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iphon Interview
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
“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지요”
김명기 시인
*인터뷰: 김정수(시인, 사이펀 편집위원)|사진: 이성수(시인)
계간 《사이펀》 ‘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는 2022년이 시작되자마자 세 번째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를 낸 김명기 시인을 만났다. 2005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한 김명기 시인은 오래 객지를 떠돌다 10여 년 전 고향 울진에 정착한 뒤, 중장비 기사에서 유기동물 구조사의 경험을 시로 써 주목을 받고 있다. 김정남 문학평론가는 “김명기 시인은 한없이 낮고 고적한 목소리로 ‘아득하니 외진 생’을 건져 올리기 위해, 낮고 누추한 곳에 끊임없이 깊은 시선을 던져왔다”면서 “그의 시작詩作은 차라리 하나의 거친 노동“이라고 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울진으로 찾아가 시인을 만났다.
김정수 기분 좋게 봄 꽃길을 달려왔어야 하는데, 불탄 집들과 산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번 산불로 피해는 없는지요.
김명기 살다가 이런 재난은 처음입니다. 물론 인생의 대부분을 7번 국도변 영동지역에서 살았으므로 산불은 익숙한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 시작한 이번 산불은 장장 아흐레 동안 타올랐어요, 경북 울진군 북면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계 지역이지요. 강풍이 불기도 했지만, 산불이 하루 만에 강원도 삼척시로 번진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집을 포기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두 번 정도 있었지만, 소방헬기와 몸을 사리지 않았던 소방관들 덕분에 기적처럼 집을 살렸습니다.
김정수 화재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죠. 승용차 몇 대 지나간 뒤 불이 나 담배꽁초에 의한 화재가 아니냐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화재가 진압되고 SNS에 누가 소방헬기를 몰았는지 모르지만 정말 고맙다고 올린 것을 봤어요.
김명기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불이 집 뒤까지 왔을 때 포기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머리 위로 소방헬기 두 대가 지나갔어요. 그런데 그중 한 대가 되돌아와 집 뒤에 물을 뿌렸지요. 덕분에 집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집 주변은 온통 잿더미였습니다. 마치 불이 ‘뫼비우스 띠’ 같았습니다. 며칠 동안 돌고 돌아 최초 발화지점인 건너편 산으로 돌아왔는데, 인간의 작은 실수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실감했습니다.
김정수 그때 비가 좀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김명기 큰불이 잡히고 한 열흘째 되던 날 새벽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난생 그렇게 반가운 비는 처음이었지요. 이틀 동안 내린 비로 산불은 완전히 진화됐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보이는 사방이 온통 잿더미였고, 매일 지나다니는 읍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지요. 끔찍한 10여 일을 보냈습니다. 앞으로 저 넓은 산의 복원이라는 더 큰 문제와 불로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기약 없는 날만 남은 셈이지요.
김정수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루빨리 일상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2005년 계간 《시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김명기 1980년대 끝자락의 대학은 늘 전쟁터였습니다. 날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학교를 뒤덮었지요. 1988년 가을 최루탄을 피해 선배의 자취방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방 책상 위에 작은 시집 한 권이 놓여 있었어요.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김수영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이었습니다. 김수영 20주기를 맞아 백낙청 교수가 엮은 시선집이었지요. 무작정 시집을 펼쳤을 때 처음으로 본 시가 「거대한 뿌리」였습니다. 김수영이 누군지도 모를 때였습니다. 충격적이었지요. 그 길로 서점으로 가 그 시집을 사서 며칠 동안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렴풋하게 내가 시를 쓰게 될 거란 걸 느꼈지요. 그렇게 전공을 작파한 채 혼자 시집을 읽고 시를 썼습니다.
김정수 그 시절에 대학에 다녀 그 분위기 잘 압니다. 생각해보니 나와 비슷한 시기에 시를 쓰기 시작했네요. 처음 읽은 시 「거대한 뿌리」면, 본의 아니게 김수영 시인의 영향을 받은 셈이네요. 시를 처음 쓰고 등단까지 한 10년 걸렸나요.
김명기 대학 졸업과 동시에 밥벌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지금처럼 대학 진학을 많이 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또 장자였으므로 그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7~8년 정도 시와 먼 삶을 살았고, 돌아가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서른을 넘기던 무렵부터 건강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의 병이 깊었습니다. 우울과 기피가 반복되었지요. 그때 다시 나를 위로해준 게 시였습니다. 다시 시를 읽고 썼지요.
김정수 시를 쓰면서 많이 위로받지요. 김정남 평론가는 첫 시집 추천사에서 ‘대학에서 만들어진 레디메이드 시인이 아니’라 ‘거친 생과 맞짱 떠온 강자’라고 했습니다.
김명기 혼자 고독하게 시를 썼습니다. 거친 삶을 살았고, 그것을 시로 썼지요. 다시 시를 쓰면서 어느 정도 실력이 올라왔다 생각한 시점부터 문학잡지 여러 곳에 투고를 했지만, 번번이 떨어지거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시평》에서 원고청탁이 왔습니다. 그때가 2005년 가을이었습니다. 《시평》은 시인의 유명세와 상관없이 작품이 마음에 들면 청탁을 했던 잡지입니다. 2003년부터 강원작가회의 기관지인 《강원작가》에 시 몇 편을 발표했는데 아마 그 시들이 어떻게 연이 닿았을 거란 추측만 할 뿐입니다.
김정수 그러면 《강원작가》로 등단한 것 아닌가요.
김명기 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연한 기회로 《강원작가》에 몇 작품 발표한 걸 가지고 등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건 당시 《시평》도 마찬가지였고요. 그해 겨울과 다음 해 봄에 문학잡지 두 곳에서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강원작가》도, 《시평》도 등단이라고 하기가 좀 애매해 여러 곳에 투고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첫 시집의 프로필을 보면 좀 복잡합니다. 《시평》은 청탁이 와서 작품을 발표했고, 두 잡지에서는 신인상과 고료를 받으며 등단했는데 모른 척하기가 좀 미안했습니다. 첫 시집의 프로필에 이런 상황을 다 썼습니다. 첫 시집이 나오고 《시평》에서 산문 청탁이 왔습니다. 그때도 첫 시집의 프로필을 써서 보냈는데 《시평》에서 그 프로필 대신 첫 발표 지면이었던 《시평》을 등단지로 써버렸습니다. 그렇게 자연히 《시평》이 등단지로 정리가 되었지요. 등단이 애매한 상황에서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시평》은 아쉽게도 몇 해 전에 폐간되었습니다.
김정수 프로필에서 빠진 두 잡지 입장에서는 좀 서운할 수도 있겠네요. 이제 첫 시집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첫 시집 제목이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문학의전당, 2009)입니다. 북평과 체 게바라! 잘 매치가 안 됩니다.
김명기 북평장은 강원도 동해시의 오래된 오일장입니다. 원래는 우시장이었던 곳이죠. 장날은 그 동네의 장삼이사들이 모여 시끌벅적합니다. 세상의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가치를 흥정하는 곳이죠. 그런데 우연히 어느 장날 옷 파는 노점에서 체 게바라가 염색된 티셔츠를 발견했습니다. 체 게바라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 바로 그런 장삼이사들의 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 티셔츠를 사면서 생각했던 것을 시로 썼지요. 그게 표제시가 된 첫 시집입니다.
삼복 처서 다 지나 미쳐 달아오른 날, 묵밥집 앞을 지나다 보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강단 없이 쓰러진 장(場)판 한 귀퉁이, 낡은 철제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랜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얼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여인이 가르쳐준 그의 이름은 만 오천 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 위로 몇 방울 땀들이 또옥 똑 떨어져 눈물처럼 번져가는 뜨끈한 오후, 날염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지작댔다. 나의 호주머니는 곤궁했으므로……,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봉지 아가리를 벌려 그를 포개 넣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새 이름을 나지막이 말해주었다. 만 이천 원이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거대한 마트에 짓눌려 몰락한 오일장 판에서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였다. 식은 밥 덩어리인 나와 꼭 같은 서른아홉이 그의 생물학적 수명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전문
김정수 첫 시집 이력을 보면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강원도 태백에서 성장했다고 돼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게 쉬운 것은 아닐 텐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명기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어머니 두 분 다 울진 토박이입니다. 아버지가 베트남에 참전했다가 제대 후 태백에 땅을 산 후 그곳에 정착했지요. 아버지는 광산에서 청원경찰 조장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외갓집에서 태어난 것이고요. 엄마가 친정에 가서 나를 낳고 몸조리를 한 것입니다. 태어난 곳은 울진이고 자란 곳은 태백인 셈이지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 강원도 삼척군에서 강원도 태백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땅을 사둔 곳이 태백시청부지로 낙점되었지요. 그때부터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투기와 같은 고랭지 배추사업에 손을 댔는데, 남들은 몇 해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대박을 연달아 터뜨렸지요. 그리고 건축업과 중장비업까지 손대는 것마다 운이 따랐습니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에 입학할 무렵까지 승승장구했지만, 마지막에 올인한 광산업에서 석탄산업 합리화라는 국가의 정책으로 모든 걸 잃었습니다. 다행히 빚은 없었어요. 그냥 당신이 번 것 전부를 광산에 쏟아붓고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망해버렸지요. 태백은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애증의 도시입니다.
김정수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다 집으로 돌아온 배경에 아버지가 있다면서요.
김명기 아버지는 자수성가형 인물이지요.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중 장자였고,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다녀왔습니다. 그 돈이 결국 종잣돈이 되어 큰 부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오지에 집 한 채와 약간의 땅을 남기고 돌아가셨지요. 당신이 벌고 당신이 다 털어먹었지만 그건 아버지의 힘으로 이루었던 일이니, 빚이 아니라 이 집 한 채 남겨 놓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생전, 부자 관계는 불화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버지는 내가 못마땅했지요. 자수성가형 인물이 가지는 독선과 고집이 아버지에게도 있었습니다.
김정수 세 번째 시집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2022)에 수록된 「큰사람」의 아버지는 ‘볼 때마다 통박’을 줬다는 구절이 생각나네요. 아버지와의 특별한 불화의 계기가 있나요.
김명기 장자로서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가장 크겠지요. 중학교를 정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아버지와 내가 서로 행복했던 시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였어요. 싸우고 또 싸웠지요. 중학교 때까지는 비교적 작고 약했지만,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폭풍 성장을 했습니다. 거의 30센티미터나 컸어요.
김정수 와 그러면 일 년에 10센티미터씩 큰 셈이네요. 키 작았을 때 괴롭히던 친구들보다 덩치가 더 커졌잖아요.
김명기 몸집이 커지고 힘이 붙기 시작하고, 또 힘센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점점 겁이 없어졌어요. 나는 싸우고 엄마는 아버지 몰래 합의를 보러 다녔습니다. 결석과 유기정학, 무기정학으로 3년을 보냈지요. 어떻게 졸업했는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고3 여름 무렵 정신이 돌아왔어요. 한데 공부와 대학은 너무 먼 곳에 있었습니다. 학력고사가 채 넉 달이 안 남았으니…. 영어와 수학을 포기하고 암기과목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한 시기입니다. 그 덕분에 겨우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지방대학이라도 먼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결국 아버지의 반대로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갔습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이과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그렇게 간 대학이 흥미로울 리가 없잖아요. 더구나 난 문과를 나왔는데(이과를 나와도 별 차이는 없었겠지만) 공대를 다녔습니다. 지긋지긋한 수식과 역학들….
김정수 아버지가 장남을 곁에 두고 싶으셨나 봅니다. 아버지들은 잘 표현을 안 하잖아요.
김명기 대학 졸업 후에도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뭔 소리인지도 모를 시나 쓰고, 몇 년씩 연락을 끊은 채 바다를 떠돌고, 결혼생활도 실패한 아들이 아버지는 영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이 집은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같은 것입니다. 모든 걸 다 잃고 고향에 돌아와 그래도 터 좋은 곳을 골라 손수 지은 집이니까요. 그 집에서 10년을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결국 부자는 화해하지 못했지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집에 왔는데, 아무런 노동력도 없고 몸 약한 엄마가 홀로 늙어 갈 거란 생각에 도저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남겨 놓은 마지막 유산에 무임승차했습니다.
김정수 몇 년간 원양어선을 탄 것으로 압니다. 부모 입장에서 험한 바다에 나간 아들이 많이 걱정됐을 거예요.
김명기 정확히 말하면 킹크랩잡이 통발선과 그것을 운반하는 운반선을 탔습니다. 배에서 나의 신분은 선원이 아닌 패신저(passenger)였어요. 이걸 그냥 승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영어의 중의적 뜻으로는 방해자 혹은 조직 내의 무능한 자 그러니까 ‘왕따’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선에 승객이 왜 필요하겠는가. 내가 맡은 일은 화주 대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킹크랩 수입사의 파견 감독이지요. 배는 항구를 떠나 돌아오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됩니다. 바다에 오래 머물수록 지출경비가 늘어나지요. 그리고 한 항차당 계약된 물량이 수십 톤입니다. 그것의 상품 가치를 판단하고 이른 시일 안에 물량을 채우는 일을 감시하기 위해 수입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배를 탄 것입니다. 이 감독이 무능하면 정말 왕따가 되거나 방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능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거칠고 거친 북태평양의 집채만 한 파도 속에서 세 번의 겨울을 났으니 무능하거나 왕따는 아니었습니다.
김정수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어머니가 맘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어머니가 두 번째 시집 추천사를 쓰셨더라고요. ‘아들이 쓰는 시 속에 내 피가 흐른다는 생각’을 하신다고 했고요.
김명기 내가 가지고 있는 예인의 재능은 외가의 혈통에서 받은 것 같습니다. 친가는 아버지를 포함해 그렇게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겨우 한글 정도만 깨우친 사람들입니다. 그나마 고모들은 딸이란 이유로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문맹들이었고요. 거기에 비해 외가는 근동에서 천석꾼 정도는 되는 집안이었고, 독자였던 외할아버지는 와세다대학을 다닌 인텔리였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엄마의 고모들도 여고보를 다녔을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고, 가무와 그림에 능했습니다. 물론 엄마도 아버지보다 훨씬 고학력자입니다. 집에 있는 옛날 사진 중에 외할아버지가 장구춤을 추는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재능을, 나는 그 재능을 엄마로부터 받은 것 같습니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음악과 미술 사진 등을 모두 전문가 수준으로 독학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형제의 예능적 재능의 원천이 외가이고, 그 DNA를 엄마에게서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엄마의 추천사도 그런 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도, 엄마도 오래된 시골집에서 함께 늙어가는 중입니다. 이제는 종종 시에 등장하는 주요소재가 되었지요. 아마 엄마가 세상을 떠나도 나는 그것을 우려먹을 것입니다.
김정수 천석꾼 집안의 배운 딸과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만나 결혼한 셈이네요.
김명기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참전 후 태백에 땅을 산 후 길에서 우연히 엄마를 봤다고 합니다. 그후 아버지가 선을 주선해 두 분이 만났고요. 엄마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가 키도 크고 너무 잘 생겨 빠졌다고 하더라고요.
김정수 키도 크고 잘생긴 것 보니 아버지를 닮은 것 같네요. 이제 두 번째 시집 『종점식당』(애지, 2017)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시집 맨 앞에 수록된 시가 「팽목」입니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8년입니다.
김명기 세월호 참사가 나고 2년 정도 팽목항에 갈 엄두를 못 냈습니다. 나는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경험해본 사람이잖아요. 아이들이 가라앉는 배의 창에 매달려 끝내 바닷속으로 사라지던 장면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어떤 신문사에서 기고 청탁이 왔지만 거절했어요. 가보지 않고 쓸 수도, 가볼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호 선체를 인양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쯤 어느 저녁 무작정 팽목항으로 향했습니다. 집에서 팽목항까지 600킬로미터가 조금 넘습니다.
김정수 세월호 참사가 나고 주말 저녁마다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지요. 내 자식 같아서요. 참사 한 달 후쯤 「세월의 바다」라는 시를 써 두 번째 시집에 넣었지요. 광화문광장에서 여러 번 조문하고, 팽목항에는 아직도 못 가봤습니다. 한동안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달고 다녔지요.
김명기 울진에서 단숨에 달려간 팽목항에는 노란 리본들로 가득 찼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 사진을 보는데, 정말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어쩌자고 이 어린것들을 그 무서운 바다에 팽개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인지 분노했지만, 시를 분노로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두 번째 시집 『종점식당』이 2017년 3월 말쯤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는 시를 「팽목」으로 정했고, 또 ‘애지시선’의 표지 문양도 노란색으로 정했습니다. 그 후 1년에 한두 번쯤 팽목항과 세월호가 있는 목포신항을 다녀왔습니다. 얼마 전에 갔을 때는 세월호 참사 기억관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언제 완공되는지 모르겠지만 별일 없으면 매년 갈 생각입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밤새 달려와 첫 끼를 먹는다 살아야겠다는 본능은 얼마나 갸륵한가 펄럭이는 창밖 주검의 표식들 앞에서 마주 대한 밥 누구는 천일 동안 젖은 눈물에 말아 먹고 누구는 천 일 동안 젖은 채 그리웠을 지상의 따뜻한 밥 한 그릇 생사를 가르는 경계 같은 한 덩이 밥 놓고 갸륵한 본능 뒤에 감춘 목숨은 이렇게 무참하다 뜨거운 국물을 넘기며 뱉어내는 생선가시들이 산자를 향해 쏟아내는 뾰족한 말 같다 실낱처럼 내리는 빗속 방파제 끝 누군가 무릎을 꿇는다 고개를 돌려도 숨길 재주 없는 슬픔 코끝 시리고 눈가가 뜨끈해진다 명치 끝에 걸리는 밥 한술 뜨러 밤새 달려왔나 이게 다 이놈의 밥 때문이지 싶어 상을 물리고 나섰는데 방파제 끝에 걸린 한 문장 “따뜻한 밥해서 같이 먹고 싶다”이 기가 막힌 문장 앞에 누군들 무릎을 꿇지 않으랴
-「팽목」 전문
김정수 두 번째 시집 이후 약 5년 만에 세 번째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를 냈습니다. 유기동물 구조사로 활동하면서 쓴 시가 많은데요.
김명기 내가 개들을 구조하고 살리는 일을 했다면, 개들은 내 시집을 살려준 셈입니다. 2부 13편이 유기동물 보호소의 이야기지요. 총 55편 중 13편이 없었다면 이번 시집은 기약 없이 아직도 헤매고 있을지 모릅니다. 출판사와 계약 기간을 1년이나 넘겨 나온 시집입니다. 대체로 사람이 일상의 영역에서 인지하는 목숨은 자기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 무수히 많습니다. 특히 내가 사는 시골은 종종 산짐승들과 마주치기도 하지요. 그중에서도 사람과 밀접한 생명은 개와 고양입니다. 고양이는 이미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냥 고양이들의 영역에서 위험에 처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요.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을 하고 있지만, 결국 예산의 문제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개는 정말 사람에 의해서 학대받거나 버려지고 방치되지요. 바꾸어 말하면 개는 사람에 의해 통제가 가능합니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은 개에게도 상처가 됩니다
김정수 「유기동물 보호소」라는 시에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 개가 일제히 짖는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몇 마리나 구조했나요.
김명기 유기동물 구조사로 근무하는 동안 약 600마리쯤 개를 구조했습니다. 버려지고 학대당하고 병든 개들을 보면서 마음에 두었던 말들을 틈틈이 꺼내 시를 썼지요. 문학도 일종의 기록물 아닌가요. 한 시대의 미시적 기록물 말입니다. 사실은 일을 더 할 수도 있었지만, 재계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프고 처절한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정수 「리기다소나무 아래에서」라는 시를 보면 ‘말뿐인 인도주의 안락사 순번이 다가’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껏 구조했는데 안락사라니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두면 더 오래 사는 것 아닌가요.
김명기 구조를 하면 일차적으로 씻기고 아픈 곳을 치유합니다. 그런 다음 입양할 사람들을 알아보죠. 보호소는 수용 한계가 있습니다. 더이상 수용할 수 없으면 결국 안락사를 시키죠. 보호하기 위해 구조했는데 결국 죽음으로 이끈 셈이라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 인도주의는 명분일 뿐이지요. 이율배반적이죠.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이 일을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죽은 개를 거두고 돌아와
소주 한 대접 마시고 잠들고 싶은 밤
길거리에는 수 없는 불길함이 돌아다니고
사는 게 왜 이런가 생각하다가
사는 건 늘 그랬지, 혼자 중얼거린다
밑동까지 베어낸 대추나무에서
새순이 자라듯 버려진 개를
거두어들인 거리에는
날마다 새로운 개들이 버려진다
감당할 수 없는 버림에 대한
보호소 준칙은
괄호 속 짤막한 지문 같은 한 줄
(인도주의적 안락사)
버려진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이
어떻게 인도주의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개 몇 마리가 영문도 모른 채
인도주의적으로 죽었다
차디찬 냉동고에 주검으로 구겨 넣고
인도주의자들은 아무런 일 없다는 듯 흩어졌다
오래전 사라진 익명의 사람들이
자기 몸을 제물로 쓰고 남기고 간 우리처럼
개도 그렇게 살아가라고 태어난 목숨인데
갈색 속눈썹 긴 개가 미동 없이 눈 감을 때
채 식지 않은 몸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인도주의
어떤 날은 견사에 갇힌 개들을 다 풀어 주고
목줄을 맨 내가 갇혀 있는 인도주의적인 꿈을 꾸기도 한다
-「인도주이적 안락사」 전문
김정수 경기도 부천의 한 도축장에서도 일했잖아요. 도축장은 생명을 죽이고, 유기동물 보호소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물론 안락사는 죽이는 것이지만요.
김명기 도축장에서의 일은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었습니다. 내가 한 밥벌이 중 가장 지독한 일이었지요, 힘든 노동력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일하는 내내 겉에 입고 있는 우의가 피로 물들었습니다. 날마다 몸에 피를 뒤집어쓴다고 생각해보세요. 냄새는 정말 숨 막힐 정도로 지독했지요. 배를 타면서 제때 치료받지 못해 후각을 망쳤는데, 도축장에서 일하면서 후각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나중에는 차라리 그 지독한 냄새를 못 맡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김정수 그때의 경험을 쓴 「봄날은 안녕하다」(두 번째 시집)에서 ‘목 떨어지고 다리 잘린, 속내까지 다 파헤쳐진/ 핏빛 축생의 응고되지 않은 주검’이라 했지요.
김명기 그때의 시는 삶과 죽음보다 노동에 초점을 두었지요. 반면 유기동물 구조사는 버리진 생명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생명의 간절함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문학의 근원 혹은 원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단순히 밥을 벌던 것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생명을 살리는 쪽에 선다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김정수 시인의 삶도 중요하지만 생존도 중요하잖아요. 유기동물 구조사를 그만두었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김명기 뭔가 계획을 세우고 살지는 않습니다. 계획대로 살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요. 그냥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성실하게 사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습니다.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나는 또 그 속에서 시를 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태껏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정수 꾸준히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쓴 시 중에서 대표작이랄까, 애착이 가는 시가 있을까요.
김명기 첫 시집에서는 표제작인 「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이고, 두 번째 시집에서는 「팽목」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시집에서는 유기동물 보호소가 배경인 2부의 모든 시가 애착이 갑니다. 요즘도 길거리에서 버려진 개를 보면 한참 동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지켜봅니다. 그리고 두 마리를 직접 구조해 보호소에 넘긴 적도 있고요.
김정수 대표작이 많아진 셈이네요(웃음). 요즘 건강을 위해 많이 걷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명기 생존을 위해 많이 걷고 있습니다. 4개월 동안 1,000킬로미터 이상을 걸었으니 적은 거리는 아니지요. 매일 10~20킬로미터를 걷습니다. 그 덕분인지 수치상으로 모든 것이 좋아졌습니다. 혈압과 당의 수치가 정상범위로 돌아왔지요. 그러나 100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는 요지부동입니다. 많이 걷고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두 자릿수로 몸무게를 줄이는 게 목표입니다. 내게 제일 안전하고 적당한 운동이 걷기인 것 같은데, 이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습니다. 어쩌다 하루를 쉬면 그다음 날은 두 배 더 걷습니다.
김정수 건강을 위해 걷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세 번째 시집을 내고 독자들과 종종 만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명기 독자는 늘 그곳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처럼 대중성 없고 유명하지 않은 시인의 시집을 기다리고 사서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좀 더 좋은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가 어떤 시인지 나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 시를 읽고 작은 위안이라도 받았다면 나도 독자도 좋은 인연이라 생각하지요. 언제까지 시를 쓰고 시집을 묶을지 알 수는 없지만, 독자들이 그곳에 있는 한 나는 더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김정수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명기 어쩌다 보니 시를 쓴 지 20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비록 3권의 시집밖에 못 냈지만 내가 가진 능력 이상의 운이 따랐습니다. 제대로 된 시집 한 권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3권의 시집을 묶어준 출판사들이 있어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지요. 그것에 대한 사회적 책무도 있다고 봅니다. 나 역시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를 쓰는 이유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을 늘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지요.
울진으로 가면서 “엄마의 꽃밭”(이하 「사양斜陽」)을 보고 싶었습니다. “상추며 실파며 무 대신”에 “더 이상 늙기 싫은 당신의 속내” 같은 꽃밭. 하지만 화마가 휩쓸고 간 뒤인지라 말을 꺼낼 엄두도, 그럴 염치도 없었습니다.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지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참 염치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울진 금강소나무길과 동해안을 걷는 시인의 부끄럽지 않은 삶을 통해 염치를 좀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치 좋은 동해 바닷가 카페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죽변항 횟집에서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진솔한 이야기는 다음 날 불영사 가는 길에서 나누었고요. “고요가 다른 고요를 깨”우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화재 때 불영사에 있던 보물 영산회상도와 불연, 시도유형문화재인 신중탱화를 긴급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옮겼다가 돌아왔습니다. 조금 일찍 갔더라면 보지 못할 뻔 했습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많은 생명이 죽었습니다. 삶은 업業을 쌓는 일입니다. 전생에서 한 행위에 의해 이생의 삶이 결정되듯, 이생에서 한 행위에 의해 내세가 결정되지요.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 “더 이상 낡을 줄 모르”는 속세로 돌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