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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희의 협연 무대, 벼르고 벼르었으며 원치 않는 혐오스러운 남성과의 밤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상납을 불사했건만 실패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에드먼드라는 녀석 덕에 무대에 오르고 그치로 인해서 망쳐버린 연주회였던 것이다.
그녀를 더욱 예상외로 당황하게 만든 것은 에드먼드가 운영하는 매체에서만 유독 솔희에게 티나게 긍정적인 평론을 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뼈가 굵은 음악인들은 벌써부터 에드먼드와 솔희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확인될수 없는 솔희의 성상납을 숫제 기정사실화했고 솔희의 평판은 부정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희와 제이의 관계까지 결부시켜 솔희는 성을 무기로 음악적 생존과 성공을 꾀하는 여인이라는 뒷소문까지 더 진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녀의 예상과 목표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흐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솔희의 기획사와 제이와 음악적 협업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독자적 기획사를 설립한 제이는 행보가 나날이 바빠져서 진득한 사랑을 나눌 기회마저 협소해져 가고 있었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 모더니즘 양식으로 건축된 초대형 교회당에서 천장의 유리막을 뚫고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Mr. Jay Neville과 Miss Everlyn Keller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거기에는 많은 음악인들, 그리고 G 콘서바토리 동문들이 대거 하객으로 몰려왔다.
솔희는 파티용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에 참석할까 고민하다가 너무 오버하는 듯 하여 짧은 치마가 포함된 흰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진한 화장을 한뒤 이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때 처음 본 제이의 부친은 영화에서 본듯한 초로기의 멋진 서양인 신사였고, 제이의 한국인 모친은 세월의 흔적은 느껴져도 미모에 우아한 기품이 배어 있었기에 그들의 아들 제이의 멋진 조각 비쥬얼이 이해가 갔다.
솔희는 신부대기실에 들어가서 일부러 에벌린에게 아는척 하며 인사를 했다.
신부 에벌린은 솔희와 제이의 4년 후배였고, 기억의 필림을 거꾸로 돌려보니 그녀가 제이의 대학원 시작 시절, 학부 신입생으로 돌어왔던 에벌린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것 같기도 했다.
(6년전 봄날, 나도 화려한 신부였었지...........나도 언젠가는 에벌린 못지 않은 화려한 식장의 신부가 다시 될 날이 있을거야)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솔희는 잠깐잠깐 제이의 옆 자리에 솔희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된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더 큰 소망을 상상함으로써 그런 잡 생각을 쫓아 버렸다.
여기저기서 수근대는 소리를 종합해볼때 신부 에벌린의 친정 아빠는 보스턴 지역의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로펌의 대표였으며 지역판사와 셰리프, 경찰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마만큼 승률도 높은 회사였다.
제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저 풋내기 후배랑 결혼하는걸까, 아무래도 정략결혼인 듯 싶었다.
(쯧쯧, 제이야, 너! 돈하구 권력보고 결혼했구나?! 하긴 나도 느낌없고 분위기도 없는 남자와 사랑없는 결혼을 했었으니깐. 뭐 그래도 대강 살아지긴 하더라.... 생각도 않던 정도 잠깐이나마 생겼었고, 넌 그나마 순혈 백인 미국여자랑 그런게 생기기나 할까?)
“솔희 선배!!”
웬 낮은 음성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 보니 솔희의 예중, 예고, 미국에서 컨서바토리 3년 내리 후배이며 바이올린을 전공한 빨간 투피스 정장 차림의 유성하가 솔희를 향해 웃으며 다가온다.
“오오, 넌 성하? 아직도 미국에 있었니?”
“아, 뭐야! 언니는 이렇게 오랜만에 봐 놓고서 기껏 내가 한국으로 안 돌아가서 섭섭했던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유학생 출신인 유성하양은 연주 전문박사과정까지 마쳤기에 학교를 졸업한 것은 1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고, 노동허가를 받아서 텍사스 휴스톤의 유명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말석자리를 하나 얻었다고 한다.
“언니, 근데 보스톤 정착했다고 한국인 동문들 사이에 소문이 확 퍼졌더라”
“어머, 그래? 나 유명인사 다 됐구나, 호호호”
이 말을 전해들은 솔희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자신이 보스톤에 정착했다고 소문이 났다면 이혼사실도 알려졌을 것이고 어쩌면 제이와의 다른 관계도 누군가를 거쳐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솔희가 늘 이상적으로 여기던 비밀스러운 낭만적 사랑이라는 환상은 깨어지는 것이다.
“그래, 뭐 고군분투하고 있다, 예. 넌 계획이 뭐니?”
“글쎄, 어떻게 될지는, 워킹퍼밋 연장하다 영주권 안 나오면 한국 돌아가는 수밖에. 시간강사 자리나 남아 있을는지 의문이지만 뭐 바이올린 학원 쌈빡한데 차리면 그저그냥 먹고 살수 있지 않을까?”
“아이고, 우리 유박사님한테 안 어울린다. 여기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걸맞는 신랑감을 물 생각을 해야쥐, 안그러냐?”
“성공? 정경화나 장영주같은 성공? 나 그 오케스트라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한칸 앞으로 가 앉는것마저 얼마나 피를 말리고 뼈를 깎아야 되는건데”
솔희는 오랜만에 만난 여후배와 두 손을 마주잡고 수다를 떨어댔지만 속으로는 ‘요뇬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가 내내 궁금했다.
그녀의 귓전에는 결혼식 내내 옛날 미국 대중가요 가수 패트 페이지가 불렀던 “I went to your wedding”이라는 곡이 앵앵대고 있다.
식이 끝나자 트럼펫 두 대에 바순, 오브에, 클라리넷 주자까지 동원된 16인조의 관현악 앙상블이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신랑 신부가 팔짱을 끼고 행진을 시작한다.
교회당 옆 건물의 홀에는 고급호텔 캐더링 팀에서 출장나온 검정 바지에 흰 와이셔츠, 검정 무릎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유니폼으로 차려입고 금색 명찰을 가슴에 단 남녀 직원들에 의하여 랍스타와 그릴새우를 비롯한 산해진미들이 깔리고 와인과 맥주, 샴페인과 소다수들이 차곡차곡 스탁되고 있다.
파티장으로 옮겨온 솔희가 차례를 지켜 음식을 퍼담으려고 할때 낯익은 실루엣이 보임과 동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어! 넌 브라이언김!”
“제이한테서 들었어, 여기서 활동하고 있다면서?”
그 결혼파티에 꿈많던 학창시절 첫사랑의 연인, 그녀의 첫 순결을 고민없이 허락했던 브라이언 김이 턱시도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솔희는 반가움과 동시에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이 되어 브라이언과 살짝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너야 말로 먼데서 어쩐 일이야? NH 주립신포니아 오케스트라 부악장이라며? 바쁘신 몸일텐데!!”
“제이 결혼식에 안올수가 있나? 내 결혼식때 베스트맨(들러리 팀장)까지 해주었는데”
하지만 브라이언과 못 나눈 대화를 더 이상 풀어나갈수 없었던 것이 브라이언의 아내로 보이는 한국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호기심과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즉시 솔희에게 자신의 간호사 아내와 세 살 아들을 소개했다.
솔희는 브라이언이라는 남자 하나와 성관계를 맺은 두 여자가 소개받게 되는 이 어색한 상황을 가리기 위해 브라이언의 아내에게 한껏 미소를 지어주며 처음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밝고 명랑하게 인사했다.
회색 양복바지를 입고 희고 예쁜 와이셔츠 위에 X반도를 차고 귀엽게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고 머리에 무스까지 발라 세운 깜찍한 꼬마 아이는 아빠 브라이언에게 다가와 착 감기듯 안겨들고 브라이언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을 번쩍 들어 올리며 세상 부러운것 없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저게 남자의 행복인가? 브라이언만 그런건가? 나중에 내가 진정한 인연을 만나도 그 남자에게 저런 선물은 못해주겠지?)
캠퍼스에서 첫 사랑의 꿈을 함께 키웠던 브라이언이 2세와의 소박한 애정표현을 바라보는 솔희, 아들을 안아 올리는데서 브라이언의 행복을 확신하는 표정을 읽은 솔희는 알수 없는 좌절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솔희는 좌절감을 억누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브라이언의 아내와 대화를 계속 이어나간다.
“미세스김이 상당한 매니아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부인 덕택에 브라이언이 힘을 많이 받는다는 말도요”
“네, 첼로를 오래 배웠는데 부모님 반대로 음대를 못갔고 간호대학을 가야만 했죠. 그래도 음악한 남편이 안정과 성공을 찾아가는걸 옆에서 도우면서 만족하는 편이에요”
솔희의 살인 미소에 브라이언의 아내가 경계의 마음을 풀었는지 그녀도 솔희에게 웃어주면서 자신들의 결혼생활의 한 단면을 풀어주었다.
솔희는 브라이어언의 아내와 담소를 나눈뒤 브라이언의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볼을 살짝 만져주었다.
식사와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전 미국이나 캐나다 각지에서 활동중인 콘서바토리 동문들끼리 파티장에서 신랑신부를 중심에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솔희는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브라이언과 나란히 선채로 단체 사진을 찍혔다.
그 다음, 사진사가 동문들의 가족이나 배우자들도 합류하라고 싸인을 줬는데 브라이언의 아내인 미세스김은 아들을 안고 바로 솔희와 브라이언 사이를 파고들었다.
3살짜리 남자 아이의 무게가 있는만큼 브라이언은 아기를 자기 아내로부터 받아서 안아들었다.
둘 사이에 끼어들며 미세스김은 솔희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지만 솔희의 눈에는 그 아내가 자신을 경쟁자로 바라보는것 같아서 저윽이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브라이언의 오른쪽에는 그의 직속 바이올린 후배인 유성하가 자리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간격이 확보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세스김이 왜 그 성하의 옆자리를 놓아두고 하필 솔희와 브라이언의 사이로 끼어들었는지는 의문이었다.
하긴 이런 이유를 알수 없는 경험은 그녀가 이혼한 후에 한두번 당한게 아니다.
(두고봐, 언젠가 내가 청첩장 돌리는날, 너희같은 허접녀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테니깐)
솔희는 이를 갈면서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어둡고 싸늘한, 그리고 괴물 그랜드피아노가 응접실의 대부분을 잡아먹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거의 총동창회를 방불케 하던 그 연회장은 시간이 갈수록 솔희의 호흡과 맥박을 이상하게 잡아먹기 시작했으며 현기증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흥겨운 음악과 열기띤 결혼파티의 신나는 분위기, 산해진미와 비싼 와인들은 보는것만으로도 솔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세컨드, 제이의 시크릿............”
그녀는 가방을 침대 옆 테이블에 놓고 장신구를 해체한뒤 화장실 미러 앞에서 화장을 지우며 생각나는 단어를 뇌까려 본다.
기껏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관계라고 규정지었거늘 솔희의 위치는 세컨드이거나 제이의 비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녀가 제이와 먼저 알았고 오래전부터 진득한 관계를 만들어 왔던들 마치 견고한 신분제처럼 솔희의 위치는 굴러온 돌이라 해도 정식 부인 에벌린과 대체될 자리가 아님은 틀림없다.
숨어서 하는 스릴넘치는 낭만적 사랑이라는게 실은 그늘 속에서의 불장난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처음으로 스쳤다.
씻고 나온 솔희는 어두운 실내에 불을 켜지 않고 쇼파에 털썩 걸터 앉는다.
에드먼드라는 변태놈에게 불이 훤히 켜진 상태로 밤새 수치스럽게 시달린 후유증이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여자, 브라이언의 과거………”
불과 일주일전에 있었던 제이와의 오솔길에서의 데이트와 시골 모텔에서의 하룻밤이 떠 올랐다.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제이! 그땐 아니라고 했지?)
(아니라고 하긴? CEO로서 퇴사한 파트너의 사유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대답이었는데?)
(넌 내 말에 정확한 답변을 피한거야, 그러면 그 애송이랑 관계를 밝히길 피했던거지 뭐니?)
솔희는 웨딩포토 등을 완벽히 끝내 놓은 뒤 결혼 1주일을 앞두고 간신히 시간을 뺀 제이와 함께 데이트를 했었다.
솔희는 제이와 손을 가볍게 맞잡고 교외의 오솔길을 걷고 있던중 제이의 결혼한다는 직접 고백을 듣고는 일부러 쿨한 척했었다.
(자유로운 독신주의자 제이님께서 갑자기 결혼한다니 사람 일은 모른다닌깐? 제이는 참 멋지고 완벽한 남자야, 그 승질머리만 빼면. 근데 그 어린 후배가 여자로 보였다는 것도 놀랍기도 하고 제이가 어느 여자의 남편이 된다는게 정말 실감나질 않는다)
(뭐, 그렇게 됐다)
(혹시, 에벌린이 임신해서 할수 없이 결혼하는거 아니지?)
(아, 뭐래는거야~~)
(너처럼 잘난 숫컷이 여기저기 씨를 뿌리는건 본능이라더라. 움켜쥘줄 아는 것도 잘난 암컷이고. 난 그런 능력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솔희는 제이가 결혼하게 되더라도 쿨하게 보내줄거라 생각했고, 결혼 뒤에도 만남을 이어가기로 약속했었지만 그래도 예전만큼이나 자유롭고 부담없이 만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에벌린의 레이다망을 어떻게 피해서 나랑 약속잡은거야?)
(출장간다고 대충 둘러댔지. 신경쓸 것 없어. 내가 솔희 너더러 네 남편이 너가 나랑 만나는걸 아냐 모르냐 묻지 않았듯이)
(호호, 역시 제이는 제이야)
솔희는 발굽을 최대로 들고 애무를 나누듯이 두 손바닥으로 제이의 얼굴을 감싸쥐고 입을 맞추었었다.
그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것도 솔희가 전 남편 정균과 완전히 이혼한 다음의 제이와의 관계에서는 신비감과 스릴이 묘하게 사라져 버린 터였다.
그녀는 맹랑하게도 제이가 유부남이 되면 더 스릴과 긴장에 휩싸인 데이트를 할것 같은 기대가 들기도 했건만,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어쩔수 없이 다른 이성에게 떠나보낸 비련의 연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웠고 섭섭했다.
(그는 독점될수 없는 상대, 제이는 연애하기엔 다이아몬드같은 남자, 결혼하기엔 유리같은 남자지. 나 또한 어지간한 남자에게 독점될수 없는 여자, 나도 연애하기엔 보석같은 여자, 결혼하기엔 싸구려 유리같은 여자라는건가!?)
(천만에! 난 싼 여자가 아니야. 적어도 제이 정도는 되는 남자한테 연애를 허락하지, 제이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 정도는 되어야 백년해로할 남편감으로 인정할 것이고.)
사실 솔희에겐 남자들의 접근이 결혼 전에 많았고 결혼 후에도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남자들에 반응을 거부한 이유는 정을 아낀다던지 남편과의 지조 때문에 철벽을 친게 아니라,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남자들이 별 매력이 없어서였고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솔희는 아까 연회장에서 음식에 곁들인 샴페인만으로는 한방이 부족했는지 냉장고에 반쯤 남아 있던 김빠진 자몽소주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강원도 춘천호수 근방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아담한 어느 성당.
정균은 본당 옆에 작은 양옥같은 사제관 안의 어두운 방안에서 장년 나이로 보이는 사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해하신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6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흐음, 냉담중이였군요. 그럼 바로 시작하시지요”
“네, 전 결혼조건으로 우리 교회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개종을 했었고 그나마 몇달전 아내와도 이혼했습니다. 전 이 두개를 고해하고자 합니다”
무표정한 중견공무원같은 분위기의 사제는 그의 이 간단한 말에 만족을 못하고 뭔가 한참 부족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굳이 얼굴을 마주보면서 실시하는 대면 고해성사를 신청해 놓고 겨우 그게 뭐냐고 무언으로 정균에게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따지는것만 같았다.
정균은 사제의 표정에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성당이 뭐 다 그렇지 하는 체념 속에 ‘옛다 더 있다’라는 심정으로 그가 미국유학을 떠나서 직장영주권을 받게 되기까지, 그리고 솔희와 만남과 개종, 결혼생활, 그리고 헤어지던 이야기를 쭉 해나갔다.
사제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중간 중간에 지루하고 졸리운 듯이, 때로 진지하고 흥미로운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여자, 예술가연하면서 살림살이 내팽겨쳤죠, 부부관계는 거절하거나 지멋대로였어요...............
낙태까지 하고 돌아온 여자한테 그저 끝도 없이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암튼 그녀한테 달래고 빌어야 했어요. 헤어지기 두달전엔 제게 손찌검까지 하더라구요.”
“흐음............전처분의 예민한 성격에서 나온 언어폭력과 가정폭력으로 헤어지게 된건가요?”
“휴우…………..그걸로 다가 아니었어요. 다른 남자랑..........! 그것도 결혼 3년차 이후 꽤 오랫동안이었죠.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기약없이 미국동부로 떠났는데, 더 이상 내연을 못 숨기겠는지 이혼하자고 이메일 달랑 보내더라구요. 전 희생하고 헌신했어요. 그리고 그 여자를 잊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불현듯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이혼이란 죄까지 저질렀다는 생각에 잠에 들수가...........으흐흐흑!, 아흐흐흑!”
앞뒤가 제대로 맞지 않는 진술을 하던 정균은 머리를 숙이고 결국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린애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눈물은 콧날끝까지 내려와 구슬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솔희를 쿨하게 보내주었다고, 이젠 잊을수 있겠노라고 생각했건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또아리틀어 있던 상처와 억울함과 상실감이 봇물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는 이혼하고 토랜스 시내의 작은 아파트로 나가 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 사업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절대로 거절할수 없는 조건이었다.
만약 솔희와 살고 있을 때 그런 오퍼를 받았다면 솔희는 정균을 따라 영주귀국을 했었을까?
아무리 가설을 세워보아도 야심만만한 솔희가 영주귀국을 받아들일수 없었을 것이고 이들 또한 기약없는 장기별거에 돌입했을 것이다.
어쩌면 솔희와의 헤어짐은 그에게서 운명같은 것으로 다가온 것일수도 있다.
솔희에게 버림받은 것은 필연이자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정균에게는 버려야할 것과 찾아야할 것들이 있었다.
그가 버린것은 그의 클래식음반 취미와 관심이었고, 앞으로도 버려야 할 것은 솔희에 대한 아련한 미련과 더불어 그녀에 대한 증오심과 억울한 감정을 버려야 했다.
그가 되찾아야할 것은 솔희와의 결혼 조건 때문에 별 생각없이 즉각 버렸던 종교와 더불어 사춘기 이후 소원해졌던 부모와의 관계였다.
그는 춘천으로 와서 부모님이 투자해 놓았던 주택단지에 입주했으며 사업도 나쁘지 않게 시작시키고 있다.
하지만 드문드문 생각나는 과거의 상처는 도저히 현실을 살아갈수 없도록 그를 압박했는데 별 잘못도 없던 그에게 죄의식마저 생겨난 것이었다.
신부는 눈을 감고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인지 기도를 하는 것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정균의 흐느낌이 멈출 때까지 기다린건 확실했다.
저 신부님은 연애나 해봤을까?
결혼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걸 죄라고 규정할 것인가?
성경과 교리책에 나온대로나 딱딱히 일러주는게 남녀의 사랑과 결혼을 모르는 사제들이 하는 일이긴 했다.
“이런, 제가! 신부님 앞에서 별 주책을 부렸나봅니다. 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하다보니깐 전처 흉이나 보고, 계집처럼 울기나 하고”
정균의 호흡이 정돈되고 정신을 차리는 기색을 보이자 사제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형제님, 형제님이 여기에 고해하러 오신 진정한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은요,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화한 것을 고해하셨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형제님은 어렸을적부터 키워온 꿈과 소원을 절대자인양 붙들고 있었어요. 떠난 전처는 당신의 완고함으로 우려낸 우상의 그림자에 불과한겁니다. 일찌기 바오로는 우상은 실체가 없는거라고 말했습니다.”
정균은 내가 홀로 간직해 왔던 소원이 우상이 되었다니 라고 속으로 외치며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토끼눈을 뜨고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솔희는 우상감도 안되는 실체없는 그림자에, 그의 컴플렉스가 뭉쳐 만들어낸 허상이란다.
(이건 도무지 무슨 선문답도 아니고)
사제 입장에선 즉답이라 할수 있었겠지만 정균에겐 두고두고 이해를 해나가야할 문제이기도 했다.
거기에 사제는 좀 이해할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혼을 죄라고 고해하러 오셨다는데, 형제님은 교회의 적법한 성사를 거치지 않았기에 혼인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교회법상 결혼하신 적도 없기에 이혼도 하신적 없어요. 고해하시고 용서받으셔야 할 것은 형제님의 아집을 절대화한 우상숭배입니다. 형제님을 반복적으로 배반하다 떠난 자매님에 대한 인간적 용서는 자기우상화 사실을 인정한뒤 거기서 벗어나는 생활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기 우상화라뇨? 전 그녀에게 굴욕적일 정도로 헌신했는데 제가 스스로 우상이요? 그녀더러 저를 경배하라고 했어야 제가 우상이 되는거 아닌가요? 저는 그녀의 온갖 감정 쓰레기통이 다 되어주었던걸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우상이 되나요? 차라리 제가 그녀를 우상으로 섬겼다면 모를까.”
“우상숭배의 결과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법이지요. 형제님이 왜 그리 추레하게 되었는지는 형제님이 알고 계실겁니다.”
뭔가 위로가 될걸로 생각하고 성당을 찾았건만 사제는 오히려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어법으로 정균을 질타하고 있었다.
고해가 끝나고 사제가 직접 타준 차를 마시며 차담을 나누고 께름직한 마음을 진정한 정균은 숱한 의문을 봇따리처럼 싸가지고 성당문을 나섰다.
솔희와의 5년간의 생활과 쌓인 애증의 세월 그것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는 것은 인정하기 쉬운가 어려운가의 여부를 떠나 그를 더욱 멍하게 만들었다.
[[님이 사랑한 것은 부인이 아니라 부인이 갖고 있는 미모와 탈랜트, 예술적 성취와 콘서트에서의 화려함 속에 턱시도를 입고 부인 옆에 서서 주변 남녀들에게 속으로 우쭐대던 부주인공으로서의 당신 자신입니다]]
[[부인사랑보다는 당신이 가장 빛나던 시절의 열정과 헌신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 앞으로 취하셔야할 액션에 대해 판단을 못하시는 듯 합니다]]
그가 미국시절 솔희의 이해할수 없는 행적에 대해 남초 인터넷 사이트에 고민글을 올렸을 때 어느 연륜있는 유저 몇몇이 답변했던 것이 떠올리며 사제의 발언과 비슷한게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스포츠 도보 형식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그냥 터벅터벅 신발이 먼저 나가는대로 몸이 따라가는 식의 걸음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의 허전함은 마치 솔희를 떠나보내고 홀로 쇼파에 털썩 주저 앉을때와 비슷하다고 느껴졌기에 걸음걸이에 힘이 실리지 않았고 집에까지는 너무 멀다.
하지만 사제와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는 길은 사색의 길이 되고 있었다.
(나도 그녀에게 그냥 물과 공기였겠지)
남들보다 비교적 풍족하게 키워졌고 그가 원하던 음반, 연주회티켓, 피아노와 기타렛슨, 태권도 등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균의 부모, 그러나 음대진학만은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는 부모가 음대 작곡과 진학을 막은 것에 대해 오랫동안 원망을 품고 있었다.
그가 아내 솔희를 맞아들일때 부모가 기뻐해 주었던 것은 며느리가 전공 피아니스트라는 것이었는데, 부모님은 나름대로 아들의 청소년 시절부터의 한이 풀리게 된것 기뻐하신것 같다.
그 값비싼 명품 그랜드피아노를 신혼집에 주문해주며 며느리에게 결혼예물로 선사했던 부모다.
하지만 인생은 역설이라는걸까?
Steinway 그랜드 피아노는 넓은 응접실 중앙을 차지하면서 방문객들에겐 무엇보다도 피아노가 위압적으로 다가왔으며 뚜껑이 열리는 날이면 그 가정의 웨딩포토마저 완전히 가려버리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이 열리면 정균은 솔희의 연습과정을 지켜볼수가 없는 그녀가 정한 규율을 따라야만 했다.
(제가 한국서 일을 하게 되었고 솔희는 보스톤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도저히 접점이 생기지 않아서 서로에게 일의 자유를 주기 위해 이혼한 거에요)
그가 이혼하자 정균을 책망하는 한편 솔희의 행실에 문제가 있지 않았냐고 묻던 부모에게 했던 변명이다.
솔희의 행실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솔직히 말씀드린다는 것은 그에게 수치였다.
다른 남자의 배에 깔려버린 아내의 남편이라는 것은 말할수 없는 모욕이고 수치였기에 그런 아픔이 부모에게까지 전이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전달할 때 그는 또 다른 수치심 때문에, 그가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냈고 솔희가 이혼에 응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아내에게 이혼을 청구당했다는 것도 그에겐 창피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귀국 후의 정균은 부모를 어쩔수 없이 만나긴 했지만 부모와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기피해왔고 전화통화도 웬만하면 피해왔다.
성당에서 나와 국도변을 걷고 있는 정균은 바로 전화기를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넣었다.
“어머니, 이번 주말에 서울에 갈테니깐 아버지랑 같이 나오세요. 가평에 가면 맛있는거 하는데가 많다고 하네요. 이부자리도 펴준다고 하니깐 약주라도 원없이 대접하고 싶어요”
“허얼, 웬일이냐? 해가 서쪽에 뜰 일이 자주 있는거 아니니깐 니 맘 변하기 전에 아버지랑 냉큼 나올 준비하고 있을테니깐 그때 연락해라.”
통화를 끝내는 그의 온 안면은 어린애같이 입이 헤벌레 벌려지며 함박웃음이 터져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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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일주일간 힘든 시간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