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 천도교 블라디보스톡교구장 김치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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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3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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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천도교 블라디보스톡교구장 김치보(1)
탁암 심국보_편집주간
우리 민족에게 3·1운동은 강도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였고 3·1운동에 나타난 단결된 민중의 힘을 보면서 청년학생들의 각성은 빨랐지만 나이 든 노인들도 이에 못지않았다. 3.1운동 이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던 독립운동, 그 가운데서도 노인동맹단 단장이며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천도교교구장 김치보(1859~1941)의 행적을 살펴본다.
신한촌 기념비=주소,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26A. 신한촌 항일독립운동기념탑. 러시아에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을 선양하기 위하여 (사)해외한민족연구소가 1999년 8월 15일 신한촌 하바로브크 거리에 기념탑 건립. 신한촌은 1911년부터 1922년 러시아내전이 종전되기까지 러시아 항일운동의 총본산으로 권업회, 권업신문사, 노인동맹단 등 수많은 항일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된 곳. 1920년 4월 신한촌 참변이 발생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본군에 의하여 희생되기도 하였다.
노인동맹단의 결성과 활동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연해주에도 전해왔다.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한인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3.17 만세운동 직후인 3월 26일 김치보의 상점인 신한촌 덕창국에서 노인동맹단이 조직되었다.
김치보는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로 1859년 9월 평양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가계와 연해주 이주 이전 활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50세가 되던 1908년경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김치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개업하여 운영하였다. 중국 상해로부터 직접 약재를 수입하여 연해주의 한인들에게 판매하던 덕창국은 신한촌에 주소를 두고 있었으며, 소왕령(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지국을 두었다. 김치보의 상점은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홍범도(1868~1943), 박은식(1859~1925), 김치보 등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기존의 노인회를 노인동맹단으로 바꾸고, 김치보가 단장이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46세~70세 연령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자격을 부여하였다. 1919년는 당시 단장인 김치보는 61세였고 홍범도는 52세, 박은식은 61세였다. 독립운동 청년들을 지원할 계획을 세운 노인동맹단은 발단식 직후 단원 모집을 위해 각 지방으로 대표를 파견하였다.
노인동맹단은 1919년 5월 5일 이승교(이발, 1852~1928), 윤여옥, 김학영, 안태순, 차대유, 정치윤, 차부인 등 대표 7명을 선정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 대표들은 일본에 보내는 문서 2통과 취지서 수백 매, 여비 1만 루블을 지참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5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일 오전 11시 이들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민중들에게 연설을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이동휘의 부친인 이승교는 의로써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며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일경이 그를 대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이승교와 정치윤은 너무 노쇠하여 러시아로 추방당했으며, 안태순은 징역 1년, 윤여옥은 징역 10월, 차대유는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승교와 정치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자 노인동맹단에서는 6월 20일 귀환한 이들을 환영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안건을 토의하였다. 여기에서 청원서를 상해로 보내 그곳에서 불어로 번역하고 다시 파리로 전송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노인동맹단은 6월 25일 강문백과 연병우를 대표로 파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재노령在露領대한국민大韓國民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근력혈謹瀝血도충간禱衷干」라는 제목의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 대일본제국정부 대신 앞으로 보낸 이 요구서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대표 김치보 외 20명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노인동맹단은 단원 중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국내로 들여보내거나 또는 단원 150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3·1운동을 확산시킬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강우규(1859~1920)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강우규는 7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원산에서 약 1개월 체류하다가 8월 8~9일 경 서울로 들어왔다. 강우규의 행적을 살펴보자.
“1919년 여름이었다. 우리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가지고 무기를 사기 시작하였다. 채성하 노인 소개로 정연철·최내성 기타 반일 애국자들을 경유하여 폭탄을 사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는 폭탄 6개를 가지고 조선 서울에 가서 공작하기로 작정하고 폭탄을 조선 원산 도시 돌모루 거리에 사는 이장로(예수교인)의 집으로 운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채성하 노인의 소개였다. 우리 단원 박춘근·김형식은 일본상선 ‘태을환(太乙丸)’에서 수부로 사업하는 조선청년들과 약속하고 폭탄 6개를 가지고 무사히 원산에 가게 되었다. 그 폭탄을 가지고 서울로 가려고 하다가 당시 일본 당국들 경계망은 어찌나 심하였는지 청년들은 도저히 서울로 내왕하기 어려웠다.
이장로 늙은이는 권고하기를, 폭탄은 당분간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 서울로는 청년들이 가지 말고, 늙은이들을 경유하여 공작하라고 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에 러시아에서는 ‘노인동맹단’이 조직되어 공작하였는데 그 단체조직 지도자로는 해삼위 신한촌 하바로프스크 7호에 조선 건재약국 ‘덕창국’주인 김치보가 회장이었고 채성하가 간부임원이었다. 하루는 중국 밀산(密山)에 계시던 강우규라는 늙은 애국지사가 해삼위 신한촌에 당도하여 ‘노인단’ 지도자들과 상론하고 일본에서 조선총독으로 지정되어 나오는 재등실(齋藤實)총독을 암살하기로 작정하였는데 폭탄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김치보와 채성하 두 분께서는 원산에 이미 가져다가 암치한 폭탄 2개만 달라고 청탁하였다.
이 청탁을 받은 이운학과 이승은 승낙하고 강우규 늙은이를 직접 대면하고 폭탄을 사용하는 방법을 자세히 말하여 드리고 절대 비밀에 부칠 것을 약속하고, 원산 이장로 늙은이에게 암호편지를 쓰면서 폭탄 2개를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강우규 늙은이에게 내어주라고 하였다. 강우규 선생은 원산에 당도하여 이장로 늙은이한테서 폭탄 2개를 찾아가지고 서울에 올라가서 재등(齋藤實)총독을 쳤으나 실수하여 성공치 못하고 자기가 왜놈들에게 희생을 당하였다.”
강우규 동상, 서울역
강우규 의사는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새로 부임하는 재등실(齋藤實) 총독이 탄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마차 앞 약 7보 가량 되는 지점에 떨어져 무서운 굉음과 함께 폭발하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중 몇 개가 총독의 마차에 맞았다. 총독이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을 손상하였으나 총독은 피해가 없었다. 강우규의사의 폭탄 투척은 환영 나온 인사 37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65세 노인의 의거는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재등실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강우규는 1920년 11월29일 처형되며 다음의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 斷頭臺上 猶在春風 단두대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有身無國 豈無感想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4월 참변과 러시아한인예술단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은 반혁명 러시아부대를 지원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반혁명군은 1920년 1월 31일 러시아 혁명군에 무너진다. 그리하여 연해주에도 연해주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한인 독립운동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이에 한인독립운동은 활기를 띠게 된다.
1920년 2월에 김치보 등 연해주 한인 유지 16명은 블라디보스토크 상무총회 설립을 발기하였다.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의장에 최만학이 선출되었다. 상무총회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상무 진흥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에 이용하기 위하여「한인신보」를 기관지로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20년 2월 23일 오후 1시 신한촌의 유지인사들은 각 단체 대표자회를 개최하여 3.1독립선언기념회를 갖기로 하였다. 이때 김치보는 재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한촌 3.1운동 1주년 기념식 사진
3월 1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유수의 인물들이 초대되었다. 기념식에는 러시아공산당 대표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육해군 총사령관의 부관, 블라디보스토크시 위수사령관 등 혁명정부 대표자와 각 신문사의 대표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의 영사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각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참가하였다. 기념식 이후에는 연회가 베풀어졌으며 신한촌 한민회관에서는 연극이 상연되었다.
김치보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면서 1920년 3월에는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있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노령에 대하여 연통제에 의한 아령총판부를 설치할 때, 김치보는 부총판에 임명되었다. 아령총판부의 총판에는 최재형(1860~1920)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김치보의 위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 곧바로 일본군에 의해 4월참변이 발발하고, 최재형이 순국함으로써 아령총판부는 무산되었다. 4월참변은 한인 민족운동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4월 4일 밤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다.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수색을 통해 노인동맹단 채성하를 비롯한 한인 54명이 체포되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반일 한인 76명을 체포했다. 이중에는 상해 임정의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던 러시아지역의 유력자 최재형도 있었으며, 그는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일제는 파괴와 학살을 벌인 뒤 연해주를 장악했고 모든 한인 독립운동 조직을 해산시키고 친일 단체들을 세우고 직접 통제했다. 일본군은 2년 반 동안 연해주 남부에 주둔하다가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게 된다.
4월참변 때 일본영사관으로 끌려가는 한인들과 러시아혁명군
최재형. 최재형은 함경도 경흥 출신으로 9세 때 노비 출신의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로 이주하였고, 11세 때 가출하여 상선의 선원이 되어 7년간의 선원생활로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물에도 높은 식견을 가졌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일하며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군생활품을 납품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농장을 운영하며 다양한 사업적 수완으로 성공한 한인사업가로 명망이 높아졌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하고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09년 이등박문 저격한 안중근의 후원자로 거사를 위한 사격연습, 변호사 등도 최재형이 후원하였다. 1920년 4월참변으로 희생되었다.
4월 참변으로 연해주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다른 지방으로 피신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60세가 넘은 김치보는 피신하거나 지하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김치보는 신한촌에 남았다. 상점 덕창국의 주인으로 평범한 생활인의 태도를 취했다.
4월 참변 이후 김치보는 신한촌에서 사립 백산소학교를 운영하며 1921년 1월 1일 신년회에서 130여명의 사람들에게 “1921년 신년을 맞아 제군은 각성하시오. 긴 잠에서 깨어나 자제의 교육에 힘쓰시오. 교육이 없는 사람은 실력이 없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아서 가령 대통령과 같은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여도 하등 효력이 없다”고 하면서, 자녀들의 교육에 힘쓰라고 역설하였다. 1921년 7월 경 한용헌, 강양오, 윤능효 등과 한민학교를 운영하며, 학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김치보를 가만 두지 않았다. 일제는 신한촌 민회 대신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1920년 5월 23일 대표회의가 열려 이상운을 회장으로 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가 조직되었다. 김치보는 창립 초기 조선인거류민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1921년 1월 23일 개최된 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그는 63세였다. 거류민회의 주요 간부들 중 가장 많은 나이였다.
일제는 1921년 12월 일본의 문화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의 조직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한인 교육의 통일, 고등보통학교의 신설과 교육내용의 충실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취지서에 첨부된 발기인 56명 가운데는 일본 세력 하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거류민회의 중심인물인 조영진, 강양오를 비롯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김영학, 조장원, 임호, 김치보, 이강, 한용헌, 이범석, 최만학 등 주요한 한인지도자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다.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는 이듬해인 1922년 1월 10~17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조직되었다. 이때 김치보는 영업부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일제는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조선 국내에 관광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러시아한인예술단을 조선으로 보내 식민지 ‘모국’의 발전상에 대한 강조와 동화선전을 시도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유화적인 정책을 통해 3.1운동 이후 고조된 반일운동,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예술단이 1921년 4월, 1922년 4월, 1922년 7월 등 세 차례에 걸쳐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였다.
첫 번째 단체는 해삼위 조선학생음악단이다. 해삼위 기독청년회 주최로 해삼위청년회관 건축비 모금을 위하여 해삼위동양대학교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 10명이 1921년 4월 22일(해삼위)~6월 4일(경성)까지 약 44일간 방문했다. 이들은 4월 25일 원산을 시작으로 경성, 평양, 진남포, 개성, 인천 대구 부산, 마산 등 15개 도시를 돌며 총 23회 공연을 했다.
두 번째 단체는 해삼위 천도교청년회연예단이다. 해삼위 신한촌 천도교 교구에서는 교당개축비 모집을 위해 연극단원 21명이 1922년 4월 14일(해삼위)~8월 10일(청진)까지 약 119일간 방문했다. 이들은 4월 18일 원산으로부터 경성, 개성, 평양, 정주, 선천 등 27개 도시에서 총 35회 공연을 했다. 작년 방문단과는 달리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이 있긴 하였지만 미리 공연일정을 계획하는 보다 조직적인 면모를 보인다.
세 번째 단체는 해삼위 기독교학생음악단이다. 천도교청년회연예단과 거의 맞물려 해삼위조선인기독청년회주최로 기독교학생음악단의 방문이 이어졌다. 이들은 계속되는 가뭄과 마적의 출몰로 생활이 어려워져 도움을 얻고자 1922년 7월 1일(해삼위)~8월 9일(경성)까지 약 38일간 한반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8개 도시를 돌며 총 11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미 천도교청년회연예단이 다녀간 직후이고, 방문기간이 짧아 돌아갈 차비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흥행에 실패하였다.
러시아한인예술단의 방문공연 목적은 청년회관 건립기금마련, 학자금마련, 혁명이후, 전쟁과 계속되는 가뭄 그리고 화폐개혁으로 살기 어려워진 연해주 한인들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이었고, 당시의 공연들은 비밀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 모금이 목적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러시아 한인들의 활동은 다른 나라의 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922년 8월 재동경유학생으로 구성된 관성연예단, 1923년 7~8월 하와이 모국방문단과 함께 동경 유학생 학우회의 축구단, 강연단, 동경조선기독청년회 야구단, 고학생 형설회 극단의 해외동포모국방문단의 방문과 정치적인 목적의 순회 소인극 활동을 이끈다.
천도교 해삼위교구와 해삼위천도교청년회 예술단
김치보는 두 번째 예술단, 즉 ‘해삼위천도교청년회연예단’ 21명의 한 사람으로 국내를 방문했다. 이들은 4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8월 10일 돌아올 때까지 원산으로부터 경성, 개성, 평양, 정주, 선천 등 27개 도시에서 총 35회의 공연을 하였다. 이때 김치보는 해삼위천도교교구장과 연예단 고문자격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천도교청년회연예단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천도교회월보(1922.5)에 잘 수록되어 있다. 그 대략을 소개한다.
“4월 21일은 매우 따뜻한 날이었다. 마침 원산으로부터 전보 한 장이 회관에 와 떨어지니 그가 곧 멀리서 온 해삼위 형제로서 보낸 ‘금야칠시입경(今夜7時入城)’이란 전보였다. 네댓 명이 청량리로 향하였다. 남대문 표를 사가지고 구내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차는 와 닿았다. 마침 러시아 학생복 입은 이 한 아름을 발견하였다. ‘아, 이들이로구나!’하고 손을 내밀며 ‘당신 해삼위에서 오신 이 아니요’하고 물으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선뜻 손을 주면서 반가운 중에도 조금은 슬픈 빛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들과 반가운 악수를 서로 교환하고 자리를 정하여 앉은 뒤 서로 그리웠던 손님과 주인의 정겨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일행 중에는 김치보라는 노인이 있다. 7순의 고령이나 씩씩하고 건강 활달하기로는 청년을 능히 압두할 만하다. 시베리아의 대표적 인물로 얼마 전에 노인단 단장으로 천여 명의 두목이 되어 민족을 위하여 공헌한 일이 많다고 하며 지금 해삼위 교구 교구장의 직에 있는 바, 이번에 연예단의 고문으로서 모국의 땅을 죽기 전 한 번 더 밟아보게 되었다 한다.
김치보 씨의 말씀을 듣건 데 본래 평양인으로 청년시대에는 서울에 머물기를 십여 년 하여보고, 구한국시대 관직도 몇 년간 하였다 한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30년 전에 모국을 떠나 멀리 이역을 향하였다고 한다. 지난 십 수 년에 혹은 시베리아 혹은 서북간도에서 별의 별 험난한 일을 겪어보고 최후로 우리 천도교의 올바름을 깨닫고 만년의 위안이나 얻을까 하여 또 이것이 인생으로의 정도임을 깨닫고 작년 봄에 비로소 천도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국내로 들어온 블라디보스토크 천도교청년회연예단 단원 21명의 구성은 표와 같다.
이름
직책
한용헌
단장 / 러시아 까자니고등사범학교 교수
김광희
해삼위 광제의원장
김홍종
해삼위 보광학교총교사
김동환
연해주정부 현악대 감독
박세면
원동대학생
박용현
연해주 공업전문학교생
김일제
연해주 공업전문학교생
정일
해삼위 고등사범학교생
박세영
랴웃중학생
기두익
랴웃중학생
이봉삼
음악전수생
김익수
음악전수생
홍종준
부기전문학교출신
강도희
해삼위 천도교구 종의사
김종철
해삼위 천도교청년회 실업부장
이봉극
소러시아 무도전문학교출신
서진선
해삼위 자선부인회장
고숙경
해삼위 고등여학교생
고군숙
해삼위 수예전문학교생
김치보
고문 / 해삼위 천도교구장
단장 한용헌은 블라디보스토크 천도교청년회연예단의 조선 방문의 동기와 목적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교회 일로 말하면 작년 이래로 교구의 명색을 갖추었으나 아직까지 상당한 건물이 없습니다. 다른 곳과 달라 첫째 형식을 봅니다. 입기당행기도(立其堂行其道)란 어디든지 적용되겠지만 해삼위란 참말 눈에 띄는 건물이 아니면 도저히 도를 행하기 어렵습니다. 집 한 채를 장만하여 교구 문패를 붙이고 사무라고 보긴 봅니다만 너무 협소하여 남 보기에 매우 창피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당을 건축하고 좀 상당히 활동을 해볼까 하고 여러 방면으로 많이 주선해 보았습니다.
혹은 중앙총부에 사정을 말하여 몇 천원 찬조를 얻어 볼까. 그러나 총부에 무슨 금액이 그렇게 많을까. 설사 많다한들 모두 피같은 그 금액을 감히...하여 그만두고 다시 공중기부를 청해볼까. 이것도 안 되겠다. ‘우리 집짓기에 우리의 힘, 우리의 정성으로 할 것이다’ 하여 이에 충분치 못한 기술이나마 우리 청년회로서 연예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모국도 방문할 겸 형제와 인사도 할 겸 또한 다소간 동정금이 생기면 교당도 건축할 겸 겸사 겸사로 이 연예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래간만에 모국이라고 찾으면서 빈손으로 들어올 수 없어, 변변치 못하나마 재롱삼아 몇 가지 해외의 기예를 보여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예의 자랑만도 아니요 또한 영리도 아닙니다. 이미 이러한 뜻이니까 여러분이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천도교청년회연예단은 ‘4월 25일~27일의 3일간을 잇달아 음악 무용 연극으로써 대환영 대성황으로 각자 가진 바 기술을 형제 앞에 다 내어놓아 소기의 목적을 유감없이 달성’하고 ‘웃음도 많이 받고 박수도 많이 받고 동정금도 적지 않아서 모두가 다 만족’한 가운데 개성을 시작으로 여러 지방을 돌며 공연을 시작하였다.
공연 사진 1922.4.27동아일보
확인되는 공연의 일시와 장소는 다음과 같다.
1922년 5월 9~10일 평양공회당, 10일 오후 순안, 12~13일 안주극장, 13일 안주청년회 안내 명산 시찰, 5월 17~18일 정주 천도교구(800명의 청중 앞에서 무도회)와 신의주, 5월 29일 인천, 6월 15일 대구, 6월 17일 경주, 6월 19일 울산, 6월 20일 동래, 6월 23일 김해, 6월 24일 밀양, 6월 29~30일 마산, 7월 2일 진주, 7월 4일 통영, 7월 14 이리 천도교당, 7월 27일 함흥천도교구.
이들은 순회강연을 하면서 민족적 색채의 강연을 한다고 하여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7월 경남 진주 강연에서 단장 한용헌은 “5, 6십년 전부터 우리 동족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오늘날 우리의 동독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같았으면, 우리는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리라”는 말을 하여 경찰로부터 행적을 조사받고 주의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하였다. 1922년 해삼위천도교청년회연예단 공연작품은 다음과 같았다.
음악
농촌의 살림(현악), 마수루까(현악), 떠오르는 달, 사랑의 꿈, 말모리(녀자독창), 쎙까라징(남자독창), 오러만쓰(관악), 칠면조(현악합주), 파란波蘭(폴란드)의 미인(무도현악), 기타 수십 종
무도
해군무도, 소러시아무도, 비행기무도, 에스빠노 무도, 기타 수십 종
연극
인생은 눈물(정규선 작)
(다음호에 계속)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