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4월 22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지하 1층 국제회의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이학수, 윤종용 등 30여명의 그룹 사장단이 배석했다. 이 회장은 연단에 서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쓰고는 미리 준비한 기자회견문을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특검에 따른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이 회장은 짧은 ‘사과 및 퇴진 성명’을 읽은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은 채 서둘러 회견장을 나갔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일부 사장단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회장은 삼성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거액의 비자금 조성, 경영권 편법승계 의혹 등을 폭로한 데 이어 특별검사가 배임·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자신을 불구속 기소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과 등기이사, 문화재단 이사장 등 삼성과 관련한 일체의 직함을 내놓았다. 명예회장도 맡지 않았다.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도 경영권 편법승계 과정을 주도했다는 오명을 쓴 채 해체됐다. 삼성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경영쇄신안을 내놓았다.
그렇게 ‘이건희의 삼성’ 시대는 막을 내리는 듯했다. 1987년 부친이자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 사후에 경영권을 물려받은 지 21년 만이었다. 퇴진 당시 66세였던 나이와 폐 수술 등 건강 문제를 고려할 때 이 회장이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점쳐졌다. 자신의 퇴진을 계기로 외아들 이재용(현 삼성전자 부사장)에게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빨리 넘겨주지 않겠냐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2010년 3월 24일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회장으로 전격 복귀했다. ‘그룹 회장’이란 공식 직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룹의 주력 회사인 삼성전자 회장을 맡았다는 것은 삼성그룹 회장으로 복귀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 회장은 퇴진 때와 달리 언론에 나타나지 않고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 팀장(부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이 회장의 복귀를 공식 발표했다. 국내외 언론은 대서특필했고 AP통신은 “한국 기업의 아이콘이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가운데) 가족. 왼쪽부터 이부진(첫째딸), 이재용(아들), 홍라희(부인), 이서현(둘째딸). photo 삼성전자 제공
막후에선 변함없는 영향력
삼성 사장단은 2월 24일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가운데 글로벌 사업기회를 선점하기 위해 이 회장의 경륜과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건의서를 이 회장에게 전달했다. 이 회장은 한 달 뒤 이를 수락하는 형식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 회장의 복귀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계획된 수순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여론의 향방을 체크하며 복귀 시기를 저울질하다 적절한 때가 되자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회장의 복귀설은 작년부터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등 경영진은 “삼성의 장점인 스피드 경영을 살리려면 오너인 이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거듭했다. 대한상의 등 재계 단체들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와 글로벌 경쟁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이 회장의 사면과 경영 복귀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이 회장은 작년 대법원에서 특검이 기소한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탈세 부분 등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의 형을 받았다. 그마저도 지난해 말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단독 사면을 받아 경영 복귀 발판을 마련했다. 이 회장은 공식적으로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는 대주주로서 변함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작년 삼성전자 냉장고 폭발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 회장이 대로했다는 말에 담당 임원이 즉시 문책당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작년 말 이뤄진 삼성 사장단 인사는 이 회장에게 사전에 보고하고 추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1월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가전전시회 CES에 그룹 사장단을 이끌고 참관,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학수 고문 등 전략기획실 출신 측근들도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수행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취재진에게 “경영 복귀를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2월에는 “삼성이 어려워지면 돕겠다”는 말도 했다. 이 회장의 거듭된 발언에도 불구하고 삼성 측은 “원론적인 말을 한 것이지 구체적인 복귀 계획은 없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삼성 관계자들은 “이 회장이 없는 사이 그룹의 의사 결정 속도가 이전보다 많이 늦어진 게 사실”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삼성과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이 회장의 복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해온 것이다.
이 회장은 결국 지난 3월 24일 공식적으로 삼성전자 회장에 복귀했다. 이 회장은 복귀 일성으로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이 무너진다. 삼성이 어찌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삼성이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전문경영인들의 회사 운영 스타일이 성에 차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삼성이 벤치마킹했던 일본 도요타가 대량리콜 사태에 휘말려 품질경영 신화가 무너지고, 미국 애플과 구글이 스마트폰을 앞세워 급성장하는 데도 경영진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질책도 담겨있다.
삼성은 작년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도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상당 부분 환율 효과에 기댄 것이었고 수 년째 검토해온 신수종 사업(신규사업) 발굴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은 경영 복귀를 계기로 조직의 기강을 다잡고 미래 신사업 발굴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브레인 조직 부활… 이학수 행보 주목
이에 따라 계열사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돼온 삼성그룹의 경영이 다시 대주주 오너경영으로 회귀할 조짐이다. 삼성이 자랑해온 ‘삼각편대’ 경영도 부활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그동안 이건희 회장(오너십)과 전략기획실(종합조정기능), 계열사 CEO 등 이른바 ‘삼각편대’의 활약이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자평해 왔다.
이 회장은 주요 현안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계열사별로 자율경영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대규모 투자 결정이나 계열사 간 중복사업 정리, 신사업 진출 등 주요 의사결정은 직접 내리겠다는 방침이다.
이 회장의 구상을 뒷받침할 조직도 다시 만들어진다. 삼성 이인용 부사장은 “삼성전자에 회장실을 설치하고 사장단협의회 산하에 업무지원실, 브랜드관리실, 윤리경영실로 확대개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전략기획실이 사실상 부활하는 것이다.
이 회장과 동반 퇴진했던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의 행보도 주목된다. 이 고문은 이 회장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는 것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다. 이 회장의 메시지는 늘 최측근인 이 고문과 전략기획실을 통해서 그룹에 전파됐다.
이 고문은 2년 전 이건희 회장과 동반 퇴진한 후에도 삼성그룹과 이 회장 사이의 통로 역할을 해왔다. 올해 미국 CES 2010 전시회, 호암 100주년 기념식 등 이건희 회장의 공식 행보에도 동행해 이 회장의 신임이 변함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고문은 새로운 조직으로 부활하는 전략기획실의 실질적인 수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 여론이 부정적일 경우 막후에서 활동하더라도 과거의 위상을 되찾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경영능력 보여줘야
이 회장의 경영 복귀로 삼성의 경영권 승계는 다소 늦춰질 전망이다. 이 회장은 지난 1월 자녀들의 경영승계와 관련 “아직 멀었다. 더 배워야 한다”고 말해 시기상조임을 시사했다. 지금까지 자녀들이 보여준 경영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워 당분간은 자신이 직접 그룹을 챙기겠다는 뜻이다.
증권가에서는 이 회장의 복귀를 계기로 이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과 누이동생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 사이에 본격적인 ‘후계 경쟁’이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3남인 이 회장이 두 형을 제치고 삼성을 물려받은 것처럼 자녀들도 경영능력에 따라 이 회장이 달리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부진 전무가 경영 능력을 입증한다면 후계구도가 변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삼성 측은 이재용 부사장과 이부진 전무의 경쟁구도가 “터무니없다” 고 일축한다. 이재용 부사장 체제는 이미 확고하며 이건희 회장이 복귀하면서 이재용 부사장에게 더욱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게 공식적인 설명이다. 장녀 이부진 전무나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는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살려 오빠 이재용 부사장을 돕는 역할에 머물 걸로 보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건희 회장의 의중이다. 현재 자녀들이 보유한 지분구조는 큰 의미가 없다. 이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특정 자녀에게 몰아줄 수도 있고 인위적인 교통 정리에 나설 수도 있다.
이부진 전무가 작년 하반기부터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전무를 겸임하게 된 것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이 전무는 호텔신라의 매출을 크게 확대하고 면세점 사업에 신규 진출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감한 승부를 즐기면서도 사소한 부분까지 집착하는 성격이 이 회장을 무척 닮았다는 평이다.
반면 이재용 부사장은 지금까지 삼성전자에서 뚜렷한 실적을 올리기보다는 장기간 동안 그룹 전반에 대한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그는 작년 말 삼성 사장단 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아 본격적으로 경영능력을 검증받을 시험대에 올랐다. COO는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인 최지성 사장에 이어 회사의 영업, 인사, 재무, 연구개발 등을 총괄하는 ‘넘버2’의 자리로 얘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1966년 당시 삼성그룹 계열사인 동양방송에 입사, 1987년 삼성그룹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21년간 혹독한 경영 수업을 거쳤다”며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나선 지 10년이 되지 않는 이 부사장도 앞으로 경영능력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공화국’ 곱지 않은 시선 극복해야
재계는 이건희 회장의 복귀를 즉각 환영했다. 하지만 삼성은 여론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해 연말 이 회장이 단독 특별사면을 받고 3개월 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한 것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식의 여론이 우세할 경우 삼성으로서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따가운 비판을 보내고 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법과 정의는 오간 데 없고 국민 기만행위이자 족벌 삼성공화국으로 회귀하는 신호탄”이라고 비난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김건호 경제정책실 부장은 “재벌 총수 일가에 의한 ‘황제 경영’ 폐해를 유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총수 일가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 삼성의 경영쇄신안은 2년이 지난 지금 모두 ‘없던 일’이라고 선언한 셈”이라며 “당시 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려는 대국민 사기극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정도 반응은 삼성에서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문제는 일반인의 여론 향방이다. 이는 앞으로 이건희 회장과 삼성그룹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다. 삼성이 글로벌 사업을 확대하고 신사업 분야에서 탁월한 실적을 내면 ‘오너 경영의 장점’이 부각될 것이고 반면 실적이 곤두박질친다면 오너 일가의 전횡이니 ‘삼성공화국’이니 하는 지탄이 쏟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