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유명산 등정기
강명옥
새벽빛이 흩어진 꿈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부지런히 만남의 장소 남부문예회관 앞으로 향했다. ‘협동산악회’의 주최로 대마도(쓰시마)의 유명산 산행과 함께 한국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그 현장을 찾아가는 16년만의 뜻 깊은 여행이다. 60명의 일행과 함께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오션플라워 탑승 한 시간 십 분을 소요하며 대마도 히타까츠항에 도착했다. 까다로운 입국수속을 끝내고 제주도 보다는 작다는 대마도 섬 중 사람이 생활하고 있다는 5개의 섬을 관광하기 시작했다.
한국전망대에서 쾌청하게 맑은 날씨 덕분에 부산을 희미하게나마 조망하고는 일본에서 100선 안에 든다는 미우다 해수욕장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해변의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에메랄드빛 바다는 매우 아름다웠다. 청일 전쟁 후 러시아와 일본의 싸움, 러일 전쟁의 격전지로 향해서 전망대에서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러일 전쟁 당시에 뚫었다는 만제키 운하의 만제키바시다리를 도보로 걸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물속을 들여다보니 잔잔한 물속에 잠겨있는 야트막한 산 그림자가 어쩐지 쓸쓸하게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산 그림자 같아서 마음이 울적해졌기 때문일까? 마음의 쓸쓸함도 잠시 편백나무들 속에 들었다. 편백나무, 일본말로 히노끼라 불리는 이 나무는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가 많이 생성된다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일본은 대마도에 편백나무를 많이 심어놓아 대마도의 편백나무만으로도 1억3천에 가까운 인구가 4년간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다하니 정말 놀랍다.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대마도는 산길국도 옆으로 편백나무가 빽빽이 꽉 차있는 2차선 길을 따라 달리다보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또다시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숲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된다. 바다와 어우러진 산이 많은 대마도는 습기가 많아 나무가 잘 자란다. 모든 산은 몽글몽글 구름이 뭉쳐있는 듯 하고 연녹색의 산은 여백과 공간이 전혀 없어 보이는 동화속의 그림처럼 어두운 숲속의 안이 궁금했다. 석식은 야외에서 숯불석쇠위에 마련된 해물과 삼겹살 구이로 마지막 밤의 여정을 축제분위기에 젖게 했다. 나는 건배사에서 “독도는 우리 땅”을 세 번 합창으로 외치고 나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친목과 우의를 다지고 쓰시마리조트호텔에서 깊어가는 밤의 고요를 물빛나래에 접어 올렸다.
새벽빛 출렁이는 소리에 룸메이트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고 해변으로 나갔다. 아늑하고 고고한 분위기의 마을과 함께하는 바다는 깊은 여정으로 고요한 비단길을 걷고 있었다. 길섶으로 풍겨오는 향기는 밤꽃 향기도 아니면서 밤꽃향기인척 슬몃슬몃 내안을 덮치곤 했다. 조식 후에는 일본의 만행으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최익현순국비를 보고 유명산(아리아케)등정을 했다. 먼발치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산길도 잘 되어있고 넓은 쉼터도 있어 우리는 담소를 즐겼다. 유명산의 정상에서 우리는 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하산하여 단체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조선 통신사들이 올 때 마중 나갔다는 고려문과 고종황제의 딸,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보았다. 대마도의 사무라이저택을 도보하며 일본의 문화를 체험하는 마리아신사, 일본의 신사문화를 접해보는 일정도 어느덧 끝나가고 갓 잡아 올린 활어회로 미각을 즐겼다. 대마도 여행을 마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나 영토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도 없고 일본의 신사나 유적지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 보였고 조선정부는 쓰시마로 조선주민들을 이주시키지도 못했으나 토벌 후에는 부분적으로 무역을 지속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계비도 세우고 정부 관리도 파견하여 철저한 대책관리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대마도가 탐이 났다. 부질없는 내 욕심 때문에 마음이 시끄러웠다. 일본은 잊을만하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우리도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며 상상의 나래를 하늘높이 펼친다. 그리고 일본과의 영토분쟁이 우리세대에서 확실하게 매듭지어지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