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2:10)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전 2:11)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우리는 지난 주 구정 명절을 3일 동안 지내면서 부모 형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고속도로도 얼마나 시끌벅적하게 차들이 많았는지 말로 할 수 없다.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와 조용한 집에 들어왔을 때 느끼는 허전함과 아쉬움은 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하다. 사람은 역시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전도서로 알고 있는 이 책의 히브리어 이름은 ‘코헬렛’이다. 코헬렛은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코헬렛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개정개역 성경은 이 코헬렛을 전도서로 번역하여 제목으로 삼았다. 이것은 우리 성경이 중국 성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도'라는 말을 들으면 복음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아니다. 그래서 또다른 한글 성경들은 전도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자는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떤 성경들은 설교자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천주교에서 번역한 한글 성경에는 원어를 그대로 음역하여 "코헬렛"이라고 적는다.
칠십인역 헬라어 성경은 에클라시아테스(Ikklesiastes)라고 이름을 붙였다. 에클라시아스는 총회, 회중, 교회를 의미하거나 회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자신의 노년에 사람들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소집한 그들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 놓음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문서로 작성해 놓는다. 이것이 전도서이다. 전도서에는 솔로몬의 소통의 의지가 강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털어 놓은 젊은 시절 이야기를 살펴 보면, 전도서 2장 1절부터 11절까지 '나'라는 말이 30번이나 반복해서 나온다. 솔로몬은 젊은 시절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남들과 같이 사느냐, 자기만 위해서 사느냐이다. 젊은 시절 솔로몬은 자기만 위해서 사는 삶을 선택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간절히 원하는 것이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라면 자기만 위해서 살면 안된다. 남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 때 행복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소통하며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과도 소통하고 이웃과도 소통하고 자연과도 소통하며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 사람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뵐 수 있었고, 부부는 서로 돕고 살았으며, 낙원을 관리하면서 자연과 소통하며 살았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게 되었을 때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게 되었고, 부부 관계는 서로 돕는 존재에서 서로 잘못을 전가하는 관계로 변질되었고, 사람에게 순순히 먹을 것을 내 주어야 할 땅이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설교자는 사람들의 잘못된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전도서 7:29)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정직이란 단어는 거침없는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직은 사라지고 꾀만 남았다. 꾀는 불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소통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어둡게 되었을 때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이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물으시자 그는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불통은 거짓말을 낳았다. 소통을 잃어버렸을 때 형벌이 온다. 소통을 잃은 가인이 받은 형벌은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며 산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과 소통하지 못하게 되면 살아갈 이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러시아 교도소에는 죄수들에게 내리는 특별한 형벌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혹독히 추운 겨울에 추위에 꽁꽁 얼어 붙은 땅을 삽으로 파게 하는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게 해서 밖으로 끌고 나와 땅을 파게 하는데, 어느 정도 깊이 파면 다시 파낸 흙으로 메꾸라고 한다. 메꾸면 그 옆의 꽁꽁 얼어 붙은 땅을 또 파게 한다. 어느 정도 깊이 파면 또 덮으라고 한다. 그렇게 반 나절만 파고 덮고를 반복하게 하면 죄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땅을 파고 있기 때문이다. 땅을 파는 것 그 자체는 그리 큰 노동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그 노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산다면 아무 의미 없이 사는 것이다.
설교자는 아무 의미 없이 돈만 많이 벌고 사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부분이 있다.
(전 4:8)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TV에서 법정에 선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아버지는 수백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재산을 탐내서 아버지를 치매 환자로 몰았다. 그리고 노인 요양원에 보내고 재산을 차지하려고 했다. 재판이 벌어졌을 때 아버지가 치매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판사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아버지의 후견인으로 지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에게 치매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미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놓았던 것이 나중에야 드러났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으로 잘 살려고 했는데 한 푼도 물려 받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평생 수고해서 번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치매에 걸려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물려 주는 것은 자식을 망치는 길이다. 자신이 번 돈은 자신이 다 쓰고 죽어야 한다. 전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 5:18)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전 5: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람의 행복은 모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쓰는 데 있다. 상대의 즐거워하는 얼굴 속에 내 즐거운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대체로 자기만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몸에서는 항상 이기적인 냄새가 났다. 오늘 날까지도 서양 사람들은 자식들의 이름에 야곱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를 꺼린다고 한다. 그는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창 28: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창 28: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 28: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그의 말 속에 7번이나 '나'라는 말이 나온다. 완전히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말 그 자체이다. 그가 벧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 제단을 쌓겠다고 떠들어 대었지만, 그 후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하나님과 멀어져서 살았고, 나중에 결국 가나안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하나님께 약속했던 십일조도 드리지 않았고 약속했던 제단도 쌓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우상만 가득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살다가 창세기 34장에 보면 딸 디나가 강간 당하고 아들들이 살인자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때 야곱은 살인을 저지른 자식들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창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가 내뱉은 한 절의 말 속에 '나'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온다.
그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의 삶이 왜 망가졌는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야곱의 인생이 망가진 첫 째 이유는 하나님과의 불통 때문이었다.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야곱은 자신에게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곧장 하나님과 이웃과 소통을 시도한다. 이 때 야곱이 한 말들 속에는 '나'라는 말이 없고 '우리'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
(창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창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 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창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 35: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야곱이 요셉을 잃었던 것은 야곱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귀여워하는 요셉만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자식들과의 소통이 끊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소통이 끊어진 자식들이 야곱이 사랑하는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죽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식들이 나빠서만이 아니라 야곱의 잘못이 더 크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을 17년 후에 이집트에서 기적적으로 만났을 때 야곱의 나이는 130세였다. 바로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야곱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그 풍기는 냄새에서 그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나이조차 짐작이 안되었겠는가!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냄새를 풍긴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악취를 풍긴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이웃과 소통하는 사람은 신선하고 향긋한 향기를 내뿜는다. 우리의 주변의 사람 중에 악취를 풍기는 사람도 있고 향기를 내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악취를 풍기는지 향기를 내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얼굴에 달린 눈이 정작 자기 자신은 못 보듯이, 자기 자신이 풍기고 있는 냄새를 자기 자신은 맡지 못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냄새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들은 냄새가 심해서 향수로 그 냄새를 막기도 한다. 향수는 그래서 발전한 것이다.
몽고 사람들은 역겨운 냄새를 풍긴다. 언젠가 몽고 사람의 가정을 방문해 본 적이 있다. 거기 몽고인 일가족이 있었다. 아버지, 아내, 형제들을 보았다. 그들의 방에 들어가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냄새가 났다. 그 방에 앉아서 잠시 있었는데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나도 인격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사람에게 역겨운 냄새를 풍길 수 있다. 단지 내가 나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냄새를 맡게 하고 있는가? 욕심에 빠져 사는 사람은 악취를 풍기고, 소통하며 사는 사람은 향기를 내뿜는다.
솔로몬 역시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며, 자신은 욕심을 부리며 악취를 풍기고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은 나름대로 평생 재미나고 신나게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살펴보니 무의미한 일만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전 2:11)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자기를 위해서 살면 자기가 원하는 행복이 얻어질 줄 알았지만 행복은 오히려 저 멀리 가 있었다. 그렇게 늙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솔로몬은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지은 책 중에서 세 권이 권위 있는 성경으로 편입 되었다. 아가서, 잠언, 전도서이다. 혹자들은
아가서를 솔로몬이 청년 때 지은 것이고, 잠언은 중년에, 전도서는 노년에 지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상당한 이유가 있다.
내용 상으로 봐도 아가서의 내용은 젊은 청춘 남녀의 마음으로 쓴 것이 분명하고, 잠언은 중후한 중년 신사의 말처럼 무게가
있다. 전도서의 내용은 중년의 시간이 지나고 인생을 돌아보는 사람의 말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40년의 통치 기간이 끝나갈 무렵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전도서를 쓴 것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행복은 자기를 위해서 살 때 얻을 수 없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소통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도서의 끝부분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전 11: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떡을 물 위에 던지라는 것,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것은 만나는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항상 즐거울 것이라고 말한다.
(전 11: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명절에 처가집에 내려가면 집사람이 막내이기 때문에 손윗 형제들이 우리 가족에게 매우 잘해 준다. 우리 식구가 막내 가족이기 때문에 모인 형님들과 처형들이 얼마나 잘 해 주는지 말로 할 수 없다. 이번에도 다른 아이들은 한 푼도 못 벌었지만 성은이는 두둑히 벌었다. 수입이 40여 만원이 된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사람들에게 너무 신세만 지고 살았다. 난 개척교회 한다고 돈이 없었다. 그래서 구정에 형제들이 모이면 조카들의 세배를 받지 않았다. 결혼 해서 20년이 흘렀고 지금까지 조카들의 세배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세배를 주고 받는 자리에 아예 가지 않았다. 다른 방에 가서 있거나 바람을 쐬러 나갔었다. 다행스럽게도 조카들이 이제 다 커서 돈을 벌고 있다. 세뱃돈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카들에게 만원씩이라도 세뱃돈을 주었어야 한다는 후회를 한다. 이제는 받은 돈만 세지 말고, 좀 나누어 주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번에 형제들이 모여 외식을 하게 되면 내가 한 번 돈을 내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결혼해서 20년 넘게 막내라고 얻어만 먹었으면 이제는 한 번 정도 낼 줄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하나님이나 이웃과 소통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사람의 눈은 애초부터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져 있다. 자기도 보지 못하는 얼굴에 대하여 전세계 사람들은 가장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 거울 속에 비추어보는 얼굴은 각색된 얼굴일 가능성이 많다. 거울을 보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자기 표정만 지어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얼굴을 보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얼굴이다.
- 나는 우리 교회 000 집사님이 얼마나 예쁘게 보이는지 몰라요. 얼굴도 통실통실 귀엽게 생겼지만 마음은 더 예뻐요. 예배 시간도 성실히 지키고 십일조도 잘내고요, 요즘은 친정 어머니가 아프니까 오빠들이 있지만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와서 돌봐 드립니다. 예쁜 딸, 아들을 키우느라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 힘든 일 하는 것을 잘 겪어 냈고요, 성도들에게 얼마나 다정하게 잘 하는지 몰라요. 찬양은 또 얼마나 잘 부르는지, 듣는 사람들마다 천상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칭찬하네요. "좋아요?" -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눈도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 나는 거기서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 매우 민감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내리는 평가를 매우 예민하게 받아 들인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고 이웃과 소통해야 하고 자연과 소통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보게 해 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말년에 사람들에게 욕심에 치우쳐서 자기만 위해서 살았던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소집해서 소통을 시도한다. 그 시도로 통해서 얻어진 것이 전도서이다.
(맺음)
누구도 소통 없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행복해질 수도 없다.
여자들은 하루에 2만 단어를 말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한다. 그것은 말로 하는 단어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보며 짓는 웃음, 미소, 표정, 눈빛 등이 모두 언어이다. 여자들은 드라마를 통해서도 대화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천만가지의 얼굴 표정과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남자들이 말로 내뱉는 단어가 하루에 7천 단어가 넘어가면 폭발한다고 한다. 그러나 남자들에게는 여자들이 모르는 남자들만의
언어가 있다. 하루 좋일 말도 안하고 기계만 만지는 남자는 하루 종일 기계와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나 남자나 소통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살지 못한다. 소통이 끊어진 상태에서 사는 사람은 자폐증 환자이다.
감옥은 밥도 주고 쉴 시간도 주지만 사람들과 단절시킴으로써 소통을
끊어버리는 곳이다. 아주 나쁜 죄수는 독방에 가두고 소통을 아예 못하게 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하고 이웃과 소통하지도 못하고 사는 사람은 가인처럼 벌을 받고 사는 사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뒤에 숨은 아담도 아니고,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가인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