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11강
말씀/ 마가복음 7:1-37
요절/ 마가복음 7: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북으로부터 오물풍선이 날라와서 몇몇 유리창을 파손했습니다. 하는 짓거리가 화나게 합니다. 정부는 대북방송으로 대응하겠다고 하는데, 근본 대책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남북한 지도자들이 정치 명분보다 자기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더러운 마음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다툼과 싸움으로 확장되어 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결과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몇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을 조사하러 내려왔습니다.(1) 2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 몇 사람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이 바리새인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손을 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3) 물방울 몇 개 떨어뜨리는 시늉 정도가 아닙니다. 흐르는 물이나 50리터 정도의 물로 팔뚝까지 씻었습니다. 몸만 씻은 것이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 씻었습니다.(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따져 물었습니다.(5) “당신 제자들은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이오! 다른 거 말고 전통이나 제대로 가르치시오!”
손 씻는 것은 위생의 기본입니다. 손씻기 위생본부에 의하면 사람 손에 12만마리의 세균이 있으며, 각종 질병의 70%가 불결한 손을 통해 감염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정결의식은 위생 차원이 아닌 신앙 차원입니다. 주먹 쥐고 씻는 방식부터가 그러합니다. 본래 손 씻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에게만 요구되는 행동이었습니다.(출30:20) 제사장 가운을 입은 것으로 일반 백성들과 차원이 다른 사람, 본래부터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섬기는 자가 되려면 회개하고 나아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스스로에 대해 거룩하다는 의식이 없었기에 굳이 예식을 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아마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세계에 포위되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날마다 보고 듣는 것, 하나님 없는 문화, 하나님을 부정하는 소리였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우상 문화에 마음이 녹고 가치관들이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씻어내야만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과 가치관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6,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사야서 선지자의 말씀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을 하지만 마음은 멀어지는 외식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높이고 자랑하게 만드는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것입니다.(7) 왜 그렇습니까! ‘손을 씻으면 경건한 사람, 손을 씾지 않으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 마음을 씻는 전통이 아니라 마음을 감추는 전통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으로 구분하여 말씀하신 이유가 그러합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계명과 전통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한 세트였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려고 구체적인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몇 kg이상 들지 말고 응급환자 이외에는 치료하면 안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명의 정신과 상관없이 전통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손 씻는 것을 계기로 마음을 씻어야 하는데, 마음을 씻기는 커녕 그렇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고르반 전통도 그러합니다.(9)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자!’, 정신으로 출발했는데, 부모 부양을 회피하는 목적으로 악용되었습니다. 부모에게 드리기 싫은 마음이 부모를 부양해야 할 상황을 만났을 때, 고르반! 선언으로 부모에게 드리지 않으면서도 영적인 사람으로 칭찬받는 것이었습니다.(10-12) 전통이 악한 마음을 숨기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말았습니다.(13)
그러면 전통이 나쁜 것입니까! 전통을 이용하는 마음이 나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신앙 전통마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이용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임에도 여러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 먹기나 소감쓰기의 전통은 말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목자로서 양을 돕는 일대일 전통도 있습니다. 전도는 전도사에게만 해당되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표현이라는 아름다운 사명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우리 당대로 끝나지 아니하고 우리 다음 세대로 줄기차게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전통 자체에 몰입하여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체 UBF에서 365일 일용할 양식먹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는데, 365 양식 상 주는 것에 대해, ‘양식 먹는 것이 왜 상 받아야 할 일인가!’, 문제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나는 365 양식을 먹은 사람이야’, 스스로를 경건의 화신으로 인치는 인증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양식을 제대로 먹는 사람이라면 다른 고백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루라도 양식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주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교회사에서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중세교회의 면죄부는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만든 치리권이었습니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은 이것까지도 권력을 오용하는 도구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을 지키는 거기에만 몰입하거나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를 불러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14) 15,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다시 설명을 요청합니다.(17) 그만큼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더러운 쓰레기, 층간 소음, 화나게 하는 사람들..., 그들로 인해 불쾌지수도 올라가고 삶의 질도 떨어집니다. 환경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술자리에 가는 것보다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으로 향할 때, 인생을 생각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럴지라도 환경과 사람의 마음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웅장한 예배가 내 믿음을 결정해주지 않습니다. 가방 끈 길다는 것이 지성인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고, 많이 가진 것이 영혼의 풍성함을 보증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때마다 자주 속습니다. 밖에 있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다시 한번 책망을 받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18절입니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음식을 먹으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대소변으로 배출되는 것, 모든 음식물이 동일한 과정을 거칩니다.(19) 우리가 혐오식품으로 생각하는 것들, 음식물이 혐오스러운 것보다 마음에서 혐오스럽게 보는 것입니다. 일본의 개구리회, 중국 바퀴벌레 튀김, 혐오스럽지요? 그런데 우리 산낙지는 어떠합니까! 입맛 댕기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따라 더럽기도 하고 먹음직스럽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무엇을 먹는가? 무엇을 입는가? 어디에 사는가?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비방의 말을 내뱉음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오해와 불신을 끼얹고 하나님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기 마음이 아닌 전통을 지키는 것에만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 씻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들이 사람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12가지 더러움을 말씀했습니다. 21-23절입니다.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온갖 더러움’이라는 한 단어로 싸잡아 말씀하지 않고 하나 하나 콕콕 짚어 말씀하십니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직시하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를 진실하게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가면 하늘의 천사같은 모습에 이를 수도 있지만, 악한 욕망을 제어하지 아니하면 악마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 물론 우리 본성은 할 수 있는대로 변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래도 나는 드러나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나 정도면 보통 이상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서 17장 9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을 알고 계시고 주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 안에 있는 더러움을 직시해야만 주님 앞에 겸손해지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역을 떠나 이방인의 땅 두로에 가십니다. 거기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지내고자 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 있었던 여러 힘든 일들을 잠시 잊고자 아무도 없는 이곳에 오신 것이 아닐까 뇌피셜을 써봅니다. 하지만 한 여자가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25) “주여, 더러운 귀신 들린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제발 고쳐주세요” 26절을 보면, 그녀는 헬라어가 가능한 헬라인, 핏줄로 하면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26) 유대세계의 관점으로는 짐승같은 이방인이지만, 이방세계의 관점으로는 최고의 지성인입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의 과외교사 선호도 1위가 헬라인이었습니다. 유대인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자를 받아주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자가 유대인 예수님 발 아래 무릎 꿇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순전히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엄마의 아픔,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며 따뜻하게 영접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땅바닥에 내려놓은 자존심까지 확인 사살하는 장면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이 하인을 고쳐달라고 왔을 때 기꺼이 동행하신 분이 여기에서는 왜 이리 야박하게 대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숨은 의도가 있다고 한들, 너무 심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를 줄 알고 왔는데..., 병 좀 고친다고 너무 갑질하시네”, 원망을 퍼붓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말은 전혀 다릅니다.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여 옳소이다’, 자녀를 먼저 배불리 먹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기분 나쁜 말이지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스런 애완견이라 할지라도 자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것만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개 취급, 유대인들은 자녀 대우', 그것도 옳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태어난 집안도 다르고 재능도 다르고 에너지도 다르고 심성도 다릅니다. 출발점이 다르고 각자의 모습도 다르고 삶의 여정도 다릅니다. 하지만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차별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든지, 차별은 원망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인은 거기에서 한단계 더 나아갑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자는 자녀취급 받느냐, 개취급 받느냐, 거기에 붙잡히지 않았습니다.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 걸려 넘어집니다. 여자가 넘어지지 않은 것은 딸아이를 살리는 데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살리는 것인가”, 거기에 집중하다보니 예수님 말씀에서 가능성을 찾고 부스러기 은혜를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에 집중할 때 자존심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먹여야겠다는 한가지 마음으로 살아가는 많은 엄마, 아빠들도 그러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구질구질하고 힘든 자리에 서게 될 지라도 뒤엎지 않습니다. 반면 못난 부모, 못난 남편과 아내는 존심을 내세우다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에 감동을 받습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여인의 말은 예수님의 능력을 이끌어 냈습니다. 합당한 말은 은쟁반에 금사과라는 말씀이 있는데(잠25:11)..., 여인처럼 지혜롭게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서적이 한때 인기를 끌었는데..., 이런저런 말 이론을 공부하고 말의 중요성을 인식할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하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토해내어 굴어 들어온 복을 차버리는 일들을 만납니다.
좋은 말하기가 어려운 가장 근본 이유는 마음에 있습니다. 말은 기술이 아니라 내적 싸움의 열매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밑바닥을 돌아보고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교만을 쏟아내지만 마음은 겸손하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입이 사나우면 마음도 사나운 것입니다. 입에서 죽이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면, 마음에는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것입니다. 입으로 부정한 말을 내뱉고 있으면, 마음에서는 비교의식이나 불안, 욕심아나 시기심이 출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라고 칭찬하신 후에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비대면으로 고쳐주신 모습입니다. 결과적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게서 자녀로서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자녀다운 믿음을 그 말에 담았기에, 어찌 보면 합당한 결과입니다. 자녀의 특징 중 하나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욕먹고 심한 소리를 듣고 심지어 매를 맞을지라도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거야’, 믿습니다. 그와 같이 여인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담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바리새인들의 말이나 고향사람들의 말과 좋은 대조가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은 것을 꼬투리 잡아 비방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조롱과 무시를 쏟아냈습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전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교만과 비교의식, 시기심과 열등감 같은 어둠이 그들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 자녀다운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세련된 매너나 말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더러움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과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을 준비하는 데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에게 때마다 지혜를 주시고 마땅히 해야 말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사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믿음의 말을 하는 자들로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1-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을 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와서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서 고쳐주시는데,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십니다. 가장 특이한 것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탄식이란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할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면서 이리 힘들어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탄식은 치유의 어려움이 아닌 이 병자로 상징되는 당시 영적 상황의 어려움에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어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이 언제 귀가 열려 제대로 들을 수 있고, 언제 입이 열려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현재의 모습만 보면 한없는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침을 뱉아 혀를 대며 고치셨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대단히 수치스런 모습입니다. 상징적인 퍼포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제자들의 귀를 열고 입을 여실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역사의 결정판입니다. 패배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사람들은 듣지 못하고 멸시와 조롱과 침을 뱉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십자가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는 입을 열어주십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마음에 있는 악함을 씻어주시고 영생의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성령으로 동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며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말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이요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