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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면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선교적인 관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대대적인 사람들의 이동’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외국인들이 매우 많아졌다. 그 결과 오랜 역사에 걸쳐 ‘단일민족’을 내세우던 우리나라 안에서도 이미 ‘다문화 가정’이 또 하나의 가정 형태로 자리를 잡은 지도 오래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일도 매우 빈번해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는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가야만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는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섭리로 봐야 한다. 선교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다름 아닌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하나님이 그러한 사역의 마당을 우리 앞에서 펼쳐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에 여기에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할 선교에 관한 새로운 과제가 시작되었음도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교회는 해외선교의 현장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내의 이주민 선교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더욱 쉽게 해결하고, 언제나 고민거리가 되는 고비용의 해외선교를 저비용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내 이주자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럴 경우에 타문화권 선교사가 찾아가서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문화와 언어의 장애를 전혀 문제시할 필요가 없는 사역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이주민 노동자 선교는 이러한 역 파송의 선교사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파송한 선교사 숫자는 167개국 24,742명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의 수는 무려 1,650,000명이다. 이러한 통계만 봐도 많은 수의 선교인력이 해외로 파송되어가고 있고, 동시에 선교대상자들도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변화로 인해 21세기에는 그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선교의 방식과 현상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보쉬(David Jacobus Bosch)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세상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놓여 있다. 이미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이주자들이 한국에 와서 생활하고 있다. 일례로 경기도 안산이나 연천 등은 낮이면 우리나라지만, 밤만 되면 외국인들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어버린 지도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주민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사역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선교적인 사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국내 이주민 노동자 선교에 대한 성경적이며 선교신학적인 의미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II. 이주민에 대한 이해
1. 성경적인 이해
성경이 말하는 ‘이주민’은 부득불 구약과 신약의 두 배경에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인’을 의미하는 용어는 ‘노크리’(Nokri), ‘게르’(Ger), ‘자르’(Zar), ‘토사브’(Tosab)이다. 이 용어들을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기간으로 구분하면, ‘노크리’와 ‘자르’는 ‘단기 체류자’를 의미하고, ‘게르’와 ‘토사브’는 ‘장기 체류자’를 의미한다.
먼저 ‘노크리’를 살펴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동화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떠나 다른 족속이나 나라에 가서 일정 기간 머무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들은 잠시 거주하는 상인들과 같은 사람들로서 표현되었다(느 13:15-17). 그런가 하면 ‘자르’는 본래 상업이나 여행의 목적, 혹은 용병의 신분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한 자들을 지칭했다. 그러다가 후대에 이르러 다소 확대된 의미로서 ‘이방인’, ‘외국인’으로 표현되었다(사 1:7; 렘 5:19, 51:51; 겔 7:21, 28:7; 욥 1:11).
‘장기 체류자’에 속하는 ‘게르’는 ‘나그네’, ‘객’, ‘우거하는 자’, 혹은 ‘이방인’(렘 22:2), ‘타국인’, 혹은 ‘외인’(민 19:10) 등으로 구약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232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에서 출애굽 시에는 함께 나온 잡족들, 가나안에 거주 시에는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게 된 가나안 사람들, 그리고 외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의미하였다. 포로 후기에 이르러서는 ‘개종자’, 곧 귀화한 이방인을 지칭하기도 했다(대상 29:15).
‘토사브’ 역시 ‘게르’와 유사한 동의어로 사용되어 ‘거류민’, ‘이방 나그네’로 번역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기에 등장하는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얹혀사는 나그네를 가리킨 것이다.
여기까지가 구약에 나타난 ‘이주민’에 해당하는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구약 용어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가 명확하게 구별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구약 시대에 자신에게 익숙한 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은 분명히 모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명확한 국경의 경계가 정해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 이것은 무조건 피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다른 민족들이 들어와서 섞여 산다는 것은 크게 낯선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단기’ 혹은 ‘장기’로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안에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된다.신약의 표현은 구약과 차이가 있다. 신약은 유대인들의 거주지나 혹은 예수님의 복음전파 사역의 현장,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사역을 한 지역들에서 만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기록들이 곳곳에 있다. 예수님이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도들이 만났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방인들의 등장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들을 ‘이주민’, 혹은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구약의 선교와 신약의 선교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차이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교 사역의 방향성을 생각할 때 구약의 선교가 ‘구심적’이라면, 신약은 ‘원심적’이라는 원리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 원리에서 볼 때 구약은 외인들이 이스라엘의 공동체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가까운 곳이든, 아주 먼 곳이든 그들은 일단 ‘이스라엘’이라는 선민 공동체 속에 일단 들어와야 했던 것이다.
반면에 신약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으로 나가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을 나갔던 신약의 원심적 선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점점,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됐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로 인해 이방 세계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공동체들이 세워지게 됐고, 그들은 또다시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이주민 노동자 선교 233따라서 신약은 오히려 외인이나 이방인을 나그네로 표현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 천국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주체로서의 이주자’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약성경이 밝히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지상 가운데 잠시 거주하는 것이고, 이 땅은 그들의 고향(homeland)이 아니다. 그들이 그 안에 잠시 머무는 낯선 이방 땅이기에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나그네’, 즉 ‘이 땅의 이주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영원히 거주하지 않는 ‘순례자들’이요, ‘이주자들’이라는 것을 지시하면서 성경 곳곳에 그리스도인을 향해 나그네(παρεπίδημοι)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이다.그러나 드물게나마 유대인을 중심으로 이방인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는 말씀들에서 발견된다. 이런 말씀의 의미는 이방인을 무시하고 멸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사역의 우선순위와 효율성에 있어서 ‘먼저 유대인이고 후에 이방인에게’”라는 신약의 도식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2장이다. 사도행전 2장은 첫 오순절에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15개의 다른 지역에서 잠시나마 예루살렘에 모여왔던 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도들이 입을 열어 선포했던 복음의 메시지가 이들에게 각 나라의 말로 들렸다는 놀라운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다문화의 특성을 가진 교회로 출발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성경적인 고찰에 의하면 오늘날의 국제적인 관계와 새로운 산업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주민들의 형태나 모습과 신·구약 성경에 표현된 이주민들이 반드시 동일한 형태라고 말할 수 없다. 분명히 다소 차이가 있는 유형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시대적인 변화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십 세기가 흐르는 동안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영역, 수많은 사조들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전체적으로 나그네를 선대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걸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2. 사회학적인 이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지구촌’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변화와 함께 국제정세의 변화와 산업에 있어서 국제적인 현상, 그리고 다양한 교통수단의 발달은 사람들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지난날 이데올로기 차이로 인한 냉전체제에서의 적성국도 이제는 서로 교류를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러시아, 중국 등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와도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나라인 북한과도 제한적이지만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현장이 내국인으로 채워지지 못해 타국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상황은 다양한 나라의 이주자들을 증가시켰다. 편리한 교통수단 역시 이 일을 가속화하는데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주민’이란 용어가 보편화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이주민을 만나는 일은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매우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주민들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먼저 1991년 외국의 인력을 받아들이면서 초기에는 ‘산업연수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2004년부터는 외국인 고용허가제의 도입으로 공식적인 근로자의 입국이 이루어지면서 ‘외국인 근로자(Foreign worker)’로 혹은 ‘외국인 노동자’ 중에 어느 용어를 사용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과정을 거쳐 외국인이란 용어가 차별성을 지닌다는 이유에서 UN과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서 ‘이주노동자(Migrant worker)’를 사용하게 된 것이 더욱 최근의 상황이다. 그러나 다시 이주노동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가 적극적으로 검토되면서 ‘이주민’으로 불리는 것이 더욱 일반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의미는 ‘이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이주민 선교에 대한 성경적·선교학적인 이해
이미 위에서 이주민에 대한 용어와 관련하여 성경적인 고찰을 하였다. 이러한 고찰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주민 선교에 대한 성경적·선교학적인 검증도 가능하다는 것이 연계된 것이다. 여기서는 이주민 선교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시작으로 선교학적인 논의를 시도한다.
1. 성경에 나타난 이주민에 대한 관심
1) 구약성경
성경은 ‘선교의 책’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러한 표현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속경륜을 포함하여 창조질서의 회복을 계시하시며 실행하시는 목적에서 기록된 책이라면 당연히 선교의 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할 때 선교의 책인 성경에서 이주민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가 발견된다면 이주민을 위한 선교는 성경적인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외국인에 대한 배려는 먼저 십계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 10절의 안식일 규정에서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정신은 안식일에 안식하도록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타국에 객이 되었던 경험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이종록 교수는 이스라엘이 모세의 아들 게르솜과 관련하여 가지게 되는 나그네의 경험을 ‘게르 의식’, 즉 ‘종’, 혹은 ‘외국인 노동자의 의식’으로 설명하면서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22).“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출 18:3).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출 23:9).“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3 -34).“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이주노동자는 룻기에서 만날 수 있는 엘리멜렉이다. 그는 흉년을 만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우거하였다(룻 1:1-5).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 이렇게 고향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옮겨간다는 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하였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아브람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같은 족장들에게도 이미 ‘게르’로 묘사하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브람이 나그네로 우거하는 삶이 창 12:10-20에 잘 그려져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쳤다(렘 29:4-7). 이러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주하여 사는 나그네 의식을 먼저 가지게 한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게르’ 의식을 가지게 한 것은 먼저 그들이 순례자로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수행해야 한다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외국인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이 ‘게르’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나그네를 배려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신 23:7-8, 24:17-22, 26:11).
이방인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인 배려가 표현된 것은 곡식을 거두는 규례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하나님은 타국인을 위하여 열매나 이삭을 남겨둘 것을 명하였다(레 19:9-10, 23:22, 신 24:19). 계속해서 칠칠절 규례(신 16:9-12)와 초막절 규례(신 16:13-15)에서도 나그네를 위한 배려를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의 규례(레 17:8-9), 속죄일 규례(레 16:29), 유월절 규례(민 9:14, 대하 30:23-27), 피에 관한 규례(레 17:10), 신성모독 금지 규례(레 24:16)에도 이방인들이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을 때 본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나 내국인을 구별하지 말고 동일한 법으로 적용하도록 했다(출 12:49, 민 9:14, 15:13-16, 신 24:14). 그 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에도 외국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동일한 대우를 받게 하였다(신 31:9-13). 이러한 구약성경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볼 때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보여준 태도보다는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의 배려와 가르침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할 때 하나님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진 가이주민 노동자 선교 237장 분명한 선교적인 동기일 것이다.
2) 신약성경신약성경은 이주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 때문에 이방인을 향한 관심이 부족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던 그 시대에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식들과 다르게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변에 있었던 제자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신약의 교회 역시 그러한 경향을 확대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 기간에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마을을 왕래하면서 그곳의 여인을 만남은(요 4:1-14) 당시의 상황에서 파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당사자였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예수님에게 의아함을 표현할 정도였다. 예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셨으며(막 7:24-30),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다(눅 7:2-10).
특별히 예수님은 두 가지 사건에서 이방인을 멸시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말씀을 하셨으나 그것은 해석이 필요한 일이다. 하나는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을 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고 하신 일이다. 다른 하나는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하신 경우이다. 이것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우선적인 순위로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는 도식에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라는 말씀에서도 입증된다.사도행전의 교회는 그 출발에 있어서 다문화 지역에서 방문한 사람들에 의하여 출발하였다. 15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들도 함께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을 볼 수 있다(행 2:).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접근하여 복음을 설명하였다(행 8:26-49). 더욱이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선교적인 부름은 비록 그가 이방인의 지역으로 나아가서 그의 선교사역을 수행하는 형태이었지만 이러한 그의 의도에는 국내에 이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서신서의 내용에도 나그네들에 대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에는 감독의 자격에 “나그네를 대접하며”(딤전 3:2)라는 요소를 포함했으며,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격에 대해서도 나그네 대접을 언급하였다(딤전 5:10). 요한서신에도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요한삼서 1:5). 물론 여기의 나그네는 반드시 이방인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를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 역시 이방인 혹은 이주자에 대한 배려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B. 이주민에 대한 선교학적인 이해1.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성경은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의 기초가 아닐 수 없다. 구약성경은 만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블라우(J. Blauw)는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의 선교적 메시지를 위한 토대”라고 말한다. 단지 구약성경의 주된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통하여 전 인류와 모든 민족에 관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중심을 둔 구속사는 다른 민족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에게만 독점되는 신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세계 만민들과 관계를 갖고 계신다. 하나님이 온 세계의 하나님이라면, 그는 필연적으로 애굽 민족, 팔레스틴 민족, 바빌로니아 민족, 앗시리아 민족 및 그 외의 민족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특별히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인류가 범죄로 심판을 받게 되는 노아 홍수의 사건(창 10장) 후에 다시 땅 위에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하여 전 인류를 형성할 계보를 보여주고 있는데(창 10:5, 10:15-19, 10:32), 여기 이 계보가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었다면 그 언약에 포함되지 않을 어떤 족속이나 민족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바벨탑 심판으로 인류를 분산시키지만, 여기에도 유의를 끄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심판하심을 보이시면서도 구원의 관심을 계속하여 가지시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로 심판 아래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인류의 하나님으로서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이러한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란 “세계 만국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이스라엘 역사의 배경을 이루는” 의미를 가지기에 이스라엘의 구분은 일시적으로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의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그들이 모든 민족 가운데 “여호와의 사신”이 되기 위한 것과 제사장의 나라로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도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먼저 구원하신 목적을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데”(출 19:6) 있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온 세계 민족 중에서 그의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는 사상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구원에 이주민 노동자 선교 239대한 범위의 세계성이 곧 구약 선교의 뿌리”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전 인류 혹은 모든 족속의 구속에 관한 관심과 계획은 당연히 이주민 선교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와 배경이 되는 것이다.
2) 성경에 나타나는 이주민을 위한 배려에 담긴 선교적인 의미
신·구약성경에서 이주민들에 대한 배려를 이미 위에서 확인했다. 이주민들에 대한 배려는 단순히 윤리적인 배려의 의미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선교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회중에 포함되도록 허용하는 것은 이주민의 선교를 이해할 수 있는 선교학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먼저 성경에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회중에 포함되도록 허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이미 혼합된 다수 민족이 있었을 수 있었으며, 또한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여 언약의 백성임을 확인할 때에도 이미 그들 가운데 동화되었던 집단들이 있었다. 신명기 23:7-8절에 의하면 에돔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까지도 3대 후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가담하면 유월절도 지킬 수 있었고(민 9:14), 번제나 희생을 드릴 수도 있었다(레 17:8). 구약성경의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피터스(George W. Peters)는 구약성경의 계시 자체가 하나의 폐쇄적인 민족 종교가 아니라 이방인도 환영하며 동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것을 보여준다고 밝힌다.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온 이방인들을 위한 배려 역시 선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드리는 십일조 가운데 일부는 이스라엘 성읍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에게 제공하도록 했으며(신 14:28-29),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다양한 배려를 명하였다(신 24:14, 17, 19, 20). 추수 때에 곡식 이삭을 남겨 이방인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레 17:8), 타국인을 이스라엘이 낳은 자 같이 여기도록 명했다(레 19:33-34). 이방인들을 향한 이러한 배려 역시 그들을 이스라엘의 회중에 포함시키는 의미가 있으며, 이방인들의 구원도 구속경륜 속에 포함시킨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프레이타그(Walter Freytag)는 “그들은(이방인)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 자신을 증거 하셨으며,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한 의사를 간직하고 있었던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존재한 백성이다”라고 말한다. 디 리더(De Rider)에 의하면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할 대상들이었기에 이스라엘 가운데 그들이 발견되도록 구상한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온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는 선교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24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3. 구심적 형태에서의 선교적인 의미선교를 본국 중심에서 타국으로 나가서 사역하는 선교와 타국에서 본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역하는 양방향에 관하여 연구한 학자는 순드클러(Bengt Sundkler)이다. 그는 탄자니아에서 사역한 후 웁살라 대학에서 ‘선교지 교회와 선교(Young Churches and Mission)’를 가르치는 학자로서 신·구약을 통하여 ‘원심적’(centrifugal) 선교와 ‘구심적’(centripetal) 선교의 경향들을 추적하였다. 이러한 경향의 추적에서 원심적 선교는 주로 신약의 경향으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외방으로 나가는 선교이었으며, 구심적 선교는 구약의 경향으로서 외방에서 이스라엘에 들어온 사람들을 위한 선교로 구분되었다. 물론 구약에도 원심적 선교가 없는 것은 아니며 신약에도 구심적인 선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된 경향의 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분석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선교란 양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하지만 이주민 선교에서는 분명한 특징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위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이주민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살펴본 대로 그들이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어와서 선교의 대상이 되는 경우들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외국의 이주민들이 국내에 머물 동안 그들을 향한 사역은 선교학적으로 볼 때 구심적인 선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현대선교 전략에 포함된 이주민 선교의 의미누구도 기독교 선교가 양방향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문제 삼을 수 없다. 타문화권의 사역에는 여러 가지의 제약이 따른다. 먼저는 언어와 문화적인 장벽이 항상 남아 있다. 따라서 해외 선교사로 나가는 경우에 문화충격(cultural shocking)을 경험해야 하며 현지어를 배우는 고충을 거친다. 나아가서 해외선교의 문은 더욱 닫혀가는 현상이어서 기독교 선교가 필요하지만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은 상황이다.이러한 장벽들 앞에서 현대선교의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이주민들을 향한 선교이다. 국내에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위한 사역은 그들 가운데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본국으로 들어갔을 때 언어와 문화의 장벽 없이 사역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국내의 이주민을 위한 선교사역의 필요성은 이미 서구사회에서도 절감되었던 문제이다. 미국에서는 1981년에 ACMI(Association of Christians Ministering among Internationals)가 설립되었는데 북미의 유학생들을 위한 캠퍼스 사역, 교회의 외국인 사역, 교단의 외국인 사역, 그리고 선교단체들의 사역 등을 네트워크화한 것이다.독일에서도 1985년에 함부르크 복음주의 독일교회와 외국인 교회들이 연합으로 하파(HAFA: Hamburger Arbeitkreis fur Auslander)라는 선교 단체를 결성하여 도시 내에 외국인들을 집중적으로 선교하는 결의를 하였다.이주민 노동자 선교 241우리나라도 학자들 가운데는 한국교회의 이주민을 위한 사역을 선교전략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태웅은 한국선교를 위한 선교방법과 전략의 동향으로서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선교전략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피력했다.
첫째는 이주노동자들이나 외국 유학생들은 언젠가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며,
둘째는 그들은 주로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기에 우리 선교사들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선교할 수 없는 지역이며,
셋째는 성경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고 했다. 강승삼 역시 다음과 같이 요청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직접 찾아가서 선교해야 했을 이 외국인 근로자들을 이 땅으로 이끄심으로 세계 복음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영적 통찰력을 갖추고, 이 주어진 기회에 그들을 향한 선교의 비전을 키워가며 외국인 근로자를 통해 미전도 지역인 10/40창 지역 복음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그는 계속하여 외국인 근로자 선교의 필요성을 3가지로 밝혔는데 이태웅과 유사한 입장이다. ➊ 외국인 근로자들의 전도를 위한 접촉은 선교현지에서 보다 훨씬 쉬우며, ➋ 그들은 대부분 선교사 입국과 활동이 어려운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온 사람이며, ➌ 성경에 의하면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이처럼 이주민에 대한 선교는 현대선교 신학의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5) 포괄적 혹은 통전적인 개념에서의 선교에 포함되는 의미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선교의 개념은 현대선교신학의 발전에 의하여 변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면 대개 다음과 같은 3가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왔다. 보쉬(David J. Bosch)는 그들 중에 2가지를 지적하였다. 하나는 전도와 선교를 지리적(geographical)으로 구별하여 전도는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선교는 타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한 개념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신학적(theological)으로 구분하여 전도는 이미 복음이 전해진 지역의 사람들에게(No-more-Christians)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에게(Not-yet-Christians)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한 개념이었다.이와는 다르게 문화적(Cultural)으로 구분하는 입장도 유행하였는데 전도는 동일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타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한 개념이었다. 특별히 이러한 개념으로서 선교를 정의한 학자 중에는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있는데 그는 선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복음을 가지고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상 세 가지 구분에 의하면 선교 역시 지역과 대상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경향이었다. 선교신학의 발전에 의하여 선교란 단순히 복음전도에만 머물 수 없는 입장들로 이해되었다. 복음전도를 중심으로 섬김의 사역들이 함께 포함되는 포괄적인 혹은 통전적인 개념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포괄적인 구분에 의하면 선교란 복음전도와 섬김의 사역이 함께 수행되는 개념이다. 케인(J. H. Kane)에 의하면 “복음의 구속적인 선포”의 활동을 전도로, 전도활동 뿐만 아니라 교회 개척, 의료 봉사, 교육 사업, 농업 사업 등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선교로 이해하였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 역시 복음전도와 세계 속에서의 책임 있는 봉사를 강조하는 포괄적인 사역을 제시했다. 스토트(John R. W. Stott) 역시 “만일 우리가 세계 속에서 기독교적 봉사로서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을 포함하는 이 넓은 의미의 선교에 대한 개념을 받아 수용한다면” 이것은 주님의 지상 선교의 모델을 수용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피력하였다. 따라서 필자도 이미 “선교란 주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전도의 중심적 사역과 더불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봉사의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는 포괄적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암미선교회 대표인 김영애 선교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소재의 공장지대를 방문하게 되면서부터 이주민 노동자 선교를 하게 된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선교’라고 하면 ‘문명이 없는 지역에 나가 내 모든 삶을 다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의에 기초해서 선교를 보면 선교사로서의 삶은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부담스러운 사명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김영애는 이 점에 있어서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선교에 대한 포괄적 혹은 통전적인 이해에 의하면 선교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복음전도의 활동을 넘어선 사회적인 봉사와 섬김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선교는 당연히 해외에서 국내에 이주하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전도는 물론이고, 그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사역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주민을 위한 사역이 선교에 포함되는 것은 선교학적으로도 설명이 타당한 것이다.
IV. 이주민 노동자 선교 현장 이야기
1. 이주민 노동자 선교의 장
2013년 KD한국교회희망봉사단에 의해 출판된 「이주민선교 기초조사 보고서」는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됐던 이주민선교 연구를, 전 부문에 걸쳐 전국적으로 조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이주민 선교 대상으로 파악한 교회와 기관, 단체 총 575곳 중 설문조사에 응하여 회신을 완료한 교회와 기관은 270곳이다. 보고서 내용을 보면, 이주민 선교의 목적과 관련해서는 통전적 28%, 전도 25%, 세계선교 19%, 인권 및 삶의 질 개선 17%, 교회개척 8%로 ‘통전적 입장’이 다수다.하지만 그중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중요시하는 ‘전도’와 ‘세계선교’, ‘교회개척’을 합치면, 에큐메니칼 교회가 중요시하는 ‘통전적 입장’과 ‘삶의 질 개선’ 항목을 합친 것보다 7% 높다. 보고서에는 “양 진영이 대체로 균형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양 진영의 신학을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선교 현장에서의 현실 적합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이주민 선교의 부문과 관련해서는 이주노동자 선교 32%, 결혼이민여성 선교 29%, 다문화가정 자녀선교 19%, 유학생 선교 15%, 난민 선교 5%로 나타났다. 결혼이민여성과 다문화가정 자녀는 신분이 안정되고 접근과 후원이 비교적 용이하여 전도에 연결되기 때문에 교회와 기관이 많으나, 이주노동자 선교는 노동 상담이 전문지식과 경험을 요구하고, 힘들여 노력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부분 귀국하기 때문에 점차 감소추세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체류가 가능한 이주민 노동자들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정책 및 제도와 관련해서는 “총회는 다양화된 이주민 선교를 이해하고 평가하며 중장기 전망을 세워 각 부문과 형태, 규모, 예산과 대상국가에 따른 이주민 선교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 프로젝트 기관과의 협력의 바람직한 형태를 제시하며, 세계선교와 연계 및 확대 방안을 마련해서 정책에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의 적극적 이주민 정책과 지원센터 수립에 발맞춰 이주민 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이주민사회 선교사 또는 이주민 국내 선교사 제도를 수립하는 방안을 연구해서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이주민 교회들이 노회(연회, 지방회 등)에 가입할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244 세계선교의 길라잡이B. 이주민 노동자 선교의 실제이주민 노동자 선교가 더 왕성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 교단 총회와 노회, 그리고 개교회와 모든 선교단체와 기관 간 협력과 연대, 지원을 강화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특별히 지역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환경과 차별, 인권과 법률 등 종합적인 지원과 동시에 예배와 교육, 영성훈련을 통한 융합된 전략과 정책을 지원해 나가는 계획이 필요하다. 아울러 선교사 집중훈련에 이주민 선교 관련 과목을 신설하고, 해외선교사들과의 네트워킹 강화를 통해 본국으로 귀국하거나 국내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연계 사역을 추진하는 것도 필요한 시점이다.이 과정에서 이주민의 인권을 존중하며 우리나라에서 겪는 피해와 문제들을 해결하고 예방하는 사회복지를 부분적으로 지원하고 제공하므로 우리나라에 대한 선한 이미지와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하여 결국 전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주민 노동자들을 위해 의료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이주민 노동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 경우들이 많이 봤다.
우리나라는 2003년에 외국인근로자고용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해당 국가와의 양해각서를 체결해 노동자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고용허가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노동자가 실제 작업 내용과 근무환경을 모른 채 근로계약을 맺고, 직장 이동의 권리를 박탈하는 등의 문제점들이 발생했다.실제 노동의 현장에서 이주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권리는 밑바닥 수준이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이동의 자유조차 가로막고 있고, 체류 기간을 제한하여 장기체류를 막고 있는 형편이다. 농축산어업에서는 근로기준법 63조로 인해 휴게, 휴일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사업주의 비용을 줄여주기 위해 숙식비를 강제로 징수할 수 있게 하고 있고, 최근에는 심지어 최저임금마저 차등 적용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한 마디로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이주민 노동자들이라는 말이다.이를 개선하기 위해 입국 후 정식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농축수산업 근로자들의 고용 관계를 개선하며, 입국 후 교육 및 고용주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 이주민 노동자 선교와 관련된 사람이나 교회들, 기관들의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특별히 이주민 선교에 지역 교회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제안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주민 선교는 이주민 교회를 살리는 일부터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다음에 그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진 경우 그 교회를 살리려면 이주민 교회와 지역 교회가 함께 하는 ‘위드 처치’(with Church) 실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역 교회가 이주민 선교 사역자들을 양성해 이주민 교회로 파송할 것, 이주민 이주민 노동자 선교 245교회와 지역 교회와 대형교회가 함께 연합하는 이주민 선교 추진체 구성, 이주민 교회 사기진작과 연합사역을 통한 이주민 선교 부흥운동 전개 등이 필요하다고 본다.
3. 총회 차원에서의 지원
2019년 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의 일환으로 세계선교협의회(CWM) 제3차 선교지원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국내 30여 기관 관련 사업을 지원하고, 그 내용을 백서로 발간했다. 2016~2017년 진행된 프로그램을 최종 평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백서다.CWM은 1795년 런던선교회(LMS)란 명칭으로 출발한 선교회로, 1840년 리빙스턴을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했고, 선교 초기 조선의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기관이다. 한국 최초의 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1882)’를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 역시 런던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다.
한국교회와 이렇게 깊은 연결고리를 가진 CWM의 선교지원 프로그램은 전세계 회원교회들의 선교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총회에서는 한국사회의 대표적 소외계층인 이주민 사역에 초점을 맞춰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탈북민 선교 등의 사업 및 이 분야에 대한 교육훈련과 연구출판 사업 등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CWM 선교지원 프로그램 지원 금액은 236,791파운드로, 원화 342,000,000원이었다. 총회는 교육과정, 교재개발사업 5개 기관, 이주노동자 11개 기관, 결혼이주민 사역기관 11개 기관, 탈북자 사역 10개 기관 등 총 37개 기관을 선정해서 각각 선교 프로그램 재정을 지원했다.
이번 선교 지원 프로그램을 최종 평가했던 황홍렬 교수와 박흥순 소장은 이번 선교지원 프로그램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➊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이뤄지는 평화선교와 평화교육 주변에서 주변으로 향하는 선교,
➋ 환대를 또 다른 환대로 확장하는 선교,
➌ 협력과 연대하는 선교로 평가하며, 향후 프로그램 진행 시에는 기획과 선정과정에 전문가위원회가 상시적으로 활동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연구·교육·사업이 선순환 할 수 있는 구조로 활용되도록 방안을 제안했다.
총회 변창배 사무총장은 “결혼 이주민 문제 등은 총회가 잘 다루지 못한 분야였는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다루게 되어 감사하다.”며, “현장 지원 사업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교회, 노회, 신학교가 참여하도록 도운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CWM 프로그램 기금을 지원받은 ‘더불어함께 이주민센터’의 이학산 목사는 “영세한 이주민 단체가 평상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사업들을 할 수 있는 가뭄 끝에 단비 같은 지원이었다.”며,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에게 문자를 가르쳐주고, 다문화가족246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의 치유 수련회까지 진행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4. 이주민 노동자 선교의 열매
이곳에 게시하는 글은 2019년 8월 26일(월), 기독공보에 실렸던 고경수 목사(대구 평화교회, 대구 이민선교센터)의 편지다. 이 편지로 이주민 노동자 선교가 맺게 될 열매가 어떤 것들인지 직접 알 수 있다.지난번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일정으로 긴 시간 함께 하지 못하여 몇 자 적어본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난 때가 이주민들을 섬기는 교회와 선교센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도였지. 2009년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귀국할 때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벌써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앞이마가 훤히 보이는 아저씨가 되었더구나.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서 주물공단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지게차에 발등을 다쳐 절뚝거리며 교회를 찾아왔을 때만 해도 지금의 크리스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 한국에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철새처럼 찾아온 이주 나그네들의 고통과 아픔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주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여기는 교회였는데, 어느 날 네가 귀국을 앞두고 “목사님! 저도 목사님처럼 우리나라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저를 선교사로 훈련받게 해 주세요.”라고 말할 때, 사실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주저했었지. 신앙생활의 연조도 짧고, 신학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과연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었던 거야. 당시 기아대책기구에서 봉사단 훈련을 마치고, 우리 교회가 파송교회로 보내기는 했어도, 반신반의하며 너의 사역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크리스가 기아대책 스텝으로 일한 지 3년이 지나 처음으로 네팔을 방문하였을 때, 나의 염려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수도 카투만두의 빈민시설뿐만 아니라 지방의 고산지대 학교와 마을을 다니며 그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며, 네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더욱이 올해 2월에 우리 부부가 재차 방문하였을 때 지역 NGO 회장으로 3개 지역 1,5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의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아주 소외된 체팡(Chepang)족 어린이들을 위한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300명이 넘는 학생들과 11명의 교사와 직원을 둔 학교(Evervision School)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크리스가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벌써 네가 사역을 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너의 사역을 우리 교회에서 지켜보던 스리랑카인 아상크와 중국인 정해연 부부도 너의 뒤를 따라 2012년 귀국하여 고향 동네에서 우리 교회 이름을 따서 ‘평화유치원(Peace Preschool)’을 하며 지역 어린이들을 돌보며 교회학교를 하고 있고, 작년 12월에는 방글라데시 밀턴이 너와 아상크의 사역에 도전을 받고, 고향으이주민 노동자 선교 247로 돌아가 차크마(Chakma)교회 사역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야. 우리 교회는 너를 비롯하여 3개국에서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를 현지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가 되었지만, 늘 안타까운 것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미자립교회로서 너희들이 필요로 하는 선교비나 생활비를 충분히 보내주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고 안타깝기만 하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선교의 열정과 비전을 품은 교회와 이웃 교회 성도들을 통하여 너와 너의 후배들의 사역을 이끌어 가고 계심을 믿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으로 주님의 은혜와 후원자들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우리 교회에 나오는 이주민들이 정결한 믿음과 사랑으로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고, 나아가 너의 뒤를 따라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도록 계속 좋은 소식들을 보내 주기 바란다. 가족 모두 주님의 은혜 가운데 강건하고, 사역 위에 주님 동행하시기를 마음 모아 기도한다.사랑한다, 믿음의 첫째 아들 크리스!
V. 나가는 말
전술한 바와 같이 21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 앞에는 수많은 도전과 응전의 상황들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중 하나가 이주민을 위한 선교의 장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주하여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새 1백만을 훨씬 넘어섰다. 합법적이 아닌 방법으로 이주하여 있는 사람들을 합한다고 하면 그 숫자가 훨씬 더 늘어난다. 이주의 종류도 다양하며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그들을 위한 선교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지난날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사역에만 치중해 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들어온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균형 있게 수행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구심적이며 원심적인 양방향에서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게 조성되었다. 또한 한국교회가 선교를 복음전도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던 상황에서 포괄적 혹은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선교를 해외에 나가서만 행하는 사역으로 이해하던 것을 해외만으로 한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장도 마련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해외선교를 수행하면서 경험했던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면서 사역하게 되는 장점을 도입할 뿐만 아니라 고비용의 선교를 저비용으로 돌릴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248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이런 현실 속에서 제대로 된 이주민 노동자 선교를 위해서는 선교의 대상인 이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주민 노동자는 경제적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종종 이주민 노동자들이 체류 자격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경우들이 있다. 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러한 체류 자격 때문에 개개인의 권리가 무시당한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각자가 놓인 상황과 관계없이 보호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이주민 노동자가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주민 노동자 선교에 참여하는 개인이나, 교회들, 기관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실이다.그동안 한국사회는 소위 이주노동자를 ‘외노자’, 또는 ‘불체자’라는 말로 법적 잣대로만 가두고 나누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인정하지 않아 왔다. 이 점은 앞으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일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에 대한 열기가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의 성장이 주춤한 현상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과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해외선교 역시 계속하여 상승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시점에 국내 이주자들의 선교는 성장의 정체 현상에 놓인 한국교회가 다시 성장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주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나오게 한다면 선교는 물론 다시 성장세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현재 우리나라의 시골 교회는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적지 않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때에 결혼 이주자로 온 여성들에게 복음전도와 섬김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면, 시골교회가 그 지역을 책임지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시 지속하는 중요한 방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눈앞에 전개된 현실을 책임지고 이주자 선교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주자 선교에 대한 전략들은 전국 교회와 교단 차원에서, 그리고 개 교회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안들이 있다. 함께 협력이 필요한 부분들은 최대한 협력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새롭게 주시는 과제임을 깨닫고 순종하는 역사가 우리 안에서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I. 들어가면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선교적인 관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대대적인 사람들의 이동’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외국인들이 매우 많아졌다. 그 결과 오랜 역사에 걸쳐 ‘단일민족’을 내세우던 우리나라 안에서도 이미 ‘다문화 가정’이 또 하나의 가정 형태로 자리를 잡은 지도 오래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일도 매우 빈번해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는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가야만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는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섭리로 봐야 한다. 선교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다름 아닌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하나님이 그러한 사역의 마당을 우리 앞에서 펼쳐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에 여기에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할 선교에 관한 새로운 과제가 시작되었음도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교회는 해외선교의 현장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내의 이주민 선교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더욱 쉽게 해결하고, 언제나 고민거리가 되는 고비용의 해외선교를 저비용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내 이주자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럴 경우에 타문화권 선교사가 찾아가서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야 할 문화와 언어의 장애를 전혀 문제시할 필요가 없는 사역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이주민 노동자 선교는 이러한 역 파송의 선교사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파송한 선교사 숫자는 167개국 24,742명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의 수는 무려 1,650,000명이다. 이러한 통계만 봐도 많은 수의 선교인력이 해외로 파송되어가고 있고, 동시에 선교대상자들도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변화로 인해 21세기에는 그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선교의 방식과 현상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보쉬(David Jacobus Bosch)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세상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놓여 있다. 이미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이주자들이 한국에 와서 생활하고 있다. 일례로 경기도 안산이나 연천 등은 낮이면 우리나라지만, 밤만 되면 외국인들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어버린 지도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주민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사역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선교적인 사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국내 이주민 노동자 선교에 대한 성경적이며 선교신학적인 의미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II. 이주민에 대한 이해
1. 성경적인 이해
성경이 말하는 ‘이주민’은 부득불 구약과 신약의 두 배경에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인’을 의미하는 용어는 ‘노크리’(Nokri), ‘게르’(Ger), ‘자르’(Zar), ‘토사브’(Tosab)이다. 이 용어들을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기간으로 구분하면, ‘노크리’와 ‘자르’는 ‘단기 체류자’를 의미하고, ‘게르’와 ‘토사브’는 ‘장기 체류자’를 의미한다.
먼저 ‘노크리’를 살펴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동화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떠나 다른 족속이나 나라에 가서 일정 기간 머무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들은 잠시 거주하는 상인들과 같은 사람들로서 표현되었다(느 13:15-17). 그런가 하면 ‘자르’는 본래 상업이나 여행의 목적, 혹은 용병의 신분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한 자들을 지칭했다. 그러다가 후대에 이르러 다소 확대된 의미로서 ‘이방인’, ‘외국인’으로 표현되었다(사 1:7; 렘 5:19, 51:51; 겔 7:21, 28:7; 욥 1:11).
‘장기 체류자’에 속하는 ‘게르’는 ‘나그네’, ‘객’, ‘우거하는 자’, 혹은 ‘이방인’(렘 22:2), ‘타국인’, 혹은 ‘외인’(민 19:10) 등으로 구약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232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에서 출애굽 시에는 함께 나온 잡족들, 가나안에 거주 시에는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게 된 가나안 사람들, 그리고 외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의미하였다. 포로 후기에 이르러서는 ‘개종자’, 곧 귀화한 이방인을 지칭하기도 했다(대상 29:15).
‘토사브’ 역시 ‘게르’와 유사한 동의어로 사용되어 ‘거류민’, ‘이방 나그네’로 번역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기에 등장하는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얹혀사는 나그네를 가리킨 것이다.
여기까지가 구약에 나타난 ‘이주민’에 해당하는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구약 용어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가 명확하게 구별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구약 시대에 자신에게 익숙한 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은 분명히 모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명확한 국경의 경계가 정해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 이것은 무조건 피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다른 민족들이 들어와서 섞여 산다는 것은 크게 낯선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단기’ 혹은 ‘장기’로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안에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된다.신약의 표현은 구약과 차이가 있다. 신약은 유대인들의 거주지나 혹은 예수님의 복음전파 사역의 현장,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사역을 한 지역들에서 만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기록들이 곳곳에 있다. 예수님이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도들이 만났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방인들의 등장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들을 ‘이주민’, 혹은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구약의 선교와 신약의 선교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차이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교 사역의 방향성을 생각할 때 구약의 선교가 ‘구심적’이라면, 신약은 ‘원심적’이라는 원리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 원리에서 볼 때 구약은 외인들이 이스라엘의 공동체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가까운 곳이든, 아주 먼 곳이든 그들은 일단 ‘이스라엘’이라는 선민 공동체 속에 일단 들어와야 했던 것이다.
반면에 신약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으로 나가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을 나갔던 신약의 원심적 선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점점,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됐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로 인해 이방 세계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공동체들이 세워지게 됐고, 그들은 또다시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이주민 노동자 선교 233따라서 신약은 오히려 외인이나 이방인을 나그네로 표현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 천국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주체로서의 이주자’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약성경이 밝히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지상 가운데 잠시 거주하는 것이고, 이 땅은 그들의 고향(homeland)이 아니다. 그들이 그 안에 잠시 머무는 낯선 이방 땅이기에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나그네’, 즉 ‘이 땅의 이주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영원히 거주하지 않는 ‘순례자들’이요, ‘이주자들’이라는 것을 지시하면서 성경 곳곳에 그리스도인을 향해 나그네(παρεπίδημοι)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이다.그러나 드물게나마 유대인을 중심으로 이방인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는 말씀들에서 발견된다. 이런 말씀의 의미는 이방인을 무시하고 멸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사역의 우선순위와 효율성에 있어서 ‘먼저 유대인이고 후에 이방인에게’”라는 신약의 도식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2장이다. 사도행전 2장은 첫 오순절에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15개의 다른 지역에서 잠시나마 예루살렘에 모여왔던 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도들이 입을 열어 선포했던 복음의 메시지가 이들에게 각 나라의 말로 들렸다는 놀라운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다문화의 특성을 가진 교회로 출발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성경적인 고찰에 의하면 오늘날의 국제적인 관계와 새로운 산업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주민들의 형태나 모습과 신·구약 성경에 표현된 이주민들이 반드시 동일한 형태라고 말할 수 없다. 분명히 다소 차이가 있는 유형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시대적인 변화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십 세기가 흐르는 동안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영역, 수많은 사조들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전체적으로 나그네를 선대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걸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2. 사회학적인 이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지구촌’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변화와 함께 국제정세의 변화와 산업에 있어서 국제적인 현상, 그리고 다양한 교통수단의 발달은 사람들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지난날 이데올로기 차이로 인한 냉전체제에서의 적성국도 이제는 서로 교류를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러시아, 중국 등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와도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나라인 북한과도 제한적이지만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현장이 내국인으로 채워지지 못해 타국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상황은 다양한 나라의 이주자들을 증가시켰다. 편리한 교통수단 역시 이 일을 가속화하는데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주민’이란 용어가 보편화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이주민을 만나는 일은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매우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주민들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먼저 1991년 외국의 인력을 받아들이면서 초기에는 ‘산업연수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2004년부터는 외국인 고용허가제의 도입으로 공식적인 근로자의 입국이 이루어지면서 ‘외국인 근로자(Foreign worker)’로 혹은 ‘외국인 노동자’ 중에 어느 용어를 사용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과정을 거쳐 외국인이란 용어가 차별성을 지닌다는 이유에서 UN과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서 ‘이주노동자(Migrant worker)’를 사용하게 된 것이 더욱 최근의 상황이다. 그러나 다시 이주노동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가 적극적으로 검토되면서 ‘이주민’으로 불리는 것이 더욱 일반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의미는 ‘이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이주민 선교에 대한 성경적·선교학적인 이해
이미 위에서 이주민에 대한 용어와 관련하여 성경적인 고찰을 하였다. 이러한 고찰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주민 선교에 대한 성경적·선교학적인 검증도 가능하다는 것이 연계된 것이다. 여기서는 이주민 선교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시작으로 선교학적인 논의를 시도한다.
1. 성경에 나타난 이주민에 대한 관심
1) 구약성경
성경은 ‘선교의 책’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러한 표현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속경륜을 포함하여 창조질서의 회복을 계시하시며 실행하시는 목적에서 기록된 책이라면 당연히 선교의 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할 때 선교의 책인 성경에서 이주민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가 발견된다면 이주민을 위한 선교는 성경적인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외국인에 대한 배려는 먼저 십계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 10절의 안식일 규정에서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정신은 안식일에 안식하도록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타국에 객이 되었던 경험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이종록 교수는 이스라엘이 모세의 아들 게르솜과 관련하여 가지게 되는 나그네의 경험을 ‘게르 의식’, 즉 ‘종’, 혹은 ‘외국인 노동자의 의식’으로 설명하면서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22).“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출 18:3).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출 23:9).“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3 -34).“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이주노동자는 룻기에서 만날 수 있는 엘리멜렉이다. 그는 흉년을 만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우거하였다(룻 1:1-5).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 이렇게 고향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옮겨간다는 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하였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아브람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같은 족장들에게도 이미 ‘게르’로 묘사하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브람이 나그네로 우거하는 삶이 창 12:10-20에 잘 그려져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쳤다(렘 29:4-7). 이러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주하여 사는 나그네 의식을 먼저 가지게 한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게르’ 의식을 가지게 한 것은 먼저 그들이 순례자로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수행해야 한다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외국인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이 ‘게르’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나그네를 배려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신 23:7-8, 24:17-22, 26:11).
이방인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인 배려가 표현된 것은 곡식을 거두는 규례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하나님은 타국인을 위하여 열매나 이삭을 남겨둘 것을 명하였다(레 19:9-10, 23:22, 신 24:19). 계속해서 칠칠절 규례(신 16:9-12)와 초막절 규례(신 16:13-15)에서도 나그네를 위한 배려를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의 규례(레 17:8-9), 속죄일 규례(레 16:29), 유월절 규례(민 9:14, 대하 30:23-27), 피에 관한 규례(레 17:10), 신성모독 금지 규례(레 24:16)에도 이방인들이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을 때 본토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나 내국인을 구별하지 말고 동일한 법으로 적용하도록 했다(출 12:49, 민 9:14, 15:13-16, 신 24:14). 그 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에도 외국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동일한 대우를 받게 하였다(신 31:9-13). 이러한 구약성경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볼 때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보여준 태도보다는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의 배려와 가르침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할 때 하나님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진 가이주민 노동자 선교 237장 분명한 선교적인 동기일 것이다.
2) 신약성경신약성경은 이주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 때문에 이방인을 향한 관심이 부족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던 그 시대에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식들과 다르게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변에 있었던 제자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신약의 교회 역시 그러한 경향을 확대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 기간에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마을을 왕래하면서 그곳의 여인을 만남은(요 4:1-14) 당시의 상황에서 파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당사자였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예수님에게 의아함을 표현할 정도였다. 예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셨으며(막 7:24-30),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다(눅 7:2-10).
특별히 예수님은 두 가지 사건에서 이방인을 멸시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말씀을 하셨으나 그것은 해석이 필요한 일이다. 하나는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을 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고 하신 일이다. 다른 하나는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하신 경우이다. 이것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우선적인 순위로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는 도식에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라는 말씀에서도 입증된다.사도행전의 교회는 그 출발에 있어서 다문화 지역에서 방문한 사람들에 의하여 출발하였다. 15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들도 함께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을 볼 수 있다(행 2:).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접근하여 복음을 설명하였다(행 8:26-49). 더욱이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선교적인 부름은 비록 그가 이방인의 지역으로 나아가서 그의 선교사역을 수행하는 형태이었지만 이러한 그의 의도에는 국내에 이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서신서의 내용에도 나그네들에 대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에는 감독의 자격에 “나그네를 대접하며”(딤전 3:2)라는 요소를 포함했으며,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격에 대해서도 나그네 대접을 언급하였다(딤전 5:10). 요한서신에도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요한삼서 1:5). 물론 여기의 나그네는 반드시 이방인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를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 역시 이방인 혹은 이주자에 대한 배려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B. 이주민에 대한 선교학적인 이해1.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성경은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의 기초가 아닐 수 없다. 구약성경은 만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블라우(J. Blauw)는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의 선교적 메시지를 위한 토대”라고 말한다. 단지 구약성경의 주된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통하여 전 인류와 모든 민족에 관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중심을 둔 구속사는 다른 민족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에게만 독점되는 신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세계 만민들과 관계를 갖고 계신다. 하나님이 온 세계의 하나님이라면, 그는 필연적으로 애굽 민족, 팔레스틴 민족, 바빌로니아 민족, 앗시리아 민족 및 그 외의 민족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특별히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인류가 범죄로 심판을 받게 되는 노아 홍수의 사건(창 10장) 후에 다시 땅 위에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하여 전 인류를 형성할 계보를 보여주고 있는데(창 10:5, 10:15-19, 10:32), 여기 이 계보가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었다면 그 언약에 포함되지 않을 어떤 족속이나 민족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바벨탑 심판으로 인류를 분산시키지만, 여기에도 유의를 끄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심판하심을 보이시면서도 구원의 관심을 계속하여 가지시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로 심판 아래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인류의 하나님으로서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이러한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란 “세계 만국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이스라엘 역사의 배경을 이루는” 의미를 가지기에 이스라엘의 구분은 일시적으로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의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그들이 모든 민족 가운데 “여호와의 사신”이 되기 위한 것과 제사장의 나라로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도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먼저 구원하신 목적을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데”(출 19:6) 있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온 세계 민족 중에서 그의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는 사상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구원에 이주민 노동자 선교 239대한 범위의 세계성이 곧 구약 선교의 뿌리”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전 인류 혹은 모든 족속의 구속에 관한 관심과 계획은 당연히 이주민 선교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와 배경이 되는 것이다.
2) 성경에 나타나는 이주민을 위한 배려에 담긴 선교적인 의미
신·구약성경에서 이주민들에 대한 배려를 이미 위에서 확인했다. 이주민들에 대한 배려는 단순히 윤리적인 배려의 의미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선교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회중에 포함되도록 허용하는 것은 이주민의 선교를 이해할 수 있는 선교학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먼저 성경에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회중에 포함되도록 허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이미 혼합된 다수 민족이 있었을 수 있었으며, 또한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여 언약의 백성임을 확인할 때에도 이미 그들 가운데 동화되었던 집단들이 있었다. 신명기 23:7-8절에 의하면 에돔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까지도 3대 후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가담하면 유월절도 지킬 수 있었고(민 9:14), 번제나 희생을 드릴 수도 있었다(레 17:8). 구약성경의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피터스(George W. Peters)는 구약성경의 계시 자체가 하나의 폐쇄적인 민족 종교가 아니라 이방인도 환영하며 동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것을 보여준다고 밝힌다.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온 이방인들을 위한 배려 역시 선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드리는 십일조 가운데 일부는 이스라엘 성읍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에게 제공하도록 했으며(신 14:28-29),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다양한 배려를 명하였다(신 24:14, 17, 19, 20). 추수 때에 곡식 이삭을 남겨 이방인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레 17:8), 타국인을 이스라엘이 낳은 자 같이 여기도록 명했다(레 19:33-34). 이방인들을 향한 이러한 배려 역시 그들을 이스라엘의 회중에 포함시키는 의미가 있으며, 이방인들의 구원도 구속경륜 속에 포함시킨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프레이타그(Walter Freytag)는 “그들은(이방인)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 자신을 증거 하셨으며,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한 의사를 간직하고 있었던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존재한 백성이다”라고 말한다. 디 리더(De Rider)에 의하면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할 대상들이었기에 이스라엘 가운데 그들이 발견되도록 구상한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온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는 선교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24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3. 구심적 형태에서의 선교적인 의미선교를 본국 중심에서 타국으로 나가서 사역하는 선교와 타국에서 본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역하는 양방향에 관하여 연구한 학자는 순드클러(Bengt Sundkler)이다. 그는 탄자니아에서 사역한 후 웁살라 대학에서 ‘선교지 교회와 선교(Young Churches and Mission)’를 가르치는 학자로서 신·구약을 통하여 ‘원심적’(centrifugal) 선교와 ‘구심적’(centripetal) 선교의 경향들을 추적하였다. 이러한 경향의 추적에서 원심적 선교는 주로 신약의 경향으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외방으로 나가는 선교이었으며, 구심적 선교는 구약의 경향으로서 외방에서 이스라엘에 들어온 사람들을 위한 선교로 구분되었다. 물론 구약에도 원심적 선교가 없는 것은 아니며 신약에도 구심적인 선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된 경향의 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분석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선교란 양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하지만 이주민 선교에서는 분명한 특징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위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이주민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살펴본 대로 그들이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어와서 선교의 대상이 되는 경우들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외국의 이주민들이 국내에 머물 동안 그들을 향한 사역은 선교학적으로 볼 때 구심적인 선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현대선교 전략에 포함된 이주민 선교의 의미누구도 기독교 선교가 양방향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문제 삼을 수 없다. 타문화권의 사역에는 여러 가지의 제약이 따른다. 먼저는 언어와 문화적인 장벽이 항상 남아 있다. 따라서 해외 선교사로 나가는 경우에 문화충격(cultural shocking)을 경험해야 하며 현지어를 배우는 고충을 거친다. 나아가서 해외선교의 문은 더욱 닫혀가는 현상이어서 기독교 선교가 필요하지만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은 상황이다.이러한 장벽들 앞에서 현대선교의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이주민들을 향한 선교이다. 국내에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위한 사역은 그들 가운데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본국으로 들어갔을 때 언어와 문화의 장벽 없이 사역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국내의 이주민을 위한 선교사역의 필요성은 이미 서구사회에서도 절감되었던 문제이다. 미국에서는 1981년에 ACMI(Association of Christians Ministering among Internationals)가 설립되었는데 북미의 유학생들을 위한 캠퍼스 사역, 교회의 외국인 사역, 교단의 외국인 사역, 그리고 선교단체들의 사역 등을 네트워크화한 것이다.독일에서도 1985년에 함부르크 복음주의 독일교회와 외국인 교회들이 연합으로 하파(HAFA: Hamburger Arbeitkreis fur Auslander)라는 선교 단체를 결성하여 도시 내에 외국인들을 집중적으로 선교하는 결의를 하였다.이주민 노동자 선교 241우리나라도 학자들 가운데는 한국교회의 이주민을 위한 사역을 선교전략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태웅은 한국선교를 위한 선교방법과 전략의 동향으로서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선교전략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피력했다.
첫째는 이주노동자들이나 외국 유학생들은 언젠가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며,
둘째는 그들은 주로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기에 우리 선교사들이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선교할 수 없는 지역이며,
셋째는 성경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고 했다. 강승삼 역시 다음과 같이 요청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직접 찾아가서 선교해야 했을 이 외국인 근로자들을 이 땅으로 이끄심으로 세계 복음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영적 통찰력을 갖추고, 이 주어진 기회에 그들을 향한 선교의 비전을 키워가며 외국인 근로자를 통해 미전도 지역인 10/40창 지역 복음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그는 계속하여 외국인 근로자 선교의 필요성을 3가지로 밝혔는데 이태웅과 유사한 입장이다. ➊ 외국인 근로자들의 전도를 위한 접촉은 선교현지에서 보다 훨씬 쉬우며, ➋ 그들은 대부분 선교사 입국과 활동이 어려운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온 사람이며, ➌ 성경에 의하면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이처럼 이주민에 대한 선교는 현대선교 신학의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5) 포괄적 혹은 통전적인 개념에서의 선교에 포함되는 의미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선교의 개념은 현대선교신학의 발전에 의하여 변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면 대개 다음과 같은 3가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왔다. 보쉬(David J. Bosch)는 그들 중에 2가지를 지적하였다. 하나는 전도와 선교를 지리적(geographical)으로 구별하여 전도는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선교는 타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한 개념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신학적(theological)으로 구분하여 전도는 이미 복음이 전해진 지역의 사람들에게(No-more-Christians)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에게(Not-yet-Christians)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한 개념이었다.이와는 다르게 문화적(Cultural)으로 구분하는 입장도 유행하였는데 전도는 동일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타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한 개념이었다. 특별히 이러한 개념으로서 선교를 정의한 학자 중에는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있는데 그는 선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복음을 가지고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상 세 가지 구분에 의하면 선교 역시 지역과 대상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경향이었다. 선교신학의 발전에 의하여 선교란 단순히 복음전도에만 머물 수 없는 입장들로 이해되었다. 복음전도를 중심으로 섬김의 사역들이 함께 포함되는 포괄적인 혹은 통전적인 개념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포괄적인 구분에 의하면 선교란 복음전도와 섬김의 사역이 함께 수행되는 개념이다. 케인(J. H. Kane)에 의하면 “복음의 구속적인 선포”의 활동을 전도로, 전도활동 뿐만 아니라 교회 개척, 의료 봉사, 교육 사업, 농업 사업 등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선교로 이해하였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 역시 복음전도와 세계 속에서의 책임 있는 봉사를 강조하는 포괄적인 사역을 제시했다. 스토트(John R. W. Stott) 역시 “만일 우리가 세계 속에서 기독교적 봉사로서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을 포함하는 이 넓은 의미의 선교에 대한 개념을 받아 수용한다면” 이것은 주님의 지상 선교의 모델을 수용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피력하였다. 따라서 필자도 이미 “선교란 주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전도의 중심적 사역과 더불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봉사의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하는 포괄적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암미선교회 대표인 김영애 선교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소재의 공장지대를 방문하게 되면서부터 이주민 노동자 선교를 하게 된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선교’라고 하면 ‘문명이 없는 지역에 나가 내 모든 삶을 다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의에 기초해서 선교를 보면 선교사로서의 삶은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부담스러운 사명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김영애는 이 점에 있어서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선교에 대한 포괄적 혹은 통전적인 이해에 의하면 선교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복음전도의 활동을 넘어선 사회적인 봉사와 섬김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선교는 당연히 해외에서 국내에 이주하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전도는 물론이고, 그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사역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주민을 위한 사역이 선교에 포함되는 것은 선교학적으로도 설명이 타당한 것이다.
IV. 이주민 노동자 선교 현장 이야기
1. 이주민 노동자 선교의 장
2013년 KD한국교회희망봉사단에 의해 출판된 「이주민선교 기초조사 보고서」는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됐던 이주민선교 연구를, 전 부문에 걸쳐 전국적으로 조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이주민 선교 대상으로 파악한 교회와 기관, 단체 총 575곳 중 설문조사에 응하여 회신을 완료한 교회와 기관은 270곳이다. 보고서 내용을 보면, 이주민 선교의 목적과 관련해서는 통전적 28%, 전도 25%, 세계선교 19%, 인권 및 삶의 질 개선 17%, 교회개척 8%로 ‘통전적 입장’이 다수다.하지만 그중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중요시하는 ‘전도’와 ‘세계선교’, ‘교회개척’을 합치면, 에큐메니칼 교회가 중요시하는 ‘통전적 입장’과 ‘삶의 질 개선’ 항목을 합친 것보다 7% 높다. 보고서에는 “양 진영이 대체로 균형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양 진영의 신학을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선교 현장에서의 현실 적합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이주민 선교의 부문과 관련해서는 이주노동자 선교 32%, 결혼이민여성 선교 29%, 다문화가정 자녀선교 19%, 유학생 선교 15%, 난민 선교 5%로 나타났다. 결혼이민여성과 다문화가정 자녀는 신분이 안정되고 접근과 후원이 비교적 용이하여 전도에 연결되기 때문에 교회와 기관이 많으나, 이주노동자 선교는 노동 상담이 전문지식과 경험을 요구하고, 힘들여 노력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부분 귀국하기 때문에 점차 감소추세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체류가 가능한 이주민 노동자들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정책 및 제도와 관련해서는 “총회는 다양화된 이주민 선교를 이해하고 평가하며 중장기 전망을 세워 각 부문과 형태, 규모, 예산과 대상국가에 따른 이주민 선교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 프로젝트 기관과의 협력의 바람직한 형태를 제시하며, 세계선교와 연계 및 확대 방안을 마련해서 정책에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의 적극적 이주민 정책과 지원센터 수립에 발맞춰 이주민 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이주민사회 선교사 또는 이주민 국내 선교사 제도를 수립하는 방안을 연구해서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이주민 교회들이 노회(연회, 지방회 등)에 가입할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244 세계선교의 길라잡이B. 이주민 노동자 선교의 실제이주민 노동자 선교가 더 왕성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 교단 총회와 노회, 그리고 개교회와 모든 선교단체와 기관 간 협력과 연대, 지원을 강화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특별히 지역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환경과 차별, 인권과 법률 등 종합적인 지원과 동시에 예배와 교육, 영성훈련을 통한 융합된 전략과 정책을 지원해 나가는 계획이 필요하다. 아울러 선교사 집중훈련에 이주민 선교 관련 과목을 신설하고, 해외선교사들과의 네트워킹 강화를 통해 본국으로 귀국하거나 국내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연계 사역을 추진하는 것도 필요한 시점이다.이 과정에서 이주민의 인권을 존중하며 우리나라에서 겪는 피해와 문제들을 해결하고 예방하는 사회복지를 부분적으로 지원하고 제공하므로 우리나라에 대한 선한 이미지와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하여 결국 전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주민 노동자들을 위해 의료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이주민 노동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 경우들이 많이 봤다.
우리나라는 2003년에 외국인근로자고용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해당 국가와의 양해각서를 체결해 노동자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고용허가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노동자가 실제 작업 내용과 근무환경을 모른 채 근로계약을 맺고, 직장 이동의 권리를 박탈하는 등의 문제점들이 발생했다.실제 노동의 현장에서 이주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권리는 밑바닥 수준이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장 이동의 자유조차 가로막고 있고, 체류 기간을 제한하여 장기체류를 막고 있는 형편이다. 농축산어업에서는 근로기준법 63조로 인해 휴게, 휴일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사업주의 비용을 줄여주기 위해 숙식비를 강제로 징수할 수 있게 하고 있고, 최근에는 심지어 최저임금마저 차등 적용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한 마디로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이주민 노동자들이라는 말이다.이를 개선하기 위해 입국 후 정식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농축수산업 근로자들의 고용 관계를 개선하며, 입국 후 교육 및 고용주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 이주민 노동자 선교와 관련된 사람이나 교회들, 기관들의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특별히 이주민 선교에 지역 교회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제안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주민 선교는 이주민 교회를 살리는 일부터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다음에 그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진 경우 그 교회를 살리려면 이주민 교회와 지역 교회가 함께 하는 ‘위드 처치’(with Church) 실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역 교회가 이주민 선교 사역자들을 양성해 이주민 교회로 파송할 것, 이주민 이주민 노동자 선교 245교회와 지역 교회와 대형교회가 함께 연합하는 이주민 선교 추진체 구성, 이주민 교회 사기진작과 연합사역을 통한 이주민 선교 부흥운동 전개 등이 필요하다고 본다.
3. 총회 차원에서의 지원
2019년 6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운동’의 일환으로 세계선교협의회(CWM) 제3차 선교지원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국내 30여 기관 관련 사업을 지원하고, 그 내용을 백서로 발간했다. 2016~2017년 진행된 프로그램을 최종 평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백서다.CWM은 1795년 런던선교회(LMS)란 명칭으로 출발한 선교회로, 1840년 리빙스턴을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했고, 선교 초기 조선의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기관이다. 한국 최초의 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1882)’를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 역시 런던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다.
한국교회와 이렇게 깊은 연결고리를 가진 CWM의 선교지원 프로그램은 전세계 회원교회들의 선교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총회에서는 한국사회의 대표적 소외계층인 이주민 사역에 초점을 맞춰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탈북민 선교 등의 사업 및 이 분야에 대한 교육훈련과 연구출판 사업 등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CWM 선교지원 프로그램 지원 금액은 236,791파운드로, 원화 342,000,000원이었다. 총회는 교육과정, 교재개발사업 5개 기관, 이주노동자 11개 기관, 결혼이주민 사역기관 11개 기관, 탈북자 사역 10개 기관 등 총 37개 기관을 선정해서 각각 선교 프로그램 재정을 지원했다.
이번 선교 지원 프로그램을 최종 평가했던 황홍렬 교수와 박흥순 소장은 이번 선교지원 프로그램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➊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이뤄지는 평화선교와 평화교육 주변에서 주변으로 향하는 선교,
➋ 환대를 또 다른 환대로 확장하는 선교,
➌ 협력과 연대하는 선교로 평가하며, 향후 프로그램 진행 시에는 기획과 선정과정에 전문가위원회가 상시적으로 활동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연구·교육·사업이 선순환 할 수 있는 구조로 활용되도록 방안을 제안했다.
총회 변창배 사무총장은 “결혼 이주민 문제 등은 총회가 잘 다루지 못한 분야였는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다루게 되어 감사하다.”며, “현장 지원 사업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교회, 노회, 신학교가 참여하도록 도운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CWM 프로그램 기금을 지원받은 ‘더불어함께 이주민센터’의 이학산 목사는 “영세한 이주민 단체가 평상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사업들을 할 수 있는 가뭄 끝에 단비 같은 지원이었다.”며,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에게 문자를 가르쳐주고, 다문화가족246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의 치유 수련회까지 진행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4. 이주민 노동자 선교의 열매
이곳에 게시하는 글은 2019년 8월 26일(월), 기독공보에 실렸던 고경수 목사(대구 평화교회, 대구 이민선교센터)의 편지다. 이 편지로 이주민 노동자 선교가 맺게 될 열매가 어떤 것들인지 직접 알 수 있다.지난번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일정으로 긴 시간 함께 하지 못하여 몇 자 적어본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난 때가 이주민들을 섬기는 교회와 선교센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2004년도였지. 2009년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귀국할 때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벌써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앞이마가 훤히 보이는 아저씨가 되었더구나.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서 주물공단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지게차에 발등을 다쳐 절뚝거리며 교회를 찾아왔을 때만 해도 지금의 크리스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 한국에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철새처럼 찾아온 이주 나그네들의 고통과 아픔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주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여기는 교회였는데, 어느 날 네가 귀국을 앞두고 “목사님! 저도 목사님처럼 우리나라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저를 선교사로 훈련받게 해 주세요.”라고 말할 때, 사실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주저했었지. 신앙생활의 연조도 짧고, 신학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과연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었던 거야. 당시 기아대책기구에서 봉사단 훈련을 마치고, 우리 교회가 파송교회로 보내기는 했어도, 반신반의하며 너의 사역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크리스가 기아대책 스텝으로 일한 지 3년이 지나 처음으로 네팔을 방문하였을 때, 나의 염려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수도 카투만두의 빈민시설뿐만 아니라 지방의 고산지대 학교와 마을을 다니며 그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며, 네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더욱이 올해 2월에 우리 부부가 재차 방문하였을 때 지역 NGO 회장으로 3개 지역 1,5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의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아주 소외된 체팡(Chepang)족 어린이들을 위한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300명이 넘는 학생들과 11명의 교사와 직원을 둔 학교(Evervision School)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크리스가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벌써 네가 사역을 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구나. 너의 사역을 우리 교회에서 지켜보던 스리랑카인 아상크와 중국인 정해연 부부도 너의 뒤를 따라 2012년 귀국하여 고향 동네에서 우리 교회 이름을 따서 ‘평화유치원(Peace Preschool)’을 하며 지역 어린이들을 돌보며 교회학교를 하고 있고, 작년 12월에는 방글라데시 밀턴이 너와 아상크의 사역에 도전을 받고, 고향으이주민 노동자 선교 247로 돌아가 차크마(Chakma)교회 사역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야. 우리 교회는 너를 비롯하여 3개국에서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를 현지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가 되었지만, 늘 안타까운 것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미자립교회로서 너희들이 필요로 하는 선교비나 생활비를 충분히 보내주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고 안타깝기만 하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선교의 열정과 비전을 품은 교회와 이웃 교회 성도들을 통하여 너와 너의 후배들의 사역을 이끌어 가고 계심을 믿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으로 주님의 은혜와 후원자들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우리 교회에 나오는 이주민들이 정결한 믿음과 사랑으로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고, 나아가 너의 뒤를 따라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도록 계속 좋은 소식들을 보내 주기 바란다. 가족 모두 주님의 은혜 가운데 강건하고, 사역 위에 주님 동행하시기를 마음 모아 기도한다.사랑한다, 믿음의 첫째 아들 크리스!
V. 나가는 말
전술한 바와 같이 21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 앞에는 수많은 도전과 응전의 상황들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중 하나가 이주민을 위한 선교의 장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주하여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새 1백만을 훨씬 넘어섰다. 합법적이 아닌 방법으로 이주하여 있는 사람들을 합한다고 하면 그 숫자가 훨씬 더 늘어난다. 이주의 종류도 다양하며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그들을 위한 선교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지난날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사역에만 치중해 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들어온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균형 있게 수행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구심적이며 원심적인 양방향에서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게 조성되었다. 또한 한국교회가 선교를 복음전도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던 상황에서 포괄적 혹은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선교를 해외에 나가서만 행하는 사역으로 이해하던 것을 해외만으로 한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장도 마련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해외선교를 수행하면서 경험했던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면서 사역하게 되는 장점을 도입할 뿐만 아니라 고비용의 선교를 저비용으로 돌릴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248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이런 현실 속에서 제대로 된 이주민 노동자 선교를 위해서는 선교의 대상인 이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주민 노동자는 경제적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종종 이주민 노동자들이 체류 자격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경우들이 있다. 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러한 체류 자격 때문에 개개인의 권리가 무시당한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각자가 놓인 상황과 관계없이 보호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이주민 노동자가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주민 노동자 선교에 참여하는 개인이나, 교회들, 기관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실이다.그동안 한국사회는 소위 이주노동자를 ‘외노자’, 또는 ‘불체자’라는 말로 법적 잣대로만 가두고 나누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인정하지 않아 왔다. 이 점은 앞으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일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에 대한 열기가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의 성장이 주춤한 현상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과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해외선교 역시 계속하여 상승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시점에 국내 이주자들의 선교는 성장의 정체 현상에 놓인 한국교회가 다시 성장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주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나오게 한다면 선교는 물론 다시 성장세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현재 우리나라의 시골 교회는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적지 않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때에 결혼 이주자로 온 여성들에게 복음전도와 섬김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면, 시골교회가 그 지역을 책임지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시 지속하는 중요한 방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눈앞에 전개된 현실을 책임지고 이주자 선교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주자 선교에 대한 전략들은 전국 교회와 교단 차원에서, 그리고 개 교회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안들이 있다. 함께 협력이 필요한 부분들은 최대한 협력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새롭게 주시는 과제임을 깨닫고 순종하는 역사가 우리 안에서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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