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공 연보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1 | 1518 | 중종 | 13 | 정덕13 | 7월 5일 갑진시에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 구택에서 나셨다. | |
2 | 1519 | 중종 | 14 | 정덕14 | ||
3 | 1520 | 중종 | 15 | 정덕15 | ||
4 | 1521 | 중종 | 16 | 정덕16 | 스스로 능히 문자를 읽으셨다. | |
5 | 1522 | 중종 | 17 | 가정1 | 아버지 신고당이 손수 중용과 주문공 잠명발을 써서 항상 무릎 아래 놓고 번거롭게 가르쳐도 글을 외우는데 막힘이 없고 서책 애호함이 어른과 같다. | |
6 | 1523 | 중종 | 18 | 가정2 | 10월 5일 신고당 상을 당하여 큰형님을 따라 산소 여막에 가서 집에 돌아오지 않고 가끔 와서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달래 말하기를 “네가 겨우 어린아이를 면하여 혈기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떻게 상사를 이룰 수 마땅히 고기를 먹어 삶을 온전히 하라”하니 선생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지금은 여섯 살이고 탈상하면 여덟살이 될 것이니 사람이 아버지 상를 입지 아니하면 옳은 일 입니까?”하니 부인이 울면서 기특하게 여기고 강요하지 않았다. 뒷간에 갈 때는 반드시 건을 높은 곳에 걸고 떨어지지 않도록 꼭 묶어놓으니 세수하고 세탁하여 겨울이 되면 손가락이 얼어터져 사람이 간혹 말려도 듣지 않고 3년을 마치니 향리가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
7 | 1524 | 중종 | 19 | 가정3 | 신고당의 상중에 있을 때 신씨가 누님을 만나 말하기를 “네가 글 읽지 않는 것을 원한다하니 무슨 까닭이냐?”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상중에 있으면서 글 읽는 소리가 마치 노래나 시 읊는 소리 같아서 내 마음에 미안해서 입니다.”하니 “큰형님은 읽는데 너는 왜 사양하느냐?” 하였다. 그때 누님의 나이 아홉 살이었는데 향리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칭찬하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이가 없었다. | |
8 | 1525 | 중종 | 20 | 가정4 | 복을 벗었다. | |
9 | 1526 | 중종 | 21 | 가정5 | 종형 양공에게 가서 글을 배웠는데 글 뜻을 모르면 회초리를 가지고 나가 스스로 번거로움을 끌이지 않으니 양공이 더러 노하여 회초리를 쳐도 반드시 깨우친 뒤에 물러나니 이로부터 문리가 날로 나고 한편으로 잡서를 보아 여승지람 대평광기 등 여러가지 책을 섭렵하였다. | |
10 | 1527 | 중종 | 22 | 가정6 | ||
11 | 1528 | 중종 | 23 | 가정7 | ||
12 | 1529 | 중종 | 24 | 가정8 | ||
13 | 1530 | 중종 | 25 | 가정9 | 소속 문사가 체격의 가장 요긴한 곳을 칼로 깍듯이 알아 해득하므로 다시는 어른 앞에 회초리를 가지고 가는 일 없이 스스로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 |
14 | 1531 | 중종 | 26 | 가정 | 10 | |
15 | 1532 | 중종 | 27 | 가정 | 11 | 일찍이 대학장구집석을 다 정독하여 다시 복습하니 상당히 의문나는 곳이 있는데 향중에 정희보라는 사람이 있어 학문으로 남중에 나 있으나 만년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후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이 먼저 대학으로 질문하니 정군이 선생의 말에 옳다고 하여 선생이 이때 이미 대의를 성현의 학문에서 보았고 유명한 스승으로서 종학할 수 있는 이가 없음을 짐작하고 드디어 창연(悵然 슬픈 마음)한 뜻을 가지고 중학과문을 그 문에서 종학하고 한문등서를 받았다. |
16 | 1533 | 중종 | 28 | 가정 | 12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17 | 1534 | 중종 | 29 | 가정13 | 별시 초시를 보았는데 현판한 사람이 그 두루마리 글이 아담하고 넉넉하고 창달하여 한자 첨삭한 것을 보고 그 문장 체제를 알지 못하더니 전채고관(고시관)이 그 두루마리를 보고 다 합격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때 모재 김문공이 상시관으로 선생의 부친과 친구간이라 연소자가 등과하면 불행하다하여 뽑지 아니하였다. |
18 | 1535 | 중종 | 30 | 가정14 | |
19 | 1536 | 중종 | 31 | 가정15 | 사제당 안공 처순의 문에 장가드니 안공은 기묘명현이다. 선생이 23세에 과거 보려가는 큰형을 따라 지나가다가 뵈었는데 안공이 한 번 보고 그 원대한 그릇을 알고 지은 글을 찾아 보이고 크게 기이하게 생각하여 사위 삼을 뜻을 가졌는데 안공이 돌아간 뒤 4년 만에 성혼되었다. |
20 | 1537 | 중종 | 32 | 가정16 | 생원시 제9명으로 합격되었다. |
21 | 1538 | 중종 | 33 | 가정17 | 성균관에 여러 선비와 거쳐하며 담소하는 모양이 부드럽고 도도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덕기가 수연하여 유식지인이 다 존경하고 일시 지명인사들이 서로 더불어 벗이되어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조정에서 얼굴도 모르고 벗이 되고자 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뒤텁게 사귀고 사이가 없는 이는 김하서, 노소재, 홍치재 등 너댓 사람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더욱 퍼졌다. |
22 | 1539 | 중종 | 34 | 가정18 | 별거초시에 장원하였으나 강서에 불리하였다. |
23 | 1540 | 중종 | 35 | 가정19 | 아들 사훈을 낳다. |
24 | 1541 | 중종 | 36 | 가정20 | |
25 | 1542 | 중종 | 37 | 가정21 | |
26 | 1543 | 중종 | 38 | 가정22 | |
27 | 1544 | 중종 | 39 | 가정23 | |
28 | 1545 | 인종 | 1 | 가정24 | 아들 사회를 낳다. |
29 | 1546 | 명종 | 1 | 가정25 | 선생이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질병에 걸려 1540년 이후로는 포병객으로 갑진(1544) 을사년(1545)간에는 세상이 변하여 심히 참혹함에 일시 조야의 오랜 친구들이 거의 다 죽어서 선생이 이에 이세상에 뜻이 없어 성현의 서적을 간직하고 정주의 글을 연구하여 보고 구학에서 마치고 과거의 생각은 아득히 잊었는데 마침 신영천이 태인 현감으로 있었다. 모부인이 따님을 따라 그 관아에 있었는데 선생이 가서 뵈었을 때 별시가 정읍에서 배풀게 되었다. 정읍과 태인은 거리가 얼마 않되어 영천이 위로 부인에게 고하고 아래로 선생에게 주야로 힘써 권하여 말하기를 “자내가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가빈친로함이 진실로 상심되고 불쌍하여 40이 못되어 과거를 폐하는 것은 옳지 못한것 같다. 정읍이 지극히 가까우니 비록 병들었어도 지탱할만하면 출입하여 스스로 편안할려고 하지말고 어버이를 기쁘게 하도록 하시오”하고 부인이 힘써 권하니 선생이 힘써 시험에 나가 제2인으로 급제하고 서울로 가서 회시에 나가 제2인으로 급제하고 전시는 제8인으로 급제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출세하는 운을 면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죽음의 기한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이미 나가 벼슬할 생각을 단념하였으나 마침내는 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승문원에서 동방을 뽑으니 선생이 탐탐하게 여기지 않으며 몸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하향하니 나타나지 않으면 뽑지 않음이 상례였다. 김모재가 본디 선생의 명성을 잘 알아 의정부에 품신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30 | 1547 | 명종 | 2 | 가정26 | |
31 | 1548 | 명종 | 3 | 가정27 | 통사랑으로 부정자에 올랐다 |
32 | 1549 | 명종 | 4 | 가정28 | 정월에 정자에 오르고 저적겸 봉상시 직장이 되었는데 품계는 계공랑이다. |
33 | 1550 | 명종 | 5 | 가정29 | 아들 사흔을 낳다. 큰형 진사공이 병으로 돌아가시니 선생은 어려서부터 형 섬기기를 아버지와 같이하여 사랑하고 공경함이 다 갖추어졌으며 진퇴봉승의 정성스러움을 오래토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큰형이 조금 자리에서 움직이면 선생은 이미 자리를 떠나서 있었고 조금이라도 지팡이와 소리가 들리면 선생은 이미 마루에서 기다렸다. 큰형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아우로 더불어 항상 유학하는 곳에서 그 강송하는 아름다움을 보고 그 엄하고 공경함은 도리어 내가 따라갈 수 없었다”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애모호곡하기를 초종여일하고 엄하게 장사지내는 것을 신칙하여 갖추고 여력이 없어도 홀어머니 고휼하여 그 궁한 것을 보조하며 흉년에도 항상 공경하여 맛있는 것을 얻으면 가져다 바치고 대부인의 외에 비록 적은 것이라도 반드시 나누어 그 여러 아들을 무율하는데 기출과 차이를 두지 않으니 여러 아들도 또한 아버지 같이 보았다. 6월에 박사가 되고 용양위사정으로 좌천되었다가 바로 본직에 돌아오니 품계가 무공랑이다. 일찌기 두 번 한림에 천거되었으나 다 회피하고 가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7월에 성균관 전적에 오르고 곧 예조좌랑에 천거되니 품계가 승훈랑이다. |
34 | 1551 | 명종 | 6 | 가정30 | 6월에 지례현감으로 나가니 품계가 승의랑이다. |
35 | 1552 | 명종 | 7 | 가정31 | 아들 사악을 낳다. 품계 봉훈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그때 명조께서 안팎에서 벼슬에 임하여 청렴하고 근실한 자를 간택하였는데 선생이 뽑히어 겉옷과 속옷 한 벌을 하사 받았다. |
36 | 1553 | 명종 | 8 | 가정32 | 품계가 봉직랑이다. |
37 | 1554 | 명종 | 9 | 가정33 | 품계가 통선랑이다. |
38 | 1555 | 명종 | 10 | 가정34 | 아들 사전을 낳다. 양정편으로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긴요한데 선생이 판본이 드물어서 공쟁이에게 명하여 만들게해서 스스로 발문을 지어 향리의 자제에게 1000여건을 펴서 보내셨다. |
39 | 1556 | 명종 | 11 | 가정35 | 선생이 봉양을 위하여 외직에 있다가 임기가 만료 되었을 때 정치를 함에 백성이나 관리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고 비록 고을 쇠잔하고 물건이 없으나 봉공하고 장부나 문서를 정기적으로 모아 항상 처리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용도를 절약하여 균등하게 사람에게 혜택을 주며 후한 것을 이루고 좋은 것을 이바지하니 관이 폐단을 알지 못하고 상하가 평안하여 스스로 법령을 어기고 범죄하는 일이 없었다. 부역이나 조세를 병든 백성에게 순리를 따라 빨리 고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병든데 이로운 근원을 통치한 연후에 고쳐주고 감해주어 그 실행함을 영구토록하고 한때 구차하고 간략한 정치를 하지 아니한고로 백성이 처음에는 기뻐하는 빛이 없었으나 오래토록 공의 정화에 혜택을 받아서 곧 그 정치에 복종하고 그 덕을 사랑하였다. 관청의 청사를 수리하는 것과 학당과 재실이 무너지고 훼손된 것을 고치는데 또한 정성으로 고쳐서 새롭게 하였으며 백성과 이속들이 균등하게 힘써 완급에 맞도록하니 너그러움과 엄격한 공이 스스로 이루어졌다. 자신의 의식은 한사와 같이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39 | 1556 | 명종 | 11 | 가정35 | 박하게 하여 비록 사소하게 쓰는 물건도 관아의 집물에 누를 끼치지 아니하여 지극히 적은 것도 일일이 관부에 기록하였으며 처자로 하여금 전단치 못하게 하니 이것이 선생이 벼슬에 있을 때 자치한 대략이다. 비록 큰 주나 부에서도 종시 한결같이 하니 이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을에 있을 때 관직(홍문관, 예문관)으로 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고 곧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에 승진되어 품계가 통덕랑이었다. 선생이 처음 3관(홍문관, 예문관, 성균관)을 버리고 외현에 좌천되어 시종관에 있지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경연에 들어가 입시하는 동렬이 되니 다 경연에서 강하는 의가 소홀해질 걱정해서이다. 시독함에 이르러서는 음성이 맑고 아름다우며 진술함이 명백하고 자상하며 간절하니 영사 「윤개」가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참 훌륭한 강관이라 하였다. 6월에 사헌부 지평 지제교 겸 춘추관 전직에 이배되고 얼마 안되어 수찬에 환배되었으나 사직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소환되어 8월에 부교리에 임명되니 품계는 조봉대부이다. 병으로 외직에 나갈 것을 주청하였는데 공조정량에 체직되었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니 지례에 유애비가 있었다. |
40 | 1557 | 명종 | 12 | 가정36 | 수찬으로 천거되었다가 이조정랑이 되어 부임하여 공직하다가 얼마 안되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군에 있는 것을 바라는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
41 | 1558 | 명종 | 13 | 가정37 | 2월에 품계가 봉정 중훈 중직이었고 3월에 성균과 직강에 제배되었다가 곧 수찬으로 이배되고 또 세자시강원 필선 지제교로 옮기니 품계가 통훈이며 부임하였다가 부교리에 환배되고 교리로 옮겼다가 이내 부응교 지제교 겸 경영시강관 춘추과 편수관에 승진되었다. 일찍이 경연에서 강목을 진강할 때 제기에 왕촉이 조국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현사가 조국을 떠나는 것은 군신의 의를 모르기 때문이라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조국을 떠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조국을 잊는 것이니 조국을 잊지않고서야 감히 어떻게 조국을 떠날수 있으리오 그 정이 가히 슬픕니다. 간하는 말이 받아들여 행하여 지지않아서 떠났다면 왕촉같은 사람은 임금 섬기는 의를 능히 알았다 알것이니 이런고로 제나라가 망함에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가 한사람도 몸을 버려 충성하는 자가 없었으니 왕촉이 홀로 능히 절개를 지켜 나라를 순회하다가 조국을 떠났으니 나라를 저버린것이 아닙니다하니 임금은 묵묵하였고 여러 번 벼슬을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 명종께서 의심하는 마음이 많았기 때문에 왕촉의 일로 물으심이 이와같았는데 선생의 대답하심은 간절하고 납득할만한 말이었다. 이때에 권간이 선생과 연척되는 사람들을 트집잡는데 그세력이 커서 한때 동류들이 그 문에서 머물지 않는이 없었다. 선생은 문을 닫고 괴롭게 살며 사람과 교유하지 않으니 저들이 선생을 만나고자 하는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선생은 끝내 응하지 않으니 선생이 저들을 보는 눈이 이와 같았고 저들이 선생과 사귀려함이 오래도록 변치 아니하였다. 그 당의 선생과 서로 잘 아는 사람이 심야에 문을 두드리고 곧바로 자는 방에 들어와 은연중 선생을 맞이하는 뜻을 이야기했는데 선생이 굳이 사양하고 보내니 그 근엄함이 이와 같았다.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42 | 1559 | 명종 | 14 | 가정38 | 2월에 특별히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고 일로 인하여 사복시 첨정으로 체직되었다가 곧 의정부 검상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에 천배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에 올랐는데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가 외직으로 있으면서 노후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조정에서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 벼슬에 뜻이 전혀 없었으나 이조 멋대로 오래도록 체직하여 주지 아니하였고 선생이 조정에 오래도록 낭료가 비어있어 큰일에 지장이 있다하여 부득이 조정에 들어와 공직하였으며 11월에 사헌부 집의에 옮겨 임명되었다. |
43 | 1560 | 명종 | 15 | 가정39 | 2월에 신시자의 상을 당하니 선생의 슬픔은 골육의 간절함 뿐만 아니라 빨리 대부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또 전한 벼슬로 소환되고 직제학으로 전배되고 양관을 겸하게 되니 부응교이다. 동년 5월에 또 사직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니 특별히 통정대부 형조참의로 임명되었다가 승전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임명되었고 바로 우부승지에 전직되었다. 선생이 병환이 심해 위돗하여 몇달 조리하고 겨우 소생하여 10월에 용양위 부호군으로서 사직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병진년부터 경신년까지 5년간 항상 경연에 있었고 또 사헌부 사간원에 출입하였으나 외부인이 시골에 계심으로 왕래하며 근친한것이 한해 두어번이었다. 이로써 벼슬에 있으면서 고한것이 날마다 서로 반은 되었을것이어서 그간 규잠이나 풍의의 유익함이 후세에 전하여진것이 없지 않을것인데 선생이 자제 문인에게 말을 하지 않아 듣고 아는 사람이 없지 않을것인데 선생이 자제 문인에게 말을 하지않아 듣고 아는 사람이 없어 이제 이 편록에 궐실이 이와 같으니 아아 슬프도다. |
44 | 1561 | 명종 | 16 | 가정40 | 2월에 또 우부승지에 배수되고 이문정시에 장원하여 잘 길든 말을 하사받았다.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병으로 벼슬에 있기 어렵고 어버이 병으로 떨어지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나 은총을 받고 더욱 성실이 직분을 다하였으므로 노모 봉양할 날이 없어 그달이 넘어가기 전에 상소하여 귀양의 간절함을 말하니 명종이 만류한지 몇 일만에 비답을 내리어 말하기를 정리가 박절하니 인근 수령을 제수하여 노모를 봉양하라하며 또 모요를 하사하며 사양치 말라하고 곧 남원부사를 제수하고 처향에 밭과 집을 주었는데 사양하고 담양부로 바꾸었다. |
45 | 1562 | 명종 | 17 | 가정41 | 9월에 일제 이선생과 용천사에서 만났는데 원근 사자가 많이 왔다. |
46 | 1563 | 명종 | 18 | 가정42 | 아들 사첨을 낳다. 규치절목이 한결같이 지례에 있을 때와 같아 평서하는 정치와 청약하는 지조에 사람이 더욱 복종하였다. 이해 9월에 선생이 사직하고 용양위 대호군으로 환배하니 한가히 우유하게 함이다. |
47 | 1564 | 명종 | 19 | 가정43 | 선생이 추담 위에 두어칸의 집을 짓고 신의재라 편액하니 효제의 의를 편다는 뜻이다. 여가에 친구를 부르고 자질을 불러 왕래하면서 자적하며 도리를 담론하여 희연히 욕기의 흥이 있으니 소문을 듣고 멀리서 오는 학자가 많았다. 제물과 곡식을 스스로 내어 제질로 하여금 맡게하여 의장을 만들고 궁한 사람을 도운 나머지로 방리서재에 풀었다한다. 4월에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
48 | 1565 | 명종 | 20 | 가정44 | 선생이 일찍 조선생에게 유학하였을 때 분의가 두터웠더니 선생이 진주 목사가 되니 조선생이 덕천에 거하여 진주에서 가까운 거리임으로 왕래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48 | 1565 | 명종 | 20 | 가정44 | 하면서 의좋게 지낸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만년에 퇴계이선생과의 경례 왕복소서가 많이 보였으므로 가히 상고할만하다.임갈천이 인물을 논평할때마다 선생을 미루니 이는 노소가 동향에서 의좋게 지내고 침밀한 것이니 선생의 평생 온고하며 시종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
49 | 1566 | 명종 | 21 | 가정45 | 아들 사악이 요사하였다. 선생이 벼슬자리에서 부지런하여 힘쓰는 일과 한가한 일은 반드시 그일을 다스리고 그날일을 마친 연후에나 마음이 편안하였다. 고을이 남방의 매우 바쁜곳이어서 문서 수작하는 일을 하루도 궐할 수 없어 노고가 쌓여 병이 되었으므로 드디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니 관에서 물건을 보냈는데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더러 명절이나 생일에 의복 같은 것을 보냈으나 또한 사양하고 그 뒤에 다시 그러한 일이 있었으나 여전히 거절하였다. 선생이 상하지간에 매양 틈이 날까 미안하여 받아서 이속에게 주고 친족을 찾아서 다주니 고을을 떠나는 날에 또 표요(담비가죽으로 만든 요)를 가지고 와 간절하게 주니 선생이 굳게 거절하고 받지 않아 계속하여 물고기 반찬과 곡포 여러 짐을 집에 실어다 주니 고기 반찬은 받고 포곡은 사양하여 사물을 바르게 판가름하니 권간의 자질이 선생의 청백함을 두려워하여 능히 탐종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근거없는 훼방으로 선생을 흔들었으나 선생은 못들은척하고 대하기를 간격없이 하였다. |
50 | 1567 | 명종 | 22 | 융경1 | 아들 사심을 낳다. 선생이 거처하는 집에 당을 짓고 양휴라 편액하고 또 작은 집을 그 옆에 지어 칙암이라하여 자호로 삼고 거기에 경서를 많이 비치하여 사친접빈의 여가에 수정하고 수성하는 곳으로 삼았다. 2월에 이조참의로 임명되었다가 얼마후 청홍도(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되어 나갔고 6월에 명종이 승하함에 슬퍼하던 중에 병이 낫고 졸곡을 지나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또 전주부윤을 제수하였다. |
51 | 1568 | 선조 | 1 | 융경2 | 정부인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선생이 홀로 모부인을 모시는데 봉선하는 즐거움이 전일 같이 아니하고 또 국상을 만나 일이 많이 막히고 곤경에 빠졌으나 항상 지조를 잃지 아니하고 일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 청신한 덕과 관유한 풍습은 구속을 취하여 움직였다. |
52 | 1569 | 선조 | 2 | 융경3 | 선생이 가장 존신하고 애완하는 것은 논어, 대학, 근사록, 심경뿐이었다. 항상 갑에 넣어두고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비록 관에서 종일 응수하는데 골몰하였어도 밤에 들어와 쉴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안ㅈ아 읽으며 실마리를 푸는 것으로 일과를 삼아 그 위기하고 근독하는 공부가 탁월하여 다른 사람의 미칠바가 아니었다. 항상 말하기를 “학문은 많이 말하는데 있지 않고 대학편 열여섯 말이면 족하다.”하였다. 이러므로 반평생 공력이 오로지 대학에 있었다. 대저 그 학문은 기록하고 보고 탐구하고 토론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지극히 간락한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한 번 자취를 감추면 그 높은 식견과 원대한 지식을 나타내지 아니하므로 세상이 모두 선생의 덕량이었음을 알고 이같이 치밀한 것은 알지 못한다. |
53 | 1570 | 선조 | 3 | 융경4 | 벼슬이 만기되어 집으로 돌아갈때 용양위대호군이 되었고 11월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교지를 내려 부르니 부임하여 공직한지 겨우 한 달이 지나자 곧 상소를 하여 전에 귀양하는 이유로 지금은 더욱 벼슬에 있기 어려운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53 | 1570 | 선조 | 3 | 융경4 | 뜻을 애절하게 표하니 임금이 하교하여 말하기를 “옥당장관(홍문관의 우두머리)은 경솔하게 바꿀 수 없다고 말을 주어 타고가 근친하고 오라”하니 선생이 여러번 들어서 미안하므로 묵묵히 내려와 글을 올려 노모의 병상을 아뢰어 윤허받기를 기대하였는데 임금이 또 유시를 내려 이르기를 “네가 노모의 병으로 본직을 해임 받는 것을 바라는 심정은 잘 알겠으나, 옥당장관은 경솔히 체임할 수 없어 이제 이미 근성을 하였으니, 말을 타고 올라와서 내가 전일 명한대로 따르라”하니 선생이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또 글을 올려 애가 탈정도로 걱정스러운 정상에 바르게 경계하는 말을 부치니 대개 이때 임금의 시초가 옛 흥치하는 뜻을 사모함이 점점 쇠약해가고 비근한데 억매이고 원대하고 구원한 것을 도모하지 그 사사로히 주장함이 크게 걱정되는 기미가 있으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통절하게 하니 또 유시를 내려 말하기를 글 올린바를 살피니 사직서를 아룀이 두 번에 이르렀으니 내가 감히 강요할 수 없다하고 본직을 체직하고 그 도에 명령하여 노모가 있는 곳에 식물을 주니 그리 알라하니 곧 글을 올려 사양하니 임금이 또 회유하여 말하기를 나는 충효는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오늘 노모에게 귀향하게 함이 다른날 임금을 섬기는 근본이 되므로 그뜻을 따라 허락하고 본도로 하여금 적은 물건을 내렸는데 어찌 글을 올려 사양하느냐 하였다. |
54 | 1571 | 선조 | 4 | 융경5 | 6월 곤양군수에 제수되니 이때 대부인의 나이가 많아 집에서 봉양하다가 돌아가시는 것을 생각하여 조정에서 그 가까운 고을을 골라 도왔으니 사양하기도 어려워 곧 부임하였다. |
55 | 1572 | 선조 | 5 | 융경6 | 5월에 사간원 대사간을 제수하였고 얼마 안되어 이조참의에 제수되어 월여만에 사직서를 올리고 하향하니 11월에 또 승정원 좌승지로 불렀는데 글을 올려 전과 같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아니하니 12월에 임금이 어필로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를 임명하니 선생이 감격하여 부임하였다. |
56 | 1573 | 선조 | 6 | 만력1 | 7월에 해변지방을 순찰하고 집으로 돌아와 근친했는데 비병과 설사에 걸려 조리하고 다시 순찰하여 피로가 싸이고 증세가 심하여 드디어 사직서를 올렸다. 선생이 문서를 닦음이 흐르는것 같았고 조리를 문란하지 않게 척결하고 소송하는 일에도 특별히 신찰하여 속결하지 아니한고로 고을살이 하던 날 사람이 이것으로서 병을 삼았으나 선생은 근심하지 않았다. 김공 계휘가 대신 본도 관찰사로 와서 선생의 송사처리한 것을 살피고 평일 덕행문학의 선비로서 이무에 겸하여 통달하지 아니한 자이면 어떻게 처리할 수 있으리오 하니 김은 문리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후 도성에 들어가 또 친구들에게 칭선하기를 마치 아니하였다하니 이는 비록 여사이지만 지자는 그것을 아는 것이 이와 같거든 하물며 덕의 아름다움이 몸에 쌓인자야 두말할 것이 있겠는가?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춘추관사에 체직되고 10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어 계우 한 달만에 또 귀양하는 글을 올렸는데 윤허가 내리지 않으니 피눈물로 세번 아뢰어 윤허를 받고 말을 하사하는 명을 받음에 대사헌을 그만 두고 말을 타는 것이 미안하여 글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용양위 부호군으로서 고향에 내려갈 때 추위를 무릅쓰고 들어간지 몇달만에 경급한 병에 걸렸다가 겨우소생하여 조치한지 여러달이 되었으나 원기는 그전같지 않고 그후 모든 증세가 여기에서 원인되었다.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57 | 1574 | 선조 | 7 | 만력2 | 동지달에 아우 사암공의 상을 당하고 아들 사전이 사망하였다. 그 대부인을 하루같이 하였다. 나이가 높고 벼슬이 나타났으나 옆에서 모시고 기뻐함이 어린 아이와 같았다. 젊어서 유학할 때도 조금이라도 멀리가지 않고 장성하여 벼슬에 있을때도 일찍이 때를 지나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평생에 한번 성균관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리는 기대를 어기지 아니하였다. 대부인이 이미 80이 넘었고 선생도 60이 거의 가까운데도 밤마다 맨발로 나와 귀를 창벽에 붙이고 대부인의 숨쉬는 것이 평상시와 같은 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서 취침 하였다. 선생이 항상 화림현 옥산동 본군 임천의 장항동을 사랑하여 만년 퇴거하여 살 곳으로 삼았다. 이해 봄에 조남명을 장항동에서 만나 집 지을 땅으로 의논하여 정하고 또 임갈천을 옥산에서 만나 땅을 점쳐 터를 닦고 또 문하사 변사정을 보내어 먼저 운봉도탄위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후 집에 우환이 연달고 또 대고를 만나 나가지 못하였다. 3월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부임하지 않고 조금 있다가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또 상소하여 부임치 않았다. 6월에 이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에 또 예문명이 전후로 몰라 드디어 글을 올려 전과 같이 간절하게 사양하고 겸대관곽 중임을 면해 줄 것을 아울러 비니 임금이 특히 윤허하였다. |
58 | 1575 | 선조 | 8 | 만력3 | 6월에 특별히 자헌대부 예조판서로 초배하니 곧 상소 수백언으로 공없는 사람에게 벼슬을 남용하면 배명하는 뜻에 불가하며 어머니 곁을 차마 떠날 수 없다는 것과 끝에 경계하는 말 수십조를 붙여 올렸는데 그 글이 도착하기도 전에 또 이조판서에 이배하니 또 글을 올려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대부인의 병환이 위독하여 선생이 띠를 풀지 않고 병간한지 10여일 임종의 염빈하는 과정에서 불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이미 장사 지내고 실당에 반혼하고도 묘하의 여막에 거하며 하루를 걸러 궤연에 왕래하였으며 바람이나 비가 크게 불어와도 묘소에 올라가는 일을 폐하지 않고 또한 이틀 간격으로 조석에 망배하며 추운때나 더운 때나 상복을 벋는 일이 없었으며 선산에 비를 만들고 상하 계체를 표하는데 또한 갈고 닦는 공을 돕고 역사를 감독하는 즈음에 비록 자제가 있으나 반드시 몸소 날마다 두번, 세번, 네번 보았다. 대개 선생이 본디 비의 병증세가 있어 평생의 걱정으로 몸이 약해진지 여러해였는데 정력이 능히 이에 미침은 선생의 평생 기대한바 아니므로 사람이 또한 기이하게 여겼다. |
59 | 1576 | 선조 | 9 | 만력4 | 주곡 여소에서 기거하였다. |
60 | 1577 | 선조 | 10 | 만력5 | |
61 | 1578 | 선조 | 11 | 만력6 | 정월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처음으로 벼슬에 오르라는 명을 받아드리지 못하였으며 3년 동안에 이미 양대에 걸쳐 은혜가 내린 것으로 미루어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였고 지금은 탈상하였은 즉 도성에 들어가 사은숙배하고 수년동안 힘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은 연후에 집에 돌아와서 사는 계획도 또한 간절하였다. 또 의로 분림하는 일은 느출 수 없어 곧 출발하려고 하는 저녁에 병환이 심하여 사직서를 올리니 지중추부사가 되고 또 공조판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5월에 대사헌에 임명되니 늘 상소하는 것이 미안하여 간신히 부임하였으나 일로 인하여 곧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61 | 1578 | 선조 | 11 | 만력6 | 7월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출사한지 20일만에 사임하고 곧 이조판서에 임명된지 며칠만에 심열이 극심하고 지병으로 괴로워하니 정원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이조판서 노진은 본래 중망이 있어 사림의 우두머리로 모친상사때 집례하는데 피로가 쌓인 나머지 병세가 심중해졌다고하니 임금이 놀래서 의원을 보내 문병케하고 약을 보내 치료하게 하니 선생이 손쉽게 일어나 앉아 경건하게 절하고 약을 받아보고 돌아와 병석에 누운지 한달 동안에 말은 가정의 사사일에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선산에 명을 다하지 못하고 타향에서 갑자기 죽은 것은 진실로 평일의 뜻에 어긋난다하고 또 말하기를 상을 마치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병은 실로 상으로 인하여 상하게 된 것이니 이는 초상 때에 죽은 것과 같은 것으로 다만 마음에 번거로울 뿐이고 나머지 슬품은 없다하니 이것이 선생의 초상의 애통한 뉘우침이다. 8월 23일 임인시에 성서우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이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조회를 2일간 폐하고 신 예조좌랑 강신을 보내어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병에 걸려 고생한 나머지 집에는 물건 하나 없었고 부조한 물건으로 염빈하였다. 조정의 친구들이 후한 부조를 하고 사림에서 서로 만나 사람들이 오래토록 슬퍼하였으며 심부름꾼까지도 또한 슬퍼할 줄 알았고 상여가 지나갈 때 향린의 사류도 노소없이 경상에 모여 상여를 맞아 슬퍼하는 자가 거반이였고 오지못하는 자는 신위를 만들어 곡하였다. 장사지내는 데도 또한 각각 학사 방촌으로 모여 제사를 지내고 곡하니 선생이 이와 같은 것을 사람에게 얻은것이 어찌 세리로서 이끌은 것이겠는가? 주곡산 자좌오향의 언덕에 예폄하니 신고공의 묘하강이요. 부인 안씨가 동영이실이니 이해 11월 7일 갑인이다. 이해 봄에 주곡 선롱 두산의 나무가지가 얼어서 고드름이 달린 것 같으니 식자는 수목이 곡식이라 하였다. 서울에서 영구를 운구할 때 겨울달에 무지개가 보이지 않았는데 남원에서 고향으로 올때 수일간 더러는 비가오고 더러는 개었는데 연도에 무지개가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하니 이것이 실로 이상한 일이며 옛날 현인 군자가 돌아감에 많이 풍수와 별 무지개의 이적이 있었다하니 거짓말이 아니다. 고향의 사자와 선생 문하생 조대소헌, 종도, 변도탄, 사정 정역양, 유명, 성석곡, 팽년 등 모든 사람이 선생을 위하여 사당에 배향하는 의논을 임갈천에게 품정하였다. |
1579 | 선조 | 12 | 만력7 | 선생을 남계에 배향하자는 의논이 비로서 임갈천에게서 나와 사자가 백방에게 고유한즉 백방은 본디 선생을 심히 경모하는 자이었으므로 별묘로 하여야 마땅하니 하필 배향하느냐하며 비용을 내고 정성을 다하여 이고을의 사류가 각각 재물을 모아 추담 위에 사당을 세워 신의재로 정당을 삼았으니 대개 선생이 평생 거처하시던 곳으로 그 풍속을 사모하는 뜻에서다. 호남 사자가 백방에게 고하여 서원을 남원의 요천위에 세우기를 원하니 선생이 항상 거닐던 땅으로 숨어서 닦고 흥감하던 곳이다. 고룡서원이라 일컫고 부사 이경이 서원을 짓는 날 많이 도와주었다. 아들 사훈이 상처를 입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 |
1580 | 선조 | 13 | 만력8 |
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
1581 | 선조 | 14 | 만력9 | 가을에 위판을 봉안하여 신계서원이라 회칭하였다. 이때 노군 사예 형제가 상중에 글을 향교에 올려 말하기를 ‘표종형 강참봉 익은 우리 숙부 옥계선생과 서로 닮은 사람이니 이 사람의 행함은 숙부와 짝할만하다’하니 향의가 이를 쫓아 갈천 임선생에게 품신하여 위차를 정하여 본원에 배향하였다. 조정에서 효자를 정표한 것으로 마음에 걸렸는데 예조판서 이우직이 아뢰기를 ‘돌아가신 이조판서 노진은 사친을 시종 성효로 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고 지금 조정 상하가 다 추모하니 특별히 정표를 내려 말속을 바로 잡음이 어떠합니까’하니 임금이 즉시 정려를 명하였다. | |
1629 | 인조 | 9 | 숭정2 | 3월 임금이 이조정량 김육을 보내어 시호를 문효라 내렸다. 부지런히 배우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자혜롭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라 한다. | |
1660 | 현종 | 1 | 숭정33 | 임금이 예조좌량 도신을 보내어 서원에 치제하고 사액하여 당주라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