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씨의 역사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싫증한다. 한국인의 성씨는 현존하는 것만 해도 2백70여 성이 넘고 각 성씨에서 나뉘어진 본관의 수효만 해도 1천여 본이 넘는다. 그 1천여 줄기의 혈통은 대개 신화적 존재로 이 땅에 출현한 몇몇 분의 시조에게서 핏줄을 이어받아 분파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쓰는 성씨는 가문의 특성과 역사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성쇠를 거듭한 뒤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생명력의 증거들이다. 그렇기에 성씨는 생명의 이름이고 자랑스러운 존재의 증명이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기원전 고대국가가 형성될 무렵부터 여러 씨족의 이름으로 자생되거나 왕으로부터 사성되거나 아니면 외래의 성씨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하나의 표시이거나 기호이지 삶의 흔적과 생명의 형질이 집적되어 강인한 생명력으로 형성된 성씨의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다. 우리 성씨는 고대 이래로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언제나 새롭게 이어진 생명의 이름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의 증명이되어 온 것이다. 성씨는 그 발원과 생활의 근거지 아니면 오랜 시간과의 싸움에서 살아난 사람의 발자국들이 모여 한 핏줄의 특성과 동질성을 이룬 창조적 생명의 대명사이다. 특히 한국인의 성씨는 한 핏줄의 부계혈통이라는 절대조건에 의해서만 부여되며, 혼인 등 어떤 인위적 또는 사회적인 사유로도 어보애거나 바뀌지 않는 생명의 절대 증표이다. 그래서 우리의 성씨는 한국인의 생명력과 정체성의 비밀을 밝히는데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성을 쓰게 되었는가.
여러가지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만 하드라도 왕계나 특히 일부 계층에 한해서만 성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역사상 고려조가 들어서면서 성으로서 사람의 혈통을 구분하는 일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지배층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요건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 초창기인 1055(문종 9)년 "성이 있는 자에게만 과거시험에 응시 자격을 준다." 는 법령을 공포하기 때문이다.
11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1천년 이상의 국가 경영의 체험한 민족으로서 혈통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려는 계층이 급속도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성씨개념이 확립된 것은 고려초, 중기 이후로 보아야 하는 것은 법적, 제도적 여건이 뒷받침되고 일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뿌리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국가 구성원의 힘이 가문중심의 벌족세력 단위로 재편되고, 문벌의 세력구조가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 권력구조에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되엇음을 의미한다. 한 가계에 속한 인물들의 명예와 능력이 결집되어 하나의 힘의 단위로 형성된 가문은 서로 대립 또는 경쟁과 견제를 통해 국가 사직에 역동적인 힘을 불어넣었고 역사발전의 동력을 이끌어 내는 힘의 지랫대 역활을 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신라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270여 개 정도인데, 이중 130여 성씨가 중국에서 온 귀화성씨라 한다. 귀화성씨 중에는 덕수장씨, 한양조씨 등 1백만에 가까운 성씨가 있고, 독고(獨孤)씨, 섭(葉)씨, 마(痲)씨 등 1,000명 미 만과 500명도 안되는 풍(馮)씨 초(楚)씨도 있다. 귀화성씨의 유래는 3천여 년 전 기자조선으로까지 소급된다. 귀화성씨는 고려 때가 60개로 가장 많다. 신라 때 40개 성씨가 귀화했 고 조선조에서는 24개 성씨가 거의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귀화, 기자조 선 당시와 일본귀화성씨까지 합치면 130개 성씨가 넘는다. 특히 고려 때에는 아랍, 이란인까지 귀화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宋)나라 사람을 비롯하여 여진(女眞), 거란(契丹), 안 남 (安南:베트남), 몽골, 위구르, 아랍 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명(明)나라와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귀화하였 다. 이들이 한국에 귀화하게 된 동기는 대체로 정치적 망명, 표착(漂 着), 종교홍포(宗敎弘布), 투항(投降), 구원(救援), 상사(商事), 전란 피란, 범법 도피(犯法逃避), 정략결혼(政略結婚), 왕실 시종관계(侍從 關係)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외래 귀화 성씨를 크게 나누면 중국계, 몽골계, 여진계, 위구르 계, 아랍계, 베트남계, 일본계의 등으로 분류 할 수 있다.
중국계
가씨(賈)
강씨(强)
현풍 곽(郭)
남궁씨(南宮)
강음 단씨(段)
열산 마씨(麻)
함평 모씨(牟)
수원 백씨(白)
원주 변씨(邊)
청주 사씨(史)
섭(葉)씨
성주 시씨(施)
죽산 안씨(安)
의령 여씨(余)
염씨(廉)
휘주 요씨(姚)
유씨(劉)
교동 인씨(印)
요양 자씨(慈)
서산 정씨(鄭)
임천 조씨(趙)
상주 주씨(周)
파릉 초씨(楚)
용강 팽씨(彭)
강릉 함씨(咸)
남양 홍씨(洪)
남양 갈씨(葛)
경씨(景)
구씨(具)
낭씨(浪)
당씨(唐)
만씨(萬)
묵씨(墨)
금성 범씨(范)
황주 변씨(邊)
진주 사씨(謝)
평산 소씨(邵)
거창 신씨(愼)
태원 안씨(安)
여씨(呂)
오씨(吳)
단양 우씨(禹)
유씨(庾)
파릉 호씨(胡)
장(張)
한산 정씨(程)
평양 조씨(趙)
신안 주씨(朱)
제주 초씨(肖)
풍덕 포씨(包)
해씨(海)
당홍 황씨(黃)
희산 감씨(甘)
계씨(桂)
구씨(丘)
노씨(盧)
성주 도씨(都)
매씨(梅)
남양 방씨(房)
범씨(凡)
면천 복씨(卜)
서문씨(西門)
진주 소씨(蘇)
영산 신씨(辛)
청주 양씨(楊)
곡산 연씨(延)
의령 옥씨(玉)
원주 원씨(元)
육씨(陸)
평택 임씨(林)
아산 장씨(蔣)
배천 조씨(趙)
제주 좌씨(左)
충주 지씨(池)
통천 태씨(太)
임구 풍씨(馮)
진주 형씨(邢)
아산 호씨(胡)
신천 강씨(康)
곡씨(曲)
영양 김씨(金)
노씨(魯)
광천 동씨(董)
신창 맹씨(孟)
방씨(方)
초계 변씨(卞)
수성 빈씨(賓)
해주 석씨(石)
송씨(宋)
풍산 심씨(沈)
통주 양씨(楊)
전주 연씨(連)
전주 연씨(連)
위씨(魏)
무송 윤씨(尹)
거창 장씨(章)
문경 전씨(錢)
나주 정씨(丁)
흥덕 진씨(陳)
영양 천씨(千)
달성 하씨(夏)
전주 호씨(扈)
회양 후씨(后)
진주 강씨(姜)
곡부 공씨(孔)
남씨(南)
노씨(路)
두씨(杜)
명씨(明)
방씨(龐)
밀양 변씨(卞)
빙씨(氷)
보성 선씨(宣)
승(昇)씨
어씨(魚)
개성,제남왕씨(王)
위씨(韋)
행주 은씨(殷)
남양 제갈씨(諸葛)
곡산 한씨(韓)
풍천,장흥 임씨(任)
추계,전주 추씨(秋)
몽골계
여진계
위구르계
연안인씨(延安 印氏)
청해이씨(淸海 李氏)
경주설씨(慶州 卨氏)
베트남계
일본계
아랍계
화산이씨(花山 李氏)
우록김씨(友鹿 金氏
사성 김해 김씨)
덕수장씨(德水 張氏)
우리나라 성씨의 특성
우리나라의 성씨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성명(姓名)의 구성과 개념에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은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家門)을, 명(名)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행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男系)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한국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칭(共稱)이 아니라 원래의가계(家系)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이 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가(甲家)에서 을가(乙家)에 입적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처는 김(金)성 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漢)나라때에는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엇는데,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족(父族)과 부족(夫族)의,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잇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을 다만 가정을 표징한 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金)이라면 자식의 성도 김(金),새로 온 며느리도 김(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안다. 한국의 그와 같은 성씨제도는 가족이 사회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출가하더라도 혈족 관념상 자기의 생족(生族)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또한 성씨본래의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한국에 있어서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그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초를 이뤄 사상·문화·도덕·관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성씨제도의 하나인 사성(賜姓)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귀화인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제도로 나타난 성을 볼 때 거기에는 대체로 세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유덕(有德)한 자를 표창하는 일종의 영전(榮典)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고,
둘째, 봉건시대 제후(諸侯) 대우의 표준으로서 사용되었고,
세째, 혼인을 정한 하나의 표준으로 사용되엇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지난날의 성에는 여러가지 존비(尊卑)의 계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성의 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는 이처럼 특수한 기원(起院) 연혁(沿革)과 복잡한 조직, 관습이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조선후기부터 성씨로 차별을 했을듯 합니다. 조선후기는 세도가들 안동권씨 안동김씨 풍양조씨가 이름을 날리게 되면서 양반가에서도 이들 세 성씨가 제일가는 문중이되면서 같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받게 되었으며, 천민들도 족보를 복사해 만들거나, 쇄락한 양반들의 족보를 구입함으로써 더욱 차별이 심하게되었던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족보는 상당수가 위조된것이 많고, 사실을 근거로 둔 족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허구성도 많죠. 아마 그래서 조선후기때부터 차별이 심해졌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