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릉(禧陵) 11대 중종(中宗)의 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희릉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단릉이다.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조성하였다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희릉은 예릉, 효릉과 함께 서삼릉으로 불리운다.
서삼릉에는 이들 왕릉 3곳 외에도 3원과 46묘, 태실 54기가 있어 매우 복잡하다.
ㅇ 서삼릉(西三陵)
서삼릉(사적 제 200호,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에는 왕릉 3곳 외에 3원과 46묘, 태실 54기가 있다.
왕릉은 중종의 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장경왕후 소생의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 그리고 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 있다. 희릉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고 헌릉 옆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중종의 정릉이 한때 이곳 희릉에 함께 있다가 선정능의 정릉으로 옮겨가니 희릉은 단릉으로 남게 되었다.
3원(園)중 소경원은 소현세자, 의녕원은 의소세손, 효창원은 문효세자의 무덤이다.
46기 묘(墓)는 성종의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회묘와 소현세자 장남 경선군묘를 제외하고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묘와 조선 말기까지 역대 후궁을 비롯하여 대군, 군, 공주, 옹주 등의 왕실 묘가 조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에는 전국 각지에 있던 태조부터 순조까지 임금 21위와 대군, 세자, 공주 32위 등 모두 53위의 태실을 이곳에 모아 놓았다.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을 만들 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을 집중관리 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삼릉 영역에 후궁, 왕자, 태실을 모아놓은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며, 또한 조선의 민족정기를 훼손할 목적으로 일(日)자형 담장을 두르고, 신사참배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공원화했었다. 담장은 1996년 철거되었다.
현재 인종의 효릉은 축협 관리구역내에 있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서삼릉.... 희릉과 예릉만 볼수 있고 효릉은 조금 떨어진 축협관리구역내에 있어 비공개지역이다.
그밖에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의 회묘와 후궁, 왕자/공주들의 묘, 각종 태실들이 복잡하게 모여 있는 구역이 밖에 있다.
서삼릉 안에는 의령원과 효창원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소경원이 있는등 매우 복잡한 곳이다.
돌아보는 순서는 일단 서삼릉 경내로 들어가 희릉 - 예릉 - 의령원/효창원, 그리고 조금 떨어진 소경원을 보고
완전히 밖으로 나와 다른곳으로 이동해서 효릉을 본후 공동묘지처럼 모아놓은 태실과 왕자, 공주, 후궁들의 묘를 지나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의 회묘 순으로 돌아보았는데 출입허가와 안내를 받아야하며 소요시간도 꽤 많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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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일대를 헐어내어 88올림픽때 마술(馬術)경기장으로 쓰인후 지금은 종마목장으로 쓰이면서 왕릉입구가 옹색하다.
사방으로 목책이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이 일대는 아베크족들의 산책이나 사진, 영화촬영등에 적합할지는 모르나 왕릉으로서의 보존은 불합격이다.>
서삼릉을 포위하듯 에워 싼 목책들.... 대관령 어디쯤인듯하지만 바로 서삼릉 정문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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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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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중종의 1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정비 단경왕후 신씨가 7일만에 왕비에서 쫓겨나자 그 뒤로 왕비에 올라 8년간 있다가 25세에 세자(인종)을 낳고는 7일만에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다.
장경왕후가 죽자 (국상을 당해도 왕은 흰 상복을 입지 않는데) 중종은 특별히 흰 상복을 입고 애통해하였으며 장경왕후릉 옆에 자신의 수릉지를 정하고 쌍릉으로 조성될것을 원하여 헌릉(3대 태종)이 있는 대모산 아래 왕비릉을 조성하고 희릉이라 했다.
ㅇ 희릉 천장사건
그런데 중종의 사돈인 이조판서 김안로(효혜공주가 며느리)가 권력을 남용하다 유배 당한 후 복귀하여 정적들을 제거하려고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옥사를 일으키는데 그중 하나가 희릉 천장사건이다.
김안로는 정적인 정광필, 남곤등에게 중죄를 주려고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는데 그대로 공사를 감행했다고 주장하면서 공사당시 총호사였던 정광필과 지관, 공사를 담당했던 관리들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결국 신분을 박탈하고 자손까지 처벌하였다.
이렇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희릉은 대모산자락에 조성된지 22년후인 1537년(중종 32) 현재 위치인 서삼릉으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경빈 박씨와 소생 복성군을 '작서의 변'을 일으켜 쫓아내고 사사한 사건등이 모두 김안로가 꾸며낸 일들이었다.
작서(灼鼠)의 변(變)
중종의 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왕의 총애를 받은 경빈(敬嬪) 박씨는 자기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1527년 2월 세자(인종)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 등은 이것을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경빈의 짓이라 하여, 경빈과 복성군의 작호(爵號)를 빼앗아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다가 1533년에는 모자(母子)를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1541년에 이 사건을 조작한 자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라는 것이 밝혀져,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ㅇ 둘이 있다 홀로 남은 왕비 릉
중종이 1544년 11월 15일 창경궁에서 보령 57세로 승하하자 유교(遺敎)에 따라 이듬해 2월 3일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편에 안장하고 정자각을 양릉 중간으로 옮겨 설치하여 동원이강 형식을 취한 후 두 개의 능을 '희릉'으로 부르다가 한 달 뒤 왕비 문패 아래 왕이 있을 수는 없다 하여 능호를 '정릉(靖陵)'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계비와 나란히 묻혀 있는 꼴을 보지못한 2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1562년 중종은 강남 삼성동 선정릉의 정릉으로 옮겨가니 결국 17년만에 장경왕후의 능만 홀로 남아 다시 '희릉'으로 불리게 된다. 참으로 복잡한 역사이다.
중종을 옮겨갈 때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한 자리에 선왕을 모실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1계비와 함께 묻힌 것을 시샘한 2계비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와 결탁해 옮긴 것으로 자신이 사후에 중종곁에 함께 묻히려는 속셈이었지만 정작 문정왕후도 죽어서는 중종 곁에 묻히지 못한 채 태릉에 홀로 묻히고 말았다.
결국 중종과 정비, 1계비, 2계비가 모두 제각각 따로따로 홀로이 묻혔으니 여자의 질투심이 자아낸 결과이다.
서삼릉 희릉은 25살로 단명한 왕후의 단릉 치고는 규모가 꽤 크고, 너른 편에 속한다.
중종과 함께 묻혀 동원이강릉이었다 다시 단릉이 된 까닭에 석물도 꽤 크고 능의 구성 역시 왕릉의 격에 맞게 조성됐다.
조선 전기 왕릉의 능제를 충실히 따른 상설이다.
<희릉 전경... 단정해보인다.
동원이강이었다던 중종 릉은 어디였는지? 알수 없다.
정자각도 되옮겨 지었는지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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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의 익랑이 3칸이다.
그동안 2칸이던 익랑이 이때부터 3칸이 되어 태릉, 효릉, 강릉, 익릉, 의릉, 숭릉까지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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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지붕의 잡상들... 일명 어처구니라고도 하는데 손오공, 저팔계, 삼장법사등을 만들어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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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우측의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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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좌측의 예감... 뚜껑이 지금까지와는 또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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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 바로 옆을 잘라먹은 목장.... 목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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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 전경... 조선전기 능제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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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 장명등과 혼유석, 낮은 봉분은 난간석만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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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유석의 고석이 마모가 심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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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인과 무석인.... 각 2쌍을 좌우로 배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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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인과 무석인의 뒷모습도 조각이 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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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 주변으로 호석, 양석 각 2쌍씩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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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장을 둘렀으나 봉분의 뒷쪽 지형을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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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에 올라보니 지형이 좋지 않아 보인다. 잉이 낮아서 전망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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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속 >
첫댓글 복습하는 기분으로 자료를 읽다보면 답사때의 느낌이...지나간것은 생생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