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울돌목과 몽골항전 용장성을 찾아서(#5-6)
2022년 9월 25일 (일) 날씨 : 흐림 기온 : 섭씨 12~23도
거리 : 21km 5시간 30분 동행 : 30명
장포마을-진도대교-용장성
장포마을회관 앞에서 다함께 찰칵!
추분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지겹게 더웠던 6~8월과 비와 태풍으로 전전긍긍했던 9월이 아스라하다.
인간의 나약함은 코로나로도 증명이 되었지만 자연 재해는 밀려드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어 초라해진다.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고 들판의 곡식 여무는 소리가 새털 구름으로 수놓은 하늘과 함께 정겹다.
무려 3시간 30분의 이동으로 지친 몸이지만 걷는 길위에 서면 에너지가 충전되고 활기가 생긴다.
30명의 참가자들이 버스에서 쏟아져 나오자 장포마을회관 주변은 소란스러워졌다.
온통 초록의 배추밭으로 덮인 들판 S자 시골길을 걷는 모습이 장관이다.
신나게 물을 뿜는 스프링 쿨러를 피해 요리조리 몸을 돌리는 일행들 모습이 우습다.
해남 장포마을 배추 재배 단지
장포마을에서 학동마을로 이동하며 보았던 특이한 광경은 아직도 배추 모종을 갓 심은 밭이 보인 점이다.
한꺼번에 수확하면 가격이 낮게 나오므로 시간을 두고 차별적으로 재배하는 과학농법이다.
홍수 출하를 하면 가격이 뚝 떨어지는 어려움을 재배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극복하려는 지혜가 보인다.
붉게 익었던 고추들은 어느덧 수확이 끝나고 이곳저곳 방치되어 뒹구는데 한무리의 일꾼들이 벌써 마늘을 심고 있다.
학동마을
울돌목이 보이며 길은 산자락으로 들어서는데 이충무공 산책로로 이름이 붙어 있고, 녹진관광단지의 많은 건물과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울돌목의 조수는 세고 급한데 봄철에 뜰채로 숭어를 잡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낚시를 준비한 일행의 수준급 실력을 기대해본다.
울돌목 진도대교
진도대교를 건너기 전 명량정에 들렀는데 해전의 전 과정을 자세하게 적어논 자료가 눈에 띠어 읽어 보니 대첩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12척의 배를 이끌고 대승을 거둔 것이 이순신 한 개인이 아니라 주민과 노를 젓는 군사들이 한데 뭉쳐 이뤄낸 쾌거라는 것을 알게 했다.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울돌목은 물살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 조류의 방향이 바뀐다고 한다.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대승을 거둔 충무공 이순신의 고뇌와 필살의 신념에 감탄한다.
명량정
<명량정(鳴梁亭)-명량대첩 관련 글>
모든 지식과 역량을 쏟은 명량대첩.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면서 원균에게 넘겨준 조선 수군의 전력은 대략 군함 300여 척, 천자포 등 대포 300문,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그 수군이 1597년 7월 15일 거제도 해역 칠천량에서 크게 패배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고, 함대는 일본군의 수륙 합동 작전 앞에서 무참하게 박살 나고 말았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해 갈 수 있었다.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 그에게는 군관 9명과 군사 6명뿐이었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는 교서 하나만 들고 거대한 파도처럼 밀어닥칠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명량해전(울돌목 싸움)은 이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군함 13척과 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으나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함선이 명량해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은 시작되었다.
일본 함선이 통과하려는 해협은 수로의 평균 폭이 500m지만, 배가 다닐 수 있는 가장 좁은 곳은 150m에 지나지 않는다.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최저 수심은 1.0m이며 조류의 속도가 11.5노트로 매우 빠르다. 일본 수군은 명량의 순류를 타고 거침없이 전진해 왔다.
일본군 함대는 해협을 따라 좁고 길게, 거의 2km에 걸쳐 행렬을 이룬 채 다가왔다.
이순신은 군함 13척을 일렬횡대로 쭉 늘어세워서 적과 맞섰다. 그러나 이순신의 독려에도 조선 수군의 전멸은 무너졌다.
명량의 급류를 역류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에 격군들이 노를 힘껏 저어도 조금씩 뒤로 밀린 것이다.
이순신의 기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기함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 연결된 채 바닷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일본 배 밑바닥이 뾰족한 것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앞장선 선두함이 걸렸다.
그 뒤를 빠른 조류를 타고 달려오던 다른 배들이 들이받기 시작했다.
연달은 추돌 현상으로 일본 배들은 급속도로 진형이 무너져갔다.
혼란에 빠진 일본 군함을 향해 일제 공격이 벌어졌다. 조선 군함에서 탄두에 철갑을 두른 초대형 화살인 대장군전이 발사되었다.
머리통만 한 단석들도 발사됐다. 화포와 조란탄도 발사됐다.
이순신의 기함이 분전하면서 조선 수군의 다른 함선들도 총공격에 나섰다.
이순신의 기함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죽은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주검에서 목을 베어 내걸었다. 일본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 수군의 순류 쪽으로 바뀌자 전세는 완전히 조선 수군 쪽으로 기울었다.
일본 수군은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31척이 격침된 반면 조선 수군은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호남지역의 제해권을 되찾게 되었다.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대략 17차례, 그는 이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17전 17승을 거둔 것이다.
이 전투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 바로 가장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 이겨 정유재란의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이 명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명량정 안내문에서)
서해랑길 6코스 안내판
망금산 케이블카와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
명량대교를 건너며 6구간이 시작된다. 망금산 전망대를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하지만 주변 조망을 볼 수 있고 진도에 들어선 초입이기에 거침없이 걷는다.
데크로 연결된 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푹신한 마포를 깐 길이 주욱 연결되어 좋다.
무궁화 평화동산을 지나며 만난 원두막 정자에서 일행들과 점심을 들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맛있는 반찬과 김밥 그리고 갈증 해소에 좋은 맥주까지 곁들인 여럿이 함께한 풍성한 자리였다.
명량대첩로
일주도로는 진도를 한바퀴 도는 120km 거리인데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으며, 주민들의 삶과 풍광 그리고 현재의 모습이 함께 한다.
트로트의 여왕 송가인의 집도 만나고, 대파 재배단지도 볼 수 있으며 운림산방과 삼별초 고난의 현장도 탐방할 수 있다.
둔전방조제
벽파마을
벽파진에서는 이충무공의 전첩비가 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피를 흘린 조선군과 왜군의 처절한 전투를 되새길 수있다.
12척의 적은 배로 일본의 대함대를 무찌른 명량해전의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벽파진의 전첩비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왜덕산(倭德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명량전투에서 죽은 왜군 시신들이 바다에 떠 있다 육지에 도착하자 주민들이 거두어 묘를 만들어 안장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일본의 전 수상이 와서 진도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벽파진은 옛날부터 진도의 관문 구실을 했던 나루터로 명량해협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바다 건너편은 해남군 황산면 땅이다. 포구 뒷편 암산에 오르면 이충무공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
195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이은상 선생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 있더니라.”
이 시귀가 벽파진의 이충무공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함선으로 명량해협 (울돌목)에서 3백여 척의 왜선을 섬멸, 유명한 명량대첩(1597년)을 거둔다.
벽파진은 바로 그 명량대첩을 거두기 직전 16일 동안 이순신이 머물면서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고민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석의 높이는 11m이며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명량해협을 굽어보고 있다.
이곳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고려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 행궁터가 나온다.
용장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곳에서 몽골 군에 맞서 싸우다 남도석성으로 밀려가고 끝내는 제주도로 건너간다.
벽파진은 지금도 항구의 기능을 발휘하여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가 하루에 한 번씩 기항한다.
벽파정
벽파정(碧波亭)은 1207년(고려 희종 3) 진도의 관문인 벽파 나루 언덕에 창건하여 1465년(조선 세조 11) 중건하였으나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있었다.
이 정자는 내왕하는 관리와 사신들을 영접하고 위로하던 곳으로 정객과 문인들이 아름다운 경승과 감회를 읊어 많은 시구(詩句)를 남긴 명소이다.
벽파진은 정유재란(1597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 남은 배를 이끌고 16일 동안 바닷목을 지킬 때 향민들이 공을 도와 죽음으로 명량대첩을 이루었다.
고려말에는 삼별초 군들이 들어왔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벽파정 형판 고려 정언 조희직 글>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 변방엔 거센 바다 가까이 있고
손들어 사공 불러 건너려 하는데 세상에 나 기다리는 사람이 없네.
고요한 밤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차가운 달빛엔 만상이 흐른다.
滄江水 같은 술 가득 채워 마시며 나그네 흉금을 열고 시름을 씻노라.
<벽파정 현판 이수함 벽파정기>
진도는 아득히 떨어져 있는 천연의 요새다.
그 거리가 직선으로 5~60리인데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땅이 또한 기름져 목장에는 구름 같은 말 떼들이 비단을 펼친 듯 들을 덮고
유자나 무 주렁주렁 숲을 이루었으니
보물의 광이요 재물의 곳집으로 남쪽 고을의 으뜸이 되어
사신들의 행차가 끊일 새가 없었다.
벽파진 앞 바닷가와 감부도
연동마을
서해랑길 6코스 개략도(15.5km)
용장성으로 가는 선황산(230.9m)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
<삼별초 호국 역사 탐방길의 성황당 산성터 이야기>
진도군 군내면 용장마을 동쪽의 선황산을 일컫는다.
옥주지(沃州誌)에 따르면 지금의 용장에 있는데 고진도 때 성황신당(城隍神堂)을 건립하면서 산성을 쌓아 변란이 있으면 입보처로 삼았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이에 주목하여 진도지역의 향토사가들은 선황산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굴 조사 결과 선황산에는 제사유적과 제사에 사용될 제물을 준비하는 용도나 장대(將臺)로 추정되는 건물지만 확인되었다.
2~3m 높이의 건물지 기단이 흙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토성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진도군 안내판)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은 선황산 임도를 따라 용장성으로이어지는데 고갯마루에는 예전 토성으로 추측되는 산성이 있는데 변란이 있을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산성이라고 하면 우물이 있고 산의 정상 부분에 터를 잡고 축성되었으리라 여겼는데 용장성은 오히려 아늑한 산자락 기슭에 조성되어 놀랐다.
처음에는 조성된 몽골항전 기념관과 동상 등에 관심이 갔지만 차분히 용장성을 탐구하니 대단한 유적이었다.
사적 126호로 지정된 용장성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고 조성된 건물지와 용도를 설명도에서 보고 놀랐다.
강화도를 본떠서 만든 행궁의 모습이 보여 고려의 수도를 옮긴 터전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고려의 강화도가 멸망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고 행궁을 만들어 정권의 복원을 위해 싸웠던 삼별초의 위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고려항몽충혼탑
배중손 장군상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
배중손은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장군으로서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들을 포섭하여 1270년 삼별초 항쟁을 이끌었으며 진도로 남천한 후 진도정권을 유지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임연정권(林衍政權)에 협조한 삼별초와 6번도방(六番都房)에 소속되어 대몽강경파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1270년(원종 11) 고려 원종은 몽골에서 돌아온 이후 강화도의 모든 문·무 관리들에게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엄명하여, 삼별초에 대해서는 강화도에서 철수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삼별초는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형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몽골에 항복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한 뒤 강렬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강화도 주민들과 병사들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였다.
또한 섬 안에 있는 몽골인을 참수하여 단호한 대몽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 병기고를 접수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배중손 등의 삼별초 지휘부는 부몽화된 개경 정부가 몽골군을 끌어들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새 정부 수립 3일 후에 전라도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은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로 인해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한 것처럼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는 김준∼임연정권 시기부터 대몽골 강경책이었던 해도재천도론(海島再遷都論: 海島再遷論)으로 이미 거론되었던 전략이었고, 배중손은 이를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진도로 항전의 거점을 옮긴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구축하고 용장사를 개조하여 궁궐과 관부를 지은 다음 진도를 황도(皇都)라 부르며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으며 대내외적으로 고려 황제를 받드는 자주적인 정부임을 천명하였다.
마침내 이 소식은 본토에도 전달되어 전라도·경상도의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삼별초는 해상 조운로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하여 토벌하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단독으로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몽골과의 연합을 꾀하기도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당시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었고, 몽골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欣都)로 바뀌었다. 흔도는 몽골 황제 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배중손은 몽골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골에 내부(內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배중손의 이러한 제안은 앞서 자비령 이북 서북면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한 최탄(崔坦)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들의 안위 문제였듯이, 항복보다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위장 전술, 지연전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진도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5월에 홍다구(洪茶丘)가 몽골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이에 김방경·흔도·홍다구 휘하 12,000명의 여몽 연합군은 격전 끝에 진도를 함락시켰다.
30여 년 동안 대몽항쟁의 선봉에서 활약해왔던 삼별초가 진도에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 것은 고려와 몽골 정부의 유화책을 틈탄 속전속결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즉 고려 정부로서는 원종 자신의 왕권 회복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몽골로서는 일본 정벌을 단행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삼별초를 겉으로 회유하면서 조속한 시일 안에 진압하는 것은 공통의 중요한 현안이었다.
결국 삼별초가 세운 승화후 왕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이때 남도석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진도 함락 이후 배중손에 관한 어떤 소식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김통정(金通精)의 지휘로 제주도(濟州道)로 본거지를 옮겨 2년간이나 더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1273년 제2차 여몽 연합군의 공세를 받고 평정되었다.
용장성(사적 제126호)
용장성(사적 제126호)은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고려 정부가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강행하자 이에 불복하여 대몽 항쟁의 결의를 다졌다.
삼별초 군이 현종의 8대손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에서 남하하여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둘레가 약 13km에 이르며 산성 안에는 석축이 웅장한 계단 형상의 행궁터가 남아있다.
이번 서해랑길 진도 나들이는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하고 기분 좋은 탐방 여행이었다. 많은 참가자와 함께 역사적인 울돌목과 용장성을 만날 수 있어 기뻤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실수나 착각으로 지워지는게 많은데 오늘날의 현실도 세계적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삼각파도를 만나 고전 중이다.
이럴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말 식민지시대 그리고 한국전쟁을 되돌아 보며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어떤 것인지 예리하게 헤쳐 나가는 위정자들과 국민이 되어야겠다.
농촌과 바닷가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소중한 가르침이 더없이 나라가 소중함을 일깨운다.
첫댓글 자세한 역사를 잘 설명 하고 곁들인 사진
정말 감명을 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사진과 글 부탁드려요
역사 교과서 보다 더 상세한 후기 입니다 ㆍ
청산님의 열정에 큰 박수 ㆍ짝짝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