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강력한 지역주의 구조 하에서 정당공천제는 참신한 양질의 정치 신인보다는 기존 지역패권 정당과 소속 의원들의 낙점을 받은 지방토호나 노회한 정치꾼을 양산한다는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정치 불신이 팽배한 현실에서 시민들도 자연스럽게 정당공천제 폐지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평택시 의원들의 주장은 기성 정치권력을 조금이나마 더 유지하기 위한 ‘꼼수’에 불과해서 정치인이 지녀야 할 사회적 책임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왜 그런가? 기성 정치 세력인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고자 하는 역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왜 정당 공천 폐지가 기성 정치권을 오히려 강화하고 정치 발전을 저해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정당공천제 폐지론은 따지고 보면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개혁적이라기보다는 현직과 여당에 편향적인 보수적 주장이다. 그동안 한국 지방선거의 특성 중 하나로 높은 재선율 즉 현직효과가 지적되어 왔다. 지금 당장 정당공천제가 폐지된다면 최대의 수혜 계층은 유권자나 시민이 아니라 현직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다. 왜냐하면, 정당공천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현직 단체장의 교체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 추정과 달리 정당공천제가 정착되면서 현직 단체장의 재선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이는 1998년의 제2회 지방선거에서 현직의 재선율이 무려 64.7%였지만 이후 2002년 제3회 35.5%, 2006년 제4회 38.3%로 낮아지고 있는 추세에서 나타난다. 이렇기 때문에 정당공천제 폐지를 주장하는 선두에는 정당을 통해 이미 당선된 현직 단체장과 지방의원의 기득권 보장이라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또한, 대선이나 총선과 달리 지역에 한정된 지방정치의 특성과 규제위주의 선거법 때문에 현직 단체장은 유일하게 자신의 업적과 홍보를 유권자에게 선전할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현재 230곳의 자치단체장 중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소속 단체장이다.
결국 정당공천제 폐지론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현직 단체장과 현역 의원, 그것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에 유리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성 양당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논리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일종의 독과점 ‘카르텔’을 형성하겠다는 논리다.
둘째, 정당공천제 폐지론은 지역정치가 정당정치나 중앙정치와 무관한 탈(脫)계층, 초(超)정파, 비(非)이데올로기의 순수 행정 체계임을 가정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도 미래의 정치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전제이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진보성향의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당선 이후 경기도의회에서 벌어졌던 ‘무상급식’ 과 '학생인권조례' 논쟁을 보라.
지방정치 역시 계층과 이념에 따라 정책과 입법이 좌우되는 최 일선의 정치현장인 것이다. 만약 정당 표기가 없는 상황이라면 유권자의 입장에서 새누리당 후보와 진보정당 후보 중 누가 더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다. 누가 시장이 되면 성장과 개발에 재원을 쏟아 부을지, 아니면 복지와 생태에 주력할지 알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이고 신뢰할 방법은 아직까지는 정당 이외의 다른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정당공천제는 정당 활동을 보장하고 촉진하고 있는 헌법의 취지에 부합된다. 2003년 헌법재판소는 기초의회 의원선거에서 후보자의 정당표방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제84조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4대 지방선거 중 유독 기초의회 의원선거 후보자의 경우만 제한하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위헌결정을 내린 바 있는데, 아직까지 헌법재판소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데도 만약 평택시의회 의원들께서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스스로 양 당 공천을 받지 말고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신념 있는 정치인의 모습일 것이다.
넷째, 정당폐지론은 더러운 목욕물을 비우다 아기까지 버릴, 즉 현재의 정당들이 못마땅하고 밉다고 대중의 정치혐오증을 부추기는, 그럼으로써 정치발전의 토양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우려가 크다. 일상의 대화에서 한국인들은 너무나 정치적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반(反)정당 정서에 지배되고 있다. 시의회 의원들과 시민단체의 바람직한 역할은 이 간극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정치의 균형발전과 공존이 가능한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다. 평택시의회 의원들과 시민단체의 막강한 영향력은 당장의 손쉬운 정당공천제 폐지가 아니라 모든 정당이 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정당공천제를 시행할 수 있는 다양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하도록 촉구하는 방향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그 동안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아온 시민단체에서 도덕적 관점에서 정치권을 상대로 훈계하기는 쉽다. 하지만 참여자의 관점에서 중장기적으로 사회발전에 바람직한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 당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평택시의회 의원뿐만 아니라 일반 유권자들 다수가 정당공천제가 기여보다는 부작용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실정인데도, 이에 대한 평택시의회 의원들과 일부 시민단체의 대응은 개혁을 위한 지난하고 치열한 노력보다는 폐지라는 손쉬운 방법만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현행 정당공천제를 민주적이고 공정한 방향으로 개혁할 참신한 개선조치들을 내놓은바 있다. 거기에는 경쟁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3~4인 중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확대하고, 정당별 일괄 번호부여 방식을 추첨제로 바꾸며, 한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의석점유율을 제한(예를 들어 70%)하거나 로컬 파티(지역 풀뿌리 정당)를 허용하는 방안들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당들 스스로가 공천과정에서 일반 시민들과 당원들의 참여를 보장할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경선제 실시를 전격 선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에게 줄서기 하는 현행 공천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평택시의회 의원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개혁정신이다.
우리는 지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개혁의 지난함을 목격하였다. 정치적 역학 또는 정책 환경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전격 폐지보다 더 어려운 것이 사회적 합의를 구축하면서 진행되는 개혁이다. 모든 정당들은 유력 정치인이나 제왕적 지구당위원장의 전권 행사에 따라 지명되는 현행 정당공천제를 정치개혁의 차원에서 개선할 전면적 조치를 마련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아울러 비례 대표수를 늘리고 지역구 선출 위원 정수를 줄이는 것이 ‘현역’들이 해야 할 진정한 정치 개혁임을 잊지 말자. 현재의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책임정당정치를 신봉하는 소신 있는 정치인과 이를 앞서 추진할 당찬 정당이다.
우리 지역에서 정치 개혁을 위한 시민 토론회나 공청회 한 번 없는 것, 조례까지 제정된 마당에 예산 편성을 주민에게 돌려 줄 주민참여예산제 실시를 위한 현실적 노력이 전혀 없는 점 등이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다. 문제는 다시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