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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동네 소식 스크랩 영등2동 영등2동(익산향토지 제 3권)
사무국장 추천 0 조회 130 10.02.12 18: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3권(2007)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제4편 영등2동

 

제1장 영등2동의 연혁과 현황

제1절 영등2동의 연혁

 

영등2동은 원래 조선시대에는 전주부에 속한 옛 옥야현 지역의 북일면 소속의 마을이었다. 옥야현은 고려 말에 전주에 소속되었다가 조선 초기까지 전주부의 속현이었는데 이때 전주부의 속현인 네 고을 옥야현(沃野縣 : 구 이리시), 우주현(紆州縣 : 왕궁, 삼례, 봉동의 각 일부), 이성현(伊城縣 : 이서), 이성현(利城縣 : 공덕ㆍ청하) 중 태종 9년(1409)에는 옥야현만 유일한 속현으로 남고 나머지는 폐현이 된다. 이후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중엽사이에 폐현된 것으로 보이는 옥야현 지역으로 1899년까지 전주군에 속했다가 익산군으로 편입된 지역은 모두 5개면으로 다음과 같다.

 

□남일면(중앙동, 창인동, 갈산동, 주현동, 인화동, 평화동, 마동, 동산동, 목천동 등 구이리시 [1928년 북일면 현황도]

중심부 지역)

□남이면(오산면 남부지역으로 남전리, 신지리 일대)

□동일면(신흥동, 금강동, 석탄동, 춘포리 일대)

□서일면(오산면 북부지역으로 오산리, 송학리, 장신리, 영만리 일대)

□북일면(구 이리시 북부지역으로 남중동, 모현동, 신동, 영등동 일대)

 

1914년에 부 ? 군 ? 현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2월에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었으나,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그리고 3월에는 용안군, 함열군, 여산군이 익산군으로 통합되게 된다. 1917년에 간행된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 新舊對照 朝鮮全圖府郡面里洞名稱一覽》을 보면 당시의 북일면은 모두 9개리로 이루어졌는데 그 지역은 다음과 같다.

 

1. 어양리 : 양지리, 어곶리, 궁동, 신양리, 용비리, 송정리 각 일부

2. 영등리 : 동영등리, 서영등리, 신성리, 약촌, 청복리, 궁동, 송내동 각 일부

3. 남중리 : 송내동, 장교동, 남중리, 후신리 각 일부

4. 신 리 : 소영등리, 송내동, 신리, 모인리 각 일부

5. 현영리 : 서두리, 동산리, 현영리, 내장리, 상시리, 만석리 각 일부

6. 만석리 : 만석리, 하시리, 상시리 각 일부

7. 모인리 : 도교리, 외장리, 수곡리, 모인리, 신리 각 일부

8. 고현리 : 항가리, 묵동, 요동, 고현리, 동문리, 옥호리, 매교리, 수곡리, 남중리, 남당리, 학곤리 각 일부

9. 신룡리 : 신곶리, 내곶리, 계룡리, 오룡리, 석상리, 석하리, 현영리, 신리, 모인리 각 일부

 

그러나 익산군의 군청 소재지인 익산면은 이미 1916년 3월에 북일면으로부터 남중리와 고현리를 편입시키고 1917년에는 지정면(중심면)이 되면서 9월에는 거리가 먼 석탄리와 대장촌리는 분리하여 춘포면에, 신흥리와 금강리는 북일면에, 목천리는 오산면에 각각 편입시켰다. 따라서 남중리와 고현리는 일찍이 90여년 전에 이미 익산면에 속하게 되어 1931년에 익산면이 이리읍이 되면서 1933년 12월 1일 정제(町制)시행으로 남중정과 고현정이 되고, 1947년 이리부로 승격함에 따라 남중동과 고현동이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북일면은 어양리, 영등리, 신리, 현영리, 만석리, 모인리, 신룡리, 금강리, 신흥리로 유지되다가 1947년 11월에는 모인리가 고현동에 합병되었다. 그러다가 원광대학교가 소재하여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북일면 전 지역이 대통령령 제 7161호(1974년. 5. 25일 공포)에 의해 1974년 7월 1일에 이리시에 편입됨에 따라 북일면은 시지역이 되고 북일동이 되었다. 이때 각 리의 명칭이 법정동이 되고 금강동과 신흥동은 행정동 신흥동이 되고, 신동, 영등동, 어양동의 3개 법정동을 행정동으로는 북일동이라 하고 만석동, 현영동, 신용동 등의 3개동을 합하여 행정동으로는 계문동이라 하였다가 그 후 이리시 조례 1238호(1989.12.22공포)에 의해 1990년 1월 1일 북일동이 영등동과 어양동만 북일동으로 하고 신동은 독립하여 분동되었다.

1996년 7월 10일에는 익산시 조례 제204호(1996년.6.29일 공포)에 의해 급격히 인구가 늘어난 북일동을 영등동과 어양동으로 분동하였다. 1998년 2월 2일에는 익산시 조례 251호(1997. 10. 20공포)로 영등동, 어양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북쪽을 어양동, 남쪽을 영등동으로 행정운영동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9일에는 구조조정에 따른 통폐합이 이루어져 영등동과 어양동을 통합하여 행정동 명을 영등동으로 하고 계문동과 신동을 통합하여 행정동명을 신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2003년 3월 1일에는 익산시 조례 662호(2003. 2. 4공포)로 영등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남쪽일원을 영등1동, 산업도로 북쪽 일원을 영등2동, 어양동 일원을 어양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게 됨으로써 영등2동이 탄생하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등2동 지역은 1914년경에는 북일면의 영등리로서 서쪽으로는 신성리가 있고 동쪽에는 궁동의 일부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제2절 영등2동의 자연환경

 

익산은 전라북도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부는 완주군과, 남부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서부는 군산시와, 북부는 금강을 경계로 하여 충남의 부여군 및 논산시와 접하고 있다. 지세는 동부지역은 험준한 천호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서부는 금강이 흐르고, 남부는 용화산과 미륵산에서 그 지류가 발원하고 있는 만경강상류의 준평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지질구조를 보면 동부산간지대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암질 편마암이나 편마암으로 구성된 변성복합체, 화산암류 등의 풍화에 강한 암석들이 분포하는데 반하여 산간의 분지와 서부평야지대 등의 기반암은 대부분 풍화되기 쉬운 중생대 쥬라기의 화강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익산의 동쪽인 여산과 금마일원은 노령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어 비교적 산지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쪽은 용안에서 성당면, 함라면, 서수면을 지나 임피면, 개정면, 옥산면으로 이어지는 함라산(241m)줄기와 몇 개의 대표적인 구릉지를 제외하면 해발 30m이하의 낮은 구릉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익산시 중심부의 전체적인 지형으로는 미륵산에서 남서부로 내린 지맥이 만경강 본류와 탑천 유역, 그리고 송학동 및 오산리와 영만리의 해발 10 ~ 30m 구릉지를 제외한 지역이 충적토로 형성된 저지대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구릉지로는 배산(98m), 장자산(45.8m), 수도산(40m), 고봉산(45m), 팔봉산(68m), 지네산(67.8m)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해발 30m이하로서 풍화층이 두텁고 토양은 적색을 띤다.

영등동 일대의 지형을 보면 동으로는 노령산맥의 줄기가 흘러 여산면, 왕궁면, 낭산면, 금마면을 스쳐 지나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강이 서쪽을 끼고 돌며 비옥하고 평탄한 해발 30m 이하의 평야지역을 이루고 있다. 북쪽의 모습을 보면 임상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을 흐르는 사수(만경강)의 탑천이 허리다리(요교)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기양천이 삼기면의 기산리까지 뻗어나가고 남으로는 팔봉천(망동천)이 금마면의 미륵초등학교 앞까지 뻗어나가 있는데 임상동과는 팔봉천을 경계로 한다. 이곳 평야는 충적평야인데 동부산간지대의 풍화산물이 만경강에 의하여 운반되어 쌓인 제4기의 충적층으로 되어 있다.

동쪽인 여산과 금마일원은 노령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어 비교적 산지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쪽은 용안에서 성당면, 함라면, 서수면을 지나 임피면, 개정면, 옥산면으로 이어지는 함라산(241m)줄기를 제외하면 그 동부인 이곳은 해발 50m이하의 낮은 구릉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 영등2동 일대는 북동쪽의 미륵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줄기를 따라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고 구릉의 하단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저습지가 펼쳐져 있다.이런 지형조건으로 구릉부에는 소규모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물이 재배되고 있어 경작지 조성을 위하여 상당량의 절토작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의 야산개발사업으로 거의 대부분 밭으로 개간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영등1동 지역이 도시화되어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서고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영등2동마저 급속히 개발되어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영등2동은 1937년에 요교호가 간척되기 전에는 북쪽으로는 크나큰 요교호가 있었다. 오늘날 서영부락(현재는 신동에 속한다)과 동영부락, 신성부락사이는 호수의 물이 차있었고 부영3차아파트와 마한초등학교지역까지도 저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등동은 20세기 이후 역사적으로 익산군 북일면 소속이었던 시골지역이었다가 1974년 이리시에 편입되어 비로소 시 지역이 된 곳이다. 따라서 그 범위가 비교적 넓은데다가 1980년대 이후 영등동 개발 아래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2003년에는 산업도로를 기준으로 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영등(永登)이라는 한자의 새김과 음을 따가지고 지은 이름으로서 〈길다란 구릉으로 이루어진 나지막한 잿마을〉이라는 뜻이다. 영(永)은 ?길다?라는 뜻이고 등(登)의 원 뜻은 오른다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음을 취하여 ?등허리?를 뜻하는 말이니 ?길다란 등성이?라는 뜻으로 시의변두리인 영등리의 지형이 낮은 구릉이 길게 뻗어있는 곳에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생겨난 명칭으로 보인다.

영등2동의 위치를 살펴보면 북으로는 어양동이 있고 남으로는 무왕1로를 중심으로 영등1동이 있다. 동으로는 어양동이, 서쪽으로는 신동과 닿아 있다. 영등2동의 모양은 도심지역은 거의 정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나 아직도 자연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곡영과 동영마을은 구릉지대을 형성하고 있는 곳에 동영은 동쪽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곡영은 남쪽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논지대가 뾰쪽하게 이어진 모습으로 마치 모자 쓴 사람형태를 띠고 어양동 및 신동과 경계를 이룬다. 영등2동은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선 도심지역은 아주 좁아 중앙동이나 평화동과 비슷하지만 인구는 놀랍게도 14개 행정동 중 7번째로 많다.

 

제3절 영등2동의 현황과 모습

 

1. 행정구역 및 인구

행정구역

가구수

인구수

법정동

자연

마을

아파트

1

23

107

3

5

5,500

17,572

8,577

8,995

 

2. 면적 및 토지이용 현황

임야

대지

공원

기타

1.29

0.18

0.44

0.01

0.38

0.10

0.18

 

3. 주요 기관 및 시설

공공기관

금융기관

학교

병ㆍ의원

종교기관

경노당

복지시설

3

6

2

31

21

5

0

 

4. 자연마을별 인구현황

마 을 명

세 대 수

상 주 인 구

비 고

신 성

40

111

 

곡 영

34

78

 

동 영

32

85

 

106

274

 

 

5. 영등2동의 모습

 

1974년 7월 1일에 북일면이 이리시에 편입됨에 따라 북일면은 시지역이 되고 북일동이 되었다. 이때 각 리의 명칭이 법정동이 되고 신동, 영등동, 어양동의 3개 법정동을 행정동으로는 북일동이라 하여 비로소 영등동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인구의 집중으로 2003년 3월1일 관할구역 조정이 이루어지고 영등동이 분할되어 영등2동이 태어났다. 이제 원래는 영등동 이었던 지역이 두개의 동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무왕1로 남쪽은 1동이 되고 늦게 개발한 북쪽은 2동이 되었다.

영등은 서영등이나 곡영등, 동영등 등의 마을 뒤 구릉이 모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긴 등성이라는 뜻의 긴등을 영등으로 표기한 것이니 지금도 자연마을로 남아있는 동영과 곡영 그리고 신성마을을 지나서 남성중?고와 소라단을 연결하면 긴 등성이가 된다. 그러고 보면 정작 영등동이라는 이름은 극히 최근에야 개발되어 우리가 비로소 가까이 하게 된 영등2동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겠다.

현재 영등2동은 크게 개발지역과 자연마을지역으로 구분된다. 개발지역은 야산과 밭이었던 곳이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등동 택지개발사업부터 시작된 영등동 개발이 1990년대 말에는 드디어 무왕1로 이북으로 옮겨 붙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된 곳이다. 거의 정사각형 모습의 이 개발지역은 현재 익산시 최고의 상업지구이자 주거지역으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오늘날의 영등2동]

실로 ?상전이 벽해?(桑田碧海)된다는 말이 딱 맞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끝없이 야산과 밭으로 펼쳐지며 교통도 불편하여 모두들 시내까지 걸어 다니던 이 영등동이 익산 최고의 상업지역이 된 것이다.

직교형 가로망이 형성된 영등2동지역은 사각형의 지대를 동서로는 마한로와 무왕1로가 남북으로는 영등로와 하나2로가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영등2동 개발의 본격적인 개발은 이 지역에 1997년에 준공된 890세대의 우남샘물타운을 시작으로 이듬해 영등부영3차와 영등제일3차, 1999년에는 영등제일4차가 분양됨으로써 단숨에 무려 5000세대가 입주함으로서 시작된다. 이처럼 대규모 아파트와 주민이 살게 되었지만 상가택지의 분양은 2001년까지 지속되었다.

영등2동의 놀라운 발전은 롯데마트에서 비롯되었다. 2001년 8월 31일에 개점된 롯데마트 제16호점은 익산의 상권과 소비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개점직후에는 전국 최고의 매출을 기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재래시장이 크게 흔들림으로 해서 시민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구매거부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미 금융환난사태(일명 IMF)가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국민소득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대형마트가 급증하는 추세에서 값싸고 다양하며 세련된 모든 상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식 대형마트에 대한 신세대층의 소비패턴을 인위적으로 막아낼 도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6년에는 바로 옆에 홈 플러스가 들어서고 동산동에도 E-마트가 건립되어 이제 익산시도 대형마트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재래시장 살리기 사업》도 말만 무성할 뿐 실체가 없는 사업이 되고 말았다. 북부시장을 제외하고는 재래시장들이 대부분 문을 닫기 직전에 놓이고 말았다.

현재 영등동 지역은 무왕1로에는 대형건물들이 즐비하고 농협전북지부, 하나은행, 우리투자증권 등의 금융기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병원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전자랜드 사거리는 익산시 최대의 중심지가 되어있다. 전자랜드는 모든 가전제품을 취급하는 최신식 대형마트로 규모와 시설이 대단하여 인기가 높다. 무왕1로의 뒷골목인 공작길은 길 건너 어양동의 금송1길과 더불어 익산 최고의 식당가가 되어 이미 동산동 고봉로는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나2로에도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영등2동 사무소가 있는 삼거리를 중심으로 진등2로와 진등3로는 번화가가 되어 의류 및 신발 등의 각종 패션관련 대리점들이 최근 수 년 동안에 창인동과 중앙동에서 대거 이동하여 왔거나 새롭게 개점하였다. 이제 마치 영등2동에 드나들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구세대 시민

으로 스스로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되었다. [전자랜드 사거리 부근]

시당국과 재래시장측이 역세권 개발의 일환으로 금년도인 2007년에 역앞길을 중심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중앙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하여 산뜻한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중흥을 꾀하고 있어 앞으로 기대가 되고는 있으나 익산시 자체의 인구감소와 구시내권의 인구공동화 현상으로 과연 옛 영화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이 영등2동은 비록 5개의 아파트밖에 없음에도 인구가 2만에 육박한다. 대규모의 휴식공간인 영등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생필품을 언제나 구입할 수 있는 롯데마트와 홈플러스가 있다.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서는 최신식 건물과 시설로 개교한 백제초등학교와 마한초등학교가 있으며 시립도서관 본관이 자리한고 있다. 그리고 이미 수십 개의 병원과 학원들이 성업 중인 곳이므로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가장 안성맞춤인 마을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본다.

자연마을지역은 아직도 남아있는 세 개의 자연마을 지역을 말한다. 즉 동영과 곡영 그리고 신성마을이다. 아직까지 언덕으로 된 지역에 자리한 동영과 곡영은 자연마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으나 신성마을을 완전히 변모한 상황이다. 영등로 좌편으로 이미 수년전부터 각종 대형 음식점들이 들어섰고 이리북문교회주변의 낮은 지대에도 많은 식당들이 문을 열었다. 이제 영등2동은 지리적으로는 익산 시내의 가장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나 시민생활과 문화적 측면에서 가장 각광받고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곳은 이미 익산시의 심장부이다.

마한로 북부지역은 임상리의 오상마을까지 논으로만 이어져 있는 오상들이다. 부영3차아파트 뒤에는 수문이 있다. 춘포면을 흐르는 만경강물을 허리다리 호수로 보내기 위하여 1913년에 터질목에 터널을 개통시키고 그 수로를 건너는 다리를 놓았는데 이것은 당시 두천면의 용제리에서 터질목을 지나 북일면 어양리의 팔성다리를 거쳐 황등호와 연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등동과 어양동지역이 개발되면서 모두가 복개되고 마한로 이북지역만 남아 있기는 한데 동영마을과 신동의 서영마을, 신룡동의 계룡마을을 거쳐 흐르는 작은 하천인데 이제는 전혀 제 구실을 못하고 수문들이 굳게 닫혀 있으며 비가 올 때면 부근의 물을 빠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마을 어른들의 설명이다. 이 작을 하천을 따라 마한로에서부터 신룡동의 타이거주유소와 신룡LPG충전소로 빠져나가 원광대학로와 연결되는 2차선의 포장도로가 정비되어 의외로 이곳을 통과하는 자동차들의 통행량이 많다. 2006년도에 인북 2로가 서영마을까지 개통되었으므로 황등에서 영등등으로 연결되는 하천로가 4차선의 직선도로로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이 하천은 원광대학로를 건너 만석동으로 연결되고 있다.

 

제4절 영등2동의 주요기관

 

1. 행정기관

 

(1)영등2동사무소

1996년 7월 10일에는 익산시 조례 제204호(1996년.6.29일 공포)에 의해 급격히 인구가 늘어난 북일동을 영등동과 어양동으로 분동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행정동 영등동이 탄생하여 동사무소를 두게 되었다. 1998년 2월 2일에는 익산시 조례 251호(1997. 10. 20공포)로 영등동, 어양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북쪽을 어양동, 남쪽을 영등동으로 행정운영동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9일에는 구조조정에 따른 통폐합이 이루어져 영등동과 어양동을 통합하여 행정동 명을 영등동으로 함에 따라 행정동 어양동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2003년 3월 1일에는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따라 익산시 조례 662호(2003. 2. 4공포)로 영등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남쪽일원을 영등1동, 산업도로 북쪽 일원을 영등2동, 어양동 일원을 어양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행정동 영등2동이 탄생하게 되었다.

영등동이 분동되었으므로 2000년대 들어서야 전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영등2동은 현재 5374세대에 총인구가 17,646명(남자8,591명, 여자 9,055)이며 그중 아파트에 4676세대 1만 6천여 명이 살고 있어 전 인구의 90% 이상이 아파트 주민이다. 현재 자연마을로는 신성, 곡영, 동영마을이 있으나 이미 신성은 대형음식점등으로 그 모습이 크게 변하고 있으나 곡영과 동영은 자연마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영등2동 자연마을들을 끼고 펼쳐있는 논농사지역을 제외하면 도심은 남북으로는 영등로와 하나1로, 동서로는 무왕로와 마한로가 둘러싼 사각형 지대이다. 롯데마트와 홈플러스를 중심으로 익산시 신 상업지역으로 그 뿌리를 내린 곳으로 어느새 익산시에서 가장 중심지가 되어버린 곳이다. 23개통 107반으로 조직되어 있다. 영등공원 앞 진등2로에 동사무소가 있으며 현재 11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2)영등2동우체국

우체국은 우편 ? 체신 업무 등을 맡아보는 정부기관인 정보통신부 산하 우정사업본부 밑에 8개의 체신청에 속해 있다. 전북체신청 소속으로 익산시에는 익산우체국이 중앙동에 있으며 그 산하에는 15개 읍 ? 면에 각각 1개씩의 우체국이 있고, 시내권에도 모두 15개의 우체국이 있다. 2003년도에 개설된 영등2동우체국은 동사무소 옆 영등2동 839-1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우체국의 효시는 1884년(고종 21)우정총국(郵政總局)과 인천분국의 설치이며, 1895년 농상공부의 통신국 밑에 24개의 우체사가 있었고, 1900년 한성우체사(漢城郵遞司)를 총사로 승격시켜 전국의 우체사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1949년 <정부조직법>이 제정된 뒤 <지방체신관서설치법>의 공포에 따라 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1968년 우편물 매일배달제가 실시되고, 1970년 우편번호제 실시, 1973년 서울~부산간 철도우편물 전용차 운행 개시, 1979년 일본·홍콩과 국제특급우편업무 개시, 1981년 국내특급우편제도 실시, 1983년 체신예금·체신보험, 국세·지방세 등 각종 공과금 수납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또한 1986년 우체국을 통해 특산물을 직접 구입할 수 있는 우편주문판매제가 실시되었고, 서신이나 도면 등을 팩시밀리를 이용, 원형 그대로 신속하게 전달하는 전자우편제도를 1984년부터 실시하였다. 우편물 송달체제의 개혁을 위해 1990년 컴퓨터화 된 기계장치에 의해 우편물을 자동 처리해 나가는 서울우편집중국이 개국되었다. 2000년에는 정보통신부 안에 우정사업본부가 신설되어 체신청을 아래에 두게 되었다. 2001년부터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한 인터넷 우체국과 인터넷 쇼핑몰 운영을 시작하였다. 2007년 현재 우체국을 관할하는 체신청은 전국에 8개소(서울, 부산, 충청, 전북, 전남, 경북, 강원, 제주)가 있으며, 우체국 총수는 4,000개소에 달한다.

우편물의 접수ㆍ구분ㆍ발송ㆍ수집ㆍ운송ㆍ배달, 우표·수입인지의 판매, 우편환·우편대체 및 제연금의 현금수불, 우편사서함의 사용승인ㆍ변경ㆍ관리ㆍ교부 등의 우편ㆍ체신 업무를 주 임무로 하고 있으며, 이 외에 금융사업도 실시한다. 예금ㆍ적금ㆍ대출ㆍ신용카드ㆍ보험 등의 금융상품 이외에 공과금 수납도 취급하고 있다. 전화ㆍ팩시밀리·컴퓨터 등의 첨단통신시설이 대중화되고 일상생활이 바빠지면서 편지이용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체국 고유의 우편업무보다는 전국 분포망을 이용한 금융업무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거의 전국의 모든 읍ㆍ면ㆍ동에 개설된 4,000점포를 통해 손쉽게 공과금을 납부하고 예금 및 대출이 가능하며 특히 우체국 쇼핑과 우체국 택배는 우리 생활에 아주 편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체국 택배는 가정이나 회사에 직접 우체국 담당자가 방문하여 가져가고 배달하여주는 아주 편리한 서비스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3)시립도서관 본관 영등도서관

21세기는 지식정보화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 대비하여 지식과 정보 및 문화의

핵심이 되고자 익산시립도서관은 지난 1994년 10월 20일에 동서로의 마동공원내(현 솜리문화회관 앞)에 개관하여 현재까지 지역정보문화센터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영등동이 개발되고 2000년 이후로는 무왕로 북쪽의 영등2동이 크게 발전하면서 급증하는 이용자를 수용하고 시민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등동 영등공원 오른편에 2003년 11월 25일 영등분관을 개관하였고, 2007년 인구밀집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이용자 급증과 행정력 강화의 필요성 대두로 영등도서관이 본관이 되었다.

시립 도서관은 21세기를 맞이하여 다양한 시책 추진과 프로그램을 통해 평생교육의 장이자 종합적인 정보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해 가고 있다. 시립 도서관은 현재 23만여 권의 장서를 확보하고 있으며, 종합자료실·어린이자료실 등 자료열람실과 자유열람실 및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원거리 지역의 이용자 및 도서관을 찾기 힘든 장애인등을 위하여 이동도서관을 연중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정보화 사회에 대비하여 CD-ROM, 비디오테이프, 음악 CD 등 멀티미디어 자료를 전자 자료실과 문화의 집에 비치하고 있으며, 인터넷 전용코너를 운영하여 이용자의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2004년 11월부터는 전자도서를 구비하여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도서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 시립 도서관에서는 지역 주민의 독서생활화를 위하여 1인 3권의 관외대출을 실시하고 있으며, 독서인구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있는 독서교실, 어린이독서회 그리고 주부독서회 등과 주민의 정서함양과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는 다양한 문화교양강좌를 운영하여 도서관의 평생교육센터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강화하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구 분

종합

자료실

어린이

자료실

전자자료실(비도서)

문화의 집

장애인

이동

도서관

E-

book

영등도서관

96,402

37,843

33,834

3,170

 

 

16,047

4,897

마동도서관

127,775

84,073

36,399

4,527

2,323

366

 

 

■자료 확보 현황 (2007년 2월 현재)(단위 : 권,종)

 

 

■주제별 장서 통계 (2007년 2월 현재)(단위 : 권)

구 분

총류

철학

종교

사회

과학

순수

과학

기술

과학

예술

어학

문학

역사

영 등

도서관

도 서

88,335

2,759

3,302

2,485

8,655

6,139

4,573

3,405

3,702

46,739

6,576

전자책

4,897

51

102

104

510

265

121

80

495

2820

349

마동도서관

120,925

5,557

6,265

4,474

17,585

7,652

8,442

6,050

5,089

49,453

10,358

 

■도서관주간 및 독서의 달 행사

○도서관 주간

1. 시행시기 : 4월중(7일간)

2. 대 상 : 일반 시민

3. 내 용 : 초청강연회, 시청각 자료 대출(영화. 음악 비디오테이프, CD)

○독서의 달 행사

1. 시행시기 : 9월중(1개월)

2. 대 상 : 일반 시민

3. 내 용 : 감사패 및 다독상 수여(도서기증자, 발전유공자, 다독자), 작가초청강 연회, 시청각자료 대출, 독후감공모전

 

■미륵독서회

1. 회원 모집 기간 : 연중

2. 운 영 기 간 : 연중(방학기간 제외)

구 분

대 상

인원

요 일

시 간

내 용

어린이독서회

초등학교

1-2학년

20

1, 2, 3주

토요일

14:30 - 16:30

 

도서관 이용법, 글쓰기

도서 선택법, 종이 접기

 

■문화교양강좌 운영

1. 시행시기 : 3 - 6월, 9 - 12월

2. 대 상 : 일반 시민

구분

강 좌 명

강 좌 내 용

대 상

모집인원

요일별

운영

시간

수강료

 

자녀독서지도

글쓰기 및 독서 지도 이론 및 실기

일반시민

20명

수,금

10:00 ~ 12:00

4만원

문예창작

시, 수필

일반시민

20명

화,목

10:00 ~ 12:00

 

동화책속 그림여행

독서 후 그리기

초등(1-2)

15명

화,목

16:00 ~ 18:00

4만원

어린이 논술

논리 ?논술 글쓰기 지도

초등(5~6)

15명

14:30 ~16:30

무료

어린이 논술

논리 ?논술 글쓰기 지도

초등(3-4)

15명

14:30 ~16:30

어린이 창작극장

인형극

어린이

150명

토(1,3주)

14:30 ~ 16:30

"

중학논술

논리적 사고력 및 글쓰기 지도

중등(1-2)

15명

15:00 ~ 17:00

엄 마 랑

창의력교실

유아와 엄마가 함께 하는 창작활동

미취학아동및부모

(4-5세)

20명(10팀)

화,목

10:00 ~ 12:00

4만원

서 예

이론 및 실기

일반시민

20명

수,금

10:00 ~ 12:00

사 군 자

이론 및 실기

일반시민

20명

화,목

10:00 ~ 12:00

기타 (guitar)

이론 및 실기

일반시민

10명

수,금

10:00 ~ 12:00

컴퓨터기초1 (3-4)

한글, 인터넷 기초

일반시민

20명

화,목

10:00 ~ 12:00

2만원

컴퓨터기초2 (5-6)

한글, 인터넷 기초

일반시민

20명

화,목

10:00 ~ 12:00

컴퓨터심화1 (3-4)

컴활자격증 준비

일반시민

20명

수,금

10:00 ~ 12:00

컴퓨터심화2 (5-6)

컴활자격증 준비

일반시민

20명

수,금

10:00 ~ 12:00

동화책속 그림여행

독서 후 그리기

초등(1-2)

15명

14:30 ~ 16:30

무료

어린이 논술

논리.논술 글쓰기 지도

초등(5~6)

15명

14:30 ~16:30

바이올린

이론 및 실기

일반시민

10명

화,목

16:00 ~ 18:00

중학논술

논리적 사고력 및 글쓰기 지도

중등(1-2)

15명

15:00 ~ 17:00

무료

 

 

(4)익산시민공원

영등시민공원은 영등동 814번지에 있어 영등2동에 속한다. 대저 영등2동은 남으로는 마한1로, 북으로는 마한로, 동으로는 하나1로, 서로는 영등로로 둘러진 4각형의 신 개발지역이다. 이곳이 개발되기 시작 전인 1990년대 초만 하여도 야산과 밭이 펼쳐져 있던 곳이다. 이제 10여년 만에 이곳이 상전벽해가 되어 익산시 최고의 상업지역이 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이곳이 개발됨에 따라 1994에 자연상태로 영등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연차적으로 개발을 추진하여 시민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96년 11월 5일부터 1998년 11월까지 이다. 2003년 11월에는 영등도서관의 준공과 함께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처음에는 영등시민공원으로 불리다가 최근에는 익산시민공원으로 부르기도 한다. 총면적 88,850㎡(27,000여평)이나 되는 영등시민공원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우리 익산시의 자연환경을 위해 예산을 들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공원 중에서는 116,096㎡(3만 5천여평)인 중앙체육공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공원이다. 얼핏 배산체육공원이 더 큰 듯하나 배산이 곁에 붙어 있어서 큰 공원으로 느껴질 뿐 실제로 배산체육공원은 65,189㎡(2만여평)에 불과하다.

예전에는 연일정씨 소유의 큰 배산과 작은 배산이 있는 535,000㎡(16만평)의 배산공원이 익산의 유일한 공원이었으나 그곳은 연일정씨 종중소유의 산인데다가 소나무 숲이어서 시민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시가지가 영등동쪽으로 확대되는 추세에서 지리적으로도 접근성이 부족하여 가까이 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시민들의 공원조성에 대한 갈망이 크던 차에 조한용 시장 재직시에 중앙체육공원이 조성되고 이어서 채규정 시장 재직 시에 배산체육공원이 완공되어 실로 익산시민들이 마음껏 운동과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가지게 됨에 큰 만족과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등시민공원은 단순한 체육공원이 아닌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다.

공원의 가장 높은 동산은 영등동 유적의 제3지구 집자리 유적지이다. 그곳에는 익산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탑은 왕궁면 광암리 산 4-8번지 사곡마을 뒤편 숲속에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우거진 잡풀 속에서 방치되던 것을 2000년 1월에 이곳에 ?겨 세운 것이다.

익산탑은 일찍이 유신말기인 1977년 11월 7일에 착공하여 1978년 2월 4일에 준공된 것으로 국보 289호인 왕궁리5층석탑을 모방하여 그 규모와 크기가 비슷하게 제작하여 익산의 관문인 익산인터체이지 부근에 호남고속도로가 잘 조망되는 곳을 택하여 세웠다. 그러나 2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근의 산에 있는 나무들이 자라고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시민들에게 잊혀진 탑이었으나 익산문화원의 요청으로 시당국이 이전하여 이곳 익산시민공원의 중심에 세우게 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익산탑 옆에는 익산탑 사적비도 함께 옮겨 세 [익산탑] 워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익산군은 마한의 옛 터요 백제 말기의 일시 천도지 였을 뿐 만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군내에 많은 문화재가 잇어 이를 널리 알리려고 우리 군의 상징으로 이 탑을 세운다. 1978년 5월 9일 익산군수 박 판서

공원안에는 자연보호탑과 새천년 다짐의 탑도 세워져 있다.

지난 8월에는 한국의 대표적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시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영등시민공원을 가람 선생을 기념하는 공원 명으로 개명을 추진하였다.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기에 전주의 다가산에는 가람시비가 있으나 아직 공원은 없으므로 늦었으나 대단히 반가운 계획이었다고 하겠다. [왕궁탑]

현재 영등시민공원은 시립도서관과 2개 초등학교가 인접해 시민들의 이용과 왕래가 빈번하므로 앞으로 가람 시조공원을 학생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화전, 백일장, 기타 행사 등을 개최하고 공원 내 적합한 조경공간을 가람동산으로 명명하고 조경공간에 가람 선생의 흉상, 시조비, 설명판 등을 설치해 가람 선생을 기린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이해심이 부족한 시민들의 반대가 많아 계획안이 부결되었다고 한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비록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여산면 출신이나 그 명성과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분이시기에 일부러라도 기념공원을 세울 만 하며 가람공원으로 명명하고 여러 시설을 하게 되면 이곳을 찾는 타 지역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잦아지고 미륵사지나 귀금속판매세타와 연결하여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으련만 수포로 돌아갔다니 애석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나 훗날을 기약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최근 익산시는 영등시민공원을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리모델링을 2008년 2월부터 시작해 약 3개월간 공사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익산시는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공원을 조성하고자 30억원의 예산을 투자하여 쾌적하고 아름다운 휴식공간을 조성키로 했다.

주요 시설로는 현란한 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분수대, 국제규격화한 축구장, 노인층을 위한 게이트볼장,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놀 수 있는 현대화된 놀이터, 급증하는 인라인 동호인들을 위한 트랙형 인라인스케이트장이 들어선다.

또한 산책로에는 시민들에게 좋은 지압보도 등을 새로이 시설할 계획으로 1월중 공사입찰로 시공자를 선정하고 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착수해 4월말까지는 리모델링사업을 마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음악프로그램이 접목된 바닥형 분수를 어린이날 전야에 가동하는 등 특별 이벤트 행사를 열어 시민들과 어린이들이 즐거움과 여가를 만끽 하도록 할 계획이다.

 

2. 교육기관

 

(1)이리마한초등학교

영등공원 오른편에 위치한 마한초등학교는 2000년 3월1일 개교하였다. 현재 학년별 각 6학급 총 36학급으로 1,226명의 학생(남학생 646명, 여학생 580명)이 재학중이며 50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교훈은 21세기를 주도하는 창의적인 한국인 육성을 위한 꿈과 힘을 기르는 즐거운 학교이며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철쭉, 교조는 까치이고 추구하는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애국인

나라를 사랑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어린이를 기른다.

도덕인

질서와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한 예절바른 어린이를 기른다.

능력인

자기주도적 학습활동으로 기본학력이 충실한 어린이를 기른다.

탐구인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로 탐구하는 어린이를 기른다.

건강인

지속적인 기초체력 단련으로 심신이 건강한 어린이를 기른다.

 

(2)이리백제초등학교

영등공원 왼편에 위치한 마한초등학교는 2000년 3월1일 개교하였다. 현재 학년별 각 7-8학급이며 총 47학급으로 1,524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매머드 급 초등학교이다. 모두 66명의 교직원이 재직 중이다.

교훈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바르게 자라는 어린이』로 정하고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철쭉, 교조는 비둘기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기본방향과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기본방향

꿈, 참, 힘을 기르고 봉사하는 이리백제교육

교육목표1

전인적인 사람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는 어린이

교육목표2

창의적인 사람

새롭게 생각하고 개성을 살려나가는 창의적인 어린이

교육목표3

즐겁게 일하는 사람

스스로 봉사활동을 잘하고 자기가 할 일을 찾아서 즐겁게 실천하는 어린이

교육목표4

더불어 사는 사람

예절과 질서를 잘 지키고 나라를 사랑하는 더불어 사는 어린이

교육목표5

개척하는 사람

진취적인 기상과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진로를 개척하는 어린이

교육목표6

심미적인 사람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가꾸는 심미적인 어린이

3. 공공기관 및 기업체 기타

 

(1)익산YMCA(기독교청년회)

젊은이들의 정신적, 영적상태의 개선을 목적으로 시작된 YMCA운동은 1844년 런던 YMCA가 창립된 이래 전 세계로 확산되어 1855년 세계 YMCA연맹이 결성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기 까지 가장 오랜 평신도의 범세계 운동체로 발전해왔다.

기독교청년회는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역사적 책임의식을 계발하고,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며 민중의 복지향상과 새 문화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익산 YMCA는 2000년 10월에 익산 시민들이 영등동 856-1번지에 60억원의 성금을 모아 지하1층 지상 9층의 회관을 건립하였으며 현재 5천여 명의 회원들이 영 ? 지 ?체 공생의 균형된 삶을 통해 익산을 살고 싶은 사랑의 도시로 만들어 가는데 노력하고 있다.

익산YMCA에서는 시민을 위한 각종 문화사업을 마련하여 충실히 실천하여 가고 있어 익산 문화사업의 메카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종 문화사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업부문

활동 프로그램

사업부문

활동 프로그램

생활체육

수영반 운영

사회교육

파파교실 운영

헬스반 운영

문화센터 운영

에어로빅반 운영

생태환경 교육센터 운영

방학중 어린이 스포츠

문화사업

문화자원 개발활동

방학중 어린이 스노보드 특강

문화복지 활동

청소년 활동

자원봉사 활동

문화교류 활동

특기?적성 지원 활동

레포츠 활동

동아리 활동 지원센터 운영

문화동호회 조직

시민사업

시민논단 운영

기타활동

익산시 청소년 수련관 위탁운영

시민중계 사업

 

환경 사업

 

 

(2)중앙농협 익산지부

중앙농협 익산지부가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면서 이리시 지부가 되었는데 이때 점포는 북부시장에 있었다. 2003년 11월에 크게 발전을 시작한 영등동의 무왕로로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 무왕1로의 영등동 833-15번지에 있다.

1961년 8월 법률 제670조로 공포된 농업협동조합법에 의거 구 농협과 농업은행이 통합된 새 농협협동조합이 발족되었다. 농협은 그동안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와서 지금은 국내 최대의 지점망을 가진 규모로 성장하였다.

농협은 신지식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지원사업, 시장지향적 산지유통을 위한 경제사업, 금융을 통한 신용사업을 그 주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00년 7월 1일에는 축산, 인삼협동조합까지 통합하였고 전국의 16개 지역본부 밑에 시 ? 군마다 지부가 그 아래 지점 및 지소, 출장소가 있다. 우리 익산시만 하여도 39개의 지부, 지점, 지소 및 출장소가 있어 서민들의 공과금 납부 및 예금 및 적금, 대출 등 금융서비스를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역할을 충분히 해 주고 있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나로마트를 포함하여 전라북도 내에만 총 643개의 점포가 있으니 그 규모는 실로 방대하다고 할 것이다.

일명 중앙농협이라고 하는 농협은 지금까지 익산중앙지점(중앙동소재)과 영등동 지점이 널리 알려져 있고 이외에도 함열지점과 익산시청 출장소, 영등동 상하수도 사업소 내에 있는 영등동 출장소가 있다. 이상 5개의 지점과 출장소를 관할하는 기구가 익산지부이며 지점과 동일하게 금융업무를 취급하고 있다.

익산시가 영등동과 어양동, 부송동으로 번창하여감에 따라 익산시 지부가 영등1동의 무왕1로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3)하나은행

한국투자금융이 은행업으로 사업 전환한 일반 시중은행이다. 1991년 7월 재무부와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부터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모체인 한국투자금융㈜은 1971년 6월 창립해, 1972년 국내 최초로 단기금융업 허가를 받았으며 1991년 지금의 이름으로 은행업 인가를 취득하였다.

하나은행은 설립 이후 증자(增資)와 외자 유치, 자산운용 등에서 성과를 거두어 우량은행으로 성장하였으며, 1998년 6월 강제 퇴출된 충청은행을 인수하고 1999년 1월 1일 보람은행과 합병하여 새롭게 출발하였다. 2000년 12월 하나알리안츠투자신탁운용㈜을 설립하였다. 2002년 12월 서울은행과 합병하여 자산규모가 86조 원인 은행으로 재탄생하였다. 2003년 2월 하나생명보험을 출범시켰으며 같은 해 10월 중국의 공상은행과 칭다오은행 인수를 위한 본 계약을 체결하였다. 본점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에 있다.

익산에는 2개의 하나은행 지점이 있는데 익산중앙지점은 중앙시장 앞쪽에 위치하며 익산지점은 익산시 최고의 번화가인 무왕1로에 위치하고 있다. 2001년 11월에 설치되었으며 전자랜드와 롯데마트 사이에 있다.

 

(4)외환은행 영등동지점

외국환거래와 무역금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설립된 은행이다. 1967년 1월에 자본금 100억원으로 창립되었으며 1982년 예수금 1조원을 돌파하였다. 1989년 12월 30일로 특수은행에서 일반은행으로 전환되었다. 1997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북한에 금호출장소를 개점하였고 2003년에는 북경, 텐진, 다렌, 상하이에 지점을 개설하였다.

외환은행의 업무는 외국환의 매매, 외화자금의 보유, 운용 기타 외국환거래, 신용장에 관한 업무, 대부어음의 할인, 채무의 보증과 어음의 인수, 예금의 수입(受入), 내국환거래, 외국에 대한 투자 등이다.

우리 익산에는 익산이 1973년에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신흥동에 익산지점이 개설되었고 1997년에 영등1동 제일아파트 앞에 개설되었다가 2003년도에 영등동 838-1번지 영등2동 사무소 앞으로 이전하였다.

 

(5)우리신협 영등지점

신용협동조합은 주거지역 ? 단체 ? 직장 ? 종교 등의 유대관계를 근거로 조직된 신용협동기구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의 신용협동기구는 추진주체에 따라

①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 산하의 <신용협동조합>

②마을금고연합회 산하의 <마을금고>

③농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의 계통조직인 <단위조합>과 어업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상호금융>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구성원에게 경제적인 여·수신을 행하여 조합원 상호간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비영리적 신용협동조직이다.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은 1960년 5월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28명으로 조직된 성가신용협동조합(聖家信用協同組合)이다.

6.25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궁핍해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사회적 혼란기였다. 따라서 저축을 하거나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60년 5월 1일, 부산에서 메리놀 병원 직원과 천주교 교우 27명을 조합원으로 성가신협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신협의 시초이다. 장대익 신부는 같은 해 6월, 서울에서 가톨릭 교인을 대상으로 중앙신협을 설립해 한국 신협의 확산에 불을 당겼다.

그 뒤 1964년 4월 55개의 신용협동조합이 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창설하였고, 이 연합회는 그 해 5월 국제신용협동조합연합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89년 신용협동조합중앙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2년 8월<신용협동조합법>이 제정됨에 따라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은 설립· 출자· 대출한도, 이자율, 예탁금 등 여러 사항에 대하여 규제를 받게 되었다. 1960년 당시 총자산 규모가 8만 7000원에서 1990년 3조 5976억 원으로, 2003년에는 19조 1900억 원으로 늘어났다. 조합수는 1960년 3개에서 1990년에 1315개였고 2007년 현재는 1015개 이다.

익산시에는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산하에 20개의 신용협동조합이 있으며 우리신협 영등지점은 영등1동의 833-1번지 롯데마트 뒤 진등3로에 있다.

 

(6)원광새마을금고 제2분소

이웃간의 서로 돕고 사랑하며 협동하는 우리 고유의 자율적 협동조직인 계, 향약, 두레 등 마을생활의 공동체 정신을 계승하고, 협동조합의 원리에 의한 신용 사업, 공제사업 등의 생활금융과 문화복지후생 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등을 통하여 회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지역공동체의 발전과 국민 경제의 균형발전에 기여하는 금융협동조합이다.

새마을금고의 역사는 향토개발사업의 하나로서 1963년에 경상남도에 설립된 다섯 개의 조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63년 5월 25일 산청군 생초면 하둔리, 5월 26일 창녕군 성산면 월곡리, 6월 3일 의령군 의령면 정암리, 6월 9일 의령면, 외시리, 6월 12일남해군 남해면 마산리에서 새마을금고의 전신이 탄생하였다. 초기의 마을금고 운동은 뚜렷한 이념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명칭도 금고가 아닌 신용조합이었다. 초기 마을금고 설립 주체였던 재건국민운동본부 경상남도지회 요원들이 당시 신용조합의 교육기구였던 협동조합 봉사회의 제3차 신협 지도자 강습회 때 자극을 받고 각자 자기 마을에 돌아가 조합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운동은 급속히 뻗어 나가 1963년 말에 경상남도 지역에서 모두 115개의 조합이 설립되었다. 마을금고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해체된 1975년 12월까지 가장 주된 사업으로 지도, 육성되었다. 1973년 3월에 새마을금고연합회가 창립되고 1983년 1월에는 새마을금고법 제정(법률 제3622호)되어 시행되었다.

2006년 현재 1,579개의 새마을금고가 조직되어 있으며 회원수는 1,540만 명이 넘고 새마을금고자산은 50조원을 이미 돌파하였다.

우리 익산에는 모두 11개의 새마을 금고가 설립되어 있는데 영등동 지역에는 이곳 원광새마을 금고 제2분소밖에 없다. 원광새마을 금고 제2분소는 영등동 747-3번지에 있으며 영등2동 사무소 뒤에 위치하고 있다.

 

(7)한국투자증권

1974년 9월 한국투자신탁(주)으로 설립되어 1982년 7월 본사를 현재의 서울특별시영등포구 여의도동 신축사옥으로 이전하였다. 1984년 3월 제2금융권 최초로 전국 온라인 업무를 개시하고, 1986년 11월 전산 센터를 설치하였다.

1996년 제2금융권 최초로 폰뱅킹서비스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2000년 6월 증권사로 전환, 상호를 한국투자신탁증권(주)으로 변경하였다. 또 투자신탁운용 부문을 분리하여 한국투자신탁운용(주)을 설립하고, 사이버 영업점을 오픈하였다. 2001년 3월 스위스 금융그룹 UBS와 전략적 업무제휴를 체결하였으며, 2003년 6월 현재의 회사명으로 변경하였다. 2005년에 (주)동원증권을 합병하였다.

고객의 저축금을 예탁받아 이를 전문적인 펀드 매니저들이 국내 우량기업들의 채권 및 주식 등에 투자하여 이익금을 투자자에게 되돌려 주는 전문 투자기관으로서 종합증권회사로 성장· 발전하고 있다. 주요 사업은 증권투자신탁, 유가증권 인수 및 매매, 수익증권 저축 등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7-1번지에 있다. 전라북도에는 현재 6개의 영업점이 있는데 익산지점은 무왕1로의 영등동 837-3번지 하나빌딩 3층에 있다.

 

(8)롯데마트

우리 경제가 1997년에 비록 금융위기사태를 맞기는 하였으나 이미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맞이한 상태에서 21세기를 앞두고 대형마트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식품위주의 대형 수퍼마켓이 아니라 거대한 규모의 준 백화점 형태로 거의 모든 물품이 판매되며 유통구조의 합리화를 통하여 신선하고 믿음직한 상품을 제공하고 가격을 인하하여 적어도 중저가 품목을 최저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대형마트는 우리나라 소비시장과 소비형태를 일순간에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롯데마트는 1998년 4월 1일 할인점사업에 뛰어들어 1호점인 강변점을 개점한다. 그 이후 2001년 8월 31일에는 익산 영등동에 제16호점을 개점함으로써 익산의 상권과 소비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개점직후에는 전국 최고의 매출을 기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롯데마트는 2007년 2월 53호 군산점까지 개점한 상태이며 대형마트로 인하여 기존 재래시장과 주변의 일반 소규모 가게들의 매출은 격감하여 영세상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원망을 사고 있으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믿을 수 있는 상품,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고, 다양한 상품을 고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시민들의 주소비시장이 되었다. 대형마트 주변의 상권의 발전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환영하고 있기에 대형마트 거부운동과 재래시장 살리기 운동은 그리 큰 결실을 맺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대형마트는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특히 롯데마트는 신세대가 모여 살고 있는 신 도심지역에 있기 때문에 젊은층의 정서에 맞아 떨어져 큰 호황을 누렸으나 최근 바로 옆에 홈 플러스가 들어섬으로 인하여 경쟁이 치열하게 되었다.

○슬로건 : 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롯데마트

○사시 : 우리 회사의 주인은 고객이십니다.

○비전 : 인간존중ㆍ친환경ㆍ 문화생활을 지향하는 21세기 세계적인 유통기업

 

(9)삼성 테스코 홈 플러스

우리 익산에는 2001년 8월 31일에 최초로 롯데마트가 영등동에 개점하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려왔다.

대형마트로 인하여 기존 재래시장과 주변의 일반 소규모 영세상인들의 매출은 격감하여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많은 원망을 사고 있으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믿을 수 있는 상품과 저렴한 가격, 그리고 다양한 상품을 고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대형마트 주변의 상권의 발전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환영하고 있기에 대형마트 거부운동과 재래시장 살리기 운동은 그리 큰 결실을 맺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대형마트는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홈 플러스는 2007년 10월 현재 전국에 65개의 매장이 개점된 상태이며 놀랍게도 익산점은 2006년 10월에 영등동 831-1번지 롯데마트 바로 옆에 들어서 치열한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다. 이제 같은 시기에 동산동에 개장한 E-마트와 함께 익산시도 대형마트시대가 정착되게 된 것이다.

롯데마트와 홈 플러스가 한 곳에 자리함으로써 영등동, 어양동, 부송동 일대의 신세대 젊은 세대뿐 만 아니라 구도심의 소비자들까지도 이곳을 이용하게 되어 이곳은 익산 최고의 상업지역이 되었다.

 

제2장 영동2동의 전통마을

신성(新成)은 민가가 없었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게 되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와 같이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터라고도 한다. 월성동의 신정마을도 신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신성마을과 긴 다리가 있는 혜교마을을 합쳐서 신교(新橋)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등2동은 자연마

 

[신성마을] [곡영마을]

 

을 세 곳을 빼면 모두가 번화한 도심이며 거의 모든 주민들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크게 발전하고 있는 영등로와 마한로를 오른편에 두고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있음에도 나름대로 자연마을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주 특이하다. 현재 40세대가 살고 있으며 곡영이나 동영에 비해서는 대형 식당들이 여럿 들어서는 등 크게 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곡영(谷永)은 골영등리(谷永登里) 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구릉의 골짜기 안에 형성된 마을이라서 붙여진 명칭이다. 처음에는 골영등이었다가 곡영등으로 변하고 곡영으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영등로와 마한로가 만나는 코너의 언덕배기에 위치하며 34호가 살고 있는데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사는 자연마을의 모습을 동영과 함께 잘 간직하고 있다.

동영(東永)은 동영등리(東永登里)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는 영등리의 동쪽에 형성된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신동에 속하고 있는 서영(西永)은 서영등이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서영부락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는 1919년의 5만분의 1 지도에는 소영등리라고 표기되어 있고 1928년의 북일면지도에는 신리에 속한 마을로 되어있어 서영마을이 곧 서영등 [동영마을] 리(또는 소영등리)이며 원래부터 신리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동영은 영등로와 마한로가 만나는 코너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곡영의 동편에 있는데 현재까지 32호가 살고 있으며 곡영과 마찬가지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사는 자연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제3장 영등2동의 문화유적과 유물

 

제1절 영등동 유적

1. 발굴현황

 

영등동 유적은 현 영등동 산 65-5번지 일대에 분포하는 유적으로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1993년에 발굴된 부송동 유적에 이어 1995년부터 1996년까지 3차에 걸쳐 택지조성지역에서 발굴 조사되어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위치는 제1지구는 현재의 롯데마트부근이고 제2지구는 YMCA부근이며 제3지 [영등공원의 영등동 유적지] 구는 영등공원일대이다. 이를 기념하고 그 자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2007년에 익산탑 부근에 묘자리를 조성하였으므로 익산시민 누구나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4기에 달하는 청동기시대의 집자리가 조사되고, 호남지역 최초로 초기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5기의 주구묘가 확인되어 익산지방 청동기시대의 생활상과 초기 삼국시대의 묘제양상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밖에도 수혈유구 15기, 굴립주건물지 5기와 고려시대 토광묘 1기, 석축묘 2기 등 많은 유구들이 조사되었다.

 

2. 관련유구

 

영등동 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삼국시대에 걸쳐 형성된 많은 유구가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생활유적이고 초기삼국시대의 유적은 무덤유적이다. 이들 두 시기의 유적은 같은 구릉상에 위치하며, 서로 중복되어 있는데 청동기시대의방형이나 원형집자리가 먼저 축조되고 집자리가 폐기된 이후에 주구묘가 조성되고

있는 것을 토층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평면형태에 있어서 장방형, 방형, 원형으로 구분된다. 장방형 집자리는 내부에 노지가 설치되고 벽을 따라 도랑을 친 시설이 있으며 도랑시설 내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주공이 확인되고 있다. 방형과 원형 집자리는 집자리 바닥면 중앙부에 타원형의 구덩이가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이른바 송국리형 집자리이

 

 

다. 이들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시기적으로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기까지 조성되었는데 집자리와의 중복관계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집자리의 평면형태와 츨토유물에

서 차이를 보인다. 전기는 장방형 집자리로 특징지어지고 출토유물로는 가락동식 토기, 구순각목문토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중기는 송국리형 집자리로 특징지어지며 출토유물로는 송국리식 토기인 외반구연토기와 유경식 석검, 삼각형 석도를 표식으로 하고 있다.

집자리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수혈식 유구와 굴립식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이들 유구는 대체로 송국리형 집자리와 인접되어 있고, 출토유물도 송국리형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사하여 같은 시기로 볼 수 있다.

 

3. 출토유물

 

출토유물은 청동기 시대 전기의 특징인 토기와 반월형 석도, 석검, 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송국리식 토기의 외반구연토기가 있어 송국리식 집자리임을 뒷받침한다. 또 토광묘의 남서 끝부분에서 철부1점, 중간부분에서 파손된 철검1점이 수습되었고 주구묘에서 대형 옹관편과 정교하게 제작된 회청색경질토기편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주거지내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게 토기, 석기, 토제품,옥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4. 영등동 유적의 의의

 

익산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 유적으로 영등동 집자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를 통하여 전기와 중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생활하였던 유적이다. 전기에는 주로 장방형 집자리에서 가락동식 토기, 반월형 석도가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중기에는 방형이나 원형의 이른바 송국리형 집자리에서 송국리식 토기와 유경식 석검, 삼각형 석도들이 출토되고 있다.

익산지역 청동기 시대 집자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영등동 집자리 유적은 한반도의 서북지방인 대동강 유역의 장방형 집자리의 전통을 갖춘 유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특징적인 토기유형인 팽이형 토기(가락동식 토기)도 함께 출토되고 있어 이지역과의 깊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영등동 집자리 유적의 연대는 대략 기원전 1,000~800년으로 보고 있다.

금강하류의 충적평야에 발달한 농경지를 확보한 익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주민들의 주거환경은 대부분 해발 10m 내외의 낮은 구릉위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주거유적이 익산지역 영등동과 부송동 집자리 유적이며 이외에 인접지역인 전주 여의동, 완주 반교리 집자리 유적 등의 여러 유적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낮은 구릉인 충적평야 평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들로서 도작농경의 확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익산 영등동 집자리 유적은 저지대의 발굴성과가 없어 농업생산 유적이 발굴된 경우는 드물지만, 영등동 집자리 유적의 동쪽의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에서 저습지가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 무문토기 수편이 발견되어 어쩌면 당시의 경작농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그러나 영등동 집자리 유적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송동 집자리 유적에서 볍씨자국의 토기가 출토되어 이런 유형의 지대는 도작농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익산지역에 농경이 이루어졌을 만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이밖에 농경이나 수확관련 석기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양의 석촉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수렵생활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영등동 집자리 유적에서는 적지 않은 어망추가 출토되고 있어 어로생활도 겸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석재 방추차(가락바퀴)와 토제 방추차가 출토되고 있어 방직물을 제작하여 의류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제4장 명승지

 

제5장 민속과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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