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의 끈
개암 김동출
아내와의 결혼은 전쟁의 비극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지금부터 70년 전인 1950년 여름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8월. 낙동강 전투 최후 방어선이었던 창녕군 ‘남지’는 처가의 고향이었다. 당시 처가는 일제강점기 때 신혼 초의 장인이 노동잡역부로 강제 징집되어 일본 오사카에서 10여 간 죽을 고생만 하시다 해방이 되자 이부자리 보따리만 들고 빈털터리의 처량한 귀국 동포로 고향 땅에 되돌아왔다. 고향 땅에서 겨우 정을 붙이기 시작할 때쯤 찾아온 낙동강변의 고향은 포탄이 하늘을 나는 전쟁터로 돌변하여 다시 반봇짐을 싸서 피날 길에 나서게 되었다. 처가 식구는 어쩔 수 없이 험한 자갈길을 걸어 밀양을 거쳐 부산항에서 유엔군이 내어준 피난민 수송 군함을 타고 닿은 곳이 내 고향 거제도 옥포였다. 다행히도 처가 여섯 식구는 갯가 마을에 살던 경주 崔 씨 종씨를 만나 그 집 아래채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처가의 숨겨진 슬픈 사연이 20년 후, 대학 선배 사모님의 소개로 도청 공무원이었던 아내와 결혼하게 된 결정적인 인연의 끈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골 학교 촌뜨기 교사가 첫눈에 반할 정도의 우월한 미모의 아내를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부산 뱃머리 인근의 다방에서 처음 만나고 온 다음 날부터 하루가 멀다고 연서를 보낸 지 2달 후에 애타게 기다린 아내의 편지 한 장을 받고 마침내 청혼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 필자는 그 주일의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뱃길로 부산에 가서 아내를 만나 청혼하였다. 요즘 시대로 말하면 카페였던 부산 서구 충무동 뱃머리 인근 다방에서 퇴근길의 아내를 만나 미리 준비해간 ‘칼 힐(Carl Hilty)의 행복론’ 한 권을 청혼 선물로 수줍어하는 아내에게 건네며 행복을 바라는 내 마음을 에둘러 전했다.
아내는 머뭇거리는 나를 이끌고 택시를 타고 처가의 집 앞에서 내렸다. 필자는 장인께 드릴 선물로 ‘대선소주’ 댓 병을 사 들고 아내와 같이 처가에 가서 너른 거실 소파에 앉아계신 장인어른 앞에 엎드려 넙죽 절한 후 소주 한 컵 따라 올린 후 물러나 앉았다. 할아버지 같은 장인께서는 당신의 손주 보듯 인자하신 눈길로 이미 내 고향을 알고 부둣가교회 앞에 사는 최 아무개 씨를 아느냐고 하셨다. 그분은 당시의 처가 식구가 그곳에서 피난 생활할 때 당신 가족의 은인이었다고 그분의 안부를 물으시며 장차 당신의 막내 사위가 될 나를 흡족해하셨던 기억이 떠올라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화자는 일요일 이른 오후 충무동 부산 뱃머리에서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임지로 내려 온 그날부터 다시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보냈다. 비록 지금 나의 처지는 초등교사로 경력이 짧은 풋내기 젊은이지만 젊기에 희망도 크고, 그 희망은 당신과 함께 가능하면 일찍 결혼하여 때가 되면 섬을 벗어나 너른 도시에 정착하여 인근지역의 대학에 편입학하여 2년제 교육대학의 모자라는 학령을 채우면서 중학교 국어 교사의 꿈도 품어보고 싶다는 뜻을 편지로 전했다. 이러한 나의 뜻이 가족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었다. 할아버지 같으셨던 인자하신 장인 어르신은 곧 당신의 막내 사위가 될 저를 손자처럼 귀엽게 여겨 아내의 머뭇거리는 마음을 다잡아 주셨다. 물론 거기에는 6.25 전쟁 때 자신의 식솔을 이끌고 내 고향 마을 바닷가에서 피난살이 했을 때 도움을 준 내 고향 사람들이 베풀어 준 고마움 마음도 한몫했으리라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서로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이 열매 맺을 즈음 그해 8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장인, 장모 어르신의 허락을 받아 보잘것없는 시골 초등교사의 신붓감으로 모자람이 없는 세련된 도시풍의 아내를 숲속에 둘러싸인 나의 생가로 안내하였다. 그때 할아버지께서는 병석에 계셨기에 손자 손잡고 우리 집 큰 어르신께 인사 온 예비 손자며느리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평생 거제도 밖을 나가 보신 적이 없이
산골짜기에서 농부로 일생을 보내신 할아버지께서는 아내가 따라 드린 콜라 한 잔 마시고, 그 이틀 후에 영면하셨기에 우리의 인연이 전혀 예사롭지 않음은 어질게 살아오신 양가 어르신의 후덕한 음덕이 아닌가? 가끔 생각해 보면서 할아버지와 장인 어르신의 인자하셨던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숲속에 둘러싸인 생가에서 신혼을 시작하였으나 본가와 나의 근무지가 10Km 넘는 먼 거리여서 두 번째 임지였던 학교로 전근할 때까지 아내와 나는 주말 부부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일 년간 근무하고 늦기 전에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봉고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거제 대교를 건넌지 2021년 올해로 딱 40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북 창녕의 면 소재지 학교에서 대구로 오르내리며 못다 한 배움의 꿈도 이루고, 그 사이 살림 밑천이 된 남매도 보아 안정된 가정을 이루게 되었지만, 타관 생활에 지친 아내의 바람대로 마산으로 내려와 여러 번의 이사 끝에 지금의 보금자리에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돌아보면 아득히 먼 가시밭길의 세월, 이 모두가 조상의 은덕을 겸허히 받기 위한 시련의 과정이었으리라. 오늘도 새들 떠난 둥지에 남은 우리 부부의 희망은 오로지 건강하게 사는 것뿐.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산다.
2021.3.24.
첫댓글 오늘은 아내의 생일입니다.
2021년 3월에 써 신문예에 게재했던 수필을 꺼내봅니다. 개암
와아~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내분의 생일을 감축하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