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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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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한양조씨 영양주강정및사고종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29 13.06.23 19: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영양 주강정 및 사고종택(柱江亭 및 沙皐宗宅)
소 재 지 :  영양군 영양읍 상원1리 475-1번지
건 축 주 :  조시광(趙是光), 조정옥(趙廷玉)
건축시기 :  18세기 중반 건립
소 유 자 :  조기범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9호


건축 이야기
사고(沙皐) 종택은 사고 조정옥(?~?)이 건립한 살림집으로, 사두들 마을 안에 남서향하여 자리하고 있고, 주강정(注江亭)은 18세기에 조시광이 만년에 거처한 정자이다. 이곳은 영양읍과 상원리로 통하는 도로와 접하여 있고 농경지와 수량이 풍부한 반변천 앞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일명 서책을 꽂아놓은 듯한 형태를 끼고 있는 책꽂이산을 마주하고 있어 풍수학적으로 학자가 많이 배출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고 종택은 ㅁ자형의 목조 기와집으로, 크게 정침 1동과 사당 1동, 문간채 1동 및 부속채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강정은 종택 북동쪽에 위치하고 4칸 반 토기와 겹집으로, 좌우로 방 2칸, 중앙에 마루 1칸을 배치한 팔작 기와집이다. 마루에는 시렁을 설치하여 서책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산수를 벗 삼아 시가를 읊고 학문을 논하는 전형적인 정자 형태를 띠고 있다.


건축 특징
사고 종택은 정자와 별묘까지 갖추어 상류 주택으로서의 격식을 유지하고 있다. 최초 건립연대는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나 중건할 때 대규모의 보수가 이루어져 건물에 후기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평면상에 변형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건축 구성
전면에 세워진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정침의 좌측 뒤쪽에는 손자인 주강 조시광이 건립한 주강성이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강정의 전면에는 주사(廚舍)와 별묘(別廟)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과 마루방을 두고, 우측에 팔작지붕을 얹은 3칸 규모의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좌측칸의 마루방과 우측칸의 대청은 좌우로 돌출되어 양 날개집의 형상을 일게 하였다. 안채는 3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에는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각각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주강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또한 대청의 전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현판
주강정(注江亭)
주강정중수기(注江亭重建記 )
조헌기(趙獻基)
주강헌(注江軒)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한양 조씨는 일찍이 한양에서 살았으나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가 화를 입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조광조의 삼종숙 되는 현감공 조종(趙琮)이 영주로 내려오고, 그 손자인 참판공 조원(趙源, 1511~?)이 영양으로 이거하여 5백여 년간 세거하게 되었으니 영양의 입향조는 곧 조원이다.

조원이 1553년에 영양으로 오면서 그는 함양 오씨 오필(吳?)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가 있는 영양의 원당리[현재 하원리라 불린다]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공신의 후손이라는 후광과 오씨 집안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영양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두 아들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떴다. 그러나 두 형제가 영양 일대의 사족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며, 해동이로(海東二老)라 불리는 등 입지를 굳혀갔다.

조광인은 수월 조검(儉, 1570~1644)과 사월 조임(任, 1573~1644) 두 아들을 두었다. 조광의는 조건(趙健), 조전(趙佺), 조간(趙侃), 조신(趙伸) 등 4형제를 두었다. 조검의 자는 자순(子純), 호는 수월(水月)이고, 조임의 자는 자중, 호는 사월이다.
한양 조씨가 영양의 각 지역으로 분가하여 살게 된 것은 영양 입향조인 조원의 손자대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조검은 도계리, 조임은 원당리, 조건은 가곡리, 조전은 주곡리 즉 주실마을에 정착하였다. 이는 그것을 밑받침하는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원당리에 정착한 조임은 병자호란 뒤에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집을 월담헌이라 이름하고, 당시의 제현들과 도의를 갈고 닦으며 세상의 일을 한탄하였다. 한양 조씨 사고파(沙皐派)는 바로 사월 조임의 넷째 아들인 통덕랑 조정옥(趙廷玉)에서 갈린 문중으로, 현재 사고 종택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종택 옆으로 주강(注江) 조시광(趙是光)이 지은 주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관련유물
- 『주강집(注江集)』
조시광의 시문집으로, 4권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문집 서문에 이어 시 140수, 권2에는 서 26편이 실려 있다. 권3에는 서문 4편과 기문 4편, 상량문, 제문, 행장류, 잡저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4는 부록으로 행장과 묘갈명 이외에 문집후지가 첨부되어 있다.
- 『침계집(枕溪集)』
조시광의 6대손인 침계 조병시(趙秉時)의 시문집으로, 6권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 시 300여 수, 권2와 권3에 서간문이 총 8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4에 상소 및 고유문, 제문 등이 권5에 서발문, 상량문, 유사가 실렸다. 한편 권6에는 잡저 1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자경잠>,<인심도심설>,<심학연원부> 등 공의 학문과 사상이 잘 드러난 글이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마지막으로 부록에 가장과 묘갈명이 실려 있고, 문집 말미에 부록이 첨부되어 있다.

관련인물
- 조시광(趙是光, 1669~1740)
사월 조임의 넷째 아들인 사고 조정옥(趙廷玉)의 손자로, 1669년(현종 10)에 사고 종택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계만(戒滿)이요, 호는 주강(注江), 본관은 한양이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전심하여 일찍이 사마시에 올랐으나 대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평생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평소 거문고를 즐기며 좋은 날에는 늘 거문고를 탔고, 사내아이들에게 시가를 지어 읊게 하여 마음을 온화하게 가질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가법을 엄정하게 다스렸다.『소학』,『여교(女敎)』등의 책을 언해하여 집안의 부녀자들에게 조석으로 외우고 익히게 하였고, 만년에는 정계(庭戒) 24조를 남겼다. 그것은 날마다 행실을 닦는데 마땅히 지키고 삼가야 할 일의 방도를 조목별로 적어 자제와 후손들에게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갈 것을 훈계한 글이다. 주강정을 지어 거처하다가 1790년(영조 16)에 72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문집으로『주강집』이 있다.
- 조병시(趙秉時, 1837~1911)
조시광의 6대손이다. 자는 가중(可中)이요, 호는 침계, 본관은 한양이다. 선고는 휘 조언목(趙彦穆)이며 후에 조언석(趙彦奭)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에 독서하고, 8세에 글을 지었으며 이후 학문에 뜻을 세워 경서와 백가서에 전념하였다. 문집으로 『침계집(枕溪集)』이 있는데 잡저에 실린 여러 가지 설이 조선후기 유학사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언급된다. 이와 같은 성리학적 관심은 외세 침입으로 인하여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구한말에 국난극복의 한 방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상원리
- 영양읍은 서북쪽으로 일월산이 뻗어 내려와서 일월면을 읍의 경계로 접해 있으며, 다시 청기면 금성산을 사이하여 팔수곡 큰재를 분기점으로 읍내 서부리와 연접해 있다. 영양읍의 동과 서를 가르는 반변천은 일월면 곡강에서 상원리를 돌아 대천 2리 입구에서 동천(東川)과 합류하고 감천리를 지나 입암면으로 흘러 낙동강의 동쪽 원류를 이룬다. 167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군청 자리에 동헌(東軒)이 들어서게 되면서 동부리와 서부리가 영양군의 중심을 이루었다.
상원리는 반변천이 마을의 중심을 가로 지르며 굽이치는 강물이 타원을 그리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본래 영양군 동면의 지역인데 원당동의 위쪽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에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원중동 혹은 수월동과 북초면 곡강동의 일부를 따다가 합쳐 상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9개의 자연 마을로 구분되어 있다.

논두들,답구(沓邱)는 일월면 곡강리에 접해 있으며 산비탈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지대가 강보다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논이 있어 논두들이라 부른다. 담배를 주농으로 하고 있다.
달밭골,월전(月田)은 달을 보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월전은 땅 이름의 분포로 보아서 ‘달’은 높다는 뜻이니 달밭골은 높은 곳에 자리한 밭이란 뜻으로 새길 수 있다.
당뜰,마당골,당편,당평(塘坪)은 당평 주위의 인근 주민들이 영양으로 나갈 때 이곳을 지나야 하며, 앞으로 넘어야 할 높은 고갯길에 대비하여 말을 매어 놓고 물을 먹이고 쉬어가는 마당 구실을 하였다는 데사 마당골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무다리,무달,무드리,무들,수월(水月)은 마을 앞 강의 흐름이 반월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731년에 안동 권씨들이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수월이라 불렀다. 고추가 많이 생산되어 “무드리 처녀는 고추 처녀요, 당편 처녀는 담배 처녀다.”라는 말이 있다. 또 마을 당나무로 느티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30미터가 넘는데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불에 탔으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무달은 물달의 소리가 줄어 굳어진 이름이고, 물로 하여 이루어진 달 곧 들판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밤싯골,율곡(栗谷)은 도토리 나무가 많았으며 밤이 벌어져 있는 모양의 골짜기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비릿골(飛鯉谷),성황동은 조검(趙儉)이라는 효자가 노병으로 신음하면서 한 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한 어머니를 위해 하늘에 빌었다는 고사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말그대로 비릿골은 잉어가 나는 골짜기란 뜻이다.

사두들,사부(沙阜),사구,사고(沙古),원중(元中)는 처음에는 원중으로 불렀다가 조선 중기 이후 사고라 하였고, 그 뒤에 다시 사구로 바뀌어 오늘날에는 사두들이라 부른다. 논밭이 강보다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못골,새미골은 밭곡식을 주식으로 하여 살던 이곳에 주민들이 새로 못을 파고 논농사를 짓는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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