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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죤 웨슬리의 구원론)(웨슬리 283주년 기념주일.2085.2021.5.23)
엡2:8
할렐루야!
여러분사랑합니다—목사님도사랑—옆사람과—좋은말 할 때—마음에 무거운짐 내려놓으세요.
오늘은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John Wesley) 회심 283주년기념 감사 예배로 드리는 주일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요한 웨슬레 목사님에 의해 영국에서 처음 ‘메도디스트’란 이름으로 174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감리교라는 ‘메도디스트’라는 말은 원래 별명이요, 비웃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발전하여 감리교회의 정식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규칙주의자, 법칙주의자’라는 의미입니다. 철저하게 시간을 지키며, 철저하게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감리교도들은 이처럼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며, 성경을 철저하게 공부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유산을 잘 계승하여야 할 줄 믿습니다.
감리교도들은 감리교회의 태동을 존 웨슬리의 회심에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웨슬리의 회심이 갖는 진정한 의미라 함은 웨슬리의 생애를 빼놓고는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웨슬리가 회심하기 이전부터 웨슬리는 신앙인이었고, 영국 성공회 신부였고, 선교사였고, 설교자였습니다. 그런 웨슬리에게 회심이 갖는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물음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웨슬리는 회심을 통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심을 통해서 믿음과 복음, 구원 그리고 전도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심은 ‘마음을 돌려먹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회심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회심은 죄에서부터 돌이킨다는 뜻이고, 회심은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1714년에 11세 때 런던 차터하우스 학교에 입학하여, 1720년에 17세 때에는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분의 대학시절 목사의 아들로서 매일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엄숙한 소명에로의 부름’등 경건한 서적을 읽으면서 학문에 심취함과 동시에 신앙과 경건의 훈련을 철저히 쌓으면서 행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172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고, 1726년에는 옥스포드대학교 Lincoln대학의 조교수가 되었으며 1729년에는 동생 촬스 웨슬리가 조직한 ‘경건한 친우회’(Holy Club) 리더가 되어 기도와 성경공부 및 영적인 경건의 훈련을 규칙적으로 하는 ‘성경벌레’,‘규칙장이’ (Methodist)들의 모임을 이끌었으며 감옥과 고아원 심방, 빈민구제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여기 감리회(Methodist)란 법칙주의자 곧 규칙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이 모임이 점점 커진 것이 속회의 시작이요 감리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신성구락부(속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어 감리교회의 속회는 감리교단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리교단의 속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속회가 점점 커져서 감리교단이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의 내용
1. 종교적 우월감입니다.--목사의 아들, 영국 성공회 신부, 선교사
2. 학문적 우월감---옥스포드 대학 출신
3. 그리스도 없는 열심
4. 조지아에서의 2년 4개월의 선교--웨슬리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열심으로 일했으나 인디언들은 웨슬리에게 아무런 흥미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주해간 영국인들도 웨슬리가 귀족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웨슬리는 1738년 2월 1일 완전한 실패자로서 귀국을 하게 됩니다. 선한 일을 열심으로 해서 구원을 성취하려던 웨슬리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좌절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째 되던 날 1738년 5월 24일 저녁 때였습니다. 올더스게이트(Aldersgate)라는 곳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작은 기도처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것에서는 어떤 사람이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그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있다가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밤이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강론하는 것을 듣고 있던 중, 갑자기 그의 심령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그때가 그분의 나이 35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 후 그분은 성령충만한 은혜의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전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외치며 대 전도운동을 전개하여 놀라운 복음주의적인 부흥을 가져와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1738년 5월 24일 가슴이 뜨거워지는 회심의 체험을 한 후에 60년이라는 생애를 33만 4천 672Km를 여행하며(대부분 말위에서:지구 12바퀴반 도는 거리) 4만 4천번이상의 설교를 하였는데 이것은 1년에 평균 734회, 한달에 62회 하루에 2번이상의 대중설교를 하였다는 대기록입니다. 또한 10만명의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을 위한 열심과 뜨거움으로 온 일생을 바친 분이셨던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감리교회가 해마다 5월 24일이 들어있는 주간을 요한 웨슬레 회심주일로 지켜오는 것은, 그분의 이러한 뜨거움과 열심을 본받아, 우리도 그 분처럼 귀하고 값진 신앙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그 날 저녁의 사건을 일기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그 위에 주께서 나의 죄를, 아니 나의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존 웨슬리의 일기 1738년 5월 24일)
그 날 웨슬리가 참여한 집회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가문은 청교도전통을 가진 영국국교회 신부의 가문이었습니다. 웨슬리도 영국국교회의 신부였으나 성경과 영국국교회의 신학과 자기가 보아온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 속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 때 웨슬리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접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는 성경 중에 한 책으로서 기독교의 교리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以信稱義,)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주요내용을 이루고 있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루터도 로마 카톨릭 신부의 신분에서 롬 1장 16-17절을 읽고 신앙의 확신을 갖고 종교개혁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새로운 존재로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역사가 일어나고야 만나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웨슬리는 마틴 루터의 마음을 움직였던 그 성경의 서문을 듣던 중에 놀라운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회심을 통하여 그분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뉴턴(new-turn)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이때부터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를 담대히 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을 통해서 놀라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첫째, 성령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모든 영적 운동은 성령 운동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자신의 지식, 경험, 열심만으로는 선교에 실패를 하였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불같은 은혜와 은사를 힘입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신앙의 성장이나 변화는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참다운 성령 운동만이 이 민족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감리교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웨슬레 같은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웨슬리회심기념주일을 지키고 절기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성령충만한 한사람을 통해 사회, 국가가 변화됩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둘째, 기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있을때 응답이 될때까지 기도하면서 이것이 주님의 뜻인가를 구별하며 기도합니다. 생명을 내놓고 기도합니다. 88세의 생신을 맞은 그에게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한 결과라고 하였으며, 감리교인으로써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증거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새벽기도의 줄을 놓치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철야기도, 새벽기도, 금식기도 등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후 성령이 임하기전에는 깜깜했습니다. 성령을 받기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마음을 모아 감리교단과 경북북지방과 상주감리교회와 내 자신을 위해 기도할때입니다. 그렇게 기도할때 웨슬레의 성령체험이 우리에게도 있고 그런 믿음의 바톤이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렘17:14절‘여호화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것들을 기도하면 100% 응답하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웨슬레의 성령체험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여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신 것들을 100% 응답받으시며 사시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세번째로 말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네가지 균형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전통, 경험, 이성’입니다.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갖추어진 감리교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라고 하셨으며, 당신 자신도 나는 한 권의 책의 사람 곧 성경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네번째로 이웃사랑 실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반면에 사회에는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사회 양극화와 온갖 부정 부패, 탈법, 타락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영국 사회에 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웨슬리 목사님의 이웃 사랑 실천운동으로 영국 사회가 무혈혁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감리교는 처음부터 빈민구제운동, 금주운동, 학교와 병원을 세워 불우한 사람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형무소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노예해방 운동을 하였으며,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과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도움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운동이 있어났습니다. 롬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말씀을 기초로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슬로건을 가진 감리교 운동은 복음주의 전도운동입니다. 감리교인들은 전도병(病)의 환자들이어야 한다고 까지 합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병인가? 사도 바울도 이 병에 걸려서 죽었고, 사도 베드로도 그랬고, 성 어거스틴도, 허드슨 테일러도, 아펜셀러 선교사도 이 병에 걸려서 기뻐하다 죽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도 이 병에 걸려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이 병에 걸려서 행복한 삶을 살다가 천국 갈 것을 믿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을 경험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포자로(preaching)로 세우셨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자신 하나님의 보내심(sending)을 확신하여 지구를 두 바퀴 반이나 돌 정도로 평생을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회심의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 점이 우리에게도 회심의 사건이 갖는 중요한 의미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요한 웨슬리와 같은 뜨거움과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가졌던 뜨거움의 신앙과 그신앙의 열정을 배우고 실천하자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요한 웨슬리도 우리처럼 처음부터 뜨거운 신앙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매우 청교도적인 결백성과 엄격한 생활로 딱딱하고 멋없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리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히 싫어하고 모든 것을 규칙적으로 예외없이 사는 전형적인 완벽주의자였습니다.겉으로 느끼기에는 차갑고 냉냉하며 가까이 하기 어려운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그래서 감리교회의 별명이 ‘Methodist’(규칙주의자) 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가운 사람이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냉냉하고 엄격하여 근접하기 어렵던 사람이 뜨겁고 정열적인 사람이 되어 엄청난 신앙의 불길을 온세계에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었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체험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신의 불길이란 신앙 체험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중에나 찬송중에 또는 말씀을 듣는중에 집회에 참석을 하는 중에 기도를 통하여, 또는 찬송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며, 회개를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구원의 역사를 깨닫고 마음에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기도 중에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할 수도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중에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열려 있을때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령의 역사로 내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신비한 체험없이 마음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 극심한 죄악이나 방탕의 경험이 없이 모태신앙으로 신앙속에 성장해 온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신비한 체험은 없었으나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신 것과 그분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바로 이 확신, 죽을수 밖에 없고, 죄 속에서 멸망할 수 밖에 없던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을 아무 값 없이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는 이 귀한 사실을 확신하고 감격하는 것으로 부터 새로운 생애를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고, 내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수 없다면 그사람은 분명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시작이 바로 이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이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님들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결심하신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는 아직도 조금은 자신이 없어서 아멘하시지 못하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여기에 오셔서 앉으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돈을 벌려고 이곳에 오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 분은 시장으로 가셔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하려고 이곳에 오신분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 분은 학교에 가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인기를 얻으려고 이곳에 오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은 탈랜트나 가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오신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어려운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려고 이곳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은 미약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오신 것입니다. 그러신 분들은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1:12절‘영접하는자 곧 그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기로 결심한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주실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요 5:24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나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믿는자는 ‘얻었고,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과거에 이미 얻은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살기로 결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뜨거운 신앙의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영국에 갔을 때에 둘러보았습니다만 현재 영국에는 이런 웨슬리 회심 기념비가 여러군데 세워져 있습니다. 이 사진은 박물관 옆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세워진 기념비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유산을 받은 감리교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될 수는 없지만,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남기고 가신 그 위대한 정신과 신앙만은 우리가 계승시켜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국중심에 세워진 감리교 총회관이 있습니다. 웨슬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고 제1회 un총회의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입니다. 여기도 방문하고 왔습니다.
존 웨슬리는 장장 88세까지 장수를 누립니다. 그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 세상 전부가 다 그의 교구, 곧 목회지였습니다. 그는 아예 ‘세계는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aris) ’라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새로운 삶을 되찾았습니다. 그를 통해 감리교가 생겨나고, 성결교가 생겨나고, 구세군이 생겨났으며, 순복음교회의 탄생에도 실제적인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웨슬리는 그 바쁜 와중에서도 2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으니 그의 업적은 실로 찬란하다 못해 경이롭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791년 3월 2일에 런던에 있던 자택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그가 남긴 유언의 이것입니다. ‘내 생애에 가장 좋은 말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일평생 간직하며 끝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였던 그 말, 임마누엘. 그 말이 바로 웨슬리의 가슴에서 일평생 타오르던 가장 귀한 말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웨슬리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목사님 간증 이야기 첫 목회지에서의 신학교 졸업후 1년 6개월동안 전도 하나도 못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에 회개의 역사---두번째 회개의 역사는 상주교회와서---정말 힘들 때 천국에 면류관 보여주면서 이야기---오늘가지 30년 넘게 임마누엘로 다가오신 하나님 간증
오늘은 죤 웨슬리의 구원론에 대한 설교를 그대로 인용을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 엡2:8절‘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구절로 설교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모든 복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즉 그의 부요하심과 호의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는 전혀 과분한, 사람이 그의 자비(창32:10)의 가장 적은 것도 요구할 권리가 아주 없음에도 불구하고-거저 주시는, 과분한 호의로부터 주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2:7절‘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사 생령이 되게 하셨으며’, 그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넣으시고, 시8:6, 고전15:27절‘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셨던 것도’ 거저 주시는 은혜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만물이 지속되는 것도 그 같은 거저 주시는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행17:25) 왜냐하면 하나님 손에 있는 가장 적은 것이라도 그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우리의 존재·소유·행위 속에는 없습니다. 사26:12절‘오 하나님, 우리가 한 모든 일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들은 모두 거저 주시는 자비의 더욱 많은 표적들입니다. 사람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의가 무엇이든, 이것도 또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죄 가득한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자기가 지은 죄의 가장 적은 어떤 것이라도 그 죄를 대속하겠습니까? 사람 자신의 업적들을 가지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이 아주 많이 있거나 혹은 거룩하다면,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로 그것들은 모두 불결하며 죄로 가득차 있어, 따라서 그것들 하나하나가 다 새로운 대속이 필요합니다. 나쁜 열매만이 나쁜 나무 위에서 맺는 것이지요.(마7:17)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혐오스러우며, ‘하나님의 영광’, 곧 인간의 위대한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태초에 사람의 영혼 위에 찍어넣으신 영광스런 의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롬3:23)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탄원할 아무 것도, 어떤 의나 업적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입이 아주 굳게 닫힐 수 밖에 없습니다’(롬3:19) 그런데 만일 죄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의 호의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요1:16)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우리에게 새로운 복들-네 그렇습니다, 모든 복들 중의 가장 위대한 복, 구원을 퍼부어 주신다면, 우리는 ‘그 분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이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고후9:15)이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키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심’(롬5:8)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인하여’,‘여러분들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은혜는 구원의 원천이요, 믿음은 구원의 조건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조심스럽게 탐구하여 보도록 합시다.
1.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것은 어떤 믿음을 통해서 입니까?
첫째로 이 믿음은 이방인의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명하사 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히11:6)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써’와 도덕적인 덕, 정의, 자비, 진리를 그들의 모든 동료들에게 주의 깊게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으로서의 그 분에게 영광을 돌리므로’(눅2:20)말미암아 찾아야 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므로 헬라 사람이건, 로마 사람이건, 인도 사람이건, 우리 나라 사람이건, 만일 그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또는 장차 받을 상벌이나, 의무로서 해야만 할 도덕적 덕의 본질에 대해서 믿지 않았다면, 그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이 갖고있는 사실 그대로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도 다릅니다. 마귀의 신앙은 이방인의 신앙보다도 훨씬 앞섭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셔서 상주시며, 의로우사 죄를 벌하시는, 지혜로우시고 능력 많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구주이신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오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4:34)라고 분명히 말하였던 것입니다. 불행한 영이지만 그는 그 거룩한 분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들과 옛 거룩한 분들에 의해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일지라도 두 사람의 거룩한 사도에 대하여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들이요’(행16:17)라고 영광스런 증언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만큼, 하나님과 인간의 큰 원수도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음’(딤전3:16)과 또 그 분이 ‘그의 모든 원수들을 당신 발 아래 밟으시리라’(고전15:25)는 것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다’(딤후3:16)는 것을 믿고 있으며, 또한 믿는 가운데 떨고 있는(약2:19) 것입니다. 마귀의 신앙은 이 정도에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믿음은 그리스도가 아직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사도들이 가졌던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따랐으며’(막10:28), 그 때 기적을 행하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마10:1)을 가졌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눅9:1)를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눅9:2)그들의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모든 전능한 일을 행하고 돌아온 후에,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는 세대’(눅9:41)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불신앙 때문에, 그들이 마귀를 쫓아 낼 수 없었다’(눅9:41,막6: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사도들은 자신들이 이미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주께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눅17:5)라고 말씀드렸을 때, 주님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 믿음 - 즉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 - 에 관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라해도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그러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것은 어떤 믿음을 통해서입니까? 먼저, 일반적으로 말해,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 바로 이 신앙의 적절한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점에서 이 신앙은 고금의 이방인들의 것과는 전혀 또는 전적으로 구별됩니다.
또 이 신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마귀의 신앙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 신앙은 어떤 사변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서의 냉냉하고 생명없는 지적인 동의 즉 머리 속에 있는 관념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음을 내어맡기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0:9-10절‘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런 점에 있어서 이 신앙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이 가졌던 그들의 신앙과도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필요성과 공로를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이 신앙은 롬4:25절‘예수께서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영원한 죽음에서 인간을 속량하시는 유일한 충족방법으로 보며,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를 생명과 썩지 않을 것으로 회복하시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승인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피를 전적으로 의뢰하는 일, 즉 예수의 생명과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의지하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바 되고 또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우리들의 대속이시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기대는 일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지혜 즉 우리의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고전1:30)이 되신 그리스도, 혹은,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에게 바짝 다가가 그분과 굳게 결합하는 일입니다.
2.이 믿음을 통하여 얻는 구원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는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이와같이 이 신앙에 참여한 자가 실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있는 신자들에게 아니 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도 진리이기는 하지만) 라고 한 것이 아니라‘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엡2:8)고 말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포함하여) 죄로 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미리 천사를 통하여 마1:21절‘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분이심이라’고 예언 한 바 그 위대한 구원인 것입니다.
성경의 어디를 보나, 어떤 제한이나 제약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성경에 표시된 대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십니다.(행10:43) 원죄, 자범죄, 또는 과거의 죄나 현재의 죄를 막론하고 육과 영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저들은 죄의 책임과 죄의 권세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는 과거의 모든 죄의 책임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앞에서 죄의 책임이 있어서’(롬3:19), 하나님께서 ‘잘못한 것을 매우 엄하게 지적하신다면, 이를 버텨낼 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시130:3) 그리고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줄 뿐이지’, 죄로부터의 해방은 갖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롬3:20)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의가(혹은 긍휼이) 나타났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입니다’(롬3:21,22) 이제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롬3:24)‘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지금까지 지은 죄를 용서하기 위한(혹은 용서하심에 의한) 당신의 의를 천명하셨기(명백히 알리셨기) 때문입니다’(롬3:25)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를 없이하셨습니다’(갈3: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골2:14-15).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죄책으로부터 구원 받은 자는 또한 두려움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롬8:15) 자식이 부모를 거스리므로 갖게 되는 어떤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모든 노예근성적인 두려움, 즉 사람을‘괴롭히는 두려움’(요일4:18), 형벌에의 두려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믿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대할 때, 엄격한 주로서가 아니라 관대한 아버지로 여깁니다. 롬8:15-16절‘저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 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성령이 친히 저희 영으로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또한,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서(살후2:3) 크고도 귀중한 약속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은 엡1:13절‘그들의 기업의 보증이 되는 약속의 거룩하신 영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저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으며,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가운데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저희 마음에 부은 바 된 것입니다’(롬5:1,2,5). 이에 의하여 저희들은 (아마도 늘 같은 충만한 확신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롬8:38-39절‘사랑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느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이 믿음을 통하여 저희들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요일 3:5절‘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느니라’고 선언합니다.
또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동3:7,8), ‘믿는 이는 누구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동5:1),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죄를 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입니다’(동3:9)고 하였고, 또 5장 18절에는‘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자신을 지키나니, 악한 자가 저를 해할 수 없느니라’고 거듭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죄짓지 않습니다. 어떤 습관적인 죄에 의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습관적인 죄는 모두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마음 속에서는 그 죄가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지적인 죄에 의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 거하는 동안은 그의 의지가 전적 으로 모든 죄에 대항하며, 또한 죄를 치명적인 독과 같이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된 욕망에 의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완전한 뜻 (롬12:2)을 바라며, 어떤 불결한 욕망이 생기는 때에 그는 하나님 은혜로 이것을 질식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동, 말, 혹은 생각에 있어서의 연약성에 의해 죄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연약성에는 그의 의지의 협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지의 찬동 이 없다면, 그것들은 적절히 말해 죄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요일3:9절‘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범죄한 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지금은 범죄치 않습니다’(동5:18)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이는 현세에서도 얻을 수 있는 구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과 그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을 일컬어 종종 칭의( justification )란 말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광의로 취할 때, 지금 그를 믿는 죄인의 영혼에 실제적으로 적용된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죄책과 형벌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며, 또 ‘그 신자의 맘 속에 형성된’(갈4:19) 그리스도를 통한-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합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는 진실로‘거듭난’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거듭난’(요3:3,5)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 바 된 새 생명’(골3:4)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난 아기처럼, 그는 즐겨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며, 그것을 먹고 자라가는 것입니다’(벧전2:1). 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롬1:17), ‘은혜에서 은혜에로’(요1:16) 나아가, ‘마침내는 완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온전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엡4:13)
죤 웨슬리에게 있어서 복음의 출발점은 먼저 인간은 죄인으로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시작합니다. 즉 모두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웨슬리의 구원의 내용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것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며 이땅위에서 지금 구원을 얻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모든 죄(원죄, 자범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자범죄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심판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화해된 자로서의 재림의 소망이 생깁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는
① 회개 ( 은혜가 왔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
② 믿음 (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인 의뢰)
③ 칭의 ( 의인)
④ 신생 ( 신생은 새로운 영적인 출생을 의미한다.)
⑤ 칭의 후의 회개와 믿음
⑥ 성화
⑦ 그리스도인의 완전
요한웨슬리 목사님이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회심의 사건이 없으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불안과 공포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지 정검하기 위해서 너희 믿음을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나의 신앙생활이 이종도면 충분하지’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가는‘버리운 자가’될 수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다녀온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지옥에도 목사들이 많다라고 합니다. 그럴때마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얼마나 두려운지 모릅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버리운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지금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정검하고 나중에 버림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도울테니 그 성령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나의믿음이, 나의 신앙이 지금 어느 지경이 있는지 스스로 정검하시고 혹시라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가고 있다면, 다른 길로 걸어가고 있다면, 다른 길로 가려고 생각한다면 오늘 정검을 아주 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과 오늘부터 힘써 동행하면 됩니다. 주님과 동행길로 들어서서 성령충만하여 넉넉하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웨슬리 회심 기념주일을 맞는 지금 이시간 우리들에게도 웨슬리 목사님에게 일어났던 그 뜨거운 심장을 오늘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대를 변화시키며 뜨거운 회심의 사건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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