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정신병리<1> 우울증
올해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전국 20세 이상 성인 1000명을 조사한 것에 따르면 한국인의 1년 평균 영화 관람 편수는 5.6편이었다. 연령별로는 20대가 13.9편, 30, 40대는 각각 4.8편, 2.7편이었다. 극장에 가지 않고 TV나 DVD, 비디오테이프로 보는 것까지 한다면 두세 배 이상 될 것이다. 바야흐로 영화가 대중의 여가와 문화생활의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 환자와 만나서 얘기를 풀어나가거나 간접 경험을 예시하는데에 영화라는 매체를 잘 활용하는 것은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아직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인식하지 못할 때, 혹은 감정의 표현을 잘 하지 못할 때 간접적이며 중립적인 영화를 소재로 치료적으로 개입한다면 훨씬 부드럽게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 특히 위의 통계가 말해주듯 젊은 연령의 경우 자신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기며 거리감을 좁히게 하는데 효과가 크다. 그런 문제 의식하에 주요 정신 병리를 다루는 영화들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간략히 리뷰하여 진료를 하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명백한 주요우울증을 다루는 영화는 실제 많지 않지만 우울증의 기본 정신역동이나 병태생리로 영화의 등장인물의 심리와 행동이 묘사되는 영화는 꽤 있다. "와니와 준하(2001)"의 와니(김희선분)는 애니메이터로 직장을 꾸준히 다니지만 의욕은 별로 없고 항상 처져보이며, 수동적이고 같이 사는 친구 준하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와니의 모습은 기분부전증(dysthymia)에 속하는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우울증 발현의 중요 원인 중 하나는 대상의 상실이다. "봄날은 간다(2001)"의 상우는 은수가 "사랑은 변한다"며 떠난 후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넋을 놓고 모든 사회생활을 접고 은둔을 한다. 영화 후반부에 짧은 시간이지만 보여주는 이 장면은 대상의 상실에 의한 급성 우울증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배우자나 자식을 잃은 후 우울한 기분에 빠진 주인공을 등장시킨 영화로는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1993)"과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를 들 수 있다. 특히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주인공 존 앤더튼이 아들이 유괴된 후 아내와 별거를 하게 되고, 약물을 탐낙하게 되는 과정 등 우울증의 발현이후 생길 수 있는 다양한 행동문제가 잘 표현된다.
우울증상의 다양한 면모를 보기에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즈(The Hours 2002)"만한 영화가 없다. 실제로 우울증을 앓았고, 이로 인해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의 1923년의 하루를 중심으로, 그녀가 쓴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책을 놓고 1949년 미국 LA의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는 브라운 부인이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갑자기 자살을 결심했다가 결국 아이를 두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떠나는 얘기가 다른 축을 이룬다. 그리고 현재의 축은 2001년의 뉴욕이다. 자신을 델러웨이 부인이라 부르는 중년의 여성 편집자 클라리사는 옛 남자친구이자 HIV 환자인 리처드가 문학상을 탄 것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려고 한다. 한없이 리처드를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지만 클라리사는 왠지 모를 우울감과 공허감을 경험한다. 또 HIV환자인 리처드는 죽음을 앞둔 불치의 병을 앓고 있고 이로 인한 우울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영화의 네 명의 등장인물은 내인성 우울증, 정체성과 관련한 중년여성 우울증, 끊임없는 이타적 삶과 완벽주의로 인한 에너지 고갈에 의한 우울증, 난치성 질환에 의한 이차적 우울증상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벌어지는 하루의 사건을 중심으로 매우 정교하게 제시하고 있다.
청소년기는 정체성의 혼란과 독립의 이슈 등이 우울증상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500Kg에 육박하는 어머니, 정신지체인 남동생을 두고 인구 1천명수준의 작은 마을에서 소년가장으로 살며 옆집 아주머니와 불륜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청소년 길버트 그레이프를 다룬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1993)"의 영어 제목인 "What's Eating Gilbert Grape"는 청소년기 우울증의 역동을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섯 명의 단짝 친구가 스무 살이 되어 각자 자기 삶을 만들어나가면서 겪게 되는 혼란 속에 겪는 우울감을 잘 묘사한 "고양이를 부탁해(2001)"는 여자 청소년의 우울증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중년 남성 우울증에 대한 영화로 올해(2004) 상영되었던 "인어공주"를 들 수 있다. 아버지 진국은 빚보증을 잘못 섰다 망한 후 우체국 말단직원으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우울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데 혹시 자살을 하러 간게 아닌가 걱정이 된 딸 나영은 부모가 처음 만났던 우도로 찾아갔다가 갑자기 부모가 처음 만났던 그때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젊은 시절의 해맑고 활기찬 우편배달원 진국의 모습과 현재의 아버지의 모습, 해녀 연순과 삶에 지친 때밀이 어머니의 모습을 비교하면 우울증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 확연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정신의학회보 제44권 10호 2004.10.25. 영화이야기, 영화와 정신병리<1>, 우울증, 용인정신병원 하지현 회원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