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빌 길버트/류광현 옮김) -09-
한편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에서의 국지전이 3차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심히 우려되어, 이 문제를 놓고 맥아더와 1대1로 대면하여 회담을 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웨이크 섬(Wake Island)으로 날아갔다. 트루먼은 실질적으로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 전 여정의 반 이상을 갈 용의가 있었다. 지리적 위치로 보아 맥아더 위의 군 통수권자인 미합중국 대통령이 4.700마일을 날아가는 동안, 5성 장군인 맥아더는 웨이크 섬에서의 회합을 위해 1,900마일을 날아갔다.
10월 15일 두 사람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멀 밀러(Merto Miller)에게 구두로 전한 트루먼의 자서전 <평범하게 말하다(Plain Speaking)> 예서는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맥아더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중공이 개입할 것인가 물었더니 장군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장군이 말하기를 '대통령 각하, 추수감사절까지 전쟁은 끝납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우리 장병들을 다 동경으로 철수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식의 말을 더 이어갔지요."
역사학자 데이비드 맥클리프(David McCllough)가 트루먼에게서 들은 말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을 더 이상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밀러와 맥클러프가 인용한 회화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언이 있다. 조셉 굴돈(Joseph C. Goukkn)이 쓴 <한국전쟁 비화(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에는 1951년 4월 4일, 맥아더를 해임하기 1주일 전에 쓴 트루먼의 다음과 같은 메모가 인용되어 있다.
"그는 중공군의 침공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쟁은 이겼으므로 1951년 1월에는 한국에서 1개 사단을 철수시켜 유럽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의 입장을 두둔하자면 미국의 신설된 중앙정보국 CIA도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지 못했다. CIA가 특별히 사태분석을 하고 내린 결론은 "스탈린에 의한 3차대전 촉발결정 같은 중대한 사태만 없다면, 중국 참전의 '개연성'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파국을 자초한 오판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전은 3년을 더 끌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오판의 희생자 그 이상이었다. 어떤 지휘관이나 어떤 최고 직무수행자나 마찬가지로, 그의 판단과 결정은 그가 받은 정보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한국전에 뛰어들 태세에 있었으며, 이미 뛰어든 상태였다는 증거가 오늘날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다.
정보의 소스에 따라 정확한 날자가 다르긴 하지만, 중공군 포로의 증언에 의하면, 중공군이 북한을 넘어온 시기는 트루먼-맥아더 회합 직전 또는 훨씬 이전임이 드러났다. 여러 가지 진술들을 종합해 보건데, 중공군 제4 야전군의 12만 병력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 있었다. 그들의 상당수는 소련제 야포를 끌고 소련제 탱크를 몰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은 중공군이 쳐들어온 것을 분명히 모르고 있었다.
맥아더와 그의 정보참모 찰스 윌러비(Charles Willoughby) 소장은 중공군이 어떤 움직임을 하게 될 것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체 내의 정보장교들의 보고만 잘 들었어도 족한 것이었다. 중국 상공에서 정찰비행을 했던 미 공군 조종사 맥앨리스터(McAllister) 대령은 <유에스뉴스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지의 1990년 6월 25일자 한국전쟁 특집으로,
"잊혀진 전쟁 - 한국전쟁 40주년" 이란 제목의 카버 스토리에서
"우리는 중공군이 쳐들어올 것을 예측했다. 우리가 압록강을 건너 정찰했을 때 엄청나게 많은 중공군의 집결을 보았다고 동경의 윗사람들에게 보고했다."라고 증언했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지는 그 특집기사에서,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이 중공군의 개입을 알고도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 잡지 기사는 CBS에서 전쟁을 취재했던 전 외사과(外事課) 편집인 로버트 마틴(Robert Martin)이 한 말, 즉 "한 중공군 포로를 심문했는데 아주 심한 사천성 말투와 억양으로 보아 그는 분명 국경을 넘어와서 도와주려는 만주 지방의 중국인은 아니었다." 라는 말을 인용했다. 윌로비 정보참모는 그들이 만주에서 태어난 조선족이라고 고집을 해서, 나는 "보세요. 내가 이자들에게 중국어로 말했다니까요. 하니까, 그는 고개를 돌렸다고 했다. 필자는 그가 알고 있었지만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다고 믿었다.
1990년 기사에서 <유에스뉴스>지는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을 만주까지 확대시키도록 하여 중공군과 한바탕 대 전투를 벌이고 싶은 그의 욕망을 감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40년이 지난 후 드러난 증거에 의하면, 맥아더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장진호에서의 대참패와 그로 인한 수천 명의 미군 사상자를 방지할 수도 있었던 정보를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동지(同誌)는, 북에서의 전황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더라면 장진호에서의 위기 국면과 흥남철수는 불필요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쌍방 모두 수만 명의 인적 피해를 방지할 수도 있었고,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ㅡ 등에, 팔에 앞가슴에 손자 손녀를 들쳐 업고 비틀거리며 걷는 노인네들과 옆에서 따라가는 아이들의 행렬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
동지(同誌)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트루먼 행정부의 한 외교정책 보좌관의 말을 인용하여 "문제는 정확한 정보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한 실성한 사람에 의해 좋은 정보를 부정직하게 해석 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헤이그 장군의 설명은 다르다. 그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초부터 미국은 중국의 지도자들과 일체의 대화 채널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오판한 것이지요. 나는 당시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를 잇는 통신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젊은 육군 중위인 나에게도 그 이유가 납득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갑자기 트루먼과 맥아더가 페스카도르섬 (the Pescadore Island) 주위에 선을 그은 다음, 맥아더는 대만에 군사원조 계획을 수립하려고 선발대를 파견했습니다. 우리가 비밀리에 추진한 장개석 원조 계획과 인천 상륙작전 후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 사실 둘을 놓고 종합해 볼 때, 중공이 우리가 중국 본토에 장개석을 다시 앉히고 그들의 공산혁명을 전복시킬 의도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이유를 알만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개입한 명분입니다. 좌우간, 제기랄, 전쟁을 꼭대기에서 지휘한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인터뷰에서 헤이그 장군은 트루먼과 맥아더 두 사람이 다 실수를 저질렀다고 회고했다. 중공군 참전은 전쟁 자체의 양상은 물론 미국인들의 그 전쟁에 대한 태도와 인식까지 바꿔놓았다.
해리 섬머즈(Harry G. Summers, Jr)가 발간한 <한국전 연대기(Korean War Almanac)>에 의하면, 한국전이 터졌을 때 트루먼 대통령의 파병 결정을 미국인들의 75%가 지지를 했던 반면에, 그해 11월 중공군이 참전하자 50%로 하락했고, 그 수준의 지지율이 휴전될 때까지 3년간 유지되었다.
전쟁이 벌어진 6월에는 65%가 전쟁이 과오가 아니었다고 했으나, 중공군 개입 후에는 그와 정반대로 65%가 과오였다고 했다. 1952년 트루먼을 계승하여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대통령에 입후보했을 때에는 미국인의 3분의 1만이 한국전은 싸워볼 만한 가치가 있는 전쟁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1953년 7월 휴전할 당시에는 25%만이 가치가 있다고 대답했다.
서머즈는 그의 1990년 판 <연대기>에서 '한국동란 중의 미국 여론은 월남전에서와 거의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한국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월남전 때보다 훨씬 빨리 식어 버렸다."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투르먼이 임기 18개월을 남겨두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재선을 포기했다. 트루먼의 국정 불신임도(不信任度)는 5년간 월남전쟁을 치른 존슨 대통령보다 훨씬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