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없는 한국교회 변해야 산다.
마태복음 7:20-25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오늘 저는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신앙의 선구자들 중 한분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분은 오방(五放)이라는 호를 지닌 최흥종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은 전라남도 광주를 근간으로 활동하셨던 빈민, 의료운동의 지도자였으며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의 선각자였습니다. 오방 목사님에게는 광주 최초의 기독교 신자, 최초의 장로, 최초의 목사 외에도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광주 YMCA의 창립자이며, 현 여수 애양병원의 전신인 광주 나병원의 설립자, 소록도 한센인촌의 창설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허백련 화백과 농업전문교육을 시키는 "삼애(하나님, 이웃, 자연 사랑)학원"을 설립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오방 선생님은 1880년(고종 17) 5월 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위고 계모 밑에서 자라면서 한때는 무등산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광주 장터를 주름잡기도 하였습니다. 1904년 기독교로 귀의한 그는 유진벨 선교사 밑에서 일하면서 조국이 처한 상황과 처참한 민중들의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오방선생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일제의 순검 직업을 택하게 됩니다. 당시 순검은 의병을 진압하고 체포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그는 잡혀 온 의병을 몰래 풀어 주는 등 오히려 독립군을 돕는 활동을 하다가 2년 뒤 사직을 합니다. 사직 후 1907년 세례를 받으며 이름을 영종에서 흥종으로 바꾸고 새로운 선교적 삶을 살게 됩니다.
오방선생은 광주선교진료소 의사인 윌슨의 어학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윌리암 오웬 선교사를 따라 전남지역 순회 진료를 따라다니며 오웬의 헌신적인 의료 봉사 모습에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오웬이 폐렴으로 위독해지자 목포의 의사 포사이드를 청하게 되는데, 그를 마중 나갔다가 일생을 변화시키는 귀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포사이드를 만나 돌아오는 길에 처참할 정도의 중증 나병환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포사이드 선교사가 말에서 내려 나병환자를 안아 말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방선생에게 환자가 떨어뜨린 피고름 투성이의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합니다. 그 순간 오방 선생은 차마 지팡이를 잡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서양인 선교사가 내 동포를 저렇게 아끼고 사랑하는데 나는 내 동포를 꺼림직하게 생각하여 망설였다는 수치감에 쌓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방 선생의 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나병환자, 결핵 환자들의 아버지가 됩니다.
오방선생은 1912년 북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광주제중원에 재직하면서 1914년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성직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방 선생은 의료운동뿐 아니라 독립운동, 사회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합니다. 1919년 광주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3월 5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1920년 6월 출옥하여 8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고, 1921년 9월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안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시베리아선교를 시도하였다가 좌절된 후 1923년 광주소작인연합회(光州小作人聯合會) 대표로 활동하였고, 1924년 광주YMCA 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 선교에 나섰으나 소련 당국의 탄압을 받아 일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4월 귀국하였습니다. 이어 10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어 민족운동을 재개하였고,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1927), 광주교육보급회 이사(1928), 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1928),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1928)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929년 7월 제주도 모슬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나 1931년 7월 사직하고 이후 조선나병환자구제회(朝鮮癩病患者救濟會)를 창립하고 구라사업(救癩事業),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하였습니다.
1935년 그의 일생을 또다시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조선교회의 신사참배 움직임 때문입니다. 1935년은 일제가 신사참배 강요의 마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때입니다. 조선장로교회의 각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1938년 9월 10일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의로 귀결됩니다.
오방선생은 신사참배를 온몸으로 거부했습니다. 그 극단적인 표현이 자신의 몸을 거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5가지를 버린다는 뜻에서 호를 오방으로 고치고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을 띄웁니다.
부고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935년 3월 17일 이후, 나 오방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에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최흥종은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서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 명부에서 삭제해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오방선생이 호를 오방(五放)이라 한 것은 5가지를 버렸다는 뜻인데 그 다섯 가지란 가정, 사회, 국가, 사업, 종교의 틀이었습니다.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받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과 함께 선생은 허망한 세계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참 자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방선생은 1937년 1월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칩거하며 병자·빈민들과 함께 활동하다 해방을 맞습니다. 선생은 해방 직후 전남건국준비위원회(全南建國準備委員會) 위원장에 추대됩니다. 그리고 1948년 호남신문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나환자들과 함께 합니다.
선생은 1964년 12월 「유언장」을 작성하였고,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한 후 90일을 단식하고 100일째 되는 5월 14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향년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선생의 장례는 광주 시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장례식에는 광주 시민들을 비롯해 광주 인근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내려온 결핵환자들, 여수와 나주 등지에서 올라온 한센병 환우들 수백 명이 모여 통곡하며 애도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한국교회는 참 비겁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등쌀에 굴복하여 황국신민을 맹세하고 신사참배를 받아드렸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은 모진 탄압을 받아 더러는 순교자의 길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크게 3가지인데 정치적 억압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문화적 말살정책 등이 그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정책은 조선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조선인의 정치적 참여를 봉쇄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수탈정책은 자원과 농업, 상공업 방면에서 주로 이뤄졌습니다. 문화적 수탈정책은 교육정책과 언어말살, 역사왜곡 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더해져 종교적 탄압도 병행되었습니다.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 문화,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기독교가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기독교를 민족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배일세력으로 보았습니다. 더군다나 선교사를 매개로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연결되어있으니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그 야욕을 중국과 세계로 뻗게 됩니다. 일제는 1937년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중일전쟁을 도발하였고,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내선일체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를 반대하는 종교에 대한 회유와 탄압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조선교회는 이에 굴복하여 주일예배를 '애국예배'로 드렸습니다. 애국예배는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만년 이어지리라. 돌이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내용의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 봉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배자들은 일동 기립하여 일본의 식민지배와 군국주의와 침략의 상징인 이 노래를 목소리 높여 합창했습니다. 황거요배와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천황이 살고있는 도쿄 궁성 방향으로 허리를 숙여 절을 하는 것을 궁성요배 또는 동방요배라고 하였는데 예배자들은 90도 허리를 숙여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황국신민서사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암송을 강요한 글입니다. 이글의 내용은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후에는 일제의 전쟁비용을 대기 위한 ‘국방헌금’을 하였습니다.
조선교회는 친일파 목사들의 지도 아래서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일왕을 태양신 곧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고 하면서 지극 정성을 다하여 숭배한거죠. 총회와 노회의 임원들은 '일본 성지순례'를 자청했고, 도쿄와 나라 지방의 신사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조선의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기독교와 선교사들, 교인들이 우상숭배로 규정한 신사참배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총회와 노회가 모이면 각 지역의 신사를 찾아가 90도로 절을 했습니다. 교회당 안에는 이동용 신사(portable shinto shrine)가 설치되었습니다.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는 각반을 차고 일본식 군복으로 권위를 뽐내었습니다.
광복 후,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도 과거사를 올바로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친일행각의 죄를 합당하게 처벌하지도 참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죄수석에 앉아야 할 자들이 재판장이 되어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교권을 틀어쥐고 일제에 항거하던 애국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산상 수훈의 한 장면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서 소위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 자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심판의 기준을 정하신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어떤 실천을 하였는가가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주님은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심판대에 섰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선고를 한다면 우리는 그 심판에 대해 어떻게 항변할 수 있을까요?
이런 판결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억울해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알지 못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말씀을 보면 주님의 판결에 대해 납득이 갈수 있습니다.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13-14)"는 가르침입니다. 과연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고 험한 길을 걸어왔는지요?
또 거짓 예언자에 대한 가르침도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15).” 성도들 가운데는 거짓 예언자를 만나 그 꾐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길을 걸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심판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가시나무 비유도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진다(16-18).” 선목선실(善木善實)입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수 밖에 없으니 우리가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지는 운명이 되고 맙니다.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20절의 “그러므로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삶을 돌이키길 원하는 사람은 철저한 회개와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서 자리매김 하려면 교회가 저지른 죄에 대해 고백하고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권력에 복종하고 돈의 노예로부터 진리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 교회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친일파들이 친미파로 둔갑하여 반공을 국시로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이 사회를 지배했던 것과 같은 패턴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일제에 부역했던 교계 지도자들은 반공의 옷으로 갈아입고 축복신앙을 무기 삼아 대형교회들을 만들고 그 속에 숨었습니다. 이들은 경제 개발이라는 독재자들의 구호에 발맞춰 할 수 있다는 맹목적 축복신앙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천국의 모형으로 삼아 백성들을 미혹시켰습니다. 오늘날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시위에 나오는 태극기 부대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상숭배, 배교의 뿌리가 뽑히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새 희망을 꿈꿀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광장의 촛불로 변해가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교회는 회개 하지 않습니다.
3.1 혁명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의 기도 제목 중 하나는 교회의 혁명적 변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로부터 나의 형제와 이웃이 변해야만 이 누룩이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나와 교회가 회개하고 돌이켜 우리 사회의 좋은 누룩이 되기를 소망하는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9.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