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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윤씨후손들~~海平尹氏 大宗會 공식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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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종중소식 스크랩 공지 90년의 역사 삼미초등학교
의영(한성윤공) 추천 1 조회 355 12.12.16 23:37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삼은三隱 윤학영尹學榮 선생의 좋은마을 만들기

 

수원시가 열정을 갖고 추진하고 있는 좋은마을 만들기가 1920년대에 수원의 한 지역이었던 성호면 외삼미리(현 오산시 외삼미동)에서 윤학영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평윤씨海平尹氏한성공파漢城公派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신 11윤응상尹應祥 조부祖父로 시작되어 현종손宗孫 홍주 에 이르기까지 오산 삼미마을에서 500여년을 이어온 가문의 한 분이신 삼은三隱 윤학영尹學榮(1898-1966)선생을 얘기하고자 한다.

저 또한 해평윤씨 한성공파 24세손으로 한 집안의 이야기보다는 한마을의 미담사례 이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소개하고자 합니다.

선생께서는 추오급인推吾及人이라는 즉 나로 하여금 미루어 남을 생각케하라는 가훈家訓처럼 그의 피와 땀이 구석구석 맺힌 삼미 마을은 자작농自作農으로 흉년에도 보리고개를 모르고 지냈으며, 마을 한가운데는 문맹퇴치文盲退治를 위하여 192344일 교장校長 윤학영尹學榮 교사敎舍12칸 운동장129평 교사敎師2명 학생85명으로 삼미의숙三美義塾을 개교하여 90년의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으로 현재 삼미초등학교로 이어오고 있다.

그 당시 손바닥만한 소작을 가꾸는 삼미마을 농민으로서는 신학문을 배우러 10리 나 되는 오산에 있는 오산공립보통학교烏山公立普通學校(현 성호초등학교)까지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구멍에 풀칠조차 할 수 없는 주제에 무슨 학문이냐는 핀잔을 무릅쓰고 동분서주 유지들을 설득하여 독지가 윤필선의 후의厚意로 무너져가는 초가집에 광목 커텐으로 벽을 삼아 삼미의숙三美義塾을 개교한 것이 1922년 겨울이었다.

그의 열성으로 마을엔 윤씨尹氏 종중학계宗中學契가 생겨 이를 후원後援했으며, 사재私財를 털어 월사금을 받기는 커녕 학용품까지 대주면서 학생들을 모집하였으나 입에 풀칠하기 바쁜 사람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후엔 제법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3-4호정도의 자작농自作農을 제외하고는 손바닥만한 소작으론 보리고개만 닥치면 학교는 텅텅 비어야만 했다.

자녀들의 학용품을 마련하기위해 술과 담배도 끊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선생댁에 일하러온 농민들에게 점심을 줄때는 반드시 연필.공책.담배를 광주리에 담아놓고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대부분 담배를 선택했으나 선생께서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설득한 후에는 연필과 공책을 선택하여 광주리에는 담배만 남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녀교육을 위한 생활터전이 급선 문제라고 생각한 선생께서는 1934년 약 60여 농가 가운데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는 사람이 네 다섯 가구에 지나지 아니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남의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소작농이었다.

선생께서는 자기 땅 만들기 자작농계自作農契를 조직 하게 된다.

이 운동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자작농自作農을 영위하는 지주를 설득하여 금융조합金融組合에서 돈을 융자케하고 소작농들에게 서 마지기 자기농사를 짓게 하였다.

가을 추수에 수확한 쌀을 창고에 보관하여 저축절약貯蓄節約하는 검소한 생활을 하게하여 닷새마다 배급을 주고 남는 쌀로 3년만에 땅값을 치르게하였고, 마을에서 농한기에 놀음을 하지 못하게 하고 가마니짜기를 독려하는 등 마을을 낙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노력하고 근면성실하면 누구나 다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선생께서 마을사람에게 전수한 것이다.

천수답으로 하늘에만 의존하던 농사를 위하여 삼미 제1.2저수지를 축조하여 걱정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가뭄에 대비하는 농업을 이룩하셨다.

1936년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는 청소년을 위하여 농업실습학교를 만들어 과학적인 영농방법을 배우게하여 우수한 농업인이 되게하여 영농지도자로 활동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께서는 화성華城 궐리사闕里祠 중건重建에도 참여하게 된다.

화성華城 궐리사闕里祠는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와 같이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우리나라 2대 궐리사 중 하나인데 유일하게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사액賜額이 내려진 곳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朝鮮 중종中宗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던 공자孔子64대 후손인 공서린 선생께서 서재書齋를 세우고 은행나무를 심고 그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문하제자들에게 학문을 독려했던 곳으로 1871년 고종8년 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령을 내려 훼철毁撤 되었다가 1926년 윤학영 선생을 비롯한 지방 유림들의 노력으로 다시 중건重建되었다.

윤학영 선생께서는 유학만이 땅에 떨어진 윤리도덕을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받들고 실천하는데 노력하셨으며 그 일환으로 궐리사의 중건에 힘을 기울이셨다.

1948년 오산에 최초의 중학 교육이 시작되었으나 6.25사변으로 불타버린 학교를 다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 지역유지들의 모금운동으로 교실 6칸으로 상량上樑을 하게 이르렀다.

그는 일찍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다. 그래서 삼미의숙三美義塾을 젊은 날 세우지 않았던가, 낙후되고 가난한 농촌을 살리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너무나 가난한 사람이 많아서 수원이나 서울로 학생을 진학시키기는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이 고장에 반듯한 중학교가 설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50년 해방 후 처음 실시하는 주민의 직접선거로 초대初代 면장面長에 취임하게 된다. 6.25사변으로 허물어진 시가지와 민심을 수습하고 폐허와 잿더미 위에서 오산지역을 재건하는데 총력을 경주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1957년에는 일제강점 및 6.25전쟁으로 소실된 세마대洗馬臺를 다시 복원하여 후손들에게 선인들의 위대한 업적을 일께워 주어야한다며, 선생께서는 물신양면으로 세마대 복원사업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평소 자녀들에게 조상을 잘 모시라고 말씀을 했고, 또 몸소 실천 하였다.

조상의 묘를 항상 잘 살피고 제사를 모실 때 는 분에 넘치게 허례허식하지 말고 근검절약하여 송편 한 그릇으로 모시더라도 공손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모시도록 교육을 시켰다.

자손들 몸에 해롭다고 색소가 들어있는 사탕은 차례를 지낼 때 쓰지 못하게 하셨던 일화가 있다.

제사를 모실 때 부녀자도 참석케 하셨고 네 번 절하는 것도 남자와 똑같이 두 번 절하게 하는 등 남녀평등의 현실적 감각을 지니고 계셨다.

 

1966년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 추수를 마친 늦가을 그 해 시제를 잘 모시고 1015일 하늘의 부르심에 의하여 선생께서는 영원히 영면永眠하게 된다.

 

선생께서 살아생전 좋은 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 수많은 일들을 오산지역 분들이 세워주신 추모비문으로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추모비문

 

선생은 1898년 음 112일 외삼미리 에서 태어나시어

19661127일 가시던 날까지 평생 이 고장에 사셨다

남을 위해 생각하고 고장을 위해 일하신 분

사셨던 세상에 끼침이 크셨고 가셔선 후세에 남김이 많으신 분

일제시 젊으신 날에 세우신 삼미의숙 백년의 대계이라

길이길이 빛나고 살 길이 여기 있다

선생이 닦으신 길 홍농계며 자작농계 저수사업 조림사업

내 고장의 농민들이 힘입어 살던 길 부민과 흥국의 터전 밝히시고 가신 분

해방 후 나라 서선 면장 소임 다하시고

황폐된 오산 설계 오늘날엔 자랑이고 심혈을 기울이셔서

터전 닦은 오산학원 예서 배워 이 땅의 기둥 되고

인후하신 천성으로 모성사업 펴셔서

궐리사 춘추 제향 만대에 이으신 분

 

이 고장이 낳은 교육자

이 땅의 농촌 사업가

식견이 탁월한 선견의 지도자

여기 윤학영 선생 고이 잠드신 곳

선생 생애의 덕을 칭송하고

선생을 추모하여 비를 여기 세운다

 

 

 

발기인

 

화성군 오산읍장 한 세 택

학교법인 오산학원 이사장 김 형 태

화성궐리사 유지회장 고 준 덕

화성문화원장 유 희 훈

오산번영회장 조 광 현

오산시가 건설조합대표 공 이 택

삼미학교 직원 학부형 일 동

삼미 1·2 수리계원 일 동

지방유지 일 동

 

서기 1967년 정미 429

글 구 건

글씨 이기춘

 

 

尹學榮先生追慕碑

 

三美生長삼미생장 性本仁厚성본인후

 

普渡慈航보도자항 濟衆先志제중선지

 

創設義塾창설의숙 慕聖敦行모성돈행

 

鰲山域?오산역활 鶴洞校高학동교고

 

庶土交正서토교정 台德先지태덕선

 

不忘其蹟불망기적 立石追慕입석추모

 

固城后人 李圭榮 選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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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2.19 21:08

    첫댓글 한때 오산에 정주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훌륭하신 종친께서 계신줄 몰랐었네요, 근방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을텐데, 기회가 되면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 저도 지나가다가 보았습니다.
    방문해서 인사드려도 되는지 주인허락도없이

  • 작성자 19.04.23 01:01

    언제든지 연락주세요(윤의영010-5572-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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