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석계리(石溪里)
외동읍 석계리(石溪里)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과 김씨부인의 충절이 깃든 치술령(鵄述嶺)의 동쪽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치술령에서 이 마을 가운데로 흘러내리는 ‘석계거랑’에 유난히 돌이 많아 ‘돌거랑’, ‘돌기’, ‘돌계(乭溪)’, ‘석계(石溪)’, ‘석촌(石村)’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랑’이란 표준어(標準語)로 ‘시내’ 또는 ‘개울’을 말한다. 준말로 ‘걸’이라고도 한다. ‘시냇물’을 ‘걸물’이라고도 하고, ‘시냇가’를 ‘걸가’라고도 한다.
그리운 내 고향 석계리
석계리(石溪里)는 또 박제상을 그리다가 치술령 망부석이 되었다는 김씨부인의 혼령이 새가되어 숨었다는 은을암(隱乙岩)의 전설에 연유하여 ‘석을지(石乙只)’라고도 한다. 그리고 1882년에 작성한 호적단자(戶籍單子)에서는 ‘도계(道溪)’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은 경주 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방면으로 가다가 모화역에서 14번 국도를 따라 문산공단 쪽으로 우회전하여 문산리를 지나면 치술령(鵄述嶺)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관내에 석계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석계리는 위치에 따라 하석리(석계 1리), 상석리(석계 2리)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하석리, 상석리 일부를 묶어 석계리라 하였다.
석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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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술령(鵄述嶺)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석계초등학교는 작은 오솔길을 지나 교정 안을 들어서면 잘 가꿔진 소나무가 마치 정원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석계초등학교는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光復)과 더불어 이 고장 인재육영(人才育英)을 꿈꾸던 고 박성진씨가 석계리, 문산리, 녹동리, 구어리 지역주민들의 대표들과 수차의 논의를 거듭한 끝에 동년 9월 20일 ‘소학교설립기성회(小學校設立期成會)’를 조직하였다.
그 시절 석계초등학교
이후 동 소학교기성회는 박성진씨를 임시회장(臨時會長)으로 선출하여 업무를 추진하던 중 1945년 10월 7일, 당시 석계청년회(石溪靑年會)로부터 석계금주단연회(石溪禁酒斷煙會) 회옥(會屋 ; 사무실 건물)을 희사 받아 ‘석계계명소학교(石溪鷄鳴小學校)’라 이름하고, 당시 이 지역에서 통학하던 입실국민학교(入室國民學校) 1학년생들을 인수받아 개교하였다.
고 박성진씨는 학교 설립추진에 따른 재정난(財政難) 해소를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특별성금으로 기성회(期成會)에 희사하였으며, 아동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여 가르치고, 같이 뛰고, 풍금치고, 노래 부르는 등 석계초등학교(石溪初等學校)의 설립과 육성에 열과 성을 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또 가내의 우환(憂患)을 제쳐두고 오로지 교육일념(敎育一念)에만 그 정열(情熱)을 쏟다보니 가사사정이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고 한다. 보다 못한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이 그의 가사를 대신 보살펴주고, 가족 중에 환자(患者)가 생기면 시중과 치료를 돌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 시절 석계초등학교
이러한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1947년 9월 1일 당국에서는 그를 정식교사(正式敎師)로 발령하여 배치해주었고, 1947년 12월 9일 초대교장(校長) 이득우(李得雨) 선생님이 부임함으로써 고난과 역투의 2년간을 마감하고, 대망의 석계초등학교 출범을 맞이하게 되었다. 개교 당시와 지금까지의 연혁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1945.10.07. 사립 석계계명소학교(광남학교) 개교
1946.04.06. 입실국민학교 석계분교
1947.09.01. 석계국민학교 개교
1982.03.01. 병설 유치원 개원(1학급 편성)
1988.11.21. 4개 교실 및 현관 신축
1996.03.01. 석계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9.03.01. 디지털 교과서 연구학교 지정(3년간)
2013.02.20 제64회 졸업(총 3,62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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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석계초등학교 학생들
그러나 당시는 정부재정(政府財政)이 말이 아니라 가교사(假校舍)의 건축과 부지(敷地)의 매입은 주민의 호주머니와 특지가(特志家)의 주머니에서 모두 갹출(醵出)되었다.
관할지역 주민의 특지가가 선봉에서 이끌고, 주민들이 단합된 힘으로 성원하는 등 그야말로 제도에 앞서는 지방자치적(地方自治的)이며 역동적(力動的)인 교육사업(敎育事業)을 전개하였다.
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열성(熱誠)으로 학교부지(學校敷地)가 정지(整地)되고, 교사(校舍)가 건축되었으며, 운동장이 넓혀지고, 교실에 교육자재(敎育資材)가 속속 차게 되는 등 하나 둘 학교의 형태와 연륜(年輪)이 쌓여 오늘의 석계초등학교(石溪初等學校)의 전통과 토대(土臺)가 마련된 것이다.
초기의 석계초등학교 현관
석계초등학교(石溪初等學校)는 지난 1951년, 76명의 1회 졸업생을 시작으로 2013년 64회 졸업식을 거치며 총 3천627명의 동문을 배출했다.
1960년대 말에는 전교생이 700명이 넘은 적도 있었지만, 전형적(典型的)인 농촌학교로서 그 수가 차츰 감소(減少)해 지금은 남학생 16명, 여학생 18명 등 34명의 재학생(在學生)을 두고 있다. 석계초등학교의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교직원현황
구분 |
교 원 |
일 반 직 |
계 |
직급 |
교장 |
교감 |
교사 |
유치원
교사 |
행정
실장 |
조무원 |
교무
보조 |
남 |
1 |
|
2 |
|
|
1 |
|
4 |
여 |
|
1 |
4 |
1 |
1 |
|
1 |
8 |
계 |
1 |
1 |
6 |
1 |
1 |
1 |
1 |
12 |
초기의 석계초등학교 자료실
학생 현황
학년 |
1 |
2 |
3 |
4 |
5 |
6 |
계 |
아
동
수 |
남 |
|
2 |
1 |
4 |
4 |
5 |
16 |
여 |
2 |
4 |
|
5 |
2 |
5 |
18 |
계 |
2 |
6 |
1 |
9 |
6 |
10 |
34 |
(700명이나 되던 아이들이 모두들 어디로 가버리고
3학년은 아예 1명 뿐이고, 1학년도 2명 뿐이다)
지난 1954년 설립된 석계초등학교의 계명장학회(鷄鳴獎學會)는 이 학교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장학회의 재원은 장학답(獎學畓)인데, 그 조성내력을 잠시 알아본다.
석계초등학교의 장학답(獎學畓)은 1974년에 동교 제1회 졸업생들이 숲과 하천부지를 매입하여 일군 1천500여평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 동교 17, 19대 교장을 역임한 바 있는 신용범 전교장이 1980년대 초에 교사로 재직할 때, 확보한 대여장학우(貸與獎學牛) 30두, 그리고 1974년에 매입한 하천부지의 사과밭을 매각하여 확보한 1천500여평 등 총 3천여 평의 장학답(獎學畓)을 확보하여 본격적인 계명장학회(鷄鳴獎學會) 운영의 기반을 세웠다.
그 시절 석계초등학교 조회
석계초등학교에서는 이 장학답(獎學畓) 운영의 수익금으로 장학금지급 및 재학생복지, 교육기반조성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초등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학회(獎學會)라 할 수 있다.
현재도 신용범 전 교장이 계명장학회(鷄鳴獎學會)를 운영하며 현장체험, 학습활동을 지원하고, 매년 졸업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리고 석계초등학교(石溪初等學校)에는 학부형들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동창회(同窓會)의 활동이 특히 활발하다.
초기의 석계국민학교 당시의 교기
담장의 꽃 심기, 실습지 개간, 운동장보수 등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 도움을 주고 있으며, 동창회(同窓會) 및 선배들의 지원으로 20여종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석계초등학교(石溪初等學校) 12회 졸업생인 김대원(본명 김대곤) 시인의 석계향가(石溪鄕歌)를 소개한다.
석계향가(石溪鄕歌)
석계초등학교 제12회 김대원
하늘이 축복한 땅 慶州 金鰲 精誠 등불
結實로 밝혀 맺힌 鵄述嶺 神母 품에
忠孝烈義 四節 가꾼 외동 석계초등학교
靑史에 뿌리 내린 望夫石 魂을 담아
만세 밝힐 인재 키워 부국강토 이뤄내자
흰 돌 맑은 개울 가슴 가슴 고이 담고
어린 시절 웃고 뛰며 함께 자란 석계동향
朴堤上家 세 효녀[아기아경아영] 義 따르고
백결 문량 藝術 혼 청렴지덕 휘날리며
대한의 참 일군 석계 모교 빛내보자
제상의 저 충절 국대부인 그 정절로
인의예절 터 밭 苗本 人本理想 키워내며
석계의 이 향토색 온 누리에 펼쳐가자
뒤 진자 끌어 주고 앞 선자 밀어 주며
미쳐 뛰는 저 倭國 우리 뭉쳐 바로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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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석계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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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초등학교는 그 오랜 역사에 걸맞게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이에 따라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국가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출향인사(出鄕人士)들도 많은 수에 이르고 있다.
이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보다는 졸업회수별로 도표화(圖表化)하면, 이래 표와 같다. 열거된 분들은 우리 향우회 카페의 게재문(揭載文)이나, 그 답글을 근거와 기준으로 했다는 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란다.
석계초등학교 출신 주요 출향인사
회수 |
성 명 |
주요경력 및 현직 |
7 |
신영자 |
숙대졸, 영문학박사, 숙대교수 |
7 |
임금광 |
전 철도청 공업부이사관 |
9 |
신용태 |
종신물류 대표, 재경 외동향우회 전임 회장 |
9 |
박상환 |
국정원 1급 사무관,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소장 |
9 |
노도현 |
육영재단 이사장 |
9 |
신용모 |
롯데호텔 지배인 |
9 |
박명수 |
부산 신라철강 사장 |
10 |
정종기 |
경북 농업기술원 기술보급국장 |
12 |
김대원
(김대곤) |
시인, 국제팬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
13 |
신정주 |
부산 해맑은 식품 사장 |
14 |
신 완 |
서울 서초구 ‘뉴욕오웬테일러(서초양복점)’ 경영 |
18 |
박원동 |
육군소장, 국군기무사령부 참모장 |
19 |
신용업 |
체육학박사, 용인대 대학원 교수 |
20 |
남영호 |
경제학박사, 건국대 교수 |
20 |
천태자 |
화가(국전 입선2회), 울산 학성동-한국화 연구실 개설 운영 |
20 |
김한권 |
부산지방국세청 조사2국 국세조사관 |
21 |
안성락 |
국세청 명예퇴직하여 세무사 개업 중(김해시) |
21 |
임만혁 |
현 국정원사무관, 청와대경호실근무 |
25 |
김재권 |
공군대령(공군본부)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 |
여기에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다른 학교와는 달리 석계초등학교에는 이 학교 출신 여학생(女學生)들이 학계(學界)와 관계(官界), 예술계(藝術界)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여 모교와 외동읍(外東邑)의 명예와 긍지를 한껏 고조하여 왔다는 점이다.
제7회 신영자 교수(敎授), 10회 정종기 국장(局長), 20회 천태자 화백(畵伯)이 그녀들이다. 그리고 2015년 5월 현재 MBC의 ‘화정’(華政)에 출연하고 있는 탤런트 신은정도 석계리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을 졸업 회수 또는 연령대 순으로 소개한다.
여성
졸업생 |
주요 경력 |
신영자
교 수 |
석계초등학교 제7회 졸업생인 신영자 숙명여대교수(영문학 박사)는 경주여·중고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박사는 미국 앤디에나, 말래이대학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귀국한 후 현재 숙명여대에서 문학과 영어교육 등의 강의를 담당해 왔으며, 2008년부터는 재경 경주여·중고총동창회장을 맡기도 했었다.
신영자 교수
(모교인 경주여고에서의 특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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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기
국 장 |
경상북도 농업기술원 기술보급국장을 역임한 정종기 국장은 1947년, 석계리에서 출생하여 석계초등학교 10회와 경주여중고를 졸업한 후 지난 1967년 칠곡군 농촌지도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정국장은 1990년 경북도농업기술원 초대 생활기술과장에 부임한 이래 13년 동안이나 과장직을 수행하면서 여성농업인의 능력 배양과 농외소득원 개발, 각종 복지사업 추진 등으로 여성농업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온 인물이다.
특히 농촌생활개선사업 종합평가에서는 5회에 걸쳐 전국 최우수상을 받았고, 생활개선종합시범마을 업적 경진대회에서는 일곱 번이나 전국 최우수상을 받았다.
정국장은 지난 2003년, 농촌진흥청 개청 이래 42년 만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농업기술원 여성국장에 임명됨으로써 공직사회의 새로운 모델이 된바 있다.
정종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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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자
화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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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동향우회의 회원이기도 한 천태자 화백은 석계초등학교 20회 출신으로 현재 울산에서 롯데문화센터에 출강(出講)하면서 한국화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천화백은 울산광역시미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울산미전(蔚山美展)에서 특선 2회, 경남미전 입선(入選), 대한민국 미전 특선과 입선의 관록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울산시 수상작가 초대전(招待展) 및 그룹전 등 여러 차례의 미전을 치러왔다.
천태자의 한지(韓紙) 부조작품(浮彫作品)
천화백은 현재 한국미협(韓國美協)과 울산미협(蔚山美協) 초대작가로 활약하고 있으며, 묵의회, 울산한국화회, 한국화구상작가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천태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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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정
탤런트 |
탤런트 신은정은 회원님들이 잘 아시는 대로 석계리 출신인 재경 외동향우회 신용태 전 회장의 영애(令愛)로 ‘에덴의 동쪽’(MBC), ‘감격시대’(KBS 2)에서 열연(熱演)을 보여준바 있다.
비록 석계초등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석계초등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치술령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외동(外東)의 딸이라는 점에서 여기에서 소개한다.
신은정이 그동안 전개했던 활약상(活躍狀)은 우리 향우회 카페에서 여러 회원님들이 여러 번 소개한바 있어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지금(2015년 5월 현재)은 MBC의 50부작 대하 사극 ‘화정’(華政)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 역을 맡아 그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화정’에서의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조선조 선조(宣祖)의 계비(繼妃)로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마자 아들 영창대군과 부친 김제남을 잃고, 폐서인이 되는 수모를 겪게 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명문가의 여식으로 세상의 티 하나 묻히지 않고 맑고 곱게 자라 19세에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그리고 선조가 죽자 정치적 욕망이 없었던 그녀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광해군의 냉정하지만 반듯한 성정을 믿고 의지했다. 어쩌면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유약한 믿음의 대가로 광해의 손에 정명공주마저 잃고 서궁(西宮)에 유폐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을 오직 분노와 복수심만으로 채워나간다. 정명공주가 태중에 있을 때 남사고(南師古)를 통해 예언을 들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다. 신은정의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한다.
‘화정’(華政)에서의 신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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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리(石溪里)는 치술령 동쪽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논농사와 밭농사로 비교적 부유한 마을로 알려져 왔다.
10여개의 자연부락(自然部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랫돌기(하석)의 평지마을, 중지마을, 아릿마을, 양지마을, 고천(古泉)이 석계1리, 웃돌기(상석)의 큰마을, 수서(水西), 시래(時來), 마대(馬垈)가 석계2리로 구획되어 있다. 석계리(石溪里)의 자연부락과 중요 지형지물, 지방문화재를 소개한다.
석계리
○ 아랫돌기
석계리(石溪里)의 아래쪽 마을을 통칭해서 ‘아랫돌기’, ‘하돌기’, ‘하석(下石)’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석계1리 지역이다. 이 마을에 있는 당목(堂木)은 수령 300년 된 회나무(회화나무)로 1982년에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었다.
○ 평지마을
‘아랫돌기(석계1리)’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며, 석계리(石溪里)의 중심마을이다. 평지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평지마을’ 혹은 ‘평리(平里)’라 부른다. 한 때는 시장(市場)이 열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10년 전에 풍천인(豊川人) 임균(任勻)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대구(大邱)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고 하며, 풍천임(任)씨, 영월신(辛)씨 등이 주성을 이루고 있다.
꽃피는 내고향 석계리
○ 중지마을
‘평지마을’과 ‘양지마을’의 중간에 있으므로 ‘가운데말’, ‘중리(中里)’, ‘중지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과거에는 ‘양리(陽里)’와 함께 ‘건너마을’이라고 불리었다.
약 370년 전 풍천임씨(豊川任氏)와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처음 입향(入鄕)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풍천임씨와 영월신씨가 주로 살고 있다.
○ 아릿마을
석계리(石溪里)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아릿말’, ‘아릿마을’ 혹은 ‘하리(下里)’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담안각단’이었다가 ‘아릿마을’로 불리어졌고, 후에 ‘하리(下里)’로 불리어 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 전 김원경(金元鏡)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처음으로 입향(入鄕)하였고, 이후 경주이씨, 경주최씨, 풍천임씨 등이 이주해 왔다.
○ 양지마을
이 마을은 볕이 잘 드는 따뜻한 마을이라 ‘양지마을’ 또는 ‘양리(陽里)’라 부른다. 약 420년 전부터 경주김씨(慶州崔氏)와 풍천임씨(豊川任氏), 경주최씨(慶州崔氏) 등이 거주해 왔다.
풍천 임씨와 경주 김씨가 마을을 처음 개척할 때,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대밭각단’이라고 하다가, 석계리(石溪里)의 본동(本洞)이라고 할 수 있는 ‘평지 마을’에서 건너편에 위치해 있으므로, ‘건너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석계1리 마을회관 준공식
○ 고천(古泉)
웃돌기(석계2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래된 샘이 있었다고 하여 ‘고천(古泉)’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하천이 있었던 곳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고칭이’라고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80년 전 영월인 신종상(辛宗象)이 이곳에 처음 들어왔다 하며, 신씨(辛氏) 외에 배씨, 밀양박씨, 고령박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 웃돌기
석계리(石溪里)의 위쪽 마을을 통칭(統稱)해서 ‘웃돌기’, ‘상돌기’, ‘상석(上石)’이라고도 부른다. 현재의 석계2리 지역이다.
○ 큰마을
‘웃돌기(석계2리)’의 중심마을로 ‘큰말’이라 불린다. 옛날에는 ‘동녘각단’이라고도 했으며, 석계저수지(石溪貯水池)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420년 전이며, 처음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먼저 정착했고, 이후 이(李)씨, 윤(尹)씨, 천(千)씨 등이 이주해 왔다.
석계리
○ 수서(水西)
석계저수지(石溪貯水池)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큰마을’의 서쪽 거랑(개울)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 ‘수서’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은 박(朴)씨이며, 이후 이(李)씨, 김(金)씨, 박(朴)씨 등이 주로 농사에 의존하며, 소규모의 축산업을 하며 거주하고 있다.
○ 시래(時來)
‘웃돌기(석계2리)’ ‘큰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마산(天馬山 ; 296m)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산자락 밑에 있는 작은 산촌마을로 순흥안씨의 집성촌이다.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경주손씨(慶州孫氏)가 맨 처음 정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순흥안(安)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불국사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경주시 구정동 앞 시래동(時來洞)도 옛적 선비들이 과거나 벼슬할 때를 기다리며 살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석계리
여기에서 석계리(石溪里) ‘시래(時來)마을’의 지명유래를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숯을 굽고 사는 경주손씨 독가(獨家 ; 외딴집)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조 순조(1790-1834) 당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발생하자, 지금의 경주시 천북면(川北面) 동산리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던 김형규(金衡圭)가 홍경래의 반란을 힘입은 월성일대의 화적단(火賊團)의 표적물이 되자 이들 화적단을 피해 이곳 천마산(天馬山) 아래 외딴집이 있는 산골로 일족(一族)을 거느리고 이사(移徙)를 오게 되었다.
김형규가 이 산골을 피신처로 삼은 것은 당시로부터 200여년 전인 1551년, 그의 선조인 삼족당(三足當) 김대유(金大有) 선생이 이율곡 선생과 함께 왜국의 예상 침입로(侵入路)로를 살피던 중 이곳 관문성(關門城) 일대의 산로(山路)를 답보(踏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이율곡 선생이 천마산의 산세를 보면서 그 산 아래쪽에 있는 지금의 ‘시래(時來)’ 마을 쪽을 바라보고 “저곳에다 마을을 이루면 세상을 밝힐 인재가 태어난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삼족당(三足當) 김대유 가문에서는 이를 대를 이어 전해 왔었다.
고속도로 교량공사 중인 석계저수지
이에 선대(先代)의 말을 전해들은 김형규(金亨奎)는 기왕 피신할양이면, 선조로 부터 전해오는 그 천마산(天馬山) 아래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하인과 가솔(家率)을 대리고 지금의 석계리(石溪里) 시래(時來) 마을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자신을 해하려던 화적당(火賊黨)이 진압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형규는 이름도 없는 이곳 천마산(天馬山) 북편 능선(稜線)에다 하인들을 동원하여 땅을 일구는 한편, 돈을 풀어 땅을 사고 집을 지어 마을을 개척하면서 그의 아들 ‘상경’에게 일렀다.
“이곳에 이사를 온 뜻은 너를 선대조(先代祖) 삼족당선생과 같은 훌륭한 명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줄 너도 알 것이다. 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학문을 완수하여 때가오면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여 삼족당 시절의 가문(家門)을 회복시켜라.”고 권고하면서 지역사회에 아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인근 마을 외동일대의 명문가(名文家) 인사를 초대하여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를 거듭한 결과 자연히 원래부터 마을이름이 없던 이 첩첩산중(疊疊山中)의 마을에 마을이름이 생겼으니 그 이름이 바로 ‘시래(時來)’였다는 것이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공부를 하는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때 시(時)자’, ‘올래(來)자’를 써서 ‘시래(時來)’라는 마을 이름이 지어진 것이란다.
그 후 ‘시래마을’에는 안씨, 최씨, 손씨, 김씨 등 4성(四姓)으로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많을 때는 19세대가 거주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옛 산천초목(山川草木)의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지고 공장지대로 변모하고 있다.
석계리 시래마을
○ 마대(馬垈)
옛날에 말을 많이 먹이던 마을로 ‘말때’ 혹은 ‘마떼’라고도 부른다. ‘웃돌기(석계2리)’ 서북쪽 산기슭에 있는 이 마을에는 능(陵)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는데, 이 능이 ‘말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일대에서 토기(土器)가 많이 출토되기도 했는데,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처음으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 오만동
석계리(石溪里)에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 가운데 그 다섯 번째 봉우리에 있는 마을을 ‘오만동’이라고 했는데, 지난 1964년 이곳에 석계저수지를 막으면서 수몰(水沒)되고 없어졌다.
○ 영모재(永慕齋)
‘고천마을’ 북쪽 ‘재공골’에 있는 풍천임씨의 재실(齋室)로 본래 있던 것은 6.25때 소실(燒失)되었고, 지금 건물은 1957년에 다시 지었다.
마을에서 약 2km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는 이 재실(齋室)은 4칸, 2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1칸과 앞쪽에 마루, 동쪽에 방 1칸, 서쪽에 방 2칸을 배치했다.
○ 추모재(追慕齋)
영월인 사윤공(士允公) 신석주(辛碩柱)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1959년 치술령 아래 ‘고천’에 세운 재실(齋室)이다. 3칸, 2칸에 가운데와 전면에는 마루, 양쪽에는 방을 배치했다.
팔작지붕 형태이나 강판기와로 새롭게 단장했다. 수진당(守眞堂), 경신당(敬愼堂), 무본당(務本堂) 등의 현판과 수진당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 원모재(遠慕齋)
사정(司正)을 지낸 경주인 계암(溪庵) 이눌(李訥)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석계리(石溪里) ‘아랫마을’에 세운 재사(齋舍)이다. 남향 5칸 맞배지붕으로 지은 이 재실은 가운데 2칸은 마루, 동쪽에 방 1칸, 서쪽에 방 2칸을 배치했다. 현재 현판(懸板)만 남아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위에서 말한 사정(司正)은 조선시대 무관(武官) 벼슬의 하나로 오위(五衛)에 속한 정7품 벼슬로, 부사정(副司正)의 위, 부사과(副司果)의 아래였다.
○ 경모재
‘고촌(古泉)’에 있는 밀양박씨의 묘재 재실(齋室)로 1988년에 세웠다. 콘크리트구조물의 현대식(現代式) 건물로 마치 일반 가정집처럼 지었으며, 현재 관리인이 생활공간으로 쓰고 있다.
석계1리 구 마을회관
○ 양호정(養浩亭) 터
조선 철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풍천인 임진재(任鎭宰)가 세운 정자의 터로 ‘고천정각터’라고도 하며 ‘고천(古泉)마을’ ‘재공골’ 어귀에 있다. 일제(日帝) 때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정자는 당시 후학을 기르는 서당으로 사용됐다고 전한다.
위에서 말한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조선 시대, 문관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로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위이며, 1865(고종 2)년부터 종친, 의빈의 품계와 같이 쓰였다.
○ 돈수정
석계저수지(石溪貯水池) 안 ‘점골’입구에 있는 풍천임씨 돈수공 이양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2005년에 세운 정자(亭子)다. 본래 ‘금오골’에 있던 재실(齋室)이 6.25때 소실된 것을 이곳에 다시 정자로 지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콘크리트구조물로 아래층은 기둥만 세워 누각형태로 지었다.
○ 가마봉
치술령(鵄述嶺)의 한 봉우리로 가마 모양으로 생긴 산으로, 마을 서쪽에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한다.
석계리
○ 수리재 만디
석계리(石溪里) 마을 뒷산으로 그 중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뒤쪽에서 소개하는 해발 781m의 묵장산(墨匠山)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만디’라는 말은 표준어(標準語)로 ‘산마루’, 즉 산정(山頂)을 말한다.
○ 버무들뻔디기
‘고천(古泉)’ 위쪽, 현재의 서라벌골프장 자리를 말한다. 그 위에 범굴이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뻔디기’라는 말은 널찍한 벌판이나 평평한 구릉(丘陵)을 말한다.
○ 능등고개
능(陵)이 있었다고 전하는 고개로 윗돌기(석계2리) ‘마대’에서 ‘돌티미’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 삼탯고개
석계리(石溪里)에서 구어리(九魚里)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에 이곳에 살던 사람이 3쌍둥이를 낳았다는 전설(傳說)에 따라 붙여진 고개이름이다.
석계2리 마을회관
○ 아릿고개
상돌기(석계2리)에서 ‘점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 오뱃고개
큰 마을에서 ‘오배’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 원재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 ‘영골’ 남쪽의 들판으로 ‘원지이들’이라고도 한다.
○ 고천골
‘아랫돌기(석계2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천(古泉)마을’ 안쪽 골짜기이다.
○ 금바웃골
‘금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괴매골’ 남쪽에 있다. 이곳에 옛날에 금광이 있었다고 한다.
○ 노종골
‘갈미들’ 남쪽에 있는 들로 ‘노종(露宗)’이라고도 한다.
○ 돌티미
돌이 많은 골짜기로 ‘중방고개’ 너머에 있다.
석계리
○ 둔전(屯田)골
옛적에 병사(兵士)들이 농사짓던 ‘둔전들’ 위에 있는 골짜기로 ‘하돌기(석계1리)’ 동북쪽에 있다.
○ 뒷골
‘하돌기(석계1리)’ 뒤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만암절 터
만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 골짜기로 ‘중방골’ 서쪽에 있다.
○ 버무들골
범(호랑이)이 살았다고 하는 골짜기로 ‘고천골’ 서쪽에 있다.
○ 산밭골
‘점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불선바우’가 있는 곳이다.
○ 어븐골
‘하돌기(석계1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오구밧골
‘상돌기(석계2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석계2리 구판장
○ 재충골
‘중지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점골
‘중방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쇠부리’가 있었다고 전한다.
○ 중방골
‘돌트미’로 넘어가는 고개로 ‘능등고개’ 너머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굴앞바우
‘범굴바위’를 ‘굴앞바위’라고 한다. 그 앞에 석문사가 들어섰다.
○ 금바우
‘괴매골’ 입구 ‘금바웃골’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금을 캤다고 전한다.
○ 부처바우
모양이 부처처럼 생긴 바위로 ‘중방골’ 서남쪽에 있다.
○ 불뱅이바우
‘고천(古泉)’ 입구에 있는 바위로 영검하므로 주민들이 불을 켜 놓고 치성(致誠)을 드렸다고 한다.
석계리
○ 불선바우
불을 밝히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드리던 바위로, ‘점골’ 남쪽에 있다. ‘불선’의 ‘선’은 불을 켰다는 의미의 말이다. 표준어 발음(發音)으로 말하면, ‘불썬’이 될 것이다.
○ 석이바우
‘석이(石耳)’가 났다는 바위로, ‘점골’ 북쪽에 있다. 바위가 높아 줄을 타고 올라가야 ‘석이’를 딸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석이(石耳)’란 석이과 식물인 지의류(地衣類)에 속한 버섯으로, 지름이 3~10센티미터 정도로 원반형이며, 잎 뒷면 한가운데에서 짧은 자루가 한 개 나와 바위 위에 달라붙어 자란다.
표면은 검은 암갈색(暗褐色)으로 마르면 매끈매끈해진다. 맛과 향기가 좋아 식용(食用)된다.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 선돌
‘선돌배기’에 있는 입석(立石)으로 마을의 지형이 마치 떠다니는 배와 같은 모습이라 안정을 위해 배의 닻줄을 이 돌에 매기위해 인공으로 세운 돌이라고 한다.
석계리 보건진료소
○ 칼치바우
모양이 ‘칼치(갈치)’처럼 생긴 바위로 ‘석이바우’ 서쪽에 있다.
○ 가삼들
석계 남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 갈미(乫味)들
‘아랫돌기(석계1리)’ 남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 갓질
‘갓(산)’아래에 있는 들로 ‘평리마을’ 동남쪽에 있다.
○ 괴매골
석계저수지 위에 있는 들을 말한다.
○ 굴앞
‘범굴’의 앞쪽에 있는 들로 ‘아랫돌기(석계1리)’ 동쪽에 있다.
○ 당그래미
‘평지마을’ 위에 있는 들을 말한다.
○ 두어미(斗於味)
‘아랫돌기(석계1리)’ 북쪽에 있는 들로 쌀이 많이 났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석계리
○ 밀밭들
‘삼태못’ 위에 있는 밭인데, 지금은 논이 되어 있다.
○ 사금달들
사근제(沙斤堤)라는 못이 있었던 들로 ‘아랫돌기(석계1리)’ 동북쪽에 있다. ‘사근제’라고도 한다.
○ 새들
‘아랫돌기(석계1리)’ 앞에 새로 형성된 들이다.
○ 선돌배기
‘선돌’이 있는 논으로 ‘갈미들’에 있다.
○ 영골
‘상돌기(석계2리)’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 오배
‘큰마을’ 남쪽에 있는 들로 옆에 있는 산이 ‘자라 등’처럼 생겼다고 한다.
○ 해밋들
‘갈미들’ 아래쪽에 있다.
석계자연농원
○ 약물탕
‘가삼들’에 있는 떫은 약물이 나는 곳으로 특히 피부병(皮膚病)에 좋다고 한다.
○ 고치거랑
‘상돌기(석계2리)’의 동쪽 ‘고천’에서 흘러내리는 거랑(개울)을 말한다.
○ 어븐골 못
‘어븐골’에 있는 못(저수지)을 말한다.
○ 매앞보
석계저수지(石溪貯水池)에서 ‘갈미’, ‘가삼’, ‘원지’로 가는 제일 큰 ‘보(洑)’를 말하는데, 옛날부터 있던 ‘보’로 언제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 질고지
‘원재’ 너머 ‘노정골’ 밑에 있는 땅으로 물기가 많아 늘 질퍽해서 붙인 이름이다.
○ 참새미(찬물레기)
‘참샘(찬물레기)’은 신라시대 박제상의 가족이 ‘치술령(鵄述嶺)’에 유배되어 음용했던 샘물이다. ‘새미’란 표준어(標準語)로 ‘샘’이라는 말이다.
치술령(鵄述嶺) 정상(頂上)에서 그리 멀지 않는 북쪽 산등성의 오솔길을 타고 약 100m 정도 내려오면, ‘베틀바위’가 있고, 좀 더 내려가면 평지(平地) 부근에 ‘샘터’가 있는데, 사시장철 차디찬 샘물이 솟구치는 ‘참샘’이 있다.
참새미(찬물레기)
○ 묵장산(墨匠山)
호미지맥(虎尾支脈)인 치술령(765m)의 연봉으로 해발 781m에 이르는 산정으로 치술령(鵄述嶺)보다 16m가 더 높은 산정(山頂)이다. 필자의 향리인 괘릉리(掛陵里)에서는 이 산을 예부터 ‘먹정산’이라고도 불렀다.
한자인 ‘墨匠山’이 글자를 모르는 촌로들에 의해 그렇게 불리어졌고, 멀리 보이는 치술령(鵄述嶺)이 언제나 거무스레하게 보여 검은 색, 즉 ‘먹(墨)’과 같이 검게 보였기 때문에 ‘먹정산’이 오히려 맞는 이름으로 오인(誤認)되어 온 것이다.
특히 황혼(黃昏)이 지면서 치술령(鵄述嶺) 너머로 해가 넘어 갈 때는 온 산이 새카맣게 보여 ‘먹정산’이 제대로 된 이름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먹정산'은 맞는 이름도, ‘치술령(鵄述嶺)’도 아니고, 치술령의 연봉으로 늘어선 지금의 ‘묵장산(墨匠山)’을 말한다. 그동안 외동읍(外東邑) 북부지역에서는 ‘묵장산(墨匠山)’은 치술령의 그늘에 가리어 오히려 치술령(鵄述嶺)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묵장산 산정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경주부(慶州府) 산천(山川) 조(條)에 따르면, 묵장산(墨匠山)은 부(府)의 남쪽 30리에 있고, 치술령(鵄述嶺)은 부남(府南) 36리에 있다고 기록하여 치술령과는 다른 산정으로 지목하고 있다.
산의 이름 ‘묵장(墨匠)’은 석탄과 관계를 가진 이름이다. ‘장(匠)’은 흔히 구둘장, 누룩장이라 할 때의 ‘장’에 대한 음차로써 석탄(石炭)이 나기 때문에 이를 ‘묵장(墨匠)’이라 한 것이다.
‘묵장(墨匠)’이라는 동리 이름도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의 월평(月坪)과 봉계의 일부를 ‘묵장(墨匠)’이라 하다가 이를 아화(雅化)하여 ‘묵정(墨正)’이라 하기도 한다.
이 지역이 경주부(慶州府) 남면(南面)일 때는 ‘상묵장(上墨匠)’과 ‘하묵장(下墨匠)’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었다. ‘묵장산(墨匠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묵장(墨匠)’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도 울주군 두동면 상월평에는 ‘묵장골’이 있으며, 일정(日政) 때 한동안 이 곳에서 갈탄(褐炭)을 채굴하였으나 경제성(經濟性)이 희박하여 중단하고 말았다.
묵장산
아무튼 여기에서의 ‘묵장산(墨匠山)’은 앞에서 소개한 ‘수리재 만디’를 말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석계리(石溪里) 출신 향우님들의 ‘유권해석(?)’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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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리(石溪里)는 서쪽에 치술령(鵄述嶺), 남쪽에 순금산, 천마산(天馬山), 북쪽은 ‘수리재’가 둘러싸고 있는 산간마을이자 수려(秀麗)한 산세와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로 살기 좋은 장수마을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10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차량통행(車輛通行)이 증가하여 환경이 나빠지고 교통사고(交通事故)도 증가하고 있다.
석계공단
게다가 공단(工團)이 들어왔지만 도로가 제대로 개설(開設)되지 않아 차량들이 농로(農路)를 이용하고 있어 노폭도 좁고, 인도(人道)가 확보되지 않아 농민들의 농로이용이 대단히 위험하다.
특히 14번 국도의 경우 교통량(交通量)이 많아지면서 사고도 잦다고 한다. 도로 확장이 이루어져야 하고 우선 과속(過速) 방지 턱이라도 만들어 교통사고의 위험을 줄이는 등 대책이 요구된다.
그리고 광역상수도(廣域上水道)가 들어왔는데도 오수관(汚水管)이 동시에 들어오지 않아 환경오염(環境汚染)이 심각하여 그 오수관의 설치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석계2리 마을진입로도 그동안 농로(農路)로 사용하고 있는데, 각종 차량들이 마을 가운데로 통과해 사고 위험이 가중되고 있다. 우회도로(右回道路) 개설이 시급한 실정이다.
옛날부터 산세(山勢) 좋고, 물 좋고, 농토가 좋아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졌던 석계리(石溪里)는 이제 그 도로명 주소마저 ‘경주시 외동읍 석계산업단지길’로 바뀌어 아늑한 시골마을의 분위기(雰圍氣)는 사라지고, 공단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다.
석계공단
한적한 시골 마을이던 석계리(石溪里) 일대가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산업단지로 탈바꿈하면서 “자고나면 공장이 들어선다”는 주민들의 말처럼 이곳에 터를 잡는 업체(業體)가 최근 들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석계리(石溪里) 산184-1에는 지난 2003년 말, 145,946㎡의 석계1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운수장비, 자동차부품, 조립금속, 철강, 전기제품, 재생재료가공처리업 및 플라스틱제조업 등의 업종(業種)이 유치되었다.
그리고 지난 2010년에는 석계리(石溪里) 산180-5 일원에 총사업비 149억원을 들여 산업시설용지 9만9천280㎡, 지원시설용지 810㎡, 공공시설용지 2만4천㎡로 조성(造成) 등 총 12만4천90㎡ 규모의 석계2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석계2리 일반산업단지 내에는 1차금속, 기타기계장비제조업, 자동차 및 트레일러 등의 산업시설(産業施設)이 들어섰다. 석계12산업단지의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석계리 일반 산업단지
단지명 |
소재지 |
조성년도 |
조성면적
(㎡) |
유치업종 |
석계1 |
석계리 산184-1번지일원 |
‘97.9.~
‘03.11.21 |
145,946 |
운수장비, 자동차부품, 조립금속, 철강, 전기제품, 재생재료가공처리업 및 플라스틱제조업 |
석계2 |
석계리 산180-5일원 |
‘09.01~
‘10.12.31 |
124,090 |
1차금속, 기타기계 및 장비, 자동차 및 트레일러 |
석계공단
이 뿐이 아니다. 경주시는 석계리(石溪里) 산150번지 일원에 475,990㎡의 석계3일반산업단지와 석계리 산165-1번지 일원에 177,000㎡의 석계4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造成事業)을 전개하고 있다.
석계3산업단지와 석계4산업단지 조성사업(造成事業)은 2013년 8월부터 시작하여 2016년 말까지 완공(完工)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석계공단 조성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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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장로교회(石溪長老敎會)
석계리(石溪里) 1596-2 ‘상석(上石)’마을에는 고신파(高神派) 소속 석계교회가 소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신파(高神派)’라는 말은 기독교 개신교(改新敎) 교단의 교파(敎派)를 말하는데,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 출신 목회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교파를 말한다.
그리고 고려신학교는 광복 직후 일제(日帝)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했던 목사들이 박형룡, 박윤선 박사 주도로 세운 신학교(神學校)를 말하며, 이 신학교를 모태(母胎)로 만들어진 교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파’이다.
석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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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감리교회 비젼밸리(베들레헴성전)
석계리(石溪里) 산20-2번지에는 울산시 남구 대현동 소재 울산감리교회(蔚山監理敎會)에서 건립한 ‘비전밸리’라는 기도원(祈禱院)이 소재하고 있다.
1999년 2월 18일, 146,620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베들레헴성전’을 신축․봉헌(奉獻)하여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에서 그의 섭리와 숨결을 느끼며 감사드리기 위한 처소(處所)로 활용하고 있다.
울산감리교회 석계 비젼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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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석계리(石溪里) 산 1번지 190여만㎡ 부지에는 서라벌골프장이 건립·개장되어 있다. 약 70만평의 부지에 36홀로 운영 중인 서라벌골프장은 치술령(鵄述嶺) 자락 해발 약 300m에 위치하고 있어 사계절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를 감상할 수 있는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이 골프장은 지난 1990년에 착공(着工)했으나, 1997년 11월, 시공사(施工社)인 해태건설의 부도(不渡)로 건설이 중단되었다가 2002년 11월, 시공사를 삼성에버랜드와 한화건설로 교체한 후 공사를 재개(再開)하여 2005년 10월에 정식 개장되었다.
서라벌 골프클럽
서라벌골프장과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잡음(雜音)이 그칠 날이 없었다. 산자수려(山紫秀麗)한 임야를 파헤쳐 위락시설을 만든 것 자체가 문제이기도 했지만, 골프장의 건설과 확장(擴張)으로 마을 간이상수도(簡易上水道)가 파괴되고, 골프장 측에서 당초에 약속한 진입로를 경주시에 기부체납(寄附採納)하지 않아 주민들에게 불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추가 확장공사 때에는 그 예정지(豫定地)가 마을 상단부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의 생존이 달린 저수지(貯水池)에 토사유입과 골프장 농약살포(農藥撒布)에 따른 폐수유입 등으로 주민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문제점으로 인근 주민들이 골프장 진입로(進入路)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마찰이 있었다.
이 외에도 골프장 내의 시유지(市有地) 매도와 관련한 특혜(特惠) 시비와 개량비(改良費)의 공제와 관련한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서라벌 골프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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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저수지(石溪貯水池)는 ‘하돌기’ 서쪽에 있는 저수지로, ‘석계제(石溪堤)’라고도 한다. 1958년경에 시작해 1964년에 완공했다.
석계저수지는 치술령(鵄述嶺)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가두어 석계리 주민들의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 경관이 빼어나 연중 행락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석계저수지
석계(石溪)저수지의 모태는 ‘고천(古泉)’이라는 마을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천(古泉)이란 글자 그대로 오래된 샘이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거랑’과 샘이 모여 지금의 석계(石溪)저수가 된 것이다.
석계(石溪)저수지의 수원(水源)은 치술령(鵄述嶺)이다. 때문에 석계 저수지의 물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충절(忠節)과 그 부인 국대부인(國大夫人)의 정절(貞節)이 깃든 샘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풀벌레 배설물(排泄物) 색깔이듯 변해가는 희뿌연 물결에다 포항-울산 간의 고속도로(高速道路) 건설로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構造物)이 비집고 들어서서 환경과 생태계(生態界)의 파괴가 우려되고 있다.
석계저수지 교량공사
일반적으로 도로공사(道路工事)를 할 때는 인근 주민들이 사용하는 저수지(貯水池)나, 댐 같은 시설물은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석계(石溪) 저수지에는 저수지 중심을 가로질러 거대한 철제구조물(鐵製構造物)이 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환경보전법 제4조에서 “사업자는 사업활동을 함에 있어 자연생태, 자연경관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 법 제15조 생태 경관지역(景觀地域)에서의 행위제한 등의 조항에 따르면 “생태 경관보전지역 안에서는 누구든지 자연생태 또는 자연경관(自然景觀)의 훼손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정한 규정이 무시된 것이다.
고속도로 교량공사로 흙탕물이 된 석계저수지
여기에서 포항-울산간 고속도로(高速道路)의 건설과 관련한 내력을 잠시 알아보기로 한다. 포항-울산간 고속도로는 이명박(李明博) 정부의 ‘광역경제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는데, 그동안 기형적(畸形的)으로 분포되어 있던 산업여건을 하나로 이어줄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당초 계획으로는 2013년 3월말까지 1조 7천711억 원을 투입(投入)하여 전체 53.68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함으로써 지금의 7번국도를 대체(代替)하는 교통난 해소와 관광(觀光) 인프라 확대에 목적을 두고 있다.
포항-울산 고속도로
2009년 6월 착공에 들어간 포항(浦項)-울산(蔚山) 간 고속도로 건설사업은 1공구(울주군 범서읍 굴화리~중구 다운동), 2공구(다운동~범서읍 두산리), 3공구(두산리~경주시 외동읍 석계리), 4공구(석계리~냉천리), 5공구(냉천리~개곡리), 6공구(개곡리~양북면 장항리), 7공구(장항리~송전리), 8공구(송전리~입천리), 9공구(입천리~용동리), 10공구(용동리~포항시 오천읍 진전리), 11공구(진전리~문덕리) 등 총 11공구로 나눠 진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 터널 24개, 교량(橋梁) 50개가 건설되었고, 현대건설, 남광토건, 극동건설, 태영건설, 롯데건설, 삼호, 동부건설, 진흥기업, 금호산업, 흥화, 경남기업, 두산건설, 계룡건설산업, KCC건설, 풍림산업, SK건설, 한양, POSCO건설, 백산건설, 한신공영, 일성건설 등 23개 업체에서 개발 및 공동사업주(共同事業主)로 참여하고 있다.
포항-울산 고속도로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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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리(石溪里)의 주요 출향인사는 앞서 소개한 석계초등학교 출신인사에서 거의 소개했지만, 석계초등학교 출신이 아니거나, 졸업회수를 모르는 이들은 여기에서 추가로 소개한다.
석계리(石溪里) 출신의 또 다른 인사로는 풍천산업(주) 이사와 태화섬유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현재 파크랜드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박성동(朴聖東)씨, 신용범(전 모화초등학교 교장), 윤인호(전 외동읍장), 정병호(전 경상남도 소방본부장), 김영관(울산시청 사회복지과장), 임관식(문화관광부), 안용락(육군대령), 박명숙(서울 변호사), 장태환(항공부문 명장), 변광수(포항공대 교수), 박종옥(안전행정부)씨 등이 모두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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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리(石溪里)는 지난 2011년 3월 16일, 향년 84세로 별세한 김수학(金壽鶴) 전 국세청장(國稅廳長)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김수학(金壽鶴) 전 청장은 1927년 경주 외동읍 석계리(石溪里)에서 출생하여 경주공립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31회)를 졸업하고, 필자가 태어났던 1942년, 경주군청(慶州郡廳) 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해 국세청장까지 지낸 청백리로 유명하다.
김수학 전 국세청장
그는 일제(日帝) 하에서 경주공립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31회)를 나온 후 열여섯 살 소년 때부터 경주군청 고용직(雇用職)으로 공직생활을 출발했었다.
그리고 그 뒤 정부수립 후 우리나라 국립공무원 훈련원 1기생으로 교육을 받고 경북도청, 내무부(內務部) 말직을 거쳐 전남부지사, 대구시장, 내무부 지방국장, 충남도지사, 경북도지사(慶北道知事), 국세청장 등을 역임했으니 하늘처럼 높게 출세했던 인물이다.
초등학교(初等學校) 졸업의 학력으로 시장, 도지사, 국세청장 등을 역임해 취임 때마다 화제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국졸 도백(道伯)이나 국졸 국세청장이란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벼슬이었다. 특히 공직사회에서 국세청장의 위세나 권위는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권력기관(權力機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무부(內務部) 공무원 생활만도 40년이 넘게 근무했었다.
여기에 토지공사사장 5년 11개월, 새마을중앙회장 4년 11개월, 국세청장(國稅廳長) 3년 5개월에 고향에서의 외동읍 명예읍장(名譽邑長) 10개월까지 보태면 그의 공직생활은 50년이 훨씬 넘는다. 치술령의 정기(精氣)가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김 전 청장(廳長)은 석계리(石溪里)에서 태어났고, 외동읍(外東邑)의 명예읍장을 역임한 인연으로 우리 재경 외동향우회 고문(顧問)으로 추대되기도 했었다.
공직에서 퇴직하고 낙향(落鄕)해서는 수십 년 간의 공직생활을 회고한 ‘이팝나무 꽃그늘’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공직생활을 마친 후에도 토지개발공사(土地開發公社) 사장,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환경보전 범국민운동추진협의회장 등 또 다른 공직자로서의 장관급 경력을 쌓기도 했었다.
그리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무교동 코오롱 빌딩에 위치한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기념도서관 건립 추진위원으로 상근하기도 했었고, 그 공직에서 다시 물러난 뒤에는 서울의 압구정동에서 그가 성장한 고향인 경주시(慶州市) 황남동으로 주소지를 옮겼다.
아예 전업농(專業農)이 되어 사과 농사를 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지난 2011년 3월 16일, 84세로 서울에서 별세했다.
동구밖 길가에 이정표 세우고 떠난 이 기다리는 석계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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