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1
그곳은 시원한 집이었다.
일전에 내려갔을 때 아들의 공부방에 들어가 잠시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는데 서늘한 기운이 책을 읽는 동안 전해져 왔다. 마침 아내는 아들이 자는 작은 방에서 아들이 읽는 책을 읽으며 쉬고 있었는데, 난 마치 아무도 없는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앉은 자리에서 얼굴만 돌리면 창 너머로 조그만 주차장이 텅 빈 채 강렬한 햇빛을 안고 있고 그 옆에는 작지만 아담한 교회가 문을 열어놓은 채 한가하다. 지나는 행인은 아주 가끔 있고 길 맞은편에도 건물은 있었는데 모두 볼 일 보러 외출을 했는지 조용했다. 마치 정경을 찍은 사진을 앞에 두고 창밖을 보는 것 같이 주변은 내내 정지해 있는 것 같았고 조용했다. 얼핏 설잠이 들었다가 깨는 일도 있었는데 그것은 길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잘 알지 못하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때문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만 일 년이 지났는데 여름이 지내기에는 제일 나은 것 같다. 지방에 있는 도시다 보니 서울에 있던 전세값으로 쾌 넓은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겨울은 난방비가 만만치 않았고, 봄가을은 그 정취를 느낄 만한 환경이 주변에 없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자연히 더운 여름을 이겨내는 데는 그저 그만인 것이 내 성격상 더운 날 어디 땀을 식히기 위해 집을 나설만한 바지런한 주변머리도 없고 결혼해서 애가 중학교 갈 나이까지 살아오며 신혼 초 어거지로 날 끌고나가던 아내도 이젠 어지간히 지쳐버린 것이어서 집안에 머무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하루 종일 있어도 앞 건물과의 좁은 간격 때문에 베란다로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해봐야 아침나절 그것도 밥 먹을 무렵 잠시 머물다 가고는 하루 종일 석빙고에 들어 온 것처럼 시원하니 최근 들어 이렇게 흡족한 피서는 없는 것이다.
책을 보다가 선선한 기운에 잠이 오면 잠시 잠을 청하고 일어나도 좋았다. 그런 연후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게 되는데 더운 여름 낮 자느라 애써 흐릿해진 머리도 식힐 겸 또 가끔 아내와 같이 손을 잡고 집 앞의 길을 건너 흐르는 작은 하천을 끼고 산책을 하는데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고 마침내는 어린 아이처럼 서로 웃어가며 떠들어대는 부부를 보게 된다.
어린 시절 그곳도 시원한 집이었다.
그 집은 부산 초량동에 있었다. 아주 오래된 집으로 일제시대 일본 사람이 지은 집이었다. 주인집 안방의 구들은 해방되고 난 한참 후에 들여놓았고 작은 마당에 갖춰진 정원, 식모들이 거처했을 법한 부엌에 면한 작은 방, 조그맣고 깨끗한 타일과 양변기가 설치된 변소, 미처 구들로 개량하지 못해 가끔 눈에 띄는 다다미방들로 이루어진 집들이 담장 하나를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았던 집은 마당이 없이 중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가구가 세들어 살던 집의 안집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길보다 낮은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대여섯 개 내려가고, 내려가면 나이 든 자매 할머니가 두 분, 시장에 김치를 팔아서 생활하시고 계시는 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단칸방이 있고, 조금 지나 좁은 중문이 나오는데 중문을 지나 들어가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장독이 놓여진 장독대와 마실 물과 빨래할 물을 받는 큰 드럼통이 온갖 구정물을 빼내는 수채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조그만 마당이 나오고(나의 어머니께서는 이 마당에서 빨래도 하고 김치를 담그기도 하셨다) 곧바로 작은 미닫이 문이 나오면서 제법 큰 부엌이 있다. 부엌으로 난 공간은 방 앞에 설치된 조그만 마루를 따라 작은 방 뒤의 아궁이와 연결되고 아궁이 뒤에는 연탄을 쌓아둘 수 있는 어둡고 칙칙한 공간이 창고대용으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부엌으로 들어서면 큰 아궁이가 있고, 큰 아궁이는 큰방을 뎁히기 위해 설치되어 있고 큰 방 옆에는 마루를 통해 연결된 작은 방이 있으며 마루를 돌아나가면 작은방 뒤의 아궁이와 연탄을 쌓아두는 어두운 공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이 끝난다면 난 이야기를 풀어놓을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만 않은 것이 그 작은 방 아궁이 위에는 또 하나의, 지금부터 이야기할 어린 시절의 신기하고도 아늑한 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다락방이었다.
난 이번 휴가에서 그 동안 먼지 속에 아무렇게나 묵여 두었던 책과 그 책을 쓴 작가와의 만남을 기대했다. 그 작가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글에서 삶의 향수를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의, 이제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거친 성정을 깨워 바깥세상으로 휘몰아낼 소지가 있는 그 어떤 격정적인 표현이나 충동적인 수사가 없고 그저 졸졸졸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조그만 시내를 쳐다보듯 책을 읽어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글은 주변이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가 필요한 데 이번의 집은 시원할 뿐만 아니라 한적하기도 해서 집을 떠나와 있으면 이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아내는 이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난 뒤로 얼굴이 활짝 폈다. 난 한 달에 두어 번 밖에 볼 수는 없지만 매번 점점 좋아지는 아내의 얼굴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웃음이 많아지고 소리도 밝고 커졌으며 전과 같이 장난을 치고 싶어 했다. 아내는 사십대라는 나이를 잊은 듯 했다. 둘이 길을 나서면 종종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폼이 갓 결혼했을 때 서로에게 질세라 과장된 행동을 해 보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난 알 수 있었다. 아내는 행복해 하고 있다는 것을. 내 어께를 그녀의 조그만 손으로 앙팡지게 내려칠 때는 그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질 수도 있겠지만 난 아내의 웃는 모습에 그만 최면 걸린 사람처럼 쉬이 아픔도 잊고 그저 '허허'하며 웃고 마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에는 이부자리가 한 채 깔아져 있다. 물론 아내는 내가 없는 집에서 아들을 학교로 보내고 난 후면 세상이 출근 전쟁으로 한 시름 놓을 무렵 편안한 자세로 잠을 청할 것이다. 너무 깊게 잔 나머지 베갯닛에다 침을 조금 흘려놓기도 할 것이지만 그것은 갓 이사 온 한동안일 것이고 더 이상 생활에 대한 불안이 가신 후인 요즘에는 자고 일어나도 머리도 덜 아픈 기분 좋은 집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시절의 다락방은 참 시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난했던 그 시절 웬만한 가족이 살 수 있을만한 공간이었다. 맨들맨들한 사다리를 타고 다락으로 올라가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시 세들어 살던 집 내부가 대체로 어두운 편이었는데 다락방은 지붕에 면해 있던 방이라 창으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살지 않아서 그런지 다락에 올라가 살며시 앉아 있노라면(그 아래가 아무 지지대가 없는, 작은 방 뒤에 연탄을 쌓아두는 칙칙한 창고 위라 혹시도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방금 바른 벽지에서 나는 풀 냄새가 솔솔 맡아졌다. 다락은 한 칸이지만 올라가는 입구에서 층계처럼 한 쪽을 높게 떠받쳐 놓는 바람에 단이 져 있어 언듯 두 칸으로 볼 수도 있었다. 단이 져서 높은 쪽은 낮은 쪽보다 공간은 협소하지만 그 곳에는, 은행에 다니시는 삼촌이 한 분 같이 살았는데, 공부할 때 모아두었던 각종 책과 잡지들이 앉은뱅이 책상과 더불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천정에 면해 지어졌지만 별로 청소를 하지 않는데도 다락은 늘 깨끗했다. 툭하면 천정으로 쿠당탕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곤 하던 쥐들은 먹을 게 별로 없고 늘 서늘해서 그런지 다락방으로는 출입을 하지 않는 게 분명한 것이 쥐들이 다닌 흔적이나 분비물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나의 아주 은밀한 장소였다. 형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내향적인 성격의 나와는 달리 모두 밖에서 놀이거리를 찾았기 때문에 다락이 있는 줄은 알아도 낮에 학교를 다녀와서 다락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 때는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유행처럼 집집마다 많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집에서 놀고 있던 부모는 없었다. 할머니도 한 분 계셨지만 당시 어머님과 같이 밖에서 일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낮에는 허름한 앞집, 뒷집 모두가 텅텅 비어있었던 셈인데 앞집에 사시는 자매 할머니들은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후 소일거리로 초량의 텍사스촌 주변에 자리한 큰 시장에서 직접 김치를 담궈 내다파는 일을 하셨는데, 낮에는 배추와 양념들을 장만해서 시간이 되기 전에 내다 팔 준비를 해야 하는 터라 학교를 파하고 돌아와 보면 대개들 안 계셨던 것이다. 그러면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다락에 올라간다. 굴을 빠져나오듯 머리부터 디밀면 창문으로 쏟아지는 환한 햇빛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발을 들어 한 걸음 정도 되는 높이의 단을 오르면 양옆으로 낡은 책들이 쌓여있고 창을 면해 책상이 앉아 있다. 팔을 뻗어 창을 밖으로 열면 큰 고등학교 건물이 보이고 그 뒤로 산도 보이며 뒤로 벌러덩 드러누우면 뭉게 구름이 떠가는 파란 하늘도 보이는 것이다. 가끔 앞집에 사는 석이 아재가(담장을 하나 둔 너머로 같은 높이의 기와 양옥집에 친척 어른이 살고 계셨다) 옥상으로 올라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와를 밟으며 넘어오다가 앞집 김치 할머니로부터 호된 꾸중을 듣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날에는 나도 창문 밖으로 지붕이 무너질까 무서워하면서도 살금살금 기와를 밟으며 돌아다녔다.
당시의 집은 대개 일 층집으로 기와로 지붕을 덮긴 했지만 내부는 외관과 달리 전통식이 아닌 양옥으로 지어지고 꾸며져 있었다. 그것은 내가 살던 부산역 근처의 초량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제시대 이전부터 많은 일본인들이 이 곳 주변으로 무역을 하기 위해 몰려와 살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그러니까 가까운 해방 전에 근대 문물을 먼저 도입한 일본인들의 영향으로 서울이 아닌 부산에 당시로서는 신식 가옥이 세워졌던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지붕을 덮은 기와를 제외하고는 아무렇게나 지어 화장실도 변변히 없었다. 그래서 밤을 무서워하는 나는 대문을 나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던 동네 공중변소를 사용해야 했는데 가로등이 없던 시절이라 밤에 용변을 볼 일이 발생하면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형편이 괜찮은 양옥집에는 하얀 사기로 만든 변기가 앙증맞게 자리한 깨끗한 화장실을 집집마다 가지고 있었다.
어쩌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더욱 갈 곳이 없게 된다.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거나 바닥에 석필로 하얗게 그려서 깨금발로 땅놀이를 하던 동네 공터는 빗줄기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밖에서 돌아온 누나와 동생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온 동네 아이들과 친구들로 집안이 복작거리게 되어 이내 무력해진 나는 그만 홑이불을 들고 슬그머니 다락으로 도망치듯 올라가게 된다. 올라가서는 바닥에 넓게 홑이불을 깔고 누워 주변이 잠잠해질 때가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이다. 아직도 틈만 나면 잠을 청하는 버릇은 아마 어릴 때 그 집에 살던 당시부터 생겼던 것 같다. 집안의 소란스러움은 다락 입구에 있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는 순간부터 마치 딴 세계처럼 흐릿해지고 대신 바닥과 벽과 천정에서 풍겨오는 벽지냄새와 오래 쌓아둔 책으로부터 맡아지는 퀴퀴함이 등밑으로부터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와 함께 온 몸을 휘감게 되는데 창으로 부딪쳐오는 빗소리까지 가세하다보면 귓가에 규칙적인 리듬의 자장가가 흘러 들어오고 어느새 잠이 들어있는 어린 날의 내가 있는 것이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와 뭔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소리, 벽에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들은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가물가물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부딪치며 창으로 흘러내리는 빗소리는 달콤한 잠을 청하기에 여념이 없는 나에게 다락방은 그 포근함과 서늘함으로 새우처럼 몸을 옆으로 웅크리게 하였다. 잠을 깨고 나면 어느새 어둑어둑한 저녁이다. 놀러왔던 아이들은 돌아가고 그새 비가 그쳤는지 형제들도 아이들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는지 집안은 이제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괴괴하다. 이리저리 방마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이불과 옷, 바닥에 내팽겨진 채 종이가 접히다 만 비행기나 배들, 그리고 책과 공책. 다락방의 계단을 내려오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인데 이렇게 낮잠을 자고 난 뒤에는 더욱 아프다. 멍한 표정으로 방바닥에 앉아 있으면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문간 쯤에서 이웃 사람들과 반갑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문 앞에 있는 계단을 내려서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러면 하루해는 저무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면 온 가족이 모인다. 아버지도 거친 일터에서 돌아오시고 말쑥한 양복 차림의 삼촌도 밤늦게 돌아오면 아홉 식구는 큰 방, 작은 방에 나뉘어 잠을 자게 된다. 큰 방에는 할머니와 삼촌, 그리고 나와 남동생들, 그리고 작은 방에는 부모님과 여형제들이 다닥다닥 몸을 붙인 채 필통 속의 연필처럼 잠을 자게 된다.
세 식구가 사는 집 치고는 꽤나 넓다. 아무리 지방의 전세가가 낮다고 하지만 방 세 개에 넓은 거실과 부엌을 겸한 식당까지 갖춘 집이다 보니 아내는 신이 났다. 우선 시원해서 좋았지만 조용해서도 좋았다. 주택가라고 하지만 삼 층 건물의 일 층은 대개 가게로 전용하고 있어서 겉으로 봐선 조용한 것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이제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지방 도시로 이사하는 날조차 몸을 빼지 못해 모든 짐을 이삿짐 센터에 의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사하는 날은 추운 겨울에서 갓 봄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삼 월 초순, 지난 겨울 유방암 수술로 몸이 성치 않은 아내에게는 커다란 짐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군소리없이 이사를 무사히 마쳤다. 난 쉬는 날 주중의 어느 날을 택해 이사한 새 주소지를 찾아갔는데, 길에서 만나는 행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주소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주소 말고도 전화상으로 막연히 터미널 뒤라고 들은 기억이 있어 무작정 발길을 옮겼는데 제대로 들어 맞힌 것이 집 근처의 길로 접어드는데 막 목욕을 끝내고 오는 길이라며 맞은 편 길목에서 접어드는 아내와 마주쳤다.
주변 건물들의 일 층은 중개인 사무실에서부터 시작해서 닭발 요리집, 구두 수선집, 열쇠 수리공집, 휴지 창고, 교회, 호프집 등 장사하는 가게로 모두 사용되고 있어 전에 살던 서울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역시 지방 도시는 지방 도시인지라 가게만 즐비할 뿐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니는 사람들이 적은 것은 어쩌면 요즘 시대가 전화 한 통화로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쉬는 날 아들이 학교에 가고나면 아내가 텔레비젼을 켜놓고 아침 방송을 보고 있는 동안 난 교회와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아들의 공부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내려다본다. 주차장은 늘 비어있다. 가장 많이 주차되어 있었던 때라고 해봐야 고작 두 대가 전부였다. 늘 비어있는 주차장 왼편으로 교회가 있다. 서울에 살면서 의식하기 시작했지만 이 나라에는 교회가 참 많다는 것이다. 큰 교회보다는 동네마다 꼭 있는 지하교회였다. 덩치가 크고 호화찬란하게 지은 교회는 교회같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 큰 사찰과 성당은 보면 볼수록 묵직한 것이 전해져 온다. 난 교회를 이단처럼 여기며 자랐기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난 중학교를 예배가 있는 미션 스쿨을 나왔어도 잘 의식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온 것이다.
통행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를 내려다 보는 것은 조그만 즐거움이고 큰 기쁨이다. 왜냐하면 떠나오기 전에 살았던 곳은 조그만 빌라였는데 인동 간격은 말할 바도 못되고 옆집에서 수도 트는 소리가 조용한 새벽이면 단잠을 깨울 정도였다. 같은 층에 세 가구가 살았는데, 워낙 좁다고 여겼는지 나중에 이사 온 우리 집은 제쳐두고 앞뒷 집 아이들은 낮에, 저녁이면 어른들이 하루는 이 곳, 하루는 저 곳 하는 식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놀고 떠들었다. 그때부터 아들에게 붙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저녁만 먹고나면 밖으로 산책을 가자고 조르는 것이다. 갈 곳이라야 자전거를 탄 아들을 앞세우고 우리 부부는 아들이 다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오는 것이다.
한참 쳐다보다 이윽고 아들 책상의 의자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가는 것이다. 그의 노년에 쓴 사색집으로 산문에 가까운 생활 철학서라고 보아도 좋을만큼 읽고 소화해 내는데 무리가 없어 좋았다. 한 번에 다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틈틈이 아내의 일을 도와주면서 잠시 여유가 날 때 창가의 의자에 앉아 창밖의 풍광을 청각과 책의 내용에 의지해 보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시간의 흐름이 더디게 느껴진다. 그만큼 긴장감도 덜하다. 교회에서 모임을 갖는지 간간히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멎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습도가 높아지며 잠이 올 것 같이 집중이 잘 안되며 책을 읽기는 한데 옆으로 새어나가는 것처럼 책 내용과 겉돌고 있었는지 지금까지 읽어온 책 내용 중 바로 앞의 한두 장은 내용과 의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냥 책만 읽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최근 들어 시작한 헬스클럽을 가보기로 한다. 집에서 입고 있는 편한 반바지와 짧은 티셔츠 차림에 등산용 둥근 모자를 쓰고 나가본다. 한두 번 찾아가 본 적이 있고 내려올 때마다 혼자 두고 운동가기가 미안했던지 심심하면 놀러오라며 연인한테 말하듯 얘기하고 나갔던 터라 내가 찾아올 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얼굴의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 열심히 러닝 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모습이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열린 클럽 문과 반사된 거울로 볼 수가 있었다. 땀을 운동 셔츠에 흠뻑 묻힌 채 요란한 음악에 맞추어 클럽의 모든 사람들이 달리고, 듣고, 매달리고 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고 있는 아내에게 살짝 다가가서 왔다는 기별을 하자 놀라 쳐다본다. 그리고는 이내 밝게 미소를 짓는다. 아직 운동에 익숙한 자세는 아니지만 지난 이 년 정도 아팠던 몸과 잃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건강을 위해 아내는 매사 열심이다.
기다리면서 신문도 보고 커피도 마시며 놀다가 운동이 끝나면 같이 가자는 아내의 권유를 신경쓰지 말고 운동에 전념하라는 몸짓을 해보이고 입구에 있는 휴식용 의자에 앉는다. 음악 소리가 커 웬만한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저녁이 되려면 이제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오후, 주부, 학생, 직장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본의 아니게 나랑 일일이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사물함이었는데 조그만 종이에 운동을 시작한 날짜와 계약 기간을 명시해 놓고 있다. 통풍용인지 구멍도 조금 나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보이는 것들 모두가 다 운동화다. 대충 둘러 보았지만 운동화는 대부분 이름난 상표의 비싼 운동화였다. 그리고 계약 기간을 명시한 종이들에 적힌 연도는 모두 몇 년 전의 것으로 말하자면 비싼 운동화와 목돈으로 시작한 운동들이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사물함 속의 어둡고 먼지 쌓인 시간 속으로 퇴화되어 가는 중이었다.
아내도 일 년치 사용료를 미리 지불하고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제 세 달째 접어들고 있다. 결혼 초부터 지켜보았지만 아내는 운동 신경이 발달되어 있지 못했다. 여전히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러닝 머신 위에서 빠른 속도로 걷고 있는 자세가 조금 엉성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아내는 양쪽 팔을 큰 동작으로 아래 위로 흔들며 누가 보아도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일 년 동안 꼬박꼬박 운동을 하러 다닐 것이다. 주변의 신발들처럼 어둡고 먼지쌓인 사물함에 갇힌 채 기약도 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서글픈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내는 참 억척스런 여자다. 나의 부모님 세대에서는 전쟁의 여파가 가라앉기 전이라 모두들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공부하던 무렵에는 점차 살림이 펴 나가는 중이어서 자식들은 그렇게 궁색하거나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키우지 않았다. 좀 더 영악한 방향으로 커 나갔다는 것이 억척스러움을 대신했을 수도 있겠다. 좀 더 살림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자연적으로 진화하는 방향 말이다. 아내는 그런 우리 세대에서도 보기 드물게 억척스런, 전혀 억척스럽지 않게 보이는데 그렇게 억척스러웠다. 그것은 아마 장모님을 빼닮아 그런 것인 지도 모를 일이다.
입구 옆 한 켠에 몸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운동한 결과를 몸무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통해 판단해보려는 것일 게다. 저울 위의 벽에는 아이가 둘은 됨직한 주부가 한 손에 아령을 들고 한 손은 잘록한 허리에 댄 채 처녀같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사진이 계몽 포스터처럼 눈을 치켜뜬 채 내려다보고 있다.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저울 위로 올라간다. 팔십 일이라는 숫자가 파랗게 찍힌다. 늦은 밤이면 전화로 음식을 시켜다가 술과 매일 마신 탓이다. 지난 겨울 이후로 몸이 부쩍 불더니 대번에 옷이 맞지 않았다. 숨쉬기도 가빠지고 몸이 무거워지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지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정기검진 결과에서는 몸에 이상이 있음을 통보해 왔는데, 벌써 혈압이 높고 당뇨증세가 있으니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나면 무슨 거품같은 것이 하얗게 일어났는데 벌써 오래전부터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것이다. 일상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마침내 뭔가 다가오고 있다는 중압감으로 어느새 눌러오고 있었던 것인데 이번에 확인을 한 셈이다. 악몽같은 요즘의 일들이 결코 몸무게 때문은 아니다. 그러니까 체중은 아닐 것이다. 혼자 무료하게 있을 것을 우려한 아내가 커피를 타서 신문과 함께 들고 온다. 천천히 신문을 보며 시간을 메우고 운동이 끝나면 같이 나가자며 기다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모처럼 보는데 같이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자는 것이다. 돌아서며 살짝 웃는다. 만족해하는 표정이다. 아내는 다시 처녀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웃음 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약간 굵어지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양볼이 격렬한 운동으로 달아올라 잘 익은 복숭아처럼 둥굴고 빨갛다. 커피잔을 들어보이며 미소로 화답한다. 그래, 아내는 지금 만족해 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행복과 동일선상에 있는 지는 잘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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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돌아오니 중문 수채 앞에 어머니와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어머니는 가족이 먹을 김치를 빨간 양념을 발라 마지막으로 버무리고 계셨는데 옆에 선 남자는 낯이 선 사람으로 아직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남자는 선 채로 밥을 먹고 있었는데 내가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자 얼굴을 가만히 숙였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낯선 사람은 밥을 다 먹었는지 김치가 담긴 그릇을 앉아계신 어머니에게 조용히 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밥이 담겨 있었던 것 같은 사각 철제 도시락을 밥을 먹는 내내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노란색 큰 봉투에 살며시 넣었다. "잘 먹었습니다."라는 들릴락말락한 인삿말을 했는가 싶더니 내가 조금전 들어온 파란 대문으로 성큼성큼 돌아나갔다. 난 어린 마음에도 뭘 물어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잠자코 있었고, 어머니도 내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인 앉은 자세로 아무 말도 않은 채 김치를 버무리고 계셨다. 그리고 김치를 다 담그시고 난 뒤에 허리를 펴며 일어나시더니 낯선 사람이 주고 간 그릇을 수채에 황급히 쏟아버리셨다.
김치 할머니들이 안 계시는 앞집은 늘 괴괴하다. 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칙칙한데 두 가구가 사는 넓은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는 겁이 나 앞을 잘 지나가지도 못했다. 댓돌 위에는 역시 신발이 없었다. 두 분 다 시장에 나가신 것이 틀림이 없다. 난 가방을 든 채 댓돌을 딛고 마루 위로 올라가 창호지 틈으로 방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방 한 구석에 잘 모셔져 있었다. 담너머 석이 아재집 것과는 달리 텔레비젼은 조그만 상위에 그냥 올려져 있었다. 석이 아재집 텔레비젼은 그 집이 따로 있어서 만화영화를 보러가면 그 집을 열기 위해 석이 아재가 열쇠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열쇠는 텔레비젼이 놓여있는 칸 바로 아래의 유리 선반에 항상 놓여져 있었지만 석이 아재는 딴청을 부리며 뜸을 들였다.
아직 텔레비젼이 나올 시간이 아니다. 그렇지만 텔레비젼을 켜보고 싶은 마음에 그냥 되돌아 나올 수는 없었다. 어젯밤 김치 할머니 두 분이 큰 맘 먹고 흑백 텔레비젼을 샀다면서 우리 할매를 불러 자랑을 했는데 밤 늦게서야 잠이 오는 눈을 하고 방에 돌아온 할매는 재미난 구경을 했다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는 밥을 먹고 나면 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것은 큰 문제였다. 숙제는 학교에서 돌아온 낮에 바로 해 놓아야 안심을 하기 때문에 한 번도 걸른 적이 없어 동생들처럼 숙제하느라 방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엎드린 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끙끙거리는 법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뭐하노?" 막 텔레비젼 스위치를 켜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난 호기심에 그만 이끌려 방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방문을 누가 있기라도 하듯 슬그머니 소리없이 열고는 깜찍하기 그지없이 얌전히 있는 텔레비젼 곁으로 다가가 어느새 스위치를 작동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어제 산 긴데 그라다가 고장나믄 우짤라꼬 그러노. 퍼뜩 나오이라."
작은 김치 할머니는 눈에 불이 나도록 큰 소리로 겁을 주는 것이다. 들킨 것만 해도 오금을 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한데 막무가내로 내지르는 고함에 난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얼른 나온다는 것이 가방을 놓고 나왔다.
"지금 이 시간에 텔레비가 나오나? 니 할 일 없제? 그라믄 이 할매 심부름이나 하나 해라."
성이 나서 고함을 지를 때를 제외하면 김치 할머니들은 대부분 너그러운 분들이었다.
국수를 유난히 좋아하시는 할머니들은 저녁에 김치를 다 팔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자주 국수를 끓여 드시고는 했는데 그 맛이 가히 일품이라 국수 그릇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아직 저녁을 먹기 전의 허기진 우리들의 코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해산물에서 우러나오는 시원한 국물, 어떤 배합과 어떤 재료를 거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국수 위에 뿌려넣는 양념장 맛은 어머니께서 아무리 따라 해도 결코 똑같아지지 않는 비법중의 비법이었다. 난 아직도 그 국수 맛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시장통 꼼장어집 골목에 가면 복자여관이라고 있다. 거기 가서 삼촌 있는가 보고 있으믄 할매가 좀 보잔다 캐라."
물론 나에게는 내가 정식으로 삼촌이라 부르는 어른은 명백히 따로 있다. 그리고 난 아무나 보고 시킨다고 넙죽 삼촌이라고 낮간지럽게 부르지도 못한다. 이 삼촌 아닌 삼촌은 작은 김치 할머니의 외아들인데 군대까지 갔다온 아저씨로 얼굴도 잘 생기고 머리도 좋게 생겼지만 돈을 벌러 다니지 않고 늘 놀러만 다니며 자기의 어머니인 작은 김치 할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혔다.
복자 여관은 곰장어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곰장어 골목의 가장 안쪽에 낡아서 곧 허물어질 것처럼 본때 없이 서 있었다. 그러나 곰장어 골목에는 낮인데도 곰장어 굽는 구수한 냄새로 가득해 그 길을 지나가는 나의 콧구멍을 즐겁게 해주었다. 절로 군침이 돌며 점심을 먹은 지가 한참 되어 제법 출출해서 쑥 들어간 배위로 손이 다가갈 정도였다. 여관은 조용했다. 입구라고 적힌 문은 휑하니 열려 있었는데 퀴퀴한 냄새가 어두운 복도로부터 덮치듯 흘러나와 눈살을 지푸리게 했다. 주인을 기다렸다가 물어보고 올라가는 것이 당연할텐데 난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불쑥 찾아온 사람처럼 성큼 어두운 복도로 걸어들어 갔다. 복도를 지나며 사람소리나 놓여진 구두가 있는 곳에 가서 물어볼 참이었다. 더러운 문이 달린 방 두 개를 지나 오른쪽으로 꺽어드니 문이 하나 복도로 열려 있는 데 젊은 남녀의 조그맣게 말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왔지만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문 앞에는 과연 남자의 잘 닦아서 광이 나는 구두와 여자의 굽 높은 빨간 구두가 포개진 채 서로 엉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복도로 흘러나왔는데 주의를 기울여 보니 바로 그 작은 김치 할머니의 외아들인 아직 한번도 불러보지 않아 입밖에 내기에는 좀 쑥스러운 삼촌 목소리였다. 여자의 가늘고 고운 목소리도 들렸다. 아마 저 빨간 구두의 주인이 틀림없다. 구두는 크기가 작고 굽이 높은 것이 앙증맞게 생겼다. 갑자기 이야기가 멈추었다. 내가 다가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누고?" 대답대신 난 열린 방문 앞으로 쭈뼛거리며 나갔다. "니가 여기 무슨 일이고?" "할매가 오라캅니더." "할마씨가? 와?" "난 잘 모릅니더."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며 마치 죄지은 사람 취급하는 것이 기분이 무척 나빴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입을 삐죽이 내밀고 두 손을 앞으로 그러모은 채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가락을 주무르며 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쳐다보던 작은 김치 할머니의 아들은 여자에게 다그치며 성질을 부렸다. "왜 그래? 저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여자는 서울에서 왔음이 분명했다. 방을 나오면서 내 손에 땅콩을 한 웅큼 쥐어주는데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여자는 여관을 나올 때까지 내 어깨에 그 가늘고 긴 손을 얹고 있었는데 은은히 풍겨오는 냄새가 아주 좋았다. 작은 김치 할머니의 아들은 내내 툴툴거렸다.
김치 할머니 집에서 텔레비젼은 그 날 이후로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야기로는 김치 할머니 아들이 사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들고 나갔다고 했다. 큰 김치 할머니와 작은 김치 할머니간에 대판 고성이 오간 것은 어느 저녁 먹고난 후의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빨리 그 가스나랑 치워뿌리지 뭐할라고 그렇게 질질 끌어쌓노?"
"뱃속에 자슥이 들어섰다고 같이 살아지는가?"
"그라믄 허구한 날 저렇구로 집구석에 남아도는 기 없도록 할끼가?"
"어이구 이 나이 먹도록 자식이 저렇게 애믹일줄 누가 알았나.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낀데."
"해보나마나한 소리!"
석이 아재는 늘 장난이 심했다. 그는 도무지 어른을 두려워할 줄 몰랐다. 가끔 재미삼아 옥상으로 올라와 기와지붕을 타고 우리 집으로 오려다 큰 김치 할머니한테 들켜 욕을 지청구로 들어도 눈 하나 까딱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형님!" "형수님!"하고 씩씩하게 부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아재에게 늘 고분고분한 음성으로 "예, 되름!"하며 마치 자식을 품듯 따쓰하게 받아주셨다.
나이 차가 저렇게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형, 동생 사이가 되는 것은 그 시절 비일비재했던 터라 어린 나는 별 의심을 품는 일없이 한 동기처럼 잘 지냈지만 어느 날 나는 다른 친척 형으로부터 석이 아재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아재하고 우리하고는 핏줄이 완전히 다르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 형은 이제부터 석이 아재에게 아재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뜻을 은연중 내비쳤다.
“그날 밤에 친구 장례식에 문상을 갔다가 그 집 아지매하고 자는 바람에 아재가 태어난 기라. 그래가지고 할아버지가 아재가 어릴 때 고모할머니한테 데리고 왔는데 아직 이야기를 안했단다. 만약 했다가 친엄마 찾으면 난리난다캐서 아무도 말을 안해줏다 아이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재가 이런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모른 척 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윤채야, 니는 절대로 모른 척 해야 한다이. 내가 이야기했다고 절대로 말하면 안된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사촌형은 몇 번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물론 나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구나 라고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건 나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석이 아재와 난 담을 사이에 두고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마주치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모른 척 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하지만 친자식과 아닌 것의 뚜렷한 구별이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나로서는 며칠 지나지 않아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밀 누설에 대한 고민이 희석되었고 그냥 아는 정도로 지나가버린 것 같다. 왜냐하면 석이 아재 집은 주변에서 알아줄 정도로 부자였기 때문이다.
비가 내렸다. 집 앞에 있는 조그만 하천으로 탁류가 누렇게 흘러가는 모습이 창문 한편으로 보인다. 후련하게 내리지 않은 탓에 습한 공기가 아직 남아있다. 집 앞에 매어놓은 아들 자전거의 잠금장치를 풀고 인적이 드문 도로를 찾아 길을 나선다. 얼마 달리지 않아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난다. 이미 집으로부터 한참 달린 후라 돌아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소나무 그늘로 급히 몸을 숨긴다. 지나가는 비라 곧 그칠 것을 바라면서 얼굴로 흘러내리는 땀을 부산하게 닦는다.
아내와 나는 이 도시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한지 어느덧 십사 년째니 벌써 여러 군데의 살 곳을 전전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이곳은 아내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처음 말했을 때 아내의 표정은 그리움이 간절했다. 이곳으로 오면 그럭저럭 숨을 쉴 것 같았던 모양이다. 실제 이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 아내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왔다. 한 달에 기껏해야 서너 번 밖에 볼 수 없는 시간이지만 볼 때마다 눈에 띄게 건강해지고 얼굴이 밝아졌다.
그때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급하게 이사를 내려올 필요도 없었고 마음의 상처를 받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말 한마디의 차이였다. 그리고 아직 세상살이에 덜 여물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때는 차분하게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고 한 번도 현재의 생활에 대해 답을 구한 적도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아니 물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늘 되풀이 되는 생활이긴 했으나 일상의 쳇바퀴에서 불만을 가지지 않는 온순한 다람쥐에 불과했던 탓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 년이 지났다. 그때 난 영종도에 있었는데 그곳은 새로운 국제공항을 짓느라 허허벌판에 하루 종일 마른 먼지가 자욱히 날리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재래시장과 같이 떠들썩하게 바쁜 곳이었다. 계획에도 없는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해 내가 소속된 건설회사는 물론 건설회사의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멀리 해외에서 데려온 외국인 기술자와 수많은 노무자들까지 한정된 공간에서 모두 복작거리다 보면 어두운 새벽에 시작된 하루는 어느덧 중천을 넘어가있기가 예사였고 곧 야간을 준비하는 팀들로 숙소와 현장사무실이 있는 캠프 근처는 늘상 떠들썩했다.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아예 없는 지도 몰랐다. 자정이 넘어 영등포 쪽방처럼 지어진 현장 숙소에서 잠을 청할라 치면 야간작업을 마치고 들어오는 동료소리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좁은 섬을 헤집으며 술집을 기어코 찾아 마시고는 한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를 내며 숙소를 들락거리는 바람에 애초에 깊은 잠을 자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내가 묵고 있던 옆방에는 나이든 작업반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야윈 몸에 한낮의 뜨거운 햇빛에 그을은 새까만 피부를 한 채 고향은 저 남쪽 해안지대인 거제도라 했다-밤마다 낡고 조그만 라디오를 틀어놓아 더더욱 힘들게 했다. 어쩌면 그 편이 두께가 얇아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칸막이 벽 너머로 서로에게 신경쓰는 것보다 나은 지도 몰랐다.
겨울에 갔던 현장은 어느덧 여름이 되었지만 전체 공사는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한 채 지지부진했다. 따라서 현장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은 일자체가 점차 시들해져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사 진척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공사기간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했던 계획초기 단계부터 진두지휘했던 감독관청의 무능과 부정에서 초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으로 치면 도로의 체계를 상세하게 알려줄 지도책이 부실한 상태에서 출발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인데, 공항전체에 대한 기본도면만 나온 상태에서 공사를 시급하게 밀어붙인 것이 결국 중도에 더 이상의 공사진척을 가로막는 ‘제 발등에 도끼를 찍은 격’이 되고만 것이다. 한창 골조가 올라가야 하는 공사전체로 봐서는 가장 박진감 넘치는 단계로 어떻든 아무 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무언가가 계속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지겹도록 본 어제지만 하루가 지난 여명의 아침에 현장에 나가 어제의 성과를 바라보는 일은 감개무량 그 자체에다 하루를 활력 있게 시작하도록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도 하는 것인데, 이제 더 이상 그런 재미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언젠가부터 드넓은 현장 주변의 황량한 야적장에 거대한 무게의 철골 부재들이 하나 둘 쌓이더니 날이 갈수록 그 수가 점차 늘어갔다. 도면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가 그 첫 번째고 두 번째의 이유로는 그 사이 설계 변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설계 변경이 있었다니. 현장 캠프에는 시공을 맡은 회사의 사무실이 있고 그 옆으로 설계를 검토하는 설계부서가 있는데, 그들의 주된 임무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공사의 도면들이 과연 시공에 적합한 지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도면이 확정되지 않은 탓에 불투명한 실시설계 도면들이 파란 청사진으로 굽혀져 미처 식지 않은 채 뜨거운 열 그대로 현장 사무실에 날마다 날라져 오는데 그것만도 현장 시공기술자들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어느 것을 보고 시공을 하면 나중에 재작업을 하는 과오가 발생하지 않을 것인가. 이번에 개정되어온 도면은 믿어도 되는 것인가. 건설현장에서는 명확하지 않으면 생리상 사고를 초래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그런 불확신 속에서 작업을 했다가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일을 반복하는 일에 현장의 기술자와 노무자들은 더운 여름 열기와 더불어 서서히 지쳐갔다. 당연히 불만도 늘어갔다. 그리고 당시는 국가 전체가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던 때여서 직장에 대한 불안도 가중되던 터였다. 작업이 교착상태에 빠지면 현장에 있는 기술자들은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는 컨테이너로 하나 둘 모여 불안한 앞날에 관해 냉소적인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오후에 누가 본사로 들어갔고, 내일은 누가 또 불려 갈지 모른다. 상황이 이러한데 제대로 된 판단력이 서 있는 경우란 아주 드물었고 어떻게 처신을 잘해서 현장에 끝까지 남아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당시에 농담으로 이런 말이 쓰였는데, ‘너 죽을래?’하면 그것은 ‘너 짐싸서 집에 갈래?’라는 뜻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내가 현장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나 지금 선착장에 도착했어."
아내는 서울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혼자 지쳐갔다. 화장을 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웃고 있었지만 오히려 나보다 더 지쳐보였다. 우리는 얼마 사이에 많이 초췌하게 변해버렸다. 마치 무엇인가 확인하러 온 사람 같았다. 바닷바람에 곧 날려가 버릴 것 같이 여윈 모습이었다. 우리의 아들은 장모에게 맡기고 왔다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먼저 답을 한다. 이것은 아내의 오랜 버릇이다. 그렇게 하면 가슴에 맺혀있는 갑갑증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듯이, 복잡한 머리가 개운해지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할만한 일들에 관해 빠른 속도로 보고하듯 말을 뱉어낸다. 멀리 출발 때부터 선착장까지 따라온 갈매기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아내는 나를 만나고 식성부터 해서 식사하는 습관까지 많이 변했다고 했다. 결혼 전에는 고기는 먹어도 삼겹살 같이 기름이 많고 냄새가 심한 것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랬던 사람이 나를 만나고부터는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먹는 속도도 빨라졌다고 한다. 아내는 언제나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칭찬하면 그녀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당신 만나고부터 생긴 버릇이야. 얼마나 밥을 빨리 먹는지 자칫 잘못하면 내 몫까지 빼앗길 것 같아서 그렇게 된 거야.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 그날도 아내는 식사를 복스럽게 했다.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은 모두 바닥을 드러낸 접시들로 깨끗이 비워져 있을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으레 그렇듯 미리 예약한 호텔로 바로 돌아와 입실 수속을 마치고 호텔 로비 한 코너에 마련된 카페에서 칵테일 한 잔 하고 올라가자는 제의마저도 물리친다. 그날 밤 아내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뭔가를 한참동안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쏟아지는 잠에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허리로 두 손을 감아들자 쓰고 있던 안경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스탠드 등을 껴며 “잘 모르겠어.”라고 한다. 그날 밤 아내는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아내가 다녀간 다음날 현장에는 뜻하지 않은 손님이 밀어닥쳤다. 감사원에서 사람이 나온 것인데 곧 있을 감사에 대비해 미리 암행시찰을 나온 셈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마다 흔히 있는 방문객처럼 평상복 차림으로 현장에 들어왔는데, 수행하는 공단의 직원들은 입이 강제로 봉해진 사람 마냥 아무런 말을 우리에게 해주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알아챌 수 없는 상황에서 난 그들이 묻는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기술자들이란 그들의 분야와 관련된 자연스런 질문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도면이 먼저 완성되고 공사를 시작했어야 하는데 충분한 검토도 없이 기본도면에 의지한 채 서둘러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결국 이런 식으로 재작업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공사에 관한 상황설명이 끝나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방객은 지나가는 말투처럼 넌지시 ‘공사하는데 무슨 애로사항은 없는가?’라고 물었고 난 그래서 공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말한 것인데 결국에는 아무런 지각없이 주절주절 나불어 댄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감사팀의 팀장이었다. 수행해온 공단의 직원이 소리 없이 지그시 누르는 단화의 묵직함을 난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 세 번째에 가서야 웬일인가 싶어 돌아보았지만 때는 이미 돌이키기에 너무 늦었다는 듯 표정을 잔뜩 찌푸린 공단 직원은 난색을 표명하고 있었다.
바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늘 깨어있는 삶이란 무척이나 어려운 법이다. 일어나면 먼지가 폴폴 날리는 침대부터 운전석 곳곳의 틈서리마다 바짝 끼어있는 새까만 먼지까지 온통 먼지를 밤늦게까지 뒤집어쓰고 사는 생활에서 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일 수도 있다. 더위까지 만연되면 반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해지는 곳이었다. 난 단지 그날 재수가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의 내 인생은 벌거벗은 채 황야로 내몰린 것처럼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녁에 갑자기 전 직원 회의가 소집되었다. 전에 없던 일이어서 내심 당황했지만 연락을 받고 급히 차를 몰아 도착한 현장 사무실은 전 직원이 오랜만에 모인 터라 여러 가지 이야기로 회의 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각종 안전사고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터라 현장 일을 마치고 사무실이 있는 캠프로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좀 전에 있던 어떤 일이든 잊어버리는, 안되면 잊어버리려는 습관이 현장 직원들에게는 은연중 배어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소장실의 회의 테이블 주변으로 이삼십 여명의 많은 인원들이 모인 틈새로 파고들며 긴장을 풀어버리고 있었다. 소장이 회의가 끝나갈 무렵 나를 전체 직원들 앞에서 혼자 일으켜세워 간접적으로 힐난할 때까지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회의장에 들어가고 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부터는 옆에 앉은 전기 공사팀 간부들과 이러저런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나누며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때는 내 인생에서 한창 좋을 무렵인 이제 이십대를 갓 넘긴 삼십대 초반이었다. 아들 재령이 태어나 한창 재롱을 부리며 아내와 나를 즐겁게 해주던 시절이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입을 조심해야 한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다. 학생과 주임 선생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꽤 무서운 선생으로 통하는 키가 농구선수만큼 커고 전체적으로 마르면서 눈만 뻐끔거리던 수학 선생님이 계셨는데 한 번 애들의 뺨을 후려치기 시작하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사정없이 매서웠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수업만 들어오시면 영 딴 사람이 되었다. 수학을 가르치시는데 어려운 공식을 설명할 때마다 꼬박꼬박 존대어를 사용했다. 우리들은 수업만 놓고 볼 때는 선생에 대한 그런 무서운 이미지를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 선생님께서 한 번은 수업도중 그 날 무슨 일이 신변에 있었던 것인지 문득 훈계를 하시는 것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남자들은 많은 일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러한 곤경에 빠지지 않으려면 세 가지 입을 조심해야 한다. 입은 그 종류가 세 가지 있는데, 첫째는 말 그대로 우리들이 말을 할 때 사용하는 바로 그 입이다. 즉,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큰 어려움들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두 번 째는 바로 우리의 손가락, 엄지를 말한다. 흔히 도장에 비유되는 것으로 함부로 도장을 찍지 말라는 것이다. 각종 계약서나 신용보증과 같은 서류에 엄지를 남발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 번 잘못 사용함으로써 패가망신하고 폐인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너희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자지, 즉, 남근의 사용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쉽게 어려움으로 빠져들게 하는 남자들만의 약점인데 함부로 사용하다가 인생의 내리막길로 떨어지는 경우 또한 많이 보았다. 너희들은 이 세 가지 입을 평생동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말씀하시는 논조가 갑자기 엄숙해졌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난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는 어느 일상생활 중 내 입으로 흘린 한 마디의 말로 인해 ‘마른 하늘에 내린 날벼락 격’으로 저녁에 갑자기 모인 회의실에서 이십 여명의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멸을 당했고 결국 강제로 사표를 내고 말았다.
“결혼도 하고 나이도 서른이 넘었으면 주변의 사태가 어떤 정도인지 꿰뚫어 보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사리판단은 서있어야 하는 법인데, 당신은 그렇지 못했어. 이 공사가 끝나면 다음에 이어질 2차 물량의 수주에 회사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모르나? 그동안 우리가 공단 직원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정성을 들였나? 현장에서 감독관들과 늘 같이 있었으면 그 정도는 굳이 말을 해주지 않아도 피부로 감지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일 본사로 올라가도록 조치를 해줄 테니 저녁에 짐을 정리하도록 해.”
3
그곳은 폐허였다. 한강을 끼고 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해 낡은 집들을 모두 부숴버렸는데 오래된 저층 아파트 일부가 흉물스럽게 남아 마치 낡아서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만큼 음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말로 그러했던 것은 입구로 들어서면 벽의 페인트가 아무렇게나 난도질당한 것처럼 벗겨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금이 가 있거나 청소는 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먼지가 잔뜩 쌓여있고 곳곳에 거미줄이 쳐 있는 모습들은 건장한 어른이라도 금방 주변을 경계하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게 만들 수 있는 어둠 같은 것이었다.
“가구 수가 얼마 안 남아서 사람 사는 냄새가 안 풍겨서 그럴 거야. 전체 통틀어서 서너 가구 남았을라나. 우리도 조금 있으면 이사 나가기로 했다. 저 언덕 너머로 이사할 집을 얼마 전에 결정했다.”
문이라고 붙어 있어서 두드리니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데 출산한 지 얼마 안 되는 부스스한 모습의 누나가 문을 열고 찾아온 사람을 확인하며 한 말이었다. 누나의 누런 얼굴에 기미가 조금씩 내려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소도 잘 안하고 사는지 방이 온통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습이 들어서며 보았던 아파트의 음산함과 맞닿아 있었다.
이제 누나의 나이도 삼십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난 마치 오래 산 사람처럼 누나의 누런 얼굴과 나이를 마음속으로 따져보았다. 애처로웠다. 어릴 때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결혼해서는 좀 더 부유하게 살기를 바랬는데 아버지의 말처럼 세상일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다. 보잘 것 없긴 하지만 결혼할 때 장만한 각종 가구와 전자 제품 등 혼수감들은 아이를 셋 낳는 동안 모두 고장 나거나 흘러간 세월처럼 고스라니 낡아버렸다. 마치 곧 허물어 없어질 우중충한 이 아파트만큼 초라한 흄물처럼 변해있었다. 두꺼운 먼지까지 쌓여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누나는 아무런 일 없다는 듯 오히려 웬일로 이런 평일 대낮에 방문했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건강하니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아버지를 닮은 누나는 뼈대부터가 굵고 어릴 때부터 건강한 터라 자질구레한 병치레 없이 이날까지 살아왔고 조카들 또한 모두 건강했다. 조금만 기온 변화가 있으면 심한 감기와 몸살을 앓는 허약한 체질의 나와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누나는 성격부터가 매사에 고민을 안고 사는 나와는 달리 매우 낙천적이었다.
“난 걱정 안한다. 일이 잘 될라믄 언젠가는 다 술술 잘 안 풀리겠나.”
매형은 가난한 사람이었다. 배운 것도 그렇고 가진 것도 없는 많은 형제와 나이가 든 홀어머니와 사는 순진한 청년에 불과했다. 만약 누나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다면 결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둘은 누나가 다니는 집 근처의 성당에서 만났던 것이다. 매형은 제대 후 결혼이 급했다. 결혼 전에 날마다 뻔질나게 결혼 승낙을 얻기 위해 집 주위를 맴돌곤 했는데 밤에 공부하고 있던 나를 포장마차에 불러 술이랍시고 사주며 친하기를 청했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어머니는 반대였다. 어머니 역시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아 고생을 많이 했던 터라 누나의 혼처로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금은방을 운영하는 어느 부잣집 아들이 맞선 상대로 알려졌는데 누나가 한사코 싫어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야기가 약간 빗나가지만 누나는 내가 아는 누나와는 약간 아니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너무 순진해서 사람들의 속을 잘 헤집어 볼 줄 몰라 착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같이 자랄 때 성당에 착실하게 잘 다니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 이렇다 할 사고도 한 번 낸 적이 없고 귀가 시간도 늘 한결같아 주변에서도 인정하는 얌전한 누나로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실제로 얌전한 누나였던 것 같은데 혼기에 접어들면서 약간 변화가 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누나도 여자인지라 에로스의 한 방의 화살에 그 동안의 신념이 흔들렸다고 할까 아니면 그 동안 내색하지 않고 숨겨왔던 여자로서의 본성이 서서히 드러났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후자가 맞지 않나 싶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도 마음이 약하고 모질지는 못한 분이 분명하다. 난 어머니 당신 스스로가 나에게 한 번씩 은연중 하시는 말씀 속에 당신 스스로가 매우 대가 센 성격이라고 언급한 부분을 자주 기억하며 성정이 매우 강한 분이라 여기며 자랐는데 누나의 혼사를 정함에 있어서 누나의 철없는 의견에 밀려 자신의 생각을 물리신 것을 보고 그리고 지금에 와서 다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때 그 금은방을 운영하는 부잣집 총각에게 시집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그때 그 모든 대사는 누나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추진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구차하지만 아이들 셋을 낳고 악착같이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을 보면 외양이 유약하고 주변머리라고는 없어 보이는 매형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좀 미화한다면 누나가 매형의 구원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때가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고 신혼 초 부산에서 몇 년 살던 누나는 일이 잘 안 풀려 서울로 올라가게 되고 다시 몇 번 더 이사를 한 끝에 이곳 덕소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사이 누나의 얼굴에는 핏기 없는 누런 안색에 파란 기미까지 내려앉아 아무렇게나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고 먼지도 잔뜩 낀 방처럼 초라한 여염집 여자로 늙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내가 수상해보였던 모양이다.
“웬일이고? 이렇게 연락도 없이.”
들어설 때 누나는 동그랗게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철거 관련해서는 건설 회사 측과 이미 매듭을 지었지만 그래도 남은 조합원들끼리 간혹 비상회의를 하곤 하는데 그것 때문에 갑자기 찾아왔는가 싶었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저간의 사정도 곁들여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면 이해해줄 누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말이 다소 길어질 뻔 했지만 구석에서 배를 드러내 놓은 채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막내 조카 놈이 깨어나 칭얼대는 바람에 그만 멈추었다. 다른 것은 다 이해해도 남자가 일 없이 집에서 빈둥대는 것은 절대 못 본다는 것이 누나의 남자에 대한 고집이었다.
“저 놈 태어날 때도 못 와보고 사는 게 뭔지.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살면서 그것도 지척에 두고 누나 집에 자주 오지도 못하고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게 아닌 것 같아 왔어.”
제법 그럴싸하게 말을 해놓고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사실 전화를 먼저 하고 왔어야 하는데 지난번 오는 길에 보았던 팔당대교 주변의 탁 터인 풍광이 시야에 선해 먼저 출발부터 하고 본 것이 그만 전화를 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집과 건물이 빽빽이 들어찬 서울 시내를 벗어나 하남시로 접어들면서부터 산이 보이고 낡은 이삼층 집들이 군데군데 들어앉은 양이 어릴 때 자라던 동네 주변의 모습과 비슷해 마음이 포근해졌는데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광활한 팔당대교를 건너면서부터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직장을 얼른 찾아봐야지. 올케가 힘들어서 어떻게 하노?”
“글쎄 그게 말이지...”
난 이즈음해서 이 생활에 점차 맛을 들여 직장 찾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찾아본다고 아내에게 말을 하고는 집 근처의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시간을 보내는 데는 이만한 데가 없었다. 열람실에서 두꺼운 책 한 권 꺼내들고 읽기 시작하면 오전 한나절은 금방 지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날 온 신문들을 전부 읽어도 한나절 보내기는 그만이다.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아내가 차려준 점심을 얼른 먹고 다시 나오면 그때부터는 되는대로 걷는다. 올림픽 공원도 가고 서울 거리치고 제법 한적한 곳이 있거나 행사가 있는 곳이면 찾아가서 시간을 또 보내는 것이다. 그러다 빠른 시간 내 직장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급하게 올라온 장모님과 의논한 아내는 이삿짐을 싸 고향으로 서둘러 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누나가 사는 이곳은 동네 이름 자체가 아직도 촌 냄새를 풍기지만 개발이 덜된 탓에 낡은 시골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올 때마다 푸근하고 정겨웠다. 언젠가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남은 시간을 살아야 할 때 마지막으로 올 곳은 이런 동네가 아닌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한다. 어릴 때 가난하게 살면서 자랐던 동네 모습을 드라마 세트장처럼 온전히 갖추고 있어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그런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기존에 살던 철거 예정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네로 새롭게 이사한 누나 집에는 희한하게도 어린 시절 다락방을 떠올리는 이 층 방이 조그만 목재 계단과 함께 현관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우선 무엇보다 누나에게는 내가 아직 어릴 때 우리처럼 아이들이 많았고 조카 셋은 아직 어리다. 조카들과 나는 당분간 이 층으로 통하는 조그만 목재 계단을 장난치듯 올라가면 나타나는 커다란 박스모양의 방 두 개와 그 방 사이를 잇는 목재 바닥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조카들은 아직 어려 자기들과 내가 당분간 같이 지낸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런 점들이 나를 달뜨게 한 것 같다. 아니다. 나를 달뜨게 만든 것은 또 있다. 사는 집을 나와 조금만 걸어서 돌아가면 바로 한강과 마주하는 산책로로 이어지는데 걸으면 코 닿는 곳에 위치한 이 거리감, 발을 내딛기만 하면 풍부한 수량의 파란 한강이 거대하게 소리도 없이 흘러가며, 저 멀리 한 눈에 들어오는 선비의 어깨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한강을 발치에 둔 검단산은 하나의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찾아갔던 무렵은 매일 아침 청명한 파란 빛으로 주변을 휘감는 가을이라 조카들이 학교나 유치원으로 빠져나가고 난 아침나절에는 거리낌 없이 운동화를 꿰신고 한강 둔치로 달려나가게 했다. 자전거라도 타게 되면 가을의 푸른 검단산 아래부터 한강 산책로를 끼고 쉬임없이 달리게 되는데 고가도로 아래의 그늘을 따라 힘껏 달리다 지치면 내려서 걸으며 마주 오는 행인들을 구경하거나 간만에 물오리들이 가족을 이루어 강가를 따라 노니는 모습을 둔치에 퍼질러 앉은 채 구경한다.
조카들은 삼촌이 자신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에 차츰 적응하기 시작하자 슬슬 장난을 치려들었다. 둥글게 모여서 앉아 두 손을 모아 박수를 치며 여러 가지 어릴 때 주로 했던 놀이들을 가르쳐 주면 즐거워 죽겠다는 듯 입을 벌려 큰 소리로 웃으며 방바닥을 뒹굴었다. 그 뿐인가. 아랫 동생과 주로 했던 레슬링을 이 아이들과 해보는 것이다. 햇빛이 잘 들지 앉는 복도에서, 창문 아래 이웃한 집과 나눠 쓰는 조그만 마당이자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이 방 혹은 저 방에서.
내가 이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즈음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지는 잘 모르지만 뭔가 내 인생에서 한 획이 지나간 것 같은 허전함과 이제야말로 뭔가를 시작해 볼 때가 아닌가 하는 내 안에서 수시로 이는 충동이 교차하면서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회사를 반강제로 떠나오면서 내 인생의 한 축이 떨어져 나간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첫 단추를 잘못 뀄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나를 가둬놓은 저 막강한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궤도를 간다는 것은 지금의 내 나이로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먼저 사회는 용인하지 않을 테고 틈만 나면 그 울타리로 잡아들이려는 마수의 손길이 언제나 주변에서 스멀거리며 활개치는 탓이다. 다른 직장으로 이내 옮기게 됐지만 이미 모든 것이 어긋난 채 전과 같이 톱니바퀴처럼 물려 돌아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갑자기 느슨해졌다. 인간관계, 업무의 연속성, 만족할만한 처우, 주변의 차가운 시선 등에서 예전과 같지 않았고, 그럼에도 난 기민하게 그 속으로 엮어들어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식의 자의반 타의반 방출은 삼사 년 정도 계속 이어지더니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마치 사전에 각본을 짜 맞춘 듯 갑자기 끊어져 버렸다. 어물거리거나 서성거리고가 없었다. 칼로 무 자르듯 싹둑 잘려 세상 밖으로 내쫓기고 난 다음에도 세상이 이렇게 매몰차다는 것을 어렴풋이도 느끼질 못했으니. 그냥 낑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그런 나를 혼자 서울에 남겨두고 훌쩍 지방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 무렵 덕소는 아련한 어린 시절 다락방 같이 아늑했고 포근했다. 누나는 마치 어머니 같았고 어린 조카들은 그런 내게 시가 되고 산문이 되었다. 나를 매몰차게 뱉어낸 세상을 향해 다시금 꿈을 꾸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의 무한한 영감의 원천인 다락방 속에서 지붕을 난 창을 통해 아무 걱정이라곤 없이 높게 펼쳐진 하늘을 앉은뱅이 책상에 턱을 괸 채 마음껏 쳐다보는 일이었다. 그것을 원고지에 고스란히 옮겨놓는 일일 뿐인 것은 차라리 조카들과의 흥겨운 놀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난 매일 매순간마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지방으로 내려간 아내와 아들은 안중에 없었다. 오히려 가난하고 구차한 누나의 살림살이와 이런 시골구석의 허름한 집이, 티 없이 웃으며 장난치는 조카들이, 한 발자국만 나서면 만나게 되는 거대한 한강과 그 산책로가 끝없이 펼쳐지는 언덕 둔치들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한 채 한 폭의 그림 같은 검단산이 동영상처럼 비어진 머릿속으로, 영혼을 새롭게 단장하며 넘치도록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헐거워진 살 속에 뜨거운 피로서 다시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난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만들어지고 난 다음의 나는 당연히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누나가 보기에도 내가 어리둥절했다. 나는 그 생태적 삶의 천연적 환경 속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던 누나 앞에서 조카들의 환상처럼 새롭게 변신하고 있거나 진정으로 고추를 벗겨내고 비로소 나비로 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곁에서 지켜봐온 누나의 눈길이 절실히 필요한 필연적 과정이 아닐까도 싶다. 아니면 나는 날마다 바쁘게 사는 누나 앞에 어느 날 갑자기 결혼한다고 나타나 아직 한 인간으로 비로소 거듭 태어나는 과정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해 추가로 그 노정을 확인시켜야 하는 과정을 지금 여기에 와서 실현시키는 어이없는 해프닝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