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단종실록]
1. 비운의 왕자 홍위
제 6대 단종端宗 1441~1457(1452~1455 재위)
: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장남
1. 휘 : 이홍위(李弘暐)
2. 별칭 : 원손(元孫) → 왕세손(王世孫) → 왕세자(王世子) → 왕(王) → 상왕(上王) → 노산군(魯山君)
3. 시호 : 노산대군(魯山大君) →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4. 능호 : 장릉(莊陵)
문종은 병약하여 많은 후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세자빈 권씨마저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를 나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홍위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현덕왕후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 왕자를 분만하게 되었는데,
난산이라 간신히 아이를 낳긴 했지만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였다. 태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어머니를 여윈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 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그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은 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바로 혈기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왕은 어린 세손이
그들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조선 제5대 왕으로 등극한 문종은 세종이 예상한 것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즉위 2년
3개월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홍위의 나이 12세었다.
2. 어린 단종의 즉위와 왕위를 찬탈하는 왕숙
(1441-1457, 재위 기간 1452년 5월-1445 윤6월, 3년 2개월)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스무 살 이하인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좁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도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왕비도 없었다.
단종의 모후 권씨가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의 후궁으로도 귀인 홍씨, 사즉 양씨 두
사람뿐이었다. 비록 세종의 후궁 중에 혜빈 양씨가 있기는 하였지만 늦게 입궁한데다
후궁인 탓으로 정치적인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사를 돕는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따라서 단종은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즉위한 것이었다.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인사
문제에서도 대신들은 황표정사 제도를 썼는데, 이는 조정에서 지명된 일부 신하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이른바 고명대신들인 황보 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등의
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 인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 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계유정난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났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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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
(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