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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서후면 (西後面) 유래

서후면은 삼국시대에 辰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新羅에 고려시대에는
현 안동시의 옛 명소일 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府庶棉이라 하였다가 肅宗때 서후면으로 되었다.
1924년 군면 폐합에 따라 西先面과 北後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支流인 豊山川이 풍산읍을 거쳐서 이곳으로 흐르고,
동쪽은 松夜川이 북으로 흐르로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삼림 지대가 많고 벼농사가 우세하며 그 외에 배·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 광평동(廣坪洞)
---- 너븐들·너븐돌·광평
본래 안동군 서후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30년 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너븐들이라고 하는데
1976년 국도 포장시 이 돌을 깨어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동이라 개칭하였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
조선 선조때 鄭士信이란 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또, 고려시대 이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매년 단오절마다 그네를 매고 즐겼다 하여 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추가 특산물이며 24가구가 살고 있다.

---- 원당골·월당곡(院堂谷)
추산에서 북동간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
추산에서 북동간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너븐들 서쪽 골짜기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安東府使 孟思誠이
이곳을 지날 때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담배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며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안골·내동(內洞)
1700년 경부터 眞城 李氏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점마·응기점·토점(土店)
1800년 경부터 이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긴밭·진산이·장묘
6.25 동란 이전에는 이곳에 사래가 긴 밭이 있는 들판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사래가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진살이라고 부른다.

▷ 교동(校洞)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成宗 晋州 河氏가 선산으로 옮겨갈 때 하씨 한 사람이 단종의 復歸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는데 안동 권씨 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촌은 본래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한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벼락바위는 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

---- 시무골·시묘곡(侍墓谷)
안동인 權緯紀란 사람이 參奉寺 母喪을 당하여 묘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불려오는 명칭이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수학을 시키게 되자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골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 향교골·행겟골·향교동(鄕校洞)·교동(校洞)
고려 복주 때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동 또는 교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 금계동(金溪洞)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500년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였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하여 금지라 불렀다.?

---- 을막·을막골
사망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김씨가 주로 살고 서후면 사무소 북동쪽에 있으며 지금은 사과나무를 식재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召福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렸다 한다.
단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 소복당(召複堂)
소복산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과 칠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 종가에 모여서 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 문중에서 1 사람, 타성에서 1 사람, 色掌 1 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게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동안 흉사에는 아니 가는 것이 특례로 되어, 7월 백중날에도 고사를 지낸다.

---- 사망(仕望)
조선시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이어서 불려온 이름이다.
지금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알실·지곡(知谷)
400년 전에 이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앞 일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고, 학문을 깊이하여 세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붙인 명칭이다. 또 알처럼 생긴 외딴 섬이 있어 유래햇다고도 산다.

---- 미리미·미산(未山)
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잇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눈섭 같다고 未山이라 하였고, 지형이 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배사골·작장골
옛날에 벼슬을 한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고, 백만장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골 남족에 있는 마을로 효자 門이 있어 효자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텃골·동무지·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잇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등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대두서동(大豆西洞)
---- 한도솔·한두실·대두실·대두서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
약200년 전에 이곳이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오동지이·가음실·오동정(梧桐亭)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잿마
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구억마·구석마을·윗마을
한두실 북동쪽 1㎞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어 구석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칭하며
약 100여년 전부터 개척되어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 명동(鳴洞)
---- 송내(松內)·징걸·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년전에 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재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쑤능골·수능곡(水陵谷)
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곳의 논 3000여 평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쑤능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 검박골·예배당골·서여곡(西汝谷)
송내 증거리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서양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지평 윤씨가 살고 있다.

---- 방곡·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큰 못이 있으며 진송 이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담배 농사를 주로하며 양돈 단지를 소성하고 있다.

---- 명동·말우리·명리(鳴里)
옛날 商山에 있는 龍沼에서 龍馬가 탄생하여 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마동으로 행정동명이 되었다.

---- 북적골·부적골
부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렀다.

---- 진골
진성 이씨 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응점·독잠·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곳을 석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 세조때 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을 설치하고 석불을 두었는데서
두솔원이라 하였으며, 임진 왜란 때 왜병이 이 석불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여서 움직이지 못하여
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전설의 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못건대·목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건대라고 했다 한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약 150년 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다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하며, 두솔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성곡동(城谷洞)
---- 성곡·재일(在日)
마을 전체가 크고 작은 산이 성을 이룬 듯 하다고 하여서 송곡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재일은 張興孝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밑 긴 골짜기로 마을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서 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덕거리
在日, 독실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득실·독곡·독골·옹곡(瓮谷)
朴還素·朴海立 從兄弟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 들어와서 지형이 독같이 생겨
피난지로 적정하다 하여 마을을 개척하엿으며, 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작은독실
실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역시 작은 독같이 생겼고 큰 독에 비하여 작다고 하여 작은독실이라 하게 되었다.

---- 골·능곡(陵谷)
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잇고 길쭉하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張太師 묘를 쓴 뒤에 齋舍와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본파리·춘파(春坡)
약 400여년 전에 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春坡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 고사미·고삼
능골 아래쪽 춘파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은 새로 도로가 생겨 편리한 마을로 아래고삼과 웃고삼으로 나누고 있다.

---- 노리실·노루실
춘파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노리실·노루실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자래바우
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흡사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자라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 이개동(耳開洞)

---- 구여리·귀여리(耳開)
조선 燕山君 때 權次龍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아래의 龍沼에서 龍馬가 나와 이곳에 와서 귀가 열렸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변하여 귀여리 하였다.
지금은 耳開洞이라 한다.

---- 용우물(龍泉)
이 마을의 뒷산 商山 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商山에서 龍馬가 나서 귀여리에 와서 귀가 열리고 명리에 가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웃귀여리·웃마(上耳開)
이개동 중 위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며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와우실·와욱고(臥牛谷)
이개동 중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이개동과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이개리 최고 명당 자리 마을로서
내앞 의성 김씨 조상묘역 학운소와 추원소가 있다.
내앞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개동 집성촌 과 안동 권씨, 유씨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와 밭농사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구
보현의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구라 하게 되었으며,
이개동 의성김씨,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동의 입구여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랫골
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 이송천동(二松川洞)

---- 두서내·두시내·이송천
시내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동으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거느리·그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달구어 못속에 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곳에 살던 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칭골
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높은절
높은 지대인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높은 절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천동 중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잇으므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렸는데서 마을 이름이 아랫말이 되었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이 마을은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한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간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시체를 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기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 양지골·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동향이며 마을 후면은 병풍처럼 둘러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하여 양지골이라 하였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하(鳥羅)
북쪽 뒷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길게 뻗어 조리형으로 되어서 전쟁시 피난처가 되며,
고목 느티나무에는 참새들이 즐겁게 살았다 하여 조랏이라 한다.

---- 양지말
마을이 정남으로 위치해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둘러 있어 양지바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지 말이라 했다 한다.

---- 오매
주민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양돈, 양계를 많이 한다.

---- 황사벌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에서 붉은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모인다고 하여
주민들이 황사벌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자품동(者品洞)

---- 재품·자품
舊韓末 본 마을에 窮林公이란 분이 16세 때 과거에 登科하여 정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부락 및 고을에 알려져 당시부터
본 마을은 재골의 品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才品이라 하였으나,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才'字를 '者'字로 바꾸어 자품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광흥사(廣興寺) 본 사찰은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7년 화재로 여러 건물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명부전·화직전·칠성각·일주문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게동 은행나무에 견줄 만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벌리고 잇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로 했다 한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 하여 느릇이라 했다 한다.

---- 섭 ·창품(昌豊)
雲中浸月이라는 명지가 있어 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창하여 가자 창품이라고 일걷게 되었다 한다.

---- 구헤티 ·백현(白峴)
학사산 동족, 천등산 서쪽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족 옆산에 흰 운모석이 난다하여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학가산은 안동·영주·예천의 3角 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옛부터 鶴이 앉았다 가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 서남쪽에 팔공산,
북쪽에 소백산맥이 어련히 보이고 산 기슭마다 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산에는 군데 군데 石城의 흔적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愛蓮寺, 廣興寺가 있고
산마루에 있는 수십길 바위 사이에 있는 신효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풀길과 버섯들이 깔린 자연림을 이룬다.
봄이면 山木蓮이 은은한 이 향기를 내뿜고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 괴석 때문에
큰 짐승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 기슭에 나타날 분이다.
일찍이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아래에 지금은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가 설치되어
방송 중계 및 통신 관계에 주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능인굴(能人窟) 학가산 동편 마루턱 능선에서 앞쪽으로 비탈을 내려
약30m 기암절벽으로 날카롭게 속은 이름모를 봉우리 깎아지른 백길 절벽아래
남향으로 뚫린 삼각형 모양의 바윗굴이 있다.
이 굴의 크기는 열사람 쯤 들어 앉기도 빠듯할 만한 공간이다.
맨 안쪽 구석 바위틈의 샘물은 塵客이 찌들은 번뇌를 단 한 모금으로
후련히 씻어낼 만큼 향기로운 시원한 감로수다.
영가시대에는 신라 大德, 能仁大師가 세상 인연을
D고 이 굴에 피하여 숨으매 함께 義湘大師 앞에서 공부하던 1000여 명의 부석사 스님이
능인스님을 만나려고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가면서
돌 한덩어리씩을 가져다가 학가산 북쪽에 탑을 쌓아 石塔이라 했다.
이 굴은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편이나
산 둘레 주민들로 부터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잇어 삼복 더위에도
몇몇 아낙네들이 치성드릴 멥밥을 짓고 평은에 사는 젊은 내외는 이 굴에서
기도들여 아들을 얻어서 일년에 한 두차례씩은 찾아 오고 있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
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 저전동(苧田洞)

---- 모시밭·저전동
옛날 한양 조씨 후손이 이곳에 살면서 주위 일대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화재가 자주 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서 살줄을 묶고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상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우며 승부는 빼앗은 화상의 수로서 가린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 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 협조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일에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똥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나타내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래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동에서 구전되어온 묵 新行 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를 기다리고 잇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심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긴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 하늘 위에 베틀 놓고, 구름 위에 이에 걸고 ..... 등 10연으로 구성되었고,
두불논매기 노래는 원일레라,
원일레라 경상도라 안동땅에 ......등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잇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녁마·동녁(東域)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
이 저전동 음지마을이었는데, 이 음지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동녘마라 했다.

---- 음지마·음지(陰地)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인데,
남쪽에 놓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를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로 가는길 등의 세 갈래 길이 겹친 곳이어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도는 정외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는삼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소붓골·무지랑·반정리(半程里)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지랑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도장골
계곡이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 이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棲息해서 조라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태장동(台庄洞)

---- 옛태무지·고태장촌·태장촌·태장(台庄)
고려 共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태장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가라골·가을골·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김해 김씨의
秋谷派인 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고 불리다가 추곡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가라골 느티나무는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푸른 불이 일어나 끄면 다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 굿을 하였던 바,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 10년 慶發이라는 효자가 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義湘祖師가 修道寺 어느 봄날 天燈窟에서 내려다 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 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등산(天燈山)은 서후면 태장동의 뒷산으로 개월산이라고도 한다.
험한데라고는 하나없이
맑고 고운 토산으로 온 산에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 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지리에 밝았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 때문"이라하여,
산이름을 開月山이라 고치고, 이산 동쪽 머리에 있는 흥국사를 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산은 명산으로 여러 군데 고적 명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산 마루 바로 앞쪽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사가 수도햇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복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굴은 서후면 태장동 뒷산에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개목사가 있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잇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이굴에서 도를 닦는데 항상 하늘에서 등불을 드리웠다고 해서
천등이라 이름한다고 했고 굴 어귀에는 작은 암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능인대사가 좌선하던 판대기가 있다고 했다. ?지금 이 굴엔 암자도 坐禪板도 없고
다만 굴안에 향로와 한 쌍의 촛대 그리고 정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이 있을 뿐이다.
옛 名僧도를 깨달았다는 이 굴엔 지금도 아들을 얻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士女들이 끊이지 않는다.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내려와 산 언저리쯤에 자리한
이 바위굴은 어귀의 놓이 2.5m에 너비 약 4m, 깊이 약 4m 쯤 된다.

---- 웃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의 제일 위쪽에 잇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창, 상태장이라 한다.

---- 천등굴(天燈窟)
의상조사가 少年時 수도차 大望山 큰 바위 밑에서 風雨寒暑를 견디며
眞理 探究에 전념하기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밤에
한 미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天命之謂는 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미녀와의 대화까지 거부하니 더욱 등굴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의상은 끝까지 거부하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서광이 비치므로 사방을 살펴보니 바위 위에 큰 등이 나타나 백주와 같이 밝아졌다.
하늘에서 하강한 대등의 은택으로 도통하였다 하여
大望山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천등산 중턱에 큰 굴이 있다.




모여사는사람 중에서

 
 

 
 
 
 
     
 
 
충순공 조회 27 | 07.02.11 13:47 http://cafe.daum.net/peopleroot/Oc7/44
▶서후면 (西後面) 유래

서후면은 삼국시대에 辰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新羅에 고려시대에는
현 안동시의 옛 명소일 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府庶棉이라 하였다가 肅宗때 서후면으로 되었다.
1924년 군면 폐합에 따라 西先面과 北後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支流인 豊山川이 풍산읍을 거쳐서 이곳으로 흐르고,
동쪽은 松夜川이 북으로 흐르로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삼림 지대가 많고 벼농사가 우세하며 그 외에 배·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 광평동(廣坪洞)
---- 너븐들·너븐돌·광평
본래 안동군 서후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30년 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너븐들이라고 하는데
1976년 국도 포장시 이 돌을 깨어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동이라 개칭하였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
조선 선조때 鄭士信이란 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또, 고려시대 이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매년 단오절마다 그네를 매고 즐겼다 하여 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추가 특산물이며 24가구가 살고 있다.

---- 원당골·월당곡(院堂谷)
추산에서 북동간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
추산에서 북동간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너븐들 서쪽 골짜기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安東府使 孟思誠이
이곳을 지날 때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담배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며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안골·내동(內洞)
1700년 경부터 眞城 李氏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점마·응기점·토점(土店)
1800년 경부터 이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긴밭·진산이·장묘
6.25 동란 이전에는 이곳에 사래가 긴 밭이 있는 들판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사래가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진살이라고 부른다.

▷ 교동(校洞)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成宗 晋州 河氏가 선산으로 옮겨갈 때 하씨 한 사람이 단종의 復歸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는데 안동 권씨 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촌은 본래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한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벼락바위는 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

---- 시무골·시묘곡(侍墓谷)
안동인 權緯紀란 사람이 參奉寺 母喪을 당하여 묘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불려오는 명칭이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수학을 시키게 되자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골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 향교골·행겟골·향교동(鄕校洞)·교동(校洞)
고려 복주 때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동 또는 교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 금계동(金溪洞)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500년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였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하여 금지라 불렀다.?

---- 을막·을막골
사망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김씨가 주로 살고 서후면 사무소 북동쪽에 있으며 지금은 사과나무를 식재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召福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렸다 한다.
단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 소복당(召複堂)
소복산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과 칠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 종가에 모여서 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 문중에서 1 사람, 타성에서 1 사람, 色掌 1 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게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동안 흉사에는 아니 가는 것이 특례로 되어, 7월 백중날에도 고사를 지낸다.

---- 사망(仕望)
조선시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이어서 불려온 이름이다.
지금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알실·지곡(知谷)
400년 전에 이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앞 일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고, 학문을 깊이하여 세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붙인 명칭이다. 또 알처럼 생긴 외딴 섬이 있어 유래햇다고도 산다.

---- 미리미·미산(未山)
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잇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눈섭 같다고 未山이라 하였고, 지형이 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배사골·작장골
옛날에 벼슬을 한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고, 백만장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골 남족에 있는 마을로 효자 門이 있어 효자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텃골·동무지·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잇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등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대두서동(大豆西洞)
---- 한도솔·한두실·대두실·대두서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
약200년 전에 이곳이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오동지이·가음실·오동정(梧桐亭)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잿마
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구억마·구석마을·윗마을
한두실 북동쪽 1㎞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어 구석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칭하며
약 100여년 전부터 개척되어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 명동(鳴洞)
---- 송내(松內)·징걸·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년전에 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재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쑤능골·수능곡(水陵谷)
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곳의 논 3000여 평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쑤능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 검박골·예배당골·서여곡(西汝谷)
송내 증거리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서양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지평 윤씨가 살고 있다.

---- 방곡·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큰 못이 있으며 진송 이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담배 농사를 주로하며 양돈 단지를 소성하고 있다.

---- 명동·말우리·명리(鳴里)
옛날 商山에 있는 龍沼에서 龍馬가 탄생하여 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마동으로 행정동명이 되었다.

---- 북적골·부적골
부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렀다.

---- 진골
진성 이씨 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응점·독잠·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곳을 석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 세조때 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을 설치하고 석불을 두었는데서
두솔원이라 하였으며, 임진 왜란 때 왜병이 이 석불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여서 움직이지 못하여
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전설의 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못건대·목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건대라고 했다 한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약 150년 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다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하며, 두솔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성곡동(城谷洞)
---- 성곡·재일(在日)
마을 전체가 크고 작은 산이 성을 이룬 듯 하다고 하여서 송곡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재일은 張興孝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밑 긴 골짜기로 마을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서 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덕거리
在日, 독실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득실·독곡·독골·옹곡(瓮谷)
朴還素·朴海立 從兄弟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 들어와서 지형이 독같이 생겨
피난지로 적정하다 하여 마을을 개척하엿으며, 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작은독실
실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역시 작은 독같이 생겼고 큰 독에 비하여 작다고 하여 작은독실이라 하게 되었다.

---- 골·능곡(陵谷)
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잇고 길쭉하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張太師 묘를 쓴 뒤에 齋舍와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본파리·춘파(春坡)
약 400여년 전에 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春坡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 고사미·고삼
능골 아래쪽 춘파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은 새로 도로가 생겨 편리한 마을로 아래고삼과 웃고삼으로 나누고 있다.

---- 노리실·노루실
춘파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노리실·노루실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자래바우
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흡사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자라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 이개동(耳開洞)

---- 구여리·귀여리(耳開)
조선 燕山君 때 權次龍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아래의 龍沼에서 龍馬가 나와 이곳에 와서 귀가 열렸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변하여 귀여리 하였다.
지금은 耳開洞이라 한다.

---- 용우물(龍泉)
이 마을의 뒷산 商山 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商山에서 龍馬가 나서 귀여리에 와서 귀가 열리고 명리에 가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웃귀여리·웃마(上耳開)
이개동 중 위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며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와우실·와욱고(臥牛谷)
이개동 중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이개동과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이개리 최고 명당 자리 마을로서
내앞 의성 김씨 조상묘역 학운소와 추원소가 있다.
내앞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개동 집성촌 과 안동 권씨, 유씨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와 밭농사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구
보현의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구라 하게 되었으며,
이개동 의성김씨,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동의 입구여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랫골
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 이송천동(二松川洞)

---- 두서내·두시내·이송천
시내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동으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거느리·그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달구어 못속에 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곳에 살던 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칭골
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높은절
높은 지대인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높은 절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천동 중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잇으므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렸는데서 마을 이름이 아랫말이 되었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이 마을은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한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간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시체를 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기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 양지골·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동향이며 마을 후면은 병풍처럼 둘러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하여 양지골이라 하였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하(鳥羅)
북쪽 뒷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길게 뻗어 조리형으로 되어서 전쟁시 피난처가 되며,
고목 느티나무에는 참새들이 즐겁게 살았다 하여 조랏이라 한다.

---- 양지말
마을이 정남으로 위치해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둘러 있어 양지바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지 말이라 했다 한다.

---- 오매
주민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양돈, 양계를 많이 한다.

---- 황사벌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에서 붉은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모인다고 하여
주민들이 황사벌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자품동(者品洞)

---- 재품·자품
舊韓末 본 마을에 窮林公이란 분이 16세 때 과거에 登科하여 정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부락 및 고을에 알려져 당시부터
본 마을은 재골의 品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才品이라 하였으나,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才'字를 '者'字로 바꾸어 자품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광흥사(廣興寺) 본 사찰은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7년 화재로 여러 건물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명부전·화직전·칠성각·일주문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게동 은행나무에 견줄 만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벌리고 잇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로 했다 한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 하여 느릇이라 했다 한다.

---- 섭 ·창품(昌豊)
雲中浸月이라는 명지가 있어 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창하여 가자 창품이라고 일걷게 되었다 한다.

---- 구헤티 ·백현(白峴)
학사산 동족, 천등산 서쪽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족 옆산에 흰 운모석이 난다하여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학가산은 안동·영주·예천의 3角 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옛부터 鶴이 앉았다 가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 서남쪽에 팔공산,
북쪽에 소백산맥이 어련히 보이고 산 기슭마다 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산에는 군데 군데 石城의 흔적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愛蓮寺, 廣興寺가 있고
산마루에 있는 수십길 바위 사이에 있는 신효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풀길과 버섯들이 깔린 자연림을 이룬다.
봄이면 山木蓮이 은은한 이 향기를 내뿜고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 괴석 때문에
큰 짐승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 기슭에 나타날 분이다.
일찍이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아래에 지금은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가 설치되어
방송 중계 및 통신 관계에 주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능인굴(能人窟) 학가산 동편 마루턱 능선에서 앞쪽으로 비탈을 내려
약30m 기암절벽으로 날카롭게 속은 이름모를 봉우리 깎아지른 백길 절벽아래
남향으로 뚫린 삼각형 모양의 바윗굴이 있다.
이 굴의 크기는 열사람 쯤 들어 앉기도 빠듯할 만한 공간이다.
맨 안쪽 구석 바위틈의 샘물은 塵客이 찌들은 번뇌를 단 한 모금으로
후련히 씻어낼 만큼 향기로운 시원한 감로수다.
영가시대에는 신라 大德, 能仁大師가 세상 인연을
D고 이 굴에 피하여 숨으매 함께 義湘大師 앞에서 공부하던 1000여 명의 부석사 스님이
능인스님을 만나려고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가면서
돌 한덩어리씩을 가져다가 학가산 북쪽에 탑을 쌓아 石塔이라 했다.
이 굴은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편이나
산 둘레 주민들로 부터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잇어 삼복 더위에도
몇몇 아낙네들이 치성드릴 멥밥을 짓고 평은에 사는 젊은 내외는 이 굴에서
기도들여 아들을 얻어서 일년에 한 두차례씩은 찾아 오고 있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
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 저전동(苧田洞)

---- 모시밭·저전동
옛날 한양 조씨 후손이 이곳에 살면서 주위 일대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화재가 자주 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서 살줄을 묶고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상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우며 승부는 빼앗은 화상의 수로서 가린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 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 협조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일에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똥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나타내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래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동에서 구전되어온 묵 新行 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를 기다리고 잇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심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긴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 하늘 위에 베틀 놓고, 구름 위에 이에 걸고 ..... 등 10연으로 구성되었고,
두불논매기 노래는 원일레라,
원일레라 경상도라 안동땅에 ......등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잇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녁마·동녁(東域)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
이 저전동 음지마을이었는데, 이 음지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동녘마라 했다.

---- 음지마·음지(陰地)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인데,
남쪽에 놓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를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로 가는길 등의 세 갈래 길이 겹친 곳이어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도는 정외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는삼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소붓골·무지랑·반정리(半程里)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지랑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도장골
계곡이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 이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棲息해서 조라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태장동(台庄洞)

---- 옛태무지·고태장촌·태장촌·태장(台庄)
고려 共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태장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가라골·가을골·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김해 김씨의
秋谷派인 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고 불리다가 추곡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가라골 느티나무는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푸른 불이 일어나 끄면 다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 굿을 하였던 바,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 10년 慶發이라는 효자가 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義湘祖師가 修道寺 어느 봄날 天燈窟에서 내려다 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 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등산(天燈山)은 서후면 태장동의 뒷산으로 개월산이라고도 한다.
험한데라고는 하나없이
맑고 고운 토산으로 온 산에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 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지리에 밝았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 때문"이라하여,
산이름을 開月山이라 고치고, 이산 동쪽 머리에 있는 흥국사를 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산은 명산으로 여러 군데 고적 명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산 마루 바로 앞쪽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사가 수도햇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복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굴은 서후면 태장동 뒷산에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개목사가 있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잇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이굴에서 도를 닦는데 항상 하늘에서 등불을 드리웠다고 해서
천등이라 이름한다고 했고 굴 어귀에는 작은 암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능인대사가 좌선하던 판대기가 있다고 했다. ?지금 이 굴엔 암자도 坐禪板도 없고
다만 굴안에 향로와 한 쌍의 촛대 그리고 정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이 있을 뿐이다.
옛 名僧도를 깨달았다는 이 굴엔 지금도 아들을 얻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士女들이 끊이지 않는다.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내려와 산 언저리쯤에 자리한
이 바위굴은 어귀의 놓이 2.5m에 너비 약 4m, 깊이 약 4m 쯤 된다.

---- 웃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의 제일 위쪽에 잇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창, 상태장이라 한다.

---- 천등굴(天燈窟)
의상조사가 少年時 수도차 大望山 큰 바위 밑에서 風雨寒暑를 견디며
眞理 探究에 전념하기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밤에
한 미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天命之謂는 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미녀와의 대화까지 거부하니 더욱 등굴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의상은 끝까지 거부하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서광이 비치므로 사방을 살펴보니 바위 위에 큰 등이 나타나 백주와 같이 밝아졌다.
하늘에서 하강한 대등의 은택으로 도통하였다 하여
大望山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천등산 중턱에 큰 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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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말의 압축 능력은 알집(Alzip)의 압축률도 따라올 수없다. ( )는 압축비. 충순공 07.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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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공 조회 27 | 07.02.11 13:47 http://cafe.daum.net/peopleroot/Oc7/44
▶서후면 (西後面) 유래

서후면은 삼국시대에 辰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新羅에 고려시대에는
현 안동시의 옛 명소일 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府庶棉이라 하였다가 肅宗때 서후면으로 되었다.
1924년 군면 폐합에 따라 西先面과 北後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支流인 豊山川이 풍산읍을 거쳐서 이곳으로 흐르고,
동쪽은 松夜川이 북으로 흐르로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삼림 지대가 많고 벼농사가 우세하며 그 외에 배·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 광평동(廣坪洞)
---- 너븐들·너븐돌·광평
본래 안동군 서후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30년 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너븐들이라고 하는데
1976년 국도 포장시 이 돌을 깨어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동이라 개칭하였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
조선 선조때 鄭士信이란 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또, 고려시대 이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매년 단오절마다 그네를 매고 즐겼다 하여 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추가 특산물이며 24가구가 살고 있다.

---- 원당골·월당곡(院堂谷)
추산에서 북동간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
추산에서 북동간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너븐들 서쪽 골짜기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安東府使 孟思誠이
이곳을 지날 때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담배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며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안골·내동(內洞)
1700년 경부터 眞城 李氏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점마·응기점·토점(土店)
1800년 경부터 이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긴밭·진산이·장묘
6.25 동란 이전에는 이곳에 사래가 긴 밭이 있는 들판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사래가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진살이라고 부른다.

▷ 교동(校洞)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成宗 晋州 河氏가 선산으로 옮겨갈 때 하씨 한 사람이 단종의 復歸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는데 안동 권씨 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촌은 본래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한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벼락바위는 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

---- 시무골·시묘곡(侍墓谷)
안동인 權緯紀란 사람이 參奉寺 母喪을 당하여 묘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불려오는 명칭이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수학을 시키게 되자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골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 향교골·행겟골·향교동(鄕校洞)·교동(校洞)
고려 복주 때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동 또는 교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 금계동(金溪洞)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500년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였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하여 금지라 불렀다.?

---- 을막·을막골
사망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김씨가 주로 살고 서후면 사무소 북동쪽에 있으며 지금은 사과나무를 식재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召福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렸다 한다.
단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 소복당(召複堂)
소복산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과 칠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 종가에 모여서 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 문중에서 1 사람, 타성에서 1 사람, 色掌 1 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게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동안 흉사에는 아니 가는 것이 특례로 되어, 7월 백중날에도 고사를 지낸다.

---- 사망(仕望)
조선시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이어서 불려온 이름이다.
지금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알실·지곡(知谷)
400년 전에 이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앞 일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고, 학문을 깊이하여 세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붙인 명칭이다. 또 알처럼 생긴 외딴 섬이 있어 유래햇다고도 산다.

---- 미리미·미산(未山)
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잇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눈섭 같다고 未山이라 하였고, 지형이 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배사골·작장골
옛날에 벼슬을 한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고, 백만장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골 남족에 있는 마을로 효자 門이 있어 효자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텃골·동무지·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잇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등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대두서동(大豆西洞)
---- 한도솔·한두실·대두실·대두서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
약200년 전에 이곳이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오동지이·가음실·오동정(梧桐亭)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잿마
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구억마·구석마을·윗마을
한두실 북동쪽 1㎞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어 구석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칭하며
약 100여년 전부터 개척되어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 명동(鳴洞)
---- 송내(松內)·징걸·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년전에 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재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쑤능골·수능곡(水陵谷)
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곳의 논 3000여 평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쑤능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 검박골·예배당골·서여곡(西汝谷)
송내 증거리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서양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지평 윤씨가 살고 있다.

---- 방곡·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큰 못이 있으며 진송 이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담배 농사를 주로하며 양돈 단지를 소성하고 있다.

---- 명동·말우리·명리(鳴里)
옛날 商山에 있는 龍沼에서 龍馬가 탄생하여 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마동으로 행정동명이 되었다.

---- 북적골·부적골
부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렀다.

---- 진골
진성 이씨 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응점·독잠·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곳을 석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 세조때 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을 설치하고 석불을 두었는데서
두솔원이라 하였으며, 임진 왜란 때 왜병이 이 석불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여서 움직이지 못하여
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전설의 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못건대·목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건대라고 했다 한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약 150년 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다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하며, 두솔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성곡동(城谷洞)
---- 성곡·재일(在日)
마을 전체가 크고 작은 산이 성을 이룬 듯 하다고 하여서 송곡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재일은 張興孝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밑 긴 골짜기로 마을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서 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덕거리
在日, 독실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득실·독곡·독골·옹곡(瓮谷)
朴還素·朴海立 從兄弟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 들어와서 지형이 독같이 생겨
피난지로 적정하다 하여 마을을 개척하엿으며, 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작은독실
실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역시 작은 독같이 생겼고 큰 독에 비하여 작다고 하여 작은독실이라 하게 되었다.

---- 골·능곡(陵谷)
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잇고 길쭉하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張太師 묘를 쓴 뒤에 齋舍와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본파리·춘파(春坡)
약 400여년 전에 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春坡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 고사미·고삼
능골 아래쪽 춘파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은 새로 도로가 생겨 편리한 마을로 아래고삼과 웃고삼으로 나누고 있다.

---- 노리실·노루실
춘파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노리실·노루실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자래바우
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흡사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자라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 이개동(耳開洞)

---- 구여리·귀여리(耳開)
조선 燕山君 때 權次龍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아래의 龍沼에서 龍馬가 나와 이곳에 와서 귀가 열렸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변하여 귀여리 하였다.
지금은 耳開洞이라 한다.

---- 용우물(龍泉)
이 마을의 뒷산 商山 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商山에서 龍馬가 나서 귀여리에 와서 귀가 열리고 명리에 가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웃귀여리·웃마(上耳開)
이개동 중 위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며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와우실·와욱고(臥牛谷)
이개동 중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이개동과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이개리 최고 명당 자리 마을로서
내앞 의성 김씨 조상묘역 학운소와 추원소가 있다.
내앞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개동 집성촌 과 안동 권씨, 유씨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와 밭농사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구
보현의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구라 하게 되었으며,
이개동 의성김씨,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동의 입구여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랫골
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 이송천동(二松川洞)

---- 두서내·두시내·이송천
시내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동으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거느리·그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달구어 못속에 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곳에 살던 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칭골
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높은절
높은 지대인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높은 절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천동 중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잇으므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렸는데서 마을 이름이 아랫말이 되었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이 마을은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한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간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시체를 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기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 양지골·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동향이며 마을 후면은 병풍처럼 둘러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하여 양지골이라 하였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하(鳥羅)
북쪽 뒷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길게 뻗어 조리형으로 되어서 전쟁시 피난처가 되며,
고목 느티나무에는 참새들이 즐겁게 살았다 하여 조랏이라 한다.

---- 양지말
마을이 정남으로 위치해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둘러 있어 양지바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지 말이라 했다 한다.

---- 오매
주민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양돈, 양계를 많이 한다.

---- 황사벌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에서 붉은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모인다고 하여
주민들이 황사벌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자품동(者品洞)

---- 재품·자품
舊韓末 본 마을에 窮林公이란 분이 16세 때 과거에 登科하여 정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부락 및 고을에 알려져 당시부터
본 마을은 재골의 品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才品이라 하였으나,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才'字를 '者'字로 바꾸어 자품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광흥사(廣興寺) 본 사찰은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7년 화재로 여러 건물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명부전·화직전·칠성각·일주문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게동 은행나무에 견줄 만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벌리고 잇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로 했다 한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 하여 느릇이라 했다 한다.

---- 섭 ·창품(昌豊)
雲中浸月이라는 명지가 있어 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창하여 가자 창품이라고 일걷게 되었다 한다.

---- 구헤티 ·백현(白峴)
학사산 동족, 천등산 서쪽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족 옆산에 흰 운모석이 난다하여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학가산은 안동·영주·예천의 3角 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옛부터 鶴이 앉았다 가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 서남쪽에 팔공산,
북쪽에 소백산맥이 어련히 보이고 산 기슭마다 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산에는 군데 군데 石城의 흔적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愛蓮寺, 廣興寺가 있고
산마루에 있는 수십길 바위 사이에 있는 신효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풀길과 버섯들이 깔린 자연림을 이룬다.
봄이면 山木蓮이 은은한 이 향기를 내뿜고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 괴석 때문에
큰 짐승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 기슭에 나타날 분이다.
일찍이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아래에 지금은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가 설치되어
방송 중계 및 통신 관계에 주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능인굴(能人窟) 학가산 동편 마루턱 능선에서 앞쪽으로 비탈을 내려
약30m 기암절벽으로 날카롭게 속은 이름모를 봉우리 깎아지른 백길 절벽아래
남향으로 뚫린 삼각형 모양의 바윗굴이 있다.
이 굴의 크기는 열사람 쯤 들어 앉기도 빠듯할 만한 공간이다.
맨 안쪽 구석 바위틈의 샘물은 塵客이 찌들은 번뇌를 단 한 모금으로
후련히 씻어낼 만큼 향기로운 시원한 감로수다.
영가시대에는 신라 大德, 能仁大師가 세상 인연을
D고 이 굴에 피하여 숨으매 함께 義湘大師 앞에서 공부하던 1000여 명의 부석사 스님이
능인스님을 만나려고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가면서
돌 한덩어리씩을 가져다가 학가산 북쪽에 탑을 쌓아 石塔이라 했다.
이 굴은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편이나
산 둘레 주민들로 부터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잇어 삼복 더위에도
몇몇 아낙네들이 치성드릴 멥밥을 짓고 평은에 사는 젊은 내외는 이 굴에서
기도들여 아들을 얻어서 일년에 한 두차례씩은 찾아 오고 있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
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 저전동(苧田洞)

---- 모시밭·저전동
옛날 한양 조씨 후손이 이곳에 살면서 주위 일대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화재가 자주 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서 살줄을 묶고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상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우며 승부는 빼앗은 화상의 수로서 가린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 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 협조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일에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똥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나타내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래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동에서 구전되어온 묵 新行 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를 기다리고 잇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심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긴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 하늘 위에 베틀 놓고, 구름 위에 이에 걸고 ..... 등 10연으로 구성되었고,
두불논매기 노래는 원일레라,
원일레라 경상도라 안동땅에 ......등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잇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녁마·동녁(東域)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
이 저전동 음지마을이었는데, 이 음지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동녘마라 했다.

---- 음지마·음지(陰地)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인데,
남쪽에 놓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를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로 가는길 등의 세 갈래 길이 겹친 곳이어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도는 정외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는삼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소붓골·무지랑·반정리(半程里)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지랑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도장골
계곡이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 이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棲息해서 조라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태장동(台庄洞)

---- 옛태무지·고태장촌·태장촌·태장(台庄)
고려 共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태장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가라골·가을골·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김해 김씨의
秋谷派인 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고 불리다가 추곡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가라골 느티나무는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푸른 불이 일어나 끄면 다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 굿을 하였던 바,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 10년 慶發이라는 효자가 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義湘祖師가 修道寺 어느 봄날 天燈窟에서 내려다 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 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등산(天燈山)은 서후면 태장동의 뒷산으로 개월산이라고도 한다.
험한데라고는 하나없이
맑고 고운 토산으로 온 산에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 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지리에 밝았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 때문"이라하여,
산이름을 開月山이라 고치고, 이산 동쪽 머리에 있는 흥국사를 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산은 명산으로 여러 군데 고적 명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산 마루 바로 앞쪽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사가 수도햇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복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굴은 서후면 태장동 뒷산에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개목사가 있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잇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이굴에서 도를 닦는데 항상 하늘에서 등불을 드리웠다고 해서
천등이라 이름한다고 했고 굴 어귀에는 작은 암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능인대사가 좌선하던 판대기가 있다고 했다. ?지금 이 굴엔 암자도 坐禪板도 없고
다만 굴안에 향로와 한 쌍의 촛대 그리고 정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이 있을 뿐이다.
옛 名僧도를 깨달았다는 이 굴엔 지금도 아들을 얻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士女들이 끊이지 않는다.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내려와 산 언저리쯤에 자리한
이 바위굴은 어귀의 놓이 2.5m에 너비 약 4m, 깊이 약 4m 쯤 된다.

---- 웃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의 제일 위쪽에 잇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창, 상태장이라 한다.

---- 천등굴(天燈窟)
의상조사가 少年時 수도차 大望山 큰 바위 밑에서 風雨寒暑를 견디며
眞理 探究에 전념하기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밤에
한 미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天命之謂는 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미녀와의 대화까지 거부하니 더욱 등굴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의상은 끝까지 거부하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서광이 비치므로 사방을 살펴보니 바위 위에 큰 등이 나타나 백주와 같이 밝아졌다.
하늘에서 하강한 대등의 은택으로 도통하였다 하여
大望山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천등산 중턱에 큰 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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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야 추천 0 조회 63 15.08.04 14: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후면 (西後面) 유래

서후면은 삼국시대에 辰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新羅에 고려시대에는
현 안동시의 옛 명소일 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府庶棉이라 하였다가 肅宗때 서후면으로 되었다.
1924년 군면 폐합에 따라 西先面과 北後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支流인 豊山川이 풍산읍을 거쳐서 이곳으로 흐르고,
동쪽은 松夜川이 북으로 흐르로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삼림 지대가 많고 벼농사가 우세하며 그 외에 배·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 광평동(廣坪洞)
---- 너븐들·너븐돌·광평
본래 안동군 서후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30년 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너븐들이라고 하는데
1976년 국도 포장시 이 돌을 깨어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동이라 개칭하였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
조선 선조때 鄭士信이란 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또, 고려시대 이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매년 단오절마다 그네를 매고 즐겼다 하여 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추가 특산물이며 24가구가 살고 있다.

---- 원당골·월당곡(院堂谷)
추산에서 북동간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
추산에서 북동간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너븐들 서쪽 골짜기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安東府使 孟思誠이
이곳을 지날 때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담배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며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안골·내동(內洞)
1700년 경부터 眞城 李氏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점마·응기점·토점(土店)
1800년 경부터 이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긴밭·진산이·장묘
6.25 동란 이전에는 이곳에 사래가 긴 밭이 있는 들판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사래가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진살이라고 부른다.

▷ 교동(校洞)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成宗 晋州 河氏가 선산으로 옮겨갈 때 하씨 한 사람이 단종의 復歸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는데 안동 권씨 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촌은 본래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한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벼락바위는 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

---- 시무골·시묘곡(侍墓谷)
안동인 權緯紀란 사람이 參奉寺 母喪을 당하여 묘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불려오는 명칭이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수학을 시키게 되자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골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 향교골·행겟골·향교동(鄕校洞)·교동(校洞)
고려 복주 때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동 또는 교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 금계동(金溪洞)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500년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였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하여 금지라 불렀다.?

---- 을막·을막골
사망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김씨가 주로 살고 서후면 사무소 북동쪽에 있으며 지금은 사과나무를 식재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召福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렸다 한다.
단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 소복당(召複堂)
소복산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과 칠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 종가에 모여서 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 문중에서 1 사람, 타성에서 1 사람, 色掌 1 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게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동안 흉사에는 아니 가는 것이 특례로 되어, 7월 백중날에도 고사를 지낸다.

---- 사망(仕望)
조선시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이어서 불려온 이름이다.
지금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알실·지곡(知谷)
400년 전에 이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앞 일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고, 학문을 깊이하여 세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붙인 명칭이다. 또 알처럼 생긴 외딴 섬이 있어 유래햇다고도 산다.

---- 미리미·미산(未山)
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잇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눈섭 같다고 未山이라 하였고, 지형이 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배사골·작장골
옛날에 벼슬을 한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고, 백만장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골 남족에 있는 마을로 효자 門이 있어 효자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텃골·동무지·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잇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등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대두서동(大豆西洞)
---- 한도솔·한두실·대두실·대두서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
약200년 전에 이곳이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오동지이·가음실·오동정(梧桐亭)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잿마
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구억마·구석마을·윗마을
한두실 북동쪽 1㎞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어 구석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칭하며
약 100여년 전부터 개척되어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 명동(鳴洞)
---- 송내(松內)·징걸·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년전에 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재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쑤능골·수능곡(水陵谷)
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곳의 논 3000여 평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쑤능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 검박골·예배당골·서여곡(西汝谷)
송내 증거리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서양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지평 윤씨가 살고 있다.

---- 방곡·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큰 못이 있으며 진송 이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담배 농사를 주로하며 양돈 단지를 소성하고 있다.

---- 명동·말우리·명리(鳴里)
옛날 商山에 있는 龍沼에서 龍馬가 탄생하여 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마동으로 행정동명이 되었다.

---- 북적골·부적골
부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렀다.

---- 진골
진성 이씨 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응점·독잠·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곳을 석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 세조때 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을 설치하고 석불을 두었는데서
두솔원이라 하였으며, 임진 왜란 때 왜병이 이 석불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여서 움직이지 못하여
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전설의 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못건대·목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건대라고 했다 한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약 150년 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다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하며, 두솔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성곡동(城谷洞)
---- 성곡·재일(在日)
마을 전체가 크고 작은 산이 성을 이룬 듯 하다고 하여서 송곡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재일은 張興孝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밑 긴 골짜기로 마을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서 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덕거리
在日, 독실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득실·독곡·독골·옹곡(瓮谷)
朴還素·朴海立 從兄弟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 들어와서 지형이 독같이 생겨
피난지로 적정하다 하여 마을을 개척하엿으며, 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작은독실
실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역시 작은 독같이 생겼고 큰 독에 비하여 작다고 하여 작은독실이라 하게 되었다.

---- 골·능곡(陵谷)
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잇고 길쭉하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張太師 묘를 쓴 뒤에 齋舍와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본파리·춘파(春坡)
약 400여년 전에 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春坡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 고사미·고삼
능골 아래쪽 춘파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은 새로 도로가 생겨 편리한 마을로 아래고삼과 웃고삼으로 나누고 있다.

---- 노리실·노루실
춘파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노리실·노루실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자래바우
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흡사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자라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 이개동(耳開洞)

---- 구여리·귀여리(耳開)
조선 燕山君 때 權次龍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아래의 龍沼에서 龍馬가 나와 이곳에 와서 귀가 열렸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변하여 귀여리 하였다.
지금은 耳開洞이라 한다.

---- 용우물(龍泉)
이 마을의 뒷산 商山 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商山에서 龍馬가 나서 귀여리에 와서 귀가 열리고 명리에 가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웃귀여리·웃마(上耳開)
이개동 중 위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며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와우실·와욱고(臥牛谷)
이개동 중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이개동과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이개리 최고 명당 자리 마을로서
내앞 의성 김씨 조상묘역 학운소와 추원소가 있다.
내앞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개동 집성촌 과 안동 권씨, 유씨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와 밭농사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구
보현의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구라 하게 되었으며,
이개동 의성김씨,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동의 입구여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랫골
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 이송천동(二松川洞)

---- 두서내·두시내·이송천
시내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동으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거느리·그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달구어 못속에 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곳에 살던 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칭골
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높은절
높은 지대인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높은 절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천동 중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잇으므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렸는데서 마을 이름이 아랫말이 되었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이 마을은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한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간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시체를 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기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 양지골·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동향이며 마을 후면은 병풍처럼 둘러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하여 양지골이라 하였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하(鳥羅)
북쪽 뒷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길게 뻗어 조리형으로 되어서 전쟁시 피난처가 되며,
고목 느티나무에는 참새들이 즐겁게 살았다 하여 조랏이라 한다.

---- 양지말
마을이 정남으로 위치해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둘러 있어 양지바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지 말이라 했다 한다.

---- 오매
주민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양돈, 양계를 많이 한다.

---- 황사벌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에서 붉은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모인다고 하여
주민들이 황사벌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자품동(者品洞)

---- 재품·자품
舊韓末 본 마을에 窮林公이란 분이 16세 때 과거에 登科하여 정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부락 및 고을에 알려져 당시부터
본 마을은 재골의 品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才品이라 하였으나,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才'字를 '者'字로 바꾸어 자품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광흥사(廣興寺) 본 사찰은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7년 화재로 여러 건물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명부전·화직전·칠성각·일주문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게동 은행나무에 견줄 만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벌리고 잇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로 했다 한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 하여 느릇이라 했다 한다.

---- 섭 ·창품(昌豊)
雲中浸月이라는 명지가 있어 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창하여 가자 창품이라고 일걷게 되었다 한다.

---- 구헤티 ·백현(白峴)
학사산 동족, 천등산 서쪽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족 옆산에 흰 운모석이 난다하여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학가산은 안동·영주·예천의 3角 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옛부터 鶴이 앉았다 가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 서남쪽에 팔공산,
북쪽에 소백산맥이 어련히 보이고 산 기슭마다 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산에는 군데 군데 石城의 흔적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愛蓮寺, 廣興寺가 있고
산마루에 있는 수십길 바위 사이에 있는 신효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풀길과 버섯들이 깔린 자연림을 이룬다.
봄이면 山木蓮이 은은한 이 향기를 내뿜고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 괴석 때문에
큰 짐승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 기슭에 나타날 분이다.
일찍이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아래에 지금은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가 설치되어
방송 중계 및 통신 관계에 주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능인굴(能人窟) 학가산 동편 마루턱 능선에서 앞쪽으로 비탈을 내려
약30m 기암절벽으로 날카롭게 속은 이름모를 봉우리 깎아지른 백길 절벽아래
남향으로 뚫린 삼각형 모양의 바윗굴이 있다.
이 굴의 크기는 열사람 쯤 들어 앉기도 빠듯할 만한 공간이다.
맨 안쪽 구석 바위틈의 샘물은 塵客이 찌들은 번뇌를 단 한 모금으로
후련히 씻어낼 만큼 향기로운 시원한 감로수다.
영가시대에는 신라 大德, 能仁大師가 세상 인연을
D고 이 굴에 피하여 숨으매 함께 義湘大師 앞에서 공부하던 1000여 명의 부석사 스님이
능인스님을 만나려고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가면서
돌 한덩어리씩을 가져다가 학가산 북쪽에 탑을 쌓아 石塔이라 했다.
이 굴은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편이나
산 둘레 주민들로 부터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잇어 삼복 더위에도
몇몇 아낙네들이 치성드릴 멥밥을 짓고 평은에 사는 젊은 내외는 이 굴에서
기도들여 아들을 얻어서 일년에 한 두차례씩은 찾아 오고 있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
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 저전동(苧田洞)

---- 모시밭·저전동
옛날 한양 조씨 후손이 이곳에 살면서 주위 일대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화재가 자주 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서 살줄을 묶고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상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우며 승부는 빼앗은 화상의 수로서 가린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 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 협조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일에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똥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나타내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래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동에서 구전되어온 묵 新行 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를 기다리고 잇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심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긴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 하늘 위에 베틀 놓고, 구름 위에 이에 걸고 ..... 등 10연으로 구성되었고,
두불논매기 노래는 원일레라,
원일레라 경상도라 안동땅에 ......등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잇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녁마·동녁(東域)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
이 저전동 음지마을이었는데, 이 음지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동녘마라 했다.

---- 음지마·음지(陰地)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인데,
남쪽에 놓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를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로 가는길 등의 세 갈래 길이 겹친 곳이어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도는 정외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는삼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소붓골·무지랑·반정리(半程里)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지랑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도장골
계곡이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 이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棲息해서 조라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태장동(台庄洞)

---- 옛태무지·고태장촌·태장촌·태장(台庄)
고려 共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태장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가라골·가을골·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김해 김씨의
秋谷派인 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고 불리다가 추곡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가라골 느티나무는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푸른 불이 일어나 끄면 다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 굿을 하였던 바,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 10년 慶發이라는 효자가 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義湘祖師가 修道寺 어느 봄날 天燈窟에서 내려다 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 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등산(天燈山)은 서후면 태장동의 뒷산으로 개월산이라고도 한다.
험한데라고는 하나없이
맑고 고운 토산으로 온 산에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 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지리에 밝았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 때문"이라하여,
산이름을 開月山이라 고치고, 이산 동쪽 머리에 있는 흥국사를 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산은 명산으로 여러 군데 고적 명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산 마루 바로 앞쪽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사가 수도햇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복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굴은 서후면 태장동 뒷산에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개목사가 있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잇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이굴에서 도를 닦는데 항상 하늘에서 등불을 드리웠다고 해서
천등이라 이름한다고 했고 굴 어귀에는 작은 암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능인대사가 좌선하던 판대기가 있다고 했다. ?지금 이 굴엔 암자도 坐禪板도 없고
다만 굴안에 향로와 한 쌍의 촛대 그리고 정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이 있을 뿐이다.
옛 名僧도를 깨달았다는 이 굴엔 지금도 아들을 얻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士女들이 끊이지 않는다.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내려와 산 언저리쯤에 자리한
이 바위굴은 어귀의 놓이 2.5m에 너비 약 4m, 깊이 약 4m 쯤 된다.

---- 웃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의 제일 위쪽에 잇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창, 상태장이라 한다.

---- 천등굴(天燈窟)
의상조사가 少年時 수도차 大望山 큰 바위 밑에서 風雨寒暑를 견디며
眞理 探究에 전념하기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밤에
한 미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天命之謂는 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미녀와의 대화까지 거부하니 더욱 등굴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의상은 끝까지 거부하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서광이 비치므로 사방을 살펴보니 바위 위에 큰 등이 나타나 백주와 같이 밝아졌다.
하늘에서 하강한 대등의 은택으로 도통하였다 하여
大望山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천등산 중턱에 큰 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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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후면은 삼국시대에 辰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新羅에 고려시대에는
현 안동시의 옛 명소일 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府庶棉이라 하였다가 肅宗때 서후면으로 되었다.
1924년 군면 폐합에 따라 西先面과 北後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支流인 豊山川이 풍산읍을 거쳐서 이곳으로 흐르고,
동쪽은 松夜川이 북으로 흐르로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삼림 지대가 많고 벼농사가 우세하며 그 외에 배·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 광평동(廣坪洞)
---- 너븐들·너븐돌·광평
본래 안동군 서후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30년 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너븐들이라고 하는데
1976년 국도 포장시 이 돌을 깨어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동이라 개칭하였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
조선 선조때 鄭士信이란 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또, 고려시대 이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매년 단오절마다 그네를 매고 즐겼다 하여 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추가 특산물이며 24가구가 살고 있다.

---- 원당골·월당곡(院堂谷)
추산에서 북동간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
추산에서 북동간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너븐들 서쪽 골짜기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安東府使 孟思誠이
이곳을 지날 때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담배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며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안골·내동(內洞)
1700년 경부터 眞城 李氏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점마·응기점·토점(土店)
1800년 경부터 이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긴밭·진산이·장묘
6.25 동란 이전에는 이곳에 사래가 긴 밭이 있는 들판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사래가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진살이라고 부른다.

▷ 교동(校洞)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成宗 晋州 河氏가 선산으로 옮겨갈 때 하씨 한 사람이 단종의 復歸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는데 안동 권씨 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촌은 본래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한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벼락바위는 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

---- 시무골·시묘곡(侍墓谷)
안동인 權緯紀란 사람이 參奉寺 母喪을 당하여 묘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불려오는 명칭이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수학을 시키게 되자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골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 향교골·행겟골·향교동(鄕校洞)·교동(校洞)
고려 복주 때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동 또는 교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 금계동(金溪洞)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500년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였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하여 금지라 불렀다.?

---- 을막·을막골
사망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김씨가 주로 살고 서후면 사무소 북동쪽에 있으며 지금은 사과나무를 식재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召福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렸다 한다.
단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 소복당(召複堂)
소복산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과 칠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 종가에 모여서 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 문중에서 1 사람, 타성에서 1 사람, 色掌 1 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게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동안 흉사에는 아니 가는 것이 특례로 되어, 7월 백중날에도 고사를 지낸다.

---- 사망(仕望)
조선시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이어서 불려온 이름이다.
지금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알실·지곡(知谷)
400년 전에 이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앞 일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고, 학문을 깊이하여 세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붙인 명칭이다. 또 알처럼 생긴 외딴 섬이 있어 유래햇다고도 산다.

---- 미리미·미산(未山)
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잇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눈섭 같다고 未山이라 하였고, 지형이 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배사골·작장골
옛날에 벼슬을 한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고, 백만장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골 남족에 있는 마을로 효자 門이 있어 효자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텃골·동무지·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잇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등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대두서동(大豆西洞)
---- 한도솔·한두실·대두실·대두서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
약200년 전에 이곳이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오동지이·가음실·오동정(梧桐亭)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잿마
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구억마·구석마을·윗마을
한두실 북동쪽 1㎞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어 구석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칭하며
약 100여년 전부터 개척되어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 명동(鳴洞)
---- 송내(松內)·징걸·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년전에 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재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쑤능골·수능곡(水陵谷)
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곳의 논 3000여 평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쑤능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 검박골·예배당골·서여곡(西汝谷)
송내 증거리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서양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지평 윤씨가 살고 있다.

---- 방곡·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큰 못이 있으며 진송 이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담배 농사를 주로하며 양돈 단지를 소성하고 있다.

---- 명동·말우리·명리(鳴里)
옛날 商山에 있는 龍沼에서 龍馬가 탄생하여 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마동으로 행정동명이 되었다.

---- 북적골·부적골
부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렀다.

---- 진골
진성 이씨 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응점·독잠·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곳을 석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 세조때 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을 설치하고 석불을 두었는데서
두솔원이라 하였으며, 임진 왜란 때 왜병이 이 석불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여서 움직이지 못하여
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전설의 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못건대·목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건대라고 했다 한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약 150년 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다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하며, 두솔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성곡동(城谷洞)
---- 성곡·재일(在日)
마을 전체가 크고 작은 산이 성을 이룬 듯 하다고 하여서 송곡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재일은 張興孝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밑 긴 골짜기로 마을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서 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덕거리
在日, 독실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득실·독곡·독골·옹곡(瓮谷)
朴還素·朴海立 從兄弟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 들어와서 지형이 독같이 생겨
피난지로 적정하다 하여 마을을 개척하엿으며, 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작은독실
실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역시 작은 독같이 생겼고 큰 독에 비하여 작다고 하여 작은독실이라 하게 되었다.

---- 골·능곡(陵谷)
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잇고 길쭉하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張太師 묘를 쓴 뒤에 齋舍와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본파리·춘파(春坡)
약 400여년 전에 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春坡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 고사미·고삼
능골 아래쪽 춘파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은 새로 도로가 생겨 편리한 마을로 아래고삼과 웃고삼으로 나누고 있다.

---- 노리실·노루실
춘파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노리실·노루실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자래바우
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흡사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자라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 이개동(耳開洞)

---- 구여리·귀여리(耳開)
조선 燕山君 때 權次龍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아래의 龍沼에서 龍馬가 나와 이곳에 와서 귀가 열렸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변하여 귀여리 하였다.
지금은 耳開洞이라 한다.

---- 용우물(龍泉)
이 마을의 뒷산 商山 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商山에서 龍馬가 나서 귀여리에 와서 귀가 열리고 명리에 가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웃귀여리·웃마(上耳開)
이개동 중 위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며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와우실·와욱고(臥牛谷)
이개동 중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이개동과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이개리 최고 명당 자리 마을로서
내앞 의성 김씨 조상묘역 학운소와 추원소가 있다.
내앞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개동 집성촌 과 안동 권씨, 유씨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와 밭농사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구
보현의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구라 하게 되었으며,
이개동 의성김씨,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동의 입구여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랫골
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 이송천동(二松川洞)

---- 두서내·두시내·이송천
시내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동으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거느리·그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달구어 못속에 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곳에 살던 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칭골
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높은절
높은 지대인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높은 절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천동 중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잇으므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렸는데서 마을 이름이 아랫말이 되었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이 마을은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한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간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시체를 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기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 양지골·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동향이며 마을 후면은 병풍처럼 둘러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하여 양지골이라 하였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하(鳥羅)
북쪽 뒷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길게 뻗어 조리형으로 되어서 전쟁시 피난처가 되며,
고목 느티나무에는 참새들이 즐겁게 살았다 하여 조랏이라 한다.

---- 양지말
마을이 정남으로 위치해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둘러 있어 양지바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지 말이라 했다 한다.

---- 오매
주민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양돈, 양계를 많이 한다.

---- 황사벌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에서 붉은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모인다고 하여
주민들이 황사벌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자품동(者品洞)

---- 재품·자품
舊韓末 본 마을에 窮林公이란 분이 16세 때 과거에 登科하여 정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부락 및 고을에 알려져 당시부터
본 마을은 재골의 品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才品이라 하였으나,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才'字를 '者'字로 바꾸어 자품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광흥사(廣興寺) 본 사찰은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7년 화재로 여러 건물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명부전·화직전·칠성각·일주문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게동 은행나무에 견줄 만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벌리고 잇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로 했다 한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 하여 느릇이라 했다 한다.

---- 섭 ·창품(昌豊)
雲中浸月이라는 명지가 있어 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창하여 가자 창품이라고 일걷게 되었다 한다.

---- 구헤티 ·백현(白峴)
학사산 동족, 천등산 서쪽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족 옆산에 흰 운모석이 난다하여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학가산은 안동·영주·예천의 3角 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옛부터 鶴이 앉았다 가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 서남쪽에 팔공산,
북쪽에 소백산맥이 어련히 보이고 산 기슭마다 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산에는 군데 군데 石城의 흔적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愛蓮寺, 廣興寺가 있고
산마루에 있는 수십길 바위 사이에 있는 신효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풀길과 버섯들이 깔린 자연림을 이룬다.
봄이면 山木蓮이 은은한 이 향기를 내뿜고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 괴석 때문에
큰 짐승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 기슭에 나타날 분이다.
일찍이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아래에 지금은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가 설치되어
방송 중계 및 통신 관계에 주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능인굴(能人窟) 학가산 동편 마루턱 능선에서 앞쪽으로 비탈을 내려
약30m 기암절벽으로 날카롭게 속은 이름모를 봉우리 깎아지른 백길 절벽아래
남향으로 뚫린 삼각형 모양의 바윗굴이 있다.
이 굴의 크기는 열사람 쯤 들어 앉기도 빠듯할 만한 공간이다.
맨 안쪽 구석 바위틈의 샘물은 塵客이 찌들은 번뇌를 단 한 모금으로
후련히 씻어낼 만큼 향기로운 시원한 감로수다.
영가시대에는 신라 大德, 能仁大師가 세상 인연을
D고 이 굴에 피하여 숨으매 함께 義湘大師 앞에서 공부하던 1000여 명의 부석사 스님이
능인스님을 만나려고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가면서
돌 한덩어리씩을 가져다가 학가산 북쪽에 탑을 쌓아 石塔이라 했다.
이 굴은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편이나
산 둘레 주민들로 부터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잇어 삼복 더위에도
몇몇 아낙네들이 치성드릴 멥밥을 짓고 평은에 사는 젊은 내외는 이 굴에서
기도들여 아들을 얻어서 일년에 한 두차례씩은 찾아 오고 있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
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 저전동(苧田洞)

---- 모시밭·저전동
옛날 한양 조씨 후손이 이곳에 살면서 주위 일대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화재가 자주 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서 살줄을 묶고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상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우며 승부는 빼앗은 화상의 수로서 가린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 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 협조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일에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똥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나타내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래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동에서 구전되어온 묵 新行 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를 기다리고 잇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심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긴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 하늘 위에 베틀 놓고, 구름 위에 이에 걸고 ..... 등 10연으로 구성되었고,
두불논매기 노래는 원일레라,
원일레라 경상도라 안동땅에 ......등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잇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녁마·동녁(東域)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
이 저전동 음지마을이었는데, 이 음지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동녘마라 했다.

---- 음지마·음지(陰地)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인데,
남쪽에 놓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를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로 가는길 등의 세 갈래 길이 겹친 곳이어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도는 정외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는삼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소붓골·무지랑·반정리(半程里)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지랑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도장골
계곡이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 이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棲息해서 조라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태장동(台庄洞)

---- 옛태무지·고태장촌·태장촌·태장(台庄)
고려 共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태장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가라골·가을골·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김해 김씨의
秋谷派인 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고 불리다가 추곡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가라골 느티나무는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푸른 불이 일어나 끄면 다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 굿을 하였던 바,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 10년 慶發이라는 효자가 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義湘祖師가 修道寺 어느 봄날 天燈窟에서 내려다 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 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등산(天燈山)은 서후면 태장동의 뒷산으로 개월산이라고도 한다.
험한데라고는 하나없이
맑고 고운 토산으로 온 산에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 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지리에 밝았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 때문"이라하여,
산이름을 開月山이라 고치고, 이산 동쪽 머리에 있는 흥국사를 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산은 명산으로 여러 군데 고적 명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산 마루 바로 앞쪽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사가 수도햇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복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굴은 서후면 태장동 뒷산에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개목사가 있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잇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이굴에서 도를 닦는데 항상 하늘에서 등불을 드리웠다고 해서
천등이라 이름한다고 했고 굴 어귀에는 작은 암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능인대사가 좌선하던 판대기가 있다고 했다. ?지금 이 굴엔 암자도 坐禪板도 없고
다만 굴안에 향로와 한 쌍의 촛대 그리고 정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이 있을 뿐이다.
옛 名僧도를 깨달았다는 이 굴엔 지금도 아들을 얻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士女들이 끊이지 않는다.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내려와 산 언저리쯤에 자리한
이 바위굴은 어귀의 놓이 2.5m에 너비 약 4m, 깊이 약 4m 쯤 된다.

---- 웃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의 제일 위쪽에 잇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창, 상태장이라 한다.

---- 천등굴(天燈窟)
의상조사가 少年時 수도차 大望山 큰 바위 밑에서 風雨寒暑를 견디며
眞理 探究에 전념하기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밤에
한 미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天命之謂는 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미녀와의 대화까지 거부하니 더욱 등굴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의상은 끝까지 거부하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서광이 비치므로 사방을 살펴보니 바위 위에 큰 등이 나타나 백주와 같이 밝아졌다.
하늘에서 하강한 대등의 은택으로 도통하였다 하여
大望山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천등산 중턱에 큰 굴이 있다.




모여사는사람 중에서

 
 

 
 
 
 
     
 
 
충순공 조회 27 | 07.02.11 13:47 http://cafe.daum.net/peopleroot/Oc7/44
▶서후면 (西後面) 유래

서후면은 삼국시대에 辰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新羅에 고려시대에는
현 안동시의 옛 명소일 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府庶棉이라 하였다가 肅宗때 서후면으로 되었다.
1924년 군면 폐합에 따라 西先面과 北後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支流인 豊山川이 풍산읍을 거쳐서 이곳으로 흐르고,
동쪽은 松夜川이 북으로 흐르로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삼림 지대가 많고 벼농사가 우세하며 그 외에 배·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 광평동(廣坪洞)
---- 너븐들·너븐돌·광평
본래 안동군 서후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30년 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너븐들이라고 하는데
1976년 국도 포장시 이 돌을 깨어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동이라 개칭하였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
조선 선조때 鄭士信이란 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또, 고려시대 이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매년 단오절마다 그네를 매고 즐겼다 하여 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추가 특산물이며 24가구가 살고 있다.

---- 원당골·월당곡(院堂谷)
추산에서 북동간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
추산에서 북동간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너븐들 서쪽 골짜기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安東府使 孟思誠이
이곳을 지날 때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담배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며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안골·내동(內洞)
1700년 경부터 眞城 李氏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점마·응기점·토점(土店)
1800년 경부터 이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긴밭·진산이·장묘
6.25 동란 이전에는 이곳에 사래가 긴 밭이 있는 들판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사래가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진살이라고 부른다.

▷ 교동(校洞)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成宗 晋州 河氏가 선산으로 옮겨갈 때 하씨 한 사람이 단종의 復歸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는데 안동 권씨 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촌은 본래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한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벼락바위는 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

---- 시무골·시묘곡(侍墓谷)
안동인 權緯紀란 사람이 參奉寺 母喪을 당하여 묘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불려오는 명칭이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수학을 시키게 되자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골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 향교골·행겟골·향교동(鄕校洞)·교동(校洞)
고려 복주 때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동 또는 교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 금계동(金溪洞)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500년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였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하여 금지라 불렀다.?

---- 을막·을막골
사망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김씨가 주로 살고 서후면 사무소 북동쪽에 있으며 지금은 사과나무를 식재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召福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렸다 한다.
단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 소복당(召複堂)
소복산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과 칠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 종가에 모여서 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 문중에서 1 사람, 타성에서 1 사람, 色掌 1 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게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동안 흉사에는 아니 가는 것이 특례로 되어, 7월 백중날에도 고사를 지낸다.

---- 사망(仕望)
조선시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이어서 불려온 이름이다.
지금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알실·지곡(知谷)
400년 전에 이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앞 일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고, 학문을 깊이하여 세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붙인 명칭이다. 또 알처럼 생긴 외딴 섬이 있어 유래햇다고도 산다.

---- 미리미·미산(未山)
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잇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눈섭 같다고 未山이라 하였고, 지형이 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배사골·작장골
옛날에 벼슬을 한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고, 백만장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골 남족에 있는 마을로 효자 門이 있어 효자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텃골·동무지·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잇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등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대두서동(大豆西洞)
---- 한도솔·한두실·대두실·대두서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
약200년 전에 이곳이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오동지이·가음실·오동정(梧桐亭)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잿마
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구억마·구석마을·윗마을
한두실 북동쪽 1㎞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어 구석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칭하며
약 100여년 전부터 개척되어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 명동(鳴洞)
---- 송내(松內)·징걸·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년전에 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재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쑤능골·수능곡(水陵谷)
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곳의 논 3000여 평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쑤능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 검박골·예배당골·서여곡(西汝谷)
송내 증거리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서양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지평 윤씨가 살고 있다.

---- 방곡·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큰 못이 있으며 진송 이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담배 농사를 주로하며 양돈 단지를 소성하고 있다.

---- 명동·말우리·명리(鳴里)
옛날 商山에 있는 龍沼에서 龍馬가 탄생하여 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마동으로 행정동명이 되었다.

---- 북적골·부적골
부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렀다.

---- 진골
진성 이씨 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응점·독잠·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곳을 석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 세조때 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을 설치하고 석불을 두었는데서
두솔원이라 하였으며, 임진 왜란 때 왜병이 이 석불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여서 움직이지 못하여
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전설의 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못건대·목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건대라고 했다 한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약 150년 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다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하며, 두솔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성곡동(城谷洞)
---- 성곡·재일(在日)
마을 전체가 크고 작은 산이 성을 이룬 듯 하다고 하여서 송곡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재일은 張興孝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밑 긴 골짜기로 마을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서 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덕거리
在日, 독실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득실·독곡·독골·옹곡(瓮谷)
朴還素·朴海立 從兄弟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 들어와서 지형이 독같이 생겨
피난지로 적정하다 하여 마을을 개척하엿으며, 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작은독실
실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역시 작은 독같이 생겼고 큰 독에 비하여 작다고 하여 작은독실이라 하게 되었다.

---- 골·능곡(陵谷)
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잇고 길쭉하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張太師 묘를 쓴 뒤에 齋舍와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본파리·춘파(春坡)
약 400여년 전에 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春坡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 고사미·고삼
능골 아래쪽 춘파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은 새로 도로가 생겨 편리한 마을로 아래고삼과 웃고삼으로 나누고 있다.

---- 노리실·노루실
춘파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노리실·노루실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자래바우
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흡사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자라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 이개동(耳開洞)

---- 구여리·귀여리(耳開)
조선 燕山君 때 權次龍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아래의 龍沼에서 龍馬가 나와 이곳에 와서 귀가 열렸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변하여 귀여리 하였다.
지금은 耳開洞이라 한다.

---- 용우물(龍泉)
이 마을의 뒷산 商山 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商山에서 龍馬가 나서 귀여리에 와서 귀가 열리고 명리에 가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웃귀여리·웃마(上耳開)
이개동 중 위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며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와우실·와욱고(臥牛谷)
이개동 중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이개동과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이개리 최고 명당 자리 마을로서
내앞 의성 김씨 조상묘역 학운소와 추원소가 있다.
내앞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개동 집성촌 과 안동 권씨, 유씨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와 밭농사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구
보현의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구라 하게 되었으며,
이개동 의성김씨,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동의 입구여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랫골
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 이송천동(二松川洞)

---- 두서내·두시내·이송천
시내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동으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거느리·그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달구어 못속에 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곳에 살던 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칭골
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높은절
높은 지대인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높은 절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천동 중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잇으므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렸는데서 마을 이름이 아랫말이 되었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이 마을은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한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간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시체를 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기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 양지골·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동향이며 마을 후면은 병풍처럼 둘러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하여 양지골이라 하였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하(鳥羅)
북쪽 뒷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길게 뻗어 조리형으로 되어서 전쟁시 피난처가 되며,
고목 느티나무에는 참새들이 즐겁게 살았다 하여 조랏이라 한다.

---- 양지말
마을이 정남으로 위치해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둘러 있어 양지바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지 말이라 했다 한다.

---- 오매
주민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양돈, 양계를 많이 한다.

---- 황사벌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에서 붉은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모인다고 하여
주민들이 황사벌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자품동(者品洞)

---- 재품·자품
舊韓末 본 마을에 窮林公이란 분이 16세 때 과거에 登科하여 정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부락 및 고을에 알려져 당시부터
본 마을은 재골의 品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才品이라 하였으나,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才'字를 '者'字로 바꾸어 자품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광흥사(廣興寺) 본 사찰은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7년 화재로 여러 건물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명부전·화직전·칠성각·일주문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게동 은행나무에 견줄 만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벌리고 잇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로 했다 한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 하여 느릇이라 했다 한다.

---- 섭 ·창품(昌豊)
雲中浸月이라는 명지가 있어 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창하여 가자 창품이라고 일걷게 되었다 한다.

---- 구헤티 ·백현(白峴)
학사산 동족, 천등산 서쪽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족 옆산에 흰 운모석이 난다하여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학가산은 안동·영주·예천의 3角 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옛부터 鶴이 앉았다 가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 서남쪽에 팔공산,
북쪽에 소백산맥이 어련히 보이고 산 기슭마다 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산에는 군데 군데 石城의 흔적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愛蓮寺, 廣興寺가 있고
산마루에 있는 수십길 바위 사이에 있는 신효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풀길과 버섯들이 깔린 자연림을 이룬다.
봄이면 山木蓮이 은은한 이 향기를 내뿜고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 괴석 때문에
큰 짐승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 기슭에 나타날 분이다.
일찍이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아래에 지금은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가 설치되어
방송 중계 및 통신 관계에 주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능인굴(能人窟) 학가산 동편 마루턱 능선에서 앞쪽으로 비탈을 내려
약30m 기암절벽으로 날카롭게 속은 이름모를 봉우리 깎아지른 백길 절벽아래
남향으로 뚫린 삼각형 모양의 바윗굴이 있다.
이 굴의 크기는 열사람 쯤 들어 앉기도 빠듯할 만한 공간이다.
맨 안쪽 구석 바위틈의 샘물은 塵客이 찌들은 번뇌를 단 한 모금으로
후련히 씻어낼 만큼 향기로운 시원한 감로수다.
영가시대에는 신라 大德, 能仁大師가 세상 인연을
D고 이 굴에 피하여 숨으매 함께 義湘大師 앞에서 공부하던 1000여 명의 부석사 스님이
능인스님을 만나려고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가면서
돌 한덩어리씩을 가져다가 학가산 북쪽에 탑을 쌓아 石塔이라 했다.
이 굴은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편이나
산 둘레 주민들로 부터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잇어 삼복 더위에도
몇몇 아낙네들이 치성드릴 멥밥을 짓고 평은에 사는 젊은 내외는 이 굴에서
기도들여 아들을 얻어서 일년에 한 두차례씩은 찾아 오고 있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
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 저전동(苧田洞)

---- 모시밭·저전동
옛날 한양 조씨 후손이 이곳에 살면서 주위 일대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화재가 자주 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서 살줄을 묶고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상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우며 승부는 빼앗은 화상의 수로서 가린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 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 협조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일에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똥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나타내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래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동에서 구전되어온 묵 新行 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를 기다리고 잇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심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긴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 하늘 위에 베틀 놓고, 구름 위에 이에 걸고 ..... 등 10연으로 구성되었고,
두불논매기 노래는 원일레라,
원일레라 경상도라 안동땅에 ......등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잇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녁마·동녁(東域)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
이 저전동 음지마을이었는데, 이 음지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동녘마라 했다.

---- 음지마·음지(陰地)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인데,
남쪽에 놓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를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로 가는길 등의 세 갈래 길이 겹친 곳이어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도는 정외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는삼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소붓골·무지랑·반정리(半程里)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지랑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도장골
계곡이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 이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棲息해서 조라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태장동(台庄洞)

---- 옛태무지·고태장촌·태장촌·태장(台庄)
고려 共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태장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가라골·가을골·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김해 김씨의
秋谷派인 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고 불리다가 추곡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가라골 느티나무는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푸른 불이 일어나 끄면 다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 굿을 하였던 바,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 10년 慶發이라는 효자가 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義湘祖師가 修道寺 어느 봄날 天燈窟에서 내려다 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 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등산(天燈山)은 서후면 태장동의 뒷산으로 개월산이라고도 한다.
험한데라고는 하나없이
맑고 고운 토산으로 온 산에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 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지리에 밝았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 때문"이라하여,
산이름을 開月山이라 고치고, 이산 동쪽 머리에 있는 흥국사를 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산은 명산으로 여러 군데 고적 명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산 마루 바로 앞쪽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사가 수도햇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복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굴은 서후면 태장동 뒷산에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개목사가 있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잇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이굴에서 도를 닦는데 항상 하늘에서 등불을 드리웠다고 해서
천등이라 이름한다고 했고 굴 어귀에는 작은 암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능인대사가 좌선하던 판대기가 있다고 했다. ?지금 이 굴엔 암자도 坐禪板도 없고
다만 굴안에 향로와 한 쌍의 촛대 그리고 정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이 있을 뿐이다.
옛 名僧도를 깨달았다는 이 굴엔 지금도 아들을 얻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士女들이 끊이지 않는다.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내려와 산 언저리쯤에 자리한
이 바위굴은 어귀의 놓이 2.5m에 너비 약 4m, 깊이 약 4m 쯤 된다.

---- 웃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의 제일 위쪽에 잇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창, 상태장이라 한다.

---- 천등굴(天燈窟)
의상조사가 少年時 수도차 大望山 큰 바위 밑에서 風雨寒暑를 견디며
眞理 探究에 전념하기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밤에
한 미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天命之謂는 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미녀와의 대화까지 거부하니 더욱 등굴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의상은 끝까지 거부하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서광이 비치므로 사방을 살펴보니 바위 위에 큰 등이 나타나 백주와 같이 밝아졌다.
하늘에서 하강한 대등의 은택으로 도통하였다 하여
大望山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천등산 중턱에 큰 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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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공 조회 27 | 07.02.11 13:47 http://cafe.daum.net/peopleroot/Oc7/44
▶서후면 (西後面) 유래

서후면은 삼국시대에 辰韓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新羅에 고려시대에는
현 안동시의 옛 명소일 吉州에 속하였다.
원래 安東府의 서쪽에 있어 府庶棉이라 하였다가 肅宗때 서후면으로 되었다.
1924년 군면 폐합에 따라 西先面과 北後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의 支流인 豊山川이 풍산읍을 거쳐서 이곳으로 흐르고,
동쪽은 松夜川이 북으로 흐르로 있다.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삼림 지대가 많고 벼농사가 우세하며 그 외에 배·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 광평동(廣坪洞)
---- 너븐들·너븐돌·광평
본래 안동군 서후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30년 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에 큰 돌이 있어서 너븐들이라고 하는데
1976년 국도 포장시 이 돌을 깨어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하여 너븐들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가야리·추산동·내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평동이라 개칭하였다.

---- 가래실·추동·추산(楸山)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가래실이라고도 한다. ?
조선 선조때 鄭士信이란 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또, 고려시대 이 마을 뒷산의 큰 소나무에 매년 단오절마다 그네를 매고 즐겼다 하여 楸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고추가 특산물이며 24가구가 살고 있다.

---- 원당골·월당곡(院堂谷)
추산에서 북동간 1㎞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옛날 院堂寺라는 절이 있어
원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인가도 없다.

---- 성주골
추산에서 북동간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며
170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무당이 성주굿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은 인가가 없고 농토로 변하였다.

---- 개실·가야(佳野)
너븐들 서쪽 골짜기 개목산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安東府使 孟思誠이
이곳을 지날 때 들을 보고 '아름다운 들이구나'하고 크게 감탄하여 가야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개실이라고도 한다. ?

---- 연등골·연등곡(蓮登谷)
담배와 고추를 주로 생산하며 마을을 이은 뒷산의 형국이 연꽃줄기같이 길게
이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안골·내동(內洞)
1700년 경부터 眞城 李氏가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마을 앞이 거의 과수원으로 되었다.
마을이 골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 점마·응기점·토점(土店)
1800년 경부터 이곳에 옹기를 굽는 굴을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이라 하여
점마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은 약초 재배와 밭농사를 주로하며,
옹기굴은 없어졌으나 마을의 어느 곳을 파보아도 붉은 흙과 옹기 조각이 나온다.

---- 긴밭·진산이·장묘
6.25 동란 이전에는 이곳에 사래가 긴 밭이 있는 들판이었는데 그 후 차차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사래가 긴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진살이라고 부른다.

▷ 교동(校洞)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조선 成宗 晋州 河氏가 선산으로 옮겨갈 때 하씨 한 사람이 단종의 復歸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외가에서 피신하며 살았는데 안동 권씨 司正公이 그 사람을 사위로 삼게 되어
이곳에 살았다고 하며 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촌은 본래 가옥이 없었는데 산 밑 들가운데에 터를 잡으니 평지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평촌이라 부른다.

---- 한석골·대석동(大石洞)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어 한석골이라 하였다 한다.
벼락바위는 巳頭재에서 한 석수장이가 돌을 깨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여 그 자리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며 근처에 무덤이 있다.

---- 시무골·시묘곡(侍墓谷)
안동인 權緯紀란 사람이 參奉寺 母喪을 당하여 묘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여 불려오는 명칭이다.

---- 구름장골·운곡(雲谷)
선비 안동 권씨가 여기에 서당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수학을 시키게 되자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이골을 구름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 향교골·행겟골·향교동(鄕校洞)·교동(校洞)
고려 복주 때 향교가 있었으므로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동 또는 교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 금계동(金溪洞)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500년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였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하여 금지라 불렀다.?

---- 을막·을막골
사망 서쪽에 잇는 마을이다.
김씨가 주로 살고 서후면 사무소 북동쪽에 있으며 지금은 사과나무를 식재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召福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렸다 한다.
단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 소복당(召複堂)
소복산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과 칠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 종가에 모여서 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 문중에서 1 사람, 타성에서 1 사람, 色掌 1 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게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동안 흉사에는 아니 가는 것이 특례로 되어, 7월 백중날에도 고사를 지낸다.

---- 사망(仕望)
조선시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매번 낙방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 선비가 벼슬하는 것이 소망이어서 불려온 이름이다.
지금은 사과나무를 많이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알실·지곡(知谷)
400년 전에 이곳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앞 일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고, 학문을 깊이하여 세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서 붙인 명칭이다. 또 알처럼 생긴 외딴 섬이 있어 유래햇다고도 산다.

---- 미리미·미산(未山)
金下里 입구에 세 집이 살고 잇었고 위에는 금상리라 하여 몇 집이 살았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탕건과 눈섭 같다고 未山이라 하였고, 지형이 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배사골·작장골
옛날에 벼슬을 한 사람이 죽어서 묘를 쓴 곳이라 배사골이라 하였고, 백만장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효자문 건너에 있다.

---- 만운(晩雲)·마릉(馬陵)·효자문(孝子門)
골 남족에 있는 마을로 효자 門이 있어 효자문이라 하였다.
지금은 邊氏가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논농사를 많이 하며 집 주위에는 과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 텃골·동무지·기곡(基谷)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잇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등무지라 하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여서 사과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대두서동(大豆西洞)
---- 한도솔·한두실·대두실·대두서
신라 때 큰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이라 하였으나 한두실, 대두서동으로 개칭되었다.

---- 풀밭밑·초전(草田)
약200년 전에 이곳이 황무지여서 풀숲이 우거져 논밭으로 개간하기 어려워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오동지이·가음실·오동정(梧桐亭)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 나무에서 기이한 새가 여러 해동안 아름다운 소리로
울음을 계속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김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 잿마
한두실의 북쪽으로 연결된 마을로서 한두실로 통하는 재(고개) 밑에 있어서 잿마라 칭하며, 한우 등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있다.

---- 구억마·구석마을·윗마을
한두실 북동쪽 1㎞ 떨어진 구석진 곳에 있어 구석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칭하며
약 100여년 전부터 개척되어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 명동(鳴洞)
---- 송내(松內)·징걸·증거리(增巨里)
말우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300여년전에 松林이 우거져 있어 송재라 하였고,
지금은 징거리라 한다. ?벼농사를 주로 한다.

---- 쑤능골·수능곡(水陵谷)
진골 동쪽 산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곳의 논 3000여 평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쑤능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경주 이씨들이 살고 있다.

---- 검박골·예배당골·서여곡(西汝谷)
송내 증거리 서편에 자리잡은 골이라 하여 서여곡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서양인이 이곳에 정착하여 예당을 지었다하여 예배당골이라 한다.
지금 지평 윤씨가 살고 있다.

---- 방곡·방앗골·방곡(方谷)
송내 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에 큰 바위가 많아서 방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마을 입구에
큰 못이 있으며 진송 이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담배 농사를 주로하며 양돈 단지를 소성하고 있다.

---- 명동·말우리·명리(鳴里)
옛날 商山에 있는 龍沼에서 龍馬가 탄생하여 耳開洞에서 귀를 열고 이곳에 와서 말이 울었다 하여
말우리 또는 마명동이라 했으나 지금은 마동으로 행정동명이 되었다.

---- 북적골·부적골
부리골 북쪽에 있으며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북적골 또는 부적골이라 부렀다.

---- 진골
진성 이씨 松安君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궁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응점·독잠·독점(獨店)·석잠(石岑)
옛날 이곳을 석잠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외딴 곳에 주점이 있었다 하여 독점이라 칭하여 왔다.
또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도 하며 마평동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두실원·두솔원(兜率院)
조선 세조때 官員이나 선비들이 왕래하다가 日暮가 되면 숙식하도록 두솔원을 설치하고 석불을 두었는데서
두솔원이라 하였으며, 임진 왜란 때 왜병이 이 석불을 통과할 때 말발굽이 붙여서 움직이지 못하여
鳥嶺을 빨리 넘지 못하였다는 전설의 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못건대·목곤대
지금 있는 못 위에 작은 연못이 옛날부터 있었는데 이 못 부근의 마을이라 하여 못건대라고 했다 한다.

---- 금당고개·옹기마(瓮器里)
약 150년 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었다 하여 붙인 명칭이라 하며, 두솔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 성곡동(城谷洞)
---- 성곡·재일(在日)
마을 전체가 크고 작은 산이 성을 이룬 듯 하다고 하여서 송곡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재일은 張興孝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밑 긴 골짜기로 마을 앞산이 낮아 일조량이 많아서 재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덕거리
在日, 독실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春坡와도 떨어져 있어서 덕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 득실·독곡·독골·옹곡(瓮谷)
朴還素·朴海立 從兄弟가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 들어와서 지형이 독같이 생겨
피난지로 적정하다 하여 마을을 개척하엿으며, 독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작은독실
실의 큰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역시 작은 독같이 생겼고 큰 독에 비하여 작다고 하여 작은독실이라 하게 되었다.

---- 골·능곡(陵谷)
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잇고 길쭉하다. 마을 뒷산에 안동 권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太師 묘가 있다하여 능골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張太師 묘를 쓴 뒤에 齋舍와 새로이 마을이 생겼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아담한 새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 본파리·춘파(春坡)
약 400여년 전에 金麟燦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春坡라 칭하였으며 지금의 본 면 중심지 일대를 말한다.

---- 고사미·고삼
능골 아래쪽 춘파 북쪽에 위치하여 북서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은 새로 도로가 생겨 편리한 마을로 아래고삼과 웃고삼으로 나누고 있다.

---- 노리실·노루실
춘파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노리실·노루실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자래바우
마을의 남쪽을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흡사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자라바우라 부르게 되었다.


▷ 이개동(耳開洞)

---- 구여리·귀여리(耳開)
조선 燕山君 때 權次龍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商山 아래의 龍沼에서 龍馬가 나와 이곳에 와서 귀가 열렸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변하여 귀여리 하였다.
지금은 耳開洞이라 한다.

---- 용우물(龍泉)
이 마을의 뒷산 商山 上峰 아래에 있는 우물로 전에는 명주실 1꾸리가 다 풀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商山에서 龍馬가 나서 귀여리에 와서 귀가 열리고 명리에 가서 울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웃귀여리·웃마(上耳開)
이개동 중 위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만 산이 없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며 안동 권씨가 살고 있다.

---- 와우실·와욱고(臥牛谷)
이개동 중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 큰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어서 와우실이라 한다.

---- 보연(普淵)·보현(普峴)
이개동의 입구에 있는 마을로 동쪽이 틔이고 서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마을 입구에 연못이 있어 이 못을 주민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보현이라 칭하였다.

---- 관두둘·관두평(寬斗坪)
이개동과 보현 사이에 있는 평평한 들을 끼고 있는 이개리 최고 명당 자리 마을로서
내앞 의성 김씨 조상묘역 학운소와 추원소가 있다.
내앞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개동 집성촌 과 안동 권씨, 유씨가 살고 있으며 논농사와 밭농사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구
보현의 아래 입구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구라 하게 되었으며,
이개동 의성김씨, 경주 이씨와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이개동의 입구여서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도랫골
하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떨어져 있기에 도랫골이라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약초와 사과로써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 망두골
도랫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둘러 싸여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안동 권씨가 살고 있으며, 주로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다.

▷ 이송천동(二松川洞)

---- 두서내·두시내·이송천
시내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동으로 되었다.

---- 까치개·작포(鵲浦)
마을 한 가운데는 200년 이상 묵은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으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까치개라 부른다.

---- 거느리·그느리·거나리·거진(巨津)?
이 마을에 깊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龍이 있다하여 주민들이 바위와 돌을 달구어 못속에 넣었더니
용이 비를 내려 못의 흔적을 없앴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곳에 살던 辛氏들이
건너편 마을로 건너가 살았다 하여 거느리라고 했다 한다.

---- 대장골·대장곡(大將谷)
이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었으며 동민들이 이 바위를 대장바위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대장골로 되었다 한다.

---- 도칭골
옛날 석수장이들이 돌을 치는 곳이라고 하여 도청골, 또는 도칭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높은절
높은 지대인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높은 절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절이 없다.

---- 아랫말·아랫마
이 마을은 이천동 중에서 아래쪽에 위치해 잇으므로 동민들이 아랫말이라 불렸는데서 마을 이름이 아랫말이 되었다.

---- 미라골·미라곡(美羅谷)
이 마을은 옛날 한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인가를 찾던 나그네는 불빛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그 곳으로 옮겼다.
한 초가집이 있어 주인을 찾으니 어여쁜 처녀가 나왔다.
그러나,
처녀는 혼자 사는 집이고,
방도 한 간 뿐이니 다른 데로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다른 집도 없으며 밤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사람 좀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처녀는 나그네의 사정이 딱함을 생각하며 우선 들어와 요기라도 좀 하도록 했다.
들어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처녀와 마주하자 첫눈에 그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나그네는 처녀에게 혼인할 것을 간청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승낙을 했다.
다음날 나그네는 100일 뒤에 다시 돌아와 혼인식을 올릴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러나 나그네가 떠난 뒤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1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소식조차 없었다.
처녀는 매일같이 선비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식음을 잊고 기도에만 전념하던 여인은 지쳐 쓰러졌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마침 과거에 급제한 나그네는 시체를 안고 회한과 슬픔으로 며칠을 울다가 죽고 말았다.
이들 시체는 세월이 흘러 바위로 화하였다 하며 기금도
삿갓바위란 이름의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처녀가 죽을 무렵 한 아들을 낳았다 하며,
그 아들이 자라서 애틋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의 넋을 위로하면서
근처 양지바른 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사는 갸륵한 마을이라 해서 미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 양지골·양지곡(陽地谷)
이 마을은 동향이며 마을 후면은 병풍처럼 둘러 바람이 없고 따뜻한 마을이라하여 양지골이라 하였다.

---- 우물골·웅곡
마을 한가운데 아무리 심한 한발에도 항상 일정량의 샘물이 솟아 나는 샘이 있어 웅골이라 칭하고 있었다.

---- 조랏·조하(鳥羅)
북쪽 뒷산이 높고 동쪽과 서쪽이 길게 뻗어 조리형으로 되어서 전쟁시 피난처가 되며,
고목 느티나무에는 참새들이 즐겁게 살았다 하여 조랏이라 한다.

---- 양지말
마을이 정남으로 위치해 있고 뒤에는 낮은 산이 둘러 있어 양지바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지 말이라 했다 한다.

---- 오매
주민의 대부분이 김씨이며 양돈, 양계를 많이 한다.

---- 황사벌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에서 붉은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모인다고 하여
주민들이 황사벌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 자품동(者品洞)

---- 재품·자품
舊韓末 본 마을에 窮林公이란 분이 16세 때 과거에 登科하여 정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부락 및 고을에 알려져 당시부터
본 마을은 재골의 品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才品이라 하였으나,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才'字를 '者'字로 바꾸어 자품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광흥사(廣興寺) 본 사찰은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자품동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거찰로서 전해오다가 1947년 화재로 여러 건물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명부전·화직전·칠성각·일주문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은행나무는 길안면 용게동 은행나무에 견줄 만하다. 광흥사는 학가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으로 보이는데
이 절의 위치는 학이 날개를 공중으로 솟아 오르려는 순간처럼 넓게 벌리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벌리고 잇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로 했다 한다.

---- 느릇·천주(天柱)
자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근에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 하여 느릇이라 했다 한다.

---- 섭 ·창품(昌豊)
雲中浸月이라는 명지가 있어 月來라고 칭하다가 이 마을이 점차 번창하여 가자 창품이라고 일걷게 되었다 한다.

---- 구헤티 ·백현(白峴)
학사산 동족, 천등산 서쪽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족 옆산에 흰 운모석이 난다하여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학가산은 안동·영주·예천의 3角 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은
옛부터 鶴이 앉았다 가는 형상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해발 882m의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에 일월산 서남쪽에 팔공산,
북쪽에 소백산맥이 어련히 보이고 산 기슭마다 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산에는 군데 군데 石城의 흔적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愛蓮寺, 廣興寺가 있고
산마루에 있는 수십길 바위 사이에 있는 신효한 약수가 흘러 나오고 소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풀길과 버섯들이 깔린 자연림을 이룬다.
봄이면 山木蓮이 은은한 이 향기를 내뿜고 골짜기가 깊지 않고 기암 괴석 때문에
큰 짐승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이 산 기슭에 나타날 분이다.
일찍이 통신 수단이었던 봉수대 아래에 지금은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가 설치되어
방송 중계 및 통신 관계에 주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능인굴(能人窟) 학가산 동편 마루턱 능선에서 앞쪽으로 비탈을 내려
약30m 기암절벽으로 날카롭게 속은 이름모를 봉우리 깎아지른 백길 절벽아래
남향으로 뚫린 삼각형 모양의 바윗굴이 있다.
이 굴의 크기는 열사람 쯤 들어 앉기도 빠듯할 만한 공간이다.
맨 안쪽 구석 바위틈의 샘물은 塵客이 찌들은 번뇌를 단 한 모금으로
후련히 씻어낼 만큼 향기로운 시원한 감로수다.
영가시대에는 신라 大德, 能仁大師가 세상 인연을
D고 이 굴에 피하여 숨으매 함께 義湘大師 앞에서 공부하던 1000여 명의 부석사 스님이
능인스님을 만나려고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가면서
돌 한덩어리씩을 가져다가 학가산 북쪽에 탑을 쌓아 石塔이라 했다.
이 굴은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편이나
산 둘레 주민들로 부터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잇어 삼복 더위에도
몇몇 아낙네들이 치성드릴 멥밥을 짓고 평은에 사는 젊은 내외는 이 굴에서
기도들여 아들을 얻어서 일년에 한 두차례씩은 찾아 오고 있다.

---- 샛말·헤티·중백현(中白峴)·간리(間里)
자품과 백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간리라고 부르며 백현 남쪽 1㎞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 저전동(苧田洞)

---- 모시밭·저전동
옛날 한양 조씨 후손이 이곳에 살면서 주위 일대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저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학가산의 산정이 풍수가 나빠
화재가 자주 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매년 단오절날 밤, 저전동이 서부가 되고, 타 마을이 동부가 되어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썩은 뿌리를 캐어 말려서 살줄을 묶고 뿌리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며
상대방의 상줄을 휘감아 빼앗은 일종의 횃불싸움이다.
화상을 빼앗기면, 도망가고 빼앗은 사람은 계속 싸우며 승부는 빼앗은 화상의 수로서 가린다.
이때 지휘자는 자기 편이 싸우는데 유리하도록 방향을 알려주며 온 마을이 적극 협조 응원한다.
싸움이 끝나면 해산했다가 다음날 다시 모여 부상자를 위로하기도 하며
싸움 도중의 일에 사과하며 즐긴다.
이 놀이는 불꽃똥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과감성과 모험심을 나타내는 놀이로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소속감을 협동심으로 이끌도록 하는 놀이이다.

---- 저전논메기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이 농경생활에서 전해온 독특한 전승민요로서
오래 전부터 안동시 서후면 저전동에서 구전되어온 묵 新行 中인
신부가 베를 짜며 신행일자를 기다리고 잇던 중 남편의 부음을 받고 시댁으로 달려간 색시는
남편의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며 자심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한 내용이다.
논매기 노래의 후렴은 예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예천보다 변화음이 적다.
가창 방식은 어떤 노래이던 간에 처음에는 사설조로 길게 메긴 다음 후반에 가서
자진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노래는 애벌논매기 노래 ; 하늘 위에 베틀 놓고, 구름 위에 이에 걸고 ..... 등 10연으로 구성되었고,
두불논매기 노래는 원일레라,
원일레라 경상도라 안동땅에 ......등 2연으로 구성되었다.

---- 양지마·양지(陽地)
동네의 지형이 삼태기 모양으로 되어 잇고 정면이 정남향이어서 일년 내내 온화하고 아늑하여서
양지마을이라 부르며 30여 가구가 지금도 베틀로 삼베를 많이 짜고 있다.

---- 동녁마·동녁(東域)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
이 저전동 음지마을이었는데, 이 음지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동녘마라 했다.

---- 음지마·음지(陰地)
趙光祖 亂이 일어난 후 한양 조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 정착한 곳인데,
남쪽에 놓은 산이 있어서 일년 내내 산그늘이 많이 든다고 하여 음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삼거리(三距里)
예고개를 넘어서 영주를 가는 길과 벌고개를 넘어서 제비원으로 가는 길,
봉정사로 가는길 등의 세 갈래 길이 겹친 곳이어서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삼베 짜는 공장이 있어 안동의 명산물인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 거릿마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사는 모시밭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이 마을은 동네 어귀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를 드나드는 거리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거릿마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정외(亭外)
옛날 거릿마 인근 산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에서 떨어진 지역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 도는 정외라고 하게 되었다. 현재는삼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소붓골·무지랑·반정리(半程里)
옛날 임금님의 행차가 이 곳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쉴 때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하며,
어떠한 가뭄에도 풀이 마르지 않고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흘러내려 무지랑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도장골
계곡이 생긴 모양이 위가 동그랗고 중간이 길쭉하며 아래가 넓은 모양이어서 꼭 도장과 같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하였다.

---- 조랏·조라(鳥羅)
월성 이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였으며 모시밭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많이 棲息해서 조라라 하였다고 한다.

---- 벌고개·버리고개·보리고개·맥현(麥峴)
산 모양이 마치 벌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과 같아서 벌고개라고 하며,
옛날에는 이곳에 보리를 재배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 태장동(台庄洞)

---- 옛태무지·고태장촌·태장촌·태장(台庄)
고려 共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시 태장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다.

---- 중마·중태장(中台庄)
태장의 중간부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중마·중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아랫태장·하태장(下台庄)
이 마을은 태장의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랫태장·하태장이라 불리고 있다.

---- 가라골·가을골·추곡(秋谷)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김해 김씨의
秋谷派인 金順貴란 선비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가을골이라고 불리다가 추곡
또는 가라골이라 하게 되었다.
가라골 느티나무는 가라골에 있는 둘레가 네 아름 정도의 큰 느티나무인데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뿌리를 좀 잘랐더니
별안간 푸른 불이 일어나 끄면 다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느티나무 앞에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껏 큰 굿을 하였던 바, 그 후부터는 이 불안스러운 불이 없어져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한골·화언(花堰)·화원(花原)
고려 공민왕 10년 慶發이라는 효자가 花原池라는 못에 고기를 길러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를 하였다 하여 芳原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義湘祖師가 修道寺 어느 봄날 天燈窟에서 내려다 보니 봉정사 맞은편 산들이
모두 진달래 꽃으로 덮여 있어
꽃의 언덕이란 뜻에서 화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등산(天燈山)은 서후면 태장동의 뒷산으로 개월산이라고도 한다.
험한데라고는 하나없이
맑고 고운 토산으로 온 산에 솔숲이 울창하고,
해발 576m의 나지막한 산이나 뒤로 백리 앞으로 2, 3백리를 무릎 아래 깔고 있다.
지리에 밝았고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 때문"이라하여,
산이름을 開月山이라 고치고, 이산 동쪽 머리에 있는 흥국사를 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과연 그 후로부터 소경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산은 명산으로 여러 군데 고적 명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산 마루 바로 앞쪽엔 의상 조사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능인대사가 수도햇다는 천등굴이 있고
동쪽엔 신라 고찰인 개복사가 있으며 남쪽엔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이 있고
그 조금 아래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가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도 있다.
천등굴은 서후면 태장동 뒷산에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개목사가 있다.
절 뒷산에는 거무스름한 바위가
산정을 누르고 앉아 잇는데 그 바위 밑에 천등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다.
능인대사가 이굴에서 도를 닦는데 항상 하늘에서 등불을 드리웠다고 해서
천등이라 이름한다고 했고 굴 어귀에는 작은 암자가 있으며
그 안에는 능인대사가 좌선하던 판대기가 있다고 했다. ?지금 이 굴엔 암자도 坐禪板도 없고
다만 굴안에 향로와 한 쌍의 촛대 그리고 정수 그릇이 놓인 작은 상이 있을 뿐이다.
옛 名僧도를 깨달았다는 이 굴엔 지금도 아들을 얻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士女들이 끊이지 않는다.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내려와 산 언저리쯤에 자리한
이 바위굴은 어귀의 놓이 2.5m에 너비 약 4m, 깊이 약 4m 쯤 된다.

---- 웃태장·상태장(上台庄)
고려 공민왕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태무지 고태장촌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태장이라 개칭하였는데 태장동의 제일 위쪽에 잇는 마을이라하여
웃태창, 상태장이라 한다.

---- 천등굴(天燈窟)
의상조사가 少年時 수도차 大望山 큰 바위 밑에서 風雨寒暑를 견디며
眞理 探究에 전념하기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밤에
한 미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소녀는 천국 상제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강림하였는데
貴郞의 벗이 되고자 하오니,
원컨대 동굴함이 어떠하오'하니 의상은 대로하여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안위를 원하는 자가 아니고, 또 天命之謂는 不當之事니 즉시 귀가하라'하고
미녀와의 대화까지 거부하니 더욱 등굴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의상은 끝까지 거부하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서광이 비치므로 사방을 살펴보니 바위 위에 큰 등이 나타나 백주와 같이 밝아졌다.
하늘에서 하강한 대등의 은택으로 도통하였다 하여
大望山을 천등산이라 개칭하고
그 큰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천등산 중턱에 큰 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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