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李瀷,1681-1763)묘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여주(驪州) 자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 1681년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나 그 이듬해인 선영이 있는 안산으로 와 평생을 안산에서 머물렸다. 숙종 31년(170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 낙방하였다. 이듬해 형 잠(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뜻을 버리고 낙향,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처음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이이(李珥)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지리 ·율산(律算) ·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으며,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으며 그의 학풍은 그후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그의 주요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重農思想)에 입각하여 전제(田制)개혁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田主)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限田論)에서 찾았으며, 노비신분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것 등을 주장하는 한편 당쟁의 발생은 이해(利害)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이론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제(貢擧制)를 아울러 실시할 것 등도 제시하였다. 영조 3년(1727)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763년 83세의 고령에 이르자 나라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에 죽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은 직계 후학들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 초서(草書)에 능했으며 저서에는 앞에 든 것 외에도 《성호집(星湖集)》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사서삼경》 《근사록(近史錄)》 등이 있고, 편저에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 《자복편(自卜編)》 《관물편(觀物編)》 《백언해(百諺解)》 등이 있다.
▣안탄대(安坦大?-?)묘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615-1 중종의 장인 제14대 선조의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 안탄대 선생의 묘이다. 안탄대 선생의 딸인 창빈안씨(昌賓安氏)는 중종2년(1507)에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2남 1녀를 출산하였으니 장남은 영양군이고 차남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되며 딸은 정신옹주이다. 따라서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이며 선조 이후 역대 16대 왕은 창빈안씨의 혈손이 된 안탄대 선생의 외손으로 계승되게 되었다. 안탄대 선생은 생존시 종7품인 적순부위(조선때 무관의 종7품 벼슬)를 지냈으며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검소와 겸손으로써 생애를 마쳤으며 사후에는 조정에서 우의정으로 추서되었다. 안탄대 선생은 집안이 몹시 가난한데도 자기분수에 맞지않는 일에는 결코 눈을 돌리는 일이 없었으며, 성품이 매우 순하고 부드러워서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안공은 딸이 빈이 된 다음부터는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고 근신하였다. (嬪:정일품 내명부(內命婦)의 일컬음) 그저 잘못되었다고만 사과할 뿐 한번도 울분하여 성미를 돋구는 일이 없었다. 창빈이 아들을 낳은 후에는 문밖 출입을 삼가하였는데 그것은 처신에 더욱조심함이요, 왕자의 외가됨이 송구스러워서였다. 그의 묘비문에 따르면 효종왕 때 왕명으로 비문을 지으면서도 안산안씨 만을 밝히고 그의 선조와 가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의 자나 호를 알길이 없고출생일과 사망일조차 전하지 않는다. 풍해군 이잠의 묘가 있다.
▣한응인(韓應寅,1554-1614)묘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18-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청주(淸州) 시호 충정(忠靖) 자 춘경(春卿) 호 백졸재(百拙齋) 유촌(柳村) 부사직(副司直) 경남(敬男)의 아들. 선조 9년(157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다음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 예조좌랑 병조좌랑 지평(持平)을 지내고,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88년 신천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적발하여 고변(告變), 그 공으로 호조참의에 오르고 승지를 역임하였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정여립 사건을 고변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각각 책록되었다. 1591년 예조판서가 되어 진주사로 재차 명(明)나라에 가서 이듬해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순찰사(八道都巡察使)가 되어 랴오둥에 가서 명나라 원군(援軍)의 출병을 요청하고,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李如松)을 맞았다. 이듬해 청평군(請平君)에 봉해지고, 서울이 수복되자 호조판서가 되었다. 1595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8년 우찬성에 승진, 1605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1607년 우의정에 올랐다. 1608년 선조로부터 유교7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광해군 5년(1613)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관작이 삭탈 당하였다가 후에 신원되었다.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문집에 《백졸재유고》가 있다.
▣강징(姜砒,1466-1536)묘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16-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진주(晋州) 자 언심(彦深) 성종 25년(1494)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전한 부제학 등을 거쳐 승지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수렵(狩獵)을 삼갈 것을 간하였다가 낙안(樂安)으로 유배되었으며, 1506년에는 복세암(福世庵)의 이건(移建)을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이 해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중종 3년(1508) 형조참판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후 전주부윤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에 능하여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작품에 <정익혜공난종신도비(鄭翼惠公蘭宗 神道碑)> <예조참의최한정비(禮曹參議崔漢禎碑)>가 있다.
▣김여물(金汝杖,1548-1592)장군묘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 조선 중기의 충신. 본관 순천(順天) 시호 장의(壯毅) 자 사수(士秀) 호 피구자(披 子) 외암(畏菴)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류( )의 부친이다. 받으면서 보답 어렸을 때부터 병서(兵書)에 밝아 20세(156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호조(戶曹) 예조(禮曺) 병조(兵曹) 등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전되고 충주군사(忠州郡事)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1)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으로 충주(忠州)의 방어를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우리 군사가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安山)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신점(申點,1530-?)묘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 산9-2 조선 중기의 문신 서예가 본관 평산(平山) 시호 충경(忠景) 자 성여(聖與) 호 척재(齋) 순미(順美)의 아들 명종 19년(1564) 문과(文科)급제, 예조좌랑(禮曺佐郞) 등을 지내고 상례(喪禮)에 있어서 대상(大祥)후의 입제(笠制)에 백립(百笠)을 통용하도록 하였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힘썼다. 귀국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형조,병조,예조판서 등을 역임한후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判中樞府事兼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 평성부원군(坪城府院君)에 추증
▣홍명원선생묘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7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남양(南陽) 자 낙부(樂夫) 호 해봉(海峯) 진사(進士) 영필(永弼)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선조 33년 검열(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와 사서(司書)·수찬(修撰)·헌납(獻納)이 되었으나 권신(權臣)들을 탄핵하던 끝에 미움을 사서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되었다. 선조 36년(1603) 예조정랑(禮曺正郞)으로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을 겸했고, 그 후 죽주부사(竹州府事)로 죽주산성(竹州山城)을 쌓고 돌아와 수찬(修撰)·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장령 등을 역임했으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좌승지(左承旨)를 역임했으며,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 끝에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광해군 7년(1615)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인 해곡(海谷)으로 돌아갔다. 광해군 14년(1622) 광해군 초 후금(後金)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 관계가 미묘해지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했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특히 한대(漢代)의 문장과 당대(唐代)의 시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해봉집(海峯集)》을 남겼다.
▣최정걸(崔挺傑)장군묘 안산시 상록구 사동 산92 산우물 본관 양주(楊州) 시호 충장(忠壯) 시조 억(億)의 12세손이다. 조선인조 15년(1637)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추증(追贈)받았으며 충절공신(忠節功臣)이다. 최정걸 장군은 등무과 출신으로 절충장군 (折衝將軍) 까지 지낸 후 귀향(안산시 사동 감자골)하여 효양우애(孝養友愛)하고 있던 중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 (播遷) 하심을 알고, 장군은 50세의 나이로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으로 달려가니 조정은 주화파(主和派)가 득세하여 바야흐로 국치를 당할 판국이었다. 장군은 적진으로 단신 출격하여 적의 머리 칠급(七級)을 베어 인조어전에 바치니 인조는 크게 감동하고 그 충용을 포상하여 어주(御酒)를 내렸다. 그러나 조정은 강대한 호세(胡勢)에 눌려 치욕적인 강화(講和)로 기우니 장군은 이튿날 다시 적의 대군 중으로 돌진하여 분전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인조 14년(1636) 12월 29일)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장군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을 추증하고 향리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후히 장사지내게 하고 정문(旌門)을 내리며 사패(賜牌), 봉록(俸錄)하였다.
▣정언벽묘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나주(羅州) 자 계홍(季弘) 관찰사 호선(好善)의 아들이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5대 조부이다. 인조22년(1644)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내고 예문관봉교겸 세자시강원설서(藝文館奉敎兼世子侍講院設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헌납 때 왕자 징(徵)의 죄가 논의되자 이를 변호하여 무사케 하였다.
▣최혼(崔渾)묘 안산시 상록구 사동 83-8 양주 최씨(楊州崔氏)의 중시조(中始祖) 독선당(獨善堂) 혼(渾 9世)이 연산군 5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해 父인 자준(自濬), 祖父인 담(潭)를 모시고 현 안산시 사동 감자골로 입향(入鄕)한 이래 이곳에서 별세한 6대 13기(27명)의 무덤과 시조로부터 상계(6世가지) 7명의 제단이 보존되어 있는 안산시 소재 최대 규모의 묘역이다. 서기 1500년대 초 감자골로 입향(入鄕)한 양주최씨(楊州崔氏)는 7, 8, 9世(獨善堂:혼渾)의 후손 두 계파가 490여년 동안 28世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매년 10월 1일 이곳 묘역에서 시향제(時享祭)를 지냄으로서 전통적 유교식집성촌의 법도를 지켜왔는바 1976년 이래 반월공단 신도시개발로 광대했던 묘역의 상당 지역이 당국에 의해 수용(收用), 삭실(削失)되었다. 양주 최씨(楊州崔氏)의 시조 억(億)은 고려때 태사(太師)로 천거되어 공민왕 2년(1352)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한 문경공(文敬公)으로 양주군으로 봉작 되었으며, 2世 연(淵)은 판도판서(判圖判書), 3世 숙(淑)은 병조전서(兵曹典書), 4世 경운(慶雲)은 공조전서(工曹典書), 5世 항(沆)은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고, 6世 정안(井安)은 우정언부사직(右正言副司直)을 역임했고, 정연(井涓)은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냈는바 이들 일곱분은 선영제단에 비(碑)를 세웠으며 안산 감자골로 입향하였으며 정걸(挺傑)은 절충장군(折衝將軍), 병자호란 때의 순절공신(殉節功臣)으로 사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중직되었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제수받았다. 이들 7世부터 12世까지의 거의 모두가 이곳 묘역에 봉분이 유존(遺存)되어 있을 뿐 아니라 비석, 상석, 망주석 등이 석물도 보전가치가 매우 크다.
▣이인현묘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산87 전주이씨(全州李氏) 진남군파(鎭南君派) 봉성군(鳳城君) 후손 6백여년째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을 주축으로 살고 있다. 고잔동 산 87, 85에는 50여 基의 묘가 있었으나 1차 도시개발로 철거되고 현재 12基가 남아있다. 이인현(仁賢) 묘는 12基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인현 선생은 통훈대부(通訓大夫), 문화현감(文化縣監), 충양위(忠衛)를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때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했다.
▣유석묘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5-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진주(晋州) 자 덕보(德甫) 호 개산(皆山) 사옹원정(司饔院正) 시회(詩會)의 아들로서 조부 격(格)은 정언(正言)을 지냈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인조 3년(1625)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正字)직에 있을 때 선조의 제7자 곧 인조의 삼촌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모역(謀逆) 사건이 일어나자 무고임을 알고, 한무제(漢武帝)의 포속요(布粟謠)에 비유한 상소를 올려 그를 구출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도망가고 이듬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니, 당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였다. 그는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거쳐 벼슬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홍처윤묘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11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남양(南陽) 자 지임(之任) 호 안분재(安分齋) 관찰사 명원(命元)의 아들 인조 17년(1639) 알성문과 (謁聖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1641년 검열(檢閱)을 거쳐 1646년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제(科題)에 문제가 있어 파방(罷榜)되자 삭직(削職) 당했다. 1648년 복적되어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고, 효종 1년(1650) 응교(應敎)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 해 지평(持坪)으로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했다. 이에 교리(校理)가 되고 왕이 당쟁의 폐해를 지적하자 그 무해(無害)함을 진술하여 삭직(削職) 되었다가 백천 군수(白川郡守)로 기용되고, 1655년 보덕(輔德)에 승진, 사인 (舍人)을 거쳐 1659년 수찬(修撰)·겸보덕(兼輔德) 등을 지냈다. 이 해 효종이 죽자 빈전도감도청(殯殿都監道廳)이 되고 이에 사간(司諫)을 지낸 후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현종 2년(1661) 호조 참의가 되고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예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이조 참판을 추증받았다.
▣정정옹주묘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50-40 선조의 후궁 정빈(貞嬪) 홍씨(洪氏)의 소생으로 선조의 아홉번째 딸이다. 선조 37년(1604) 정정 옹주로 봉해지고 광해군 2년 진안위(晋安尉) 유적에게 출가하였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강화도에서 증살(蒸殺)되었고 이어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하려 하자 지아비와 더불어 이를 반대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는 광해군 치하에서 진안위가 정의롭게 처신하였다 하여 통헌대부에 추증하고 정정 옹주에게도 두터운 예로 대우하였다. 후사가 없어 시동생 영(潁)의 아들 명전(命全)을 양자로 삼았으나 명전도 문과에 급제한지 2년만에 요절하였다. 이후 2년만에 옹주도 타계하니 현종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비용을 후사하였으며 스스로 빈소에 나아가 진안위묘에 합장토록 하였다.
▣윤강(尹絳,1597-1667)묘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17-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 자준(子駿) 호 무곡(無谷) 공조참의(工曹參議) 민헌(民獻)의 아들이다. 인조 2년(162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인조 4년 검열(檢閱)을 거쳐 봉교 정언 교리 등을 지냈고, 인조 20년(1642)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湊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승지 집의 대사헌 도승지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8년(1657)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예조판서로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어 장례를 치루었다. 이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이조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현종 5년(1664) 민유중의 탄핵으로 사직한 후 향리인 안산으로 낙향하였다.
▣최용신(崔容信,1909-1935.1.23)묘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농촌 운동가. 본관 경주(慶州) 누씨고녀(樓氏高女)를 나와 서울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YWCA 농촌사업부에서 경기 화성군 샘골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였다. 부락민의 협조를 얻어 스스로 교사(校舍)를 신축, 매일 10리 길을 걸어다니며 어린이를 가르쳤다.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하였다가 신병으로 귀국, 샘골에서 요양하면서도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하던 중, 장중적증(腸重積症)으로 죽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은 실제 인물이다. 상록수의 청석골은 현재의 본오동으로 1935년 1월 23일 최용신은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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