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식천(以天食天) 이야기
윤 석 산(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1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은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 펼친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천식천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월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해월 선생은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윈 해월 선생은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고, 제지소 용인노릇도 하며 살았다. 그런가 하면, 마북리에서 3키로 정도 산속으로 들어가 자리하고 있는 화전민 마을인 검곡(劍谷)이라는 곳에서도 살았다.
해월 선생이 동학에 입도하기 전, 나이 30이 넘어 화전민의 삶을 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현실적 삶이 어려웠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가진 땅 한 평 없이, 가진 재산도 없이 살 수가 없어, 깊은 산간 화전민 마을을 찾아올라 갔던 것이다. 이러한 해월 선생의 삶이란 결국 가난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고난의 삶이었으며, 당시로서는 가장 소외받는 하층민의 삶이 아닐 수 없다.
해월 선생은 어느 날 경주 용담이라는 곳에서 세상을 구할 도를 편다는 소문을 듣고 용담으로 수운 선생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를 한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그의 삶 대부분은 관의 지목(指目)과 쫓김의 반복이었다. 36 년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해월 선생은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에 펼쳐져 있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산간 오지 50 여 곳을 전전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그가 한 생애를 살아가며 펼쳐보였던 삶의 모습, 또는 그가 세상을 향해 펼친 가르침의 말씀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마음의 움직임은 당시 소외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해월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로 하여금 한국근대사라는 한 격동의 역사 속을 헤쳐 나가는 주체로 떠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해월 선생은 관의 추적을 받아 산간 오지를 헤매면서도, 흩어진 동학도를 모아들여 무너진 동학교단을 다시 일으키고자 노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힘을 몰아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렸고, 척양척왜(斥洋斥倭) 운동과 함께 갑오동학운동 등을 주도하므로, 한국의 근대 형성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역사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19 세기 중반이라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부패, 경제적 어려움이 만연된 조선조 후기라는 시대에, 가장 소외된 계층의 한 사람으로 빈곤과 억압 속에서 성장하고 또 살아가던 해월이라는 한 인물이 역사의 중심인물로 그 삶을 전환하게 했던 가장 구체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해월 선생이 스승인 수운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스승인 수운 선생으로부터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 가장 구체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 및 문학에서 일어나는 창조는 ‘만남’의 순간에 배태된다. 이 ‘만남’은 저항할 수 없는 매혹으로 다가와 그것이 미래의 삶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해월 선생에게 있어 수운 선생과의 만남은 감격의 잔잔한 기쁨이었고,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몰아간 느닷없는 생기(生起)였다. 해월 선생이 스승인 수운 선생을 만난 감회를 그의 「법설」에 이렇듯 적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인 줄 알았노라.
대선생인 수운 선생을 만나 마음공부를 한 이후 해월 선생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배해 왔던 ‘봉건적 인간에의 관념’을 벗어버린다. 사람이 태어날 때, 성현(聖賢)은 성현의 자질을, 우부(愚夫)는 우부의 자질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현이 되고 우부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마음을 정하느냐, 정하지 못하느냐에 있음을 깊이 체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수운 선생과의 만남은 당시 소외받는 하층민의 한 사람인 해월 선생으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빈천의 하층민도 일컫는바 ‘성현’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스스로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성인과 범인의 범주를 구분하여 성인은 다른 차원의 삶 속에서 범인들을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다는 관념을 파괴하고, 성인의 차원도 범인의 차원도 모두 일상의 삶 속에서 찾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을 만나기 전, 그러므로 ‘동학의 가르침’을 받기 그 이전의 해월 선생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아무러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던 계층의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머슴, 한 사람의 용인(庸人), 한 사람의 화전민(火田民)이라는, 당시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의 외롭고 또 가난한 한 사람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수운 선생을 만나게 되고, 수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난 이후,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이끌고자 자신의 신념을 새롭게 했고, 또 이를 실천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침내는 한국근대사 속 우뚝한 한 사람의 민중 지도자, 나아가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로 자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해월 선생에게 있어 수운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전환시킨 가장 중요한 계기가 아닐 수 없다.
2
해월 선생이 비록 스승인 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은 동학의 2세 교주라고 해도, 관의 추적을 받으며 쫓기던 시절의 그는 다만 힘없고 가난한 중년의 한 남자에 불과했다. 산간 오지에 자신의 몸 하나 숨기기에 급급한 처지에 놓여 있는 지명 수배자에 불과했었다. 이와 같은 해월 선생이 훗날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로 역사 속에 우뚝 설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해월 선생이 태백과 소백의 험준한 산 속 마을로 몸을 숨겨 들어오게 된 것은 1864년 3월, 스승인 수운 선생이 대구 감영에 갇히어 사형을 받기 바로 그 직전이었다. 스승의 체포와 죽음을 뒤로하고, 눈물을 흘리며 조여 오는 관의 추적을 피하여 태백과 소백의 크나큰 산맥들이 어우러지는 깊고 깊은 산간 오지 마을로 숨어들었다.
이때 해월 선생은 38 세라는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였다. 이렇듯 이제 막 중년으로 들어서는 나이에 시작된 깊은 산간 속에서의 생활은 35년이라는 기나 긴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1898년 4월 원주(原州) 호접면 고산리 원덕여(元德汝)라는 제자의 집에서 관군에 의하여 체포가 되었고, 이내 서울로 압송이 되어 72 세의 나이로 처형을 당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해월 선생은 38 세라는 중년의 나이에, 우리나라의 가장 오지에 해당되는 지역에 자리한 험준한 산간 마을로 숨어들어, 지속되는 관의 추적을 피하여 40년 가까운 긴 세월을 지명수배자로서, 도망자로서의 어려운 삶을 살았다.
해월 선생은 구체적으로 조선조 정부로부터 이 35년 동안 세 번의 집중적인 지명 수배령을 받았다. 첫 번째가 수운 선생의 체포에 이어, 동학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조선조 조정에서 내린, 동학의 중요 지도자들에게 내린 체포령이 그것이다. 두 번째 수배령은 ‘이필제(李弼濟)의 난’과의 연루로 인한 체포령이었다. 세 번째는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동학운동을 이끈 수괴(首魁)로서의 지명수배가 그것이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겹쳐지는 집중적인 지명 수배령을 받았다.
이와 같이 관에 쫓기는 삶 속에서도, 해월 선생은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해온 모순된 삶의 방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영위하고자, 세상을 향하여 가르침의 말씀을 펼쳤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을 했다. 즉 해월 선생은 동학의 가르침에 의한 올바른 삶의 가치를 이 지상에서 실현하고자,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험난한 태백의 깊은 산간 속을, 때로는 관군에 쫓기며, 때로는 산짐승에 쫓기며, 추위와 허기 속을 전전하며 살아갔다.
해월 선생은 일찍이 수운 선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의 가르침이란 단순히 문자와 문자를 통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영적(靈的) 세계에의 체험’을 통한 가르침이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운 선생은 경신년(1860년) 4월 ‘궁극적 실체인 한울님’을 만나고 대화를 한다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했다. 이러한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만유(萬有)를 화생(化生)하고 또 생성시키는 근원적인 힘, 즉 ‘혼원지기(混元之氣)에 의한 생명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만유는 우주적 영(靈)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그 존재가 무궁하다는 무궁성과 함께, 궁극적으로 만유는 개체이면서도 동시에 이 무궁한 우주와 하나라는 진리를 체득하였다. 그러므로 수운 선생은 경신년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과 함께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관념적인 모든 테두리를 해체하고, 무궁한 우주와 더불어 무궁한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됨을 스스로 체득하게 되었다.
해월 선생이 스승인 수운 선생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이란 바로 만유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무궁함에 뿌리를 둔 개체이자 전체, 그러므로 이 모두를 경건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해월 선생은 체화(體化)하고 또 실천하기 위하여 스승의 지도를 받아 ‘마음공부’에 전념을 하였다.
마음공부를 통해 해월 선생이 터득했고, 또 지향했던 ‘올바른 삶의 가치’란, 결국 모든 생명이 생명으로서 그 가치를 지니며, 동시에 이 생명, 생명 모두가 우주적 조화(調和)를 이루는 삶을 이룩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상실한 채 소외당하는 삶을 사는 당시 민중들의 삶은 해월 선생에게 있어 우주적 질서와 그 조화에 어긋나는 삶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해월 선생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본성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며, 그러한 면에서 본질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수운 선생의 가르침인 ‘시천주(侍天主)’를 이어, “세상의 모든 사람, 소위 일컫는바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 모두 한울님 같이 대하고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를 세상에 천명하고, 이를 실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가고자 노력했다. 해월 선생이 펼쳐나간 ‘사인여천의 윤리’, 이는 단순한 휴머니즘의 차원이 아닌, 우주적 차원에서 펼치게 되는 새로운 인간주의, 즉 생명주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해월 선생은 당시의 억압된 인간 삶의 문제를 어떠한 제도의 변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인류사적인 면에서 반성하고, 또 우주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고뇌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와 같은 해월 선생의 모습에서 제도의 변혁을 통해 사회를 혁신시키려는 ‘혁명가’의 모습이 아닌, 인간 본연의 문제를 통해 새로운 질서의 삶을 이룩하고자 하는 ‘신앙인’, 또는 ‘사상가’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해월 선생은 태백의 준령과 소백의 깊고 깊은 산간 마을도 마다하지 않고 숨어사는 그 고통을 감내하였으며, 죽음과 고난의 시간을 넘나들며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의 가치를 이 지상에 현현하고자 끊이지 않는 노력을 펼쳐나갔다.
40년 가까운 긴 세월을, 깊은 산간에서 펼쳐나간 해월 선생의 삶은 실상 단순한 도피와 은거의 삶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흩어진 동학의 교도들을 모아들였고, 나아가 현실적인 고난과 고통 속에서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당시의 수많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이들이 지닌 고통의 원인을 밝히고, 나아가 새로운 세상을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비록 해월 선생은 그 외양상 깊고 깊은 산간 오지를 숨어 다니는, 내놓을 만한 학식도 또 권력도 없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한 사내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당시의 수많은 소외되고 또 억압받는 가난하고 힘든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진정한 민중의 지도자이었다. 나아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이 무엇이며, 이를 이끄는 새로운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 스승이기도 했다.
해월 선생은 산간의 수많은 지역을 전전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가르침의 말씀’, 곧 설법(說法)을 펼쳤다. 따라서 이러한 해월 선생이 펼친 많은 설법들은 태백의 준령, 그 산간 오지의 자연 속에서, 산간 마을의 사람들과 함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어울려 살면서, 이들의 삶 속에서 해월 선생 스스로 터득한 깨달음이 그 대부분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 남겨진 해월 선생의 설법들을 읽어보면 이는 결코 어렵거나 난해하지를 않다. 해월 선생 스스로의 생활과 해월 선생이 바라다본 자연이 그대로 그의 설법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도(道)에 대한 한결 같은 생각은 주릴 때 밥 생각하듯이, 추울 때 옷 생각하듯이, 목마를 때에 물 생각하듯이 하라.(道之一念 如飢思食 如寒思衣 如渴思水)”는 말씀은 곧 산간을 전전하면서, 배를 움켜쥐는 굶주림과 살을 에는 추위, 그리고 목마름 속에서도 바른 도를 잊지 않았던, 해월 선생의 절절한 경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천지부모(天地父母)」 편을 통하여 해월 선생은 “밥 한 그릇에 모든 세상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天依人 人依食 萬事知 食一碗)” 는, 그 유명한 ‘밥 철학’을 설파하기도 했다. 즉 ‘밥’은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먹는 매우 평범한 일상사이지만, 이에는 한 치 한 순간도 어긋나지 않는 우주 대자연의 운행과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물 곤충들의 협동, 그리고 숭고한 인간의 노동이 어우러지는, 그러한 ‘우주의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역설한 것이라고 하겠다.
매일 같이 먹고 잠을 잔다는 그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 이와 같이 엄청난 우주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해월 선생은 그가 겪은 삶을 통해 깨닫고, 또 이 깨달음을 자신과 함께 산속 마을에서 어우러져 살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곤 했다. 따라서 해월 선생은 “도(道)’라는 것은 지고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용행사(日用行事) 모두가 도 아님이 없다는,”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 진정한 도가 담겨져 있음을, 입버릇처럼 강조하곤 했다. 그런가 하면, 한 가정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며느리에서 어린아이까지 모두 자신이 펴고자 하는 도를 설명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해월 선생은, 사람이 하루하루 생활 속에 행하는 일 그 자체가 바로 한울님(事事天)이요, 사람이 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만나고 또 사용하는 사물이 곧 한울님(物物天)이라고 설파하므로, 도를 일상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또 설명하고 있다.
해월 선생은 이렇듯 ‘도의 생활화’를 통해 당시 새로운 변혁을 꿈꾸던 민중들의 가슴에 깊이 ‘가르침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해월 선생은 자연 이들 민중들로부터 가르침을 펴는 ‘동학 선생’이 되었고, 이러한 해월 선생의 가르침은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동학이라는 신앙운동에 참여하고 또 결속을 이루는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스승인 수운 선생이 참형으로 죽임을 당한 이후 산속에 숨어살면서, 비록 무심히 자라는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 또 한 떼기의 땅이라고 해도 모두 한울님의 덕화(德化)에 의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몸소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해월 선생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그리고 숲속에서 우는 ‘새소리’ 등, 자신이 만나고 경험한 일상의 모든 것 역시 한울님 덕화에 의한 것이요, 그러므로 이들 역시 자신의 도(道)를 펴는 대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생각에 의하여, 해월 선생은 “사람만이 오직 먹고 입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을 비롯한 만유 역시 먹고 입는다.(何獨人衣人食 日亦衣衣 月亦食食)” 라고 가르치므로, 만유라는 사물과 사람의 유기적 필연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또 “숲속에서 우는 새소리 역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天地萬物皆莫非侍天主也 彼鳥聲 亦是侍天主之聲也)”는 가르침을 펴므로, 천지 만물 모두 한울님을 모신 존재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 우주에는 한울님의 기운이 가득 차 있으므로 한 걸음이라도 경솔하게 내딛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宇宙間 充滿者 都是渾元之一氣也 一步足 不堪輕擧也)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밟고 다니는 땅이라고 하여도 함부로 뛰지 말며,(惜地 如母之肌膚 母之肌膚所重乎 一襪子 所重乎) 더러운 것을 함부로 땅에 버리지 말라고, 그 가르침을 폈다.
이와 같은 해월 선생이 지녔던 천지만물에 대한 생각은 실상 최고의 종교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높은 종교적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지니게 되는 ‘나와 만물이 하나 된 상태’를 해월 선생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풀벌레도 날짐승도 나뭇가지 하나도 모두 각기 명(命)이 있으므로 나의 목숨과도 같이 소중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羽族三千 各有其類 毛蟲三千 各有其命 敬物則德及萬方矣) 어린아이가 나막신을 신고 꽝꽝 소리를 내며 달리는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는,(余閑居時 一小兒着屐而趨前 其聲鳴地 驚起撫胸曰 其兒屐聲 我胸痛矣) 땅이 느꼈을 그 아픔 역시 똑같이 느끼는,
‘만물과 하나 됨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러한 만유와 하나 됨의 경지는 결국 해월 선생이 자기의 자의식을 소멸시키거나 자의식 정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매우 높은 종교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해월 선생의 종교적 경지는 뒷날 다만 한울님이라는 신만을 공경한다는 경천(敬天)을 넘어, 사람을 공경하는 경인(敬人), 만물과 하나 됨을 통해 만물을 아끼고 또 공경하는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해월 선생의 종교적 경지를 바탕으로 하는 가르침은 오늘 인류가 겪고 있는 자연 환경의 폐해에 대한 매우 소중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즉 오늘이라는 현대에 이르러, 환경 파괴의 심각성과 함께 비로소 제기되고 있는 생태 및 생명의 문제를, 해월 선생은 이미 100 년 전에 구체적이며 근원적인 면에서 제기했었다.
해월 선생은 관의 추적을 받으며 산간 깊은 오지에 의지하며 살아간 한 사람의 지명 수배자, 또는 한 사람의 힘없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러나 그가 펼친 가르침의 말씀과 실천적인 행동, 나아가 그가 보였던 시대를 뛰어넘는 예언은 그를 한 사람의 ‘동학 선생’으로 민중들 앞에 설 수 있게 하였고, 당시 소외된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19 세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이끌던 주체로 살아가게 했던 힘이 되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해월 선생이라는 한 빈천의 인물이 살아온 삶이 역사적 의미나 가치를 지니게 되었던 근원적인 힘은, 다름 아닌 그의 동학 선생으로서의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나아가 해월 선생이 동학 선생으로서 19 세기라는 조선조 후기의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가르침을 폈으며, 오늘이라는 현대에도 역시 요구되는 가르침을 폈기 때문임을 알 수가 있다.
3
해월 선생이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의 가르침을 편 곳은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였다. 수운 선생을 처형한 이후, 조선조 조정은 동학의 뿌리를 뽑고자 수운 선생의 수제자인 해월 선생을 잡아들이라는 지명수배를 내란다. 이에 해월 선생은 깊은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가 어우러지는 깊은 산간 마을로 숨어들게 된다. 안동, 울진, 영해 등지를 전전하며 숨어 지내던 해월 선생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 중에 있는 산간마을인 용화동(龍化洞)에 들어와 몸을 숨긴다.
용화동은 태백산맥 줄기의 한 자락인 1,218 미터의 일월산 뒤쪽 계곡인 죽현(竹峴, 대치)이라는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산간마을이다. 영양읍내에서도 50 리 이상 떨어진 일월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이 마을로 들어가는 동구(洞口)에서 막장까지는 그 거리가 30 리나 된다. 이곳 용화동은 용화, 대치, 윗대치 등 세 개의 마을로 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를 총칭하여 용화동이라고 한다. 영양 자체가 아주 작은 고을이고, 이 작은 고을에 속해 있는 산간마을인 용화동은 해월 선생과 같이 관으로 수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숨어 지내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해월이 용화동에 와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입에 입을 타고 알려지게 되자, 수운 선생의 부인을 비롯한 유족들이 찾아와 함께 살게 된다. 또한 관의 추적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동학도들이 해월 선생과 수운 선생의 유족들이 용화동에 거쳐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용화동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렇듯 모여드는 동학도들을 바탕으로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의 부인, 유족들을 중심으로 용화동에서 동학 교단의 새로운 부활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 그러므로 산골 마을 용화동은 동학교도들에 의한 신앙공동체 마을로 새롭게 자리하게 된다.
용화동에서 해월 선생이 중심이 되어 동학 교단이 다시 부흥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진주에서 난을 일으키고자 준비를 하다가 고변으로 실패한 이필제가 영해로 들어와 영해작변을 기획하면서 접근하게 된다. 해월 선생에게 접근을 한 명분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수운 선생의 신원(伸寃)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필제는 영해에 머물면서 5개월에 걸쳐 여섯 사람을 보내 해월 선생을 설득하는 한편, 각 처의 동학 지도자들 또한 설득을 한다. 그리하여 많은 동학의 지도급 인사들이 ‘교조신원운동’이라는 대의명분에 수긍을 하고 이필제의 거사에 동의를 한다. 이에 해월 선생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수 없어 거사에 동참을 하고, 경상도 일원의 동학도들에게 참가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해월 선생이 동참을 하게 되므로, 이필제의 난은 경상도 일원의 16개 군이 참가를 하는 대대적인 변란으로 발전을 한다. 그러나 실제 난을 일으켜 영해부를 점령하고, 또 영해부사를 살해한 이후, 이필제는 교조신원에 관하여서는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또한 영해부를 점령한지 며칠이 되지를 못해 증원된 관군에 의하여 이필제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필제의 난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신앙공동체의 마을로 동학의 주문(呪文) 소리와 함께 시천주(侍天主)의 강론이 펼쳐지던 산간마을 용화동은 ‘적도(賊徒)들의 은거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용화동에서 영양 현감이 이끄는 관군들에 의하여 잔존해 있던 동학도들 13명이 죽었고, 10여 명이 체포가 되었다. 그러나 해월 선생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은 탈출을 한다. 그러므로 관에서는 이들 지도급 인사들을 잡기 위하여 장교 및 군졸을 많이 보내 철저히 수색하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관의 수색과 추적이 강화되고, 따라서 해월 선생은 다시금 조선조 조정으로부터 지명수배를 받는, 그러한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지명 수배자가 된 해월 선생은 태백산과 강원도 영월 지역으로 숨어든다. 해월 선생이 강원도 영월로 숨어들게 된 것은 이필제가 경상도를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켰고, 그러므로 경상도 전 지역에 수배령이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필제의 영해 민란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에 강원도 영월 출신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배령이 덜 미치는 강원도 영월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이렇듯 강원도 영월 지역으로 숨어들은 해월 선생은 영월과 이웃한 정선의 동학도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하며, 정선, 단양 일대의 산간마을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 영월, 정선, 단양에서의 삶은 단순한 도피의 삶이 아니었다. 이곳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어우러지는 산간지역인 영월, 정선, 단양 등지에서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의 처형 이후 궤멸된 동학교단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들 지역에서 이룬 교단 부활의 기반은 훗날 동학이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이렇듯 성장한 교세는 척양척왜의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직접적인 힘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곳 영월, 정선, 단양은 초기 동학 교단 형성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 아닐 수 없다.
1871년 8월 이필제가 다시 문경(聞慶)에서 김기현(金基鉉)과 함께 거사(擧事)를 일으켰다가 잡혀 처형을 당하게 된다. 문경 사건으로 인하여 다시 세상이 시끄럽게 되고, 각 진영의 포졸들이 어느 마을이나 어느 골짜기나 퍼져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하여 해월 선생은 강수, 그리고 황재민(黃在民) 등과 더불어 인가조차도 없는 태백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태백산 속에서 14일 간을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숨어 보낸 이후, 해월 선생은 강수와 함께 태백산 줄기 바로 밑에 있는 영월의 작은 마을 직동(稷洞)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내려온다.
천신만고 끝에 깊은 산간 마을인 직동으로 숨어 들어간 해월 선생은 이곳 박용걸의 집에서 1871년의 겨울을 보낸다. 직동은 해월 선생이 영월과 그 인연을 맺은 첫 번째 마을이다. 산간 작은 마을인 직동에 은신해 있으며, 해월 선생은 지난날을 반성하고, 다시금 재기를 도모하고자 그 계획을 수립한다. 해월 선생이 세운 새로운 계획이란 다름이 아니라, 보다 강화된 신앙적인 수행이었다. 이필제와 같은 사람의 위계를 따르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 신앙의 심지가 굳지 못했기 때문이요, 또한 동학의 가르침인 후천의 새로운 개벽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비롯한 세상의 사람들이 올바른 수행을 통하여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해야 함을 해월은 더욱 깊이 자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 해월 선생은 태백산 적조암(寂照菴)을 비롯하여 단양, 정선, 익산 사자암(獅子菴), 공주 가섭사(迦葉寺) 등지에서 여덟 차례나 ‘49일 특별기도’를 주도하기도 한다. 특히 이 특별 기도에 해월 선생과 같이 참여를 했던 동학의 인사들은 뒷날 동학을 이끄는 중요한 지도급 인사들로 성장하게 된다. 즉 해월 선생은 이러한 ‘49일 특별기도’라는 종교적인 수련을 통하여 위기의 교단을 다시 일으키고 무너진 동학의 기반을 다시 세워 나갔으며, 동학의 여러 제도를 정비하는 중요한 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다.
영월 직동을 근거지로 해월 선생은 다시 동학의 재건에 힘을 기우리기 시작하였다. 동학교단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영월 일대에 머물면서 해월 선생은 교도들에게 ‘기운으로써 기운을 먹고’,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기식기(以氣食氣)’,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설법을 했다고 되어 있다. 이들 기록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以氣食氣하며 以氣治氣하며 以天食天하며 以天奉天하며 以心治心하며 以善化善은 是 吾道의 大化니 人이 來하거던 人이 來하엿다 云치 勿하고 天이 來하신다 云하라. (『天道敎書』 ․ 「第二篇」)
실상 ‘以氣食氣하며 以氣治氣하며 以天食天하며 以天奉天하며’의 부분은 오늘 『해월신사 법설』에는 「영부주문(靈符呪文)」 부분에 실려 있다. ‘기운으로써 기운을 먹는다.’는 이기식기(以氣食氣)나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은 동학에서는 같은 의미의 표현이다. 동학에 있어서 신(神)은 ‘지기(至氣)와 한울님, 또는 천주(天主)’로 이야기된다. 이때 지기를 흔히 한울님의 기운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지기는 다만 한울님의 기운만은 아니다. 한울님은 이 지기를 통하여 우주에 편만(遍滿)되어 있으며 동시에 나의 안에도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기는 다만 한울님의 기운만이 아니라, 바로 한울님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즉 지기와 한울님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이기식기(以氣食氣)나 이천식천(以天食天)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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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은 먹고 먹히는 ‘만유 모두가 한울’이라는 말로써, 만유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萬物 莫非侍天主)는 ‘시천주(侍天主)의 모심’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이다. 시천주의 ‘시(侍)’, 곧 ‘모심’을 수운 선생은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각지불이(各知不移)’로 해의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한울로서의 우주생명이 개별생명과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하는지에 대한 생명론적 언명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개별생명인 만유는 우주적 생명을 안으로 품고 있으며(內有神靈)’, ‘밖으로는 기화를 통해 전 생명계와 관계성을 지니며 상호작용을 한다.(外有氣化)’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 ‘시천주의 모심’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천식천’에서 우리는 동학적 생명론, 또는 생태론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보다 구체적인 ‘이천식천’에 관해서는 「이천식천」이라는 별도의 제목 아래 『해월신사 법설』에 실려 있다. 이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 항상 말하기를 “물건마다 한울이요(物物天), 일마다 한울이라고(事事天)” 하였다. 만약 이 이치를 옳다고 인정한다면 모든 물건이 다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 아님이 없을지니,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이치에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으나, 그러나 이것은 인심(人心)의 편견에 치우쳐서 보는 말이요, 만일 한울 전체로 본다면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기 위하여 동질(同質)이 된 자는 서로 도움으로써 서로 기화(氣化)를 이루게 하고, 이질(異質)이 된 자는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으로써 서로 기화(氣化)를 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한울은 한쪽 편에서 동질적 기화로 종속을 기르게 하고, 다른 한쪽 편에서 이질적 기화로써 종족과 종족의 서로 연결된 성장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합하여 말하면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以天食天)다는 곧 한울의 기화작용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서구적 근대화와 더불어 인간중심적 이기적 행태가 저지른 폐해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지하수 오염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폐해는 극한에 이르러, 자연을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심각성이 극에 이르러 있다. 따라서 이러한 폐해로 인한 앞으로 다가올 자연 재해 등의 위기를 오늘 인류는 실감하고 있다.
오늘 인류가 실감하고 있는 환경 폐해 등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고 또 방지하기 위한 작업으로는 과학적인 면보다는 철학적인 면이 더욱 요구된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과 함께 ‘생태 문제’ 내지는 ‘생명 문제’가 제기되었고, 현대, 특히 20세기 말 이후 이들 생태와 생명에 관한 문제는 철학의 핵심적인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오늘 제기되고 있는 생태, 생명 문제의 핵심은, 그 원인이 되었던 근대적 경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더불어 삶’에 있다고 연구자들은 입 모아 말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나아가 생명이 없다고 간주되는 모든 무생물과도 조화와 균형 속에서 더불어 살 수 있을 때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아가 생명이 진정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데에 그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따라서 ‘생태 및 생명의 문제’에는 오늘의 인간중심적 삶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첫째로는 인간이 모든 자연을 지배한다는 ‘인간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그 사고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인간의 삶과 환경은 다른 생명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생물체까지도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사고의 전환만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원심적, 구심적 세계관을 지닌 환경이 유기적, 총체적 세계인식 양상을 지닌 생태계의 테두리 안에서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지금까지 생존에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온 ‘개체생명으로서의 인식을 우주적 생명, 또는 온생명’과의 관련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개체생명의 생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 왔기 때문에, 개체생명이 생존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서는 ‘투쟁과 죽임’은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투쟁과 죽임은 생명과 생명 간의 어쩔 수 없는 본원적 양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온생명의 관점을 취하게 되면 자연의 본원적 질서는 기본적으로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온생명 안에 매우 특별한 지위에 있는 인간이 온생명 자체가 자신의 몸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더불어 사는 길을 택하게 되면, 인류는 스스로 오늘 온생명에게 치명적 위해를 주고 있는 암적인 존재로서의 오명을 벗어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임과 투쟁이 아닌, 조화와 공존의 ‘더불어 삶’을 위하여서는 필연적으로 개체생명으로서의 인식만이 아닌, 온생명과의 연관된 생명에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해월 선생이 펼친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법설에는 오늘 인류가 겪고 있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에 가장 긴요하게 요구되는 문제인, 인간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나아가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온생명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다만 생명과 생태의 문제가 단순히 담겨져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왜 필연적이어야만 하는가의 문제 역시 피력이 되어 있다.
해월 선생은 늘 제자들에게 사사천(事事天), 물물천(物物天)을 강조해 왔다. 일마다 한울님 아님이 없고, 물건마다 한울님 아님이 없다는 이 해월 선생의 범천론적(汎天論的) 의미를 띄고 있는 신관(神觀)은 다만 신을 세속화시키고 나아가 인간존엄으로 이어지는 근대지향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해월 선생이 말하고 있는 사사천, 물물천은 ‘자연이라는 만유와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위계에 의한 지배와 억압의 관계로 보는, 인간중심주의가 강조되는 서구적 근대성을 뛰어넘는다. 해월 선생의 이 가르침은 자연과 인간과 신이 유기적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조화와 균형이 강조된 가르침이다. 따라서 사사천, 물물천의 가르침에는 ‘더불어 삶’에의 필연적 과정이 담겨져 있다.
동학에서는 ‘우주’를 ‘지기(至氣)’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며, 사사천, 물물천의 만유(萬有)와 혼원지일기적(混元之一氣的) 연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또한 지기(至氣)로 가득 차 있으며 만유와 더불어 혼원지일기적 연대를 이루고 있는, 동학에서 말하는 우주는 ‘무궁한 울’로 지칭이 되기도 한다. 즉 동학에 있어 우주란 ‘한울님의 무궁한 기운으로 가득 찬(至氣者 虛靈蒼蒼)’,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궁한 울’이다. 또한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이 지기는 삼라만상, 무엇이고 간섭(干涉)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명(命)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없는(無事不涉 無事不命) 한울님의 위대한 작용이기도 하다. 즉 동학에서 말하고 있는 우주란 한울님의 지기(至氣)가 그 본체를 이루며, 나아가 한울님 지기의 작용과 연관을 이루며 삼라만상이 현현되고 또 순환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지기(至氣)는 기왕의 기론자(氣論者)들이 지니고 있는 개념과 유사하게 보인다. 특히 우주의 모든 활동이 기(氣)의 적극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지기’의 ‘지(至)’는 수운 선생 스스로의 해의와 같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至者 極焉之爲)”을 의미하며, 동시에 ‘지’가 관(冠)하고 있는 ‘지기(至氣)’란 단순한 ‘기(氣)’와는 차별을 갖는다. ‘기와 지기’의 결정적인 다름은 ‘기(氣)가 생명력, 활동력 등의 힘, 또는 힘의 근원인데 비하여 ‘지기(至氣)는 허영(虛靈)’이므로, 보다 영(靈)의 성격이 강조된 데에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지기(至氣)는 기왕의 기론자들이 지니고 있는 개념과 유사하지만, 만유(萬有)를 화생시키고, 또 만유에 내재하면서 만유를 간섭하고 만유에 명(命)을 부여한다는, 만유와 혼원지일기적 유대를 이루는 영적(靈的)인 요소가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차별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 수많은 만상(萬象), 곧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편만(遍滿)되어 있어도, 궁극적으로 이들 모두는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한울님의 지기(至氣)와 함께 서로 유기적(有機的)인 연관을 맺고 있고, 동시에 이들 모두는 ‘하나의 커다란 영(靈), 곧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 우주를 한울님의 지기(至氣)에 의한 하나의 커다란 영성(靈性)의 생명체이며, 동시에 삼라만상과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동학의 우주관이다. 일컫는바 우주적 생명, 온생명으로서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우주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이 무궁한 우주, 곧 한울님의 지기에 의하여 명(命)을 부여받은 만유(萬有)는 궁극적으로 같은 뿌리를 지닌 모두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동학에서는 다만 이 우주에서 인간만이 홀로 가장 존귀하다는 인간중심의 인간존엄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해월 선생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스승인 수운 선생으로부터 받고, 깊은 수련을 통해 우주적 본체를 깨닫는다. 그러므로 ‘우주가 한 기운 덩어리, 또는 한 기운 울타리(天地 一氣塊也)’임을 깊이 터득하였고, ‘우주에 가득 찬 혼원한 한울님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인하여 한 걸음, 한 발자국이라도 감히 경솔하게 내딛으면 안 된다.(宇宙間 充滿者 都是渾元之一氣也 一步足 不敢輕擧也)’ 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해월 선생은, 이와 같은 우주를 인심(人心)의 편견, 곧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치우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주 그 자체를 ‘전일적(全一的)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 곧 ‘온생명’으로 볼 것을 「이천식천」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이 크나큰 한 생명체인 우주는 한편으로는 햇살을 보내고 비를 내리게 하여 만유를 자라나게 하고 또 살아가게 하는 ‘동질적 기화(氣化)’로 종속을 기르고 있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먹이를 위하여 먹고 먹히는 ‘이질적 기화(氣化)’로 서로의 연결된 성장발전을 도모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즉 ‘기화(氣化)’를 통해 만유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자리하고, 그러므로 인간 역시 만유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만유와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해월 선생은 생명을 개별적인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천지만물 속에서 신령한 모습을 띠며, 전체적인 생명체와 기화를 통해 관계한다고 피력한다. 개체생명은 전체생명을 내재하고, 전체생명은 개체생명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생명은 개별 존재의 생사문제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생명이 함께 공존하는 생명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동식물이 먹이를 위하여 다른 동식물을 잡아먹는 것은 ‘약육강식에 의한 살육과 다툼’이 아니라, 한울이 한울을 먹으므로 일으키는 ‘기화작용’, 곧 비를 내리고 햇살을 보내어 만유를 살아가게 하는 그러한 작용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 해월 선생의 생각이다. 즉 동물이나 식물은 자기 이외의 종에게 먹힘으로써 자기 종을 확산시키며 우주 전체의 변화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해월 선생은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질적 기화와 ‘한울이 한울을 도와준다.’는 동질적 기화를 통해 만유가 지닌 생명의 공생과 순환을 피력하므로, 인간중심의 사고를 벗어버린, 생명 중심 사고가 바로 우주적 생명의 본연임을 강조하고 있다.
해월 선생이 펼친 「이천식천」은 우주적 삶이 살육과 다툼이 아니라,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게 하는 것’임을 밝히므로, 오늘 인류의 삶에 있어 가장 긴요하게 요청되는 생명 중심의, 생태 중심의 문제를 근원적인 면에서 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왜 생명 중심이어야 하며, 생태 중심이어야 하느냐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피력하고 있다.
또한 ‘이천식천’은 만유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만유 역시 한울님으로서 공경해야 한다는 삼경(三敬) 사상으로 이어지면서, 해월 선생이 펼치는 동학적 생태, 생명사상의 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해월 선생은 한울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한다는 경천(敬天)과 경인(敬人)에 그치지 않고, 사물을 공경해야 한다는 ‘경물(敬物)’ 또한 강조하고 있다. 해월 선생이 강조하고 있는 ‘경물(敬物)’은 말 그대로 자연인 만물을 다만 보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공경하라는 가르침이다.
해월 선생은 사물을 공경하는 것, 곧 ‘경물’은 도덕의 극치를 이루는 일이요,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는 바로 만유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한울님이 우주 법칙으로 내재해 있기 때문에, 경물을 한다는 것은 한울님의 도, 곧 천리를 따라, 천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길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지닌 이기적 욕망에 따라서 자연 생태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생태계의 도, 곧 만유에 내재된 한울님의 법칙을 깨달아 이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곧 경물(敬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물은 바로 도덕의 극치이며,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에 합일하는 길이 된다.
천지기화의 덕에 합일된다는 의미는 또한 ‘나’라는 개체만이 사는 문제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길을 뜻하며, 전체 생명, 곧 온생명이 의식을 지닌 존재로 깨어나게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경물을 실천하게 되면 그 덕이 만방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敬物則德及萬邦矣) 이와 같이 동학이 지향하는 생태, 생명의 문제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천리를 깨닫고 천리를 따라 사는 삶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나아가 만유에 내재한 한울님의 도를 실천하므로 개별 생명이 전체 생명이 펼치는 천리(天理)에 함께하는 길이기도 하다.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해월 선생이 펼친 동학적 생태, 생명사상의 특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해월 선생의 생각은 스승인 수운 선생이 제시한 ‘불연기연(不然其然)’에 의한 것이다. 불연기연은 동학의 매우 중요한 사유 체계로서, 원인에 대하여 경험을 바탕으로 추론해 나가는 것이 ‘기연(其然)’이 된다면,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본원적 탐구가 ‘불연(不然)’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원인에 대하여 경험을 바탕을 하는 추론인 기연(其然)의 관점만으로 볼 것 같으면, 이 우주는 모두 다른 개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한다. 즉 나는 나의 아버지의 자식이고, 너는 너의 아버지에부터 태어났으니,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식의 일반적인 인식이 된다. 이러한 일반적 인식에만 의존하여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삶과 우주적인 질서를 ‘너와 나’, 나아가 ‘여성과 남성’, ‘인간과 자연’ 등의 이원적인 성격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그 차원을 달리해서 이들 모두가 궁극적인 면에 있어, 우주적 공동체와 그 근원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들 만유는 개체이며 동시에 개체가 아니다. 나의 아버지와 너의 아버지는 그 첫 조상이 누구이며, 그리고 그 첫 조상은 또 누가 낳았는가의 문제에 이르면, 우리의 일반적 경험을 토대로는 알 수 없는 일, 곧 ‘불연(不然)’이 되지만, 이와 같은 불연의 일을 일반적 경험이 아닌, 차원을 달리해서 바라보면, 너의 아버지나 나의 아버지는 같은 조상에게서 태어났고, 또 그 같은 조상인 우리의 첫 조상은 우주적 크나큰 생명으로부터 화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반적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불연이 ‘그렇구나’ 하는 기연이 되며, 너와 나는 현상적으로는 다른 아버지의 자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뿌리를 둔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는 서로 다투고 싸울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수운 선생은 제자들에게 ‘무궁한 울’인 이 우주와 더불어 너 역시 무궁한 존재임을 깨달아, 한울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경험이 토대가 되는 기연(其然)으로만 살피지 말고 본원적인 면을 궁구하고 또 그 본연에 이를 수 있는 불연(不然)으로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운 선생이 펼친 ‘불연기연’을 근거로 하는 「이천식천」의 가르침은 생태, 생명의 문제와 함께 우주적 모든 삶, 곧 전체와 개체,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 서양과 동양, 남성과 여성, 인종과 인종을 비롯한 모든 이원적인 대립과 모순을 극복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나아가 이와 같은 점이 바로 오늘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인, 자기 아닌 타자를 자기 속에 귀속시킴으로써 자기의 동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러한 동일성의 논리로 인하여 빚어지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져 조화와 균형의 삶을 이루므로 진정한 생태, 생명의 길을 여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이성의 도구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화 등으로 인하여, 이 우주마저 종속시키려는 포스트모던의 시대, 해월 선생의 「이천식천」은 투쟁과 분열에서 하나 됨으로, 남성중심 가정에서 공동의 화합 가정으로, 인간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인류의 행보를 옮겨놓고자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법설이다.
영월과 정선이라는 깊은 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해월은 동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자 인근의 교도들을 다시 모으고, 또 기도소 등을 차려 특별 기도를 봉행하는 한편,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이와 같은 법설을 펼쳤다.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대인접물」의 설법, 또 만유를 모두 공경해야 한다는 「삼경」이나,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의 설법은 결국 한 뿌리를 두고 있는 법설이다. 「이천식천」과 「삼경」의 법설이 만유와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이라면, 「대인접물」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 된다. 이필제의 난을 거친 이후, 좌절을 벗어나 영월 직동의 깊은 산간 마을에서 한 해 겨울을 보내며, 해월 선생 스스로 더욱 깊은 종교적 경지를 이룩했음을 이와 같은 법설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만유의 공생과 순환을 통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이 바로 동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삶임을 해월은 이렇듯 법설을 통해 강조하였다.
해월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오늘이라는 현대사회 속에서, 인류의 가장 직면한 문제인 생태, 생명의 문제를 포함한 모든 이원적 대립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문제를 근원적인 면에서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에서 해월 선생의 사상이 다만 근대에 머물지 않고, 근대를 뛰어넘어 현대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