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9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하자 차지철 경호실장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가 9일 자신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 공개했다.
12.12 사태 당시 정승화 육군총장이 전두환 등 신군부에 연행되자 36계 줄행랑을 놨던 노재현 전 국방장관은 지난 93년 12.12 쿠데타 진상조사위원회에 출석,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두환을 천거, 보안사령관에 임명하자 차지철이 노골적으로 언잖아 했다고 증언했다는 것.
노재현 전 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명 경위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식 기안을 올리기 전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해도 되겠느냐고 ‘사전내신결재’를 구두로 올렸다고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이 사단장 나간 지가 얼마나 되었지”라고 물었고 노장관은 “1년쯤 지났기 때문에 경험을 얻었고 지금 이 자리가 더 중요하니까 보안사령관 업무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했다고 전했다.
노재현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은 건의를 하면 마음에 약간 차지 않더라도 실무자의 의견을 수용, 그냥 결재를 해주신다”고 말했다.
이어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뒤 차지철이 자신에게 '약간'이 아니라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증언했다.
노재현 전 장관은 “진종채 보안사령관이 차지철 실장과 업무 충돌이 나기 때문에 차지철 때문에 보안사 보고사항이 대통령까지 올라가지를 않아 차질이 많이 생겼으며 군에서 보고하는 것이 성실히 보고가 되고 정확하게 되어야 하는데 차지철이 도중에서 가로막기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 전두환이 적합하다고 생각해 대통령에게 건의를 했다”고 밝혔다.
지난 1988년 정승화 전 육참총장도 “차지철이 진종채 장군 보고를 막고 있고 보안사령관 교체시기가 돼서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후임자를 추천하기 전에 전두환이 적임자라고 판단, 건의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980년8월22일 서부전선 기지에서 육군대장 전두환 장군 전역식에서 전두환 상임위원장
최규하가 신군부에 의해 심한 모욕을 당한 반면 신현확은 상대적으로 TK 마피아의 대부라는 별칭을 들으며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해 왔다.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는 최규하
12·12와 5·18을 통해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전두환(좌). 1980년 전두환씨의 대장
육군대장전두환장군전역식경례모습
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 대장 예편 후 대통령을 역임
육사 11기부터 36기까지의 하나회 회원 全 250명의 명단은 2005년 2월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신동아>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이 명단은 전술된 기존의 하나회 명단인 '백승도 명단'의 오류를 바로잡은 하나회 명단의 '완결판'이라 한다. 하나회 회원 연명부 및 관련 자료
전두환은 수 천억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일부 비자금은 밝혀지기도 했으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반체제인사·민주화 운동가·학생운동가 등의 정적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비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자와 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의 책임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나회를 비롯한 전두환 관련 인사들과 일부 반공주의우익 세력에서는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일컬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경상남도합천군 율곡면 출신이지만, 5세에 대구광역시로 이사했으므로 정치적 고향이 대구광역시로 간주되기도 한다. 천주교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훗날 백담사에 기거하던 중 불교에 귀의했다.
전두환은 1931년1월 18일경상남도합천율곡면 내천리에서 완산 전씨(完山 全氏) 전상우(全相禹)[3]와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점문(金點文)[4]의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위로 형 열환(1915년생), 형 규곤(1916년생),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누나 선학(1925년생), 형 기환(1929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5년생), 남동생 석환(1937년생), 경환(1942년생)이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몰락 양반 가계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 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이후 무관이 몇명 배출됐으나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몰락한 상태였다.
아버지 전상우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5]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추고 있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아버지 전상우는 성격이 괄괄해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전상우는 의리가 강해 아들 전두환이 여덟 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빚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5]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5] 한다
전두환이 태어날 때 그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두 형 중 전열환은 고향 친구들과의 놀이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 둘째 형 전규곤은 추락사고로 사망했고, 전두환과 전경환 사이의 동생 전석환은 어렸을 때 병으로 사망하여 셋째형 전기환과 그, 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유년기에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그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합천율곡면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8세 되던 해에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했다.[4]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때 초등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벼랑에서 때려 눕히고 절벽으로 떨어뜨린 뒤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4]일본 순사의 수배를 피해 그의 부모는 만주지린성 반석현에 숨어 살다가 1년 3개월 만에 귀국했다.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 일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4] 그 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교 진학의 꿈을 접고‘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갑종 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지만, 형 전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교하지 않았다. 이때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국비로 공부할 수 있는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1951년 입교하였다.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운동선수이기도 했으며, 축구선수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6]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다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6]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당시 골키퍼였던 전두환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1955년9월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사 11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했고, 육군부관학교(陸軍副官學校)에 입학해 1959년 1월 육군부관학교 군사영어반을 6기로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李圭東)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딸 이순자를 만났다.
형제들 중 경제력이 나았던 그는 형 전기환을 대신해 노부모를 모셨다.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했다.
1955년 소위로 임관하여 25사단 소대장에 보임되었다. 1959년 육군 공수특전단에 전입하면서 미국에서 선진 군사교육을 배우기 위해 1959년2월미국으로 유학, 미국 육군특수전학교에 입교했다. 특수전학교 재학 중 그는 심리전과목을 주로 이수했으며 야간과 휴일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해 6월 미국 육군특수전학교 심리전 교육 과정을 마친뒤 귀국했고,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국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에 입교하여 차지철, 최세창, 장기오와 함께 레인저 과정(Ranger Tranning Course)과 침투로 개척(Path Finder)과정을 이수하고 7월 비행기편으로 귀국했다.
그 후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에서 근무하던 중 1961년 4월에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에 발탁됐다가 곧 서울대 문리대의 ROTC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5월 16일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주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5·16 군사 정변 과정에서 박정희의 부하 장교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3명의 장교들의 인솔 하에 무장병력들을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는데 그 지휘관은 오치성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그리고 훗날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될 차지철대위였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뒤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7]
이 공로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농담이나 사적인 잡담은 되도록 줄이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였다.
1961년7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로 찾아와 자신에게 육만환 짜리 수표 두 장을 내놓고 간 노모씨를 경찰에 고발하여 노씨가 중부서에 수감되기도 했다. [8]
육군 소령 계급으로 있었던 1962년에 하나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해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였다.
1962년12월말에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9]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고, 파병기간 중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으나 예하 군 장병들로부터 인망을 잃었다.(특히 식수가 부족한데도 혼자 진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암거래 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과 함께 훈장을 주려했으나, 월남전에서의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였다.) 1971년 귀국 후 장군 보직인 제1공수특전단 단장에 파격적으로 임명되고, 1974년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육사 11기 최초로 준장에 진급됐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제 1사단장을 지냈다. 제1사단장으로 재직할 때 부대 내 사기진작을 하기 위해 모범 병사 10명을 선정하여 표창과 포상을 수여했다. 또한 1사단장 재직 당시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윤필용의 비호속에 손영길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 갔지만, 육사 동기이자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73년 4월 윤필용이[13]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강창성에 의해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돼 위기에 몰렸다.
1979년 3월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 때 전두환은 차지철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실세였다. 때문에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의 입지에 방해가 되는 상대방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그래서 그 둘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실제로는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차지철쪽은 직설적이고 괄괄한 데에 비해 전두환쪽은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훗날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에 전두환이 나서서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뒷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 이러한 뒷배경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첫댓글
지탄의 대상인
저주받을 위인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