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대상 |
고1,2 인문논술반 |
지도 장소 |
교실 |
담당교사 |
공기택 | ||||
대단원 |
5. 근 ․ 현대의 정치 |
소단원 |
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 흥선 대원군의 정책 | ||||||
주 제 |
흥선 대원군의 대외정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 ||||||||
학습목표 |
가.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 나. 19세기 후반 국내사의 흐름을 세계사와 함께 이해할 수 있다. 다. 흥선 대원군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역사관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 ||||||||
단계 |
학습내용 |
교수-학습활동 |
교수학습자료 |
지도상의 유의점 | |||||
교 사 |
학 생 | ||||||||
도입 및 준비 (30) |
학습지 활동지 배부
본시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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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지 배부 대원군과 관련된 학습지를배부하여 학습하게 한다.
◦ 동기유발 - 철종 다음 왕은 누구? - 고종의 아버지는? 이하응이라 불리는데 또 다른 이름이 있지. ※ 대원군의 의미 설명
◦ 오늘 우리의 토론 방식을 설명한다. - 개인 학습, 설명 - 조별 토론 - 전체 토론 |
◦ 학습지를 읽고 ◦ 활동지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 질문에 답한다. - 고종 - 흥선대원군 |
◦ 학습지 ◦ 활동지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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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자료를 읽게 한다 ◦ 자신의 의견을 활동지에 기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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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90) |
세계의 정세 (10) |
◦ 19세기 무렵 세계정세를 설명한다. -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 중국: 아편전쟁 - 일본: 페리제독 |
◦ 설명한다. |
◦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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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정세 (10) |
◦ 19세기 국내외 상황을 설명한다. ◦ 흥선대원군의 대내정책 - 정치적 측면 - 경제적 측면 - 사회적 측면 ◦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신미양요 - 척화비 |
◦ 배부한 학습지를 읽어가면서 내용을 이해한다. |
◦ 교과서
◦학습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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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
학습내용 |
교수-학습활동 |
교수학습자료 |
지도상의 유의점 | |
교 사 |
학 생 | ||||
전개 (90) |
조별토론 활동 (20) |
◦ 흥선대원군에 대한 후대 의 여러 평가를 보여주며 토론 동기를 유발한다. ◦ 미리 짜놓은 모둠을 바탕으로 토론을 하도록 한다. ◦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각자 활발한 의견을 제시하도록 한다. ◦ 5명의 모둠원들이 토론을 하고 정리해 조별대표가 발표하도록 한다. |
◦ 학습지와 수업내용의 학습을 바탕으로 토론을 한다. ◦ 모둠 당 활발한 토론을 진행하고 하나의 의견으로 정리해본다. ◦ 모둠별 의견이 통합되지 않는다면 각자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의견을 정리한다. ◦ 자신들의 의견을 노트에 간략히 적어가면서 토론을 진행한다. |
◦학습자료
◦ 학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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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토론 방향이 어긋나지 않도록 지도한다. ◦소외되는 학생이 없도록 한다. |
전체토론 활동 (50) |
◦ 조별 토론을 통해 대원군의 대외정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는 팀과 그렇지 않은 두팀으로 나누어 토론하게 한다. ◦ 전체 토론 주제를 무엇으로 정하면 좋을지 토론하게 한다. ◦ 긍정팀과 부정팀으로 나뉘어 대원군의 대외 정책에 대해 토론한다. |
◦ 토론주제를 정한다. ◦ 긍정팀과 부정팀으로 나눈다. ◦ 사회자를 선출한다. ◦ 긍정팀과 부정팀 각자 2분씩 의견을 개진한다. ◦ 상대방의 의견에 반론을 가하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한다. |
◦ 학습지 |
◦ 다른조의 발표내용을 잘 듣도록 지도한다. | |
정리 및 차시 예고 (30) |
형성평가
과제 및 차시예고 |
◦ 학습내용을 정리한다. - 19세기 국내외 정세 - 흥선 대원군의 대표적인 정책 ◦ 과제부여: 대원군의 대외 정책에 관한 자신의 최종의견을 인터넷에 올린다. |
◦ 본시 수업내용을 상기시키며 물음에 답한다. |
◦학습자료 |
◦인터넷게시판 주소를 확인한다. |
6. 참고자료
◦ 『한국사 통론』, 변태섭, 삼영사, 2005
◦ 『한국사 특강』,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영우, 경세원, 2004
◦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6 (근대)』, 김태웅, 솔, 2003
◦ 『조선 왕국 이야기 (100년 전 유럽인이 유럽에 전한)』, 김영자, 사문당, 1997
◦ 『매천야록』, 황현, 서해문집, 2006
학 습 자 료
자료1.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말하기를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 라고 하였다.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말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다.
-『매천야록』 갑오이전甲午以前
자료2.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 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 (중략) …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쫓아버리도록 하였다. … (중략) … 사족들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략) … 대원군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랴.” 하였다. … (중략)…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근세조선정감』 상
자료3. 경복궁타령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온다.
→ 배고픈 부역 장정들이 남문 여는 파루 소리에 놀라 깨어 보면 아직 꼭두새벽, 밤잠 설쳐가며 강제 동원된 설움
을축 4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루었네.
→ '갑자을축'이 아니라 '을축갑자'라 바꾼 것은 경복궁 공사가 정치의 앞뒤를 헤아리지 못한 처사라는 빈정거림이다.
우리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중건에 다 들어갔네.
덜커덩 웬 소리냐 경복궁 짓느라고 헛방아 찧는 소리다. - 실속없는 공사라는 것을 빗댐
석수쟁이 거동을 보소 방망치를 갈라 잡고 눈만 껌벅거린다.
도편수란 놈의 거동보소 먹통메고 갈팡지팡한다.
→ '눈만 껌벅거린다', '갈팡질팡한다' 등은 일하는 사람들의 불평을 풍자한 것이고, 그 밖에 부역의 고달픔을 나타냄.
남문 밖에 떡 장수들아 한 개를 베어도 큼직큼직 베어라.
남문 밖에 막걸리 장수야 한잔을 걸러도 큰 애기 솜씨로 걸러라.
→ 남문 밖에 늘어선 떡 장수나 주모까지도 물가 상승 때문에 , 민심이 야박해졌다는 것을 한탄.
나 떠난다고 네가 통곡 말고 나 다녀올 동안 네가 수절하여라
인생을 살면 몇 백 년 사나 생전 시절에 맘대로 노세
경복궁 역사(役事)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족을 만나 볼까.
자료4. 흥선대원군의 양이 보국책 유시
1.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만일 화친을 허한다면, 이는 매국하는 일이니라.
2. 그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일 교역을 허한다면, 이는 망국하는 일이니라.
3. 침략자가 서울에 육박해 옴에 만일 서울을 떠난다면, 이는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이니라.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보다도 더욱 심할 것이다.
자료5. 오페르트의 <폐쇄의 나라 대한제국>
어느 날 페롱 신부가 꽤 흥분한 모습으로 찾아와서 아주 좋은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데, 조선 조정을 위협해서라도 통상을 맺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같이 행동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오페르트)는 그처럼 확실한 계획이 대체 무엇인지 들어보자고 했다. … (중략) … “대원군은 미신을 아주 중시합니다. 그의 재산 중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물’이 있는데 어느 외딴 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성물’에 가운(家運)이 걸려있다고 믿고 있고 이로 인해서 대원군의 아들이 왕대비의 양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인의 계획이라는 것은, 이 가보를 잠시 동안만 훔쳐오겠다는 것인데, 이는 마치 서울을 함락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원군은 가보를 찾기 위해서 결코 협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며 친히 개방 조항에 서명을 하게 될 것입니다.”
- 김영자의『조선 왕국 이야기 (100년 전 유럽인이 유럽에 전한)』
자료6. 신미양요 회고
◦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 물에 투신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 앨버트 가스텔
◦ 남북 전쟁 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 블레이크 중령
◦ 이 전투는 동양에서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 미 국무장관 포스터
자료7.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 洋夷 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도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학 습 지
학 습 일 자 |
월 일 |
모 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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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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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론 주 제 |
나는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 ||||
내 용 |
나의 의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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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사람 의 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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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된 의 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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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원군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물론, 그 당시의 세계는 제국주의가 만연하여, 문호 개방을 빌미로 우리 나라가 침략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서양 문물의 유입을 너무도 철저하게 막는 바람에 훗날 일제의 침략에 우리나라가 힘없이 무너져 버린것이라 생각한다. 흥선대원군이 집권 초기에만 쇄국 정책을 쓰고, 그 이후에는 문호를 개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근거도 충분히 없을 뿐더러, 역사를 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약 대원군이 우리나라의 상황에 맞게 신중히 문호를 단계적으로 개방했다면, 그리하여 외세에 대적할 만한 국력을
길렀다면, 외세의 침략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는 나라안이 매우 혼란 하였기 때문에 흐트러진 정치적 기강을 바로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더불어, 외세의 침략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주변국ㅡ중국의 아편전쟁ㅡ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대원군은 문호 개방에 극히 부정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대적인 개혁과 동시에 체계적으로 서양의 세련된 기술 등을 유입하여, 그것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유연한 정책을 진행하였다면, 고급화된 무기나 경제의 부흥으로 인해 국력의 신장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필연적이었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글의 전개를 보면 1.본인의 주장을 말하고, 2. 대원군이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해 이해하는 태도를 보였고 3,대원군 정책의 한계를 비판하고, 4,다시 대원군의 시대적 상황을 인정하였고, 5. 또 다시 비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일관성 있는 서술을 해야할 것 같네요. 가령 대원군에 대해 긍정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몰아서 이야기하고 난뒤 조목 조목 비판하는 것이 훨씬 더 일관된 표현이 될 것 같아요.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앞서 먼저 1840년에 개항하게 된 중국이나 1854년 일본의 개항 등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실시하였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 일을 모르고 무조건 낙관적인 전망만 가지고 개화를 하였다가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옳은 일이었다고 본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개화가 지연되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제국주의 세태에서 서양 열강이 침입해 와서 개화를 요구한 것은 단순한 명분일 뿐, 실질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식민지화를 꾀었다는 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만약 그 때 개화를 했다면 우리는 서양 열강들의
반식민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당시 우리 나라 대내적 상황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여기에 섣부른 개방으로 인하여 새로운 문화나 사상이 들어오면 나라의 혼란을 가중시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염두에 둔 흥선대원군은 국민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던 것이었다. 가끔 대원군이 부국강병같은 문제는 고려를 하지 않고 나라의 상황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폐쇄적인 외교 정책을 펼친 것은 아니며 그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책은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시 글의 서술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네요. 처음에는 본인의 주장을 말하고 나서 바로 다음에는 본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에 대해서 서술을 하고 , 그 다음에 그 의견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 훨씬 설득적인 표현 방법일 것 같아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한다.대원군은 정도전이나 조광조 못지않은 개혁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개혁의 지향점이 복고와 폐쇄에 있었던 것이 대원군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의 개혁열차의 종착역은 시대착오적인 성리학 사회의 재건이었고 왕권강화였다. 바로 이것이 대원군 개혁정치의 한계이자 비극이었다.
당시 개방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조선의 상국이었던 청나라가 1841년(헌종 7년), 부도덕한 아편전쟁에 패배해 굴욕적 조건의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한 것이나 일본이 미국 동인도함대 제독 페리(Perry)의 무력시위 끝에 1856년(헌종 7년) 불평등한 미일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냉엄한 국제현실이었다.
대원군은 이런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인식해 가장 유리한 때,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 나라 바깥을 모조리 오랑캐로 보고 오로지 타도할 적으로 취급하는 정신병적인 태도는 최선의 방책이며 주체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은 미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때 개방을 했더라면 어이없는 강화도 조약은 치루지 않았을텐데... 아니 30년동안 식민지로 암울하게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개화를 하기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말하던 그들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때만 기다릴 것인지 묻고 싶다. 조선이 영원한 고립국이 되기를 바란단 말인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당시 서양열강은 아시아를 비롯한 전세계를 제국주의를 앞세워 지배하기 시작했다. 중국 또한 1,2차 아편전쟁 등으로 난징조약과 같은 여러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그결과 홍콩할양과 연해주할양을 비롯하여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게되었다. 이 상황을 주욱 지켜보고있던 조선은 과연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 했을까.
일본은 페리 제독의 압력으로 개항을 한 후, 메이지유신을 거쳐 근대화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은 계속해서 열강의 간섭을 받아야했고, 결국 제국주의국가의 일원이 된다. 또 일본은 이미 그 이전에 조닌문화가 형성되어있었고, 나가사키 등지에서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왔기때문에 개항을 받아들이는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에 반해, 조선은 신미년, 병인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양요로 서양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상태에서 개항을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야기하였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당시는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강화해야하는 시기였다. 개정할 것과 신경써야 할 것이 그렇지 않아도 많았는데,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채 개방으로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면, 그것은 사회혼란만 가져올 뿐이었다. 19C 조선은 신분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상업이 활성화되며 근대의 태동이 보였다. 또한 대원군은 서양세력과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하자, 대원군은 곧 열강은 조선을 도울 생각은 없고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 챙기려한다는 것을 깨닫게되었다.
그러하다고는 하나 대원군은 분명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가졌더라면 충분히 스스로 근대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것이다. 결국 조선의 내적으로 곪아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타국의 선례를 통해서, 또 조선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때,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옳은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에 부정적이다. 미흡한 조건 하에서 무리한 쇄국을 하느니, 개방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추된 왕권 강화, 민생안정이라는 이름 하의 노력 과정에서 오히려 백성들에게 부역을 강요하고, 물가를 불안정시키고, 몇차례의 전투를 하는 것은 모순이다. 힘든 국내 사정에서 혼자 분투하는 것 보다는 넓은 세상을 보고 서양 세력과 교류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열강의 힘을 빌리면 자신의 정권이 흔들리지 않을까, 라는 걱정하에 쇄국을 하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만족이다. 무리한 쇄국으로 중국과 같은 일방적인 조약을 맺는 상황을 맞이하는니, 먼저 개방하여 조금 더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다.
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찬성한다. 대원군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개항을 했더라면 우리나라가 근대 기술을 받아들여 국력을 기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상황은 그럴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사실 쇄국정책을 하기 전 개혁의지가 있었다.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는 적극적 의지를 보였으나 프랑스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은 영국, 프랑스 등에 의해 북경을 점령당했고 청나라 황제가 열하지방까지 피난을 가야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과연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대원군이 쉽게 개항을 할수 있었을까.
그리고 당시 조선의 흐름은 반외세였다. 반외세운동은 사실 아래에서 먼저 일어난 것이다. 새정책이 추진되느냐고 재정이 바닥나 월급조차 받지 못하는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 것이 반외세운동의 발단이었다. 민심이 이렇게 서양에 대한 안좋은 감정으로 차 있었는데 이런 시기에 개화를 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불러 일으킬수 있다. 당시 개화를 했더라면 우리의 유교 질서를 흔들 사상이 들어올 것이고 그 사상이 백성들에게 퍼지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국력이 쇄할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또 백성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 고유 전통문화가 새로 들어온 서양 문화에 의해 갈길을 잃는것을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하는 지도자로서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즉, 새로운것을 받아들 일 때는 옛것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인데 엣것이 흔들리는 가운데 무턱대고 개항부터 하고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옛것을 지켜나가며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춰서 개항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에 부정을 표하는 바다. 당시 대외적으로 이미 서양의 기세가 동양으로 확장되고 있었고,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 역시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문을 연 상태였다. 세계는 이미 서로를 받아들이며 흘러가고 있는데 조선만 꿋꿋이 문을 지키고 있다면 세계의 흐름에서 도태되는 것은 물론이요, 곧 자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당시 조선의 열악한 국내상황을 고려한다면 도저히 조선 혼자서는 자생이 힘들텐데 말이다. 또한 대내적으로 당시 조선은 이미 근대화로 막 첫발을 내딛고 있었기에 오히려 서양 신진문물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나라안으로는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취약한 경제구조
를 살리는데 도움을 주는 등 조선의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흥선대원군이 진정으로 서양 오랑캐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수용하고 배우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랬거늘 부딪쳐보기는 커녕 무작정 외세를 막기만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능력이 의심스럽다. 또한 빠를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장기적인 전망으로 먼 미래까지 내다본다면 분명 개항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이 경우, 외세에 의해 억지로 문을 여느니 조선이 먼저 주체적으로 세계의 흐름에 합류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어떻게든 쇄국을 하려 애걸복걸했을 그 시간에 정세를 읽고 개방의 준비를 단단히 했었더라면 오히려
독이 아닌 약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문을 열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닌 문을 연 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물음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는데 그저 화친과 척화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엔 쇄국으로 훗날 강화도조약과 같은 더 큰 위기를 불러온 흥선대원군.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은 흥선대원군과 그의 시대에 맞지 않는 쇄국 정책에 다시 한 번 부정을 표하는 바이다.
흥선 대원군은 적절한 외교정책을 펼친 지도자이다. 그 당시 외세들이 우리 나라에 접근한 목적이 단지 친화가 아니라 침략이었다. 그 상황에서 개방을 한다면 나라 전체가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는 개방(강화도 조약)후부터 줄곧 일본에게 시달려야 했다. 대원군은 이런 결과를 늦춘것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개방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므로, 언젠가는 개방을 했을 것이다. 단지 그는 그 당시를 개방에 적절하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하고 미룬 것이다. 나라의 군사력이 외세와 겨룰 수 있을 만큼 막강해지고, 상업이 발달하여 자본도 많아질 때를 기다려 개방하는 것이 올바른 조선 살리기였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은 대원군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문호 개방을 하지 않아 강화도 조약 같은 불평등 조약의 체결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대원군을 개혁의지가 없고 변화를 싫어하는 지도자였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대원군에게 개혁의지가 없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대원군은 처음에 최대한 효과적으로 문호개방을 하기 위해 프랑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천주교에도 우호적이었다. 그러한 프랑스의
거절과 청나라에서의 아편 전쟁을 지켜보면서 과연 지금이 문호 개방의 적시라고 판단했을까? 지금 섣불리 개방했다간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할 것이 자명했다. 그러므로 대원군은 일단 쇄국정책을 펴 문호 개방을 늦추고, 국가적 역량을 키운 뒤 개방하려 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근대 태동기라며 여러가지 근대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열강과 견주어 보면 범 앞의 하룻강아지 격이었다. 또한 일본과 우리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일본은 옛부터 죠닌 문화라는 상인 문화가 발달해 있어 폐쇄적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개방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약 2백년 동안 쇄국을 한 뒤 미국에 의해 강제로 문호 개방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흥선대원군은 국제정세와 국내역량을 냉철히 판단한 뒤 적시가 아니라고 판단해 일단 쇄국정책을 펼친 것이다. 제대로 된 실력도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적극적으로 개방을 했다고 열강들이 불평등 조약을 맺지 않았을까? 오히려 강화도 조약의 3포 개항이 아닌 10포 개항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흥선대원군은 개혁의지를 분명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뜻을 펼칠 여분의 시간만 있었다면 우리나라는 성공적인 근대화와 문호 개방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