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인적 자원부주최 교단체험수기 공모: 영예의 대상
작은 나눔 큰사랑/ 박영숙 : 대구 일중학교 교사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 1980년대 초반 대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 해의 2학기 마지막 날(2,28. 토) 오전 11시경 학교 서무실에서 다급한 전화 연락이 왔다. 우리 반
1번 이은숙 학생이 3,4기분 공납금을 미납한 상태로 연락이 끊겨서 "12시까지 해결하지 못하하면 제적
시킬 수밖에 없다" 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 전화였다. 그 학생의 2학년 담임을 끝내고 3학년 진급
을 앞둔 봄방학 때였다. 나는 해결책이 있는지 반문하였고, 서무직원은 미안한 목소리로 방법이 있긴
하지만… 어렵게 말을 꺼냈다. “ 마침 한 서무직원이 은행에 가 있으므로 "선생님께서 다음 봉급에
제하시면 ..."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다음날 아침
학생집 주소를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어렵게 찾아간 골목 안 집 대문으로 들어셨다. 마침 은숙이가 자기 몸집보다 3배나 더 큰 쓰레기통을
들고 차에 버리기 위해 나오는 참이었다. 나를 본 순간 놀라며 반가움에 “선생님!” 하고 뛰어왔다.
쓰레기통이 큰 이유는, 부모가 단칸 셋방에 살므로 주인집 할머니 방에 잠자는 대신 집안 전체 청소와
쓰레기통 비우기를 도맡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월에는 아프다며 거의 결석을 했기에 이유도 확실
하게 알아볼 겸 부모님을 찾았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자리를 피하고, 큰방 할머니를 통해 엄마로 부터
온갖 구박 속에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딱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애의 아버지를 만나 다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자가용 운전기사였으나 얼마
전 교통사고를 내서 직장도 잃고, 다친 후 치료 및 합의금 지급 등의 문제로 너무나 상황이 어려워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벌이가 없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은숙이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돈 벌러
깊은 산속에 송이버섯이나 캐러 가자고 엄마가 설득시키는 중인 것 같았다. 우리 반 1번인 이 학생은
조그만 체구에 착하고 얌전하고 말이 없는 학생이었는데… , 이렇게 딱한 형편인 줄 몰랐다는 사실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주인집 할머니는 은숙이에게 부모처럼 잘 해 주라셨다. 나는 그순간 누군가에
게 명령이라도 받은듯 불쑥 그녀의 아버지에게 "은숙이를 저의 집에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은숙이 때
문에 불화가 잦아서 부부싸움을 밥 먹듯이 한다는 할머니 얘기가 떠올랐다. 나를 따라 나오며 좋아
하던 은숙이는 우리 집에서 3학년을 마치고 졸업하였고, 제일여상에 입학하여 3년간 학업을 마친후
세무사 사무실 취업과 동시에 야간부 계명대 의상학과에 진학하면서 우리 집에서 독립해 나갔다.
우리 집에 처음 데려 왔을 때 나의 삼남매는 11살, 8살, 6살로, 은숙에게 '언니야”하며 좋아했다.
남편은 그냥 덤덤하게 "사전에 한 마디 말이라도 했었어야지, 그래! 어쨌든 잘 했다”는 정도였고,
나는 너무 즉흥적으로 행동했던 나 자신의 태도에 미안해하며 "나는 물론 당신이 무조건 좋다고
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고 얼버무리고 그냥 넘어갔다. 아마도 한마디 의논도 없이 행
한 날벼락 같은 내 황당한 행동에 기가 막혔으리라.
그러던 며칠 후 하루는 아이 아빠가 화난 얼굴로 "아~이구, 게을러 빠진 모습 차마 못 봐 주겠더라.
자기가 쓰는 방을 닦는데 무심코 들여다보니 한 손은 배를 움켜쥐고 한 쪽은 엎드려 뻗쳤다가 한참
후 슬며시 떼고 또 한쪽 손으로 엎드린 채 한참 있다가 슬그머니 떼고 정말 하기 싫어 죽는 듯한 모
습이라니….” 하는 것이었다. 내 눈에는 그런 모습 안 보였기에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밤 그 애 방에서 솔직히 말해달라고 사정했다. 한참 후 울먹이면서 " 너무나 괴롭고 정말
죽고만 싶은 나머지, 우리 집에 오기 며칠 전 하이타이 가루세제를 물에 타서 마셨다"고. 토하고
마시고 토하고 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녀를 붙들고 한 참을 같이 울었다. 어린 마음에 아프
다고 하면 혹 돌려보낼까?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오자마자 아프다고 하면 병원비는 물론이고
걱정까지 하게 되니 미안함 때문에 절대로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지내려했던
것이리라.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남편도 그 일 이후로는 은숙이를 애틋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사대부고 여교사 2명과 사대부중 여교사 4명 등 6명이 부속중고등 전체 여교사였고,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이 이야기를 학교에 가서 했다. 마침 사대부고 여선생님 중 남편인 소아
과 의사께서 다 나을 때까지 장기간 정성이 넘치는 치료를 해 주셨는데 그 장소는 북비산 로터리에
위치한 “조 소아과”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위속이 헐어서 밥을 못 먹은 사정을 알고 난 후, 나는
영양실조로 바짝 마르고, 키도 자라지 못한듯 한 그녀가 애처로워 이를 막으려고, 소고기를 갈아서
쑨 죽, 야채죽등 여러 흰죽을 번갈아 쑤어 보온병에 담아 학교 양호실에서 먹이며 치료를 계속했다.
착한 은숙이도 학교를 마치면 집에 돌아와 동생들 돌보며 집안일도 도우려고 애쓰고 우리 가족은 아
주 화목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부터인가 반상회에 참석하면 수군거리다가 나를
보고는 멈칫 하는것 같았다. 나는 별의심 없이 돌아오곤 했었는데, 하루는 큰아들 친구 엄마가 할말
있다며 부르더니 대뜸 그 집 여학생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그는 듣고 난 후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부부교사인 우리는 꼬마 6살짜리 때문에 아빠가 제일여상 야간부를 지원
해서 오후 4시에 출근하는데다 집도 학교와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오전 10시 쓰레기차가 오면 당연
히 아빠의 몫이 되었고 우리 꼬마와도 손잡고 놀이터에서 놀아 주니 실업자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우리 꼬마는 물론 애들 모두가 언니야 ! 언니야! 하며 잘 따르니 이를 보고 “백수인 주제에
어디서 딸까지 낳아 데려다 키운다” “거기다가 학교까지 보낸다”"선생님만 불쌍하다”고들 했다
는 것이다. 그 이후 우리 남편은 뜻하지않게 아파트 관리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 받았고, 꼼꼼
하게 살림 잘하는 존경받는 위원장으로 장기간 붙잡히게 되었다. 또 한번은 은숙이가 울어서 눈이 벌
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유인 즉 은숙이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으나 나는 우리 애들 셋을 불러 앉혀
놓고 타이르듯이 물었다.
“사실은 엄마가 언니야만 맛있는 죽 쑤어주고, 또 언니야 옷만 사주고 우리 것은 안 사주기에…….”
하는 것이다. "엄마가 언니야 옷 사느라고 우리 옷 못 샀잖아” 하며 우리 꼬마가 질투가 나서 언니한
테 따지며 대든 모양이었다. 우리 애들은 절대 그런 말 하지 않을 줄 알았었는데 애들은 다 똑같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용돈을 나눠 주면서 “너희들은 옷도 많고 헌 옷도 받아 입을 수 있지만 언니는 제
일 크니까 물려 받을 옷이 없잖니, 그지? 언니 옷 작아지면 너희들이 받아 입으면 되고...
”라며 욕심 부리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타이르며 '언니가 죽을 먹어야할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울먹이며 “언니야가 아픈 줄 몰랐어.” 더욱 애틋한 사랑으로 언니를 따르게 되었고,
또 언니도 동생들에게 근진한 사랑으로 대해 주었기에,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그 전보다
사이가 더욱 좋아져 이후 그런 문제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덧 고교 입학원서 접수 철이 돌아왔다. 여상에 입학시켜 직장 생활을 하도록 해야겠기에 학교
생활지도며 학업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줄 수있도록 남편이 근무하시는 제일여상에 원서 내는 것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제일여상은 대구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학교이므로 이름난 학교
를 졸업해야 취직에 유리하기도 하고, 아울러 이 학교는 한 해 건너 한 번씩 미달 사태가 일어나곤
했는데 바로 그 때가 기대해 볼 해이기도 했다. 은숙이에게 아빠가 있음을 확인시켜 정신적으로 든든
함을 느끼게 하도록, 더욱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했다. 이 아이에게는 아주 독한 부분이 있었기에,
우리의 생각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입시 생활을 관심있게 보아주었고,
나는 마침내 제일여상에 원서를 제출했다.
경대사대 부중 교직원은 모두 경북대학교 선후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은숙이의 3학년 담임은 우리
1년 선배인 수학과 김 선생님이셨는데, 원서를 보는 순간 갑자기 얼굴빛이 확 달라지면서 원서를
내던졌다. 책상을 쾅! 치면서 하는 말이 “박 선생님! 정말 이러깁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요.
야! 진짜 속 들여다 보입니다”그렇게 무섭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물론 약한 몸으로 병원에
다니고 하느라 은숙이 성적이 좋을리가 없었다. 속으로 울면서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인
나는 담임선생님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슬그머니 내 자리로 돌아왔다. 훗날을 기약하
며 꼭 합격시키고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저절로 이가 악 물려졌다. 오늘의 이 치욕을 꼭
씻어 주리라! 입시 공부하는 은숙이에게는 "너는 꼭 합격한다. 꼭 해야 한다. 하지만 이왕이면 좋은
성적으로 합격 하는 게 좋지 않겠니?" 라며 용기와 격려를 불어 넣었다.
예측대로 약간의 미달사태로 합격 발표가 났다. 은숙이의 성적도 평소보다 훨씬 좋았다. 그 때의 기쁨
이란 정말 서울대에 합격한 부모의 심정이 이 정도일런지?. 그 다음날, 무섭게 화를 내었던 김 선생님
의 태도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 다가와서 간절하게 사과의 말로 용서를 구할 때 나는 홱 뿌리
치고 뒤돌아서서 엉엉 울었다. 그 때는 너무나도 서운했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번이나 용서를 구했는
지 나중엔 민망할 정도였다. 성적이 높은 학교에 원서를 내어서 아이를 고의로 떨어지게 한 다음 이용
이라도 하려는 의도로 짐작했던 것이다. 남편이 제일여상에 근무했던 사실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간 중간 안부 전화가 오고 있으며, 올 2월 모 고등학교 교장직을
퇴임하셨다.
여상에 입학하였으니 주산, 상업부기, 타자. 기타. 전공 과정 급수 딸 것도 많았고, 장부 정리 등
까다로운 것도 많다. 취직에 필수적인 준비를 학원에 다니며 철저하게 마친 뒤 열심히 쌓은 실력으로
취업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은숙이는 취약점이 있었기에 남다른 방법을 필요했다. 키가 작은 데다
안경을 낀 최악의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보완하려면 상대방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는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구두시험 때 못한다는 말은 사절이다.’'반드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라며 그렇게 나는 지도했고 은숙이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를 잘 했다.
은행에서는 항상 삼배수로 3명을 추천 받아 그중 1명만 뽑았는데 번번이 낙방했다. 실력보다는 키나
인물 등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세무사 사무실 같은 데는 오로지 실력 위주로 뽑았으므로 제일여상이
라는 이름과 자신감 있는 태도로 주위를 물리치고 거뜬히 합격했다. 그때의 좋아하던 모습이란….
쭉쭉 뻗은 미모의 적을 물리쳤으니 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늘 내가 말해온 대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내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 되라’
는 말을 명심하고 은숙이도 사무실에서 자기 몫은 물론, 다른 사람이 쩔쩔 매고 있을 때 이를 도맡아
늦도록 남아서 끝까지 해내고 마무리하는 태도로 꾸준히 일했다. 마침내 사무실에서 제 1인자인 팀장
이 되었고 사무실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인물’ 이 되었던 것이다. 세무사 사무실에 다니면서
야간대 계명대 의상과의 공부를 마친 후 격을 높이고자 서울의상실에 취직하여 장래 의상실 차릴 꿈도
꾸었다. 그러나 일 년이 훨씬 넘도록 의상실 청소와 차 심부름이나 하고, 옷 만드는 일이라고는 기껏
단추 구멍 만들기와 단추 다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박봉이라, 희망이 요원하여 다시 세무사 사무
실로 직장을 옮겼다. 그때 대구 우리 집에 인사 왔기에 서울 금천구 성암교회에 전도사로 있는 둘째
아들을 꼭 만나 보도록 권유했더니 은숙이도 동생이 보고 싶다고 반가워했다.
그때의 내 생각으로는 결혼할 시기도 되고 해서 교회에 다니다 보면 착하고 성실한 품성은 저절로
알게 될 것이고, 거기다 전도사 누나라면 훨씬 낫게 봐 줄 것도 같아 성실한 믿음을 지닌 청년을 만
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서울에 있는 둘째에게 은숙이 누나 주소를 알려 주었더니 반가움
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 후 주기적으로 누나 사무실에 찾아다니며 본분인 성경 공부등, 사무실 내
의 직원 상대로 전도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마침내 사무실 동료직원은 물론 은숙이도 아들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서 얼마나 전도활동이 열심이었는지, 지금 아들 뒤를이어 그 교회 전도사로서
'쓰임받는 꼭 필요한 인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물론 세무사 사무실 직업도 그만 두었기에.
그 당시 내가 물었다. "은숙아, 교회에 있으면 봉급도 그전보다 훨씬 적을 테고 살기 어렵지 않니?.”
왜 그랬냐고 측은한 마음으로 물었더니 “선생님!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물론 돈 액수로 따지면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적지만 교회에서는 꼭 쓸 만큼 하나님이 주세요. 더 있어 봐야 쓸데없는데 쓸거니
까 상관없고요. 마음이 항상 기쁘고 만족스럽고 보람찬 생활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나는 뜻밖의 대답에 놀랐다. ‘선생님 때문에 손해 많이 봐요 후회스러워요’할 줄 알았는데….
순간 나의 전도사 아들이 정말 대견하게 생각되었다. 은숙누나를 이렇게 변화시켜 놓다니. 다만 한
가지 원하는 것은 교회 다니며 성실한 짝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는데…….
은숙이는 어린이들 및 청소년들을 맡아 자기 어릴 적 얘기를 들려주며 용기를 북돋워 바른 길로 인도
하는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행복하고 순탄한 가정에서 자란 성직자들보다 더 설득력 있는 전도자가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전도사님이 제 마음을 어찌 알아요?” 하며 누군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 "내가 어릴 때 겪은 얘기 해 줄까?” 하면서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감동을 받아 와락 달려
들어 안기기도 하고. 한마음으로 동화되어 믿음과 끈끈한 정으로 따르게 되는 등, 사랑을 실천하는
바른 인간으로 교화시키는 일에 제 1인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전도사 아들이 서울 총신대 다닐 때의 일이다. 자취집에 오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나 역시 직
장일도 바쁘고 해서 아들을 믿고 가지 않았었는데 자기 자취집에 가출학생, 마약하던 청소년 등을 데
려다가 며칠에서 한 달 정도 숙식을 제공하고, 성경공부와 기도회 및 주일날은 교회에 데리고 다니며
교화시켜 객지생활을 무사히 끝내고 고향집으로 돌려 보내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시초가 되
어 지금 성암교회 '미션홈의 창시자' 가 되어 있다.
오래 전의 일이다. 한번은 아들을 아껴주던 한 집사님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서울 아들집에 가
보았냐 하기에 안 가봤다고 했더니, "그 자취집이 청소년 혼숙하는 장소인 줄은 알고 있느냐, 어떻게
그리도 무심하냐" 고 질책하셨다. 그 다음 날 당장 예고없이 우리 부부는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는 기
차를 탔다. 전화를 받은 후 그때까지 잠자지도 먹지도 못해 둘 다 초췌한 모습으로 묵묵히 입 다물고
갔다. 그때 심정은 마치 단두대로 향하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아들 자취집은 모 교회 장로님 소유로 성직자들이 계속 쓰던 곳이다. 아들이 쓰는 1인용 침대와 책상
이 꽉 차는 작은 방 1개와 옆으로 4- 5배 이상 정도 되는 길고 넓은 방이다. 두 방 앞쪽으로 쭉 마루
로된 넓은 홀과 붙박이장이 있는 반 지하 집으로, 다른 교회 선배 전도사님께 인계받은 집이었다.
목사님으로 전근 가시게 된 선배님 덕분에 10년 넘도록 집세를 올리지 않은 넓은 집으로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았다고 좋아하던 집이었다. 서울로 가면서 생각하니, 아들이 대구에 한 번씩 내려올 때마
다, 또는 부산 내려가면서 지나갈 때마다 집에 있는 쌀자루 채(쌀을 시골에서 농사지어 갖다 먹었다)
반찬거리며 음료수, 쥬스 팻트병까지 몽땅 실어가곤 했었다. 나는 작은 교회라 어려워‘성미’로 쓰려
는줄 알고 열심히 실어 주곤 했다. 심지어 세탁기, 냉장고, 컴퓨터, 책상, 침대, 가재 도구까지…….
서울에 도착하니 목사님 장로님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런데 잠시후, 어처구니 없는 우리 부부
의 질문에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교회의 보배’‘보물’이라고 칭찬을 쏟아놓으면서. 총신
대 가까이 살면서 형편이 아주 어려운 학생들은 집에 공짜로 상주시키고, 가출소년들은 수시로 들락
거린다고 했다. 컴퓨터 숙제하러 드나드는 하숙 학생도 있고. 주기적으로 성경 공부및 기도회 할 때
자정을 넘길 수도 있는데, 마친 후 서울시내 거주 학생은 집으로 돌아 갈 그때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
면서 밑반찬, 김치, 된장 등을 갖다 주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도와주는 성도님도 많다고 했다.
“ 정말 잘 오셨습니다, 아무도 못할 일을 전도사님이 감당 하고 있는데 당치도 않는 소문일랑 잊어
버리세요" 라며 우리 부부를 극진히 대접해 주었고, 장로님 댁으로 다투어 초청해 주셨다.
이때 처음으로 이것이 앞에 말했던 '미션홈의 시초' 였음을 알게 되었다. 뜻밖의 환대에 놀라며 아들
에게 내가 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랬더니 “엄마! 모두 엄마한테 배운거지요 ”
"무슨 말이니?” "엄마가 은숙이 누나 우리 집에 데려 왔잖아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할말을 잃었다. 나의 행동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 현재 아들은 미국 워싱턴 임마누엘 교회에 파송되어 내년 초쯤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다. 바로
아들이 워싱턴으로 가기 전, 파송 예배 때의 일이었다. 예배 도중 이별을 슬퍼하며 울먹이듯 한 청년
들의 특송이 끝나고, '다음은 이어 이은숙 전도사님의 간증이 있겠습니다.’하자 은숙이가 나오더니
어릴적 우리 집에 오게된 일부터 지금까지의 과거를 울면서 한참 얘기하는 것이었다. 듣고 있던 성도
들도 하나 둘씩 따라 울기 시작했다.
“ 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선생님 댁에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
달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이 자리에 계시는 김상범 전도사님의 어머님이신 나의 초등학교 때의 담임
박영숙 선생님이십니다.” 라고 하였고, 주위 성도님들은 일제히 나에게 눈을 돌렸으며 목사님께서는
나를 단상으로 부르셨다. 얼떨결에 나가게 된 나는 은숙이랑 손잡고 웃는 모습을 지었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려, 울면서 웃는 얼굴로 성도님들께 인사 드렸다. 곳곳에서 ‘ 나의 아들 김전도사의
훌륭함이 어머님이 뿌린 씨앗 덕분이라고’"그렇게 씨앗을 뿌리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은혜스
러워요.’라며 이사람 저사람 여기저기서 내 손을 붙잡으며 격려해주어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나는 은숙이가 ‘과거 일로 혹시 상처받지 않을까, 결혼에 지장이 되지 않을까, 또는 자존심이 상하
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과거에 동료교사들의 권유로 수기를 써 놓고도 발표하지 못하고 그냥
장롱 속에 넣어 두곤 했고, 언젠가 남편이 쓰레기로 버리기까지 했었는데……. 은숙이도 이 모든 것
을 인정하고 오히려 하나님 뜻으로 알고 있으니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은숙이가 말띠이니 마흔
한 살이 되나보다. 3년 전쯤인가, 서울에 결혼식이 있어 갔다가 은숙이 집에서 하루밤을 같이 지냈다.
그 때 너무나 밝고 활기차게, 보람찬 일과 속에서 진정한 행복이 심신에 꽉 차 넘치게 보였고. 마치
하나님의 가족이 된듯한 느낌의 모습, 은숙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며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써 보았다. 또한 나의 사랑하
는 은숙이가 이 글로 인해 오히려 더욱 더 새 힘이 샘솟게 되기 바라고. 우리 아들과 나란히 이 세상
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더욱 훌륭한 성직자로 거듭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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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이제 내년 8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38년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감히 용기를 내어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만, 앞뒤가 뒤섞여 두서가 없는 것 같아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보잘 것 없으나마 끝까지 읽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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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적자원부주최 교단 체험수기 공모에서 영예의 대상으로 당선되었어요.
인터뷰끝났고요, 수상은 12월 19일 오후2시 부터 교육인적 자원부 (서울)연수원
영상홍보실에서, 1월 11일(목)밤 10시특집으로 방영된대요(EBS)예요.안녕히.
(이 글은 내가 포항여고-송라중 -초전중거쳐 -경북사대부중 때
겪었던 일이란다... 얘들아 사랑해... 정말 사랑해... )
![첨부이미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planet.daum.net%2Fupload_control%2Fpcp_download.php%3Ffhandle%3DNHZoUzBAZnMxMy5wbGFuZXQuZGF1bS5uZXQ6LzEwNzkyMjQ5LzkvOTU0LmdpZg%3D%3D%26filename%0D%0A%3D3.gif)
배경음악/ 김종환 : 사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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