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리삼거리
남리삼거리 우측에 통신탑이 있고 2차선 도로따라 계속 직진하여 간다.
♤ 해남군 황산면 연당리(蓮塘里)
마을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예전에는 갯벌이 있어 게와 굴 등을 채취하였다. 마을에 연못이 있어 연못골이라 불렀고, 임진왜란 이후부터 마을 앞 저수지에 연꽃이 자생하여 연꽃 연(蓮)과 연못 당(塘)을 합해 연당(蓮塘)이라 불렀다고 한다.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당리, 덕암리, 백동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연당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연당마을과 덕암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연당리 가운데 아래쪽으로 국도 제18호선이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비스듬히 지나간다.
♤ 덕암삼거리
마루금은 도로 좌측 경작지로 이어지나 도로따라 마루금을 보며 간다. 덕암삼거리에서 도장사쪽 시멘트 도로로 우틀한다.
- 덕암마을 농로따라 개사육장 뒤 고물상으로 올라간다.
♤ 돈박산(70.4m)/ 돌탑, 의자
퇴적암 암릉으로 오른다. 양쪽으로 조망이 좋다. 돌탑과 운동시설이 방치되어 있다.
♤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冠春里)
관춘리는 마을의 생김새가 갓을 쓴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갓점골 또는 입점이라고도 불렀다. 본래 해남군 황원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성리, 내외리, 평덕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관춘마을, 산동마을, 신성마을, 평덕마을, 성만마을, 내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관춘리는 북쪽으로 금호호 건너 산이면 진산리, 동쪽으로 우항리, 남리리, 남쪽으로 옥동리, 서쪽으로 문내면 석교리와 접하고 있다. 관춘마을은 평평한 너른 들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서편에는 수십 그루의 팽나무가 방풍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산동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형 촌락을 이루고 있다. 신성마을은 1970년대 초 월광포구가 간척되면서 바다와 갯벌이 거의 사라졌다. 평덕마을은 본래 반농반어의 생활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평덕저수지가 축조되고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주업이 농업으로 바뀌었다.
♤ 관춘마을/ 관춘교차로
밀양박거사묘를 지나고, 논둑따라 밭둑따라 신설 18번 국도를 관춘2육교로 지나 관춘리로 들어서고, 소정삼거리 황산제재소 앞을 지난다. 멀리 옥매산이 보인다.
♤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富谷里) 신곡마을/ 소정삼거리
부곡(富谷)이란 명칭은 마을의 형국과 관련이 있다. 부곡리는 북쪽으로 관춘리, 동쪽으로 연당리, 외입리, 남쪽으로 바다, 서쪽으로 옥동리, 바다와 접하고 있다. 부곡마을은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는 평야촌이다. 성산마을은 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가옥들은 해안선을 끼고 들어서 있다. 간척공사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는 형세를 동남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인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수(浮水), 부실, 부옥촌, 부뜰이라 불렀는데, 후에 부곡이라 개칭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부자 양반만이 살았다고 하여 부곡(富谷)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현재 부곡마을, 신곡마을, 소정마을, 춘정마을, 성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신곡마을은 본래 부곡마을과 한 마을로 신곡마을을 상마을, 부곡마을을 하마을로 불렀다. 신곡마을 입향조는 문화유씨와 서흥김씨로 250년 전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 신흥뫼산(68.2m)
소정마을에서 효부진주강씨기적비 좌측을 끼고 오른다. 연홈마을에 있다. 좌측에 신흥뫼산이 있으나 있으나 가시잡목이고 전망도 없어 도로 따라 우회하는 경우도 많다. 우측에 관춘저수지가 있다.
- 신흥뫼산 정상에서 먼 기억으로 어란진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울돌목을 향하는 왜선을 바라볼 수 있다.
♤ 평덕마을
신흥뫼산을 옥연저수지로 내려서면 평덕리 마을표지석이 있는 도로로 나온다.
♤ 해남학생의집
옥동초등학교가 폐교되어 해남 학생의집으로 바뀌었고 주변에 옥돌 공예집이 여러개 있는데 모두 문을 닫았다.
♤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玉洞里)
옥동리는 옥연이라고도 불렀는데, 마을이 옥매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연마을은 옥동마을과 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옥동리의 옥과, 마을 중앙이 제비집을 닮았다 하여 제비 연(燕)을 붙여 옥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옥동마을, 옥연마을, 삼호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옥연마을은 옥동마을과 한 동네였으나 1952년에 분리되었다. 마을 앞으로는 바다가 길고 넓게 펼쳐져 있으며 오른쪽 위로 국도 제18호선이 살짝 걸쳐 지나간다. 옥동리는 북쪽으로 관춘리, 문내면 용암리, 문내면 학동리, 동쪽으로 관춘리, 부곡리, 남쪽으로 부곡리, 바다, 서쪽으로 문내면 학동리, 바다와 접하고 있다. 옥연(玉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이 있어 ‘농장’이라 불리던 곳을 해방 후에 일본식 명칭을 없앤다 하여 옥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삼덕포 제방을 막아 농장을 만들면서 형성되었으며, 1940년쯤 일본 한전화학회사가 옥매산을 개발하면서 각지에서 일거리를 찾아 온 사람들에 의해 마을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 국도변 초원식당이 있다.
♤ 옥동삼거리/ 이목마을(10m)/ 황산면-문내면 경계
황산면 옥동리 옥동초등학교앞 이목마을은 문내면 용암리에 속하며 우리말로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 마을이다. 옥매산 밑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에 옥매산에 있는 옥광산의 옥을 캐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들어선 마을이다. 신흥마을은 원목마을과 한 마을로 있다가 분리된 마을이다.
- 옥동삼거리 수준점이 방치되어 있고, 문내면으로 들어서서 좌측에 보이는 옥매교회 뒤 배추밭으로 오른다.
♤ 해남군 문내면(門內面)
해남읍에서 서쪽으로 30㎞ 지점에 있는 문내면은 동쪽으로 황산면, 북쪽으로 화원면과 인접하여 있으며, 남서쪽으로 이순신 장군의 대첩지인 명량해협[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진도군, 동북쪽으로 금호호를 사이에 두고 산이면과 마주보고 있다. 문내면은 좁은 반도 지형에 구릉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산이 높지 않고, 하천이 발달되지 않았다. 이 지역의 산은 호암산[136.9m], 서승산[108.5m], 망해산[78.4m], 대덕산[85m], 청룡산[74.8m] 등 해발 100m 내외이다. 황일면(黃一面)과 황이면(黃二面)이 1897년 합쳐져서 문내면(門內面)이 되었다. 문내면에는 조선시대 초부터 전라우수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전라우수영 영문(營門)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문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인 것은 우수영이 혁파된 1895년(고종 32)으로, 그 이전에는 황일면과 황이면의 일부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자연마을에는 우수영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용암리(龍岩里)의 원동(院洞)·원문(元門)마을은 우수영과 원문에 기원을 두고 있다. 동외리(東外里)의 동외(東外)·동영(東營)·동내(東內)·남외(南外)마을은 동문밖·우수영·동문안·남문안의 한자식 표기이며, 우수영과의 위치 관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선두리(先頭里)의 남상(南上)마을은 남문 안에 있던 바닷쪽 마을에서, 남하(南下)마을은 바다에서 떨어진 안쪽에 있던 마을에서 각각 기원한 지명이다. 무고리(武古里)는 우수영 병사들이 무술을 연마하였던 곳이다.
♤ 우수영(右水營)/ 사적 제535호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접촉이 극심한 전라도와 경상도에 한하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상주하는 주진을 각각 두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한성에서 보아 각 도의 서편, 즉 우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우수영, 동편 즉 좌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였다. 1377년(우왕 3) 전라북도 옥구(沃溝)(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부근)에 전라수영이 설치되었다. 태종 때 왜구의 침입이 전라남도로 집중되면서 적극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1407년 전라도 수군도절제사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함평군 대굴포로 수영을 옮기자고 제안하였고, 1408년(태종 8) 현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곡찰리 대곡마을인 대굴포(大堀浦)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되었다. 1432년(세종 14) 무안(현 목포시 하당 부근 추정)로 이전하였으며, 1440년(세종 22) 현재 위치인 해남군 황원곶(黃原串, 해남 문내면 우수영)으로 옮겨 왔다. 1465년(세조 11) 전라수군처치사에서 전라수군절도사영(全羅水軍節度使營)으로 이름을 고쳤고, 이어 1479년(성종 10) 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개편되었다. 정유재란 명량대첩 당시 조선 수군의 배후 기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해남 전라우수영은 조선시대 전라우도 수군의 본영으로, 앞에 있는 '양도'가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막고 있어 천혜의 요새이다. 왜적이 육지로부터 전라우수영을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된 원문이 있다. 우수영에는 정3품 당상관인 전라우수사가 배치되었다. 종 6품 해남현감보다 6단계 위의 계급이다. 우수사의 약칭은 수사(水使)이며, 별칭은 곤수(梱帥)라 하기도 하였다. 우수사의 위상은 대단하였다. 우선 당상관(堂上官)으로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 대청[堂] 위의 의자에 앉을 수 있으며, 왕과도 정치 중대사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고급관료이다. 당상관 곤수는 ‘대궐 밖의 신하’라는 뜻으로 ‘대궐 밖의 모든 일을 맡는 장군’을 말한다. 전쟁 시에는 생살권까지 임금으로부터 위임받아 막강한 군령을 휘두른다. 전라우수사는 밑에는 우후 1명[종3품], 첨절제사[종3품], 여러 만호[정4품] 그리고 병선은 130여 척을 거느렸다. 전라우수사의 역할은 전라우도의 방어 외 25처의 봉화, 목장관리, 세곡의 수납과 호송, 소나무밭 관리와 전선의 건조 등으로 임무가 막중하였다. 조선 후기에 전라우수영은 속읍으로 7관[해남, 진도, 영암, 나주, 무안, 함평, 영광]과 수군진은 17포[완도 가리포~전북 옥구·군산진]를 거느렸으며, 전라우수사는 이에 속한 수군을 통솔하였다. 반면 전라좌수영은 5관 5포에 불과하였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조선 후기 전라우수영에 소속되어 근무하는 자는 사령관격인 정3품 전라우수사 외 5,544명이고, 우수사의 관할에 편성된 전라우도 수군은 총 2만 5,000명에 이르렀다. 19세기 중엽에는 전라우수영에 소속된 병선은 모두 85척에, 병사는 2만 1,356명이었던 반면에 전라좌수영은 9,849명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등에 업은 우수영 사람들은 최근까지 이를 상당한 긍지로 여기고 해남읍을 하대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우수영은 처음에 거제에 두었다가 1604년(선조 37) 고성(固城)으로 옮겼다. 각 수영에는 한학의 역학(譯學)과 왜학의 역학을 각 1인 두었다. 1895년(고종 32) 칙령 제140호에 의해 폐영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수영이 있었던 곳은 그 명칭과 함께 흔적이 남아 있다.
♤옥매산(玉埋山, 137.8m)/ 황산면-문내면 면계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암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옥매산정의 폐광이 된 옥돌광산이 계곡처럼 보인다. 광산터로 정상부가 둘로 나누어졌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玉梅로 표기되었고, 조선지형도에는 매화 매(梅)가 묻을 매(埋)로 바뀌었다. 전체가 암산이고 지명 유래에도 칼바위, 공알바우, 송곳바우 등 여러바위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쇠말뚝을 박아놓았던 곳으로 쇠말뚝제거비가 있다. 옥매산 광산은 과거 일제강점기인 1916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국내 강제동원 중 최대규모인 국내 기술자와 노무자 약 1,200여 명이 군수품의 원료인 명반석(비행기 만드는 원료)과 납석을 채굴한 노역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발 173m였던 옥매산 봉우리는 깍여나가 협곡이 되었고 이어진 해안가에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저장창고와 선착장이 있다. 전쟁말기에 이르러 이 지역 광부들은 강제로 제주도로 끌려가 굴을 파는 일에 또 동원되었다.
♤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龍岩里)
마을 뒤 대덕산에 용바위가 있어 ‘용바우’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한자화하여 용암(龍岩)이라 하였다. 북서쪽으로 대덕산(85m), 남서쪽으로 옥매산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평평한 구릉지 위에 들어섰다. 본래 해남군 문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문리, 원동리, 용암리와 석교리, 사교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문내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용암마을, 원동마을, 신흥마을, 사교마을, 원문마을, 신월마을, 이목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용암, 원동, 원문이 황일면에, 석교가 황이면에 속한 것으로 나온다. 원동은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삼기원(三岐院)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화원목장(花原牧場)의 원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암리는 북쪽으로 석교리, 동쪽으로 석교리, 남쪽으로 왕산면 옥동리, 서쪽으로 동외리, 선두리와 접하고 있다. 용암리 서쪽에서 동남 방향으로 국도 제18호선이 지나고 있다. 우수영에 속한 원문성(轅門城) 터와 영세불망비가 있다.
♤ 신흥마을/ 신흥마을회관
옛날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벌을 간척한 넓은 평야지대이다. 한동안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 옥매산을 내려서면 신흥마을입니다. 왼쪽으로 간척된 들판을 바라보며 다시 도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 원문-터(轅門)
문내면(門內面)의 지명은 전라우수영의 외성(外城)으로 원문(轅門)의 안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한다. '원문’은 지금은 넓게 매립이 되었지만 옛지도를 보면 좌우가 바다와 인접한 그 폭이 불과 300m 정도의 아주 좁은 목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남 우수영으로 가던 길목으로 여기에서 막히면 우수영이나 진도로 가는 육로는 단절이 되는 셈이다.
♤ 원문마을
원문마을은 1630년경 나주에서 이주하여 들어온 나주정씨 정관(鄭觀)이 입향조라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인근 옥매광산에서 채굴 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호구총수』에 원문리가 나온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주도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타고 있던 배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마을 주민 10여 명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신흥마을은 원목마을과 한 마을로 있다가 분리된 마을이다.
- 도로와 마루금이 바짝 붙어 지나 도로를 따라 계속 간다.
♤ 사교마을/ 사교교차로
신월마을 버스정류소가 있고 좌측으로 꺽어가나 직진한다. 사교마을표지석을 지나, 18번 구도로를 지하통로로 통과해서 도로따라 마루금을 우측으로 비켜서 송정마을로 가기도 하고, 맥길을 따를려면 좌측으로 18번국도로 올라서서 조금 진행하다 무단횡단하여 송정마을로 가야합니다.
- 문내원동사거리에 있는 문내초등학교는 폐교되었습니다. 맥길은 좌틀합니다.
♤ 원동마을
원동마을 버스정류소 반대편에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간판 없는 가게가 있습니다.
♤ 거북산(65m)
마루금은 좌측으로 태양열발전소 가운데 길로 마루금을 쫒아 거북산을 오르지만 태양열발전소 연두색휀스공사로 우측으로 돌아서 우회하여 올라야 한다.
- 거북산은 거북이등처럼 내리는 길에도 태양열집전판 시설이 있군요. 통신탑이 있는 임도로 내려서서 다시 태양열발전소시설을 또 지나야 합니다.
- 태양광시설을 어렵게 통과하여 정상에서 임도로 내려서니 위 사진의 아스팔트 도롭니다. 여기서 5분여 올라서면 구안산이네요.
♤ 구안산(71.8m)
거북산과 구안산은 산은 낮지만 넘기가 까다로워서 그런지 도로따라 비켜가는 경우가 많다.
♤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石橋里)
석교리는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어 ‘독다리’, ‘독나루’, ‘석교’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삼덕리, 일정리, 신창리, 석교리와 사교리·충평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석교마을, 심동마을, 신창마을, 일정마을, 목삼마을, 삼덕마을, 송정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 호암산(虎岩山)[132m]과 남쪽으로 대덕산(大德山)이 있다. 석교리(石橋里)는 북쪽으로 충평리, 고당리, 고평리, 동쪽으로 금호호 건너 산이면 초송리, 남쪽으로 황산면 관춘리, 서쪽으로 용암리와 접하고 있으며 교통은 국도 제18호선이 마을 아래쪽을 스치듯이 지나고 있다.
- 심동마을 버스정류소로 내려서서 건너편 대나무숲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심동마을/ 2차선
심동마을 뒤쪽의 낮은 구릉이 지맥길이다. 좌측 지맥능선 아래 도로로 우회하기도 하는데 심동마을 버스정류소에서 구안산을 비켜온 마루금과 만난다. 마을회관 앞에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다.
♤ 서승산(108.5m)
해남 문내면 무고리 산승산의 서쪽에 서승산(108.5m)도 있네요.
- 충평마을의 서쪽 산승산은 배낭을 놓고 좌측으로 300m 다녀와야 합니다.
♤ 문내면 충평리(忠坪里)
본래 산수가 좋고 버드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유평(柳平), 버릿돌, 벗들이라 부르다가 해방 이후 국가에 충성을 해야 된다는 의미로 충평(忠坪)이라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우리와 무고리, 신평리, 충평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남군 문내면 충평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충평마을, 신평마을, 갈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충평리는 북쪽으로 화원면 장춘리, 동쪽으로 고당리, 고평리, 남쪽으로 석교리, 서쪽으로 무고리와 접하고 있다. 서남쪽은 서승산 자락으로 이어져 있고, 북쪽도 산지가 분포한다. 남서쪽 끝에 충평저수지가 있다.
♤ 문내면 충평리 충평마을
- 도로 왼편에 지맥 마루금이 가깝게 있어 마루금을 보며 우측 충평마을 방향 도로를 따라 우회하기도 합니다.
- 우회길을 선택했다면 갈우마을회관/ 갈우마을 표지석, 버스정류소 앞 사거리에서 좌측 화원방향으로 올라갑니다.
- 우측에 보이는 76.8m봉은 도로따라 비켜서 갑니다. 화원에서 유일하게 이 봉우리만 우회했네요.^^
- 김해김씨세장산비를 지나 일성산이 보이는 곳에서 지맥길은 묘지 옆 들머리를 통해 좌측 동산(57m)을 올랐다가 우틀로 내려서야 합니다. 하지만 도로로 직진해서 우틀하여 방죽재로 내려서는 우회길을 많이 택한답니다.
♤ 일성재(36m)/ 방죽재/ 2차선도로
문내면 고당리(古棠里)에서 화원면 장춘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팥배나무 당(棠)을 쓴다. 작은 저수지 방죽제 바로 옆이라 ‘방죽재’라 하는 모양인데 현지 사람들은 일성재로 부른다. 이 도로따라 문내면과 화원면계가 갈라지므로, 이제 일성산으로 오르면 화원반도의 끝면인 화원면으로 들어간다. 문내면 고당리 지명유래에 ‘가잣재’로 나오는걸 보면 방죽재가 아니라 가잣재라 해야 되겠다.
♤ 일성산(日星山, 335.1m)/ 화원3등삼각점/ 문내면-화원면 경계
문내면 고당리와 화원면 장춘리, 청룡리, 성산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일성산이 높아서 해가 뜰 때 산 뒤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고, 별이 뜨면 별이 산 봉우리에 걸려 있는 듯이 보인다 하여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성산은 고당천의 발원지이며, 고당천 물줄기는 금호호로 유입된다. 일성산 큰골에는 마치 애기를 업은 바위처럼 생긴 애기업은바위가 있다. 장평마을 동쪽 가삼동마을 북쪽에 여덟 개 바위로 이루어진 여덟바우가 있다.
- 일성산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약 250m 비켜나 있다.
- 방죽재에서 우측 고당마을 쪽으로 300m 내려가면 일성산에 오르는 정상적인 등산로 입구가 있습니다.
♤ 황원봉수터(黃源烽燧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황원봉수는 현의 서쪽 60리(약 23.56km)에 있다. 남쪽으로 진도 첨찰산에, 북쪽으로 무안현의 유달산에 응한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내용이 여지도서에는 황원 일성산(日城山) 봉수로 쓰여있다. 일성산 봉수와 황원 봉수는 같은 명칭이다. 조선지형도에서 일성봉(日星峰)이 확인된다. 일성산 정상의 봉화대 불빛은 우수영 8경 중의 하나인 제6경 일성봉화(日星烽火)로 전한다.
- 일성산 봉수지가 있다. 봉수대 흔적인 축대위로 올라서면 산불감시카메라가 걸린 철탑이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금호호와 금호도도 보이고 북으로 화원면 소재지가 잘 보인다.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다.
♤ 해남군 화원면(花源面)
조선 후기에 장서면(場西面)과 장목면(場牧面)으로 편제되었다가, 1906년(광무 10)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감목관이 혁파되고, 그 자리에 관저면(管底面)이 신설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서면과 장동면, 그리고 관저면 등 3개 면을 합하여 해남군 화원면을 개설하였다. 이런 지명은 조선 초에 설치한 황원곶목장(黃原串牧場)의 ‘원(原)’ 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두 면은 황원곶 목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장서면, 아래쪽에 장목면이 있었다. 화원의 면리는 1906년 지방행정 제도를 개편하면서 약간의 변동이 일어난다. 황원감목관을 폐지하고 그 자리에 관저면(官底面)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화원 지역은 장동면과 장서면, 그리고 관저면 등 3개 면으로 편제되었다. 이때 장목면이 장동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동면과 장서면, 그리고 관저면 등 3개 면을 합쳐 화원면을 개설하였다. 이후 화원면(花源面) 지역은 화원면은 1980년 2월 1일 행정리 후포리를 후포와 온덕으로 분할하고, 1980년 5월 2일 행정리 내주리, 외주리를 주광리로 합병하고 행정리 신주광리를 청룡리에 신설하면서 약간의 변동이 일어났을 뿐 1914년 개편 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화원반도의 끝 부분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문내면과 인접하여 있고, 동쪽으로 금호호를 사이로 산이면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바다(해남만)를 사이에 두고 영암 삼호읍과 목포 신외항을 바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안군 장산면과 마주하고 있다.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농지는 동쪽 금호호와 남서쪽의 바닷가에 주로 분포한다. 주요 산은 일성산, 운거산, 지령산, 매봉산, 깃대봉, 큰봉산 등으로 해발 200m 넘는 산들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조선지형도』에서 화원반도를 살펴보면, 서쪽과 동쪽 일대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복잡하고 여러 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활발한 간척사업으로 지금의 해안선은 그때보다 단조로워졌고, 섬들도 없어졌다.
- 화원 지역에는 화원지방산업단지, 오시아노관광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 증가 요인이 생겼다. 금호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목포로 출퇴근이 가능해지면서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많이 늘지 않았다. 교통은 국도 제77호선이 화원면을 관통하듯 지나고 있다. 금호방조제·영암방조제[1985년 착공, 1996년 준공]가 만들어지면서 개통된 국가지원지방도 제49호선은 영암과 목포로 가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 애기엎등산(293.6m)
정상부는 억새밭이고 조금 더 나가면 암반이 있어 멋진 조망대가 된다. 엄청 큰 낭초저수지(朗草) 옆으로 77번 국도가 달린다. 국도따라 왼쪽 멀리 우수영, 명량전망대, 진도까지 잘보인다. 아래쪽 암봉에서는 화원면이 더 가깝게 보인다. 정면은 절벽이라 우측으로 돌아서 내려간다.
- 작은 일성산이라고 표시를 해둔 묘지가 있는 153m봉을 지나 전망이 좋은 송전탑을 만난다. 여기서 77번국도로 내려서는데 중간에 만나는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가 77번 국도를 통과하는 암거로 가도 되고, 가시밭길을 직진해 수정카센터로 가도 된다.
♤ 77번 국도(32m)/ 효심사입구
해남에서 목포로 가는 4차선 도로인 77번 국도이다. 남쪽 아랫마을이 어둠골이고 북쪽 아래는 화원면소재지인 청용리이다. 우측으로 도로따라 통로암거로 우회하여 마루금에 합류하면 효심사 입구이다.
- 산수갑산순대국집 앞이 이목교차로이고 수정카센터가 마루금으로 카센터 뒤로 오르면 효심사입구 표지석을 만나지 않는다. 이목마을에서 신덕저수지로 넘는 고개 안부를 지나 180m봉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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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1. 3. 13.(토) - 음력(2. 1.), 일출 06:48~일몰 18:39
●산행지: 화원지맥 2구간(77번국도-목포구등대)
●산행코스: 77번국도-효심사-158m-180.9m봉-214.3m봉-호출산-176.1m봉-화봉재/도로-201.4m분기-인지고개/도로-165.8m봉-초봉골산-인지봉-239.7m봉-후포재/사동-가마고개-운거산-311.4m봉-325.7m봉-진등산-216.2m봉-금굴산-106.1m봉-당포재/도로-매봉산-223.7m-203.8m봉-246.3m봉-깃대봉-목포구등대
●먹거리: 생수1.5리터, 빵3, 땅콩샌드2, 단백질바, 산도, 알마겔2, 인삼포5
●준비물: 쟈켓, 스틱, 마스크2, 충전지, 충전짹, 수건, 반장갑, 손수건, 휴지, 팔토시, 긴팔, 스패츠, 안대, 귀마개
●거리: 약 23.27km
●소요시간: 09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버스24,900, 식사8,000, 여관30,000, 편의점8,800, 택시16,300, 버스2,000, 저녁8,000, 고속버스42,600
●날씨: 5~10, 맑음
●산행경과:
- 07:00 : 77번국도/수정카센터
- 08:07 : 산호봉(214.3m)
- 08:27 : 호출봉(270.8m)
- 09:18 : 화봉재
- 09:50 : 인지고개
- 10:24 : 초봉골산(219.3m)
- 11:10 : 인지봉(232.8m)
- 11:10~20 : 후포재
- 11:49 : 운거산(318m)
- 12:22 : 지령산갈림봉(325.7m)/1등삼각점
- 12:55 : 진등산(227.4m)
- 13:24 : 금굴산(223.1m)
- 13:51 : 당포재
- 14:18 : 매봉산(247.7m)
- 14:56 : 매계잔등
- 15:17 : 매월봉
- 15:39 : 깃대봉(231.1m)
- 16:00 : 목포구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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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거리
- 77국도 효심사입구~목포구 등대 23.5km
- 77번국도~후포재 10.74km
-. 화봉재~목포구등대 17.9km
-. 당포재~목포구등대 5.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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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다녀와 바쁘게 준비하느라 전지가위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저번 구간에 또 용수철과 고리가 빠져나갔답니다. 어쨌거나 그거라도 가져갔더라면 2구간 화원지맥을 걷기에도 훨씬 넓어지고 편해져 많은 후답자분들이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을텐데 그 길을 다시 가기 힘들다고 생각하니 아쉬움과 후회가 막급합니다.
- 2구간 시작부에 처음 만나는 임도에서 묘지로 올라서며 잠깐 잡목 숲을 지납니다.
♤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新德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관저면의 신평리(新坪里), 하리(下里) 일부와 장서면의 사동리(巳洞里)를 병합하여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로 개설되었다. 신평리의 ‘신(新)’ 자를 취하여 신덕리(新德里)로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신평마을은 마을이 어려운 시기를 몇 차례 무사히 넘겨왔기에 평탄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신평(新坪)이라 불렀다고 한다. 북서쪽에서 초봉골산을 경계로 인지리와 접한다. 중앙에 챌봉(차일봉, 153.1m)이 있고, 그 아래 신덕저수지가 있다. 북쪽으로 후산리, 금평리, 청룡리, 동쪽으로 금호호, 성산리, 남쪽으로 산호리, 장춘리, 성산리, 서쪽으로 주광리, 산호리와 접하고 있다.
♤ 호출봉(270.8m)/ 누에머리산
지형이 누에머리처럼 생겼다. 지맥길은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다.
♤ 해남군 화원면 화봉리(花峰里)
화봉리는 마을 뒷산인 화봉산(花峯山, 165.3m)에서 마을 이름을 따왔다. 화봉산은 꽃봉우리 형국으로, 사시사철 꽃이 피고 향기가 가득하여 화봉(花峯)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서면의 화봉리(花峯里), 초동리(草洞里), 역양리(力陽里)를 통합하여 화원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화봉마을과 초동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화봉마을에는 바닷물을 불로 때서 소금을 만드는 화렴터가 있었다. 화봉리는 동남쪽으로 산호리, 북쪽으로 인지리가 있다. 북쪽으로 주광리, 동쪽으로 산호리, 남쪽으로 산호리, 서쪽으로 바다 건너 신안의 장산도와 자라도, 우도가 마주 보인다. 화봉리는 화봉산과 역양산(力陽山) 아래에 있다. 동북쪽에 화봉제가 자리한다.
- 임도길을 따라 화봉재로 우회하기도 한다. 176.1m봉에서 우틀하여 내려서는데 2구간에서 명감나무 잡목숲이 제일 거세다. 일단 능선을 놓치지 말고 유지해야 한다.
♤ 화봉재(83m)
높아 보이는데 해발은 100도 안된다. 화봉마을 표석 뒤에 이정표가 있고 우측 절개지로 올라간다. 좌쪽은 화원면 화봉리로 내려서고, 우측은 해남화원관광단지와 파인비치골프장으로 내려선다.
- 화봉재에서 산길을 한번 넘어섰다 내려서면 채석장이 있는 도로 앞이다. 채석장 절개지를 올라 산길로 들어서면 이후로도 사동고개까지 계속 길이 좋지 않다.
♤ 뱀골고개/ 인지고개/ 2차선도로
인지리와 신덕리를 잇는 2차선 도로이다. 남쪽 아래가 뱀골이라 뱀골고개라 한다. 우측 방호벽 절개지를 오른다.
♤ 초봉골산(219.3m)
영진 5만지도에 초봉골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로는 잡목이 제거되어 길이 좋다. 조망이 없는 후포봉(232.8m)을 지나 능선갈림길에서 좌측 철탑공사로 생긴 임도를 따른다.
♤ 사동고개(95m)/ 후포재
사동고개는 화원면 후산리 송촌마을과 신덕리 사동마을을 잇는 고개로 양회임도였으나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말끔해졌다. 생태통로 공사중이라 조심조심 내려선다.
- 사동고개 아래로 내려가면 대흥사의 말사인 사동사가 있다. 완전 밑바닥에 있어 들렸다 가기에는 애매하다.
♤ 사동마을
화원면 신덕리 사동마을은 해남 대흥사의 말사인 서동사(瑞洞寺)라는 절이 있어 절골(寺洞)이라고 한다.
♤ 가마고개
공사중인 사동고개를 지나 10분 정도 마루금을 따르면 지형도에 가마고개라 표기된 평평한 능선을 지나는 안부가 나온다. 후산리와 금평리를 잇는 가마고개는 양 옆으로는 잡목과 덤불만 수북하고 작은 벚꽃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 사동마을 옆으로 가마마을이 있다.
♤ 운거산(雲居山, 318m)/ 운차산/ 무인산불감시카메라철탑
전남 해남군 화원면 금평리·영호리·후산리에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이 항상 구름 속에 잠겨 있다 하여 붙여졌다. 땅끝에서 뻗어 내린 화원지맥에 속한다. 청룡천과 후산천의 발원지이다. 산자락에 수백 년 묵은 울창한 비자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다. 2011년 8월 26일 해남 서동사(瑞洞寺) 동백나무·비자나무 숲(海南瑞洞寺冬柏나무·榧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245호로 지정되었다. 운거산 기슭에는 통일신라 시기에 창건하였다는 서동사가 있다. 서동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이다. 1993년 김포공항에서 영암 목포공항을 향하던 아시아나 여객기가 추락하여 66명이 숨지고 44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장소이다.
- 가마고개에서 꾸준한 오름길 150m 정도 올리면 산불감시 초소가 1층, 2층짜리 두 동이나 있으나 나무가 우거져 조망은 없다. 송전탑이 있는 운거산 뒷봉 고압선송전탑이 조금 더 높아보인다.
- 지맥길은 조망이 좋은 운거산 뒷봉에서 우측으로 내려서서 송전탑건설로 생긴 임도를 따른다. 우측 정한석산 채석장에서 소음이 요란하다.
- 우측으로 지령산(288.8m)과 산이면 끄트머리 금호도를 잇는 금호방조재 수문이 보인다. 왼쪽으로도 바닷물이 보이니 능선 좌우로 바다가 다 보이는 장면이다.
♤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馬山里)
마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마천(馬川)과 월산(月山)의 첫 자와 끝 자를 취하여 지었다. 마천 마을은 마을 지형이 말의 형국이고, 마을 앞으로 하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마천(馬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월산마을은 마을 앞산 지령산(地靈山)의 맥이 동북쪽을 가리고 있어 등산(登山)이라고 하였는데, 앞산에 떠오르는 달이 너무 아름다워 월산(月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산리는 북쪽으로 월호리, 큰봉산(199m)을 경계로 구림리, 동쪽으로 바다 너머로 영암 삼호읍이 바라 보인다. 동남쪽 지령산을 경계로 영호리와 접하고, 서쪽으로 후산리와 접하고 있다.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가 마을 뒷산에 추락하였을 때 마을 사람들이 탑승객 구조에 적극 나서서 44명의 목숨을 구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을회관을 짓고 ‘숭의관’이라 하였다. 국도 제77호선이 마산리 서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 지령산갈림봉(325.9m봉)/ 화원1등삼각점/ 장재봉/ 지추산
1등삼각점이 있는 봉이다. 동쪽으로 지령산(288.8m)이 분기한다. 지령산까지는 2.4km 된다. 지령산 뒤로 영산기맥의 마무리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 지령산(288.8m)
해남군 화원면 영호리에 있는 산이다. 당초 신산경표에서는 지령산으로 마루금이 그어졌다가 개정판에서 수정되었다. 금북기맥의 끝에도 지령산(218.2m)이 있다.
- 227.4m봉인 진등산을 넘어서고 216.2m봉도 지난다.
♤ 금굴산(금굴산, 223.1m)
영진지도에 금굴산이라 표기된 228m봉을 지나면 당포재 오르는 아스팔트 도로와 뾰족한 매봉산이 더 가까워진다. 108m봉은 암봉이라 조망이 좋고 바다가 가깝다.
- 당포재 내려서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당포재 너머로 채석장이 매봉산을 갉아먹고 있다.
♤ 해남군 화원면 월호리(月湖里)
화원면 월호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월하리(月下里)의 첫 글자와 당호리(唐湖里)의 가운데 글자를 취하여 지은 이름이다. 본래 해남군 장동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동면의 월하리, 화동리, 당호리, 그리고 억수리 일부를 합하여 해남군 화원면 월호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당포마을, 월하마을, 수동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서북쪽에 매봉산이 있고, 동쪽으로 큰봉산(199.5m)이 있다. 중앙에 수동저수지가 있다. 월호리(月湖里)는 북쪽으로 매월리, 동쪽으로 화원면 구림리, 마산리, 남쪽으로 후산리, 서쪽으로 후산리와 접하고 있다. 월호리 중앙을 국도 제77호선이 북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지난다.
당포재부터 수류미등대까지는 일반등산로로 이어져 끝까지 길이 좋다. 수류미등대까지 5.4km이정표가 있다.
♤ 당포재(62m)/ 803번 지방도
해남군 화원면 서쪽 후산리와 동쪽 월호리 당포마을을 잇는 당포재 떨어지기 직전에 길이 없어 억새덤불을 헤치며 겨우 내려선다. 2차선 포장도로 길건너 임도를 따라 오른다. 당포재에는 매봉산을 먹어들어가는 금천토건 채석장이 있다.
♤ 매봉산(247.7m)
이정표와 오랫동안 관리가 안된 목재데크시설 전망대가 방치되어 있다. 당포재에서 20여분 올라선다.
- 매봉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서남해안, 천사대교에서 암태-팔금-자은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梅月里)
매월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매개(梅介)와 월내(月內)의 첫 자를 취하여 지은 이름이다. 매개(梅介)마을은 마을 뒷산에 있는 매화나무에서 매화가 떨어진다고 하여 매화 매(梅)와 시내 계(溪)를 써서 매계(梅溪)라 하였다가 매개(梅介)로 바꿨다. 월내(月內)마을은 달처럼 생긴 마을 뒷산이 마을을 품고 있어 월내(月內)라 하였다. 장동면의 부동리, 양화리, 매계리, 월내리를 합쳐서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부동마을, 양화마을, 월내마을, 매개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시하바다 건너로 신안 팔금, 안좌도가 보이고, 북쪽으로 목포 달리도가 마주 보인다. 매월리는 서쪽과 북쪽이 바다에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 구림리, 남쪽으로 월호리와 접하고 있다. 남서쪽에 매봉산이 있으며, 북쪽에 깃대봉이 있다. 화원반도의 가장 끝자락 바닷가에 있어서 목포의 유달산이 마주 보인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바닷길로 목포에 다녔다. 국도 제77호선이 동쪽으로 치우쳐 남북 방향으로 지나간다. 월내마을에는 해남 구 목포구등대(海南舊木浦口燈臺)[2008년 7월 14일 등록문화재 제379호 지정]가 있다.
♤ 매계잔등(100m)/ 매개재/ 잔등고개
매개마을에서 올라온 널찍한 공터 안부이다. 좌측으로 바다가 보인다. 이정표의 거리 표시가 맞지 않는다. 당포재 2.8km, 목포구등대 2.6km이다.
♤ 월내고개
시누대가 숲을 이루고 있다. 월래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깃대봉으로 올라선다.
- 좌측으로 조망이 트이며 압해도 송공산과 천사대교, 암태도 승봉산과 그 뒤 자은도 두봉산도 바라보인다.
- 매월봉(247m) 내려서면서 바라본 풍경, 바로 아래의 화원산단의 대한조선, 그 건너편의 삼호조선과 목포신항만이 보인다.
♤ 깃대봉(231.1m)/ 목포4등삼각점
화원지맥의 마지막 봉우리, 깃대는 없고 덤불만 무성하다. 삼각점은 두개나 있다. 우측으로 화원산업단지 대한조선소가 보이고 바다 건너로 목포 신항만에 커다란 배들도 보인다. 여기서부터 달리도 넘어 목포대교와 유달산도 바라보면서 계속 내리막길이다.
- 좌측으로 도로에 있는 주차장이 내려다 보인다. 팬션 아래쪽에 공사가 한창이지만 우측 구등대로 내려선다.
♤ 목포구등대/ 수류미등대/ (등록문화재 제379호)/ 수류미마을(전남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 696-1 번지)
달리도와 사이의 통로는 큰 선박이 목포로 들어가는 유일한 바닷길이다. 목포의 입 역할을 한다고 입구(口)자를 써 '목포口燈臺'가 되었다. 목포구등대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1월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제국주의의 본격적인 대륙진출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사업의 일환으로 1908년 당시 세관 공사부 등대국에서 목포항의 관문인 화원반도 끝자락에 관세 수입으로 설치되었다. 목포구 등대는 1897년 10월 개항한 목포항의 관문에 설치되어 화원 반도와 달리도의 협수로(폭 600m)를 안전하게 통항할 수 있도록 등대 불을 밝히고 있다. 건립 당시는 높이 7.7m의 콘크리트로 세운 흰색 원형 무인등대로 운영되다가 1964년 12월 등대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등대원이 근무하는 유인등대로 변경 하였으며, 2003년 12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3년 새로운 목포구등대가 설치된 이후 사용되지 않는다. 대한제국기의 대표적인 등대이자 전체적인 비례가 조화되고 외형이 아름다워 이후 우리나라 등대건축의 기본적인 전형이 된 등대이다. 또한 거푸집을 짜서 시공하는 등 콘크리트 축조의 근대 건축기술이 집약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등대 건축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올겨울 목표로한 남쪽 세개 지맥 모두 8:2로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제 참꽃 시기에 맞춰 수도와 비슬로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퐁라라님 화원지맥 구등대 입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잡목 땅까시를 뚫고 이룬 화원지맥 완성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화이팅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세르파선배님!^^
한발 앞서서 가시잡목 헤쳐주셔서 수월했던거 같습니다.
누가 델꼬가만 주시면 마지막 구간 전지가위 들고 다시 따라나서고 싶네요.^^
뭔일이다요 두번은 금물입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화원지맥 ...2구간 수고많으셨습니다.
매번 소리소문없이 혼자 쓰을쩍 ㅎㅎㅎ
항상 홧팅입니다.~
부케님!
봄기운에 가시가 다시 힘을 얻기 전에 조금 서둘렀습니다.
하루가 다르네요. 이제 수도지맥 공부에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힘내세욧..ㅎㅎ
긴 여정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는 화원지맥 길이었네요.
'흙이 보이면 가서 만져보고 싶고,
나무가 보이면 가까이 다가가 누구냐 물어보고 싶고,
개가 짖으면 손도 흔들어주며 시골길을 걷는 맛을 놓칠 수가 없었다'
는 진솔한 표현이 너무 감동적으로 와 닿습니다.
참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수도와 비슬에서도
산행의 기쁨과 삶의 행복이 즐비하게 널려 있기를 기원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추신: '목포구등대'의 '구'자가 '口'자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덕분에, 텅 빈 지식창고가 조금 채워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범산선배님!
木浦口등대, 求禮口역은 입구를 나타내는 일본식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었을적 바보들의 행진에 참가하여 국토종주를 한 경험이 있어 맨땅 걷기도 아주 좋아합니다.^^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게,
군인처럼 씩씩하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커다란 행복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원지맥 졸업을 축하합니다
요즘 일정이 바빠서 산행기는 추후 찬찬히 감상토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화원지맥을 두번째종주하는 느낌과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기회가 될 듯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묵언선배님!
누군가에게 참고가 되고 필요로 하는 산행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산행기는 선배 선답자님들의 후기를 바탕으로 엮었기에,
아무나 가져다가 더 보충하여 보다 완성도 높은 후기를 작성하는데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50장까지 사진을 올릴 수 있지만 처음부터 여기다 작성할 수도 없고,
복사해서 옮기면 사진 한정이 20장이라고 나오네요. 그래서 스크랩했는데,,,
쓰고나면 부족한게 많지만 스크랩으로 옮기다보니 작은 실수를 수정할 수도 없고, 보충할 수도 없네요.
이 점 감안하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풍라라님..
험안한 화원지맥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읍니다.
늘...즐거운 맥길 이어가시길 응원합니다.
즐거운 한주 되십시오 ^^
무형객형님!
그런데 트랙이 지령산으로도 가고, 다시 또 목포구등대쪽으로도 가셨데요.
어트케 그런 트랙을 만드셨는지 궁금했습니다.^^ ㅋ~
화원지맥!
가시밭길이라고 소문 났지만 앞서 몇 분만 전지가위로 청소하며 지난다면 후답자님들이 편히 걸을 수 있지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달려드는 명감나무 밑둥을 바짝 잘르고, 20~30cm 크기로 몇 번을 동가리 쳤습니다.
다른 가시나무나 잡목도 진행을 현격하게 방해하면(눈을 찔른다든가...) 가급적 제거했습니다.
그렇게 진행해도 작업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거 같지만 별 차이가 없다는걸 알았고요.
몸에 생채기가 없이 지날 수 있으니 그 방법이 훨씬 좋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열성적으로 지맥을 진행하시는 분!
그리고 가급적 남도의 가시밭길로 소문난, 영산, 땅끝, 고흥, 여수, 화원, 진도, 사자 철성 등등을 진행하실 후답자 분에게 전지가위를 선물해 드릴려고 10개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단한잡목을 해치고 화원지맥 졸업을축하드림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왕봉운영자님!
제가 가시들 절반은 끊어놓았는데 어쩌죠?
화원이 명성을 읽게될까봐 겁나네요. ㅋㅋ^^
화원 산패작업 하며 진행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직 남은지맥이 더 많지만 진도.화원에서 제데로된 잡목과 까시넝쿨 맛을보았네요.
앞으로 이보다더한 지맥이 있을까 싶습니다.
화원지맥졸업 축하드림니다.
부뜰운영자님이 앞에 가면서 청소를 많이 해주셨더군요.
제가 뒤따르면서 잔정리를 좀 했습니다.^^
제아무리 화원이라도 같은 길을 전정가위를 가지고 대여섯 분만 지나가면 훨씬 편안한 길이 되리라 보였습니다.^^
월래마을 입구까지 올라서 30분 정도 더 걸었습니다.
마지막 목포구등대 주차장에서 월래마을 버스정류소까지 20분 정도 걸어나와야 하더군요.
화원택시 기사아저씨가 그러는데,
부뜰운영자님 부부도 자기가 태우고 나왔다고 그러데요.^^
그 이전에는 여자 지맥꾼 한분이 저녁 9시에 등대로 내려오며 불러서 별모텔까지 데려다 주었답니다.
화원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첫 구간에 비해 다소 여유있게 졸업구간을 마무리하신 셈입니다.
날머리 목포구등대에 이른 감회도 느껴지네요.~
이어지는 지맥길에서도 멋진 추억의 여정 되시길 기대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한숨 자고 이제 퇴근 중입니다.^^
구간거리는 여유로운데요. 교통편이 어렵습니다.
목포보다 해남가는 고속버스가 요금도 싸고, 화원가는 첫차가 해남 6시, 목포는 8시 출발입니다.
게다가 해남에서 가면 한 정거장 전인 이목교차로(수정카센터)에서 내리고, 목포에서 가면 화원 청룡터미널에서 효심사입구까지 약 20분 걸어야 합니다.
졸업하고도,,,
목포구등대에서 월례마을 버스정류장까지 15~20분 걸어나와야 되고, 월례마을에서 화원터미널은 17:10분이 막찹니다.^^
17:30분 화원터미널에서 목포 나가는 막차를 놓치면 우수영터미널로 가서 진도에서 나오는 19:55분 목포행 직행을 타야 하거든요.
비산비야를 지나다 뒷동산 하나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를 반복 하다 보니 거의
끝나갈즈음 해서 이제 좋은길만 남았구나
생각할때즘 에 채석장이 나오고...
그곳부터 날머리가 사람 잡드만요 ㅋ
홀로 무겁게 진행하기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어 가심은 대단한 열정의 결과물 이겠죠 ..
네~ 다류대장님!
처음 시작부분에서도 채석장이 있는지 아침 일찍 돌캐는 소리가 들렸고요.
운거산 지나서도 채석장, 당포재에도 채석장을 만나더군요.
당포재에서 매봉산 오름은 채석장이 확장되면 길이 바뀔듯 합니다.
해남에서 화원으로, 화원에서 목포로 버스를 타고 지나며 차창밖 풍경과 이정표로 화원지맥을 정리할 기회도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