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 (1858년~ 1924이탈리아)
주세페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 루카에서 4대가 음악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와 이름이 같다. 아버지는 음악학교의 교사였지만 푸치니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어릴 적에는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일절 없었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말썽만 피우는 문제 학생이었다. 심지어 그를 가르치던 한 음악 교사는 푸치니가 가업을 이을 가능성은 없다며 그를 가르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푸치니에 대한 기대와 지원을 그치지 않았고 그를 루카의 음악 학교로 보냈다.
푸치니는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카를로 안제로니라는선생을 만나 엄청난 속도로 음악을 배우고 루카의 성당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드디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고 오페라 작곡가로 살것을 결심하여, 1880년에 움베르토 1세의 아내 마르가리타 왕비의 후원 등을 받아 밀라노의 음악학교에 입학해 폰키엘리 밑에서 배웠다.
밀라노 음악원 재학중 폰키엘리의 권유로 창작 오페라 공모에 처녀작 "빌리"(Le Villi)를 냈으나 등단에 실패했다.
그러나 1884년,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리코르디 출판사에서 "빌리"의 악보를 출판하고 공연을 후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푸치니의 본격적인 오페라 경력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된 "라보엠"(La Boheme)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1900년에는 로마에서 "토스카"(Tosca)가 초연되어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오페라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을 작곡하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해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904년 "나비부인"을 밀라노에서 초연하여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나비부인" 이후로 푸치니의 오페라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라보엠","토스카","나비부인"에 미치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진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다. 1907년 뉴욕으로 건너가 미국적 소재로 작곡한 "서부의 처녀들"이 1910년에 뉴욕에서 초연되었고 1918년에는 전혀 내용이 이어지지 않는 3연작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가 무대에 올랐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니냐는 평을 받던 푸치니는 중국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투란도트"를 접하자 이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음악의 경지로 들어가 푸치니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준 오페라 "투란도트"를 작곡했다. 하지만 이전의 교통사고 후유증에 암이 겹쳐 결국 "투란도트"의 완성을 거의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으며,
미완성된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후배인 프란코 알파노(1875~1954)가 완성하여 1926년에 밀라노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둔다. 초연 당시 토스카나니는 푸치니가 작곡한 부분까지만 지휘하고 연주를 마치는 것으로 원 작곡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에 투란도트의 나머지를 겨우 완성시켰던 알파노는 꽤 섭섭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푸치니는 로시니에서 베르디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계보를 잇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낭만주의 시대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완결하고 현대 이탈리아 오페라로 나아가는 길을 연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스스로 "극장을 위해 작곡할것을 신께 명받았다"라고 할 정도로 위대한 오페라들을 남긴 그는 자칫 성악에 치중하기가 쉬웠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유려한 관현악법의 구사로 이전 작곡가들과는 다른 스타일을 보였다.
이런 푸치니는 당대 다른 음악가들의 경향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방식으로 녹여내는 것으로나타났는데
예를 들어 리하르트 바그너의 "유도동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활용했다던지,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 심지어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의 영향까지도 일부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오페라에서는 인상적인 여성 주인공들의 묘사가 탁월하게 나타난다. "라보엠"의 미미, "토스카"의 토스카, "나비부인"의 나비부인(쵸쵸상), "수녀 안젤리카"의 안젤리카, 그리고 마지막 오페라인 "투란도트"의 투란도트 공주까지 그의 오페라는 이런 인상적 여성 주인공들의 매력적인 선율로 청중들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그런덕에 위대한 여성 오페라 가수들에게 푸치니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꼭 거쳐가야할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비부인", "서부의 아가씨", "투란도트"처럼 동양이나 미국 서부같은 이국적 소재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특징도 있다.
베르디 시대때부터 시작된 가사와 극적 표현의 강조를 그대로 이어서 심화시켰는데, 이는 가수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고급 의류를 상당히 센스 있게 입고 다닌 간지남이었으며, 최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닌 얼리 어답터였고,
이로 인해 당시로서는 드문 자동차 사고로 상당기간 고생을 했다. 거기에 여자 관계가 복잡한 바람둥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호화롭고 자유롭고 방탕한 삶을 추구한 인물이다.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Elvira, 결혼 전 성은 본투리Bonturi)는
원래 푸치니 친구 나르시소 제미냐니(Narciso Gemignani)의 아내였고 둘 사이에는 포스카(Fosca)란 딸과 레나토(Renato)란 아들도 있었는데,
친구가 자기 아내에게 피아노 개인 교습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푸치니가 친구의 집을 드나들다가 불륜관계가 되었다.
엘비라는 끝내 딸을 데리고 남편과 별거하여
푸치니와 지내게 되어 아들 안토니오까지 낳았고 푸치니의 차 사고 이후 하루가 지나 나르시소가 사망하자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참고로 친구 나르시소 또한 바람둥이에다가 이 사실에 매우 당당한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부부 간에 불화가 심했으며 나르시소는 결국 자기 불륜 상대의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요란한 스캔들을 일으키며 결혼했건만, 그녀가 나르시소와 결혼해있던 상황에서도, 그리고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아서 가정불화를 겪었다.
"나비부인"을 작곡할 당시에는 여주인공에 대한 영감을 얻겠다면서 일본인 소프라노를 집에 끌어들여서 부인과 다투기도 했다.
어린 소녀 도리아 만프레디(Doria Manfredi)를 가정부로 들였다가
남편과 소녀의 관계를 의심한 부인이 강력히 반발하자, 이에 부담을 느낀 소녀가
푸치니의 집을 떠난 후 얼마 안되어 자살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소녀는 유서로 자신의 시신을 부검하여 숫처녀인지를 밝혀달라고 청했다.
이에 부검 결과 진짜 숫처녀였음이 밝혀져서 푸치니의 부인이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푸치니가 거금을 들여 처를 석방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부인의 괜한 의부증이라는 주장과, 푸치니가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한 것이 맞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다.
도리아는 우연히 푸치니의 의붓딸 포스카가 당시 기획자 살바토레 레오나르디(Salvatore Leonardi)와
결혼한 유부녀인 상황에서 대본작가 구엘포 치비니니(Guelfo Civinini)와 바람피는 현장을 목격했다.
도리아가 자신의 부정을 누설할까봐 두려워진 포스카는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도리아의 행동거지가 수상하다고 비난했다. 엘비라는 여기에 낚였고, 도리아를 의심한 나머지 심한 모욕을 가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푸치니는 그 소녀와 바람을 핀 것은 아니지만 그 소녀의 사촌 줄리아 만프레디(Giulia Manfredi)와는 실제로 바람을 피고 있었던 것.
사촌의 후손인 만프레디 집안의 구성원들은 자신들도 푸치니의 혈연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사촌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의 이름과 본처와의 자식들의 이름이 모두 일치한다. 심지어 푸치니는 그녀를 위해 그녀를 찍은 사진, 영상 클립들을 선물했다.
만프레디가가 사는 동네에서는 이 사실이 소문으로 허다하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만프레디가의 일원들은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자고 주장하나 푸치니가는 이에 응하지 않는다.
실제로 혈연이 있음이 입증되면 각종 재산 분할과 관련한 법적 분쟁에 시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
이 일련의 사건은 ‘도리아 사건’이라고 불리며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구설수에 오른 일이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2008년에
푸치니의 여인(Puccini e la fanciulla)이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거위 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가 암으로 사망한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하지만 푸치니의 사망 원인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다름아닌 담배.
실제로 푸치니는 지독한 골초로 유명했고,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는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는데 이와 연관된 일화가 있다.
하루는 두 사람이 매우 지독하게 다툰 뒤 한동안 연락조차 끊고 지내게 되었다.
이후 크리스마스가 되었는데 푸치니가 지인들에게 빵을 선물로 보내다가 실수로 토스카니니에게도 빵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푸치니가 따로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보냈음'이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토스카니니의 답장은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먹었음'이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럭저럭 좋은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주세페 베르디와는 달리 정치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푸치니의 전기작가 메리 제인 필립스 마츠는 "1차 세계대전과 그 즉각적인 여파를 거치면서 푸치니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제로에 가까웠다"고 썼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른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아무도 잠들지 말라)’
자니 스키키 중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
르 빌리
에드가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서부의 아가씨
제비(오페라)
삼부작(Il Trittico)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자니 스키키
투란도트
전주곡 E단조 (1876)
아다지에토 F장조(1881~3)
교향적 전주곡 A장조 Op.2 (1882)
교향적 카프리치오 Op.3(1883)
현악 4중주 D장조(1881~3)
현악 4중주를 위한 3개의 미뉴에트(1881)
현악 4중주 C♯단조 '국화(Crisantemi)' (1890)
작은 왈츠(1894)
피아노 소품(1916)
칸타타 아리따운 이탈리아의 아이들(1877)
미사 글로리아(1880)
레퀴엠(1905)
태양과 사랑(1888)
바다와 땅(1902)
영혼의 노래(1904)
황금같은 꿈(1912)
로마의 찬가Inno a Roma (1919)
「토스카」 · 「라 보엠」 · 「나비 부인」 등, 이탈리아 가극에 많은 공헌을 남긴 푸치니는, 근대 이탈리아가 낳은 대음악가이며, 베르디 이후의 이탈리아 가극에 근대의 숨결을 불어 넣은 제1인자이다. 1858년 12월 22일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르간 주자였으나 일찍 타계하여, 푸치니는 가난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베르디의 「아이다」가 가까운 도시인 피사에서 흥행된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피사에 갔다고 하며, 그것이 푸치니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음은 사실이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탈리아 여왕의 하사금을 얻어 1880년 밀라노 음악원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라 보엠」은 토스카니니에 의해 1896년에 상연되었는데, 오늘날에는 구노의 「파우스트」와 함께 가장 뛰어난 가극이 되고 있다. 이어 「토스카」(1900년) · 「나비 부인」(1904년)이 작곡 · 상연되자 푸치니의 이름은 확고한 존재가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가극계 뿐만 아니라 세계 가극계의 중진이 되었다. 1924년 11월 29일 브뤼셀에서 별세하였다.
🐦오페라 나비부인(1904작곡)
2차대전 때 히로시마와 더불어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으로 유명한 항구도시 나가사키. 이곳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스코틀랜드인 토머스 글로버의 저택과 글로버 공원이 있고, 공원에는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 오페라 [나비부인]의 주역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가 극중 차림새로 아이를 데리고 서 있는 동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앞서 제국주의 열강에 문을 열었던 일본에서 개항과 함께 서양 문물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곳도 바로 이 나가사키였습니다.
서양인들이 들어오자 일본 게이샤들은
이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게 되었고,
매춘과 국제결혼으로 인해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생겨났지요.
이들과 결혼까지 했다가 남자가 혼자 본국으로 돌아가 버려 버림받는 게이샤도 더러 있었습니다.
핑커튼과 샤플레스 - Dovunque al mondo 온 세상을 누비는 우리 양키는
나비부인과 핑커튼 - Vogliatemi bene 조금만 사랑해주세요
나비부인 아리아 - Un bel di vedremo 어떤 갠 날
미국 작가 존 루터 롱은 선교사의 아내로 나가사키에 살았던 누이를 통해
이런 게이샤의 실화를 알게 되었고,
1898년 미국 잡지 <센추리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이 실화를
소설로 각색해 연재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 피에르 로티의 소설 [국화부인]이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롱 역시 로티의 작품을 상당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극작가가 이 흥미로운 소재를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숱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이 작품을 연극으로 옮길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 사람은 데이비드 벨라스코였습니다.
연극으로도 크게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런던으로까지 진출했고,
푸치니는 런던에서 [나비부인]을 연극으로 보자마자 이 소재로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흥행감각이 탁월했던 푸치니는 이미 연극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을 오페라화하는 것이 인기를 보장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본은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에게 맡겼습니다.
결혼에 모든 것을 건 게이샤의 비극
1막은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일본식 집에서 시작됩니다. 미국 해군 장교 핑커튼은 아버지가 할복자살하고 집안이 몰락해 게이샤가 된 열다섯 살의 ‘초초’상('나비'라는 뜻의 게이샤 예명. ‘버터플라이’는 서양인 고객을 위한 이름)과 일본식 전통 혼례를 치릅니다.
핑커튼 쪽에서는 장난에 불과했지만, 핑커튼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버터플라이는 이 결혼에 모든 것을 걸고 기독교로 개종까지 하죠. 나가사키에 주재하는 미국 영사 샤플레스는 그녀의 진심을 느끼고 걱정하며 핑커튼에게 신중하라고 충고하지만,
핑커튼은 그 충고를 가볍게 넘깁니다.
“온 세상을 누비는 우리 양키는 온갖 위험도 아랑곳 않고 이윤과 쾌락을 쟁취하죠. 어디든지 맘 내키는 대로 닻을 내리고...” 물론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미국 여성과 새로 결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죠.
혼례식 중에 버터플라이의 숙부가 나타나 개종을 꾸짖으며 난동을 부리자 친척들은
다 식장을 떠나버리고,
괴로워하는 버터플라이를 달래며 핑커튼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사랑의 이중창을 부릅니다. 이 오페라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면서, 뚜렷이 엇갈리는 남자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 뒤에 올 비극을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1막과 2막 사이에는 3년이 넘는 세월이 놓여 있습니다. 미국으로 떠난 지 3년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는 핑커튼을 버터플라이는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하녀 스즈키가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남편이 돌아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단념을 권하지만, 버터플라이는 요란하게 화를 내며, 남편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담은 아리아 ‘어떤 갠 날’을 부르지요.
그러나 핑커튼은 미국에서 이미 케이트라는 미국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샤플레스 영사는 핑커튼의 편지를 들고 나비부인을 찾아오지만, 차마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한편 일본인 뚜쟁이 고로는 부자인 야마도리를 버터플라이의 집에 데려오지만, 버터플라이는 기혼여성에게 감히 청혼을 하다니 무례하다며 그의 구애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핑커튼의 아들을 영사에게 보여주며 꼭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지요.
영사가 돌아간 뒤 예포 소리가 들리고 핑커튼이 탄 군함이 항구에 닻을 내립니다. 버터플라이는 감격에 겨워 온 집안을 꽃으로 꾸며놓고 밤새 남편을 기다립니다.
스즈키와 아이는 지쳐 잠이 들고 버터플라이 혼자 꼿꼿이 앉아 있는 가운데 유명한
‘허밍 코러스’가 들려옵니다.
허밍 코러스는 이탈리아어로는 ‘입 다물고 부르는 합창(Coro a bocca chiusa)’입니다.
새벽이 밝아온 뒤에야 버터플라이는 잠시 방안으로 들어가 눈을 붙입니다.
그 사이 핑커튼과 케이트, 영사가 나타나 스즈키에게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합니다. 핑커튼은 온 집안에 가득한 꽃들을 보고는 괴로워서 숨어버리고,
케이트는 버터플라이 앞에 나타나 아들을 친자식처럼 잘 키우겠다고 약속하죠.
버터플라이는 30분 후에 핑커튼이 직접 아이를 데리러 와야 한다고 말하고,
다들 떠난 사이에 아이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한 뒤 병풍 뒤로 가서 ‘명예롭게 살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으리라’라고 쓰여 있는 아버지의 칼로 자결합니다.
핑커튼이 돌아와 ‘버터플라이’를 외쳐 부르는 가운데 막이 내립니다.
푸치니의 신념 - 극적 충격이 공연 성패의 관건
연극 [나비부인]의 극본과 연출을 맡았던 벨라스코는 군함이 항구에 도착한 뒤 핑커튼이 집에 올라오기까지 걸리는 저녁, 밤, 새벽까지 시간을 뛰어난 감각의 조명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버터플라이 역의 주연배우를 14분 동안 정지 자세로 무대 위에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연극 무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긴 정적이죠. 푸치니는 특히 이 장면과 피날레의 자결 장면에 감격했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무대 뒤로 달려가 벨라스코에게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