나 똑같이 비치지만, 삶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
김민아기자 /경향신문 2008-12-31 16:37:40
1988 김일성 신년사에서 남북연석회의 제안
쌍방의 당국자 포함한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각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남북연석회의 제
안하고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다국적 군축회담, 제24회 서울올림픽 공동주최, 상호비방 중
지문제 등을 논의하자고 제안
1982 - 한국전력공사 발족
공사법 제21조에 공사의 사업연도는 정부의 회계연도에 따르도록 규정되어 있어, 1982년 1월 1일자로 공사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1월 4일 청담동 소재 본사 강당에서 한국전력공사 창립기념식을 가졌다. 한국전력공사 초대(한전 7대) 사장에는 한전 창립이래 처음으로 사원 출신인 성낙정(成樂正)이 취임했고 감사에는 신동선(申東鮮), 부사장에는 박세직(朴世直)이 각각 임명되었다.
/한국전력공사
[한국전력공사 연혁]
1982.01.04 - 한국전력공사 창립기념식
1982.01.01 - 한국전력공사로 개칭(발족)
1961.07.01 - 한국전력주식회사 발족
한국전기통신공사 발족
1982년 1월 1일, 한국전기통신공사는 그 동안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기본통신 수요를 충족시키고 질적으로도 최고 품질의 통신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목표하에 힘차게 출항했다. 이땅에 전기통신이 들어온 이래 줄곧 정부에서 운영해오던 사업을 이관받아 정식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한국전기통신공사는 국가 핵심 기간산업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1982 - 국제보건규칙의 검역전염병에서 천연두 관계조항을 삭제
196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 근절본부를 설치하고 각국의 협력을 얻어 대규모 천연두 근절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이미 종두가 보급되어 천연두가 근절된 나라도 있었지만, 1969년 여전히 42개국 10만 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하였다. 그 뒤 해마다 발생국과 환자수가 줄어들어, 남아메리카·동남아시아·남아시아 등의 각 지역에서도 잇따라 천연두가 자취를 감추었다. 나머지 동아프리카 지역에서도 1977년 10월 소말리아인 환자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세계 전역에서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그 뒤 2년 동안 동아프리카에서 엄밀한 추적조사를 한 뒤 1979년 10월 26일 세계보건기구의 현지 조사기관인 국제천연두근절위원회는 천연두의 근절을 보고하였으며, 세계보건기구사무국장이 이를 선언하였다. 이 선언을 1980년 1월 제65회 세계보건기구집행이사회에서 승인하였고, 5월 8일 제33회 세계보건총회에서 정식으로 천연두 근절을 확인하였다. 이 결과 1981년 5월 제34회 세계보건총회에서 국제보건규칙의 검역전염병에서 천연두 관계조항을 없애는 개정안을 채택하여 1982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고 그 뒤 한국에서도 천연두예방접종이 없어졌다. /Paran사전
1978 동력자원부 발족, 초대 장관에 장예준
1924년 7월 17일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결성(結城)이고 호는 경암(景岩)이다. 1942년 경기고등학교, 1944년 경성법전(京城法專,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4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였고 1957년 미국 밴더빌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49년 한국은행에 입행하여 근무하였으나, 1958년에는 공직으로 자리를 옮겨 부흥부 기획국 물가과장으로 재직하였다. 1961년 주미국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이 되었고 1964년 경제기획원 운영차관보로 재직하였다.
1967년 농림부 차관, 이듬해 경제기획원 차관 등으로 일하였고 1972년 제9대 건설부 장관으로 발탁된 뒤, 이듬해 제25대 상공부(동력자원부와 함께 지금의 산업자원부으로 개편)장관, 1978년 초대 동력자원부 장관 등으로 재직하였다. 1984년 공직에서 은퇴한 뒤 국민은행 이사장, 삼신올스테이트생명보험 명예회장, 대한건설진흥회 회장을 지냈다. 1998년에는 이북5도행정자문위원회 위원장, 사봉장학재단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건설부 장관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수립, 추진하였으며 상공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석유파동 등을 대비한 동력자원부 창설에 힘써 초대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시절에는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국내 석유 수급을 안정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60∼1980년대 한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녹조·황조·청조 근정훈장을 받았으며 벨기에 대십자훈장, 사우디아라비아 1등훈장, 가봉공화국 레오파트대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2004년 8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1977 - 우리나라 의료보험제 실시
[오늘의 역사]우리나라 의료보험제 실시
우리나라에서 의료보호제도가 지난 1977년 오늘 개시됐다.
의료보호제도는 지난 1961년 제정된 생활보호법에 의거 실시됐고, 당시 생활무능력자의 구제사업으로 무료 진료가 진행됐다. 의료보호의 대상자는 지난 1979년부터 의료비의 지불 능력이 낮은 저소득계층까지 확대됐고, 지난 1992년 기준으로 의료보호 대상자는 268만 명 정도였다.
또 지난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강제적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돼 같은 해 7월 1일부터 실질적 건강보험제도가 시작됐다.
당시 피보험자는 110만여 명, 피부양자는 190만여 명 등 총 300만여 명으로 국민의 8.2% 정도가 의료보험권에 해당됐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8.12.30 18:00
1977 - 체코슬로바키아 '77헌장'
[오늘의 경제소사/1월1일] <1283> 77헌장
정치적 억압과 경제난이 겹친 프라하의 겨울.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들이 남몰래 연판장을 돌렸다. 전 공산당원까지 포함한 243명이 지하선언문에 서명을 완료한 시점이 1977년 1월1일. A4 용지 4장 분량의 선언문에는 이런 제목이 달렸다. ‘77헌장(Charter 77).’
공동대변인을 맡은 시인 바츨라프 하벨이 기초한 선언문은 민주화와 인권존중을 핵심 내용으로 담았다. ‘헬싱키 선언에 명시된 인권이 체코에서는 문서로만 존재하며 수십만명이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일할 권리를 박탈 당하고 있다’는 내용을 엿새 후에 파악한 공산정권은 즉각 하벨 등 주모자 4명을 잡아들였다.
다음날인 1월7일, 서방 유수 언론에 주모자 체포 소식이 실리며 77헌장은 세계적인 뉴스거리로 떠올랐다. 당황한 공산정권은 즉각 관련자를 석방하는 한편 ‘서명자들은 서방진영으로부터 데탕트(화해) 파괴를 사주 받은 새로운 용병이며 조국의 배신자’라고 몰아붙였다.
과연 그들은 체코를 배반했을까. 헌장이 잉태된 배경은 억압과 독재. 반정부 성향의 한 록그룹이 ‘평화파괴죄’라는 죄목으로 투옥된 게 선언의 직접적 원인이지만 그 바닥에는 소련군 탱크로 뭉개진 ‘프라하의 봄(1968년)’에 대한 갈망이 깔려 있었다.
77헌장그룹은 민의를 등진 집권 공산당으로부터 철저하게 탄압 받았으나 억압과 몇 년째 계속되는 가뭄으로 경제난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결국 공산정권은 무혈혁명(벨벳혁명)으로 1989년에 무너지고 하벨은 대통령으로 뽑혔다. 77헌장은 벨벳혁명과 모범적인 체제전환국으로 손꼽히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초석이었던 셈이다.
신년벽두에 우리를 돌아본다. 이땅에는 억압과 차별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행동하는 양심이 정치와 경제를 이끌고 역사를 만든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8/12/31 17:37:35
1975 - 워터게이트사건 4명 유죄판결
1973년 8월, 미 상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가 열렸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귀결된 이 사건은 권력분립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조선
워터게이트사건 4명 유죄판결
워터게이트사건은 닉슨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하려 했던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스캔들로 이 사건 관련자 제임스 머코드 등 7명이 체포되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중 미첼 재선위원장, 홀드먼 보좌관 등 닉슨의 측근도 관련되었다는 사실과 백악관의 은폐조작 이전부터 행해진 정적에 대한 불법적 정보활동 등이 밝혀졌다.
닉슨대통령은 1973년 4월 홀드먼, 에릭먼드 두 보좌관, 딘 법률고문, 크라인딘스트 사법장관을 사임하게 하고 자신을 사건을 전혀 몰랐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딘은 그 해 6월 25일 상원조사위원회의 공청회에서 닉슨 대통령도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닉슨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녹음테이프와 속기록을 공표했으나 손을 댄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의혹만 더하게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을 밝히기 위해 임명된 특별검사의 해임, 불성실한 납세신고 등으로 국민의 불신감이 깊어지자 하원 사법위원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했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1974년 8월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975년 1월 1일 이 사건의 관련자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조선
1971 남산 제1호 터널 개통
남산 제1호터널
서울특별시 중구. 중구 및 용산구에 있는 남산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터널.
남산 제1호터널 ·남산 제2호터널 ·남산 제3호터널 등 3개의 터널이 있다. 남산 제1호터널은 중구 예장동(藝場洞)에서 용산구 한남동(漢南洞)에 이르는 터널로, 중구 충무로(忠武路) ·을지로(乙支路), 3 ·1고가도로, 용산구 한남동 제3한강교, 강남구 강남대로, 경부고속도로에 연결되어 있다. 터널의 규모는 길이 1,530 m, 너비 10.8 m로 2차선이다. 남산 제2호터널은 중구 장충동(奬忠洞)에서 용산구 용산동(龍山洞)에 이르는 터널로, 중구 장충동 ·을지로 6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종로구 동대문 지역과 용산구 용산동 ·이태원동(梨泰院洞) ·반포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터널의 규모는 길이 1,620 m, 너비 9.6 m로 2차선이다.
남산 제3호터널은 중구 회현동(會賢洞) ·남대문로 3가 ·서울시청 앞 및 시내 중심부와 용산구 용산동에서 남산 제2호터널과 약간 떨어져 있으며, 용산구 이태원동 ·반포대교로 연결되어 강북의 도심과 서초구 반포로를 연결하는 주요 터널이며, 강북지역의 인구분산, 강남 ·강북 간의 교통소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터널의 규모는 길이 1,270 m, 너비 9 m로 2차선이다.
1970 - 박정희 대통령, 모든 공문서와 기타 표현물을 완전히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지시
박 정희 대통령의 한글전용정책
1968년 10월 25일 한글 전용 추진 7개항을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하여 각종 敎科書에 있는 漢字를 삭제하고 言論出版界(언론출판계)에 한글 전용을 적극 장려하도록 했다. 그리고 1969년 9월에 敎科課程(교과과정) 개정령이 공포되어 漢字교육의 근거가 삭제되고 敎科書(교과서)에 표기된 漢字를 삭제하게 되었고, 1970년 1월 1일부터는 모든 公文書(공문서)와 기타 표현물을 완전히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하였다. 그 후 1972년 8월 16일에 中高校用 한문 교육용 기초 漢字 1,800字가 공포되었다. 이때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漢文科 敎育을 獨立敎科(독립교과)로 교육할 수 있게 하였고, 初等學校에서는 漢字敎育을 禁止(금지)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光州 초등학교 모교사가 국어 시간에 漢字를 가르쳤다 하여 징계처분까지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초등학교 교육 분위기 속에서 漢字교육은 完廢(완폐)되는 학습환경이 되고 말았다. ...
(企劃論壇)
1966 - 험프리 미국 부통령 내한
험프리 미부통령 내한, 박대통령과 경제원조·월남지원문제 협의
이러한 쟁점들이 부각된 가운데 한미간에 협상이 진전되고 국내의 여론이 수렴되어 가면서 해를 넘긴 1966년 1월초와 2월 중순에 두 번이나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여 전투부대 추가 파견에 따르는 확고한 대한 방위공약을 천명하였다. ...
1966년 신정에 미국의 험프리 부통령이 내한하였다. 그는 귀로에 하와이에서 연설하였는데, 주월한국군의 증파 가능성을 공표하였다.
1964 미터법 실시
미터(m) 및 킬로그램(kg)을 기본으로 한 십진법의 국제적인 도량형단위계.
1790년 프랑스의 C.탈레랑의 제안에 의해 파리과학아카데미가 정부의 위탁(委託)을 받고 만든 것이다. 지구자오선 길이의 1/4000만을 1m, 각 모서리의 길이가 1/10m인 정육면체와 같은 부피의 4℃ 물의 질량을 1kg, 그 부피를 1ℓ로 하고, 배량(倍量:곱하기 양)에는 그리스어, 분량(分量:나누기 양)에는 라틴어에서 따온 접두어 등을 각각 붙였다.
미터법의 보급은 순조롭지 않았고, 프랑스에서는 1840년 강제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1875년 국제적인 미터조약이 성립되었고, 이어 1889년 국제원기가 제정되었으며, 1960년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국제적인 단위의 길이표준을 크립톤 86(86Kr)의 원자가 방사하는 오렌지색의 스펙트럼선 파장으로 바꾸는 등, 개정의 노력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각 국가들도 이 미터법의 전용에 힘쓰게 되어 1967년에는 미터법을 국법으로 채용한 나라가 70개국을 넘어섰고, 학술적인 제반 단위는 거의 전부가 미터법을 토대로 하여 짜여졌다.
한국에서는 계량법 제11조에 의해 1963년 5월 31일부터 거래 ·증명(證明)에 미터법 외에는 쓰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1963년 12월 31일을 유예기한으로 하여 미터법의 완전실시(건물 ·토지 제외)가 행해지고, 1983년 1월 1일 시행령 부칙 제2조에 의해 건물 ·토지까지도 미터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참조항목 : 도량형, 미터, 미터원기, 킬로그램, 탈레랑
역참조항목 : 길이, 미터조약, 센티, 야드-파운드법, 척관법, 홉, 헥타르, 서양의 도량형
1963 KBS-TV 유료광고방송 실시, 시청료 징수 업무 개시
특별법인 한국방송공사법에 의해 설립된 방송법인. 1927년 2월 16일 우리나라 최초로 JODK라는 호출부호로 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의 후신이다. 경성방송국 개국 당시의 수신기 보급대수는 1,440대로 일본인 소유 1,165대에 한국인 소유는 겨우 275대였으며 방송 출력은 1kW였고 편성도 일본인이 담당한 방송이었다. 경성방송국(JODK)은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 수탈의 수단으로, 일본의 기술과 시설을 이용해서, 그리고 일본의 전문가들이 중심이 돼서 일본어로 시작됐던 방송이었다.
1945년 미군이 진주하면서 38선 이남에 있던 10개의 방송국들은 미군당국에 접수되었고, 1946년 3월에는 방송협회 산하에 있던 각 방송국이 국영화되는 첫 조치가 취해졌다. 즉 각 방송국의 기술과 업무를 제외한 방송 현업은 모두 미 군정청 공보부로 이관됨으로써 각 방송국들은 민간단체가 아닌 정부의 한 기관으로 개편된 것이다. 이어서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 두 달전인 6월 1일부로 미군정장관의 명령으로 공보부 방송국이 폐지되고 조선방송협회가 방송사업을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그후 정부수립이 되면서 방송국은 다시 정부기관으로 넘어가서 이른바 국영방송체제를 갖추게 된다. 이때 이름을 KBS로 바꾸어 유일한 국영방송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방송의 국영화에 관한 법적 근거는 이해 8월 7일 국회를 통과한 정부조직법이 전부였고 방송사업의 관리 통제를 위한 독립된 법규는 미처 마련되지 못했다.
1961년 12월 31일 국영 KBS에 의한 본격적인 TV 방송이 시작됐다. 그러나 조직, 재정적인 준비없이 KBS-TV방송의 운영 첫 해인 1962년도 예산 총액은 4,500만원 정도로서 이는 서울중앙방송국 예산보다 2,400만원 이상이 적은 것이었다. 정부는 뒤늦게 텔레비전 방송의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독립채산제를 구상하게 된다. 자국 제공 프로그램 2시간 30분 내지 3시간분의 특별 회계로 하루 평균 8시간(광고방송 5시간 30분)을 방송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1962년 12월 3일자로 국영 텔레비전 방송 사업 운영에 관한 임시 조치법과 국영 텔레비전 방송사업 특별 회계법이 공포되어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같은 법 제정으로 첫째, KBS-TV는 공공방송 이외에 일반의 요청에 의하여 유료 광고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고(임시조치법 제1조 1항) 둘째, 정부는 텔레비전 수상기 등록자로부터 시청료를 징수하게 되었으며 셋째, KBS-TV는 광고방송의 유치 및 이에 반하는 업무를 광고업자에게 위탁할 수 있고 넷째, 동시에 시청료 징수 및 업무 또한 특정한 자에게 위탁할 수 있게 되었다.
1963 - 정치활동 금지 해제
5.16군사정부가 들어선 이래 군정이 금지한 정치활동이 1963년 1월 1일을 기해 재개됐다. 최고회의는 12월 31일 일절의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를 폐기하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새 정당법을 제정함으로써 1961년 5.16군사혁명이래 만1년7개월반 만에 정식으로 정치활동재개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에 따라 5.16 주체세력이 중심이 된 민주공화당은 재야정치인이 새 정당을 창당하기 전인 1월 18일 발기인 78명의 명의로 발기선언문을 내놓고, 당총재에 박정희, 당의장에 김종필, 사무총장에 김동환씨 등을 내정했다. 한편 윤보선 전 대통령은 범야당 형성을 제창한 이래 김도연 신민당위원장과 범야당 결성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최고회의는 정치활동 재개와 더불어 그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못한 곽상훈 전 민의원의장 등 1백71명에게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조선
1963 - 부산시 정부직할시로 승격
역사속 오늘[1963년 1월 1일] 부산, 직할시로 승격
한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인 부산이 1963년 오늘 직할시로 승격됐다.
새해 첫날 열린 직할시 승격 기념식에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이 참석해 치하했다.
부산시민들은 길거리 행진을 벌이며 직할시 승격을 자축했다.
부산은 1876년 일본에 의해 개항장(開港場)이 된 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경인공업지대와 더불어 2대 공업지대의 하나인 남동임해공업지대의 중심도시가 됐다.
/YTN 2011-01-01 토
1962 - 공용연호를 서력으로 변경
정부, 공용연호를 서기(西紀)로 바꿈
정부가 1961년 12월 2일 ‘연호(年號)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고 이듬해 1월 1일부터 단기(檀紀) 연호대신 서기(西紀)를 공용연호(公用年號)로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밝힌 변경이유는 국내문서와 외교문서가 연호를 달리쓰는 데서 오는 불편,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연대개념의 혼란 등이다.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자신의 통치 연차(年次)를 표시하는 연호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용된 ‘건원(建元)’이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도입됐는데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돼 있는 ‘영락(永樂)’이 첫 사례다. 마지막 연호는 대한제국 때 순종이 사용한 ‘융희(隆熙)’.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연호 ‘다이쇼(大正)’과 ‘쇼와(昭和)’를 사용하다가 1945년 美군정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서기가 처음 도입됐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단기가 공용연호로 채택됐으나 국제조류에 맞춰 다시 서기로 돌아와 현재에 이른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54.5%가 단기ㆍ서기 병용을 희망한 반면, 서기만의 사용을 원하는 사람은 23.4%에 그쳤다. /조선
[이 주일의 역사] 공용연호로 서기 사용
1962년 1월 1일부터 대한민국은 '서기(西紀), 즉 서력기원(西曆紀元)'을 공용연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 공용연호로 사용돼 오던 단기(檀紀) 연호는 1961년 12월 2일 공포된 '연호에 관한 법률'의 시행에 따라 그 지위를 잃게 되었다.
서기를 고안한 사람은 6세기 초 스키타이 출신의 로마 성직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 당시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즉위 기원을 연호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독교 박해자였던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불만이었던 디오니시우스는 예수의 탄생 연도를 기점으로 한 서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연대 계산법에는 오류가 있어 실제 예수의 탄생은 서기 1년이 아니라 기원전 7~4년 께로 추정되고 있다.
일찌기 동아시아 국가에서 연호는 군주의 치세에 붙이는 칭호였다. 기록상 처음 사용된 연호는 중국 한나라 무제의 '건원(建元)'.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락(永樂)'이 첫 기록으로 전한다. 발해는 건국 시조 대조영이 '천통(天統)'을 연호로 한 이래 역대 임금들이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다 갑오개혁 이후 독자 연호를 사용했으나,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의 연호를 써야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단기(4281년)를 공용연호로 사용했다.
현재 헤이세이(平成) 연호를 쓰고 있는 일본은 천황이 왕위를 계승할 때마다 연호를 개정하고 있다. 북한은 1997년부터 주체연호를 서기와 병용하고 있다. 오는 새해가 되면 우리나라가 서기 연호를 사용한지 48년째다. 그 지나온 시간만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단기 연호는 점점 잊혀지는 듯하다. 서기 2009년은 단기 4342년이다.
정광용 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8. 12.29. 10:35
1960 호적법 제정 공포
호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1960. 1. 1 법률 제535호).
호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호적에 관한 사무는 시·읍·면의 장이 관장한다. 시·읍·면의 장 또는 호적사무에 관하여 시·읍·면의 장을 대리하는 자는 자기 또는 자기와 호적을 같이 하는 자에 관한 호적사건에 대하여는 직무를 행할 수 없다. 호적사무는 시·읍·면의 사무소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장이 감독한다. 가정법원지원장은 가정법원장의 명을 받아 그 관할구역 내의 호적사무를 감독한다. 호적사무에 관한 수수료 및 과태료는 호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수입으로 하며, 호적에 관한 사무에 요하는 비용은 그 사무를 관장하는 지방자치단체의 부담으로 한다.
호적은 시·읍·면의 구역 내에 본적을 정하는 자에 대하여 호주를 기준으로 하여 가별로 편제하며, 지번의 순서에 따라 편철하여 장부로 한다. 호적은 원본과 부본을 작성한다. 원본은 시·읍·면의 사무소에 비치하고 부본은 감독법원이 보존한다. 호적부는 전쟁·천재지변 기타 이에 준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시·읍·면의 사무소 밖으로 옮기지 못한다. 호적부를 시·읍·면의 사무소 밖으로 옮긴 때에는 시·읍·면의 장은 지체 없이 그 사유를 감독법원에 보고하여야 한다.
호적부는 열람 및 등본·초본·증명의 교부를 할 수 있다. 호적부의 전부 또는 일부가 멸실하였을 때 또는 멸실의 우려가 있을 때에는 대법원장은 그 재제, 보완 또는 보전에 관하여 필요한 처분을 명한다. 호주승계·무후 기타의 사유로 호주와 가족이 모두 제적되거나 말소된 호적은 호적부에서 제거하여 제적부에 편철·보존한다.
호적부와 호적의 기재, 신고, 호적의 정정, 불복절차, 벌칙, 시행규칙에 대하여는 각각 별개의 장으로 자세한 규정이 있으며, 신고에 대하여는 통칙과 출생, 인지, 입양, 파양, 혼인, 이혼, 친권 및 후견, 사망과 실종, 호주승계, 입적과 복적, 일가창립, 분가, 국적의 취득과 상실, 개명 등에 대하여 각각 별개의 절로 자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8장으로 나누어진 전문 135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다.
1959 쿠바 혁명 성공 ◀ 카스트로(1964)
1959년 1월 1일 쿠바에서는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고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았다. 쿠바 혁명은 뇌물수수, 부정부패, 아프리카계 쿠바인의 사회적 불평등 등 오랜 기간 누적되어온 쿠바의 내부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은 국가의 부를 횡령해 해외로 유출시켰고 공포정치로 국민을 다스렸다. 능률적인 운용으로 한때 국민의 지지를 받던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 정권마저 2차 집권 때는 부패와 독재로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강력한 공포정치로 반대자들을 억압하고 카스트로 반군을 거의 전멸시키기도 했으나 결국 카스트로가 이끄는 7·26운동 조직에 의해 무너졌다.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는 소련과 수교하고 공공부문 국유화, 교육과 의료 무상 제공 등 광범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피그스 만 침공, 경제 교류 중단 등의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후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핵미사일 철수를 조건으로 더 이상 카스트로 정부 전복 시도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1958 - 언론제한을 포함한 선거법 국회 통과
이 사태로 인책 사퇴한 민주당 대표최고의원 조병옥 박사. /조선
언론제한을 포함한 선거법 국회 통과
1958년의 민·참의원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1957년 4월부터 신경전을 벌여왔다. 자유당은 현 국회의석을 고수하기 위해, 민주당은 의석 확대를 위해 전 당력을 선거법 개정에 쏟고 있었다.
1957년 9월의 여야대표회담과 10월 15일의 여야 10인 선거법협상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된 협상선거법은 소선거구제, 정당추천위원의 선관위 참가, 기탁금제, 선거공영제 강화, 참관인 권한 확대, 선거사범엄단 등을 규정했다.
그러나 이 법안에 `허위보도를 엄벌한다`는 언론규제조항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언론계는 물론이고 민주당 소장 국회의원들까지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1957년 12월 31일 밤을 꼬박 새우며 박영종, 이철승, 민관식 등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에서 질문전술로 저지투쟁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958년 1월 1일 그대로 통과됐다. 언론계에서도 국회출입기자단의 24시간 취재거부, 전국언론인대회 개최 등 적극적인 저지투쟁을 벌였으나 사태를 호전시킬 수는 없었다. 이 사태로 민주당 대표최고의원 조병옥이 인책 사퇴했다. /조선
1958 - 유럽 경제공동체(EEC) 발족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 대표들이 유럽경제공동체 창립을 논의하고 있다. /조선
유럽공동체시장(EEC) 발족
1957년 3월 25일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 대표들이 로마에 모여 유럽경제공동체 창설을 위한 협정에 조인했다.
1958년 1월 1일부터 실행에 들어간 이 조약은 회원국 사이에 자본, 상품, 노동력,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것으로 20세기 들어 두차례 초대형 전쟁을 겪었던 유럽 국가들이 그같은 재앙의 재현을 막기 위해 시작한 장정이 또 한걸음 거보를 내디딘 순간이었다.
1950년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슈만은 서독에 대해 석탄과 철강의 공동이용을 위한 기구 창설을 제안했다. 1870년 보불전쟁 이후 75년간 세차례나 독일과 대규모 전쟁을 경험한 프랑스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슈만은 양국의 경제적 이익을 하나로 묶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슈만의 제의에 호응함으로써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출범했다. 이어 원자력의 공동 이용을 위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발족됨으로써 이들 6개국의 경제적 이해가 한층 긴밀해졌다. 유럽경제공동체는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경제통합을 지향한 것이었다. /조선
유럽 경제공동체 발족
1958년 1월 1일 유럽 경제공동체(EEC)가 발족했다. 서유럽을 통합한 프랑크 왕국이 분열한 이후 이제껏 무력으로 유럽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통합의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52년 장 모네가 제시한 석탄 및 강철에 대한 공동관리안을 로베르 슈만이 현실화해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했다. 뒤이어 1958년 1월 1일에는 EEC가 활동을 시작했다. EEC는 회원국이 6개국에 불과했으나 회원국간 무역장벽 제거, 비회원국에 대한 공통의 통상정책 수립, 노동력·자본·기업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 등을 내세우며 유럽 통합에 한층 다가섰다. 1967년 EEC, ECSC, 유럽 원자력공동체(Euratom)가 통합되어 유럽 공동체(EC)가 설립되었다. 유럽 통합에 필수적인 공동통화(通貨) 문제는 1999년 1월 1일 유로(EURO)를 출범시킴으로써 해결되었다. /브리태니커
1956 영암선 개통
영동선에 속하며, 영주 기점 69.2㎞ 지점에 있다. 1956년 1월 1일 영암선 개통에 따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57년 7월 17일 역사(驛舍)를 신축, 준공하였다. 1997년 3월 11일 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2001년 9월 8일 신호장(信號場: 철도의 정거장의 일종으로 열차의 교행(交行) 또는 대피를 위하여 설치한 장소)으로 격하되었다. 1999년 환상선 눈꽃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어 2004년 12월 10일 보통역으로 재승격하였다. 현재는 석포면 방면으로 도로가 나 있고, 면사무소를 오가는 마을버스가 운행중이다. 역종은 보통역이며, 승강장 구조는 1면 3선이다. 코레일(Korail) 경북본부 소속이다.
참조항목 : 신호장, 영동선, 코레일, 승부리
1955 문예지 [현대문학 現代文學] 창간,
*1955년 1월 1일에 창간된 월간 문예지로 1955년 1월에 창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대 사장은 김기호, 주간은 조연현(趙演鉉), 편집장은 오영수(吳永壽)였으며, 그뒤 주간은 김윤성·윤재근·신동욱·감태준·최동호·양숙진 등이 역임하였고, 편집장은 김수명·김국태·감태준 등이 역임하였다. 창간사를 통하여 '한국의 현대문학을 건설하자는 것이 그 목표이며 사명임'을 밝혔다. 시·소설·희곡·수필 등 문학의 전 분야에 걸친 작품 외에도 고전문학 및 외국문학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1955년 창간과 동시에 현대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소설·희곡·평론의 4개 부문에 걸쳐 시상하고 있다. 1971년에는 문인극회를 창설하여 3편의 연극을 상연하였고, 같은 해 시 전문지 《시문학》을 창간하여 발행하다가 1973년 도서출판 성문각에 넘겨주었다. 1981년에는 전국순회 문예강연과 창작실기 강좌를 실시하여 지방문단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1982년부터 가로쓰기를 단행하였고, 1983년 출판부를 신설하여 단행본의 출간을 시작하였다. 1989년에는 부설문예대학을 개설하여 문학이론 강좌를 하였다. 1993년부터 그해에 나온 작품 가운데에서 실험적 작가정신이 투철한 작품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그 작품들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집》과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집》으로 묶어 출간하고 있다. 같은 해에 판형을 국판에서 신국판으로 변경하였으며, 1997년 6월호부터는 표지와 편집 체제를 새롭게 바꾸었다. 1996년 8월 지령 500호 기념 특대호를 발행하였다. 한국문학가협회 감사패(1959), 서울시문화상(1965), 문화공보부장관 공로감사패(1967), 한국잡지협회상 경영부문(1967), 한국잡지협회상 편집부문(1968), 보관문화훈장(1986), 공보처주관 제3회 우수잡지 선정(1994) 등을 수상하였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많은 문인들을 배출시켜 왔는데, 시에서는 박재삼·김관식·문덕수·황동규·마종기·이성부·이승훈·정현종·강우식·오세영·오규원·이선영 등, 소설에서는 이범선·최일남·박경리·서기원·정을병·이문구·김원일·이동하·조정래 등, 평론에서는 김윤식·신동욱·박동규·홍기삼·임헌영·이기영·김인환·이선영·김시태 등을 포함해 이제까지 배출된 문인의 수는 총 563명(시인 323명, 소설가 131명, 평론가 73명, 기타 36명)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월간 순수 문예지로서, 창간 이래 단 한번의 결간 없이 2001년 5월 통권 557호를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 문단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54 - 정비석(鄭飛石)의 소설 '자유부인' 서울신문에 연재 시작
소설 ‘자유부인’ 논쟁 - 3월 11일
‘S데리아 밑에서는 육십여 명의 남녀들이 아름다운 고기 떼처럼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인생의 향락과 정열의 발산… 관능적인 체취에 정신이 현혹해 오도록 대담무쌍한 애욕의 분방….’ (‘자유부인’의 일부)
정비석(鄭飛石) 씨의 소설 ‘자유부인’이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됐다. 대학교수 부부의 일탈과 애정행각을 다룬 이 소설은 춤바람 등 전후 세태를 잘 묘사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연재기간에 벌어진 지상 논쟁으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황산덕 서울대 교수가 그해 3월 1일자 대학신문을 통해 ‘대학교수를 모욕했다’고 비난하면서 논쟁이 시작됐다.
3월 11일 작가인 정 씨가 서울신문에 ‘탈선적 시비를 박함’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창작의 자유, 대중매체의 선정성 등을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했다.
정 씨는 “(황 교수의 비난은) 문학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개인적 흥분”이라고 비판했다.
황 교수는 3일 후 “문학정신 없이 성적 흥분을 돋우는 표현은 문학이 아니다”며 “인기욕 때문에 저속한 작문을 쓰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정 씨를 비난했다.
이어 변호사 홍순엽 씨와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논쟁에 뛰어들었다.
홍 씨는 21일 서울신문을 통해 “작가는 양식이 명하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붓대를 구사할 수 있다”며 정 씨를 옹호했다.
백 씨는 29일 대학신문을 통해 “신문소설은 후진적인 대중 취미에 신경을 쓰느라 저속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작가의 문학정신을 독자가 이해했든 않았든 간에 이 소설이 ‘대중 취미’를 만족시킨 것은 분명하다. 연재 후 나온 자유부인 단행본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1956년부터 1990년까지 6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윤리 기준도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일면식도 없던 정 씨와 논쟁 이후 가까워졌다는 황 교수는 11년 뒤인 1965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정 씨와 나는 아연실색하고 있다. 우리가 허심탄회한 기분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사회의 되어가는 꼴에 대해 허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40년이 지났다.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tggdhk님의 블로그 2008-02-03 16:09:33
‘자유부인’, 박인수, 이강석사건
발췌개헌을 통해 제2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1954년 11월에는 대통렬 3선의 길을 열기 위하여 또 한 번 헌법개정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사사오입 개헌"이다. 헌법개정에는 국회의원의 3분의 2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했는데, 개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에서 135명이 찬성이었다. 203의 3분의 2는 135.3이기 때문에 이건 분명 부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135.3을 사사오입하면 135가 된다는 해괴한 논리로 개헌안 가결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전후 한국 사회는 서구 문물과 외래 사조가 도입되면서 문화적 정체성에 다소의 혼란이 일었는데, 1954년 ‘서울신문’에 작가 정비석이 연재하고 있던 ‘자유부인’은 그런 세태를 잘 반영해 준 작품이었다. 이 소설 덕분에 ‘서울신문’은 한 때 부수가 크게 늘었으며 단행본으로 나온 소설은 1954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학교수 부인의 불륜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서울 법대 교수를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정비석인 "전혀 소설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대응하자 황산덕은 ‘자유부인"은 ’에로작품‘으로서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논전이 있은 1년 남짓 후인 1955년 6월에 일어난 이른바 ‘박인수 여대성 간음사건’은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박인수가 명문 E대생을 비롯한 70여 명의 여인과 간음을 했다는 혐의와 그 가운데 처녀성을 가진 여자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는 박인수의 실초에 대해 언론은 일제히 "우리 여성들의 정조관념에 일대 경악과 통탄을 금할수 없는 중대한 현실 문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담당 판사 권순영은 무죄선고를 내리면서 "법은 정숙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하 수 있음을 밝혀 두는 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박인수 사건 못지않게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으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1957년 8월 태풍 아그네스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강타했을 때 22세 된 무직자 강성병은 이승만의 영자인 이강석 행세를 하면서 "아버님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다"고 사기를 쳐 풍수해 지구 각급 기관장들을 농락하고 다녔다. 기관장들은 그에게 돈을 주고 아첨을 일삼는 추세를 벌였다. 그는 결국 붙잡혀 10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법정에서 한 그의 발언은 방청석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시험해 보는 것도 동기의 하나였다."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사바사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냐".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시장, 군수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 "헐리우드 같으면 60만달러의 연기료를 받을 수 있는데 나는 연기료 대신에 벌을 받게 되었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1951 중공군6개군단(김일성의 6.25남침전쟁에 북괴군지원참전),
1951 중공군6개군단(김일성의 6.25남침전쟁에 북괴군지원참전), 1951.1.1. 38선 넘어 대규모 공세 개시,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River Yalu) - 중공군 압록강을 넘다] -중국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이 가능성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국군이 38도 선을 넘어선 다음 날인 10월 1일, 한국군이 아닌 UN군이 38도선을 넘어설 경우 중국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UN군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음날인 10월 2일, 38선을 넘었습니다. 중국의 지도자인 모택동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과 긴밀히 협의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그 당시 중국은 공군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련으로부터 공군력을 지원받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중국이 지상군을 파견하는 대신, 스탈린이 공군과 전쟁물자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결정되었습니다. 한편, 맥아더 장군은 당시 중국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참전을 걱정하는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중국은 절대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확신시켰고, 설사 중국이 참전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희생만이 있을 것이라며 크리스마스까지 미군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19일), 맥아더가 중국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지 단지 사흘 후에, 중국군은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에 들어오자 마자 모두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UN군은 중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습니다. 이 때, UN군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과 함경 남도 도청 소재지인 함흥을 막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대부분이 UN군에게 장악되었을 때,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1950년 11월 2일 - 중국의 한국전 참전] -10월 25일 미군은 중국군으로 보이는 군대로 부터 기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미군은 그들이 그저, "중국계 한국인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11월 1일 서부 전선에서 중국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고 다음 날인 11월 2일 중국은 방송을 통해 그들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중국군의 공격으로 유엔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기 시작합니다. 유엔군이 느낀 상대는 지금까지 싸웠던 북한군과 매우 달랐습니다. 이들은 유엔군의 보급로와 도주로를 차단하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후방에서 불쑥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낮에는 숨어있다가 밤에만 공격을 하였고 진군할 때는 언제나 나팔을 불거나 징을 치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습니다. 주변의 산에는 불을 내어 연기가 휩싸였고 이 가운데서 그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비행기의 공습은 효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공격 방법은 UN군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도중 고립되어 있던 어떤 미군부대는 초토화되는 치명타를 입기도 했습니다. 한편, 하늘에서는 소련에서 제작된 MIG-15기가 출연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유엔군은 하늘에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이 성능 좋은 MIG기로 인해 더 이상 편안한 비행을 즐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11월 하순, 동부 전선에서도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동부 전선도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 제 1 해병사단이 가장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중국군뿐만 아니라 한반도 북부의 살인적인 추위로 부터도 공격을 당했습니다. 중국은 미 해병대를 제거하기 위해 약 7개 사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겹겹이 애워쌌습니다. 중국군의 주 공격 방법은 사람의 수를 앞세운 인해 전술이었습니다. [인터뷰 : 에드워드 리브스 , 당시 미 육군 7사단] 장진호에서 전투할 때였습니다. 적군이었지만 중국군이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50구경 기관총을 사용했는데, 그들은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달려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병력을 이쪽 저쪽으로 이동시키지 않고 한 방향으로 계속 진격함으로써 고지를 점령하는 전술을 쓴 겁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곧바로 다가왔습니다. 그 불쌍한 친구들은 전술을 사용할 줄 몰랐으며 사람을 아주 무가치하게 이용했습니다.
*[1950년 11월 30일 워싱턴-원자 폭탄 사용도 가능하다] -중국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그 결과로 미국이 완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전쟁에서 원자 폭탄이 사용될 수 있다는 암시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덧붙여 그는 원자 폭탄을 사용할 때 UN의 승인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며 의존하지도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UN의 많은 나라들은 한국전쟁이 제 3차 대전으로 번질까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UN의 많은 나라들은 휴전을 제안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 폭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황급히 워싱턴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국과 협상을 하자고 설득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오히려 강력 대응을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미국과 영국의 견해가 대립되고 있을 무렵인, 12월 5일 중국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 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 역시 중국의 참전에 대해 미국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미 해군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둘재, 중국 본토를 폭격하며 셋째,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시키고 넷째, 원자탄 사용도 고려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이런 의견을 수용하여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최종 결정은 결사 항전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며칠 뒤, 트루먼 대통령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애틀리 총리의 노력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950년 12월 24일 - 흥남 철수 작전과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 -한편, 장진호 에서부터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모인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들은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서 흥남 주위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함흥을 비록한 주변 지역은 모두 중공군에게 포위 당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안전한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피난민들도 흥남 부두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타야할 배는 그 곳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난민들은 철수하는 미군에게 실낫 같은 희망을 걸고 부두에서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미군은 처음, 피난민들과 같이 철수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전시에는 아무리 생명이 중요하다고 해도 군인이 최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때 한국인 고문관으로 있던 현봉학이 알몬드 사령관에게 피난민들이 여기 남는다면 중공군에게 분명히 몰살당할 것이라며 생명을 반드시 구해 주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위와 같은 이유로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현봉학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골몰하다 하니 대령과 함께 LST등 여러 군용 함선에 여유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즉시 이를 이용하여 피난 계획을 수립하여 알몬드 사령관에게 재청을 합니다. 결국 알몬드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피난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우리는 당시 이 쉽지만은 않았던 이 피난 계획을 끝까지 추진한 현봉학을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라 부릅니다.
*[1951년1월4일-1.4 후퇴] -흥남에서 철수가 무사히 성공할 무렵, 서울이 위치한 서부전선은 중국군에게 38선까지 밀렸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제 8군 사령관 워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낙동강 전선을 막아낸 비운의 장군이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그는 곧바로 전선으로 날아왔습니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국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곧 함락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길이었습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오늘(1월 4일) 리지웨이 사령관도 남쪽으로 후퇴결정하고 금강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유엔 공군은 계속해서 보급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해 공산군은 공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시간을 얻었고 그 동안 전선을 재정비하였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일은 의욕을 잃은 장병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프차와 경비행기로 전선을 돌아다니며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다시 전투가 시작 됬습니다. 리지웨이는 막강한 화력으로 인해전술에 맞섰습니다. 그는 공산군의 보급원을 완전히 끊기 위해 북한의 공장지대와 주요 도시인 평양, 원산에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1월에는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수원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국은 이에 맞서 2월에 대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UN군은 이를 무사히 막아냈습니다. 특히, UN군으로 참전한 프랑스는 지평리에서 미군과 함께 중국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습니다.
*[1951년 4월 11일 워싱턴 - 맥아더 해임] -전세가 다시 유리해짐에따라 미국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그리고 합동 참모 본부는 전쟁을 확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이 중간에 다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UN의 국가들은 휴전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희생을 원치 않았고 한국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경우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3월 15일 UN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전세는 계속 UN군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전쟁이 유리해지자 UN의 휴전 압력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미국은 중국과 협상을 통해 휴전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월 20일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맥아더는 정부와는 한 마디의 협의도 없이 중국의 신경을 건드릴만한 성명을 발표하고 중국군 사령관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합니다. 이와 함께 트루먼 정부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러한 맥아더의 행동에 격분하여 4월 11일 그를 해임시켰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태평양의 시저, 전설적인 장군 더글라스 맥아더는 이렇게 해임되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밴플리트를 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4월 16일 맥아더는 미국의 시민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는 비록 해고되었지만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그의 귀국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반면, 트루먼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커져만 갔습니다. 4월 19일 미 의회에서 71세의 노장군 맥아더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맥아더의 연설] "Old soldiers never die, but just fade away!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의 연설은 엄청난 찬사와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어떤 의원들은 소리를 내어 울기도 했습니다. 한편, 맥아더의 해임 후, 1951년 4월과 5월에 중국군은 다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UN군과 중국군 모두 준비가 충분한 상태였습니다. UN군은 공산군의 공격을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제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과 유엔군의 대규모 화력전...그들은 이제 힘으로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1951년 여름 - 국제전의 무대, 한반도] -51년 여름 무렵, 유엔 참전국으로 한국에 파견된 여러 나라의 군대들이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유엔군으로서 한국에 전투 부대를 파견한 나라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벨기에-룩셈부르크, 콜롬비아 그리고 이디오피아 모두 16개국 입니다. 또, 5개국 ,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이탈리아, 이 의료 지원을 하였습니다. 비UN국으로 일본은 비밀리에 해군을 참전시켰습니다. 공산측은 소련과 중국이 개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주인공인 대한민국과 북한을 합쳐 모두 25개국이 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한과 북한의 내전적 성격이 짙었지만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는 국제전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마치 이들에게 전쟁터를 빌려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출처: 한국전쟁 http://www.osan.hs.kr/~artrics/korea/stories/stories.htm )
1950 제1회 건국국채 발행
건국국채규정에 의하여 발행된 국채.
건국국채는 세입보전공채의 성격을 가지며, 명목상으로는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발적으로 소화시키려는 임의공채(任意公債)의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강제성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부터 1969년까지 16차례에 걸쳐 건국국채규정이 제정·시행된 바 있다.
제16회 건국국채규정에 의하면, 건국국채는 공모(公募)와 인수(引受)에 의하여 발행하고, 발행가격은 액면금액으로 하며, 이율은 연 5푼으로 하였다. 건국국채를 발행하고자 할 때에는 명칭, 발행금액, 액면, 원금상환일과 원금상환비율, 이자지급일, 이자계산시기 등을 고시하도록 하였다.
건국국채의 원금은 5년간 균등분할상환하되 상환순위는 추첨으로 정하며, 등록국채(登錄國債)는 고시로 정한 날 현재의 등록금액을 원금상환비율에 의하여 상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등록국채의 이자는 고시된 이자지급일에 그전에 속하는 것을 지급하되, 무기명국채(無記名國債)는 이자를 거치하여 원금상환시마다 그전에 속하는 것을 복리(複利)로 계산하여 지급하도록 하였다.
1949 미국, 한국정부를 정식 인정(초대 대사에 무초)
서울 중심 세종로에 있는 주한 미국 외교사절단의 공관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등을 거친 뒤 조선과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관계를 맺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통상조약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이 때문에 미국과 맺은 외교관계가 단절됐다.
미국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까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국은 이어 1949년 1월 1일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 최초로 정식 승인하고 존 무초(John Mucho)를 초대 주한 미국 대사로 파견했다. 한국 정부는 1949년 3월 25일 장면(張勉)을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했다.
미국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을 조직, 전쟁에 참여했으며 휴전 이후에도 주한 미군을 주둔시키면서 한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미국은 또 1948년부터 1971년까지 46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는 등 한국 경제에도 도움을 주었다.
2011년 현재 주한 미국대사는 캐슬린 스티븐스(Kathleen Stephens)로 2008년 부임했다. 그는 1975년부터 2년 동안 충남 예산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으며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조직으로 농업무역관, 상무부, 경제과, 공보과 등을 두고 있다. 농업무역관은 한국의 무역업체에 미국 농산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상무부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등과 협력해 한국과의 교역확대를 모색한다. 경제과는 한국의 경제, 통상 및 투자 동향을 관찰하고 양자 및 다자간 경제 이슈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에게 알리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 공보과는 교육 및 시민교환프로그램, 언론관계 및 미국 관련 대민 홍보활동 등을 담당한다.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 정부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협력과 함께 한국 거주 미국인의 보호 및 육성, 국적·호적·여권 업무 및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 등의 업무를 한다. 업무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만 하며 미국과 한국의 공휴일은 휴무다.
관련 사이트 : http://korean.seoul.usembassy.gov
1949 친일파와 부일협력자 처단 위한 반민특위[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발족,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일제 치하 36년간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특별기구로 약칭 ‘반민특위’라고도 한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 친일잔재청산을 위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안이 미군정의 동맹세력인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정치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준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정부 수립 후로 넘어가게 되었다.
반민법의 제정】 1948년 8월 헌법 제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이어 9월 특별위원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의하면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징역, 직 ·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하도록 하였다.
반민특위의 구성】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반민법이 공포되자 국회는 곧 반민특위 구성에 나서 10월 12일 그 구성을 완료하였다. 이어 11월 25일 국회 제113차 본회의에서는 반민특위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 조직법안’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부속기관 조직법안’ ‘반민법 중 개정법률안’을 모두 통과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서는 특별재판부 재판관과 검사관 및 반민특위 도(道)조사부 책임자를 선출함으로써 민족반역자 및 부일협력자에 대한 처단기구를 완성하였다. 한편 친일행각을 벌였던 경찰간부들은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켰다. 10월 하순 수도청 수사과장 최란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은 수사과장실에 모여 반민특위 위원 중 강경파를 제거하기로 모의한 후 테러리스트인 백태민에게 이 일을 맡겼다. 처단대상 15명 가운데는 대법원장 김병로, 검찰총장(특별검사부장) 권승렬, 국회의장 신익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의는 백태민의 자수로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자들은 구속 ·기소되었다.
반민특위의 활동】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는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8일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승만은 담화를 통하여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요지는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되며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장(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 김병로는 반민특위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더니 2월 24일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제2회 39차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결과는 부결되었으며,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기간동안 특위의 활동성과는 총 취급건수 682건 중 기소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으로, 체형은 고작 14명에 그쳤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반민특위의 와해】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사건과 6 ·6경찰의 특위습격사건을 겪으면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위축시켰다면, 특위 산하 특경대에 대한 경찰의 습격은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역사적 평가】 8 ·15광복 직후 무엇보다도 신속히 친일파를 척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초기에 기회를 놓쳤고, 이후 미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어 등장한 이승만정권 역시 미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 이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한국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처: 두산백과)
1949 - 백범 김구 선생,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을 염원하는 신년사
백범이 마지막 맞던 새해,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하는데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는 민족의 영원한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1949 ECA원조도입 시작
경제원조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경제원조는 독일·일본·오스트리아 등을 주요 원조대상국으로 하며 식량원조가 대종을 이룬 점령지행정구호자금(GARIOA)원조였다. 이후 이승만정권의 성립과 함께 <한미원조협정>에 의해 GARIOA원조는 ECA원조로 바뀌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SEC원조로 바뀌어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전시 긴급구호물자 제공 및 전후복구를 위해 유엔의 이름으로 CRIK원조·UNKRA원조 등이 제공되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휴전이 성립되면서부터이며, 이후 미국원조는 FOA원조·ICA원조·AID원조·PL480원조 등으로 연결되다가, 미국의 국제수지가 악화되는 57년을 고비로 점차 줄어들고 유상차관 방식으로 바뀌어갔다. 45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기 전해인 61년까지 미국의 총원조액은 약 31억 달러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약 42%가 주로 제조업과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쓰이는 원재료 및 중간제품이었고, 25%가 밀·옥수수 등 농산물이었으며, 자본재에 속하는 것은 전체의 9%, 기술용역에 관한 것이 5%를 차지했다.
해방 후 약 17년간 제공된 미국의 무상원조는 2차대전 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이기를 통한 심한 식량난 및 극도로 감퇴한 공업 생산력을 극복하고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했으나, 식료품과 원면 등을 주종으로 하는 소비재 중심의 원조였기 때문에 자립경제구조의 형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빚었다. 또한 경제원조를 기반으로 한 독재정권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과 유착된 독점자본의 형성을 유도, 비민주적 정치권력 및 경제구조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1946 -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선언'
[어제의 오늘]1946년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선언’
ㆍ국민들에 패전 수용 권유
1946년 1월1일 아침. 일본 히로히토 일왕(昭和天皇)은 라디오 방송으로 신년 담화를 발표한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신(神)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일왕은 스스로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혔고, 국민들에게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한다.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패전국 일본에 대한 원활한 통치를 위해 히로히토와 정치적 거래를 한다. 아시아 각국의 바람과는 달리 일왕을 전범으로 법정에 세우지 않으며 ‘천황제’ 역시 폐지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 대신 신격화된 초법적 권위로 절대복종의 명령을 내리던 일왕이 직접 육성으로 일본인들에게 ‘인간’임을 선언하도록 했다.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와 ‘천황’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콤플렉스’가 통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 ‘천황’에 대한 단죄 대신 정치적 이용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일왕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11세기 무사들이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700여년간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다. 권력은 고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은 1600년 이후로는 항상 존폐의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다.
일왕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서게 된 것도 정치적인 이유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도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일왕을 이용한다. 일왕을 민족 통일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유신정권의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왕을 헌법 위에 올려놓으며 ‘천황의 뜻’이라면 불가능이 없는 일본 제국주의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무모한 전쟁은 무조건 항복으로 마무리됐고, 이듬해 ‘천황’은 ‘인간’이 됐다. 물론 아직도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여전히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지만 이는 ‘인간선언’으로 일왕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비록 타의에 의한 정치적 ‘인간선언’이었지만 ‘천황’의 인간화는 전후 일본의 정치·경제적 선진화에 큰 도움이 됐다.
새해 우리나라에서도 비인간적인 ‘정치’를 쏟아내던 이들의 반성과 성찰, 그리고 진심어린 ‘인간선언’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진호 기자 /경향신문 2010-12-31 18:17:27
1936 “학술원 설립 동아일보가 제안”…최호진 前연세대교수 증언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학술원 설립의 최초 구상을 동아일보가 제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학술원 초대회원인 최호진전 연세대 교수(90·경제학·사진)는 최근 발간된 ‘대한민국학술원 50년사’에서 이 같은 사실을 증언했다. 최씨는 김용섭(73·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 ‘50년사’ 편집위원의 사회로 역시 초대회원인 안동혁 전 서울대 교수(98·화학)와 가진 좌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선학술원을 (1945년) 8월 16일에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참 빨랐죠. 아마도 ‘중앙아카데미’에 대한 구상 이래의 준비기간이 있음으로써 이같이 빨리 설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한민국학술원의 전신인 조선학술원은 광복 다음날 백남운 홍명희 백낙준 이양하 우장춘 등 좌·우·중도학자들이 모두 모여 결성해 1년 동안 활동을 하다가 해체됐다. 최씨가 말한 ‘중앙아카데미’ 구상은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자에 실린 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날 신년특집호로 본면 4면과 부록 48면을 낸 동아일보는 부록 ‘기1’의 2면과 3면 전체를 ‘문화조선의 다각적 건축’이라는 제목의 특집으로 꾸몄다. ‘조선의 학자, 과학자, 재산가’들이 힘을 합쳐 학술, 과학, 문예 등의 영역을 연구 발전시킬 기구를 만들자는 취지로 각계 학자들에게 그 방안을 물은 것. 당시 조선경제학회 회장이자 동아일보 ‘객원기자’였던 백남운은 ‘학술기간부대의 양성, 중앙아카데미 창설’이라는 글에서 ‘첫째, 현존한 각 학술단체를 슬하에 모을 수 있는 중앙적 기구일 것 둘째, 조선 내에 있는 민간의 전문 이상 학원에 있는 각 연구실의 협력을 구할 것’이라며 학술원 창립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밖에도 백낙준 당시 연희전문 교수, 도산 안창호 선생 등 각계 인사 11명의 학술원에 대한 의견을 실었고, 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 소련 등 선진국의 학술연구소를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김용섭 편집위원은 “당시 그 기사를 실은 뒤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혼이 났다고 들었다”며 “아쉽게도 일제가 이후 중일전쟁을 시작하는 등 전시체제로 돌입해 동아일보의 제안이 즉각 실현되지 못했지만 동아일보의 구상은 학자들 머릿속에서 충분히 구체화되어 있다가 광복 직후 곧바로 조선학술원 성립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민동용기자 donga.com)
1935 - 한국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 출생
Google 이미지
대한민국의 과학자 이휘소 출생
이휘소(李輝昭, Benjamin W. Lee, 1935년1월 1일~1977년6월 16일)는 한국 출신의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생애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에 검정고시를 통해 1952년에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이후 주한 미군 부인회의 지원으로 1955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애미 대학교물리학과에 편입하였으며 1958년에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졸업하였다. 당시 피츠버그 대학교의 시드니 메시코프는 이휘소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으로 추천하여 1961년 에이브러험 클라인(Abraham Klein)의 지도 하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곧바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임용되어 1965년에 정교수로 승진하였으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교수 등을 지낸 후 1973년 부터는 국립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 이론물리부장 및 시카고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를 겸임하였다. 1962년 싱가포르계 마리안느(沈蔓菁, Marianne)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그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과 맵시 쿼크의 탐색에 관한 연구에 공헌하였다.
의문사 논란
1977년 일리노이 주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뉴욕 타임스의 부고에 따르면,[1] 도로 건너편에서 사고가 난 유조차의 바퀴가 굴러와서 이휘소 가족의 차 앞유리를 강타한 것이다. 가족들은 경상을 입었지만, 이휘소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반대편에서 사고가 난 타이어가 운전석 창문에 맞는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 미심쩍다고 여겨, 당시 국회에서 의문사 청문회를 했다. 일부 사람들이 이휘소와 제3공화국의 핵 개발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그는 한국의 대학원 교육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하다가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모든 계획을 취소했던 적이 있다.
업적
재규격화
1964년에 이휘소는 그의 지도교수 클라인과 자발대칭파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서 미시세계에서의 질량의 존재를 규명하는 힉스 메커니즘이 등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1969년에는 독립적으로 온곳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어지는 모형의 재규격화에 성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당시 네덜란드의 대학원생이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힉스 메카니즘을 양-밀스 이론에 사용하여 국소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어지는 경우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학회에서 접한 이휘소의 영향을 통해 그의 학위 논문 주제였던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대한 통찰력를 얻었다고 여러차례 진술하였으며 마침내 이에 성공하게 된다. 엇호프트는 이 업적으로 1999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폴리처는 그의 2004년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당시 학자들이 이휘소의 재해석을 통해 전자기 약력에 대한 엇호프트의 연구결과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맵시 쿼크 예측
글래쇼, 마이아니, 일리오풀로스는 맵시(charm) 쿼크가 있으면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맵시 쿼크를 예측하였다. 이휘소는 게이아, 로즈너와 함께 〈맵시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K 중간자의 섞임과 붕괴에 해당하는 양을 계산하여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했다.
한국과의 관계
1974년 미국 AID 차관(서울대학교 교육 차관)의 평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그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다.
한 때 한국에서 그의 학문 분야 및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왜곡하여 쓰여진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휘소는 실제로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및 핵무기를 강력히 반대한 입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1934 독일 소설가 바서만 사망
유대인 태생으로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의 문화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또 증오해야 했던 독일 소설가 야콥 바서만. 그가 1934년 1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도덕적 열정과 선정주의적 경향을 모두 가진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비유되곤 하는 그는 독일 바이에른의 퓌르트에서 유대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과학교를 졸업한 후 문학에 뜻을 두고 빈으로 가서 잡지 편집에 종사하다 1900년부터 작가로서 독립, 1920~30년대에 인기몰이를 하며 독일 문학계에 나타났다.
초기에는 구츠코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이 정신분석에 흥미를 가지고 시대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관찰했다. 그러나 점차 독일인이자 유대인인 자신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유대인으로서의 고뇌를 체험하면서 모든 사회의 부정을 간취(看取)하여 그것들을 소재로 현대사회를 묘사했다.
자서전 ‘독일인 및 유대인으로서의 나의 길’(1921)은 독일인이면서 유대인인 그의 불행하고 불안했던 유년시절을 그린 것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문화를 가진 독일에 대한 애증(愛憎)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에 대한 애증관계는 전생애를 걸쳐 그를 갈등하게 했고, 또한 창작의 원동력이 돼주었다.
그 밖에 그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탐정소설 ‘마우리치우스 사건’(1928)과 보통 세계에 익숙지 않은 한 낯선 소년의 실화를 다룬 ‘카스파르 하우저’(1908), 당시 사회상을 매우 낭만적으로 펼쳐보인 표현주의적 작품 ‘세상의 망상’(1919) 등을 남겼다.
1934 수필가 번역문학가 전혜린[田惠麟,1934.1.1∼1965.1.11]출생,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출생하였다. 경기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 재학 중 독일에 유학, 뮌헨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울대학교 법대·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6년 F.사강 원작 《어떤 미소》를 비롯하여 E.슈나벨의 《한 소녀의 걸어온 길》(1958), 이미륵(李彌勒)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 E.케스트너의 《파비안》(1960), L.린저의 《생의 한가운데》(1961), H.게스턴의 《에밀리에》(1963), W.막시모후의 《그래도 인간은 산다》(1963), H.노바크의 《태양병(太陽病)》(1965) 등을 계속 번역 소개하였다. 그 밖에도 사후에 출판된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와 비장(秘藏)의 일기를 모은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68) 등이 있다. 자살로 스스로의 인생을 결말지었다. (출처: 두산백과)
1931 염상섭, 장편소설 [삼대三代]를 조선일보에 연재(∼9.17)
*염상섭의 대표적 장편소설로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 서울의 이름난 만석군 조씨(趙氏) 집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에 이르는 삼대가 일제 치하에서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당시의 청년들의 고민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3·1운동 전후의 대지주의 생태, 그 당시 풍미했던 사회주의자들의 군상이 복잡하게 얽혀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할아버지가 죽자 쑥밭이 되는 덕기의 집안,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상호 불신과 반목, 그리고 그들 내부에서의 갈등과 테러가 인상 깊게 묘사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염상섭廉想涉,1897.8.30∼1963.3.14] - *호 횡보(橫步). 서울 출생.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도일하여 교토부립중학[京都府立中學]을 졸업, 게이오[慶應]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0년 《폐허(廢墟)》지 동인에 가담하여 문학의 길에 투신했다. 1921년 《개벽(開闢)》지에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적인 위치를 굳히고 1922년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던 주간종합지 《동명(東明)》에서 기자로 활약했으며, 현진건(玄鎭健)과 함께 《시대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과 동시에 편집국장,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국에 근무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萬歲前)》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三代)》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破産)》 《일대의 유업(遺業)》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驟雨)》 등이 있다.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건설한 최초의 작가로서 김동인(金東仁)·현진건과 함께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 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195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장에 취임하고 아시아자유문학상, 195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에 3·1문화상(三一文化賞), 1971년 문화훈장 은관 등을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대표작: <표본실의 청개구리標本室-靑->] -1921년 《개벽(開闢)》지에 발표한 처녀작으로서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일컬어진다. 1인칭 소설로, 내용은 '나'라는 주인공이 중학교 2학년 때 청개구리를 해부하던 기억을 더듬는 데서 시작된다. 어느날 친구와 함께 남포까지 가서 친구 Y의 소개로 정신이상 증세가 있는 김창억(金昌億)을 만난다. 철학자연하는 그는 우리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일종의 영감(靈感)에 사로잡히게 되어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서 세계평화를 위한 회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 북만주를 방랑하던 중 Y의 편지를 통해 김창억의 후문을 듣게 된다. 즉 김창억은 자기의 왕국을 불살라버리고 자기를 버린 후처의 본가 주변에서 걸식하며 지낸다는 것이었다. '나'와 '김창억'을 통해 당시의 창백하고 무기력한 청년층의 우울상을 해부한 작품이다. (출처: 두산백과)
1928 한국 최초의 [신춘문예新春文藝]작품 입선작 발표,
*주로 일간신문사에서 새해의 문예 당선자를 뽑는 연중행사로 매년 연말에 문학작품을 공모하여 신년 초에 당선 작품들을 지면에 발표하고 당선자에게 상금을 주며 축하한다. 한국 문필육성에 큰 공헌을 한 신춘문예는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시작하였으며, 제1회 소설 입선 작품은 최자영(崔紫英)의 《옵바의 이혼사건》이다. 이어 1928년 《조선일보》에서도 실시하였다. 그후 8 ·15광복과 6 ·25전쟁으로 몇해 동안 중단되었다가 1955년 다시 실시되었다. 이때 1954년에 창간된 《한국일보》에서도 신춘문예 제도를 창설하였고, 나중에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서도 실시하였다. 문단의 등용문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이 제도는 현재 잡지사와 여러 지방신문에서도 채택하는 곳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소설 ·시 ·희곡 ·동화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문인이 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24 - 김구 선생 부인 최준례 여사 별세
1924년 2월18일 상하이에서 병사한 부인 최준례씨의 묘비에서 함께한 백범의 가족. 왼쪽부터 둘째아들신(2), 김구(49), 어머니 곽낙원(66), 큰아들 인(5)의 모습. 당시 <동아일보>는 동포들이 돈을 모아 세운 빗돌에 조선어학자 김두봉씨가 비문을 지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
김구 선생 부인 최준례 여사 별세
[길을찾아서] 아내 임종조차 지킬 수 없었던 백범 / 김자동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3
1922년 7월 할아버지(김가진)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정정화)가 상당 기간 서울에 머물게 되자, 아버지(김의한)는 살던 집을 항일혁명투쟁의 동지이자 동향으로 절친했던 황훈 최중호와 백범 김구, 두 집 식구에게 넘겼다. 그리고 아버지는 프랑스 조계 내 포시로 아이런리(애인리)에서 무정 등 몇몇 동지들과 자취생활을 했다.
황훈의 두 아들 중 맏이는 훗날 옌안(연안)에 있는 조선의용군에서 활약했으며, 동생은 광복군에 참여해 항일투쟁을 했다. 그리고 딸은 중국군관학교를 나와 훗날 광복군에서 중책을 맡았던, 임정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의 양자인 박시창과 결혼했다. 박시창은 아버지의 절친한 항일동지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운명한 곳은 프랑스 조계 안의 베레로 융칭팡(영경방)이었는데, 아이런리와 융칭팡이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상하이에 다시 돌아온 뒤 융칭팡 옛집에 자주 들러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부인 최준례 여사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백범의 네 식구가 그 집 3층에 살았는데, 사실은 다락방 같은 형편없는 곳으로 계단도 좁고 가팔랐다. 그곳에서 최 여사가 둘째아들(김신)을 낳게 되니 식구는 다섯으로 늘어났다.
최 여사는 그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산후 얼마 되지 않아 계단에서 굴러 심한 낙상을 입었다. 최 여사는 외상도 문제였지만 결핵까지 앓고 있었다. 결국 장기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에 오래 있어 영어에 능통한 세관 유인묵의 알선으로 외국계 교회에서 운영하는 ‘훙커우 폐의원’에 무료로 입원했다.
백범은 임정 초기 경무국장에서 23년 내무총장으로 옮기었지만 이때 임정은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무총장은 임정 부서 중 가장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출도 많은 편이었다. 임정의 형편이 그러하니 백범은 미주 동포들에게 부지런히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해야 했는데, 동포들이 많이 호응하여 임정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한다.
그렇게 들어온 돈은 백범 자신이 맡아 지출했으며,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백범은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치며 사는 사람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는 무척이나 인색했다.
최 여사가 입원한 뒤 연로한 곽 여사가 집안 살림뿐만 아니라 두 손자까지 돌봐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어머니가 틈틈이 백범 가족의 살림을 도와드렸다.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헌옷을 모아 기저귀를 집에서 만들어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머니가 어린 김신의 기저귀를 만들어 대기도 했다. 최 여사는 24년 1월1일 훙커우 폐의원에서 별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침 그날 임정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기에 앞서 최 여사를 문병하러 병원에 가보니 이미 임종 직전이었다. 어머니는 연락할 길이 없어 인력거를 타고 백범이 사는 융칭팡으로 갔다. 그러나 훙커우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이었으므로 백범은 부인이 입원중일 때도, 운명한다는 말을 듣고도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곽 여사와 어린 손자 둘과 함께 병원에 와보니 이미 운명한 다음이었다.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분을 마지막 만난 사람이 된 것이다. 곽 여사는 아들의 독립투쟁에 부담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26년 작은손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큰손자까지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혼자 남은 백범은 27년부터 임정 청사로 옮겨 기거했다. 19년 임정 수립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난 신생독립국의 대열에 우리도 낄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베르사유 강화협정의 진전을 지켜보면서 쉽게 독립이 이룩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부는 무장투쟁에 참여하고자 만주로 갔으며, 중국 각지의 군관학교에 입학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 혹은 외국의 대학에 입학해 실력양성의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한편 상하이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직장을 갖고 벌이를 하면서 독립투쟁의 장기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한겨레 2010-01-19 오후 07:20:01 서울역 신축공사 현장 1900년 경성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05년 남대문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3년 다시 경성역으로 바뀌었고, 1925년 역사(驛舍)가 준공되었다. 1946년 광복 1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명칭인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기로 한 서울시 헌장이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 1일부터 서울역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7 이광수(李光洙),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에 연재 시작, *이광수(李光洙)의 장편소설로 1917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된 한국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 경성학교의 영어교사 이형식은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 개인지도를 하다가 선형의 미모에 차차 연정을 품게 되는데, 어린 시절의 친구이며 자기를 귀여워했던 박 진사의 딸 영채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받는다. 이 때 영채는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 그 뒤 영채는 경성학교 배 학감에게 순결을 빼앗기자 형식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한편, 자살을 기도하였던 영채는 동경에 유학 중인 병욱을 만나 마음을 바꾸고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며, 약혼한 형식과 선형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들은 같은 기차로 유학길을 떠나고 있었으며, 모두 학교를 마치고 고국에 돌아오면 문명사상의 보급에 힘쓸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 신교육사상, 자유연애의 찬양 등이 주제를 이루어 당시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 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선구적인 의의를 지니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출처: 두산백과) *[이광수李光洙,1892-1950.10.25] - 호 춘원(春園).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소작농 가정에 태어나 1902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동학(東學)에 들어가 서기(書記)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추천으로 도일, 메이지[明治]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0년 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재차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허영숙(許英肅)과 결혼,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8·15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尹光浩)》 등의 단편과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사랑》 《원효대사》 《유정》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13 어린이 교육잡지 붉은 저고리 창간 1913년 1월 최남선(崔南善)이 발간한 어린이 반월간 잡지. 신문관(新文館) 발행. 타블로이드판 8면. 총 88면. 통권 12호. 1913년 1월 창간하여 매월 2회(1일∙15일) 발행하였으며, 1913년 6월 11호로 종간되었다. 표제 위에는 ‘공부거리와 놀잇감의 화수분’이라는 부제가 있다. 인사 여쭙는 말씀으로 “우리는 온 세상 붉은 저고리 입는 이들의 귀염 받는 동무가 될 양으로 생겼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보기 좋은 그림도 많이 가졌습니다.
하루 평균 9만여 명이 이용하는,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철도의 중추 간선노선인 경부선과 경의선의 시종착역으로, 경부선 서울역은 종착역인 부산역까지 거리가 441.7㎞이며, 경부고속철도(KTX)는 408.5㎞이다. 경의선은 도라산까지 55.6㎞이다.
경부선은 새마을호·무궁화호·KTX가 운행되며, 통일호 운행은 2004년 4월부터 폐지되었다. 새마을호·무궁화호는 대전·김천·동대구·부산 방면, KTX는 광명·대전·동대구·부산 방면으로 운행된다. 수도권 광역전철 경의선은 일산·금촌·문산 방면으로 운행된다.
지하철 서울역은 1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으로, 1974년 8월 15일 개통하였을 때 명칭은 서울역앞이었다. 1호선은 수원·천안 방면의 서울~천안 급행열차가 하루 3회 운행된다. 1호선 서울역과 경부선·경의선의 행정구역상 소재지는 서울시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이며, KTX와 4호선 서울역의 소재지는 용산구 동자동 43-205번지이다.
과거에는 경부선 외에도 호남선·전라선·장항선 등 모든 장거리 열차가 운행되었으나 2004년 4월 KTX가 개통된 뒤부터 호남선·전라선·장항선은 용산역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2003년 12월 완공된 신축 역사에는 백화점이 입점하고 주변에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는 등 여행과 쇼핑을 겸할 수 있는 복합역으로 조성되었다.
공부거리와 놀잇감도 적지 아니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보고 듣고 배우고 놀기에 도움될 것은 이것저것 다 마련하였습니다. 한벌한벌 나오는 대로 차례차례 보아가면 무엇이 어떠하며 무슨 재미가 얼만큼 있는지 아시오리다.(이하생략)”에서 볼 수 있듯이, 내용은 어린이를 위한 계몽 또는 학습보조 잡지이다. 1호의 차례를 보면 <은진미륵>(한샘) ∙ <바보 온달이> ∙ <따님의 간 곳> ∙ <깨우쳐 들릴 말씀>(한샘) ∙ <이름 난이-아이삭 늬유톤> 등으로 되어 있다. 12호가 발행되었다고 하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1912 - 중화민국 수립을 선포,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취임
중국 근대혁명의 지도자겸 초대대통령을 지낸 쑨원(孫文). /조선
중화민국 수립, 손문 대통령 취임, 공화제 선포
쑨원이 1912년 1월 1일 오후5시 상해에서 남경으로 들어간 즉시 임시대총통 취임식을 거행한 후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취임과 함께 이해부터 양력을 채용했고 중화민국 원년으로 삼았다. 국기는 한족,만주족,몽고족,회족(이슬람 교도),장족(티베트족)의 5족을 상징하는 오색기가 제정됐다. 하지만 쑨원은 곧 대총통직을 사임했고 북방 군벌 원세개가 3월 11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해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이전했다.
쑨원은 분명 권위있는 혁명가이자 근대중국의 대표적인 정치가였지만 그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남방 혁명세력은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의 보수세력에 비해 군사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열세에 있어 원세개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중화민국은 원세개에 의한 독재지배의 길을 걸어 쑨원이 제정한 주권재민,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우위 등 민주적인 내용의 임시약법(헌법에 해당)은 폐지됐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영원한 혁명가…1912년 쑨원 대총통 취임
1895년 광저우에서 거병(擧兵)을 도모했다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도쿄로 피신했던 쑨원(孫文). 그는 호텔의 숙박부에 자신의 본명 대신 중산차오(中山樵)라고 적었다.
일행이 그 이름의 뜻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중산(中山)은 중국의 산, 차오(樵)는 나무꾼을 뜻한다네. 조국에 새 세상이 온다면 나무꾼으로 평생을 산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나.” 이후 중산은 그의 호가 되었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
그는 실패한 혁명가였다.
1894년 청(淸) 왕조 타도를 위해 흥중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1912년 중화민국이 발족한 이후에도 그의 일생은 봉기(蜂起)와 실패,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됐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객사한 쑨원이 남긴 유언은 이랬다. “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영원한 혁명가였다.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한 쑨원. 그는 내분과 수구세력의 저항으로 혁명의 성공이 위협받자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기꺼이 그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가 제정(帝政) 복귀 쿠데타를 일으키자 2차혁명으로 이에 맞섰다.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중국 근대의 문(門)을 열었다.
1905년 공표된 민권(民權), 민족(民族), 민생(民生)의 삼민주의는 그가 ‘흩어진 모래(散沙)’로 표현했던 중국 민중을 구국주의의 이념 아래 결집시켰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못다 이룬 그의 혁명과업을 이어간 사람은 부인 쑹칭링(宋慶齡)이었다.
‘쑹(宋)씨 3자매’의 둘째였던 그녀는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한 셋째 쑹메이링(宋美齡)과 함께 20세기 ‘2개의 중국’을 빛낸 여걸(女傑)이었다.
쑨원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에 결혼해 ‘혁명의 동지’로서 10년을 함께했고, 그가 떠난 뒤 60년 가까운 세월을 중국의 혁명과 현대화에 진력했다.
그녀는 우아함과 온화함, 원칙과 용기,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국제적 교양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의 혁명적 애국주의자로 남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3-12-31 17:17
1911 조선독립운동 말살책인 105인 사건 조작
1911 일본경찰이 민족운동과 조선독립운동 말살책과 탄압을 위해 신민회원 다수를 체포고문한 [105인사건百五人事件](민족주의자 700여명 피검)]조작발생,
*1911년 일본 경찰이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다수의 신민회원을 체포하여 고문한 사건으로 1910년 평북 선천(宣川)에서 안명근(安明根)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 경찰은 이것을 구실삼아 신민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그리스도교 신자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억압할 계획을 세워, 안명근 사건을 신민회원 등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처럼 조작하여,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이동휘(李東輝) 등 6백여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신민회원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총독암살 음모를 꾸민 사실이 없으므로 그 사실을 부인하자, 일본 경찰은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의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明石元二郞]의 지시로 이들에게 가장 악독한 고문을 자행했는데, 그 결과로 6백 명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105명을 기소하였다. 1심(審)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105명은 불복상고를 제기하여, 2심에서 99명은 무죄석방되고 윤치호·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승훈·임치정·옥관빈 등 6명만이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선고를 받고 복역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1910 - 양력 1월1일을 공휴일로 지정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⑦ 설]
1896년 1월1일, 음력으로 1895년 11월7일인 이 날은 설 한식 단오 추석과 같은 음력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세시풍속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공식적인' 기점이었다. 이 날을 기해 고종이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제정하면서 기존의 태음력 대신 태양력을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엄한 나라님 말씀이었다 해도 하루 아침에 뼛속까지 스민 전통을 바꿀 수는 없는 일. 6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태음력을 받아들인 이래 1500년 가까이 따라온 음력을 버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무렵까지도 대부분의 세시풍속은 제 모습이 유지됐다.
그러나 우리보다 태양력을 먼저 채용한 일본이 나라를 삼키고 "조선의 관제를 '내지'(內地)와 같이 고친다"며 1910년 양력 1월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면서부터 우리의 설은 일본의 '정월'과 얽혀 본격적인 수난을 겪기 시작했다. 일제는 설날 온 민족이 한마음으로 조상을 추모하는 민족정서를 말살시키기 위해 '이중과세'라는 올가미를 씌워 '오랑캐 설'을 강요했고, 이 때문에 음력설에는 조상님 앞에 술 한잔 맘놓고 올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강필 기자 /마이다스동아일보 [동아일보매거진: NEWS+172]
1905 - 서울-부산간의 경부선 철도가 개통됨
1905년 5월 25일, 남대문역사(현재의 서울역)에서 경부선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사진 수집가 함성한씨가 제공) /조선
경부선(서울-부산) 개통
우리나라 두번째 철도선인 경부선이 1905년 1월1일 운행을 개시했다. 1901년 서울 영등포(8월20일)와 부산 초량(9월11일)에서 공사가 시작된 지 3년4개월 만이었다.
공사는 관민의 저항과 반대, 용지매수 분쟁, 결빙과 홍수 등으로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조선 정부의 협조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됐다. 경부선에 이어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최초의 부관(釜關)연락선 `일기환(壹岐丸)`이 취항(1905년9월11일)하고, 경의선(서울~신의주)이 개통(1906년4월3일)됨으로써 섬나라 일본은 사실상 대륙과 연결되는 효과를 보았다.
1913년에는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 각국과 화물운송을 시작해 오랫동안 숙원해 온 대륙진출로의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첫 열차는 시속 26.5㎞ 속도로 17시간이나 걸려 서울과 부산 간을 운행했지만 5개월 후에는 14시간으로 단축됐고, 1906년에는 다시 11시간으로 단축돼 속도, 기술면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조선
[책갈피속의 오늘]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
100년 전인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됐다. 서울 서대문을 출발한 열차는 30시간 뒤 부산 초량에 닿았다. 말을 타고 며칠 만에 닿던 서울∼부산이 하룻밤 자고 나면 도착하게 된 것이다.
철도는 일본이 기획한 조선 침략정책의 핵심이었다.
1904년 5월 일본 정부가 작성한 ‘대한 시설 강령’에는 ‘(조선의) 교통기관을 장악할 것’, ‘철도사업은 조선 경영의 골자’라는 내용과 함께 철도 부설 계획이 상세히 담겨 있다.
경부선에 이어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 △1929년 충북선 △1931년 장항선 △1936년 전라선 △1939년 경춘선 △1942년 중앙선 등이 차례로 개통됐다.
일본은 광복 이전까지 약 6000km에 이르는 국내 철도 노선을 장악했다.
이들 철도는 조선의 쌀과 자원, 사람을 일본으로 빼내가는 통로였다. 사실상 일본의 군사시설이었던 조선의 철도는 근대화나 진보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수탈’의 상징이었다.
1908년 경의선과 경부선을 따라 부산∼신의주 구간을 달리는 직통 급행열차 융희호(隆熙號)가 운행을 시작했다. 1911년 11월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고 철로가 중국 대륙의 철도와 이어지면서 융희호는 중국 창춘(長春)까지 연장 운행됐다. 이는 일본과 만주를 잇는 병참로로 철도를 활용한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융희호 운행 시간은 관부연락선(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연락선)의 발착 시간에 맞춰 편성됐다.
1933년 부산∼선양(瀋陽), 1939년 부산∼베이징(北京) 간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경부선과 이어지는 철도는 ‘국제선’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 지배와 대륙으로의 팽창을 위한 ‘동북아 물류 허브’로 삼은 셈이다.
지금은 분단으로 인해 철길로 신의주나 중국까지 갈 수는 없다. 날마다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여객 열차 630여 회와 화물 열차 430여 회가 국내에서 운행되고 있다.
2005년 1월 1일 0시 20분 올해 첫 번째 열차가 서울과 대전에서 동시에 출발했다. 새해를 맞아 밝고 활기찬 한국의 희망을 실은 열차가 또 1년간 전국의 철로를 누비길 기대한다.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동아닷컴 2004-12-31 09:55
1900 정부 만국우편연맹 가입
우편업무의 효과적 운영으로 각국 국민간의 통신연락을 증진하고 문화·사회·경제 영역에 있어서 국제협력 달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1874년에 창설된 기구.
내용
본부는 스위스 베른에 있다. 국제간의 우편물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북독일연방 우정청장 슈테판(Stephan,H.)의 제창으로, 1874년 10월 스위스 베른에서 22개 국가의 대표가 모여 <일반우편연합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편에 관한 국제기구가 탄생되었으며, 1878년 제2차 파리총회에서 만국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 UPU)으로 개칭하였다.
이 연합은 우편영역의 단일화, 우편물중계의 자유 보장, 우편요금의 표준화, 우편분쟁의 해결 중재, 우편업무 개선발전을 위한 국제협력과 기술원조를 목적으로 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국제연합회원국은 가입선언만 하면 자동적으로 가입되며, 국제연합회원국이 아닌 나라는 국제연합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동의로써 가입할 수 있다. 1985년 말의 회원국 수는 168개 국이다.
이 연합은 만국우편연합헌장·일반규칙·만국우편협약 등 3개의 의무조약과, 소포약정·우편대체약정·대금교환약정·신문 및 정기간행물예약구독약정·현금수취약정·국제저금약정 등의 7개 임의약정을 통해 국제우편물 교환질서를 규율하고 있다.
최고기관으로 총회가 있고, 상설기관으로 집행이사회·우편연구자문이사회·국제사무국 등이 있다. 총회는 협약 및 기타 약정을 개정 또는 보완하기 위하여 5년마다 개최되며, 198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제19차 총회가 개최되었다.
우리 나라는 1894년(고종 31) 1월 27일 외부대신 조병직(趙柄稙)이 서명날인한 연합가입신청서를 제출하고, 1897년 제5차 워싱턴총회에 주미공사 이범진(李範晉)과 통신원총판(通信院總辦) 민상호(閔商鎬)를 전권대표로 파견, 연합조약에 서명하였으며, 그 해 7월 29일 고종의 비준서를 기탁, 1900년 1월 1일 국호 대한국(大韓國)으로 정식가입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으로 회원국으로서의 활동이 일시 중지되었다가 1947년 제12차 파리총회의 결정에 따라 우리 국호인 ‘대한민국’으로 가입권이 회복되었다.
그 뒤 1952년 제13차 브뤼셀총회부터 계속 대표단을 파견하여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단위 등급의 연합경비분담금과 저개발국의 우편업무 개선발전을 위한 특별기금을 제공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 연합의 진행이사회 및 우편연구자문이사회 이사국 진출을 통한 지위 강화와 국제협력 증진에 기여할 것이 기대된다.
1896 - 그레고리력 도입
율리우스력 대체한 그레고리력, 조선은 1896년 1월1일 도입
역사로 보는 한주
조선이 태양력(그레고리오력)을 도입한 것은 1896년 1월1일이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 5년 뒤인 1873년, 그리고 중국은 쑨원이 중화민국을 세운 1912년 1월1일부터 태양력을 썼다. 지금 세계 대다수 국가들은 그레고리오 역법을 쓰고 있으나, 그 전에는 율리우스 역법을 썼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1502-1585)는 1582년 2월24일 기존 율리우스력을 대신할 새 역법을 공포해 그해 10월4일(목요일) 다음날을 10일 건너뛴 10월15일(금요일)로 하기로 결정했다. 역법상의 절기와 실제 절기 간의 오차를 수정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그레고리오력의 시작이다. 율리우스력은 로마 장군 율리우스 케사르(시저)가 제정한 것으로 기원전(BC) 45년 1월1일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7월달(July) 명칭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로마 황제들은 달력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려 갖은 시도를 했으나 케사르 외에는 8월달(August)로 남은 아우구스투스만이 성공했다.
율리우스력은 평균역년을 365.25일로 잡아 1000년마다 실제 태양년과 약 8일간의 차이가 났다. 1년을 365.2425일로 잡은 그레고리오력은 그 오차가 3300년에 하루 꼴이다. 365.2425라는 수치를 계산해낸 사람은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통상 1년을 365일로 하고 여기에 윤년으로 오차를 조정하면 평균년이 365.2425일이 된다. 끝수 0.2425를 분수로 표시하면 400분의 97이 되므로 400년에 97일간의 윤일을 끼워넣으면 된다. 그런데 율리우스력은 4년에 한번씩 윤년을 두었기 때문에 400년간 윤일이 100일이다. 이 100일을 97일로 줄이기 위해, 4로 나눠지는 해를 윤년으로 하되 그 중 100으로 나뉘는 해는 평년으로 하고 또 400으로 나뉘는 해는 다시 윤년으로 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그레고리오력은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이름을 땄지만, 율리우스력을 고치기로 결정한 것은 교황 파울루스 3세(1468-1549)가 소집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쇄신, 내부개혁 문제를 논의했고 새 역법 제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이미 13세기에 로저 베이컨(1214-1294)이 지적했음에도 이처럼 3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다. 가톨릭 내부개혁은 1517년 독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95개조’ 요구사항을 내걸기 전부터 시작됐으나 그때부터 본격화된 일종의 대항개혁, 즉 전통적인 가톨릭 교의나 교회조직을 보호하고 프로테스탄트 쪽의 비판을 견뎌내고 살아남기 위한 개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지역들이 그레고리오력을 받아들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유대교는 지금도 율리우스력과 비슷한 유대역법으로 부활절 등 축일을 정하고 있고 러시아 정교회도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겨레 2005-12-29 오후 05:17:32
1895 후버 J(ohn) Edgar Hoover출생
1895년 1월 1일 태어남 / 1972년 5월 2일 죽음 ◀ 후버
"케네디·존슨 정부의 가호 속에 미국연방수사국(FBI) 국장 후버와 법무부는 마틴 루터 킹을 가차 없이 공산당에 연루시키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단지 후버가 제 강박관념에 못 이겨 저지른 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블랙 파워’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후버는 그 전쟁에서 낙승을 거두는 길은 상대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 얼 허친슨
후버는 미국연방수사국(FBI)을 세계 최고의 경찰기구로 키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의 공직자이다. 그는 법집행의 전문적 기준을 확립했으며, 수사관들을 정예화하기 위해 'FBI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는 국장으로 재직하면서 FBI를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성이 보장된 기구로 만들고자 힘썼다. 그러나 그는 열성이 지나칠 때가 많았고 때때로 피의자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그의 독재적인 운영을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지만 그의 명성이 워낙 높아 대통령조차 그를 퇴임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48년 동안이나 FBI 국장직을 고수했다.
1892 폴란드태생 미국지휘자 아서 로진스키[Rodzinski,Artur, 1892.1.1∼1958.11.27]출생,
*유고슬라비아 스팔라트 출생. 빈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1920년 바르샤바에서 지휘활동을 시작하고, 스토코프스키에게 인정을 받아 도미, 1926년부터 필라델피아관현악단에서 스토코프스키의 조수로 일하는 한편, 커티스음악원의 강사도 지냈다. 그 후 로스앤젤레스 ·클리블랜드 ·NBC ·뉴욕 등의 각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고, 1948년 시카고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마지막으로 프리랜서로 유럽에서 활약하다가 195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다이내믹하고 정열적인 연주가 특징인 명지휘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러시아음악에는 정평이 나 있다. (출처:네이버백과 100.naver.com)
1883 - 제물포 개항, 인천으로 이름 바꿈 - 부산항과 원산항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
조선 구식군인이 신식군 대양성과 군제개혁에 불만을 품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1882.7.23). 일본 공사(公使)는 인천으로 피신하여 제물포에서 영국선박으로 일본에 귀환(7.25)
* 이 결과 1882년 8월 30일 인천에서 제물포 조약(일본군의 조선 내 주둔 허용) 체결
강화도 조약에 따른 일본의 요구에 의거 1877년부터 수차의 개항협상(일본공사 하나부사와 조선의 홍우창 및 김홍집)을 거쳐 1881년 2월 1일 인천항 개항에 합의 1882년 12월 28일 개항 포고
개항장의 세관업무 관장을 위하여 1883년 6월 16일 해관(海關)을 설치하고(초대 : 영국인 A.B Stripling) 9월에는 통상사무관장을 위하여 감리서(監理署) 설치(초대 : 조병직)
/인천항만연수원
1879 폭스/William Fox출생
본명은 Wilhelm Fried.
1879. 1. 1 헝가리 툴치바~1952. 5. 8 미국 뉴욕 시.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무성영화시대에 영화의 상영·배급·제작을 총괄하는 대규모 영화사를 세웠다.
폭스는 신문판매소년을 거쳐 모피·의류 공장에서 일한 뒤 브루클린에서 영화관에 투자했다. 1913년경에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극장주이자 배급업자가 되어 영화산업을 독점하려던 영화특허회사와 맞서 싸워 이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15년에는 20세기폭스사의 전신인 폭스영화사를 세웠다. 폭스는 자기 극장에서 상영되는 무성영화에 오르간 반주를 도입했고, 관객들이 안락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극장을 설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또한 광고를 잘 이용하여 최초의 스크린 요정 테다 바라를 스타로 만들었다. 1927에는 뉴스 영화 연속물인 〈무비톤 뉴스 Movietone News〉를 제작하여 유성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879 영국소설가 에드워드모건 포스터[Forster, Edward Morgan,1879.1.1-1970.6.7]출생,
*런던 출생. 케임브리지대학교 재학 중 학내의 자유주의 그룹에 참가하였다. 빅토리아왕조의 도덕이나 가치관에 반발, 그리스 문명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모임은 나중에 '부룸즈버리 그룹'으로 발전하여 당시의 지도적 문화 서클이 되었다. 졸업 후 이탈리아로 가서 《천사가 두려워하는 곳에 Where Angels Fear to Tread》(1905), 《가장 길었던 여로(旅路) The Longest Journey》(1907),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1908)을 썼다. 1910년 그의 가장 원숙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하워즈 엔드 Howards End》를 썼고, 또 1924년에 발표한 대작(大作) 《인도로 가는 길 A Passage to India》에서는 동서문명의 대립과 인간이해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그 밖에도 환상적인 작풍의 단편집, 여행기·전기·수필, 독창적인 소설론 《소설의 제상(諸相) Aspects of the Novel》(1927) 등의 논평 및 기타의 저작이 있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출처: 두산백과)
1863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노예해방선언 발효,
1863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노예해방선언[奴隸解放宣言,Emancipation Proclamation] 발효,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노예해방에 관하여 대통령 A.링컨이 발표한 선언으로 남북전쟁 중 링컨은 1862년 9월의 안티텀 전투에서 전황이 북부에 유리해지자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여러 주가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선언이 정식으로 포고되었다. 내용은, ①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②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충실히 일할 것, ③ 흑인에게 연방 군대에 참가할 기회를 줄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선언은 남북전쟁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가지는데, 남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남부 여러 주의 연방 조기복귀(早期復歸)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노예해방은 전쟁 뒤 합중국 수정(修正)헌법 제13∼15조의 성립으로 폐지가 확정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노예해방] -1863년 1월1일.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이 효력을 발동한 이날 400만여명의 미국 흑인들은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노예해방의 공로는 링컨에게 돌아갔다. 과연 그는 노예해방론자였을까. 1858년 9월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 유세장. 링컨은 ‘백인과 흑인의 평등을 찬성한 적이 없다. 흑인의 선거권이나 배심권 부여, 공직 진출, 백인과의 결혼에 찬성하지 않는다’고연설했다. 관심은 오직 미합중국의 단합에 있었다. ‘노예제도를 존속해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노예를 해방해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또는 일부를 해방시키고일부를 노예로 남겨 연방의 분단을 막을 수 있다면 그럴 것이다.’ 트리뷴지 편집장에게 보낸 링컨의 편지다. 오히려 남부가 노예해방을 추진한 적도 있다.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동맹 대통령은영국과 프랑스에게 ‘남부의 독립을 공인해주면 자발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제안했었다. 로버트 리 장군은 흑인을 해방시켜 30만명을 징병하려고 시도했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은 고도의 정치촵경제적 전략이었다. 노예주를 연방에 복귀시켜 남부의 사기를 꺾고 북군의 도덕적 우월성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남부경제의 근원인흑인노예의 노동력을 와해시키자는 전략도 배경이다. 노예해방은 북부와 남부의 헤게모니 다툼의 부산물이지만 링컨은 노예해방자, 정직한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역사는 승자를 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일까. 오늘날 흑인의 인권과 자유는 150여년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비록 정략에서 결정되고 아직 차별이 남아 있지만 노예해방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한위대한 발걸음이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역사는 진전한다. (서울경제신문[오늘의 경제소사] 2004-12-31 /권홍우 경제부차장)
1879 영국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Forster,Edward Morgan,1879.1.1-1970.6.7]출생,
*런던 출생. 케임브리지대학교 재학 중 학내의 자유주의 그룹에 참가하였다. 빅토리아왕조의 도덕이나 가치관에 반발, 그리스 문명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모임은 나중에 '부룸즈버리 그룹'으로 발전하여 당시의 지도적 문화 서클이 되었다. 졸업 후 이탈리아로 가서 《천사가 두려워하는 곳에 Where Angels Fear to Tread》(1905), 《가장 길었던 여로(旅路) The Longest Journey》(1907),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1908)을 썼다. 1910년 그의 가장 원숙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하워즈 엔드 Howards End》를 썼고, 또 1924년에 발표한 대작(大作) 《인도로 가는 길 A Passage to India》에서는 동서문명의 대립과 인간이해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그 밖에도 환상적인 작풍의 단편집, 여행기·전기·수필, 독창적인 소설론 《소설의 제상(諸相) Aspects of the Novel》(1927) 등의 논평 및 기타의 저작이 있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출처: 두산백과)
1863 쿠베르탱/Pierre, baron de Coubertin출생
1863. 1. 1 파리~1937. 9. 2 제네바.
1894년 근대 올림픽 대회를 창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프랑스의 교육자.
올림픽 대회는 중단된 지 약 1,500년 만에 그의 공로로 부활되었다.
쿠베르탱의 집안은 대대로 군인집안이었으나 그는 가문의 전통을 깨고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육방법 모색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그리스를 방문하여 마침 고대 올림픽 경기 발상지의 발굴현장을 보게 되었다. 1892년 그의 도움으로 조직된 프랑스의 체육단체인 운동경기연맹이 모임을 가진 자리에서 처음으로 근대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2년 후 파리에서 열린 국제체육회담에서 만장일치로 1896년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쿠베르탱은 1896~1925년에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신체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프랑스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체육에 관해 많은 저서를 썼다.
1814 홍수전/洪秀全출생
(병)Hong Xiuquan (웨)Hung Hsiuch'uan.
1814. 1. 1 중국 광둥 성[廣東省] 화 현[花縣]~1864. 6. 1 난징[南京].
중국의 종교적 예언자, 태평천국운동(1850~64)의 지도자.
1853년 난징에 입성하여 태평(太平)이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자신을 천왕(天王)이라 칭했다. 2,000만 명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대규모 농민봉기는 현대 중국사의 흐름을 크게 뒤바꾸어놓았다.
1804 - 아이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줌인]“질곡의 역사로 얼룩진 ‘아이티 비극’
ㆍ최초 흑인신생국가가 제국주의 경쟁으로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
지난 1월 12일 카리브해 연안의 소국가 아이티에 리히터규모 7.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이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에 가까워 사망자만 10만명을 넘어서는 대참사를 불렀지만 참으로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엄청난 사태를 수습하는데 정작 아이티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패국가’의 극단적인 전형이 다. 더 가관인 것은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 구호활동을 벌여야 함에도 미국과 프랑스가 꼴사납게 신경전을 벌여 가며 주도권 싸움을 불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이티 대참사의 비극을 통해 구미세계가 빚어낸 근대세계의 명암, 아니 차라리 섬광처럼 보이다 사라지기에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추악한 현실의 단면을 한없는 절망으로 대면하게 된다.
위대한 과거를 가진 영웅국가
아이티가 어떤 나라인지 이제쯤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티 하면 ‘진흙 과자’를 먹는 중남미 최빈국에 관한 보도로 아는 이가 있었을 뿐 ‘정보통신기술’을 뜻하는 IT를 연상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아이티는 참으로 위대한 과거가 있는 영웅국가이며, 근대성의 모든 요소를 실험하고 변용하고 그 희생자가 되어 스스로 형극의 길을 걸은 ‘작은 거인’이다.
아이티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프랑스혁명과 거의 동시기에 발생한 아이티혁명(1791~1803)과 최초의 흑인 신생국가 아이티의 탄생(1804년 1월 1일)이다. 이전은 콜럼버스의 상륙으로부터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3세기에 걸친 식민 시기이고, 이후는 구미 열강의 배제와 차별 속에서 꿋꿋이 버티다가 결국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한 독립 시기다.
식민 시기에 아이티가 겪은 역사적 행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발견을 영유권의 근거로 삼는 유럽식 근대 질서의 논리에 따라 아이티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일부로 에스파냐령이 됐다가 1697년에 이 섬 서쪽의 3분의 1(우리의 경상도만한 크기)이 프랑스령이 되어 ‘생도맹그’라는 이름을 가졌고,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두 번째 이런 과정에서 적어도 300만명이 되는 원주민은 사실상 전멸했고,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으로 아프리카로부터 수입된 흑인 노예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세 번째 18세기 후반에 들어 생도맹그는 유럽 식민지 가운데 가장 번영해 혁명 직전 프랑스 대외교역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유럽에 설탕·커피·원면의 소비량 절반을 공급했다. 네 번째 대서양 노예제의 본질은 극단적인 노동 착취와 이로 말미암은 인신 파괴다.
생도맹그의 경우 노예의 평균 수명이 20세를 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노예들의 지속적인 수입이 불가피했다. 프랑스혁명 직전에 생도맹그에는 백인이 3만800명, 자유유색인이 2만4800명인 반면에 흑인 노예는 90%에 육박하는 50만명 정도였다. 이 가운데 아프리카 태생은 60~70%에 달했다. 다섯 번째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들 아프리카 태생 노예 대부분은 전사 출신이고, 독자적인 문화와 전투능력을 지녔다. 이들의 고유한 정치문화가 계몽사상과 결합해 크리올어(피진어)를 매개로 하는 ‘노예 계몽사상’과 ‘흑인 공공영역’이 형성됐고, 이것이 혁명의 바탕이 됐다.
노예들은 무감각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프랑스혁명과의 동시성을 들어 흔히 아이티혁명을 그 아류로 간주한다. 그러나 아이티혁명은 그에 못지않은 위대한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의 위대성을 운위할 때 미국혁명과는 달리 노예 해방과 노예제 폐지를 이룩했음을 지적하지만 사실 생도맹그에서 노예 반란이 없었다면 국민공회는 대농장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1794년 2월 4일에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현지에 파견된 혁명 당국의 판무관이 영국과 에스파냐의 침공에 맞서 생도맹그를 지키기 위해 군 복무를 대가로 반란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것이고, 혁명의회는 이를 추인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예 흑인들은 독자적인 전투능력을 지녔다. 이들은 영국이나 에스파냐 같은 열강들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인 나폴레옹의 정예군도 물리쳤다. 아프리카의 게릴라전술과 유럽의 기병·보병 연합전술을 함께 구사한 혁명의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는 당대 최고의 군사전략가였다.
프랑스혁명 못지 않은 아이티혁명
생도맹그의 노예 흑인들이 정치적 독립을 이룩해 냈을 때 이들이 택한 국호는 소멸한 원주민들이 사용한 원지명인 ‘아이티’(‘산악이 많은 지방’이란 뜻)였다. 이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같은 하층에 처해 있던 원주민들과 공감대를 이루었음을 말해 준다. 1810~1920년대 라틴 아메리카 혁명의 주역인 시몬 볼리바르가 두 번씩이나 아이티로 피신하고,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 알렉상드르 페티옹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를 지원했음은 혁명의 수출이라는 이데올로기 차원과 함께 중남미 특유의 국제적 유대감이 이미 형성돼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신생 아이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내문제는 내전과 혁명의 와중에서 폐허가 된 경제를 어떻게 재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크게 두 노선이 경합했다
하나는 식민지 시기의 대농장체제를 재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토지를 광범위하게 분배해 소농체제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병사 일반이 소농체제를 선호했다면 현지 태생의 물라토나 해방노예들은 집단 강제노동을 전제하는 대농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원했다. 양 세력의 갈등과 대립이 독립 이후에 빚어진 잦은 정변의 근본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아이티의 해방노예들이 신생 경제의 건설을 고민하고, 일정 수준에서 이룩한 것은 당시의 세계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성취였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런 아이티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아이티는 노예들이 최악의 조건에서 엄청난 희생(최소한 5만명)을 치러가면서 당시 대서양 세계의 최강대국들을 물리쳐 세운 최초의 국가다. 이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만이 아니라 모든 기존의 국가에 위협이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노예가 흑인이라는 점이다. 열등한 존재인 흑인(노예)이 자유를 요구해 그것을 쟁취하다니! 이는 백인 유럽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서방의 학계는 노예혁명이 터질 때부터 배제와 차별의 전술을 구사해 왔다. 하나는 그런 사실 자체를 묻는 ‘침묵의 카르텔’이다.
오늘날까지도 구미의 교과서를 비롯해 모든 개설서는 아이티혁명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의 현존을 부정할 수 없는 전문가들은 ‘평범화 전술’을 구사한다. 이들은 그 우렁찬 혁명이 있었음을 외면할 수 없기에 의미를 평가절하해 날카로움을 지워 없애려고 한다. 예컨대 프랑스의 좌파 역사학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프랑스혁명과 ‘백인 계몽사상’의 영향이나 혁명 과정에서 백인들이 행한 역할 및 아이티가 독립 이후에 오히려 더 빈곤해졌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실제로 아이티가 ‘실패국가’의 본보기가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나라는 중남미 최빈국이다. 오늘날 문맹자 비율이 전 국민의 절반을 넘고, 80%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실의 이면과 숨겨진 역사 속에서 아이티의 비극이 철저하게 의도되고 기획된 결과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최초의 위대한 성공한 노예혁명과 흑인 국가는 그 휘광만큼이나 철저하게 망가져야 했다.
20세기 들어 최빈국으로 전락
여기서 우리는 국제 질서의 작동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티는 1804년에 독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백인의 구미 국가들은 누구도 이 신생 흑인 국가를 외교적으로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혁명의 수출을 두려워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이티는 1822년에 같은 섬에 있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산토도밍고(현 도미니카 공화국)를 침입해 노예제를 종식시켰다. 19세기 전반기에는 식민 본국이던 프랑스가 아이티에 대한 각종 압력을 주도했다. 프랑스는 1838년이 되어서야 아이티를 승인했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대농장 소유주들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1억5000만 프랑의 대가를 요구했다. 바꿔 말하면 가난한 신생 국가는 출발부터 막대한 금액의 부채를 짊어져야 했고, 이는 두고두고 아이티에 부담이 됐다.
이어 다른 나라들의 승인이 뒤따랐으나 노예제 국가인 미국은 이런 국제적 행렬에 낄 수 없었다. 미국이 아이티를 승인하게 된 것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에 와서였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아이티는 프랑스의 놀이터에서 열강, 특히 미국과 독일의 각축장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19세기 말에 쿠바로부터 관타나모를 장악하고, 윈드워드 해협의 건너편에 있는 아이티에 개항장을 장악하기 위해 해병대의 상륙을 시도하기도 했다. 프랑스·미국·독일 자본들이 아이티 지배층을 장악해 들어갔으며, 1843~1911년에 대통령이 된 16명 가운데 11명이 민중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아이티는 여전히 건강한 혁명의 활력을 지녔던 것이다.
20세기가 되면서 아이티는 미국의 놀이터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1911~1915년이 결정적인 시기였다. 이 시기에 미국 자본의 승리가 확정된다. 다섯 명의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은 대통령궁에서 폭사하고, 한 명은 독살됐으며, 나머지 세 명은 혁명으로 쫓겨났다.
마지막 대통령인 장 브륑 기욤 삼은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민중의 저항을 제압하고자 미국은 아예 1915년 7월 아이티를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즉각 중앙은행인 ‘아이티 은행’을 장악하고 아이티는 미국의 보호국,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후의 20세기사는 미국의 직·간접의 점령과 개입, 이로 말미암은 만성적인 정정 불안,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장클로드 뒤발리에 부자의 30년에 걸친 무단독재(1957~1986),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끊임없는 민중의 저항과 두 차례에 걸친 민중 신부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의 대통령 당선과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인한 망명으로 점철된다. 현재 대통령인 르네 가르시아 프레발은 2세기가 넘는 아이티의 역사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돼 임기를 제대로 채운 두 번째 대통령이고 민중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현재 많은 아이티인들은 아리스티드의 귀환을 바라고 있다.
과연 아이티는 대지진의 참사로부터 되살아날 것인가. 아이티가 이보다 더 어려운 여건에서도 새 나라를 만들고 끊임없이 민중의 활력을 되살려왔음을 아는 나로서는 아이티의 재생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간성에 대한 신뢰, 이것이 아이티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최갑수<서울대 교수·서양사> /위클리경향 861호 2010 02/02
1801 - 이탈리아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Giuseppe Piazzi), 소행성 세레스(Ceres) 발견
/경향신문
태양계 76년만에 3개 행성 새 식구 맞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9개 행성으로 이뤄진 태양계가 3개의 행성을 새 식구로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태양계 행성의 지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 14일부터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제26차 총회를 열고 있는 국제천문학연맹(IAU)의 집행위원회는 16일 소행성 ‘케레스’ 등 3개를 태양계의 새로운 행성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초안을 마련, 총회에 공식 제안했다.
초안에는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천체인 ‘2003 UB313’(일명 제나)과 명왕성의 위성으로 알려진 ‘카론’, 그리고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 ‘케레스’ 등 3개가 새 행성 후보라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이 초안이 받아들여지면 태양계의 행성수는 9개에서 12개로 늘어난다. 12개 행성 배열은 태양으로부터 거리에 따라 수성-금성-지구-화성-케레스-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명왕성-카론-제나 순이 된다. 이렇게 되면 1930년 명왕성이 추가된 이후 고착돼 온 태양계 행성에 관한 이론은 76년 만에 전면 재손질이 불가피할뿐더러 기존 백과사전과 교과서도 다시 써야 한다.
IAU 총회는 오는 24일 열리며, 초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75개국 2,500여명의 참석자 가운데 3분의 2 이상의 지지가 필요하다.
케레스는 1801년 1월1일 이탈리아 팔레르모 천문대의 피아치가 발견한 지름 913㎞, 공전주기 4.6년인 소행성이다. 명왕성에서 약 2만1천㎞ 바깥에 위치한 카론은 지름이 약 1,200㎞로 명왕성의 절반 크기다. ‘2003 UB313’은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마이클 브라운 교수가 발견한 것으로, 공주가 주인공 투사로 나오는 TV 프로그램의 이름을 따 ‘제나’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태양계 행성 12개’ 이론이 채택되더라도 오래 유지될 것 같지는 않다고 AP통신은 전했다. IAU가 최소한 10여개의 잠재적인 행성 후보 명단을 가지고 있어 새 행성이 추가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기 때문이다.
IAU 집행위는 또 1930년 행성이 된 이후 논란에 휩싸여온 명왕성의 행성 지위 유지도 제안했다. 명왕성은 지구의 위성인 달이나 명왕성 바깥에 있는 제나보다 덩치가 작다는 이유로 태양계 퇴출론이 이는 등 행성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IAU는 이번 총회에서 ▲태양 주위를 도는 직경 800㎞ 이상의 구체(球體)이며 ▲지구의 1만2천분의 1 정도의 부피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행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할 예정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명왕성은 행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명왕성은 스스로 구형을 만들 수 있는 자기 중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달은 지구와의 중심중력이 지구 표면보다 낮기 때문에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IAU 집행위는 이와 함께 해왕성 바깥 궤도에 위치한 작은 천체들의 밀집장소인 ‘카이퍼 벨트’에 속한 명왕성과 카론, 제나 등을 새로운 행성 분류인 ‘명왕성군’(plutons)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조찬제기자> /경향신문 2006-08-16 18:22:40
1785 - 영국 '더 타임스' 창간
`더 타임스(The Times)` 표지. /조선
영국 '더 타임스' 창간
1785년 1월 1일 J.월터 1세가 영국의 대표적 신문인 `더 타임스(The Times)`의 효시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Daily Universal Register)`를 창간했다.
1788년, `더타임스 오어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The Times or Daily Universal Register)`로 이름을 바꿨고 1803년, J.월터 2세가 `더 타임스`로 다시 개제하고 T.번스와 J.딜레인이 주필을 맡아 오늘날의 `더 타임스`로 성장하게 됐다. 한때 부실경영으로 노스클리경에게 경영권이 넘어가기도 했으나 1922년 월터와 J.J애스터 양가에서 경영권을 다시 찾았다. 그 후 1981년 국제적인 신문왕 R.머독에게 경영권이 넘어가 머독그룹 체제하에 운영되고 있다.
현재, 더 타임스는 조간신문으로써 영국의 모든 일간지 중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그 영향력도 막강하다. 더 타임스는 처음으로 투서란을 만들고, 사설을 여론 지도기관으로 만들었으며 기자가 자사의 기사에 서명하지 않는 전통도 남겼다. /조선
1752 로스/Betsy Ross출생
결혼 전 성(姓)은 Griscom.
1752. 1. 1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1836. 1. 30 필라델피아.
최초로 미국 국기를 만든 재봉사.
필라델피아에 살던 소녀시절, 엘리자베스 그리스컴은 바느질솜씨가 뛰어났다. 1773년 존 로스와 결혼하여 그의 실내 장식용품 가게를 함께 경영하다 1776년 남편이 민병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후에도 그 일을 계속했다.
그녀의 손자 윌리엄 캔비가 1870년 신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1776년 6월 조지 워싱턴, 로버트 모리스, 그리고 죽은 남편의 삼촌인 조지 로스가 그녀를 찾아와 다음 달에 독립을 선언할 새 국가의 국기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처음에 그녀에게 주었던 대략적인 바탕그림은 그녀의 의견을 참고해서 워싱턴이 다시 그렸고, 로스는 자기 집 거실에서 국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1748 스위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Bernoulli, Johann, 1667.8.6∼1748.1.1] 사망
*1748년 1월1일 스위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가 81세로 작고했다. 요한 베르누이는 당초 문학을 공부하다가 의학으로 방향을 돌렸고, 다시 수학으로길을 틀었다. 수학자로서 그의 공적은 미적분학을 체계화하고 해석학을 물리학에 응용한 데 있다. 요한 베르누이는 또 바젤대학에서 가르치며, 뒷날‘해석학의 화신(化身)’으로 불리게 될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비롯해 많은후진을 길러냈다. 자연과학의 역사에서 베르누이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그 앞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성(姓)만 얘기하면 어떤 베르누이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베르누이 집안은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베르누이 일가는 16세기 후반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안트베르펜을 떠나 스위스 바젤에 뿌리를 내린 프로테스탄트 집안이다. 이 집안은 오늘의 주인공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3대만 헤아려도 8명의 수학자를 배출했다. 베르누이수(數)로 확률론에 공헌한 요한의 맏형 야콥 베르누이와, 유체(流體)의 속력과 압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베르누이 정리를확립한 요한의 차남 다니엘 베르누이가 특히 알려져 있다. 수학이나 자연과학 쪽에 눈길을 돌리지 않은 베르누이가(家) 사람들도 거의 모두 법률 행정 예술이나 다른 지적 분야에서 뛰어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베르누이 가문은, 두 세기에 걸쳐 50여 명의 음악가를 낳은 독일의바흐 가문이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비롯해 수많은 일급 학자들을 낳은 스위스의 소쉬르 가문과 더불어, 유전과 환경(nature vs. nurture)이 생물체에 행사하는 결정력을 두고 벌어진 고전적 논쟁에서 전자(前者)의 편에 선 우파 이론가들에게 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빼어난 베르누이 개인들도 베르누이 집안이라는 환경이 없었다면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으리라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한국일보 2004.1.1 고종석 논설위원 hk.co.kr )
1574 율곡 이이, 임금에게 <만언봉사> 올림
이것은 율곡이 선조 7년 (1574) 1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어 올린 대표적인 상소문으로 '만언에 이르는 장편의 글로 임금에게 아뢰는 소'라는 뜻이다. 봉사(封事)란 옛날 중국[漢代]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상주할 때 글을 검은 천 주머니 속에 넣어 봉하여 올림으로써, 그 내용이 사전에 밖으로 누설되는 것을 방지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1. 선조임금의 구언(求言)
임금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천(天)30)이란 것은 이(理)와 기(氣)일 따름이다. 이(理)에는 현저한 것과 은미한 것의 구별이 없고, 기(氣)에는 유통(流通)하는 원리가 있는 것이어서, 사람의 일에 올바로 된 것과 그릇된 것이 있으면 재앙과 상서(祥瑞)가 각각 그 종류를 따라 상응(相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장차 흥성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일이 있어서 그것을 알려주고,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되려면 반드시 요사스런 변고가 일어나서 그것을 예고하여 주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하지 않게 되면 하늘의 꾸지람이 있게 되는데 이 꾸지람이 바로 멸망의 징조인 요사스런 변고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체로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화를 내리는 것은 천도(天道)의 원칙인데, 모두가 임금을 인애(仁愛)하고 국가를 안녕케 해 주려는 때문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뜻 또한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하늘의 밝은 명(命)을 받아 임금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라면, 어찌 공경히 부지런하고 두려운 듯이 힘씀으로써 하느님의 인애해주시는 마음에 보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덕이 적고 우매하여 대도(大道)에 어두워, 왕족으로 숨어 살면서 한평생을 그렇게 마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외람되이 선왕(先王)의 유탁(遺託)을 받들게 되고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못이기게 되었다. 본시부터 부귀한 사람의 걱정은 빈천한 사람의 안락함만 못한 것이고, 말세(末世)의 다스리기 어려움은 바다를 건너뛰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자리를 사양하려고 는 하였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불민(不敏)한 자질을 가지고 어렵고 큰 기업(基業)을 지키게 되니, 짊어진 짐도 너무 무겁거니와 하는 일도 모두 어긋나게 되었다. 이에 나는 하늘과 백성에게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여, 조심조심 두려운 듯 마치 깊은 물가에 서거나 엷은 얼음판을 밟고 지나가듯, 걱정하며 애써오기 7년 동안 감히 안락하게 지내려고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한 치의 효과도 나타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괴변만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요사스런 별이 1년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고, 샛별이 대낮에 반짝이기도 하며, 때아닌 우뢰가 일어나고 지진(地震)도 여러 번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덕을 닦기에 힘쓰지 아니한 때문이니,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무너져 내릴 듯한 뜻이 더욱 깊어 멸망의 재액이나 면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하늘은 노여우심으로 더욱 꾸짖으시어 변괴가 드러남이 더욱 심해졌다. 바로 전 달에는 서울에서 흰 무지개〔白虹〕가 해를 꿰뚫어31) 요사스런 기운이 햇빛을 압박하였다. 해란 모든 양기(陽氣)의 조종(祖宗)이며 임금의 표징(表徵)인데 바로 간사한 기운에 침범을 당하였으니, 마음의 놀랍고도 아픔이 용납될 길이 없을 것만 같다.
!...............................................
1484 츠빙글리/Huldrych Zwingli출생
Huldrych는 Ulrich라고도 씀.
1484. 1. 1 스위스 장크트갈렌 토겐부르크 빌트하우스~1531. 10. 11 카펠 근처.
종교 개혁가. ◀ 츠빙글리, Hans Asper가 1531년에 그린 유화(부분)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의 가장 중요한 개혁가로 교회 내에서 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16세기의 유일한 인물이다. 마르틴 루터와 같이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보다 더 엄격하고 포괄적으로 모든 교리와 의식(儀式)에 성서를 적용시켰다.
1618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출생
1618. 1. 1 스페인 세비야~1682. 4. 3 세비야.
17세기 스페인에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바로크 양식의 종교화가. ◀ 무리요가 그린 유화 <두 삼위일체>(1681경)
대상을 이상화하고 때로는 정확하게 묘사하는 양식으로 유명하다. 그의 주요후원자들 중에는 종교 교단, 특히 프란체스코 교단과 세비야 및 안달루시아의 봉사 단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리요의 초기 작품 중에는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 Virgin of the Rosary〉(1642경, 스페인 세비야 주교관 소장)가 있다. 세비야에서 그를 가르친 후안 델 카스티요의 보수적 화풍이 엿보이는 이 초기 작품은 16세기 이탈리아의 마니에리스모*와 플랑드르 유파의 사실주의를 결합하고 있다.
*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양식'이나 '구성형식'을 뜻하는 '마니에라'에서 유래) (프)manierisme.
르네상스 말기인 1520년대부터 바로크 양식이 시작된 1590년경까지 이탈리아에서 성행했던 미술양식.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피렌체와 로마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 북부 지방으로 퍼졌고, 결국에는 유럽 중부와 북부의 모든 지역에 확산되었다.
1115 여진족의 아골타 금 나라 건국
여진족의 아골타가 1115년 1월 1일 나라이름을 대금 이라 칭하며 왕위에 올랐다, 여진족은 아골타가 금 나라를 건국하기 전까지는거란의 요나라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요나라가 해마 다 더많은 연공을 요구하자 참다 못한 아골타가 부족장들을 규합해 요나라와 전쟁을 준비했 다,이사실이 요나라에 알려지자 아골타는 기선제압을 위해 먼저 요나라의 동북 관문인 영강주 (길림성 동쪽)를 함락했다, 이때 여진족의 병력은 겨우 2천5백에 불과했다, 2개월후 1만명도 채 안되는 병력으로 출하점 (흑룡강성 서쪽)에 있던 요의 대군을 격파했다, 이듬해 요의 천조제가 친히 70만의 대군으로 출진했으나 아골타는 겨우 2만의 부대 선두에 서서 이 들을 맞아 싸우며 연전연승했다, 요양부에서 황룡부에 이르는 요동땅이 모두 아골타의 수중에 들어오자 요나라에의해 멸망했던 발해국의 잔당까지도 아골타에게 복속해 아골타의 세 력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이날 금 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요나라를 타고하고 금 나라를 창업하는 대업을 성취했으나 피로가 원인이 되어 1123년 병상에서 56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그의 동생이 뒤를 이었다, 여진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선진 시대에는 숙신 수-당 시대에는 말 갈 이라 불렀고 5대10국 시대부터 여진 이라 불리우다 명나라 말기 에는 후금 을 세운 누루하치가 자신들을 만주족 으로 개칭했다, 만주족은 이후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 화상이 매일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 는 [오늘의 인물과 역사]의 기초자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