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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정씨 관련 글 모음 스크랩 동래정씨 대호군공파 난암 정언신 (선조 당시)우의정역임
31진호 추천 0 조회 81 11.06.19 13:40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朝鮮 王朝實錄을 통한 諱 彦信公의 足跡

 

公은 東萊鄭氏 18세 孫으로 大護軍 諱 絪의 8세손이다

中宗 22년 1527년 8월 26일 父를 禮曹佐郞이고 曾 領議政이신 諱 振과

母를 陽川許氏로 하여 다섯째 아들로 出生했다.

 

公은 1566년 明宗21년 丙寅年 別試 文科 丙科13으로 등과하시고, 자는 立夫요, 호는 懶菴이시다.

등과 후 檢閱이 되어 明宗實錄 편찬에 관여 하시고, 翰林院, 司諫院, 正言

議政府 舍人, 司憲府 持平을 역임하시고, 이어 右副承旨, 司憲府 大司憲,

弘文館 副提學 京畿道 觀察使를 歷任하시었다.

 

1583년 9월 24일 尼湯介가 수시로 北邊을 침입하여 양민을 虐殺하고,

財物을 약탈하는 변란이 頻發하자, 상이 公을 議政府 右贊成 겸 함경도 巡察使로 임명하고 부임 시, 임금(宣祖)이 雲劒을 하사하시었고, 文武百官이 칭송과, 격려의 글을 지어 주었다.

 

부임하시어,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를 개간하여, 군량을 확충하시었고, 공의 막하에 李舜臣 申砬, 金時敏, 李億祺, 李鎰 등의 장수를 지휘하여 수차에 걸처 오랑캐(여진)를 물리치시었다.

 

公의 업적이 지대하여,1583년 9월 24일에는 오랑캐(여진)의 침입을 매번 격퇴한 공을 인정하여, 宣祖가 입으시던 초구(담비로 만든 옷) 1벌을 하사하시는 등 임금(宣祖)의 배려가 있었다.

 

함경도 觀察使로 북변을 정비하고 이후 兵曹判書로 승차하시여, 歸京하시고

1589년 2월 1일 우리 大護軍派의 유일한 상급(우의정)으로 승차하시었다.

호사다마던가? 생각도 하기 싫은 己丑獄이 1589년 10월 1일에 고변되어, 鄭汝立을 위시한 朴淵齡 등의 사실규명을 위해 위관에 임명되었으나, 鄭撤등 서인당의 兩 司諫들이 公이 鄭汝立의 9촌 同姓血族임을 들어 委官의 삭임을 상소하니, 위관에서 退하시었다.

 

그 후 西人 당 즉 鄭撤의 사주를 받은 梁千會, 丁巖壽 등의 상소로 모함과 피혐으로 南海로 중도부처 되고, 다시 투옥되시어 사사의 하교가 있었으나 가증스럽게도 鄭撤이 我朝의 國初부터 상급의 신하에게 사사의 전례가 없음을 주장하여 상이 允許하니, 다시 甲山으로 중도부처되고 유배지에서 1591년 10월 26일 향년 65세로 壽를 다 하시었다.

 

1595년 영중추부사 鄭琢이 기축옥의 원망을 풀도록 상에게 건의 하였고, 1599년 공의 妻族인 平山申氏 申磼이 공의 복작을 재차 상소하고 건의하니, 상이 비로소 복작을 명하여 伸寃되시었다.

 

公의 卒記가 아래와 같이 朝鮮王朝實錄(宣祖修)에 전해지고 있다 “1591년 10월1일 6번째 기사, 故 議政 鄭彦信이 적소에서 卒하였다.

己丑獄 당시 彦信이 거짓으로 공초한 일로 임금(선조)이 노하였으나 그의

아들 慄이 이 일 때문에 죽었다 하니, 상이 그러한가? 하고 비로소 마음을 풀었다.

그후 申磼 등이 복작 상소를 올리니 임금(선조)가 허하였다”

 

配位는 政敬夫人 平山申氏이며, 協 慄 慣 博 4분의 아드님을 두시었고,

長子인 協은 1585년 진사시에 장원 1588년 式年試 文科 乙科로 급제하여 光海朝에 吏曹參判 副提學 大司成 同知春秋館使 禮曹參判 역임하시고 문장이 걸출하여, 임진란으로 소실된 역대실록을 중간할 시 編修官으로 참여하시었다.

 

朝鮮王朝實錄(선조)의 諱 鄭協의 卒記를 인용하면 “1611년 12월 28일 果川에 사는 前 吏曹參判 鄭協이 사망했다.

我朝에 관리가 卒하면 조속히 알려야 함에도 죽음이 늦게 알려진 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니다. 鄭協은 前 右相 鄭彦信의 아들이다.

얼굴이 희고 풍모가 아름다웠으며, 문장 특히 시문에 능하고, 고아인 조카(정세규 정세구 등)를 자기소생과 같이 보살피었다”

위 졸기에서 알 수 있듯이 兄弟간의 정이 깊고, 親族의 보살핌이 큼을 알 수 있다.

 

公의 孫 諱 世美는 光海 戊申年 1608년 別試 丙科 12로 登科하고 藝文館 檢閱 弘文館正字 曾嘉善大夫 吏曹參判하고,

 

公의 孫 諱 世規는 사마시 합격후, 義禁府都事, 和順縣監,安山郡守를 거처

忠淸觀察使 時 丙子胡亂으로 南漢山城에 仁祖가 포위 당할 시 下三道 근왕병을 지휘하여 龍仁(처인)에서 분전하였으나, 패전하였음에도 상이 충절을 가상히 하여 戶曹參議 全羅道 觀察使 工曹判書 吏曹判書를 역임하시었다.

특히 全羅道 觀察使 부임 시 우리 大護軍 一族의 先祖의 묘소를 찾아내어 보수하고 입비한 공적은 대대로 칭송됨이 당연하다.

 

참고; 龍仁, 處仁 전투지역은 현재 지명 성남 판교 落生面 지역이다.

公이 낙생면 전투에서 청의 팔기병에 포위되어 고립무원이 되었으나,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마지막으로 사지을 벗어날 수 있었다. 落生面의 유래는

公이 전투 중 馬上에서 落傷하는 부상을 당했으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여 落生面의 地名이 유래됨. 지금은 판교 신도시로 개발되었으나, 낙생중, 고등학교가 있다)

 

또한 公의 曾孫으로 諱 攸는 仁祖17년 己卯 1639년 別試 丙科12에 登科하시었고,

曾孫 諱 脩 역시 孝宗1년 庚寅1650년 增廣試에 乙科2로 登科하시었다.

 

公의 高孫으로 諱 來祥은 肅宗5년1679년 庭試 丙科5로 登科하는 등 公의 後孫들의 족적이 확연하고 뛰어났다.

 

참고문헌:조선왕조실록(선조 및 선조수정실록)

국조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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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2.02 20:31

    첫댓글 다른 내용은 모두 맞는데요, 曾祖(諱 振)께서 영의정을 지냈다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상신 17인에 없는 것 같으니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니면 밝혀지지 않은 상신이 있을 수 있으니....

  • 작성자 13.03.01 15:44

    지적하신대로 위의 자료는 검증할 필요가 있지요.
    제가 본 자료중에 '동래정씨 영상공파'라는 분들이 계신데 이와 연관이 있는듯 합니다,
    우리 동래정가 족보가 청보인 것은 1595년 당시 영의정이셨던 17세 임당공 유길할아버님이 창보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의 족보를 확인할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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