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뛰놀던 살곶이목장
현재 한양대학교 남쪽의 성동교를 건너면 성수동이 된다. 전일에는 이 일대를 뚝섬〔纛島〕, 살곶이들(箭串坪) 또는 도성 동쪽의 들이라는 의미에서 동교(東郊)라고 하였다. 살곶이들은 중랑천이 사근동을 돌아 나오는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는 지점을 중심으로 남쪽의 넓이 30∼40리에 달하는 들판이다. 전관평의 전관(箭串)은 「살곶」의 벌을 의미하며, 이 부근을 우리말로 살곶이라 하고, 한천(漢川)을 가로 지르는 옛날 다리를 살곶이다리라고 부른다. 곶, 즉 관(串)은 지형이 수중으로 돌출한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연해변(沿海邊)의 갑곶(甲串) · 장산곶(長山串)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의 곶 또한 전관평의 지형이 한강 본류와 중랑천 하류가 모이는 곳에서 뾰족하게 이루어졌던 데에서 연유된 것 같다.
살곶이들인 뚝섬은 동쪽에서 오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오는 중랑천과 서울 도심을 꿰뚫고 흘러오는 청계천이 흘러 합류되면서 서쪽 성수대교 부근에서 한강과 만나는 중간에 있기 때문에 섬과 같이 되었다 하여 불리워 졌다. 원래 뚝섬의 명칭이 붙게된 것은 조선시대 역대왕들이 이곳에 나와 사냥을 즐길 때나 또는 군사들의 무예 검열을 나오면 왕의 몸기인 둑기(독기 纛旗)를 세웠으므로 뚝섬(纛島) 또는 둑도, 뚝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년 동안 이곳에 왕이 직접 사냥 나온 것만 해도 151회나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대를 사열하는 곳이 노량진과 서쪽의 망원리(望遠里) 등의 세곳에 있었는데 특히 이 곳은 평야지대로서 풀과 버들이 무성하고 국가에서 기르는 말 목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세 곳 중에서 이곳이 적지(適地)여서 종종 임금이 거둥하게 되었다.
현재는 이 곳 일대가 거의 골프장, 주택, 공장들로 들어차 있지만 40여년 전만 해도 넓은 평야에 채소밭이 일궈져 있어서 서울의 채소 공급지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요즈음도 속칭 김치를 ‘뚝섬갈비’라고 부르기도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봄이 되면 풀이 가없이 무성해져 마치 비단 요를 깔아 놓은 것 같아 많은 도성의 사민(士民)들이 나들이를 나와 화창한 봄을 즐겨 유명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천도한 후 60~70년을 지난 세조, 성종 때에는 정치가 안정되고 도성민들의 생활도 여유가 있게 됨에 따라 많은 사녀(士女)들이 봄, 여름, 가을철에는 시외에서 행락(行樂)을 즐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뚝섬은 조선시대 때 서울부근에서 10 군데의 경치좋고 놀기좋은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로서 ‘전교심방’(箭郊尋芳)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뚝섬 일대를 살곶이들이라고 부른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 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보고 환멸을 느껴 왕위를 내놓고 고향인 함흥(咸興)에 가 있었다. 그 뒤를 이은 정종도 2년 만에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자 태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종은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세상의 이목(耳目)을 생각하여 부친인 태조에게 국왕으로 인정받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태조를 서울로 모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를 모시러 신하를 함흥으로 보내면 태종의 행실을 노엽게 생각하는 태조 이성계는 사신이 올 적마다 죽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심부름을 보낸 뒤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생겼다.
그 뒤에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자 동교(東郊), 지금의 뚝섬에서 환영 연회를 열도록 하였다. 이때 하륜(河崙)은 연회장에 큰 차일을 칠 때 굵고 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놓도록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태종이 인사를 드리려 하니 갑자기 태조 이성계가 태종에게 활을 쏘므로 태종은 굵은 기둥을 안고 요리조리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다시 태종이 술잔을 드리는데 하륜의 말을 쫓아, 신하를 시켜 잔을 올리오니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며,
“모두 천명(天命)이로다.”
하였다. 그 후부터 이 부근을 살곶이들(箭串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왕 5년(1405) 10월에 한양에 재천도 하였다. ꡔ조선왕조실록ꡕ을 보면 태종 1년(1401) 윤 3월 1일에 태종이 태상왕(이성계)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행차하자 임진강까지 전송하였고, 태종 2년(1402) 8월 2일에는 태종이 양주의 회암사에 가서 태상왕을 문안하였다는 기록 등이 있으므로 이 설화는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기 전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에 나아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는데 이 때 응봉에서 활을 쏘자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의 살곶이목장에서 기르는 말의 음료로 사용했던 도요연(桃夭淵)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ꡔ대동야승(大東野乘)ꡕ에 보면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연산군 12년(1506)에 젊어서 서울에 역군(役軍)으로 올라왔던 어느 노인이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의 회고담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일곱살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 번(番)을 들었는데, 그 때는 연산군이 황음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다. 연산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빛이 희고 수염이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다. 화양정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서 기르던 암말 수 백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두었다. 연산군이 정자에 자리를 잡자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하고, 시신(侍臣)들은 물리쳤다. 이어서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몰아넣으므로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 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그 해 가을에 중종반정이 있었다」
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였다.
살곶이다리는 한자명으로 전관교(箭串橋)라 부르지만 원래 성종 때 붙여진 공식 명칭인 제반교(濟磐橋)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성현(成俔)의 ꡔ용재총화(慵齋叢話)ꡕ 에 의하면 「성종 때 승려가 있어서 만석(萬石)을 벌(伐)하고 큰내를 건너는 돌다리를 놓았다고 하였다. 다리 길이가 300여보가 되며 옥우(屋宇)와 같이 평평하여 행인이 마치 평지를 밟는것 같아서 왕이 제반교라고 이름 지었다」고 다리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살곶이 다리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 당시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나가려면 한강진에서 노량진, 말죽거리로 가는 길도 있지만, 동대문과 광희문(일명 수구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느면 ①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로 가는 길이 되고, ② 송파로 건너가 충주로 나가는 통로가 될 뿐 아니라 이 길은 태종과 왕비 및 순조와 왕비가 모셔져 있는 헌·인릉(獻仁陵)으로 가는 길이고, ③ 거의 정남쪽으로는 성수동의 한강변에 이르는 길이다. 이 곳에서 나룻배를 타면 삼성동에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정릉(宣靖陵)에 이르게 되어 국왕이 수시로 참배(參拜)하는 길이며 또 봉은사로도 통하게 되어있다. 거기에다 조선 초에 정종이 광나루에 전각을 짓고 자주 나가게 되고, 태종 또한 대산(臺山)에 새로 이궁(離宮)을 짓고 낙천정에 왕래하니 살곶이 다리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 조선 초기의 도성 안에 목교(木橋)가 허다해도 이곳에 먼저 석교(石橋)를 놓으려 하였을 것이다.
일제 때 이 다리를 실측한 결과 폭이 6m, 길이가 76m라고 하였으며, 서울에서 금천교(禁川橋), 수표교와 함께 유명하였다.
그러면 이 다리는 어떻게 놓여졌을까.
세종때 왕의 행차가 빈번하게 되니 그 때마다 수행하는 중신(重臣)들은 이곳을 건너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기에 다리를 놓는 것이 시급함을 느끼게 되었다. 즉 홍수에도 견딜 수 있는 목교가 아닌 석교(石橋)라야만 했는데 이 다리를 놓는 것은 태종이나 세종대왕보다 중신들의 희망이 더 간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2년(1420년) 5월 6일 기록에 의하면 상왕(上王)인 태종이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살곶이 다리의 공사를 친히 감독하도록 명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당시의 토목 기술, 자재 공급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삼복 더위에 장마가 오기 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계절 탓도 있어서 추진이 어려웠다. 이 당시 세종은 “예로부터 백성들을 동원하는 데는 때를 맞추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장마전에 끝낼 수 있겠는가. 중단하여 가을을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하였다. 이에 공사는 착수한지 20여일 만에 기초 부분만 완성된 채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중단한 공사는 50년 이상 지나도록 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다리 공사는 왕실과 중신들의 필요성보다는 서울과 지방을 여행하는 많은 선비나 백성들이 더 시급했던 것 같다. 이리하여 다리 가설 공사를 중단한지 55년이 지난 성종 6년(1475) 9월에 병조판서 이극배(李克培)가 “탄천과 전관천이 또한 깊으니 소재 읍(邑)으로 하여금 다리를 놓도록 하고 그 지류(支流)는 가교(假橋)를 설치 하도록 하십시오”라고 건의하자, 성종이 그 말을 쫓아 다리를 가설하도록 명하여 성종 14년에 살곶이 다리가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살곶이 다리는 1967년 12월 15일에 사적으로 지정되고, 1972년에는 서울특별시 예산으로 크게 보수하여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한천의 강폭이 넓어져 동쪽은 별개의 콘크리트 교량을 연장하여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50여년 전만 해도 어두어지면 이 다리 밑에서 노상강도가 나타났으므로 행인들이 무서워 밤을 지낸 후에야 건너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첫댓글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