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시고 행하시는 곳, 초원교회]
■초원교회의 예수님은 성경 속의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즐거운 하나님의 가족을 주장하시는 예수님은 초원교회만의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동시에 열방과 우주만물을 주장하시는 살아계신 성경속의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초원교회는 주권적으로 삼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이름을 두시고(대하6:20; 슥8:22,23) 영혼들을 불러 회복시키시는 곳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직접 영혼들을 불러 간섭하시며 온전케 만드시는 곳입니다. 철저히 사람의 열심과 노력, 자랑이 배제되는 곳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영안을 열어 한 교회를 친히 거룩히 구별하시고 주장하시며 인도하시는 일은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우입니다.
구약의 모세시대에는 한 사람 모세의 영안과 대언을 통해서 무리를 인도하신 것이라면, 이제는 남종과 여종들, 곧 택하시고 부르신 어린 자녀들, 젊은이들, 노인들에게 성령님께서 영안을 열어 각자의 삶 속에 친히 임하시고 주장하셔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궁극적인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즐거운 하나님의 가족에만 계신 예수님이시라면 초원교회를 멀리하거나 반대하고 떠나가면 그뿐입니다.
하지만 진짜(참이신) 예수님의 경우는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초원교회를 주장하시며 인도하시는 진짜(참이신) 예수님을 떠났다면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을 떠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짜(참이신) 예수님을 떠나는 순간 다른 예수님을 붙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이신 예수님을 떠나는 순간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기에 마귀가 즉시 그 사람을 사로잡게 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즐거운 하나님의 가족의 예수님이 따로 있고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예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개체의 모습으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각 교회에 나타나시며 존재하셔도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십니다.
질적으로 하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삼위로 각각 계셔도 삼위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숫자적인 단수성이 아니라 질적인 단수성, 단순성을 가지십니다.
온전한 것을 분별하며 지극히 선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직접 통치 받는 삶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좇아 예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각한 문제를 가볍게 여기려는 시도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초원교회에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들을 만듭니다. 성경에 없는 일을 하시니 예수님이 아니라고 합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의 구별을 핑계대고 기도대신 놀이를 핑계대고 무기와 사역을 핑계 댑니다. 방언구별도 핑계 댑니다. 자기주장 자기분별의 교만으로 마귀에게 잡혀 살면서 방언이나 은사는 끝났다고 아예 방언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또 다 하나의 방언으로 취급하여 마귀방언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좋게 하는 사역자는 그런 말들을 합니다. 또 교역자는 자신을 추종하고 자기사업을 돕는 교인들이 예수님의 간섭을 받지 못하도록 비방으로 방어막을 칩니다.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이 자율권을 주셨다면서 하나하나 묻고 행하는 것은 어리석고 잘못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통치가 실현되는 현장임에도 작은 도시이며 이름 없는 목사여서 안보고 안 들으면 되고 무시하면 그 뿐이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일을 하시는데 알지 못합니다. 새 일을 통해서 부흥케 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면 마귀도 꼼짝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마귀와 대등한 관계로 아니면 못한 분으로 취급하여 초원교회도 마귀에게 잡혀 마귀가 이끌어가는 교회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비방을 하기 위해 훈련조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면을 부각시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성도들을 인도하고 또 합당치 않으면 떠나도록 예수님이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초원교회에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자기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군사들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초원교회에서 원하는 은사나 능력만을 받고 떠난 사람, 예수님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면 결국 마귀에게 사로잡혀버리고 그 은사나 능력은 마귀의 통로로 사용됩니다. 방언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도 은사가 있는 것 같아도 즉시 마귀의 방언, 마귀의 은사로 바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세계에는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배하든지 마귀가 지배하든지 어느 하나입니다.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어느 하나입니다. 영생하든지 영벌하든지 어느 하나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중요합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의해 영원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여호와 내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잘 안 되기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도와주심과 긍휼을 기대하고 바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깨달을 때 겸손해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에 기대고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 안전하고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맞다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진리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한다고 존재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며 수십억의 사람들이 부인하고 배척해도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임이 변치 않으며 그 살아계심과 전능하심과 광대하심을 없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정한다고 예수님이 부정당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예수님에게 피해를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영이시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티끌 같고 열풍에 마르는 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지만 결국 천국에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 손해가 될 수 없으며 믿는 자도 손해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2,23)
■마귀방언은 예수님이 직접 주장하시는 곳에서만 온전히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마귀방언을 성령의 방언으로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 마귀방언을 안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축사사역으로도 마귀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방언을 받아 기도해야만 자신 안에 존재하는 마귀를 빼내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방언을 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소속된 사람으로 100% 지옥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셔서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는 초원교회에 머물며 그동안 마귀에게 휘둘리며 마귀에게 속하여 산 것을 철저히 회개하면서 오직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께 나아와 성령의 방언으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긍휼을 베푸심으로 마귀방언을 하는 자라도 성령의 방언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택한 사람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초원교회에 삼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고 행하시는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중대한 일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위의 말씀은 마귀가 주는 방언, 마귀가 주는 통변, 마귀가 주는 예언, 마귀가 주는 영안, 마귀가 주는 능력 등 죄와 마귀에게 속한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마귀방언을 받은 사람의 문제는 자신은 진지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예수님을 부르고 성령님을 부르는데 대답하고 말하는 이는 자신 안에 또는 바깥에 있는 마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도 예수님의 토대 위에 선 신앙생활이 아님으로 그들이 갈 곳은 지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팎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불쌍한 영혼들, 마귀방언을 하는 자들 뿐만 아니라 마귀방언을 하지 않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실제적인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님의 은사를 훼방하는 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믿음의 점검을 통해서 그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마귀를 섬기고 마귀를 따라 사는 것이 지금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원교회를 통해 마귀에게 사로잡혀 마귀에게 속고 사는 불쌍한 영혼들을 그 크신 긍휼로 이끄셔서 구원을 베푸시고자 믿음과 방언을 점검하게 하시며 시인하고 긍휼을 구하는 자를 치료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지명하신 자는 예수님이 가라하신 곳, 예수님이 머물라 하신 곳에 있어야 그 영혼이 살게 됩니다.
초원교회는 삼위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시고 거하시며 주장하시기에 오기를 사모해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곳에 머물러야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자기의 길을 가는 자며 자신 안에 우상을 두고 사는 자이므로 예수님과 상관이 없음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이렇게 저렇게 부르시고 다양하게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초원교회에 오게 하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이 부르신 초원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갈 뿐입니다.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1-2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신 12:11)
※신 12:4,11,14,18,21,26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한대로 너는 여호와의 주신 우양을 잡아 너의 각 성에서 네가 무릇 마음에 좋아 하는 것을 먹되”(신 12:21)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긍휼이 역사하는 장소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초원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역사하며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주장하시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떠나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형식과 의식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해 가는 자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함께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안으로와 예수님의 인도를 좇아 분별할 때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받았노라고 하지만 마귀에게 사로잡혀 고상한 마귀의 종노릇하며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직접통치하시며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옛 선지자나 사도들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 체험을 주시지 않은 세대들은 전수받은 지식적인 신앙생활이 전부로 알고 자신의 편에서 하나님을 찾는 노력과 구원을 얻고자 함으로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그런 상태가 종교개혁으로 일부분 회복되었으나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하나님의 직접통치보다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을 가지므로 종교와 정치가 결합한 독재가 세상 법을 통해 부당하게 행해졌습니다.
그들은 시대적인 상황에 제한된 믿음을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불의한 세력과 타협하며 기득권세력과 연합하여 하나님만을 구하며 인도받는 신실한 자들을 핍박하며 하나님의 다양하고 직접적인 역사를 거부한데서 보여줍니다. 오랜 기간 영적체험이 없는 세대들에 의해 형성된 사람 중심의 예배와 기도, 신앙생활이 전통이 되었고 정통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 말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직접통치보다 인간 왕의 통치를 매력으로 여기고 받고자 한 것처럼 사도 시대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접통치를 구하지 않고 일부분 자신들의 주장과 역할을 남겨두어 행해왔고 그것이 자신들의 공로와 업적이 되며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자신들을 추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세상적인 철학과 지식에 기초한 신학을 체계화하여 학문의 복잡함은 더했으나 하나님이 역사하실 공간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왜곡하여 한 쪽만을 부각시키므로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믿음을 막았습니다.
예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하고 그들의 논리와 사상을 세상 학문과 연계하여 연구하고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의 사람 중심의 계보신학입니다. 행함으로 얻는 가톨릭의 구원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믿음으로 말미암는 개신교의 구원론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직접통치로 말미암는 온전한 구원과 성경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순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함께 타락한 자들(믿는 자들도 포함)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도 마땅히 인정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가르침을 받는 추종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제한당하는 모순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지 교리나 신학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이요 구원이심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긍휼에 의해 구원받음을 믿으며 오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만을 구하는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주장하심에 따라 사는 것이 진정 믿음으로 사는 길이요 축복임을 알기에 달리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