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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 키로보그라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이다. 어릴 때부터 카를 마르크스의 서적을 탐독했다. 1898년 남부노동자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다 체포돼 오데사·시베리아 감옥에서 4년을 보냈다. ‘트로츠키’는 오데사 감옥에서 만난 간수의 이름이다. 이 가명이 결국 그의 평생 이름이 된 것이다.
그는 1902년 시베리아를 탈출해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905년 러시아로 돌아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지만 다시 체포됐다. 출옥 후 유럽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1917년 2월혁명 직전 러시아로 돌아왔다.
혁명 초기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였다. 멘셰비키는 ‘소수파’란 의미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노선이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무력혁명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했다. 2월혁명 후 임시정부 수반 직을 맡은 유대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멘셰비키 지도자였다. 그러나 10월혁명이 일어나면서 멘셰비키는 ‘다수파’인 볼셰비키에 밀렸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약간의 이념 차이를 보였지만 10월혁명 직전 레닌의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레닌의 오른팔이 돼 혁명의 성공과 소비에트연방 창건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혁명 초기에는 외무장관을 지냈다. 1918년 ‘붉은 군대(赤軍)’를 조직해 황제파 잔당 ‘백군(白軍)’의 반혁명 봉기를 진압했다. 공산혁명의 국제화를 촉구하는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선언문도 기초했다.
당시 유럽 공산주의자 대다수는 단계적 혁명론을 지지했다.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는 일단 부르주아 혁명이 선행된 후 노동자 혁명이 따라야 완벽한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부르주아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노동자 중심의 10월혁명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다.
트로츠키는 더 앞서 나갔다. 그는 혁명은 한 국가에 머물 게 아니라 차차 국제무대로 확산돼 혁명의 세계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른바 연속혁명론(또는 영구혁명론)이며 ‘제4 인터내셔널’의 핵심이다.
1924년 레닌이 죽자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졌다. 레닌은 생전에 트로츠키에게 음흉한 인물인 스탈린을 권력에서 격리시키라고 각별히 당부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과신했다. 또 변방 그루지야 출신의 스탈린을 경시했다. 당시 소련 내 상황은 스탈린에게 유리했다. 트로츠키가 믿었던 노동자계급은 혁명과 내란에 지쳐 새로운 집권세력으로서의 활기를 잃었다. 대신 관료계급이 부상했다. 스탈린은 관료조직과 연합해 당(黨)과 군(軍) 그리고 정부기구를 야금야금 장악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의 내실을 우선 다진 후 세계혁명 전선에 나서야 한다며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공박했다. 결국 트로츠키는 ‘인민의 적’으로 몰려 1927년 당에서 제명당하고 1929년 망명길에 올랐다. 트로츠키는 터키·프랑스·노르웨이를 거쳐 마지막으로 멕시코에 망명했다. 도피 중 몇 권의 책을 펴냈다. 『나의 생애』(1930년), 『러시아 혁명사』(1931년), 『스탈린주의 날조학』(1932년), 『배반당한 혁명』(1936년) 등이다.
『배반당한 혁명』에는 반(反)스탈린 봉기를 선동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격분한 스탈린은 트로츠키 제거를 결심했다. 40년 5월 정보기관(GPU) 요원 이오시프 그리굴레비치를 보내 트로츠키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해 8월 20일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밀명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바르셀로나 태생 스페인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가 휘두른 등산용 피켈에 머리를 맞아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혁명가가 허무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60∼70년대 서유럽 급진좌파 교본 되기도
트로츠키와 같은 유대인 혁명가에게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미국과 서유럽 등지에서 망명할 때 얻은 국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혁명을 이끌었다. 러시아 내 민중의 지지 기반이 약했던 이유다. 더욱이 혁명 직후 피폐해진 대중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지 않고 당과 국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또 소수의 ‘국제인’인 유대 혁명가들은 공산혁명의 세계적 확산에만 조급증을 보였다. 결국 이들은 스탈린의 암수에 걸려 1930년대 중반 모두 숙청되고 말았다.
스탈린 시대에 희생당한 유대 혁명가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절에 대부분 복권됐지만 트로츠키는 제외됐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의 ‘제4 인터내셔널’ 논리는 60∼70년대 서유럽 급진좌파의 교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트로츠키의 바람과는 달리 90년대 초 공산권은 스스로 무너졌다. 혁명이론이 부실해 그런 것이 아니다. 먹고사는 대중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댓글 멘셰비키가 다수파란 뜻의 볼셰비키보다 더 많았던.. 아무튼 스탈린은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천수를 누린것도 그렇고요!
죽어서 좋은데 못갔을 것 같아...정말 나쁜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