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투명인간(연출 강량원)' 공연 장면.(뉴스컬처) © 사진=남산예술센터 | | (뉴스컬처=황정은 기자) 처음엔 장난이었다. 아버지에게 기억에 남는 생일파티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 지난 해, 아버지 생일에 어떤 이벤트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게 못마땅했다. 아무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생일파티가 훗날 가족에게도 오롯한 추억이 될 거라 생각했다. 장남의 제안으로 시작된 투명인간 놀이.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 그 뿐이었다. 놀이는 말 그대로 장난처럼 시작됐다. 눈에 보이는 아버지를 보이지 않는 체 하는 것은 가족들에게 웃음을 유발했다. ‘보이지 않음’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한 가족들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아버지가 집에 오기 전, 자체적으로 ‘리허설’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 객석도 이내 키득거린다. 하지만 이상하다. 장난으로 시작한 놀이에 어느 순간부터 웃음이 걷혔다. 언제 끝날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여러가지 행동을 시도해 보지만 그럴수록 가족들은 철저하게 그를 외면한다. 시작은 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놀이가 돼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을수록, 아버지는 점점 더 확신한다. 가족들에겐 내가 정말 보이지 않는다고. 손홍규 소설가의 단편소설 ‘투명인간’이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강량원 연출의 손을 거쳐 무대언어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강 연출이 이끄는 극단 동에 의해 무대화 된 만큼 독특한 신체언어가 눈길을 끈다. 극이 시작되는 초반부터 배우들은 독특한 액팅(acting)을 구사한다. 사실적이지 않은 느릿한 동작, 다소 뻣뻣한 움직임과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이 모든 ‘어색함’은 작품이 사실적이라기 보다 부조리극에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조리극은 일반적으로 상식 혹은 논리 안에서 설명되기 어려운 모습들을 담는다. 인물들이 한 공간 안에서 대화를 나누지만 그것은 대화라기보다 각자의 독백에 가깝다. 소통과 공감이 불가능한 현대사회를 아이러니한 극 전개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 혹은 연출가는 이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를 작은 무대에 담아낸다. 연극 ‘투명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사실처럼 굳어버린 그들의 놀이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관계를 비유한다. 이는 인격과 인격이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 채, TV 혹은 가상의 세계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혹은 서로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감정만 주장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배우들의 정교한 움직임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스토리 전개보다 배우들의 움직임이 더욱 강조되는 지점이 있어 일부 관객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어 보인다. 극단은 이 작품을 준비하며 지난 1년 동안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무대 언어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이야기 했다. 이러한 노력을 방증하듯 작품이 전개되는 동안 배우들은 무중력상태와 마네킹 상태의 몸, 놀이하는 몸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다. 그러나 대사 없이 진행되는 이들의 몸동작은,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면서 무엇을 의미하는 행위인지 궁금증을 불러낸다.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난해한 부분들이 없지 않지만, 소외된 인간의 외로움과 몸부림을 나타내고 있다는 인식만 갖고 있다면 소화가 무리한 작품은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기존의 연극적 형식이 아닌, 새로운 몸동작으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한편 연극 ‘투명인간’은 지난 2013년 10월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공연예술센터 연합회(AAPPAC) 대전총회 쇼케이스로 시작된 작품으로 남산예술센터와 대전예술의전당이 공동제작, 두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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